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의료복지·인권 향상 위해 쉼없이 달려오다

메리놀 수녀회(한국공동체 대표 성미영 안젤라 수녀)가 10월 21일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았다. 1924년 서울에 도착한 6명의 수녀로 시작된 메리놀 수녀회 한국공동체는 지난 100년간 우리 역사의 질곡 속에서 의료 사업, 빈민 구제, 학교 설립, 인권·생태 환경·여성 운동 등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메리놀 수녀회의 대표적인 발자취와 10월 18일 거행된 100주년 축하식을 살펴본다. 의료 지원 사업에 헌신 메리놀 수녀회는 1926년 평양교구 의주와 영유, 1928년 비현의 의료원 개설을 시작으로 수많은 의료 지원 사업을 시행해 우리나라의 의료 복지에 이바지했다. 특히 1950년 4월 15일 부산에 도시 최초 가톨릭 의료기관인 메리놀병원을 설립했다. 개원 직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민 중심으로 구호와 약품 지급, 무료 진찰과 치료를 제공했다. 수녀들은 고아원과 빈민가 방문 진료도 실시했다. 1951년 8월경에는 병원에 매일 찾아오는 환자 수가 10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주민들이 과로로 인한 질병을 많이 앓고 있던 청주교구 충북 증평에는 1956년 12월 증평병원을 세웠다. 농업 종사자가 많았던 터라 봄·가을에는 농부들이 뱀에 많이 물려 미국에서 가져온 해독제로 연 300여 명을 치료하기도 했다. 패트리시아 콘로이(Patricia Anne Conroy) 수녀는 부산가톨릭대학교의 태동이 된 메리놀병원 부속 간호학교를 1964년 3월 설립했다. 병원을 운영하며 잘 훈련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아울러 메리놀 수녀회는 여러 섬에서 의료 지원 사업을 펼쳤다. 1963년부터 1976년까지 인천 강화도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리스도왕병원을 개설해 운영했으며 공공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주변 섬에도 방문해 예방 건강교육을 제공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인천 백령도의 진료소에서 특히 결핵 환자 치료에 힘썼다. 1974년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의 초청으로 소록도에 파견돼 1985년까지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소임하며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 메리놀 수녀회는 여성 쉼터와 이주민 센터 설립, 여성 수도회 설립 지원 등을 통해 당시 열악했던 여성의 인권과 복지 증진, 자립을 도왔다. 문애현 수녀(요안나·Jean Maloney)는 1985년 7월 이옥정(콘세트라타) 씨와 함께 서울 용산에 성매매 여성과 학대 여성을 위한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마련해 1999년까지 운영했다.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던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보금자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은 그들에 대한 상담과 기술 교육 등을 지원해 2017년 문을 닫을 때까지 수백 명의 여성에게 도움을 줬다.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인해 늘어난 과부들에게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제적 자립을 지원했는데 이를 발단으로 1960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기도 했다. 2000년대 접어들며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여성들이 늘어나 여러 도움이 필요했다. 이주 여성들은 언어와 문화, 경제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가정 폭력과 이혼 등의 문제도 대두됐다. 이들을 돕기 위해 노은혜(Patricia Norton) 수녀와 노리(Norie Mojado) 수녀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미리암이주여성센터를 운영하며 센터의 초석을 다졌다.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수녀회 설립을 도왔다. 메리놀 수녀회 본회의 첫 한국인 입회자였던 장정온(아네타)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1935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고 1950년 공산당에게 납북될 때까지 수련장과 원장 등으로 헌신했다. 또한 메리놀 수녀회는 가부장제가 심했던 1920년대 가내수공업 학교인 영유산업학교를 통해 10대 소녀들에게 일반 학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 교육을 실시해 여성 교육과 산업기술학교의 효시를 이루었다. ◆ 메리놀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행사 “지나온 100년을 여러분이 저희와 함께해 주셨던 것처럼 앞으로의 100년도 함께 지켜봐 주시고 걸어가 주십시오.” 10월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메리놀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미사와 축하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메리놀 수녀회 한국공동체 대표 성미영(안젤라) 수녀는 메리놀 수녀회를 지지해 주는 평신도들이 오늘의 주인공임을 강조했다. 기념미사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장 안구열 신부(아우구스티노·Richard Agustin)가 축하객 2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주례했다. 성찬 전례 시간에는 지구본과 문애현(요안나) 수녀의 일기, 메리놀 수녀회 창립자 마더 메리 조셉 수녀(Mary Joseph Rogers)의 사진, 장정온(아네타) 수녀의 사진이 봉헌됐다. 강론을 맡은 메리놀 수녀회 총원장 테레사 허니언(Teresa Hougnon) 수녀는 “한 세기 동안 126명의 메리놀 수녀가 한국 선교에 참여했다”며 “앞으로도 우리는 지역민들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위한 평화와 포용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축하식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자들은 설립 당시를 재현한 단막극과 노래 <Here I am Lord>(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를 선물했으며, 행사 후에는 식사와 함께 케이크 커팅식이 진행됐다.

