[교회 상식 팩트 체크]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도 있다?

수녀님, 수사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갈색, 회색, 흰색, 남색 등 수수한 색상에 상하의가 나뉘지 않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수녀님들의 경우 머리 수건을 착용합니다. 이런 수도복은 보는 이들까지도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해줍니다. 수도자들이 이렇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청빈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생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로서 단순하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 생활 교령」 17항)고 말하고, 교회법을 통해 “수도자들은 자기의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로서 고유법의 규범에 따라 정해진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1항) 수도복은 본래 수도회가 세워지던 당시 일반인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었습니다. 3~4세기경 수도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복장을 통일해 나갔는데요. 수도회들은 당시의 농부나 서민들이 입던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원한 수도자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옷을 입고자 했던 것이죠.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복장은 변했지만, 수도자들은 당시의 복장을 그대로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수도자들의 복장이 독특한 복장으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수도자의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 단순·단정·검소하고 품위 있어야 사도직 현장에 따라 평상복 입기도 하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들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회나 살레시오회 등 남자 수도회 중에는 별도의 수도복이 없는 수도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사님 중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를 입고 계신 수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법은 “고유한 복장이 없는 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제284조 규범에 따른 성직자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2항) 예수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이창현(비오) 신부님은 “사람들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예수회 설립 당시부터 수도복을 따로 입기보다 사제들의 복장인 수단을 그대로 입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 중에도 수도복을 입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심 수녀회는 흰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정복으로 하되, 사도직 현장에 따라 그에 맞춰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복장이든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수도회의 경우 정해진 수도복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에서는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성심 수녀회 한화관구장 최혜영(엘리사벳) 수녀님은 “성심 수녀회는 설립 당시 과부들의 복장을 수도복으로 입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창설자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자고 결의했다”면서 “사복을 입고 있지만 십자가 목걸이로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7-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은 몇 번 치는 걸까?

유명한 성당이나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성당 종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바로 삼종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삼종기도 종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종을 제법 많이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을 몇 번 치는 걸까요? 그래서 삼종기도 시간에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찾아가 직접 세어봤습니다. 모두 33번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안성성당에도 가서 세어보니 마찬가지로 33번이었습니다. 안성성당에서 7년째 종지기를 하고 계신 유국형(요한) 형제님께 물어보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예수님 나이가 33세라 33번을 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이라니! 삼종기도에 참 어울립니다. 그런데 삼종기도 종이 33번이 아닌 성당들도 있었습니다.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삼종기도 종은 42번 울립니다.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2019년까지 50년간 종지기를 해오신 조정형(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각각 세 번씩 울리고 다시 종들을 20번 가량 연속으로 울리는 방식으로 종을 쳐오셨다고 합니다. 꼭 33번을 쳐야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타종 횟수는 달랐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처음 9번은 타종 방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3번씩 끊어서 3차례 치는 것이지요. 이는 삼종기도 안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삼종기도를 다 바칠 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 계속 종을 치는 것입니다. 삼종기도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담긴 세 가지 성경 구절(루카 1,28; 루카 1,38; 요한 1,14)과 성모송, 본기도로 구성된 기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 종이 칠 때 바치는 기도라 해서 삼종(三鐘)기도라고 부르지만, 기도문이 “주님의 천사가(Angelus Domini)~”라는 구절로 시작하기에 ‘안젤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삼종기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13세기 무렵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3번씩 바쳤고, 이것이 신자들 사이에 크게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16세기에 성경 구절이 추가됐고, 17세기경에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의 형태가 됐다고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 기도를 가능한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한다”면서 “말씀이 강생한 신비를 묵상하고 복되신 동정녀께 인사하며 그녀의 자비로운 전구를 바라는 것 등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41항) 이처럼 삼종기도는 우리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과 수난과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에 이르기까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아침, 낮, 저녁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비록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삼종기도를 정성껏 바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당 종소리 같은 우리가 돼보면 어떨까요.

2024-07-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회에도 법원이 있다?

