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주일 특집] 보편교회에서 활약하는 한국의 평신도

11월 10일 제57회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널리 가 닿도록 노력하여야 할 빛나는 짐을 지고 있으며’(「교의헌장」33항) 이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증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하는 날이다. 한국교회 평신도로는 처음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부회장에 선출돼 아시아교회 여성들의 연대와 세계 무대로의 진출 길을 넓히고 있는 박은영(이사벨라) 씨, 그리고 자신의 탈렌트를 십분 발휘하며 가톨릭교회의 새 역사를 쓴 세계주교시노드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 정태영(베드로) 씨를 통해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을 재조명한다. ■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박은영 부회장 교회 안 여성 역할과 위상 증진 강조 사제에 대한 존중과 수동적 태도는 달라…능동적 참여 필요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한국의 여성 평신도들은 어머니로서의 강인함과 더불어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만난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World Union of Catholic Women’s Organizations·WUCWO) 박은영(이사벨라) 부회장은 한국 여성 평신도만의 장점으로 ‘강인함’과 ‘열정’을 꼽았다. 여성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한 시노달리타스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여성 평신도들이 잠재된 열정을 이끌어 내 보다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박 부회장은 오랜 미국 생활 이후 2000년 귀국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가 비교적 수평적인 미국교회의 모습이 익숙한 박 부회장에게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낯설게 다가왔다. “레지오와 성모회 활동을 하면서 본당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음식 준비 등 보조적인 일에 국한된 것에 안타까움이 컸어요. 전통적으로 해왔던 여성 신자들의 역할만 유지하며 새로운 제안이나 시도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죠. 사제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수동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 스스로 교회 안에서 역할을 제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시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이후 서울대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와 인연이 닿은 박 부회장은 연합회 회장을 거쳐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이사를 지낸 뒤 2023년 부회장에 선출됐다. 한국교회 평신도로서 처음이자 비영어권 국가 출신의 부회장 임명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계교회 안에서 영어권이 아닌 나라들은 아무래도 연대의 끈이 느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로 임명되면서 가장 주력했던 활동은 아시아 교회의 연대와 그들이 세계 무대로 나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박 부회장은 교회의 주축인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은 ‘참여’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독려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시노달리타스의 정신과도 연결된다. 지난 7월 발표된 세계주교시노드 제2회기 의안집은 크게 개혁과 쇄신의 키워드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참여’와 ‘동반’이다. 특별히 교회 안 여성의 역할과 위상의 증진을 강조하며 “각국 주교회의는 우리 시대의 사목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여성들에게 주어진 은사와 성령의 은총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직무적, 사목적 지침들을 더 깊이 탐구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할과 위상이 높아진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박 부회장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장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역할이 커진 만큼 신앙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알려주는 봉사정신과 사랑 실천도 여성 평신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시노드 커뮤니케이션팀 봉사자 정태영 씨 한 달간 시노드 영상 제작 봉사자로 참여 경청하고 공감하는 대화 모습에 큰 감동…평신도 사명 되돌아봐 지난 10월 한 달간 보편교회의 심장 교황청에서 열린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인스타그램(synod.va)을 비롯한 시노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회의 모습과 대의원들의 인터뷰 등 다양한 영상이 한국인 청년의 손을 거쳐 매일매일 업로드됐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을 직접 촬영하고 다듬어 세계교회에 전한 주인공은 세계주교시노드 커뮤니케이션팀에서 비디오그래퍼로 봉사한 정태영(베드로·서울대교구 중앙동본당) 씨다. 영상 제작 전문 프로덕션에서 PD로 일하는 정 씨는 서울대교구 청년성서모임 연수 영상이나 살레시오 수녀회의 150주년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는 등 자신의 탈렌트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힘써 왔다. 현재도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콘텐츠팀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신부님이 시노드 봉사자 공고 소식을 알려주셨어요. 제 능력을 보편교회를 위해 쓸 수 있는 뜻깊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휴직을 해야 참가할 수 있어 고민도 했지만 다행히 회사에서도 흔쾌히 허락해 로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제2회기 개막부터 폐막까지의 모든 과정을 대의원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담아 전 세계에 전하는 일. 세계 각국에서 온 봉사자 17명과 함께 한 10월 한 달은 하루하루 새로움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줄곧 접하면서도 추상적으로만 와닿았던 ‘시노드’를 눈으로, 머리로 그리고 가슴으로 체험한 시간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노드의 대화 방식이었습니다. 세계 각 대륙에서 온 수백 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진솔한 이야기에 서로 귀 기울이며 공감하는 모습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줬습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대화가 최종문서라는 열매로 드러난 순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대화가 이런 것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정 씨는 시노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배운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믿음의 힘’이라고 전했다. ‘시노드는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는 그는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대화를 멈추지 않고 하나가 되어 가는 노력 그리고 그 길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고 시노드 정신을 실현해 나갔으면 한다”고 전했다. 보편교회 역사의 획을 긋는 시노드에 참여하며 청년 평신도로서의 역할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평신도는 교회를 세상 속에 전파하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성직자가 교회를 지탱한다면,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직장과 가정, 학교 등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만큼 이 사명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교황청에서의 봉사를 계기로 정 씨는 앞으로도 교회를 위한 영상 제작에 더욱 헌신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WYD 콘텐츠팀에서 활동하며 교회의 아름다운 순간을 널리 알리는 데 더욱 노력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전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정 씨의 글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 젊은 평신도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바티칸에서 보낸 한 달, 그간의 모든 걸음이 기적으로 느껴집니다. 시노드는 끝났고 삶은 계속됩니다. 그렇기에 시노드는 끝나지 않았음을 되새겨봅니다. 함께하는 여정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 사랑에 감동하며, 다음 걸음을 내딛습니다.”

