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형의 클래식 순례] 레스피기의 <주님의 탄생을 위한 찬가>

어느덧 12월이 찾아왔습니다. 슬슬 2024년을 마무리해야 할 때지만, 교회력으로는 오늘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되니 새로운 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여러 작곡가가 대림과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음악을 썼지요. 오늘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작품을 한 곡 소개해드립니다. 20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의 칸타타 <주님의 탄생을 위한 찬가(Lauda per la Natività del Signore)>입니다.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지나치게 오페라에 쏠려있던 19세기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을 탐구하는 작곡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카셀라, 말리피에로, 피체티 같은 이들인데, 대부분 1880년 무렵에 태어났기에 ‘80년대 세대(Generazione dell’Ottanta)’라고 불렸습니다. 레스피기는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곡가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음악에서는 한발 물러서 옛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한 작품을 썼습니다. 특히 삶의 터전이었던 로마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등 이른바 ‘로마 시리즈’는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레스피기는 신앙심이 깊은 음악가였는데, 의외로 종교음악은 단 한 곡만 썼습니다. 바로 <주님의 탄생을 위한 찬가>입니다. 작곡가는 1928년 시에나의 한 유서 깊은 저택에서 열렸던 반다 란도프스카의 리사이틀에 참석했습니다. 란도프스카는 옛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를 현대에 되살린 선구자였는데, 악기와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은 레스피기는 옛 음악의 요소를 활용한 칸타타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와 적당한 대본을 조사하던 중 13세기 프란치스코회 수사이자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쓴 것으로 유명한 야코포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가 쓴 성탄 찬가를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칸타타를 썼습니다. 1930년 초연된 이 작품은 천사, 목동, 성모님의 시점에서 바라본 성탄을 그립니다. 목동들은 구세주가 태어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 아기 예수가 나신 마구간을 찾습니다. 목동들은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자기들 옷을 벗어 덮어드린 뒤 성모님의 허락을 받아 안고, 다 함께 기쁨의 찬가를 부릅니다. 레스피기는 후기 낭만주의풍 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 마드리갈, 인상주의 음악 등 다양한 음악 양식을 적절하게 섞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는데, 플루트와 오보에, 잉글리시 호른, 바순 등 목관 앙상블이 만드는 목가적인 분위기나 긴 호흡의 합창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노년에 접어든 작곡가가 표현한 성탄의 내밀한 기쁨과 소박한 정경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글 _ 이준형 프란치스코(음악평론가)

2024-12-01

대구가톨릭미술가회 50주년 기념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전’

한국교회 미술 발전에 힘써 온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회장 박혜원 소피아, 담당 지영현 시몬 신부)가 대구가톨릭미술가회(회장 장수경 베로니카)의 창립 50주년을 맞아 대구에서 ‘2024년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전’을 개최한다. 전시는 12월 3일부터 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6~10전시실에서 ‘친교로 하나되어’ 주제로 열린다. 3일 오후 3시 개막식 후 5시에는 대구대교구 주교좌범어대성당 1층 프란치스코성전에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가 집전하는 감사미사를 봉헌한다. 대구가톨릭미술가회는 대구대교구의 장기사목계획에 따른 ‘친교의 해’에 맞춰 전시 주제를 ‘친교로 하나되어’로 정했다. 지난 2021년 대구대교구는 교구 설정 120주년을 대비하기 위해 전 교구민이 한 방향성으로 살아가자는 뜻을 밝히며 말씀, 친교, 전례, 이웃사랑, 선교를 핵심 가치로 제시했다. 김도율(요셉) 지도신부의 작품을 포함해 전국 16개 교구 280여 명의 작가가 전시에 참여하며, 제27회 가톨릭미술상 수상작도 관람할 수 있다. 장수경 회장은 “이번 50주년 전시는 창립에 기여한 원로 작가들과 현재 가톨릭 신자로서의 예술혼을 표현하고 있는 작가들의 헌신 덕분”이라며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 작품들을 통해 위안과 치유를 얻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대구가톨릭미술가회는 국내 미술 단체들이 뿌리내리기 전에 같은 신앙을 지닌 미술인들이 자생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1974년 창립 전시 이후 매해 전시를 열어 예술 작품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2024-12-01