‘교회 상식 팩트 체크’에서 종종 ‘교회법’을 인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법은 교회에 관한 여러 제도나 성사, 전례 등에 관한 규범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와 형벌, 재판에 관한 다양한 법규도 실려 있는데요. 그렇다면 재판을 하는 곳, 법원도 있을까요? 네, 교회에도 법원이 있습니다. 교회 법원도 사회의 법원과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국 교구들에는 법원이 있는데요. 15개 교구에는 1심 법원이, 관구를 관장하는 대교구, 바로 서울·대구·광주대교구에는 2심 법원이 있습니다. 대법원 역할을 하는 법원도 있습니다. 교황청에 있는 사법기구(Institutions of Justice)입니다. 이전에는 ‘법원’이라고 불리다 2022년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가 반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사법기구 안에는 대사(大赦) 등을 다루는 내사원, 교회의 사법을 올바로 관리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대심원, 그리고 다른 법원들에서 이미 심판한 사건을 제3심이나 그 이상의 심급으로 재판할 수 있는 상급심 법원인 공소원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활동하듯이, 교회 법원도 비슷한 구성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먼저 청구인을 변호하는 변호인, 판결을 하는 재판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사에 관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성사보호관이 검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법원은 사회의 법원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요. 각 교구가 운영하는 법원은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각 교구에 법원을 설치한 이유는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교회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성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성사를 통해 맺어진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은 것으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결혼생활 중에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사회적으로 이혼·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성사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를 교회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혼인이 무효임을 밝히는 소송이 필요합니다. 이를 교구 법원들이 돕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혼인법에 관한 재판 외에도 여러 재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재판들은 법원에서 하기 보다는 별도의 위원회 등을 구성해 진행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시복시성을 위한 재판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교구 법원이 오롯이 신자들의 성사생활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수원교구 사법대리이자 재판관인 박석천(안드레아) 신부님은 “교구에 법원이 있는 목적 자체가 혼인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사회 법원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 상담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2024-07-1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들어가면 어디에 절을 할까?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고, 또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여 절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성당 앞의 제단을 향해서 예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기는 하는데, 정확히 어디에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의외로 신자분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단 예수님께 인사드린다 생각하니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감실에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제대에 인사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올라온 답변들이 서로 달라 헷갈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성당에 들어갈 때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사 중 독서자들도 제단에 오르기 전에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는 성체성사가 재현되는 주님의 식탁이자 성당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제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교회가 그 둘레에 모이는 제대는 한 신비가 지니는 두 가지 측면, 곧 주님께서 희생되신 제단과 주님의 식탁을 나타낸다”며 “그리스도교의 제대가 상징하는 것이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3항) 제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제사가 이뤄진 제단임과 동시에 예수님과 모든 신자들이 함께 하늘나라의 잔치를 만끽하는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냅니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297항)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도 “제대는 성체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제대 위에 계신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씀들로 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제대는 주로 돌로 만드는 데요. 그 이유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 4)이자 “모퉁잇돌”(에페 2, 20)이신 예수님을 더 잘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감실을 “성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938조2) 감실을 “최대의 존경심으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치하라고도 말합니다. 다만 감실의 외양과 위치는 “제대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3항) 감실은 신자들이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와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대에서 거행되는 성찬례가 없다면 감실도 없는 것이지요.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11항) 제대를 향해 고개 숙여 절할 때마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황님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무류성’(無謬性)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류(無謬)는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인팔리빌리타스(infalliblitas)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라틴어는 단순히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강한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무류성’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교황님입니다. 교회는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5항)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참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교황님도 실수도 하고, 잘못 말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만약 교황님이 절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라며 고백의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고해성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면 죄를 짓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미사 중 고백의 기도도 바치시고, “15일이나 20일마다 고해성사를 한다”고 밝히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이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교회법은 “교황은 그의 형제들을 신앙 안에 굳세게 하는 것이 소임이므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해 고수해야 할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 그의 임무에 의해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749조) 교황님이 모든 분야에서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목자이자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라”(요한 21,15~17)고 명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께도 그 책임과 권한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천명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실로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이 약속된 이유는 그분의 계시로 새로운 교리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계시 또는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보호하고 신실하게 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영원하신 목자」 제4장) 교황님이 새롭게 계시를 받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고,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류성은 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곧 교회와 함께 머무시면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교의입니다.

2024-06-30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십자가 위 ‘INRI’의 의미는

“‘인리’가 뭐예요?” 알파벳을 읽게 된 무렵, 부모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느닷없이 ‘인리’가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바로 십자가 위에 적힌 문구, ‘INRI’를 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INRI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약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인리’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의미할까요?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의 죄명입니다. 이 문구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한복음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을 십자가 위에 달게 했는데 히브리어·라틴어·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했다’라고 고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빌라도가 “한 번 썼으면 그만”이라면서 이 죄명을 그대로 붙였다고 합니다.(요한 19,19~22 참조) 마르코복음서는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마르 1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루카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죄명이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죄명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수석 사제들이 항의한 것처럼, 사형집행자 입장에서는 ‘임금’이라는 죄명은 ‘자칭 임금’이라는 의미로 적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임금’이라는 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임금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자녀들 곧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3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이 왕직에 참여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786항) 십자가에 적힌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2024-06-2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전례에 쓸 수 있는 악기는 오르간뿐이다?