[특별기고] 교회와 함께 걸으며 오늘을 살고 내일을 희망하는 청년 그리스도인

모든 세대의 청년기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거기서 형성되는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찾고, 삶의 방향을 탐구한다. 한국교회 청년들도 자신들이 앞으로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희망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한국교회사 안에서 청년들이 펼쳐온 역동적인 활동 모습을 살펴보고, 보편교회가 추구하는 청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분석하고자 돈보스코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 이진옥(페트라) 선임연구원이 기고를 보내왔다. 변방으로 나아가는 진취성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가톨릭 청년들은 언제나 교회의 중심에 존재하며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물을 온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평가하고 해석”(「사목 헌장」 62항)해 “현세의 시민 생활에 하느님의 법”(「사목 헌장」 43항)을 새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서로 연대하며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모든 형제들」 142항)를 세상 안에서 실현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가톨릭 청년의 역동적인 모습은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과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가톨릭 청년은 이 두 가지 활동을 통해 “무기력하게 근근히 살아가거나 마치 구경꾼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진취적”이고 “활기차게” 사회와 교회를 위해 살았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43항)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본당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스스로 모여 애국 청년 운동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경성교구 청년연합회’와 ‘남방천주공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청년 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교육·문화·사회 활동을 펼치면서 청년들의 의식을 고취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청년들은 문화활동을 통해 가톨릭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6·25전쟁 이후 청년들은 본당별로 주일학교나 야학을 설립해 교회 재건 사업에 동참했다. 이는 본당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한국에도 결성되면서 다시 활기를 보였다. 이 활동은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톨릭 청년 운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 운동은 교회 내에서 봉사활동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출현으로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의 활동은 빈민촌 무료 진료, 불우 청소년 선도, 영세민과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경영, 노동자 문제 해결 등 이때까지 교회의 활동과는 다른 실천적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 특히 17~18세 어린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를 파악해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두 단체의 활동이 특별한 이유는 활동 주체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년들은 두 활동을 통해 “직접 만나는 첫째 사도”가 되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을 고려해 자기 자신들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들을 통해 사도직을 수행”했다.(「평신도 교령」 12항) 이는 1965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폐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남긴 메시지에서 드러나는 교회 쇄신과 사회발전을 위한 청년들에게 바라는 희망과 일치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청년들에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앞선 세대가 살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이룩”(공의회 폐막 메시지 ‘젊은이들에게’)할 것을 권고했다. 청년들은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복음의 기쁨」 20항)에 응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활발한 사회 참여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향하는”(「모든 형제들」 88항) 삶을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세상과 교회의 성화를 위한 충실한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청년은 언제나 교회 중심에 존재…사회·교회 위한 역동적 활동 펼쳐 교회 내 봉사에만 머무르기보다 새로운 사회 건설 위해 나서길 ‘주인공’인 청년들을 위한 동반 이러한 선배 청년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 모범이 돼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드러난 가톨릭 청년의 주체성은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의 주제로 개최된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젊은이 시노드)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젊은이 시노드는 교회와 청년의 상호작용 안에서 세상의 복음화라는 공동책임이 부여됨을 강조했다. 젊은이 시노드는 “교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갈 길을 멈추지 않도록, 교만해지지 않도록, 분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막고, “교회가 젊은 모습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데 청년의 역할을 강조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37항) 또한 젊은이 시노드는 청년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에서 구경꾼”이 되지 않고 정의롭고 형제애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회 “변화의 주인공”이자 “미래의 주인공”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74항) 따라서 젊은이 시노드는 청년의 역할이 독서자, 복사, 교리교사와 같이 교회 내 봉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쇄신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앞장서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를 위해 젊은이 시노드는 청년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그들의 성소의 삶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는 사제, 수도자, 혼인 성소와 같은 신원적인 구분을 포함해 “생명으로 부르심, 주님과 나누는 우정으로 부르심, 성덕으로 부르심 등을 다 아우르는 하느님의 부르심”(「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48항)을 말한다. 이를 통해 청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고, 또한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활용해 공동선에 이바지”(「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53항)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곧 다른 이들을 향한 선교 봉사의 부르심으로 이어진다. 청년이 선교 봉사에 참여하는 일은 성소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년들은 봉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자신에게 다른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자질이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청년이 선교사로서 친구나 이웃들을 초대하는 경험은 새로운 신앙 체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청년은 자신 안에만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타인을 향해 개방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교회(Chiesa in uscita)를 몸소 실천하는 길이 된다. 젊은이 시노드가 강조하는 교회의 역할은 청년의 성소 식별 여정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반은 그저 청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의 동반은 청년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식별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젊은이 시노드는 교회 안에 성소의 문화를 형성해 청년이 자연스럽게 신앙 안에서 성소를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함께 살 것을, 교회가 온 마음을 다해 청년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교회의 동반을 통해 청년은 교회와 함께 오늘을 살고 내일을 희망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글_이진옥 페트라 돈보스코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 선임연구원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로마) 신학 박사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2024-11-10

