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끝에는 꼭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많은 분들이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한 단의 마지막, 바로 영광송 뒤에 이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구원송’이라고도 부르는 ‘구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보통 묵주 기도를 배울 때 이 기도를 같이 배우곤 하는데요. 그래서 평소에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는 분들 중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가 아닌데도 영광송 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저희 죄를…”이라고 외우다가 ‘아차!’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처럼 영광송 다음에 오는 이 기도를 ‘짧은 마침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짧은 마침 기도는 구원을 비는 기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묵주 기도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짧은 마침 기도를 곁들이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짧은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다”면서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양한 짧은 마침 기도 중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나타나셨는데요. 성모님은 전쟁의 종식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묵주 기도의 모후’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발현 중 세 번째 발현이었던 7월 13일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알려주시며 묵주 기도의 한 단을 마칠 때마다 바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의 기도’(Fatima Prayers)라고도 불립니다.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구원을 비는 기도도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가 널리 퍼져 신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교회의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신심과 함께 기도문이 번역돼 전해지다 보니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의역도 있고, 또 기도문의 문구가 달라 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주교회의는 2011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현재의 기도문으로 통일했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구원을 비는 기도를 「가톨릭 기도서」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의역은 아직 남아 있는데요. 구원을 비는 기도의 라틴어 기도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모든 영혼들’을 ‘연옥 영혼’으로, ‘특별히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장 버림받은 영혼’으로 의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통일된 기도문으로 바쳐야 하겠지만, 본래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1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신비는 요일에 맞춰서 해야만 한다?

환희의 신비는 월·토요일, 고통의 신비는 화·금요일, 영광의 신비는 수요일·주일, 빛의 신비는 목요일. 아마 예비신자 교리 때, 혹은 묵주 기도를 배우는 다른 때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묵주 기도는 요일마다 각각 묵상하는 신비가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 “월요일에는 꼭 환희의 신비만, 화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만 바쳐야하는 건가요?”하고 궁금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드리자면 꼭 요일에 배정된 신비만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신비마다 요일을 정해둔 걸까요? 정해두긴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이 점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에 묵주 기도에 ‘빛의 신비’를 새롭게 제정하실 때 발표하신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서에서 새롭게 추가한 ‘빛의 신비’를 추가해서 각 신비의 요일 배분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따로 상세하게 설명하시면서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이 왜 중요한지 가르치셨습니다. 교황님은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 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전례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한 주간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고 강조하십니다.(38항) 전례처럼 신자들이 묵주 기도를 통해 같은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주일 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신비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묵주 기도는 그저 성모송을 10번 외우면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묵주 기도를 두고 “요약된 복음”이라고 칭송하셨는데요.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의 유년기 시절의 신비들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복된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구원 사건들이 조화 있게 연결돼 있고, 성령 강림 날 태어난 교회와 이 세상에서의 일생을 마치시고 영혼과 육신이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타난 파스카의 결실이 총망라돼 있다”면서 “로사리오(묵주) 기도는 복음적인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44~45항 참조) 묵주 기도는 성모송을 외우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묵주 기도의 4가지 신비 전체를 다 바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바쁜 일상에 쫓겨 그러기 어렵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제안에 따라 매일 요일에 맞는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 기도를 바쳐보면 어떨까요? 그 여정을 통해 우리의 한 주간을 예수님의 삶으로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0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명동대성당은 대성당(basilica)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대성당’이라 하면 많은 분들이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본당의 성당이자 한국교회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성당이기 때문이지요. 세계적으로 생각해 보면 로마 바티칸에 자리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동대성당을 부를 때의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부를 때의 ‘대성당’은 사실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바실리카(basilica)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말로 ‘대성당’에 해당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역사적·신앙적·예술적인 중요성을 인정받는 성당이자, 교회를 통해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성당을 일컫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줄지어 세운 기둥 위에 지붕을 올린 사각형의 넓은 강당 형태의 건축 양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재판, 집회, 상거래를 위해 쓰인 이 건축 양식은 교회가 공인되면서 교회의 주요 건축 양식이 됐습니다. 당시 교회가 기존 바실리카를 개조해 성당으로 사용하거나 바실리카 양식으로 성당을 지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은 대부분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실리카는 특별한 성당을 높여 부르는 칭호가 됐습니다. 특히 16세기 무렵부터 교회는 특정 성당들을 지정해 바실리카라 부르도록 했는데요. 현재 교회법에는 삭제된 내용이긴 하지만, 1918년 「교회법전」에는 “사도좌의 허락이나 오랜 관습을 따르는 경우 외에는 어떤 교회에도 대성당(바실리카)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을 정도로 중요한 칭호입니다. 여전히 바실리카라는 칭호를 붙일 권한은 교황청에 있습니다. 바실리카에는 대 바실리카(major basilica)와 소 바실리카(minor basilica)가 있습니다. 대 바실리카는 전 세계에 딱 4곳, 그것도 교황님께서 사목하시는 로마에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바실리카이자 교황님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 오늘날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님에 관한 기적이 담긴 전설로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불리는 ‘성모 대성당’ 이렇게 4곳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 4곳의 바실리카를 제외하고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모든 성당은 소 바실리카에 해당합니다. 우리말로 ‘준대성전’이라고도 하는 소 바실리카는 대 바실리카의 일부 특전을 부여받은 성당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입니다. 그럼 명동대성당을 대성당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성당은 바실리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교좌성당(cathedral)을 높여 부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구장 주교님이 자리하시는 주교좌가 있는 성당은 한 교구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성당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대구대교구에도 주교좌 범어대성당이 있습니다.