오롯이 주님과 대화하는 나만의 ‘기도 공간’ 전시

2025년 희년을 맞아 갤러리1898(관장 이영제 요셉 신부)이 12월 15~22일 특별전 ‘희망의 빛’을 연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각자 받은 ‘빛’을 되찾자는 의미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순례’, ‘기도’, ‘희망’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된다. 특히 ‘희망’을 주제로 한 전시는 2024년을 ‘기도의 해’로 보낸 전시 참가자 25명이 자신의 기도 공간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선보이는 자리다. 지난 2월 교황청 복음화부 세계복음화부서가 올해를 ‘기도의 해’로 선포하며 희년의 경험을 온전히 실천하기 위한 ‘기도 공간’에 대한 중요성을 선포한 데 따른 전시다. 전시 참가자인 ‘희망의 순례자’들은 저마다 성경과 묵주, 성물 등을 통해 ‘기도’의 의미를 관람객들에게 소개한다. 전시에서는 김유리 전례미술연구소장, 김진화 가톨릭미술해설사, 배요한 서울가톨릭청년미술가회장, 홍덕희 사진작가, 홍수원 보고재 대표 등 평신도와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진슬기 신부, 고승현 수녀 등의 기도 공간도 만나 볼 수 있다. 전시 참가자 가운데 김상아(드보라·서울대교구 명동본당) 가톨릭미술해설사는 올해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희년의 의미를 더했다. 첫영성체 때 받은 초와 세례 선물로 받은 성 다미아노 십자가 등을 내놓은 김 해설사는 “기도란 하느님께서 초대해 주신 시간과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최연소 참가자이자 초등부 복사단인 박서은(스텔라·수원교구 수지본당) 양은 예수님에게 쓰는 편지를 담은 복사노트와 수녀님이 준 부활 달걀 등으로 기도 공간을 꾸민다. 박 양은 “기도는 주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간곡히 부탁도 청하는 대화 시간이다.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은 처음이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에 참여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대교구 나종진(스테파노) 신부는 대학생 시절 견진성사 때 선물로 받은 묵주를 비롯해 예수성심상, 성모상 등으로 전시에 참여한다. 나 신부는 “기도는 나를 나에게서 벗어나 주님에게 이끌어 주는 ‘엑소더스’이자 ‘파스카’와 같다”고 전했다. 갤러리1898은 명동대성당의 성미술을 담은 희년 기념 일러스트 ‘순례’ 전시와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기도지향을 담은 일러스트 ‘기도’ 전시도 마련했으며, 21일에는 ▲희망의 묵주 만들기(이희정 작가) ▲희망의 초 만들기(이유리 작가) 등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이다. 전시를 기획한 갤러리1898 이지형(안나)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2025년의 핵심 가치이자 예수님을 뜻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관람객들이 전시를 통해 희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고 희년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2024-12-01

30일 이해인 수녀 ‘가을 편지 콘서트’

일생을 수도자로 살며 세상에 감사와 위안을 전해 온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발간 이후 약 50년 동안 받아온 사랑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이해인 수녀 가을 편지 콘서트’가 마련된다. 한국가곡방송이 주최하는 공연에서는 이 수녀가 삶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표현한 연작시 ‘가을편지’ 18편에 박경규(스테파노) 작곡가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 「편지」 전곡이 연주된다. 연가곡집 ‘편지’는 유럽의 대표 가곡인 독일의 리트, 프랑스의 멜로디, 이태리의 칸초네 등과 달리 우리 가곡과 가요의 중간인 대중가곡 형태로 작곡돼 한국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이날 공연에선 편지 이외에도 <강>(이해인 시, 박은회 곡)과 <대관령>(신봉승 시, 박경규 곡)도 들을 수 있다. 소프라노 강혜정(보나)와 바리톤 송기창(미카엘)·김성길, 피아니스트 이성하 씨가 출연해 아름다운 선율을 수놓을 예정이며, 공연의 사회는 방송인 안현모(리디아) 씨가 맡는다. 또한 이 수녀가 직접 참여하는 토크 시간도 마련돼 수도 생활 60년을 회고하며 수도 생활 가운데 만난 뜻깊은 인연과 영성 메시지를 전한다. 관객과의 즉문즉답을 통해 관객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해인 수녀 가을 편지 콘서트’는 오는 11월 30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열린다.

2024-11-24

구원 간절함 담긴 ‘착한 사마리아인’ 만나볼까

반 고흐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착한 사마리아인>(들라크루아 원작)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이 12년 만에 열리는 것. 이번 전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과 함께 고흐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오테를로의 크륄러 뮐러 미술관 단일 컬렉션으로 이뤄진다. 크륄러 뮐러 미술관의 소장 작품 가운데 선별된 원화 76점을 전시하며, 작품의 총평가액은 1조 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극적인 색채 대비와 강한 터치가 특징인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고흐는 1890년 5월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절,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보고 이 그림을 모작했다. 깊은 정신적 고통에서도 창작을 이어 간 고흐는 그림을 통해 구원과 영혼의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누가 우리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를 들었다. 고흐의 그림 가운데 사마리아인이 다친 이를 힘겹게 말에 태우는 역동적인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으며, 다친 이는 옷이 벗겨진 채 기진맥진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픈 이를 등진 채 길을 떠나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전시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 외에도 고흐의 작품 연대에 따른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네덜란드 시기(1881~1885년), 파리 시기(1886~1888년), 아를 시기(1888~1889년), 생레미 시기(1889~1890년),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년) 5개의 테마로 구성됐다. 고흐가 그림 수업을 배우며 첫 유화를 완성한 시기의 작품 <밀짚모자가 있는 정물화>, <감자 먹는 사람들> 등부터 <자화상>, <슬픔에 잠긴 노인>(영원의 문에서), <석고상이 있는 정물화>,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의 전경>, <씨 뿌리는 사람>, <꽃이 핀 밤나무>, <젊은 여인의 초상> 등 대표작들이 걸린다. 고흐가 예술가로서 10년간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11월 29일부터 내년 3월 1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다.