가난 대물림 소수민족의 꿈 실현시킬 재봉틀 선물

[라오스 후아판주 박주헌 기자] 기근이 든 흙 속의 씨앗도 ‘물과 양분’(믿음)을 만나면 ‘꽃’(가능성)을 피운다. 메마른 세상을 적시는 인간애 역시, 동료 인간 안의 잠재된 가능성을 묵묵히 믿어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완성되는 게 아닐까. 사단법인 평화3000(상임대표 곽동철 요한 신부, 이하 평화3000) 활동가들은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2박4일간 라오스 후아판주 ‘위앙싸이 소수민족학교’ 학생들의 직업 교육을 위한 지원 사업 활동을 펼치고 왔다. 학교에는 평화3000의 도움으로 학생들 취업과 자립을 위한 ‘재봉교육 직업훈련반’이 일찍이 개설됐다. 혼자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주고자 재봉틀 기증, 수업 참관 등 지원 사업 활동들로 구슬땀을 흘리고 온 활동가들 현장을 따라갔다. ■ 소외 속의 소외를 사는 이들을 위하여 28일 저녁 8시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6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비엔티안은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나지막한 건물들이 목가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노동가능인구 중 62%가량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등바등 살기보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라오스 사람들을 빼닮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많이 배우고 싶어 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에요.” 현지에서 평화3000과 협력하는 이관택 코디네이터는 “현지 진출한 외국 사업가들은 라오스인을 계몽 대상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이들은 무기력한 게 아니라 쫓기며 살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자정을 코앞에 두고 숙소에 도착한 활동가들은 다음 날 아침 ‘위앙싸이 소수민족학교’가 있는 북동부 후아판주 위앙싸이 마을로 떠나기 위해 여윈잠을 청해야 했다. 비엔티안에서 약 600㎞ 떨어진, 차로 가면 꼬박 16시간이 걸리는 산간 지역이었다. 후아판은 라오스의 18개 쾡(주) 중에서도 가난한 곳으로 손꼽힌다. 활동가들은 올해 4월 평화3000이 진행한 모금 캠페인으로 마련된 재봉틀 30여 대를 학교에 기증하고, 재봉교육 직업훈련반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하며 취업과 자립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마을을 찾았다. 후아판주의 유일한 소수 민족 학교인 이곳에는 531명 중·고등학생이 배우고 있지만 졸업 후 진로가 막막한 상황이다. 차별과 핍박 받고 있는 몽족 농업 중심 경제 구조에서 작황 안 좋으면 생활고 빠져 마을 주민은 몽족, 크무족 등 소수 민족으로 많은 차별 속에 살아간다. 특히 몽족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고문과 핍박을 받았다. 현재 법적으로는 주류 민족 라오족과 평등하게 취급되나 차별은 지금도 계속된다. 직장에 취업하는 것조차 어려워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진다. “졸업 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전문 기술도 없고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어요. 농업 중심인 경제 구조라 작황이 좋지 않으면 일자리도 부족한데, 전문 기술도 없는 소수 민족은 더더욱 취업에서 소외될 수밖에요.” 마을까지 가는 산길 내내 흔들리는 차 안에서 해외사업팀 정다와 팀장이 활동가들에게 설명했다. 산수화같이 운치 있는 풍경과 달리 계속 산등성이를 타느라 다들 멀미를 참고 있었다. 그는 “재봉교육은 특히 소수 민족 여학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나마 남학생은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짓거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 외국으로 떠날 수 있지만 여학생들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되고 꿈마저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립무원한 처지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은 활동가들에게 여독마저도 묵묵히 이겨낼 힘이 솟게 했다. 온화한 라오스 민족들을 빼닮은 뽀얀 벽을 한 학교가 나타났다. 그 앞에서 역시 온화한 미소를 띤 교사들이 “닌디떤합(환영합니다)”하며 활동가들을 맞이했다. “재봉틀이 한 대도 없어 아이들 직업 교육을 못 하고 있었어요. 여러 곳에 재봉틀 지원을 요청했는데, 소수 민족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손을 잡아 준 평화3000과 후원자분들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 함께 짜는 미래 재봉교육 직업훈련반 교실에는 학생 30명이 재봉틀 30대와 오버로크 미싱기 5대, 다리미 5대 등 기자재로 한참 실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평화3000이 기증한 기자재들 덕분에 9월부터 재봉교육 첫 수업을 시작했다. 작업 도중에도 일어나 열렬한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학생들 한가운데서 재봉틀 기증식이 열렸다. 기증식에는 후아판주 노동사회복지부 책임자와 학교 교감 2명이 함께했다. 그들은 평화3000 운영위원장 박창일 신부(요한 사도·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에게 후아판주 주지사의 감사장을 건넸다. 그러면서 “본교 학생뿐 아니라 후아판주의 다른 빈곤층, 조손 및 한부모 가정, 장애인 아이들도 이곳에서 재봉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비로소 취직의 꿈을 안겨줄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하다”고 전했다. 훈련을 마친 학생들은 현지 한국계 재봉 기업 ‘풍신’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풍신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신에 따라 평화3000의 행보에 깊이 공감하며 여러모로 적극 협력하고 있다. 현지에서 내년 공장 가동을 준비 중인 풍신은 후아판주에서 노동자 1000명을 고용할 계획이다. 직업훈련반 과정을 마친 학생들을 고용한 후 일정 기간 자체 교육을 진행해 실무에 투입할 예정이다. 또 직업훈련반 지도 교사 9명이 일찍이 풍신의 도움으로 기초 재봉 수업을 받았다. 훈련 과정을 마친 이들은 곧 중·고급 과정 이수를 앞두고 있다. 이날 공장을 방문한 박창일 신부와 사업 논의를 한 풍신 박동운 대표는 “‘평범한 시민, 기업 등 모두가 십시일반 보태 사회공헌을 하고 미래를 함께 짜나갈 수 있다’는 평화3000의 신념에 참여 주체들이 보조를 맞추자, 기적은 점점 손에 잡히는 실체가 되고 있다”며 웃었다. 이어 “사람 안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일에, 기업으로서 가능한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했다. 진로 막막한 청년들 자립 위해 재봉틀과 전문기술 교육 지원 미래 꿈꿀 수 있게 잠재력 키워 “아이들의 꿈이 머지않아 현실이 됩니다. 그만큼 조금 더 박차를 가하는 건 어떨까요?” 학교 교직원과 평화3000 관계자들이 함께한 회의에서 박창일 신부는 학교 측에 ▲더 많은 학생을 직업훈련반에 받아들이고 ▲수업 일수와 시간을 늘리고 ▲교사들의 기술 습득 속도를 높일 것을 제안했다. 박 신부와 완텅·라수깐 교감은 “미래를 함께 짜나가는 ‘동지’로서 노력을 아끼지 말자”며 “형제 같은 긴밀한 관계 안에 꾸준히 논의하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어려서부터 가정 형편, 연로한 부모님 걱정으로 일찍 어른이 된 원뉴 찌아뽀유(고3) 양도 “더 많이 수업받고 기술을 익히고 싶다”고 말했다. “나만의 봉제 공장을 운영할 꿈이 생겼다”는 찌아뽀유 양은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꿈을 이루는 데 도움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기쁘다”며 빙긋 웃어 보였다.