숲 속 모든 자연물은 놀잇감…“자연과 친구가 되었어요”

아이들(피조물)끼리 서로 사랑하는 모습만큼 부모님(하느님)의 마음을 뿌듯함으로 적셔 놓는 광경이 있을까. 인간을 넘어 인간이 아닌 것까지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아이들의 올된 영육은 어쩌면 깊은 생태 감수성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인천교구 가톨릭환경연대(선임대표 최진형 미카엘·지도 오병수 스테파노 신부, 이하 환경연대)는 유·청소년의 생태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심어주고자 ‘민들레·푸르니’ 환경탐사단(이하 탐사단)을 운영하고 있다. 탐사단은 10월 20일 인천 청량산으로 생태탐사를 떠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익히고 왔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자연 속에 뛰어놀며 생태 감수성을 익히고 온 현장을 전한다. 유·청소년 생태 감수성 함양 위해 자연물 활용 놀이 비롯 생태 교육 자연과 생명에 대한 관심 높이며 ‘환경 보호’ 의식도 일깨워 ■ 생명의 신비를 품은 한가을 속으로 찬 이슬이 내리는 절기 한로(寒露)를 어느새 2주 가까이 지나 보낸 10월 20일. 아침 최저 기온 8℃에 이르는 추위에도 탐사단원 22명이 청량산 입구에 모여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와 사이좋게 발맞춰 무르익어 가는 단풍 속으로 단원들은 발길을 옮겼다. 수확을 앞둔 곡식과 닮은 금빛으로 일렁이는 햇살이 산길 곳곳의 나무, 덤불, 연못, 풀꽃의 무리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파르르 날갯짓하는 곤충도, 인기척에 사부작사부작 숨는 작은 동물도,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식물도, 한복판을 걸어가는 사람의 무리도, 이 모든 걸 생동하게 한 햇살은 마치 부모님처럼 모두를 골고루 덥히고 있었다. “선생님, 단풍은 왜 드는 거예요?” 노란색, 빨간색, 곧 짙은 갈색까지 바싹 말라 떨어진 낙엽을 그러모으던 7살 꼬마 단원이 물었다. 환경연대 교육실 교사가 답했다. “나무들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이란다. 우리 사람들은 참 행복하지? 봄에 봤던 꽃의 모습을 나뭇잎으로 또 볼 수 있잖아.” 도심 한복판의 자연에서 마주한 단풍은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천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탐사단은 오늘 그것을 보고 즐기기 위해 청량산에 왔다. 단풍이 들고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한가을이야말로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오늘 마주친 신비한 생명들을 모아 나만의 꽃바구니를 꾸며 볼까요~?” 산길 곳곳에는 백합나무와 플라타너스의 큼직한 낙엽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교육실 교사들은 “낙엽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산을 거닐며 찾은 나만의 꽃과 열매, 이파리, 씨앗 모음을 만들어 보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초등학생 단원들 고사리손보다 위아래로 한 뼘씩은 큰 나뭇잎을 고이 접었더니, 천연을 담는 천연 꽃바구니 완성이다. ■ “생명이란 건 참으로 신비해” 청량산은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었다. 열매에도 갈고리 같은 두꺼운 털이 난 도꼬마리, 익으면 콩깍지가 살포시 비틀어지다가 ‘와르르’ 콩알들을 퍼뜨려 내보내는 돌콩, 빨간 그 빛깔만큼 새콤달콤한 산수유 열매…. 한가을 청량산에는 이 모든 것이 한철이었다. “우와~ ‘탕후루’(糖葫芦) 나무다!” 단원들이 너도나도 계수나무 이파리를 꽃바구니에 담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하교 후 사 먹는 탕후루와 똑같은 냄새가 난다”며 키득거렸다. 과연 이파리에서는 설탕과 물엿을 녹인 듯한 달콤한 향이 났다. 계수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어 떨어질 때, 잎에 남아있던 당분이 휘발해 날아가며 단내를 내뿜는다. 