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힘과 용기의 지도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시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전사로서 용맹하게 가나안의 각지에서 계속 싸우며 결국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찰하고 전략을 세워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세지웅(希世之雄)이란 사자성어는 난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보면, 때에 맞는 지도자가 나타나 활약하는 것은 그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는 큰 행운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지도자라고 하면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사(戰士)형 리더였다. 이미 오래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여호수아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한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실제로 국가를 세운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모세는 그를 무척 신임하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다.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많은 공을 쌓았고 실전 경험을 터득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측근으로 이집트 탈출을 하면서 광야 생활 내내 큰 공로를 세운 충직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 땅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광야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모세에 대해 반란이라도 할 기세였다. 게다가 이들이 맞이한 가나안에는 만만하지 않은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가나안에 있는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전투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필패이다. 이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 들어갈 수 있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하고 이집트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환경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이 제대로 먹힐리 없었다. 오히려 전투를 독려하는 여호수아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에서 포기해 버리고 모험에 나서지 않는 지도자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여호수아의 용기 있는 행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는 무엇보다 힘과 용기를 가지라고 하며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에서는 맨 앞장서서 싸우는 힘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8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4-2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명예와 재물에 빠져 타락한 예언자 발라암

예전에 사목했던 본당 중에 주변에 무속인들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성 무속인이 예비자 교리에 등록했다.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리를 들었고 시간이 흘러 세례식을 앞두고 있었다. 개인 면담 시간에 그는 “그동안 너무 심한 어지러움과 두통과 구토에 시달렸”면서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특히 주변의 신자들이 함께 기도해 주어서 다행히 오늘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어 “신자들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무속인들도 정말 무섭게 열심히 기도한다”며 알듯 모를듯한 이야기를 했다. 무속인을 찾은 사람에게 예언을 해주면 그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무속인도 산속에 올라가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금식하면서 자신이 모시는 신(神)에게 기도를 바친다고 한다. 점술이 맞지 않으면 밥줄(?)이 끊긴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모든 고통에서 깔끔하게 벗어나 열심히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요르단 건너편 모압 평야에 진을 쳤는데, 모압 왕인 발락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의 기세가 등등했다. 그 숫자도 너무 많아 겁에 질릴 정도였다. 모압 왕은 당시 명성이 자자한 점쟁이 발라암을 불렀다. 그러나 처음엔 발라암이 순순히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끈질기게 부르자 결국 발라암은 왕이 보낸 관리들을 따라나섰다. 왕은 발라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주면 무엇이든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발라암은 제단을 쌓고 황소와 숫양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발라암이 왕에게 점술 내용을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소원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상심한 왕은 발라암에게 세 번씩이나 장소를 옮겨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제사를 지내게 했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라암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불행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왕은 할 수 없이 아무런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발라암에게 돌아갈 것을 분부했다. 그러자 발라암은 왕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패시키는 비법을 가르쳐주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고, 예쁜 모압 여자로 유혹해 죄를 짓게 하라는 것이었다. 발라암의 비법이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게 되어 수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발라암도 결국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발라암은 다른 예언자 못지않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결국 명예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예전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점술이 발달하고 번성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닥쳐올 화근을 없애줄 방법을 찾으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 성향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점술에 여전히 매력을 느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모세의 대변인 아론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대목은 미국 역사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가장 위대한 연설로 평가된다. 명연설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국민을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다. 2004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3박4일 동안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인들은 당원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보통 정치가들의 연설은 지루한데 정치신인 버락 오바마의 연설에는 기립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고 단 몇 분 만에 무명에 가까웠던 오바마는 벼락스타가 되었고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거절할 이유로 자신은 입이 둔하고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형인 아론을 협조자로 보냈다. 아론은 말을 아주 잘하는 연설가였다. 아론의 출중한 연설 실력과 여유는 파라오에 대항해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킬 때 유감없이 잘 드러났다. 그래서 말을 잘 못하는 모세에게 아론은 모세의 최고 대변인이었다. 아론은 동생 모세를 대할 때도 거들먹거리거나 교만하지 않고 지도자라고 부르면서 겸손한 자세를 가졌다. 아론은 순종적이고 온유한 성격을 지녔는데 이러한 마음 좋은 사람의 단점은 다른 이의 말에 잘 휘둘리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지닐 때도 많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산으로 들어갔을 때 정치 공백을 아론이 맡게 되었다. 광야 생활에 지친 백성들이 모세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자연히 불평불만이 대단했다. 많은 백성이 아론에게 몰려왔고 백성을 지도할 신을 만들자며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성경에는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에 쉽게 응답하여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 협조한 이유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상상을 해보면 모세가 없는 틈에 백성들의 불평을 들으며 혹시 권력을 탐한 것은 아닐까?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 사건을 보고 크게 화를 낼 때 아론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했다. 사실 그에게는 화난 백성의 요구를 거절할 용기도 애초에 없었다. 어떤 사람의 참다운 모습은 책임을 져야 할 때 나타난다. 특별히 정치지도자에게 책임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모세와 아론은 형제이면서도 성격에서 차이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실제로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모세는 형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맡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봉합하고 공동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모두가 십인십색이다. 