성당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습니다. 전례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오르간입니다. 큰 규모의 성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성당에는 오르간이 설치돼 있습니다. 교회는 오르간 축복 예식도 따로 거행하는데요. 오르간 축복 예식은 「축복 예식」 중에서도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 축복 예식’ 항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례대나 감실, 성당문, 성화상, 십자가의 길 등 성당 안에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축복하는 예식서들을 모은 곳에 오르간 축복 예식서도 있는 것이죠. 교회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전례 거행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오르간”이라면서 오르간을 “적당한 자리에 놓아 성가대와 교우들이 노래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경우에는 모든 이가 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오르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393항, 313항 참조) 이처럼 교회 안에서 오르간의 위상은 특별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라틴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은 전통적인 악기로서 크게 존중돼야 한다”면서 “그 음향은 교회 의전에 놀라운 광채를 더하고,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이 힘차게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20항 참조) 이처럼 교회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오르간이지만, 사실 교회가 처음부터 전례에 오르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전례에 악기를 도입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오르간 역시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9세기 무렵부터 하나, 둘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 설치된 곳은 독일의 아헨주교좌성당(812년)이라고 하는데요. 이후로도 오르간은 여러 성당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교회 전례를 위한 중요한 악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전례 중 악기 사용은 오르간만 가능한 것일까요? 오르간 말고 다른 악기들도 전례 중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르간과 달리 다른 악기들은 일종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전례헌장은 오르간 외의 다른 악기들은 지역 교회의 판단과 동의에 따라 거룩한 용도에 적합하고 성당의 품위에 맞으며 신자들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전례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 교구들도 오르간 외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를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전례 중 관악기와 현악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특별한 경우에 신중하게 검토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오르간이지만, 그렇다고 전례 음악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전례 시기 중 대림 시기에는 오르간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절제하고, 사순 시기에는 노래 반주에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주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은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례 음악에서 오르간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2024-06-1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약식 제의’는 없다?

신부님 여러 명이 함께 미사를 집전하시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럼 제대 가운데 계시는 주례 신부님과 함께 집전하시는 신부님들의 복장이 다를 때가 있다는 걸 알아채셨을 것 같습니다. 주례 신부님은 품이 큰 반원형의 옷을 입고 있는 반면, 다른 신부님들은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흰옷에 긴 띠를 목에 걸치고 계시기도 합니다. 일단 주례 신부님이 입으신 옷은 ‘제의’입니다. 그럼 다른 신부님들이 입고 계신 옷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신부님들의 이 옷을 두고 ‘약식 제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옷은 사실 ‘약식 제의’가 아니라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것입니다. 장백의는 사제가 미사 때 갖춰야 할 육신과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이름 그대로 옷자락이 긴(長), 흰(白)색의 옷(衣)입니다. 그리고 장백의 위로 목에 걸쳐 두르는 폭이 넓고 긴 띠는 영대라고 부릅니다. 영대는 사제의 직책과 의무, 권한과 품위를 드러냅니다. 여러 전례 봉사를 하면서 신부님의 전례복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어? 장백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제의 안에 입는 장백의는 더 얇고 목 부분의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대만 걸쳐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백의를 일반 장백의와 구분해서 ‘예절 장백의’라고 부릅니다. 제의는 장백의와 영대 위에 걸쳐 입는 옷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상징하는 전례복입니다. 무엇보다 “미사나 미사와 직접 연결된 다른 거룩한 예식 때 주례 사제가 입어야 할 고유한 옷”(「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37항)이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신부님들은 반드시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절 장백의는 어떤 경우에 입을까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는 “공동 집전자들 수는 많고 제의가 부족할 때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주례자를 뺀 공동 집전자들은 장백의 위에 영대만 메고 제의는 입지 않아도 된다”(209항)고 설명돼 있습니다. 미사 중 우리에겐 신부님의 제의만 보이지만, 신부님은 제의 안에도 여러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장백의와 영대 외에도 악마와의 투쟁, 극기, 금욕생활을 의미하는 ‘띠’, 어깨에 걸치는 장방형의 아마포로 ‘구원의 투구’를 상징하는 ‘개두포’도 착용합니다. 이 5가지 전례복에는 각각 전례복의 의미를 담은 기도문이 있는데요. 신부님들은 미사 전 이 전례복들을 하나씩 입을 때마다 각각에 해당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미사 때마다 겹겹이 옷을 입고 제대에 오르십니다. 물론 이 모든 전례복은 신부님들의 평상복이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 위에 입습니다. 신부님들이 항상 전례복을 갖춰 입는 것은 거룩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겠지요. 날이 점점 더워져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성당을 찾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신부님만큼 옷을 여러 겹 껴입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옷차림을 단정히 한다면 더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06-09