2024-09-29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보 착용은 남녀차별이다?

미사 시간만을 위한 특별한 복식들이 있지요. 주로 신부님이나 전례 봉사자의 복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나 전례 봉사자 외의 신자들도 미사 때 착용할 수 있는 복식이 있습니다. 미사 등의 전례 중에 세례를 받은 여성 신자들이 쓰는 베일, 바로 미사보입니다. 교회가 전례 중 미사보를 사용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씀(1코린 11,2-16)에서 비롯됐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1,5) 전례 때 여성은 베일을 써서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지요. 심지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9)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구절들만 봐서는 남녀를 차별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미사보로 남녀를 차별한 것일까요? 사실 바오로 사도는 오히려 교회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강조한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성의 머리를 가리는 것에 관해 언급한 후에 바로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11,11-12)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도 성별, 출신 모두 관계없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라 3,27-28)라며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이 당시 그리스도교 풍습을 말한 것일 뿐, 절대적인 규칙이나 본질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코린토 1서 강해」를 집필하신 이영헌 신부님(마리오·광주대교구 성사전담)은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당시 코린토의 문화 안에서 예의였다”면서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은 기도할 때 예의를 지키도록 당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의 문화에서 시작된 미사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사보에는 더 큰 의미가 담기게 됐습니다. 세례 받은 신자가 입는 ‘흰옷’을 나타내게 된 것이지요. 세례성사에서 흰옷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입었다”(갈라 3,27)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43항) 이런 이유로 세례성사의 흰옷을 입는 예식에서 미사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미사보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도 뜻합니다. 미사보 착용은 의무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쓰고 싶은 분만 쓰시면 되지요. 미사보에 있어서는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선택할 수 있다는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듯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입고’ 더 깊이 예수님의 성찬례에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미사보를 쓰고 미사에 참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남성분들은 미사보를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2024-09-1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아카펠라는 교회 음악이다?

