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어느덧 대림 시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교회 전례력에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절의 흐름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례력에서는 새로워지는 시기입니다. 겉보기에 두 흐름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즉 ‘오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자로는 대림(待臨), 즉 ‘임하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다리다’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습니다. 기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은 참 묘한 감정입니다. 때로는 설레지만, 때로는 오지 않을까 두렵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합니다. 어릴 적에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냥 즐겁고 설렜습니다. 성탄절의 즐거움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 잔치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곧 구원을 기다리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어려움과 세상의 암담함을 느끼면서 기다림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까?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구원은 여전히 멀게 느껴질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런 세상에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런 질문과 의문들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한 뒤 성전에서 봉헌될 때, 그분을 기다리던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메온과 한나입니다.(루카 2,25-39 참조) 이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렸기에 성전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합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시메온에 대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묘사합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살아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반면,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하느님 없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별로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롭게도, 구원의 역사에서 기다림은 늘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늘 인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느님께 가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줄 신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오지 않는 인간을 기다리던 하느님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시는 하느님을 가장 적극적으로 기다린 이는 앞서 말한 시메온도, 한나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요한은 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처럼 성전에서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왜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 주님을 기다렸을까요? 왜 기존의 관습과 달리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을까요?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과 회의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과 황량함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소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하느님의 소리를 내라고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역사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환상보다는 짙은 어둠을 직시한 사람들에 의해 준비됩니다. 놀랍게도 요한의 외침에 많은 이가 응답했습니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기다림이 깨어났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준비한 ‘소리’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세상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광야에서 ‘소리’가 되어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숨죽이고 있던 ‘기다림’을 깨웁니다. 요한은 우리를 광야의 소리로 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막연히 넋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2-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부 사랑에 비유한 호세아 예언자

우리나라의 가장 젊은 세대그룹인 Z세대(1997~2005년생)를 대상으로 실시한 어느 여론 조사 결과, “결혼은 안 해도 되고 자녀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응답이 50% 이상 나왔다. 우리 미래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출산률이다. 결혼은 사회제도이고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선택사항이지만 문제는 결혼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적 요소도 많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더 큰 책임을 갖고 출산과 양육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결혼한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절반으로 하고 의무는 두 배로 걸머지는 일이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의 지인들은 쇼펜하우어를 성격은 고지식하지만 의협심도 강하고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가 어느 파티에서 ‘남자와 여자는 누가 본래 영리한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당연히 여자가 영리하다. 여성은 남성과 결혼하는데 남성은 여성과 결혼하니까”라고 알 듯 모를듯한 답을 했다. 여성은 영리하니까 남성과 결혼하고 남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여성과 결혼한다는 뜻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불우한 환경 탓도 많았다. 은행가였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어머니와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괴테같은 유명인들이 그녀의 살롱의 단골손님일 정도로 사교성이 많고 정열적인 여성이었는데 남성 관계가 복잡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의절하고 프랑크푸르트의 하숙방에서 친구도 없이 사색과 집필에만 몰두했다. 안타깝게 그의 염세주의 철학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혼인한 예언자이다.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서만 활동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 때인 예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1년경)까지 20여 년가량 활동했다. 호세아에게는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부부간의 사랑에 비유해 ‘사랑의 예언자’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대혼란 속에서 백성들은 이방인의 신 바알에게 매달렸다. 호세아는 잘못을 저지른 아내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인의 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살아나려면 하느님을 다시 찾고 올바르게 섬기도록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연인 같은 분이라고 강조했다. 부부간 사랑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잘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부인을 사랑으로 맞아주는 너그러운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피와 눈물 나는 예언을 귓등으로 들은 왕과 백성들은 결국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신뢰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분위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8

[말씀묵상] 대림 제1주일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마태 2,1 참조),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베들레헴의 어느 한 작은 마구간 문 앞에 가있습니다. 대림초에 밝혀진 불빛을 보면서, 설레는 기다림 속에 “아기 예수님, 어서 오세요”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곧 기쁨과 설렘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내용이 예수님의 종말론적 담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루카 22,47-53 참조)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루카 20장 이후 참조)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 이 세대가 처한 위기에 대한 말씀을 전하며 세상에 닥칠 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루카 21,5-36 참조). 오늘 복음 말씀의 초반부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예고가 중심을 이룹니다(루카 21,25-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루카 21,25), 곧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표징들이, 그리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일 것인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의 등장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후반부의 주제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루카 21,34-36 참조). 이 권고로 (루카 21,5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르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걱정으로 짓눌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 하나인 ‘기도’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상황에서 처할 수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 일상적 삶에서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주님의 오심은 이미 구약성경, 특별히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예고되었습니다(「강론지침」 81항 참조).