[교회상식 팩트체크] 성체는 탄수화물일까, 단백질일까?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성체를 모십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가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바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빵이라면 탄수화물일 것이고, 살이라면 단백질일 것인데, 그렇다면 성체는 탄수화물일까요. 단백질일까요? 물론 이 궁금증을 해결하겠다고 예수님의 몸을 실험대에 올리는 불경한 일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도 궁금하니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교회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바치신 것이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항상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서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 빵의 온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온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트리엔트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4장) 그러니까 빵이 축성을 통해 성체가 되는 순간 그 실체가 더 이상 빵, 그러니까 탄수화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 아무리 맛봐도 밀떡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비단 우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떤 신부님도 미사를 집전하던 중 ‘예수님이 진짜로 성체성사 안에 계실까’하고 의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바로 8세기경 이탈리아 란치아노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심을 하던 그 신부님이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끝낸 그 순간, 성체가 살로 변하고 성혈이 피로 변한 기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교회는 1000년이 넘는 시간 성체와 성혈을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 1970년 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결과 성체는 인간의 ‘심장 근육 조직’이었고, 성혈은 인간의 피였으며 혈액형은 AB형이었다고 합니다. 살과 피의 혈액형은 동일했고, 피 안에는 정상적인 피와 같은 비율의 단백질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성체와 성혈이 살과 피의 형상으로 변한 기적은 란치아노의 기적 이후로도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가깝게는 1996년 8월 아르헨티나 성모마리아성당과 2008년 폴란드 성안토니오성당에서도 성체 성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들에서도 각각 과학적인 조사가 이뤄졌는데, 1970년 란치아노의 기적을 조사한 결과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체가 이렇게 기적이 일어날 때만 예수님의 살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 혹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관찰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성체성사에서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런 성체 성혈의 신비에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엎드려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찬미가’ 중) 성체가 단백질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요한 20, 29)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6-0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의 꽃은 장미만이 아니다?

계절의 여왕인 5월,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참 아름다운 시기입니다. 장미하면 또 다른 여왕이 생각나지요. 바로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입니다. 성모님하면 장미가 떠오를 정도로 장미와 성모님의 관계는 깊습니다. 성모님이 처음 발현하신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는 한겨울에 장미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장미로 둘러싸인 신발을 신고 있었고,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발치에도 노란 장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모님과 장미를 결부시키곤 하는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묵주기도(Rosario)는 라틴어로 ‘장미 꽃다발’을 의미합니다. 또 성모호칭기도를 바칠 때는 성모님을 ‘신비로운 장미’라 부르며 전구를 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다미아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백합으로 입히셨고, 장미로 덮으셨으며 꽃들로 치장시키셨도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꽃은 장미, 백합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백합은 성모님의 동정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중세기 화가들은 성화에 흰 백합을 그려 성모님이 동정녀임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는 백합이 특별히 더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흰 백합을 성모님의 백합(Madonna lily)이나 성모영보의 백합(Annunciation lily)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성모님을 표현하는 성미술에는 백합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꽃이 또 있는데요. 바로 제비꽃입니다. 제비꽃은 성모님의 겸손과 겸양을 보여주는 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신비의 포도나무」라는 저서에서 성모님을 “겸손한 제비꽃”이라고 칭송했는데요. 성인은 “작고 땅에 가깝고 향기롭고 색이 소박한” 제비꽃에서 겸손을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제비꽃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겸손을 상징한다”고 전합니다. 아예 이름에 성모님의 이름이 담긴 꽃들도 있습니다. 메리골드는 마리아와 황금(Gold)이 합쳐진 이름인데요. 16세기 무렵 유럽에 이 꽃이 유래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이 꽃을 성모님에게 봉헌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장미’라는 의미의 로즈마리는 성모님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성모님이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던 당시 로즈마리 위에 옷을 두고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때 원래는 흰색이었던 로즈마리의 꽃이 오늘날처럼 파란색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파란색은 하늘의 모후인 성모님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라벤더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에서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의 옷을 라벤더 위에 널어 말리셨는데요. 그때부터 라벤더에 향기가 머물게 됐다고 하네요. 사실은 이밖에도 성모님과 관련 있는 꽃은 수십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꽃을 통해서 아름다운 어머니, 성모님과 성모님의 덕행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꽃들이 아름다운 이 시기, 꽃들을 바라보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한다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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