아카펠라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카펠라는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맞춰 부르는 음악인데요. 아카펠라를 들으면 사람의 목소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카펠라가 교회 음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지금은 교회 음악에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고 있지만, 초기 교회에는 전례 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이후 9세기경 교회 음악에 오르간이 도입되고 여러 악기들이 차츰 교회 음악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클래식 음악들도 교회 음악으로 작곡된 곡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큰 악기를 두기 어려운 작은 규모의 기도 공간, 경당에서 반주 없이도 하느님께 경건하게 찬미를 드리는 무반주 합창을 불렀습니다. 1500여 년 전부터 무반주 합창을 불러온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이 대표적인데요. 이 합창단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서 무반주 합창을 노래해, ‘성당식으로’, ‘성당 풍으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카펠라(A Cappella)가 성당에서 부르는 무반주 합창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아카펠라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경에 많이 작곡돼,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교회 음악을 뜻하던 아카펠라는 19세기 무렵 합창음악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해 교회 음악과 관계없이 악기 반주 없이 하는 모든 합창을 부르는 말이 됐습니다. 카펠라, 바로 ‘성당’이라는 말이 음악의 한 장르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성당을 뜻하는 카펠라는 이전에도 뜻이 변한 적이 있는 말입니다. 카펠라는 성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의 성당, 즉 경당을 부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 군인의 외투인 카파(cappa)가 뜻이 변한 말입니다. 세례 받기 전 군인이었던 마르티노 성인(316~397)은 어느 날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카파를 반으로 잘라 내어줬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 성인의 꿈에 마르티노의 반쪽 카파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예비신자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줬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그 후 세례를 받고, 나아가 주교가 돼 목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선종 후에도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았지요. 이후 성인의 카파를 보관하기 위한 작은 성당이 세워졌는데요. 사람들은 마르티노 성인의 카파가 있는 이곳을 카펠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마르티노 성인의 성당처럼 작은 성당, 즉 다른 경당들도 카펠라라고 부르게 됐고, 그래서 카펠라는 성당을 뜻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에서 경당, 경당에서 찬미 노래를 부르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관련 없는 줄 알았던 ‘아카펠라’에 참 많은 교회의 이야기가 숨어있던 것 같습니다.

2024-09-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인은 복자보다 높다?

순교자 성월인 9월,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억하며 본받으려 노력합니다. 특별히 기도와 순례를 통해 성인들과 복자들을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고 있지요. 순교자 성월은 우리가 기억하는 복자들의 시성이,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바로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마음을 북돋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시복시성이라고 하면 교회가 어떤 인물을 복자로, 그리고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828항) 시복시성은 교회법적인 절차에 따라 엄정한 검증을 거쳐 진행되는데요. 시복시성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에게 복자, 성인의 순서로 칭호를 부여합니다. 시성을 위한 과정에 복자가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니 성인이 더 대단하고 높은 분이고, 복자는 그보다는 덜 높은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자·성인이라는 칭호는 그분들의 공덕이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복자를 일컫는 라틴어 베아투스(Beatus)는 ‘복된, 행복한, 축복받은’이라는 뜻도 있지만 ‘천국에 있는’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복직관이란 하느님을 직접 뵙는(直觀), 지극한 행복(至福)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1코린 13,12)이라고 말씀하시듯,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표현합니다. 성인은 의미상으로 거룩한(聖) 사람(人)을 의미하는데, 실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거룩한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일치를 통해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지복직관에 이른, 하느님 나라에 든 분들입니다. 우리는 시성식을 하면 “○○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사실 시복식·시성식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계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아직 지상교회를 순례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그분들이 보여준 완덕의 모범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또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길 청할 수 있는 분들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성인들이나 복자들의 명부에 올린 하느님의 종들만을 공적 경배로 공경할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1187조) 그렇기 때문에 아기들은 시복시성을 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죄의 물들지 않아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영웅적인 성덕을 제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복시성을 염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또 우리의 후손들이 이분들을 본받으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함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면 어떨까 합니다.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소서.”(‘시복 시성 기도문’ 중)