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구원 신탁 중 일부분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계약(2사무 7,11-16; 23,5; 시편 89,4-5 참조)에 기초하며,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고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다윗 왕조의 재건은 “정의의 싹”(예레 33,15)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의 싹”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임금을 상징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 자라날 것입니다. 다윗 가문에서 후손이 나와 그가 세상에 정의와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예고는 세상에 울려 퍼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예고는 남유다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치드키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치드키야는 “주님은 나의 정의”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맞게 세상에서 공정과 정의를 세우지 못했고 유다의 패망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2열왕 25,1-7 참조), 이후 예리코 벌판에서 붙잡히고 맙니다(예레 39,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 각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주님의 오심과 심판을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강론지침」 80항 참조).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 이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2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욱 자라고 충만하게 되길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 사랑은 각자 사랑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하고, 하느님께서는 각자 지니고 있는 사랑을 풍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성숙되고 풍요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흠 없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라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도록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이때에 구체적 결심을 세워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였듯이 오늘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글_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도자들의 불의 고발한 용감한 예언자 미카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존경한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민중의 지도자였다. 사춘기 때는 술과 여자에 빠지고 종교적 반항심도 생겼지만 심성이 착하여 두려움과 죄책감에 곧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간디의 인생에서 힌두교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물질적 욕망을 끊고 고통이나 기쁨, 승리나 패배에 동요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인생의 방향타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어느 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의뢰한 소송을 맡았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남아공에서 겪은 철저한 인종차별의 심한 부당한 차별로 그는 옥살이를 반복하며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 간디가 만약에 남아공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도의 변호사로 인도의 높은 계급이 받아오던 대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참으로 신비하다. 미카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경 혼란의 시기에 남유다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미카는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이라 예언했고, 남유다왕국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어렵고 힘든 국제정세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엄청난 힘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아시리아는 여러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며 이스라엘도 위기에 휩싸인다. 특히 이 무렵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마저 위기에 처하면서 더욱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통치자들은 오히려 백성을 더 억압하고 끝을 모르게 부정부패에 빠져든다. 미카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위정자들이 저지르는 농민들에 대한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했다. 미카는 이스라엘에서 공공연한 부정과 불법을 고발하며 지도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전하고 있다. 권력을 자신의 사익으로 남용하는 고관들에 대해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사이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에게 돌아가 더 피폐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카가 예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전대미문의 메시지였다. 그러면서도 미카는 하느님은 마지막 때 결국 남은 자들이 번영과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가져다줄 구원은 이스라엘 국가가 아니라 고통을 겪어낸 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승승장구해도 시간이 지나면 불법과 부패는 결국 드러나 심판을 받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1

[말씀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임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오늘, 수난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의 왕이 수난하는 왕, 생명까지 내어주는 왕, 심지어는 죽기까지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비유가 요한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두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3,3.5), 요한복음은 십자가라는 왕위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강조하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드러내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현재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시간적 표현보다는 공간적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와 사랑이 머무는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어둠과 거짓, 미움이 지배하는 영력은 ‘아래’, 흔히 ‘이 세상’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세계는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 ‘당신의 나라’를 ‘어디에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본질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여러 곳을 오가며 여러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은 의외성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평온한 데 비해 재판하는 사람들이 더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의 죄보다 오히려 재판하는 사람들의 악함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판받는 사람이 빌라도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재판하는 빌라도는 피고인 예수님의 죄목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유다인의 고발로 자신 앞에서 있는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재판장이면서도 재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피고가 어떤 죄목으로 고발되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질문 두 가지를 던집니다. 먼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18,33.37; 19,39)을 반복할 정도로 빌라도의 관심은 온통 그것에 몰두하여 있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주제가 재판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치적 의미가 아닌 신학적 의미로 풀어내십니다.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하여 빌라도가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18,34) 이렇듯 죄수가 재판장을 신문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질문과 뒤엉켜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신원에 대한 질문에서 그분이 하신 일로 질문을 바꿉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이 질문은 독자에게 그분이 주신 생명의 가르침과 생명의 활동을 반추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처벌받아야 할 범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였음을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듭니다. 최고 정치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과 그분의 사명이 생생하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쓰인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역시 그분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자신이 하였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18,37) 요한복음 저자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왕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사명을 강력히 피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빌라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우아한 방법으로 권력 때문에 진리에 눈멀고 거짓에 기울었다며 빌라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왕을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으시는 것 같아 괜스레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성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 안에 머물며 다양한 목소리로 우리를 지배하는 거짓 왕들을 몰아내고 참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글_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1-24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주님의 날, 표징을 알려준 요엘 예언자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다’라는 속담의 유래는 메뚜기는 여름에 한창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나왔다. 