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의 구조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요구한다. 대부분 주석서들의 첫 장은 요한묵시록이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이러 저러한 순서로 적어나간 글이라고 소개하는 이른바 서술의 ‘외형적 구조’에 관한 것을 다룬다. 요한묵시록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고,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약’이기도 해서 주석학자들마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한묵시록은 역사서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연대기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구약의 역사서처럼 어떤 임금이 즉위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갔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어디서 언제 태어나셨고 갈릴래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일과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결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게 요한묵시록이 아니다. 요한묵시록은 두 개의 크게 다른 문학적 장르를 선보인다. 2장에서 3장까지의 일곱 개 편지와 4장에서 21장까지의 묵시문학적 환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학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편집이 일곱 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와 모임 안에서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나갔고, 이후 일곱 개의 편지들이 소개하는 내용들을 묵시문학적 상징들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개한 4장에서 21장까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처한 현세적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여겼고 4장에서 21장까지는 그 현세적 상황에 대한 영성적 해석이라고 이해했다. 요한묵시록의 본격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 4장에서 21장 8절까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어린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봉인과 일곱 개의 나팔 이야기(4,1-11,19)가 첫 번째 부분이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나서 펼쳐지는 악의 세력들의 서술이 두 번째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왕관을 쓴 여인, 용, 두 짐승, 그리고 대탕녀 바빌론과 용의 멸망을 다루는 여러 장면들로 구성된다. 처음 일곱 개 편지는 문학적 장르가 바오로 서간이나 가톨릭 서간과 닮아 있고 대개의 내용이 훈계나 교훈에 관련된 것이라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4장에서 21장까지 역시 그렇다.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대탕녀 바빌론을 향하는 두 번째 부분과 대립하는 구도로 펼쳐지는데, 이것 역시 이야기의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주체, 곧 어린양과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묵시문학적 설명 혹은 해석으로 읽혀진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있어 또 다른 전통적 관점은 숫자 ‘7’과 관련이 있다. 일곱 개의 편지(2,1-3,22), 일곱 개의 봉인(6,1-8,1), 일곱 개의 나팔(8,6-11,19),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16,1-21) 순으로 요한묵시록은 짜여져 있다는 것. 각각의 ‘7의 시리즈’는 그 시작과 마침이 모두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상은 이른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는 공간이어서 요한묵시록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 설화적 흐름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고 풀어놓고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이해하는 데 각각의 ‘7의 시리즈’는 처음과 끝 사이에 세상의 비참함이나 한계성, 그리고 악의 상황을 천상의 공간과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7의 시리즈’가 끝나면 또 하나의 ‘7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구도로 짜여진 요한묵시록은 네 번에 걸쳐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은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이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서술의 본질이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살피다 보면, 요한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해서 ‘주 예수여, 오소서’라고 마치는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면서 마주치는 유혹과 일탈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에의 지향성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탕녀 바빌론의 악함에 맞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향한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천상의 삶이 이 혹독한 지상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요한묵시록은 찬찬히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고, 이미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갈망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수께서 오실 그날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현실의 무엇이 이미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기 위해 요한묵시록은 여전히 읽혀져야 한다는 것. 요한묵시록의 구조는 그래서 우리 삶의 ‘오래된 미래’에 예수님이라는 변치 않는 분을 끊임없이 상상하게끔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계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안에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2025-01-12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 저자, 요한