2024-11-10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손승희 작가

주님께서 마련하신 조각가의 길 저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어릴 적 마산은 나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로, 작은 도시지만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포진해 있었어요. 바닷가에서 수영도 하는 등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요. 먹물로 동양화를 그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난을 친다 그러죠? 붓으로 ‘쓰윽~’ 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께서 칭찬을 엄청나게 하셨던 게 기억나요. 사생대회도 나가고는 했는데, 저는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어요. 당시 대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이미 그림을 공부하던 아이들이었거든요. 하지만 만들기에서는 확연히 달랐어요. 제게는 남다른 창의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혼자서 팝업 카드를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가끔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이 너무 특별한 이상한 것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해요. 만들기에 관한 재능은 그때부터 있었나 봐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대입을 위한 진로를 정하는데, 그림보다는 뭔가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소를 선택하게 됐어요. 당시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대구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을 세워놓으신 것 같아요. 제가 날고 기어봤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진 느낌이에요. 효성여대 조소과는 제가 1회 졸업생이에요. 조소를 선택한 건 제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저를 위한 하나의 길이 준비된 것이 아닌가 해요.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의 길로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했는데, 당시 효성여대에는 대학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르레상스의 발상지에서 전통 조각을 공부하고 오자는 생각이었죠. 로마에서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전수해 주려고 애를 쓰셨어요.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어요. 세례는 유학시절 받았어요. 당시 로마 한인 성당 예비신자들은 교황님께 세례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저도 지금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 세례를 받았어요. 교황님께서 시성하신 한국 성인을 세례명으로요. 세례식 날 저는 무슨 할리우드 배우를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갔어요. 그런데, 제 세례명을 부르면서 저를 바라보시는 교황님 눈에 푹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깊고 푸른 호수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느낌이요. 아직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차피 예술가로 살면 어딜 가나 먹고 살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영어라도 배우자는 생각으로 영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어요. 로마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한국에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았는데도, 환율이 갑자기 오르니 금액이 반토막이 난 거죠. 당시 레체에서 현재종교미술전이 열렸는데, 공모전에 참가했어요. 상금이 한 300만 원 정도였어요.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상금을 받아 잠시만 머물 요량으로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집안 형편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어요. 마침 모교에 강사 자리가 나서 강의를 시작했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못 갔네요. 이곳저곳의 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뜨문뜨문 작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생활이 어려웠어요. 서울에 살던 유학시절 친구가 한번 놀러와서 제 작업실을 보더니 제가 안쓰러웠는지, 서울로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저는 자구책으로 컴퓨터 디자인을 배웠는데, 그게 서울에서 쓰일 것 같았어요. 서울에 올라와 취업을 한 회사가 한국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스테인드글라스 제조업체였어요. 조소 전공에 유학 경험도 있고, 컴퓨터 디자인도 할 수 있으니 스펙은 좋았던 거죠. 처음에는 회사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했어요. 월급 때문에 제 예술성을 판다고 자책하면서요. 돌아보면 제게는 큰 기회였어요. 상업적 공방이지만 큰 스테인드글라스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했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생활을 하게 된 거니까요. 회사에 다니면서 학교 강의도 나갈 수 있었어요. 아트 디렉터로서 제 의견을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에 개진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1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저를 갈고 닦았어요.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장르를 내 안에 녹여내는 시간이었죠. 사람들에게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 전하고파 그렇게 회사에서 내공을 쌓고 독립했어요. 성당뿐만 아니라 공공시설에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만들었죠. 보통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하면 교회를 떠올리지만 더 대중화가 되면 좋겠어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사람들을 힐링하게 하고 명상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줄 수 있거든요. 특히 성당에 작품을 봉헌할 때에는 제 열정과 기도를 쏟아부어요. 작가로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예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예쁨은 잠시예요. 작품에 쏟는 에너지와 열정에 따라 작품의 아름다움이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품에 불어넣는 기도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제게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며 작품활동을 해요. 저는 신부님들이 사제 양성을 받으실 때부터 성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좋겠어요. 성음악 시간은 있는데, 성미술 시간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교회는 문화적 예술적 토대가 되어야 해요. 갤러리나 미술관에 가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성미술 작품을 통해 신자들에게 신앙뿐만 아니라 문화의 토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좋겠어요. ◆ 손승희(소벽 막달레나) 작가는 1968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92년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조소과와 1997년 이탈리아 로마 국립 미술원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2006년 이탈리아 라벤나 모자이크 아트 스쿨을 수료했다. 대구가톨릭대와 남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2011년 미국 ‘신앙과 포럼’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과 전주교구 익산 어양동성당, 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미국 알래스카 한인성당 등에 성미술 작품을 봉헌했으며, 현재 손승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2024-11-10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을 하늘로 보냈다…주님께선 그 아이를 끌어안아 주셨다

위령 성월,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기도를 그리워할 영혼들이 있다. 바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낙태아들이다. 모두에게 아픔이기에 되도록 있었던 흔적을 없애고 기억에서 지우기에 급급한 존재인 낙태아들. 그렇게 잊힌 이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이 있다. 1994년 천주교용인공원묘원에 마련된 ‘낙태아의 묘’를 찾았다. 낙태아 위한 기도 공간…1994년 서울대교구가 조성 비문석 손상돼 올 4월 재설치…‘낙태 선택한 이들도 하느님께 나아가야’ ‘낙태아의 묘’에 가다 천주교용인공원묘원(담당 김한석 토마스 신부) 주차장에서 왼쪽 도로로 100m가량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약 16㎡의 대지에 ‘낙태아의 묘 입구’가 새겨진 바위와 천사로 알려진 동상이 나온다. 낙태아를 위한 기도가 새겨진 비문석 앞엔 누군가 정성스레 두고 갔을 노란 장미꽃과 한 아름의 수국 두 바구니가 강렬한 태양으로 벌써 빛이 바래있었다. 이 태양 빛에 한 번도 눈부셔 보지 못했을 태아들을 위해, 이내 빛바래겠지만 나도 예쁜 꽃 한 묶음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엔 ‘입구’라고 돼 있어 혹시나 싶어 수풀을 헤치고 계단 위로 더 올라가 보니 일반 산소들이 나왔다. 다시 낙태아의 묘로 내려와 비문을 찬찬히 읽었다. ‘태아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 안게 하소서’라는 부분이 와닿아 잠시 묵상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 속에 사라져갔을 수많은 낙태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회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권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83항) 하지만 낙태아들은 이름도, 무덤도,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없기에 그 존재를 유일하게 아는 이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기도하기란 어렵다. 때문에 추모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잠시 들러 낙태아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묘원 한켠에 만들어진 이곳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 낙태아들을 매장하지는 않았지만 속죄와 함께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 다른 이름 ‘라헬의 땅’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을을 잃고 운다.”(예레 31,15) 낙태아의 묘는 서울대교구가 1994년 생명 존중의 의미로 조성한 곳이다. 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이하 생명위)는 이곳을 ‘라헬의 땅’이라 부른다. 라헬의 땅이라는 명칭은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예레미야서의 라헬에서 따왔다. 미국교회는 1984년부터 낙태 후 치유 사목으로 라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생명위는 라헬 프로그램을 응용해 매달 낙태아들을 위한 피정 ‘희망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이를 통해 낙태 경험자는 그에 대한 상처를 보듬고 낙태아들을 애도하며, 이런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생명위는 2016년 자비의 희년부터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라헬의 땅 순례를 하고 있다. 올해도 교구 생명윤리자문위원회 위원장인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와 함께 생명 피정을 개최했다. 올해는 특히 손상돼 다시 설치한 비문석 축복식도 거행했다. 생명위 사무국장 오석준(레오) 신부는 “라헬의 땅을 통해 낙태를 선택한 이들이 아픔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며 “또한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서 오 신부는 “현재 공백인 낙태법 여부와 낙태 가능 기간에 대한 논의를 떠나, 점점 낙태를 ‘임신 중단’이라는 단어로 바꿔 의미를 중화시키며 무분별한 낙태 수술 광고를 집행하는 세태가 문제”라며 “낙태를 경험했다면 죄책감에 머물지 말고 충분한 애도 기간을 거쳐 용서와 치유의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세례받지 않은 아기들의 구원 2007년 4월, 세례받지 않고 죽은 아기들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희망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세례받지 않은 유아들이 하느님과의 친교 없이 영원히 머무는 곳인 ‘림보’(Limbo)에 대한 전통적 신학 이론이 지나치게 제한된 구원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현 신앙교리부) 산하 자문기구인 국제신학위원회(ITC)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978~2005)의 위임으로 연구한 문헌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한 희망」(2007)을 발표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재위 2005~2013)은 이를 승인했다. 이 내용은 사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도 나와 있다.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1260항),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1261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6항에는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라고 밝혀 아기들의 구원론을 뒷받침한다.