누구나 어느 한 시기에만 번성할 뿐, 영원하지는 않으니 겸손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때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마구 날뛰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는 벼의 잎을 먹으려고 몰려오는데 벼잎이 성장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메뚜기의 서식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의 저지대, 초원지대에 가장 많이 산다. 최근에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인도, 브라질 등에서 메뚜기떼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줬다. 2004년 가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메뚜기 떼가 농작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우는 막대한 피해를 줬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조선 시대에 메뚜기(풀무치)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무리가 1000억 마리라면 상상이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메뚜기는 고단백 음식으로 레위기에는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벌레로 등장한다.(레위 11,22 참조) 메뚜기떼가 앞에 등장하는 장면 때문인지 메뚜기 하면 요엘서가 떠오른다. 요엘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다. 정작 요엘서에는 오직 “프투엘의 아들”(요엘 1,1) 외에는 그에 대한 단서가 될 내용은 전혀 없다. 요엘 예언서를 읽어보면 그가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이 추측할 수 있다. 요엘은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다.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주님의 응답과 축복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결국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이 그렇듯 안정기에 들어가면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아진다.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언급하며, 먼저 사제들에게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고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과 멸망이 순식간에 들이닥치듯 다가온다는 것이었다.(요엘 1,15 참조) 성경에서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표징으로 나타난다, 요엘은 당시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 차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한 것것이다. 요엘은 하느님께서 심판도 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준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도 많은 표징, 즉 사인(sign)을 본다. 야구 게임에서 보면 사인을 못보고 잘못 이해해서 아웃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 인생도 똑같다. 사업이나 인간관계 등 교훈이 되는 표징을 지나쳐 인생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24

[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 신앙 언어, 유일하고도 불완전한 도구 신앙은 체험에서 출발합니다. 체험이 신앙이 되려면,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된 체험이 이야기(발화)되어, 신앙은 전해지고 기억이 재생산됩니다. 신앙은 체험이고, 체험의 해석이고, 여러 사람이 빚어낸 해석의 나눔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체험을 포착하고, 해석하고, 발화하며, 보존합니다. 언어는 체험과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본질이 아니라 도구(수단)입니다. 하지만 신앙행위는 언어 없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본질적 도구입니다. 게다가 언어는 다른 도구가 없는 유일한 도구이지요. 신앙에 있어 언어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라고 해서 완전한 도구는 아닙니다. 언어는 불완전합니다. 성서에는 첫 번째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는다고 그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언어는 시대에 얽매여 있지요. 수천 년 전 사람들은 삶의 모습과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고, 언어에는 시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아무리 잘 번역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바로 와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묵시문학,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언어 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이런 투의 언어를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 유다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성전(聖殿)의 파괴,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전쟁과 반란 등은 모두 유다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인들은 묵시문학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당연히 묵시문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묵시문학의 표현들을 가져다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이면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첫 번째 신앙인들의 체험도 있습니다. 기원후 66년,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뒤,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의 몰락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날과 그 시간’을 떠올렸던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들은 물려받은 언어로 신앙을 표현했고, 자신들의 체험과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파국 이후에도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남긴 언어를 더듬어가며 그들의 체험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두워진 해와 빛을 잃은 달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식과 월식은 지루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이지요. 혜성의 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은 문자가 시간과 공간을 건너 다리 놓고자 합니다만, 그 사이는 너무나도 멉니다. 어제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외치고 있으나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시대에는 분명히 잘 작동했을 겁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등불에 마음을 기대놓고 펜으로 이야기를 수놓아가는 복음사가는, 200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마주할 우리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의 질문을 도모하지 않았을 겁니다. ■ 일상과 성찰: 신앙언어가 담아야 하는 것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어디서나 잘 자랐다고 하지요. 유다인들은 그 그늘에서 쉬고 어울리며,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을 겁니다. 말하자면, 무화과나무는 일상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일상과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복음사가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사가는 당대를 읽고, 그런 읽기에서 나온 성찰을 언어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낡고 빛바랬을지라도, 시대를 읽고 신앙을 성찰한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신앙을 찾아 나갈 수 있겠지요. 우리의 일상을 유심히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이런 순간을 ‘묵시문학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은사 신부님이 소임하시는 성당에 가는 길에는 예배당 건물을 그대로 살린 카페가 있습니다. 지을 때는 하느님의 집이었겠으나, 팔 때는 교회건물이었을 그 카페를 보면서, 오늘의 종교현실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내일을 가늠합니다. 이웃 교구는 점점 고령화되고 소멸되어 가는 농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웃 교구의 형제들과 만나, 공동체의 상황과 고민을 나눌 때면, 그들은 이미 교회의 미래를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찾은 그런 순간들이 여러분에게도 있겠지요. 많은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길어낸 깨달음을 살아있는 언어에 담아 고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언어들이 쌓여 대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언어로 담론을 엮어가는 곳에서, 파국 너머의 신앙이 싹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압살롬 왕자