‘요한묵시록은 누가 썼을까’라는 물음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한 인물을 찾으려 애쓴다. 예컨대, 파트모스섬에 갇힌 사도 요한을 떠올리는 것이다. 2세기의 유스티노나 이레네오 교부의 증언을 시작으로 교회는 사도 요한을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원로 요한’ 혹은 ‘마르코라는 요한’(사도 12,12.25; 13,13 참조)으로도 소개되기에 역사적 저자에 대한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혼재되어 흩어진다. 물론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묵시록의 저자가 같은 요한인가’라는 질문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현대 주석학의 발전으로 요한묵시록이 한 시대, 한 사람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 이후 요한묵시록은 이른바 ‘요한계 학파’라는 어떠한 사상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의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이 소개하는 저자의 문학적 실루엣이다. 요한이라 명명된 저자는 ‘하느님의 종’(묵시 1,1 참조)이자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이고 동반자’(묵시 1,9 참조)이다. 또한 자신이 본 것을 직접 써 내려가는 작가의 면모 또한 요한으로 소개된다.(묵시 1,11.19 참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요한은 모든 민족에게 ‘예언’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기도 한다.(묵시 10,11 참조) 그러나 그는 파트모스섬에 갇혀 있다. 형제와 함께 환난을 겪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써 보내야 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요한은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떨어져 있다. 그의 공간적 단절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증언은 역설적이게도 두 가지 대립 개념을 하나의 통합적 사유로 조망하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증언 때문에 요한은 ‘환난’을 겪고 있고, 그럼에도 증언을 통해 독자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한다는 것.(묵시 1,3;22,7 참조) 요한이라는 인물의 묘사는 물리적 거리감을 기반으로 한 어느 영웅의 희생적이고 특별한 삶을 기리는 데 소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적 일치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일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수많은 형제와의 일치로 확장되고, 그 일치를 요한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환치해서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요한은 특정 시공간의 범주를 뛰어넘어 신과 인간의 일치를 위해 보고 쓰고 선포하는 행복의 매개체다. 요한을 따라 요한묵시록을 읽어나가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환시는 신과 인간의 일치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장치가 된다. 요한이 처음 본 ‘사람의 아들’이 대표적 경우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7-18) 요한이 본 것은 특별하고 생소한, 그리하여 흔한 유다의 묵시문학들이 제공하는 천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다만, 여느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신적 신비를 보게 될 뿐이다. 종말의 시대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람의 아들’(다니 7장 참조)을 예수님께 적용한 요한묵시록은 신적 신비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환시는 사람에 대한 사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신적 가치가 사람의 가치 안에서 어떻게 사유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요한이 갇힌 파트모스섬이라는 공간과 요한의 선포가 끝없이 펼쳐질 무한한 공간의 연결성에 대해 사유해 보자. 한 사람이 겪는 환난의 공간이 행복의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유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머물게 된 환난의 공간에서 요한은 이미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단절의 공간에서 이미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모든 대립과 단절을 뛰어넘는 ‘사람의 아들’을 보았고 전하게 된다. 단절이 초월이 되고 환난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건, 놀랍게도 철저하게 한 공간에 머물며 자신이 보고 듣고 쓰는 것에 집중한 요한 덕택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수많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지식이나 정보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제한적이고 한계적이라 해서 천상의 하느님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에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저항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우리가 천상적 삶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염두에 두는 입장에 선다면, 모든 인간적 삶과 거기서 오는 행복은 얼마간 부족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시공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제 삶의 환난을 기꺼이 짊어지며,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은 진솔하고 담담히 적어 내려갔을 뿐이다. 요한은 자신의 시공간과 다른 또 하나의 시공간을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어진 시공간을 저만의 왕국으로 만들지 않았다. 갇혀 있으되 열려 있는, 고요하되 수많은 말들이 이곳저곳에 울려 퍼지는, 그러한 자리를 요한은 파트모스에서 만들어 갔다. 제 삶에 두 발을 디디고 굳건히 서 있을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찬란하고 완전하게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제 삶에 가장 순수하고 진솔할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선명한 행복으로 그 삶 안에 육화할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5-01-05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상

