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31절에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주님은 “오시어”(요한 20,19.26) 제자들 가운데 서시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요한 20,20.27 참조) 이는 부활이 십자가를 지워 버린 사건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사랑의 현존임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토마스의 의심은 바로 이 상처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곧 십자가의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부활의 진실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상처를 통해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임을 알아보고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또한 이 상처는 토마스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날 저녁, 두려움 속에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의심 가운데 머물러 있던 토마스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같은 장소에 두 번 오셨다는 사실은, 부활이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 의심하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이 닫혀있어도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오심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청하지도, 맞이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준비와 자격을 앞섭니다. 또한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데도” 오셨다는 사실은,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초월적인 현존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 부활 신앙이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신앙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의 의심마저 껴안으시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주님은 토마스에게 왜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토마스를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도 아니며, 오히려 그의 의심을 당신의 상처 안으로 초대하시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세상을 향해 열린 하느님 자비의 문입니다. 토마스에게 주님의 상처는 실패와 좌절이 남긴 고통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마침내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가 이끌어 온 신앙의 정점이며 부활 신앙의 가장 완전한 언어입니다. 토마스는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상처를 만졌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분’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1베드 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산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새로 태어남은 상처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의심과 상처를 안고서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으며(1베드 1,8 참조) 그분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증거를 요구하며 두려움과 의심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닫힌 마음의 문을 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가 오늘도 고통받는 이들의 상처 안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부활의 믿음으로 이끕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나서의 가르침

흔히 예언서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신탁, 즉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1-2) 그러나 요나는 말없이 주님 말씀을 등지고 야포로 가서 타르시스로 가는 이방인의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한편, 뱃사람들과 니네베 주민들은 바삐 대비하고 행동합니다. 폭풍이 일어 생사가 위태로워지자, 선장이 배 밑창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요나에게 외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이렇게 그들은 요나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도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듯 움직입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 큰 물고기에게 통째로 먹힌 요나는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주 하느님께 있는 힘을 다해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요나 2,3) 기도 중에 요나는 깨닫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요나는 두 가지를 체험하며 배웁니다. 첫째 가르침은, 예언자로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 너무 버거워서 겁에 질려 말(선포)을 못 한다 해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님 말씀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요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바다도 큰 물고기도 바람도 뱃사공들도 다 덜덜 떨게 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요나 1,15) 이를 본 “(뱃)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6) 요나서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주 하느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보편 구원 의지’의 계시입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요나 3,3)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요나 4,11) 위에서 ‘사흘’은 충만의 숫자이며 ‘십이만’은 수학적 또는 통계수치를 뛰어넘는, 주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수요 구원의 숫자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적마다 더없이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인간애를 느낍니다. 요나를 살리고자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니 얼마나 감동입니까? “(뱃)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요나 1,13) 그때 사공들의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또 어땠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과연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2면

[말씀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반전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생명에게 패배하고, 짙은 어둠이 영원한 빛에 자리를 내어준 ‘부활’의 아침입니다. 복음은 여명(黎明)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달려갔고, 뒤이어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이 달려갑니다. 이들의 ‘달림’은 단순한 물리적 속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는 영혼의 간절한 갈망입니다. 빈 무덤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신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빈 무덤’의 신비를 깊이 통찰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을 무효로 하셨음을 뜻합니다. 곧 죽음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음에도, 무덤 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수제자인 베드로에 대한 존경이자, 동시에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신중한 영성이었습니다. 뒤따라온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상징을 발견합니다. 바로 무덤 안에 놓인 ‘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간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설명합니다. 