‘삼일천하’로 불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開化黨)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守舊黨)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일종의 쿠데타이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민 씨 친인척들과 부패 관리들을 처형하고 축출하였다. 12월 6일에 개화당은 중국 내정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민들의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변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갑신정변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이해가 적었고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많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중흥을 위해 구습의 봉건체제를 변화를 시도했던 혁명이라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긍정적 가치를 두고 있다. 주동자 김옥균은 외국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종로거리에 걸렸다. 한 영화의 대사 생각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은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어릴 적에 죽었다.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타마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꾀병을 부려서 병간호를 위해 찾은 타마르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 한참 후 사랑이 식은 암논은 타마르를 쫒아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압살롬은 암논을 처치할 복수를 계획했다. 다윗 왕도 암논이 타마르에게 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부하의 처인 밧 세바를 빼앗아 아들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암논에 대한 징계는커녕 오히려 다윗의 마음이 암논에게 기우는 것을 눈치챈 압살롬은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 사건으로 압살롬은 국외로 나가 3년간 타향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압살롬이 돌아왔지만 다윗은 문전박대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초조해진 압살롬은 자기의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드디어 일으켰다, 압살롬은 큰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압살롬의 책사였던 후사이라는 인물은 사실 다윗의 첩자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추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전투 경험이 많은 다윗의 정예병들은 압살롬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출정하는 부하 요압에게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자지만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통곡했다.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책임이 있는 르하브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13세에 가출을 했고 평생 애정 결핍에 목말랐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는 교육은 최소한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유교 경전의 기초지식을 배우다 중단하고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마오는 잦은 구타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로 가서 일하면서 외화도 벌고 동시에 외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마오쩌둥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여비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북경대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구열이 높은 마오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인 책더미 안에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고대의 제왕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정무를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의 역사서를 독파하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함구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지만 르하브암도 겉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안으로 품고 후일을 도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 제4대 국왕인 르하브암(기원전 931~913년) 때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다. 그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다. 솔로몬으로부터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솔로몬의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 등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로보암을 앞세워 부당한 부역과 높은 세금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르하브암은 사흘 뒤 답변하겠다고 하며 솔로몬을 보좌하던 관료들과 논의했다. 관료들은 솔로몬왕 때 세금이 너무 과했다며 예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에 긍정적 답변을 줄 것을 권고했다. 르하브암은 자신과 함께했던 소장파 신하들과도 회의를 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백성들을 너무 풀어주면 새로운 왕을 우습게 보며 권위가 실추된다고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조언했다. 르하브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신하들을 만났는데 인생의 최고 악수(惡手)를 두었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지도자는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부은 셈이다. 이미 실망으로 다윗 가문에 등을 돌린 10지파는 분노하며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제부터 너나 잘 하세요’하며 떠났다. 르하브암의 통치 영역 안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 르하브암은 부역 감독으로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죽여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르하브암 왕도 위기를 느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였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0

[말씀묵상]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입니다. 매년 지내는 평신도 주일이 동료 평신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에 세례를 받은 저는 한동안은 평신도 주일이 뭔지 모르고 그냥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매년 한 번씩 본당 사목회장이 강론 시간에 본당의 현황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좀 더 알게 되고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이날의 중요성에 비해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평신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바라보시고 과부의 헌금이 갖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저는 율법학자의 태도와 과부의 봉헌을 통해 예수님이 말하시고자 하는 신앙인의 삶, 특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지 질문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율법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단죄합니다. 또한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옳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자신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동일시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마저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는 길게 합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모습은 종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믿고 숭배합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가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저주받은 삶을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도움받을 사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험한 일들, 다른 사람들의 멸시하는 듯한 시선이 존재하는 슬픔이 배어 있는 삶입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망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 그것도 생활비 전부를 다 넣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이런 봉헌은 어떤 마음에서 가능한 것인가요? 과부로서의 가난한 삶이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깊게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이 비참하더라도 그 너머에 희망이 있음을 보는 듯합니다. 그녀에게 세상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생활비 모두를 봉헌하지 않았을까요? 평신도 주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생긴 날입니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하고,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현대세계의 복음 선포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합니다.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활동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간혹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을 교회 봉사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거나 기도와 성사 생활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삶은 평신도의 삶이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로서 봉헌하는 길입니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듣고 일상을 통해 삶을 봉헌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봉헌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가 보여주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삶이 녹록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신앙의 여정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여정을 동반하는 공동체는 서로 기도해 주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며 함께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또다시 맞이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이날을 계기로 모든 신자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의식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삶 안에서 드러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주일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온 신자들이 1년 동안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애씀에 대해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선교 사명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을 활발하게 나누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그럴 때 많은 이가 평신도로 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우리 모두가 교회임을 공감하며 우리가 받은 사명과 새로운 전망 안에서 일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신도 주일을 지속적으로 지내며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진정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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