2024-11-10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손미경 작가

처음 만져본 흙의 느낌으로 조각가의 길 나서 어릴 적부터 사생대회에 나가면 꼭 상을 타왔어요. 초등학생 때였는데요. 어느 사생대회에 나갔는데 제 그림이 신문에 조그맣게 실리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국군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와서 1년 정도 펜팔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린 것뿐인데 이런 반응들이 온다는 게 엄청 신기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렇게 예술가가 되는 게 꿈이 됐어요. 고민 없이 입시 미술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잘하기도 해서 대학 진학은 걱정을 안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시절 학교 축제를 위해 그린 그림을 보고 이화여대에서 자기네 학교로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 조각하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저는 입시 걱정은 없었으니 선배들 모델을 서 주며 맛있는 것 얻어먹는 게 낙이었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저에게 ‘흙 한번 만져보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디자인을 전공하려고 했고 지저분한 흙을 만지기는 싫었어요. 그러다가 ‘저 언니들은 뭐가 재밌어서 저렇게 열심히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점토를 만졌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두 번쯤 흙으로 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랬더니 집과 학교, 미술학원에서 난리가 났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였거든요. 조소를 전공하기로 정하고, 성신여대에 입학했어요. 그것도 수석으로요. 사실 4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고,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쭉 대학원까지 다녔어요. 저는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했어요. 학교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은 그 당시 추상 조각을 많이 했지만, 저는 사람의 신체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어요.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로 대희년이던 2000년에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장동호(프란치스코) 조각가가 함께하자고 졸랐어요. 그때 회원전을 준비하면서 구유 안의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제 작품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 주셨어요. 사실 저는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고 해서 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머리는 크고 손발은 작은 이상한 모습이었는데, 조금씩 손을 보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가 되었어요.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여수대 교수였어요. 남편을 따라 일본 쓰쿠바대에서 예술연구과 연구과정을 마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2001년 갑작스럽게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게 됐어요. 유아세례를 받은 가톨릭신자로 본당 전례부 활동 등을 하며 마음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고 예수님께서 늘 같이 계시며 저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까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저에게 남은 것은 조각밖에 없었어요. ‘이걸 하면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개인전을 열기 시작했어요.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시회를 열고요. 그런데, 이런 전시는 제 스펙을 쌓기 위한 것이었어요. 교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도 따고요. 그런데 제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교수 후보 1순위로 올랐는데도, 다른 내정된 사람에게 자리를 뺏기기도 하는 등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많은 이 주님께 이끄는 작가 되고파 2005년, 가톨릭대 개교 15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혜화동 교정을 외부인에게 공개해 7박8일 동안 침묵피정을 열었어요. 당시 가톨릭대 교수였던 김남철(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이 추천을 해서 피정에 참여했어요. 지금은 주교님이 되신 구요비(욥) 신부님, 전원(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등을 알게 됐어요. 성경을 읽고 침묵 중에 기도하고 총고해도 하면서 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회였어요. 덤으로 좋은 신부님들과 가까이 알고 지내는 네트워크도 생겼고요. 피정을 마치면서 성경을 통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전시회를 준비해야 했어요. 성경을 다 읽고 나면 전시 준비가 늦을 것이 뻔해 보였지만,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다 읽고 나니 전시회가 열흘 정도 남았어요. 부랴부랴 흙을 어떻게 만졌는지도 모르게 작업을 해서 전시회를 마쳤어요. 그리고 교수가 되기보다는 성미술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본격적으로 성미술 작업을 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각상으로 만들었어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농담 식의 기도로 ‘예수님 얼굴을 좀 보여주세요’라고 했는데, 갑자기 피투성이 얼굴이 제 눈앞에 떠올랐어요. 이것을 표현한 예수님의 얼굴 각상은 지금 가톨릭대 신학대학에 있어요. 부제님들의 기도방에요. 이어서 서울대교구 방배동성당 성모자상, 강원도 홍천 프라도회 참제자마을에 성모상을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충남 논산 씨튼 영성의 집에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설립자 씨튼 수녀상을 봉헌했고요. 저는 성미술을 하면서 만드는 것까지만 제 몫이고 나머지는 보는 사람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성미술 작품이 작가만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은 아니어야 하고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다가가도록 돕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아버지의 정을 잘 모르고 자랐어요. 말년에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돌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스르륵 녹는 것을 느꼈어요. 훗날 아버지의 정을 되새기며 ‘돌아온 탕자’를 만들고 싶어요. ◆ 손미경(체칠리아) 작가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성신여대 미술대학 조소과 1992년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일본 쓰쿠바대학 예술연구과 연구과정을 졸업하고 2010년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신여대와 경원대, 동국대, 중앙대, 국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5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가톨릭미술가회 회원이며, 세실조형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2024-11-03