이는 자신을 방어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해발 172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중턱에 이르자 다른 나무들이 보였다. 단풍나무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빛으로 물들어 이름이 붙은 붉나무 군락으로 탐사단은 향했다. 전라도에서는 ‘불타는 것처럼 붉다’는 뜻에서 ‘불나무’라고도 부른다. 붉나무에는 후추알 같은 희끄무레한 작은 열매들이 송골송골 열려 있었다. “열매를 먹어 볼까요?”하는 교사의 제안에 아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뻗었다. “시고 짭짜름해요!” 붉나무 열매에는 사과산나트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과산나트륨은 과실산의 일종으로 젓갈을 담글 때 소금을 일부 대체해 염분 섭취를 줄여주기도 한다. 옛날 소금이 부족했던 강원도 산간에서는 붉나무 열매를 간수 대신 써서 두부를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리기만 했던 신비로운 것들이, 그것도 도심 한복판의 작은 산에도 가득하다는 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민들레’ 단원 안우진(베드로·초6) 군은 “백두산 같은 큰 산이 아니어도 산속에는 상상했던 것들이 잔뜩 있었다”며 “제각기 신기한 개성을 띤 동식물 친구들이 저마다 색다른 우리 반 친구들처럼 사랑스럽게 다가온다”며 웃었다. ■ 순환의 신비 산에는 보기 좋은 것들 일색인 것만은 아니었다. 단원들은 썩은 나무와 그루터기 무리도 마주쳤다. 하얀 곰팡이, 버섯이 잔뜩 피어 있었다. “곰팡이는 더러우니까 쓸모없는 애들이에요?” “자연 속에서 쓸모없는 존재는 없단다. 그건 우리가 함께 살기 때문이야.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쓰임 받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교육실 이선혜 교사(체칠리아·활동명 ‘무지개 물고기’)가 “버섯과 곰팡이는 숲속의 청소부와 같다”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썩고 죽은 나무 위에 자라는 버섯과 곰팡이는 긴 세월 잔해를 분해해 흙으로 돌려보낸다. 그 흙은 다시 새로운 동식물을 태동시키는 이부자리가 된다. “자연에는 ‘순환의 신비’가 있거든.” 순환의 신비는 생태환경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공생하기에 가능해진다. 불필요해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할 수 있다. 이렇듯 “낙엽도 땅에 떨어져 쓸모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이 교사가 말을 이었다. 애벌레들의 이불이 되고, 겨울에도 날아다니는 네발나비 등 곤충들의 먹이도 된다. 산언저리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를 들어 보이며 이 교사가 말을 이었다. “청설모가 땅속에 묻어놓고 그만 깜빡해 버린 도토리들도 그저 ‘버려진 음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다. 싹이 터서 참나무로 자라나면 숲의 일부가 되고, 청설모들이 먹을 더 많은 도토리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단 하나도 빚어놓지 않으신 창조주의 사랑 어린 숨결…. 무채색의 일상을 떠나 산과 숲에서 그 숨결을 한껏 들이쉬고 내쉰 단원들도 순환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사람이 혼자 잘사는 게 아니라 피조물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눈떴다. ‘푸르니’ 단원 최지웅(안티모·고1)·최리안(리타·중1) 남매는 “이 생명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생명으로서 사랑받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하고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2024-10-27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윤경호 작가