도둑이라면 서둘러 시신만 챙겼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의 옷을 정돈하여 남겨두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몸을 입으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는 것은 외적 표징에서 내적 확신으로의 내면의 변화를 말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보고 믿음’이 단지 물리적 빈 공간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을 영적으로 깨달은 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무덤, 즉 절망과 고통, 상처의 빈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그곳에서 단지 ‘없음’과 ‘상실’만을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덤 밖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 빈자리 안으로 용기 있게 들어갈 때, 죽음의 흔적은 남아있으되 생명은 그곳을 빠져나와 우리 곁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목격하는 신앙인의 시선입니다. 부활은 내면을 밝히는 영원한 광명입니다. 동방 정교회의 영적 보화인 필로칼리아의 영성가들은 부활을 단지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가두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마음의 정화(Hesychia)를 통해 내면의 빛이 다시 타오르는 것’입니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영혼 안에서 매일 일어나야 한다. 정욕에 묶여 있던 마음이 기도를 통해 빛을 발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라자로가 일어나는 것이요, 주님이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시는 순간이다.” 부활은 외부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 안의 ‘자기중심성’이라는 무덤 문을 부수고 나오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필로칼리아는 권고합니다. “네 마음을 지켜라. 그곳이 바로 주님이 묻히신 곳이며, 동시에 부활하실 장소다.” 우리가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 때, 부활하신 주님의 빛은 태양보다 더 밝게 우리 영혼을 비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들고 성당 문을 나서야 하겠습니까? 빈 무덤의 아마포는 주님께서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지 않으심을 선포합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이를 온전히 깨달은 것은 오직 부활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죄의 습관과 미움의 수의를 무덤에 남겨두고 나옵시다. 부활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모하는 현재의 능력’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할 때 부활은 시작됩니다. 절망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 때 무거운 돌무덤은 굴러갑니다. 오늘 내 마음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이라는 넓은 들판을 향해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가셨듯이, 그분은 이미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진실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2면

[말씀의 우물] 성결법이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 나오는 ‘성결법’에 대해 잠시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성결법전으로도 일컫는 성결법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주 하느님의 거룩하심(聖性, 성성)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 성결법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성화(聖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성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짐승을 잡을 때도, 그것을 제물로 바칠 때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피든 피를 먹으면, 나는 그 피를 먹은 자에게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 내겠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0-11) 당시에는 피를 모든 생물체의 생명(혼)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를 먹거나 함부로 다루면 생명체의 주인이신 하느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가 되므로, 이는 곧 그분께 불경죄를 짓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부부관계가 아닌 성관계나,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짐승과 교접하는 일체 행위는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하나라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레위 18,29) 레위기는 이어서 주 하느님과 부모 공경은 물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레위 19,2-3) 아주 큰 죄에 대한 형벌 규정을 봅니다. “제 자식을 몰록에게 바치면,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2) 사제직의 성스러움, 품위 유지에 관한 규정을 봅니다. “사제들은 머리를 밀거나, 수염 끝을 깎거나,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 자기들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사제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이다.”(레위 21,5-7) 제물을 성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일러,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봉헌하는 거룩한 예물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여라.”(레위 22,2) 안식일과 축일 규정(레위기 23장 참조), 성소(聖所)와 그 유지 지침(24장)에 이어서 안식일과 희년 규정이 뒤따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11) 옛날 이스라엘의 성결법은 주님께 성스럽게 다가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 절정을 우리는 레위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에 거행하는 속죄 예식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해에 한 번씩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너희의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라.”(레위 16,3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그 기본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여, 미사 전례 중 성지 행렬 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마태 21,1-11)을 듣습니다. 그러나 파스카 신비는 입성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전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태 26,14-27,66)를 함께 봉독하지요. 사실 이 두 복음은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입성에 관한 복음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면모’를 보여준다면, 수난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를 외치며 환호하는 반면, 수난기에서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라고 외치며 야유하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입성기와 수난기는 이렇게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신비를 이룹니다. 추앙받던 임금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점에서는 상반된 내용이지만, 이 둘은 결국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으며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환대받으며 들어 높여지던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짐으로써 구원의 신비를 완성하신다는 이 파스카 신비는, 입성 복음에서 ‘겸손한 임금’이라는 표현으로 암시됩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마태오복음이 ‘겸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단어는 ‘프라우스(πραΰς)’입니다. 