생애 마지막 순간, 더없는 평안 맞이하는 자리

누구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에 빠진다. 그런데 그 두려움의 근원을 캐묻다가도 어느덧 의연해지는 이유는 뭘까. 지난했든 순탄했든, 삶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둘 때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 국제가톨릭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이하 AFI) 회원들이 운영하는 전·진·상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원장 배현정, 이하 전진상 호스피스)는 이렇듯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죽음을 포기가 아닌 ‘완성’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30여 년간 호스피스 돌봄을 해왔다. 한계에 놓인 생명을 비로소 ‘영원’으로 치환하는 전진상 호스피스를 소개한다. 아픈 이는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족도 힘들지 않게 돕는 자리 죽음, 끝 아니라 '영원' 여는 문…화해와 성찰로 가장 아름다운 시간 인도 ■ 가정집과 같은 호스피스 “우리는 일을 시작한 초기부터 늘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들을 만나왔습니다.” 환자들의 가정 방문 진료를 다니던 전진상의원의 AFI 회원들은 이렇듯 집에서 삶의 끝을 보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1996년부터 암환자를 위한 가정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시작했다. 평생 고달프게 살아온 이들이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라도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도록 돕고자 하는 뜻이었다. 벨기에 출신 간호사로 1972년 한국에 온 배현정(Marie-Helene Brasseur) 원장은 1975년 김수환 추기경 제안으로 무료진료소 전진상 가정복지센터에서 봉사했다. 상주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1981년 중앙대 의대에 들어가 1985년 의사고시에 합격했고, 1988년부터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전진상의 여러 직원들도 1990년대 호스피스 교육을 받아 체계적인 호스피스 돌봄의 기틀을 갖췄다. 당시 정부에서 진행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사업은 대학병원과 병동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에 전진상 의원도 AFI 회원들의 숙소를 내어 호스피스 병동을 마련했다. 2008년에는 병상 10여 개를 갖춘 입원실을 열고 서울 최초의 독립시설형 호스피스 기관이자 전문 완화의료 센터로 자리매김했다. 입원형·가정형 양쪽 모두를 하는 호스피스로, 일반 병원과 달리 가정집과 비슷한 구조로 의사 3명이 상주한다. 서울 시흥동 주택가 틈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3층 건물 그대로, 고즈넉한 가족 분위기의 호스피스다. 환자에게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보편적인 대형 병원 호스피스 병동과 달리,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델이다. 전진상 호스피스의 완화의료는 말기질환 환자를 위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이뤄진 전문팀이 통증 등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의 증상을 적극적으로 조절하고,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경감시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환자의 고통에 따른 적절한 완화적 돌봄, 죽음을 향해가는 환자의 마지막 길 동반, 정서·영적 돌봄을 제공한다. 환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도 돌봄의 대상이다. 통증, 호흡곤란, 구토 등 고통스러운 신체 증상 조절을 넘어 환자와 가족의 불안, 우울, 두려움과 경제·사회적 문제도 돌본다. 환자마다 3세대 가계도를 만들어 삶의 배경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 전문 호스피스 기관답게, 미술 및 음악요법 등 프로그램에도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치료사를 동원한다. 가족에게는 임종 준비부터 사별 후 심적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돌본다. ■ 현재를 위해 산다는 것 사람들이 질병을 견뎌낼 힘을 얻는 건 치유와 그 후 생활을 향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미래를 전제로 한 치유적 진료가 아니라 ‘현재’를 위하여 사는 시간을 마련하는 데 의미가 있다. 삶을 긍정하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간주한다. 죽음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증 등 다른 증상들을 완화하는 가운데 임종까지 활발하게 살 수 있도록 환자에게 지지체계를 제공한다. 그로써 환자의 가족은 투병 기간과 사별 시기에 대처할 힘을 얻는다. 미래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평온함과 기쁨은 미풍처럼 잔잔하게 찾아든다. 전진상 호스피스 직원들이 자주 크게 체험하는 것은 환자들이 표현하는 강력한 삶의 의지다. 생을 마치기 며칠 전에도 환자들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일들이 있다며 강력한 열정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무정물(無情物, 나무나 돌 등 감각이 없는 것)에서 그쳤을지도 모르는 이 존재의 바다에서, 살아 숨 쉬며 모든 것을 느끼고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비로운 선물을 받았는지 모른다”며 깊이 있는 통찰로 나아가는 환자도 있다. 고통으로 점철됐던 삶들도, 일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음을 뽐내던 삶들도 그 깨달음 앞에서는 두루 평등해진다.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예요.” 호스피스에 대해 많이 알려지며 ‘죽음 대기소’라는 오명도 많이 씻어졌지만, 아직 건강한 이들에게조차 여전히 두려운 공간이자 시간적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패전병과 같은 의기소침 때문이다. “이곳은 죽으려고 오는 곳이 아니에요,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잘 살려고 온 거예요”라며 전진상 호스피스 직원들은 환자와 그 가족에게 말을 건넨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람 사는 이야기가 오가며 긴장이 풀린다. 그렇게 집처럼 꾸며진 아늑하고 따뜻한 병실에 누우면 그들은 금세 하나같이 고백해 온다. “여기에서 비로소 나로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간 결말만 있는 책은 아무리 멋져도 감동과 의미를 던져주지 못한다. 비통한 끝을 맞은 주인공도 스스로 영웅으로 추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가 겪어낸 줄거리(과정)에서만 나온다. 이렇듯 호스피스의 시간은 환자들 삶의 책에 ‘화해’의 줄거리를 써낼 시간이 된다. 깨진 관계, 불화, 애증….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삶이기에 오래도록 미워하고 미움받았던 그들은 좌절됐던 사랑, 믿음, 관계의 문제에 비로소 선한 종지부를 찍는다. 과정(화해) 없이 결말(죽음)로 뛰어넘는 조력자살, 안락사, 존엄사를 택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해후(邂逅)의 줄거리다. “임종자 누구나 마지막 날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며 꽃 같은 웃음을 보인다”는 직원들 고백대로다. 20년 동안 서로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등지던 모자가 서로 손을 맞대고, 버림과 버림받음의 상처뿐이던 전(前) 배우자가 병상에 찾아와 눈을 마주친다. 때 타지 않은 헌신뿐이던 지난날처럼, 아무 조건 없이 충만했던 그때 그 사랑이 담긴 시선이 오간다. “원망이란 결국 해를 등진 사랑이 드리웠던 그림자에 불과했구나” 하며, 모든 응어리를 맺힘 없이 내려놓는다. “당신을 원망했어요. 하지만 사랑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부끄럽기만 했던 이 마음을 이제야 표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배 원장은 “죽음은 포기의 끝이 아니라 ‘영원’을 여는 문”이라며 “호스피스를 통해 화해와 성찰 안에 더없는 평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문의 jeonjinsang.or.kr