그러면서도 공존하려면 타협과 양보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타인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존은 시작된다. 다른 이가 나와 성격과 사고방식, 가치관 생각이 다른 것을 너무 적대시해선 안 된다.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가야 하는 공동체의 같은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14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이야기로 부활 체험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지만 다른 제자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저자 루카는 두 제자의 신원보다는 그들의 행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들이 함께 길을 가며 근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차근차근 복기하고 있었고, 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세밀히 전해줍니다. 절망감에 포획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흔하고 자잘한 우리 인생살이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불쑥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는데,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두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셨다’ 그리고 ‘함께 걸으셨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수난의 시간에 도망갔던 제자들, 두려움에 숨어 있는 제자들 그리고 무덤 곁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먼저 찾아가셨음을 성경은 들려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먼저 다가가셨고, 절망에 끌려 들어간 그들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리 역시 절망과 실의에 휩싸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은 그늘 드리운 삶에 큰 위안이 되어 줍니다. 생면부지 낯선 이가 ‘무슨 일이냐?’며 던지는 질문에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두 제자는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그가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는 볼멘소리를 합니다. 제자들은 낯선 이가 탐탁지 않았지만, 그분의 거듭된 질문에 그간 세간을 뜨겁게 달궜던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의 입을 빌려 예수께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24,19)이셨음을, 또 그분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셨는지 그 도시와 온 이스라엘이 알고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께 걸었던 기대와 비극적 최후가 빚어낸 절망감과 좌절까지 속마음을 모두 비워냅니다. 덧붙여 여자 몇몇이 전해준 부활 소식과 빈 무덤이 초래한 불안과 혼돈스러움도 쏟아내었습니다. 그러자 낯선 동행자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서를 두루 인용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24,27)하시며 그들의 둔한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 서야 영광 속에 들어가신다”(24,26)는 것입니다. 얽힌 타래를 풀어내는 가르침으로 그들 마음에 아슬아슬한 희망이 시작되려는 찰나,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적잖이 인상적이었던 낯선 이가 더 먼 길을 가려는 듯 하자 그들이 그분을 붙잡습니다. 제자들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기운과 매력을 지닌 낯선 이와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분이 “빵을 들고 찬미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24,30) 모습에 지난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 순간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루카는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알아봄’은 시각적 작용을 통한 알아봄이 아니라 이성적 작용을 통한 알아봄입니다. 제자들의 알아봄과 동시에 예수께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지만, 주님은 이제 그 신비로운 만찬을 통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알아봄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그들이 낯섦을 받아들인 데에 있습니다. 이 낯섦과의 만남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흔의 의미를 심도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에서 보듯이 이미 길에서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만찬의 ‘친교’에서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지만, 시각적으로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낯선 이에게서도, 외로운 이웃에게서도 만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십니다. 객관적이고 파편적 이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되고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두 제자는 즉시 절망으로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역전이 제자들에게도 일어났음을 봅니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 다른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경이로운 체험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은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떠나갔던 제자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자신의 체험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부활 신앙의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고 풍성해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셨을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우리도 말씀 안에서 마음 뜨거워지는 날들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4-14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어떤 의심을 대하는 태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토마스가 모진 말을 내뱉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제야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서양말에 ‘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말이지요. 결정적인 증거나 체험 없이는 어떤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로 토마스는 불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조금 불편합니다. 토마스를 그저 의심 많은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토마스의 의심을 이렇게 희화화해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토마스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의심의 이유 전승에 의하면 토마스 사도는 후일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할 때 인도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같이 공부하던 프랑스 신학생이 농담을 건넸습니다. “인도의 수호성인이 토마스이니, 아마 인도 신앙공동체는 의심이 많지 않나?” 웃자고 던진 말에 신부님께서는 죽자고 답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주셨지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는 동안 바쁜 아버지가 급히 집을 다녀갔다고 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다른 가족 모두가 엊저녁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고 아무리 아이에게 말해도, 아이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혹 믿는다고 해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인도교회 사람들은 의심하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오히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이와 같이 깨끗하고 간절해서, 생떼를 쓰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께 뜨겁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지방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제자들은 말립니다. 그곳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오히려 다른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제자들이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두려워 숨어있을 때, 토마스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토마스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제자들이 죽음이 두려워 숨었을 때 토마스는 밖으로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과연 토마스의 의심을 불경하다 하겠습니까. 그 의심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 자기 자신 밖에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토마스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요. ■ 의심도 쓸모가 있나요 우리는 사도들이 건넨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사도들처럼, 주간 첫날 바로 이 주일에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토마스와 같이 뜨겁고 순수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과 희망의 이면에는 의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하게 되기는 하는 걸까요. 토마스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사람. 어떤 상황과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신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의심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의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의심은 무한자 하느님을 마주한 유한자 인간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동안 자신의 의심을 견뎌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의심을 도구 삼아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은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신의 의도를 덧붙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셨던 것처럼, 토마스는 자신의 부끄러운 의심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모든 것을 기록하여, 우리를 믿음에로 이끌고 있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4-0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