신악성경의 마지막인 ‘요한묵시록’을 1장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며 묵상하는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와 함께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찰해 본다.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상상’(想像)이란 단어에 집착한다. 실제로 요한묵시록은 ‘상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Ιησοῦ Χριστοῦ)는 미래에 펼쳐질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다. 예전부터 유다 사회 안에 켜켜이 쌓여 온 신앙의 흔적들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예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어낸 게 요한묵시록이다. 요한묵시록이 적혀진 시절(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들었고 알고, 그래서 믿고 있던 터였다. 그분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어 요한묵시록을 쓰고 읽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고 이 삶을, 이토록 애틋하나 힘겨운 삶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까 ‘상상’하며 쓰고 읽고 간직한 게 요한묵시록이다. 대개 요한묵시록을 공부한, 혹은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주석서들을 찾기 마련이다. 주석서에 기록된 내용들의 대부분은 문법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열거, 또 아니면 구약 이곳저곳에 요한묵시록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를테면, 글의 ‘지시적 기능’에 충실한 것이 요한묵시록을 바라보는 주석서들의 흔한 경향성이다. 이 단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 상징은 이렇게 읽혔다 등등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요한묵시록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고, 대개의 신앙인 역시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이 지시하는(가리키는) 사건이나 사람, 혹은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게 사실이다. 그런 주석서의 내용들은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쓰고자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대해 간과할 수 없고 당연히 설명해야 하겠지만,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징과 표현들을 적어 내려가야만 했던 요한묵시록의 공시적(共時的) ‘의도’에 있다. 이 ‘의도’는 한 시대, 한 시절의 이야기로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많은 역사서들을 읽어나갈 때,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 어떤 교훈이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지 우리는 묻게 된다.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다.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묵시록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2000년 전 그들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 미래의 암묵적 독자들에게까지 열려 있다. 2000년 전 글인 요한묵시록이 당시 어떤 의미로 읽혔다는 주석적 분석은 필요한 것이나 지금과 미래의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꽤나 진부하고 게으른 일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께서 말씀하셨듯 ‘성경은 읽는 이와 자라는’ 역동적인 생물체고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독자를 만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는 모든 글의 본성이자 운명이다. 오늘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매몰된 주석서에 의존한 성경 읽기는 수많은 신앙인,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독자들의 다양한 읽기 앞에 필자 자신의 한계성과 편협함을 반성하는 게 옳다. 우리는 끝없이 요한묵시록을 읽을 것이고 그 읽기의 결과는 전혀 기대치 않은 신앙의 다양한 결과물들로 쏟아질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글의 문자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에 치중한 ‘주석’의 작업 너머 오늘날 우리에게 이 상징과 표현들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 것인지 캐묻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요한묵시록은 이 상징과 표현들을 통해 왜 이렇게 상상했을까’ 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사회적 사유와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한묵시록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는 것은 지난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흔적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님을 묻고 또 물어 얻어낸 것이 갈릴래아의 지형과 그분이 실제 하신 말씀, 혹은 그분의 연대기적 활동 흐름 정도라면, 요한묵시록을 해석해서 얻어낸 것은 천상과 지상, 태초와 종말의 시공간적 연대 안에 ‘어린양’으로서 늘 함께하시는 초월적 존재의 예수님이다. 역사의 예수님을 좇아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요한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 안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해석해서 얻어 낸 결과가 요한묵시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읽어나갈 요한묵시록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도대체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는 요한묵시록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내일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요한묵시록은 어떻게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주는가?” 요한묵시록에 “행복하여라”라고 하는 말마디는 총 일곱 번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묵시문학적 가치는 ‘완전함, 풍성함’ 정도로 해석되는데, 요한묵시록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완전하고 풍성한 ‘행복’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다. 필자는 가톨릭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동안 이 두 질문에 계속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을 통해 물을 것이고 그 물음의 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행복한 삶으로 전해질 것인가 또한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이 또 다른 우리 삶을 ‘상상’하는 신앙의 기폭제이자 신앙의 사회학적 전망이 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을 통해 간절한 기다림과 설렘으로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요한묵시록의 끝이 이렇게 끝나는 건, 바로 상상의 자유로움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아닐까. 이미 오셨지만, 아직 오셔야만 한다는 예수님은 그분을 이미 만났으나 아직 기다리는 우리 삶을 그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의 풍요로움으로 가꾸길 나가길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