2024-11-03

환경 지키는 작은 손길, 피조물 살리는 거룩한 힘 보태다

본당에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는 새 사목지에 적응이 되기도 전에 본당에 비치된 종이컵을 없앴다. 화장실에 페이퍼 타월도 사라졌다. 신부는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페이퍼 타월 대신 손수건을 쓰자고 제안했다. 신자들 사이에선 “유별난 신부님이 오셨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3년 뒤, 불편했던 변화들은 익숙한 일상이 됐고 하느님의 성전을 함께 지키고 있다는 유대감은 공동체의 신앙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보호를 위해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바꾼 신부의 ‘유별남’은 평범하지 않은 본당 공동체를 만드는, 거룩한 하느님 성전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제19회 가톨릭환경상 대상을 수상한 대전교구 천안성정동본당의 이야기다. 일회용품 줄이고 환경 인식 개선 지역사회와 연계한 환경 캠페인 재생에너지 전환·탄소중립 결실 ■ 거룩한 성전을 만들다 “편하게 사용하던 종이컵이 없어지니 텀블러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성당에서 편하게 컵도 쓰지 못한다’고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회용품 사용을 안 하고 계세요. 식당에서도 종이컵이나 일회용 접시를 절대 안 쓰신답니다.” 2021년 천안성정동본당에 부임한 임상교(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가장 먼저 종이컵을 없애고, 본당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 제로웨이스트 가게. 성당 카페 한켠에는 담아갈 수 있는 빈 용기와 함께 대용량 주방세제와 섬유유연제가 진열돼 있다. 천연재료로 만든 수세미와 고체 치약, 샴푸바는 물론이고 옆 코너에는 우리농산물도 판매, 성당에 들른 신자 누구든지 환경을 위한 실천에 동참할 수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천안성정동본당의 노력은 탄소중립이라는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2023년 54.74kw의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본당은 에너지 효율화를 통한 탄소 배출 감축을 추진, 195%의 감축을 이뤄냈다. 본당 내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데도 신경 썼다. 임 신부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전력사용을 줄이고자 신자들과 논의해 모든 전등을 LED로 교체했고 창문도 이중창으로 바꿨다. 냉난방기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본당 곳곳에 실링팬을 설치하는 등 에너지를 절약한 결과 매년 600만 원가량을 환급받고 있다. 임 신부는 “새로 부임한 신부가 잘 쓰던 것들을 없애면 당연히 불만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처음 바꾸는 게 힘들지 조금만 감내하면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교육을 통해 왜 우리 삶이 바뀌어야 하는지 알리는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이어 “조금 불편하게 바뀐 내 삶이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키는데 힘을 보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신자들은 전보다 기쁘고 충만하게 신앙생활을 하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다 임 신부는 시설을 바꾸는데 끝나지 않고 신자들의 일상을 바꾸는 데도 주력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신자들의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이다. 삶의 방식을 왜 바꿔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 담긴 위기에 놓인 공동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사는 곳, 나의 일상에서 찾고자 했다. 본당 신자 조정흥(아녜스) 씨는 “신부님이 본당 야유회로 생태탐방을 제안하셔서 수라갯벌에서 파괴된 갯벌을 보고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라며 “신공항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가덕도에 함께 가서 미사를 드린 적도 있었는데 뉴스로만 보던 이야기를 현장에서 보니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와 연계한 활동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개인의 역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천안성정동본당은 현재 천안녹색소비자연대와 함께 ‘자원순환 118’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자원순환 118은 1일 동안 1인이 배출하는 쓰레기를 800g으로 줄이는 활동. 음식물 쓰레기까지 더하면 하루에 배출되는 쓰레기양을 800g에 맞추는 게 쉽지 않지만 환경단체에게 전문적인 방법들을 배워나간 결과 천안성정동본당 신자들은 분리배출은 물론이고 쓰레기 줄이기의 달인이 됐다. 취재를 위해 찾은 10월 25일은 매주 열리는 기후행동이 있는 날이었다. 10시 미사가 끝난 뒤 한숨을 돌린 10여 명의 신자들은 현관에 놓인 박스에서 조끼를 꺼내입고 자신의 피켓을 찾아 들었다. 성당 인근의 버스정류장에서 1시간가량 진행되는 작은 행동이지만 매주 함께하는 이 시간은 하느님 보시기 좋은 신앙인이 되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김향초(제클린) 씨는 “피케팅을 하면서도 ‘우리의 피켓을 보고 바뀌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에 위안이 된다”며 “그만큼 기후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 신부가 신자들의 볼멘소리를 감수하고 조금 불편한 삶으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민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에 함께 모여있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임 신부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잘 지켜나갈 때 성전의 거룩함은 유지가 되는 것”이라며 “우리 본당이 하느님이 창조했던 그대로의 성전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는 그런 거룩한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2024-11-03

봉헌 1700주년 라테라노 대성당, 축일 기리는 이유는?

11월 9일은 로마의 4대 대성당 중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특히 올해는 봉헌 1700주년을 맞이한다. 사람이 아닌 건물의 축일은 흔치 않다. 왜 잘 알려진 성 베드로 대성당도 아닌, 라테라노 대성당이 봉헌된 것을 기리는 축일이 생겼을까? 그 이유와 역사, 라테라노 대성당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으뜸’…로마 최초 바실리카 양식 대성당 1000년간 교황 거처·교회 행정 중심…그리스도교 공인 후 봉헌돼 큰 의미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가 로마 모교회 중심으로 일치 이루는 의미로 축일 지내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1700주년 라테라노 대성당 중앙 입구에는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로마에 있는 성당 중 가장 오래됐으며, 전 세계 교회의 모(母)교회이다. 새 교황이 선출됐을 때 취임식을 한 교황은 규정된 예식에 따라 라테라노 대성다에서 로마교구장에 착좌한다.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재위 314~335)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약 272~337)가 교황청에 313년 선사한 라테라노 궁전 옆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건축했고 324년 봉헌식을 거행했다. 올해는 성전 봉헌 1700주년이다. 10세기 세르지오 3세 교황(재위 904~911)은 대성당을 성 요한 세례자에게 다시 봉헌했고 12세기 루치오 2세 교황(재위 1144~1145)은 다시 이 대성당을 성 요한 사도에게 봉헌했다. 1309년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약 1000년간 라테라노 궁전은 교황의 거처였다. 1377년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두 번의 화재로 황폐해진 이곳을 떠나 바티칸으로 거처를 옮겼다.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축일은 12세기에 도입돼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기념됐다. 그 후 베네딕토 13세 교황(1724~1730)은 1726년 보편 교회에서 축일을 기리도록 했다. 중세 시대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의 부패, 세속 권력과의 갈등 심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도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열렸다. 라테라노 공의회라고 불리는 5차례의 공의회는 1123년, 1139년, 1179년, 1215년, 1512~1517년에 개최됐다. 1929년에는 바티칸시국의 영토와 지위를 확립한 라테라노 조약이 바티칸시국 바깥에 있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체결됐다. 왜 성당 축일을 기릴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성령이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경에도 이에 대한 구절이 등장한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4-5)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우리 모두는 성전이므로 모든 교회의 모교회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사람들의 영적인 고향이다. 돌로 만들어진 성당 또한 살아있는 교회,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상징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3년 11월 8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말미에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축일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살아 있는 돌이 되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날”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라테라노 대성당은 일반 성당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종교의 자유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에야 그리스도교인들은 박해의 두려움 없이 교회에 모여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서유럽에 처음 생긴 대성당으로, 인정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순교자들의 용기를 함축한다. 라테라노 대성당 이모저모 라테라노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성당이다. 중앙에 있는 문은 포로 로마노에 있던 고대 로마 원로원 건물의 문을 옮겨온 것으로 1세기경 제작돼 현재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오른쪽의 문은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2월 13일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개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12월 29일에는, 올해 11월 9일에 성당 봉헌 1700주년을 맞는 성 요한 라테라노 로마 주교좌 대성당의 성문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1369년경 만들어진 제대 위 발다키노는 4개의 대리석 기둥 위에 올려져 있고 그림으로 장식된 고딕 양식의 구조물이다. 발다키노의 윗부분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흉상이 있는데, 전통에 의하면 이 흉상 안에 두 성인의 두개골 또는 두개골의 일부가 있다고 전해진다. 라테라노 궁전에는 예수님이 수난 중 본시오 빌라도 총독(재위 26~36)에게 나아갈 때 밟았던 계단이라고 알려진 ‘거룩한 계단’이 1000년 이상 보존돼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약 250~329)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이 계단은 1589년 라테라노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부속 성당이자 교황의 개인 기도실로 이용돼 온 성 계단 성당으로 옮겨졌다.

