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시대 상황과 타협한 율법 예수께서 본래 정신대로 회복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