중고등부 시절 소풍과 단체 영화관람은 가장 신나는 시간이었다. 당시 대작들로 꼽히는 유명한 작품들을 단체 영화관람으로 많이 보았다. 여학교에서 같은 시간에 관람 계획이 잡히면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온 학교가 술렁거리기도 했다. 찰턴 헤스턴이 모세로 출연한 영화 ‘십계’도 보았지만, 사실 그때는 성경의 배경을 잘 모르니 어떤 영화였는지 이해가 쉽지 않았다. 다만 흰 수염이 긴 모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기둥 사이로 탈출하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지도자가 되어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모세는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의 구원자로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탈출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역사 한가운데 있는 모세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처음으로 세계사에서 탄생시킨 장본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탈출기 전반을 읽어보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의 일가는 평화롭게 생활했지만, 시간이 흘러 요셉을 모르는 새 파라오가 등장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이집트로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늘어나자 파라오는 위협을 느꼈다. 이스라엘인을 박해하고 남자아이들마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고 마침 강가에 나온 파라오 딸의 눈에 띄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인데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모세는 약 35년간 이집트 궁정에서 왕손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이집트 자체를 뒤덮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최악의 상태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태어났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모세는 파라오 람세스의 신임을 쌓고 지냈다. 어느 날 동족인 노예들을 박해하는 이집트 경비병과 시비가 붙어 그를 죽였다. 졸지에 모세는 광야로 피신해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었다. 광야에서의 인생 여정은 모세가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특급 수업 과정이 되었다. 광야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히브리 백성들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도록 계시를 내린다. 모세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펄쩍 뛰며 거절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라며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땅 탈출이라는 ‘임파서블’한 명령을 내렸다. 모세는 진정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느님은 인간의 결점까지도 이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07

[말씀 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전하는 복음서의 첫 이야기는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사람들이 놀라고 모두 환호하는, 그런 기쁨과 경탄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담담하게 ‘빈 무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이를 공통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복음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부활의 감동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간 첫날, 즉 유다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놀라고 두려워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을 보고 놀라고 혼란스러웠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는 못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부활에 대한 복음이 시작할까요?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간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충격이 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는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갑니다. 어떤 마음에서 그녀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덤으로 발걸음을 향했을까요? 어쩌면 소리 내어 주검 앞에서 통곡하지 못해서 혹은 그리움에 눈물지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잊지 않고 어둠이 채 가기도 전에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그녀는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제자입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이 부활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처음 마주한 것은 텅 빈 무덤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누가 선생님의 시신을 훔쳐 갔는지 두려움도 듭니다. 죽어서조차 선생님은 반대자들에게 표적이 되어 해코지당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들 역시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큰 환호를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온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갑작스럽게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가 외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가 보니 여인의 말처럼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시체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고 수건과 아마포가 개켜 놓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욱 혼란에 빠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부활에 대한 첫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일까요? 제자들이 부활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의 죽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다인 대부분의 기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지도자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누가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툴 뿐 아니라(루카 22, 24) 제베데오 아들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좋은 자리를 미리 부탁합니다(마태 20, 20~21). 그렇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정치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통치할 것을 기대했으나 이런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으로 살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자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무력하게 우리의 죄와 어둠을 끌어안아 주시는 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간 사랑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리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이며, 그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기대와 욕망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죽음 너머에 있는 예수님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가 ‘죽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인생이 제자들의 생각처럼 실패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살아간 사랑이 현실적 힘 앞에서 무력해 보이지만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초대입니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한 삶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빈 무덤’을 묵상하면서 세상의 판단과 달리 결국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이 떠오릅니다.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사랑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길이 있고, 그런 사랑의 길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의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이 동반하는 따뜻한 봄길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따뜻함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3-3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 이겨낸 요셉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호사다마‘(好事多魔),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우리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사자성어(四子成語)이다.