프라우스는 마태오복음이 인용한 즈카르야 예언서의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라는 구절에서, 겸손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니(עָנִי)’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아니’는 어원적으로, 핍박받거나 괴롭힘당하는 것을 뜻하는 ‘아나흐(עָנָה)’에서 유래하지요. 즉, 프라우스가 말하는 겸손이란, 일반적으로 예의와 공손함의 차원에서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어원적으로 어떠한 핍박과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참아 인내하며 ‘견디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겸손이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닥친 고통을 묵묵하게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하지요. 따라서 성경이 장차 오실 분을 ‘겸손한 임금님’이라고 칭한 건, 그분은 비록 왕이지만 앞으로 온갖 핍박과 모진 고통을 참아 받으며, 그것을 묵묵히 감내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실 것에 대한 암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겸손을 뜻하는 프라우스의 출발어 ‘아니’는 시편 37편에서 ‘가난한 이들’(시편 37,11)로 번역하는 ‘아나빔(עֲנָוִ֥י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나빔은 ‘아나브(עָנָו)’라는 단어의 복수형인데, 아나브 역시 핍박과 고통받는다는 걸 의미하는 아나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한(프라우스) 이들과 가난한 이들(아나빔)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가난한 이들이란, 핍박과 고통을 그대로 감내해야 하는 가련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비참한 나머지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신뢰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죄악을 그저 인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고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며, 비참한 현실을 묵묵하고 겸허하게 수용한다는 점에서 겸손한 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가난한 이들은 겸손한 이들이며, 겸손한 이들은 곧 고통 속에서 주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이 겸손한(πραΰς) 임금으로 불리는 이유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시면서 성부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스카 신비는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겸손하며 순종하는 이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겸손한 임금을 따르는 겸손한 백성에게서 부활의 신비가 열릴 것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친한 신부들과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식당에서 어느 신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뭐 먹을지를 다른 신부가 묻습니다.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무거나 시켜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뒤에 음식이 나왔는데 정말 ‘아무거나’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신부는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문했지만, 저만 이상한 ‘아무거나’를 먹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를 시킨다면 원하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원하는 음식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똑같지 않을까요? 말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과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용서의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곧 하느님께 전달하는 주문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 진심으로 필요한 것을 주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문 전에 다른 주문을 먼저 하곤 합니다. ‘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왜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거야?’, ‘왜 저 사람들은 문제투성이야?’ 등의 다른 주문은 안 됩니다. 제대로 주문해야 합니다. ‘아무거나’를 말하면 정말 ‘아무거나’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대로 주님께 주문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했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인간적인 무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타가 마중 나옵니다. 그녀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고 대답하면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먼 훗날의 사건입니다. 이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하시면서, 먼 미래에 일어날 현상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마르타가 이야기하지요.(요한 11,39 참조)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 시신 곁을 맴돌다가 냄새가 나는 나흘째가 되면 영영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타의 말은 곧 인간적 희망이 단 1%도 남지 않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돌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말씀에 죽음이 굴복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관계, 그 관계 안에서 오래 굳어 버린 상처, 희망이 사라졌다는 기억, 신앙이 식어버린 자리…. 그래서 주님께 제대로 주문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절망할 뿐입니다. 혹시 마르타의 말처럼 “주님,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주저하면서 갇혀 있는 우리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십니다. 내 안에 있는 무덤을 열고 나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잘못 반성에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른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주님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님께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8면

[말씀의 우물] 구약의 중심 ‘신명기’

창세기에서 말라키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성경 낱권은 물론 다 중요합니다. 나름의 고유한 성격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신약에서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다루는 네 복음서가 제일 중요하듯이, 구약 안에서도 신명기를 ‘구약성경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집트 탈출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전해주는 역사서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역사서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성경입니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신명기를 잇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권과 하권, 그리고 열왕기 상권과 하권 저술에도, 신학적·역사적 관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아울러 신명기계 신학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여러 예언자에게 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집니다. 신명기는 하느님 백성이 갖춰야 할 모습을 체계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되며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성에도 크게 공헌합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친 악마의 유혹에(마태 4,1-11; 루카 4,1-13 참조) 세 번 모두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신명 8,3 참조)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신명 6,13 참조)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도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신명 6,5 참조) 독일 유학 시절, 예루살렘 단기 체류 유학생 선발 첫째 조건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 고백문(신명 6,4-7 참조)을 히브리어로 암송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고 행동할 출발점이며 중심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도 신명기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모세의 예언직을 완성하는 참 예언자시라고 전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사도 3,22; 신명 18,15 참조) 바오로도 주저함 없이 신명기를 인용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로마 10,8; 신명 30,14 참조) 신명기는 부자 되고 부자나라가 되는 비법을 전합니다. “너희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이고, 너희가 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는 하여도 그들이 너희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신명 15,6) 주님 뜻대로, 그분 말씀(규정)대로 우리가 살기만 하면!(신명 15,5 참조) 선택은 이제 우리의 몫이겠지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8면