2024-09-0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 봉헌금은 꼭 앞에 가서 내야 할까?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톨릭페이는 가톨릭신자 앱 ‘가톨릭하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불 전자 지급 수단인데요. 아직 모든 본당에서 가톨릭페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가톨릭페이를 쓰는 본당이 늘고 있습니다.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낼 때는 가톨릭페이에 돈을 충전하고 봉헌할 금액을 설정해 둔 다음, 봉헌 바구니에 있는 QR을 찍는 방식으로 봉헌합니다. 현금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봉헌금을 낼 수 있지요. 가톨릭페이로 봉헌을 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현금으로 봉헌을 할 때에는 직접 내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결국 모바일기기로 헌금을 하는데 꼭 제대 앞까지 나가야 하는 걸까요? 자리에 앉아서 터치로 송금해도 봉헌금이 전달되는 것은 같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전례 안에서 앞으로 나가서 봉헌을 하는 것과 온라인 송금으로 봉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봉헌 중 제대 앞으로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하느님께 나아가 봉헌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 행렬은 예물 준비 행렬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예물 준비란 그리스도의 성찬례를 위해 상을 차리고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입니다. 예로부터 신자들은 성찬례를 위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왔습니다.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올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도 가지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물품을 가져오던 이 선물은 11세기경부터 돈으로 변화했는데요. 이것이 오늘날 봉헌금이 됐습니다. 이 봉헌금에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2코린 8,9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제물을 봉헌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당신 희생 제사 안에서 완전하게 하신다”며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0, 1368항) 결국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그저 빵과 포도주, 그리고 봉헌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하게 될 우리 자신도 제대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 예식은 미사가 참례한 모든 이의 희생 제사임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미사 중에는 봉헌 행렬 말고도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행렬이 더 있습니다. 사제와 부제, 봉사자들이 제대로 나아가는 입당 행렬, 복음 선포 전에 복음서를 독서대로 모셔가는 복음 행렬, 영성체를 하러 나아가는 영성체 행렬이 그렇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러한 행위와 행렬은 각각의 규범에 따라, 알맞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아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44항) 이번 주일도 봉헌금을 잘 준비하셨나요? 현금으로 준비한 봉헌금이든, 가톨릭페이로 내는 봉헌금이든, 한 주간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을, 우리 자신을 함께 봉헌하는 마음,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4-08-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대세(代洗)는 반쪽짜리 세례다?

대세(代洗)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죽을 위험에 처해있거나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순간, 성직자가 찾아오기 어렵다면,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간단한 예식으로 세례를 집전할 수 있는데, 이런 세례를 대세라고 부릅니다. 성직자 대(代)신에 세(洗)례를 집전한다는 의미의 한자어지요. 아시다시피 세례성사의 주례자는 성직자입니다. 교회법도 “세례의 정규 집전자는 주교와 탁덕(신부)과 부제”라고 말합니다.(제861조 1항) 또한 세례의 장소도 “성당이나 경당”으로 규정돼 있습니다.(제857조) 죽음에 임박한 분이 성당을 찾아갈 여유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대세는 정규 집전자가 집전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성당도 아닌 곳에서 세례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대세를 받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건강을 회복했다면 보례(補禮)를 받아야 합니다. 예비신자처럼 정식 교리를 받고 대세를 받을 때 생략된 다른 입교 예식들을 보충하는 예식이지요. 이렇게 보니 어쩐지 대세는 완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세는 결코 불완전하거나 반쪽짜리 세례가 아닙니다. 대세 역시 세례로서 부족함 없이 유효한 세례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의 일반적인 집전자는 주교와 사제지만, 교회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성삼위의 이름이 명기된 세례 양식문을 사용하여 세례를 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6항) 교회법 역시 “부득이한 경우에는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적법하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제861조 2항) 위급한 상황이라면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적법한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박해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신앙선조들은 성직자가 부족하고 박해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대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세가 박해시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또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병원에서 대세를 받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어느 날 우리 곁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우리가 세례를 집전해 그분이 하느님 곁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을 알아둔다면 예상치 못한 그 어느 때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깨끗한 자연수를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고 말하면 유효한 세례가 됩니다. 물론 죽음을 앞뒀다고 누구에게나 다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겠죠. 어른의 경우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요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고, 어떤 형태든지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기의 경우는 죽을 위험이 있다면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아야 하고요. 이렇게 대세를 집전한 후에는 ‘대세 보고서’를 작성해 본당에 제출하면 됩니다.