2024-11-03

한 세기 의료복지·인권 향상 위해 쉼없이 달려오다

메리놀 수녀회(한국공동체 대표 성미영 안젤라 수녀)가 10월 21일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았다. 1924년 서울에 도착한 6명의 수녀로 시작된 메리놀 수녀회 한국공동체는 지난 100년간 우리 역사의 질곡 속에서 의료 사업, 빈민 구제, 학교 설립, 인권·생태 환경·여성 운동 등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메리놀 수녀회의 대표적인 발자취와 10월 18일 거행된 100주년 축하식을 살펴본다. 의료 지원 사업에 헌신 메리놀 수녀회는 1926년 평양교구 의주와 영유, 1928년 비현의 의료원 개설을 시작으로 수많은 의료 지원 사업을 시행해 우리나라의 의료 복지에 이바지했다. 특히 1950년 4월 15일 부산에 도시 최초 가톨릭 의료기관인 메리놀병원을 설립했다. 개원 직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민 중심으로 구호와 약품 지급, 무료 진찰과 치료를 제공했다. 수녀들은 고아원과 빈민가 방문 진료도 실시했다. 1951년 8월경에는 병원에 매일 찾아오는 환자 수가 10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주민들이 과로로 인한 질병을 많이 앓고 있던 청주교구 충북 증평에는 1956년 12월 증평병원을 세웠다. 농업 종사자가 많았던 터라 봄·가을에는 농부들이 뱀에 많이 물려 미국에서 가져온 해독제로 연 300여 명을 치료하기도 했다. 패트리시아 콘로이(Patricia Anne Conroy) 수녀는 부산가톨릭대학교의 태동이 된 메리놀병원 부속 간호학교를 1964년 3월 설립했다. 병원을 운영하며 잘 훈련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아울러 메리놀 수녀회는 여러 섬에서 의료 지원 사업을 펼쳤다. 1963년부터 1976년까지 인천 강화도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리스도왕병원을 개설해 운영했으며 공공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주변 섬에도 방문해 예방 건강교육을 제공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인천 백령도의 진료소에서 특히 결핵 환자 치료에 힘썼다. 1974년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의 초청으로 소록도에 파견돼 1985년까지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소임하며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 메리놀 수녀회는 여성 쉼터와 이주민 센터 설립, 여성 수도회 설립 지원 등을 통해 당시 열악했던 여성의 인권과 복지 증진, 자립을 도왔다. 문애현 수녀(요안나·Jean Maloney)는 1985년 7월 이옥정(콘세트라타) 씨와 함께 서울 용산에 성매매 여성과 학대 여성을 위한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마련해 1999년까지 운영했다.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던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보금자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은 그들에 대한 상담과 기술 교육 등을 지원해 2017년 문을 닫을 때까지 수백 명의 여성에게 도움을 줬다.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인해 늘어난 과부들에게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제적 자립을 지원했는데 이를 발단으로 1960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기도 했다. 2000년대 접어들며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여성들이 늘어나 여러 도움이 필요했다. 이주 여성들은 언어와 문화, 경제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가정 폭력과 이혼 등의 문제도 대두됐다. 이들을 돕기 위해 노은혜(Patricia Norton) 수녀와 노리(Norie Mojado) 수녀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미리암이주여성센터를 운영하며 센터의 초석을 다졌다.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수녀회 설립을 도왔다. 메리놀 수녀회 본회의 첫 한국인 입회자였던 장정온(아네타)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1935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고 1950년 공산당에게 납북될 때까지 수련장과 원장 등으로 헌신했다. 또한 메리놀 수녀회는 가부장제가 심했던 1920년대 가내수공업 학교인 영유산업학교를 통해 10대 소녀들에게 일반 학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 교육을 실시해 여성 교육과 산업기술학교의 효시를 이루었다. ◆ 메리놀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행사 “지나온 100년을 여러분이 저희와 함께해 주셨던 것처럼 앞으로의 100년도 함께 지켜봐 주시고 걸어가 주십시오.” 10월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메리놀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미사와 축하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메리놀 수녀회 한국공동체 대표 성미영(안젤라) 수녀는 메리놀 수녀회를 지지해 주는 평신도들이 오늘의 주인공임을 강조했다. 기념미사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장 안구열 신부(아우구스티노·Richard Agustin)가 축하객 2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주례했다. 성찬 전례 시간에는 지구본과 문애현(요안나) 수녀의 일기, 메리놀 수녀회 창립자 마더 메리 조셉 수녀(Mary Joseph Rogers)의 사진, 장정온(아네타) 수녀의 사진이 봉헌됐다. 강론을 맡은 메리놀 수녀회 총원장 테레사 허니언(Teresa Hougnon) 수녀는 “한 세기 동안 126명의 메리놀 수녀가 한국 선교에 참여했다”며 “앞으로도 우리는 지역민들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위한 평화와 포용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축하식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자들은 설립 당시를 재현한 단막극과 노래 <Here I am, Lord>(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를 선물했으며, 행사 후에는 식사와 함께 케이크 커팅식이 진행됐다.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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