[말씀의 우물] ‘구약의 복음서’ 탈출기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토대를 마련해준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흔히 ‘구약의 복음서’라 부릅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시고, 이어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에 반해 탈출기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이렇게 볼 때 탈출기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태어나게 하는 책입니다. 물론 탈출기는 앞서 나오는 창세기와도, 또한 뒤따르는 레위기나 민수기와 신명기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들 다섯 권의 책을 오경이라 부릅니다. 유다교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과 그에 얽힌 체험은 이스라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 가정에서 해마다 되풀이하여 거행하는 파스카 축제 예식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또한 이집트 탈출 사건을 파스카 전례와 연결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사건의 완성으로 봅니다. 묵시록은 수난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집트 탈출 기념, 곧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서 제물이 되는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 주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건 두 가지를 꼽자면 이집트 탈출 사건과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차츰 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친히 주도하신 사건으로 가르치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탈출 13,14-15) 이집트 탈출 사건은 차츰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습니다. “너희는 주 하느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신명 26,5-9) 탈출기는 이집트에서 짓눌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담은 이야기로, 탈출기에 나오는 하느님은 억압받아 고생하는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이집트 탈출의 목표는 억압에서 풀려나 ‘맘껏 주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 8,16; 9,1; 9,13 등) 이같이 탈출기는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해주고,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어줍니다. 주님 말씀을 읽을 적마다 저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41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를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병 고침을 넘어, 예수님이 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고통 속에 있던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시선과 그 시선에 마음을 연 한 인간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대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거나, 자기 관심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이러한 우리의 시선과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요한 9,1) 여기서 ‘보셨다’는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아닙니다. 본문의 그리스어 동사 호라오(ὁράω)는 기본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깨닫다’는 의미로, 그 사람의 고통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시선을 뜻합니다. 이 시선은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는 첫 순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의 신체적 조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그 안에 깃든 고통과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이 시선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들으시고, 살펴보시고,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참조)라는 하느님의 시선과 이어집니다. 약자 위에 머무는 예수님의 시선은 곧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이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죄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는 단죄도, 그 원인을 따지는 판단도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오직 연민과 구원의 의지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는 행위는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치유는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창조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에게 ‘파견된 이’라는 뜻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게 하십니다. 이는 이 치유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는 육안의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교만의 문제입니다. 눈먼 이는 겸손으로 마음의 눈을 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우리는 잘 본다”(요한 9,41)라고 확신한 바리사이들은 교만으로 그 눈을 감았습니다. 자기 확신에 갇힌 시선은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는 본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1독서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겉모습을 넘어 그 사람의 중심과 가능성, 상처까지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눈먼 이를 바라보신 방식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고 선언합니다. 빛은 마음의 눈이 열릴 때, 곧 사랑과 겸손 안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눈이 열리면 시선도 달라집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사람의 내면을 헤아리는 마음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은 눈먼 이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열어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시선을 닮아갈 때 사람을 살리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사순 시기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기쁨의 라에타레(Laetare) 주일은, 바로 이런 시선의 전환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보는 눈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깊이를 존중하는 마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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