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자주 쓴다. 그 유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변방 노인의 말(馬)에서 나온 말이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던 중국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가 기르던 말 한 마리가 어느 날 도망가 버렸다. “말이 도망가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라며 위로했다.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오히려 담담했다. 얼마 뒤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놀라며 부러워했지만, 노인은 이 일이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며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복이 될지 어찌 알겠냐며 대답했다. 그 후 전쟁이 일어나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징집되었는데, 장애를 지닌 노인의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오히려 목숨을 지키게 되었다는 고사(古事)이다. 성경에서 이런 고사성어들이 잘 맞는 인물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라 생각한다. 그는 한마디로 드라마같은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다. 야곱은 사랑했던 라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요셉을 드러내놓고 편애했다. 당연히 다른 아들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결과가 결국 요셉에게는 고통과 고난의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다른 형제들은 기회를 잡아 요셉을 이집트 땅에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오히려 좋게 작용하여 결국에는 이집트의 총리에 올랐다. 요셉의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왔다가 첩자로 몰려 문초를 당하는 자리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재회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형들이 고향으로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왔을 때 요셉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했다. 그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끝은 모두 좋았다. 요셉은 어떤 과정에서도 실망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요셉은 사람이 일을 아무리 잘 계획해도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그의 삶에 펼쳐진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지탱해준 가장 큰 힘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선조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이었다. 신앙인의 삶을 보면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고난과 실패, 죄까지도 선용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는 분이시다. 우리도 요셉의 믿음을 배운다면, 매일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면 결국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요셉을 왜 구약성경에서 가장 착하고 훌륭한 믿음의 인물이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3-31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유학 시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조그만 마을 성당에서 성주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특별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행렬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행렬은 성당 마당이 아닌, 마을 광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성지 주일 아침, 사람들은 전통 복장을 입고 손에 성지가지를 들고서 마을 광장에 모였습니다. 곧이어 주례 사제의 인도로 행렬 예식은 시작됐고, 부제의 행렬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은 시작됐습니다. 성지가지로 장식된 십자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이어 사제와 부제, 복사들, 관악기 밴드와 기수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성대한 행렬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다소 낯선 이국적 풍경이었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했듯이, 20여 년 전 오스트리아 마을 주민들도 환호했고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합니다. 오늘 축복하는 성지가지는 2000여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며 흔들었던 그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의 행렬은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하는 하느님 백성의 행렬이자, 순례자의 발걸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을 마치면, 이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중 하나(제1독서: 이사 50,4-7)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르 14,1-15,47)가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습니다.(요한 19,19-20과 비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히브리말, 라틴말, 그리스말로 기록)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절,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은 죄명이 적힌 나무패를 들고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죄 명패를 죄인의 십자가 위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이것을 본 주민들이 죄인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는 통치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맨 위에 붙어 있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나무패는 로마 제국에 맞서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국사범의 죄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고 있으며, 동시에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갈망하는 유다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오시기 전,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마르 15,2.9.12) 이 칭호로 빌라도는 예수님과 유다인을 조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자기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유다인들이 로마 제국을 대항하여 품은 자유의 소망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오늘 거룩하고 장엄하게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에서 만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임금’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손에 가지를 들고 흔들며 암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이시다.”(따름 노래 1) 그러나 주님의 수난기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했던 임금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분의 왕좌는 십자가 나무였고, 그분의 왕관은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분의 통치 방식은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일치와 평화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빰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제1독서: 이사 50,5-6) ‘고난 받는 종’을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성됐습니다. 전례시기에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도록 초대받는 거룩한 주간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강론지침」은 성주간을 위한 길잡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주간에 교회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주간의 전례 거행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바로 그 파스카 신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77항) ‘파스카 신비’는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실체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더욱더 요원한 목적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으로 뛰어보라는 요구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영장 다이빙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영장 물속은 깊고 그곳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물속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포는 우리의 발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사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희생과 고통이 없다면, 영광 또한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이 드러나는 ‘파스카 신비’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거룩한 주간, 성주간을 보냅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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