2024-08-1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승천하신 성모님께 무덤이 있다?

지금은 전쟁으로 찾아가기 어렵지만,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빠지지 않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시온산, 최후의 만찬 성당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성모 영면 성당’입니다. 성모 영면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원뿔형 지붕과 지붕을 둘러싼 네 개의 작은 탑이 인상적인 건물이지요. 그리고 성당 내부에는 석관이 있는데요. 석관 위에는 실제 사람 크기로 두 손을 모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의 성모님이 조각돼 있습니다. 영면하신 성모님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입니다. 이쯤 오니 번뜩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셨다고 믿고 있는데 어째서 성모님이 영원히 잠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성당이 있고, 또 우리는 그 성당을 순례하고 있는 걸까요? 일단 왜 성모 승천이 아니라 성모 영면(Dormitio)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지를 살펴야겠습니다.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거행하게 된 것은 1950년부터지만, 실은 8월 15일은 성모님의 축일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축일 중 하나입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소 공의회(431년)가 끝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을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로 지냈고, 성모 신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당시 성모님의 마지막에 관한 다양한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는데요. 돌아가신 성모님을 무덤으로 옮기던 중 성모님께서 살아나 승천했다는 이야기, 죽은 지 3일 후에 부활해 승천했다는 이야기, 죽지 않고 바로 승천했다는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셨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승천하셨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루살렘 신자들은 성모님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장소를 찾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8월 15일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의 이름도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영면(죽음) 축일’로 변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8월 15일을 성모 영면 축일로 지내오다 8세기경 ‘승천’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다고 합니다. 다시 성모 영면 성당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모 영면 성당에 있는 석관은 비어 있는 석관입니다. 교회는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59항)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하늘로 불러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모 영면 성당의 빈 무덤은 성모님의 육신이 지상에 남아 있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하늘로 불러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젠가 무덤에 묻히겠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 우리의 무덤도 성모님의 무덤처럼 빈 무덤이 되리라 믿습니다.

2024-08-1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도 있다?

수녀님, 수사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갈색, 회색, 흰색, 남색 등 수수한 색상에 상하의가 나뉘지 않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수녀님들의 경우 머리 수건을 착용합니다. 이런 수도복은 보는 이들까지도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해줍니다. 수도자들이 이렇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청빈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생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로서 단순하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 생활 교령」 17항)고 말하고, 교회법을 통해 “수도자들은 자기의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로서 고유법의 규범에 따라 정해진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1항) 수도복은 본래 수도회가 세워지던 당시 일반인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었습니다. 3~4세기경 수도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복장을 통일해 나갔는데요. 수도회들은 당시의 농부나 서민들이 입던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원한 수도자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옷을 입고자 했던 것이죠.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복장은 변했지만, 수도자들은 당시의 복장을 그대로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수도자들의 복장이 독특한 복장으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수도자의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 단순·단정·검소하고 품위 있어야 사도직 현장에 따라 평상복 입기도 하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들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회나 살레시오회 등 남자 수도회 중에는 별도의 수도복이 없는 수도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사님 중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를 입고 계신 수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법은 “고유한 복장이 없는 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제284조 규범에 따른 성직자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2항) 예수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이창현(비오) 신부님은 “사람들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예수회 설립 당시부터 수도복을 따로 입기보다 사제들의 복장인 수단을 그대로 입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 중에도 수도복을 입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심 수녀회는 흰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정복으로 하되, 사도직 현장에 따라 그에 맞춰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복장이든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수도회의 경우 정해진 수도복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에서는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성심 수녀회 한화관구장 최혜영(엘리사벳) 수녀님은 “성심 수녀회는 설립 당시 과부들의 복장을 수도복으로 입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창설자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자고 결의했다”면서 “사복을 입고 있지만 십자가 목걸이로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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