2024-11-24

[이준형의 클래식 순례] 퍼셀의 <환호하라! 눈부신 체칠리아를>

11월 22일은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체칠리아 성인은 특히 가깝게 느껴지는 분입니다. 바로 음악과 음악인들의 주보 성인이기 때문이지요. 성인은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3세기 중반쯤에 순교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음악의 성인이기 때문에 예부터 오르간이나 하프, 혹은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관련이 있는 기관이나 장소, 축제 등에 성인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로마에 있는 저명한 음악원 이름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이지요. 성인의 축일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음악가의 날’이나 음악 축제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인을 기리는 음악 작품을 연주하는 곳도 있었고, 음악가들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과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송가, 프랑스 작곡가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의 오라토리오가 있고, 요제프 하이든과 샤를 구노도 성인에게 봉헌하는 미사곡을 썼습니다. 20세기에는 체칠리아 축일에 태어난 벤자민 브리튼이나 제임스 맥밀런이 멋진 작품을 남겼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헨리 퍼셀이 1692년 발표한 <환호하라! 눈부신 체칠리아를>(Hail! Bright Cecilia)입니다. 17세기부터 영국에서는 큰 도시를 중심으로 체칠리아 축일에 음악회를 여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런던에서도 1683년에 런던 음악 협회(Musical Society of London)가 창립됐는데,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퍼셀에게 성인에게 바치는 작품을 의뢰해 축일에 연주했습니다. 그 후 퍼셀은 세 번이나 더 의뢰를 받아 작품을 썼는데, <환호하라! 눈부신 체칠리아를>은 그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퍼셀은 당시 영국 궁정에서 군주의 생일이나 결혼, 신년을 축하하는 음악이었던 ‘송가’(Ode) 형식을 빌려 성인을 찬미하는 음악을 썼는데, 가사는 니콜라스 브래디가 쓴 송시를 활용했습니다. 가사는 다양한 표현으로 체칠리아 성인에게 찬사를 보내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성인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음악의 힘을 찬미하는 뜻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도시 제일의 가수와 연주자들’(Best voices and hands in town)이 연주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퍼셀이 쓴 다른 송가보다 작품과 악단 규모가 큽니다. 합창 사이에는 사라방드와 미뉴에트, 파사칼리아 등 춤곡 리듬을 품은 아름다운 독창이 있고, 오보에와 리코더, 트럼펫 등 여러 악기가 가사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웅장한 합창을 대위법적으로 펼쳐내는 마지막 악장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정연한 형식과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조화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글 _ 이준형 프란치스코(음악평론가)

2024-11-17

할머니와 손자, 따로 또 같이 희망을 그리다

동양화가 할머니와 자폐성 발달장애를 지닌 팝아트 작가 손자의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청림 허옥순(클라라·서울대교구 석촌동본당)과 정도운(엘리야·서울대교구 세곡동본당) 작가가 그 주인공. 허 작가는 오래전 자신의 얘기로 운을 뗐다. “50대 중반 무렵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몸이 아프다 보니 마음에도 병이 나더라고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게 그림이었어요.” 신문에 난 ‘사회교육원 사군자반’ 광고 하나만을 보고 전북 전주에서 서울 홍대까지 올라와 처음 손에 붓을 쥐었다. 쉬이 오가기 힘든 먼 거리임에도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림에 매진하니 어느덧 몸과 마음의 아픔도 나아져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 사이 손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기를 희망한 가족의 바람에 따라 미술고에 진학해 한국화를 전공할 수 있었다. 졸업 이후 강남장애인복지관, 잠실창작스튜디오 등 기관의 청년 예술가 육성 프로그램 등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립하고 있는 정 작가. 그렇게 각자의 그림 세계에 빠져 시간을 보낸 둘이 이제 동료 작가로서 합동 조손전을 연다. 허 작가의 작품은 실재 경관을 담은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과 식물 등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림을 본 사람들이 ‘그림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제 손으로 직접 그리면서 그 섭리와 감사함을 느끼죠.” 정 작가는 주로 톡톡 튀는 색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나 보고 싶은 가수와 배우의 모습을 담은 팝아트 작품을 그린다. 인물 옆에는 앨범 트랙 리스트, 필모그래피 등을 빼곡히 적는다. 단순한 인물 그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최근에는 할머니가 그린 자연 그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 개인 SNS를 통해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 35여 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허 작가의 그림 시계는 아쉽게도 잠시 멈춘 상태다. 황반변성으로 인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진 것. 그럼에도 허 작가는 “자신만의 그림으로 길을 개척하고 있는 손자가 있으니 기쁜 마음뿐”이라며 “그간 그린 작품들을 손자와 함께 선보일 수 있어 기대된다”고 밝혔다. “힘든 시기에 그림으로 치유 받고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말하는 할머니와 “그저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재밌다”고 말하는 손자. 80대와 20대, 여성과 남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접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들은 ‘그림’이라는 희망으로 연결돼 있었다. ‘할머니와 나’를 주제로 하는 두 작가의 전시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개최되며, 12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강남구민회관 전시실에서 만나 볼 수 있다.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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