우연히 들어선 조각의 길 저는 전라북도 무안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예전에는 차도 들어갈 수 없는 오지였어요.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어요. 고등학교는 안 다녔어요. 학교에서 배우기보다는 사회에 나가 배우고 내 삶의 토대를 세우기로 생각한 거죠. ‘밖에 나가 몸으로 부딪치자’ 이렇게요. 아버지께 제 결심을 말씀드리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부모님이 실망하지 않게 정말 엄청 노력했어요. 처음에 서울로 올라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지하에 있던 작업실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서울대 조소과 출신인 고(故) 강홍도(요한) 선생님 밑에서 조각을 배웠어요. 조각이라는 일이 작가가 이미지를 구상하지만 혼자서 작업하기는 힘들어 조수가 필요하거든요. 흙으로 빚고 돌을 쪼아내는 조수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했어요. 그런 다음에는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선생님 연구실로 들어갔어요. 서울대 학생들과 같이 작업에 참여했죠. 당시에는 큰 조형물들 작업을 많이 했어요. 이런 대규모 조형물을 학생들만 데리고서는 만들 수 없었어요. 위험하기도 했고요. 우리 같은 기술자들이 주물에 들어가기 전 단계 작업 등 마무리 작업을 했어요. 김세중 선생님과 작업을 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어요. 일이 계속 있지 않았거든요. 연구실 작업이 없을 때에는 투잡, 쓰리잡까지 뛰어야 했어요. 조각가의 길로 김세중 선생님 선종 후 개인 작업실을 열었어요. 나름 독립한 셈이죠. CCK와 김세중 선생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며 알게 된 교수님들과 함께 작품들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전시회를 한번 열라고 재촉하더라고요. 제가 만드는 작품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그래서 작업실을 열고 얼마 후 전시회를 한 번 했어요. 제가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였어요. 전시회 이후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CCK와 김세중 선생님 작업실에서 조각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성물들을 만들었지만, 독립한 이후로도 저는 신자는 아니었어요. 먹고살기 힘들 때였고,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기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신자가 아니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작업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저도 먹고살아야 했기에,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됐죠. 일 때문에 선택한 종교였지만, 종교 생활에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앙이 없었을 때와 신앙이 생기고 난 후 작품에 티가 나더라고요. 전에는 정성도 좀 덜 들어갔는데, 그냥 일로 했던 거니까요. 그런데 신앙이 생기고 난 후에는 성미술 작업에 눈이 좀 뜨이게 됐어요. 많은 분들이 보고 기도하는 성물이잖아요. 마음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성미술 작업을 할 때는 교회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해요. 그동안 여러 곳에 성미술 작품을 봉헌했는데요, 그중에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성모 동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감곡과의 인연은 산꼭대기에 십자가상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했어요. 그 후 종종 성지를 오가며 여러 작업들을 했는데, 성지에서 루르드 성지에 있는 것과 똑같은 성모 동굴을 조성해 달라고 의뢰했어요. 루르드까지 갈 여건이 안 돼서 현지에 있는 지인에게 성지의 성모 동굴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다음부터는 비용문제를 빼면 일사천리로 작업이 진행됐어요. 높이가 13미터가 되는 동굴을 찰흙으로 빚어 모양을 만들었어요. 찰흙을 쓰면 정교하게 잘 표현할 수 있거든요. 거기에 표현력이 좋은 실리콘으로 본을 떠서 성모 동굴을 완성했어요. 항상 최선 다하는 작가 되고파 이제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게 되니, 제 안에 창작의 열의가 올라요. 또다른 돌파구도 필요했고요. 그래서 최근에 목우회라는 미술가 단체의 공모전에 제 작품을 선보이고 있어요. 목우회에서도 제 작품을 인정해 주고 있고, 조만간 목우회 회원으로도 등록이 될 것 같아요. 제 자신만의 작업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아요. 머릿속에 작품을 구상해도 계속 의뢰가 들어오는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제 작업을 중단하고 다른 작업을 하다보니 집중이 어려운 거죠. 목우회 회원이 되면 회원전에도 작품을 내야 하니 신경이 쓰이긴 한데요,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든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이런 면에서 저는 아직 학생인거죠. 그래서 제 작업실은 24시간 열려 있어요. 작가들도 많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품평도 하고요. 주일에도 오전에 미사를 드리고 3~4시간 작업실에 있다가 퇴근해요. 주일 오후에만 잠시 쉬는 일상이에요. 성미술 작업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만족은 없어요. 최선을 다해 만들어 설치하지만 항상 미비한 점이 보이거든요. 죽을 때까지 주어진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제가 원하는 작품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 윤경호(요셉) 작가는 1961년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조각실에서 조각 작업에 입문해 김세중 작가 연구실 등을 거쳐 현재 호성조각조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 평화화랑 개인전 등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성모 동굴을 조성했다.

2024-10-27

[저를 보내주십시오]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하)

한센인들과 오랜 세월 함께한 유의배 신부. 최근엔 언론과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도 이름이 알려졌다. 대중이 보기에 유 신부는 이제 할아버지 같은 든든한 존재다. 하지만 그도 한국에 온 초창기엔 낯선 땅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적응해 나가던 젊은이였다. 한센인들의 동반자 유의배 신부의 한국 적응기는 어땠을까. 또 유 신부의 타지 생활 원동력이었던 신앙은 어떤 모습일지 알아보자. 유의배 신부의 한국어 정복기 “한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를 익혀 가면서 느낀 건 말 그대로 ‘한국 좋구나’였어요. 분위기도 좋고 한국 사람들도 좋고…. 그냥 마음에 들었어요.” 1976년 유의배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설날이었다. 덕분에 서울 정동에서 덕수궁 가는 길에 한복을 차려입은 많은 인파를 구경했다. 가족이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광경이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이었는데 그 모습이 예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한국이 좋아졌다. 한국어는 명도원(明道院)에서 배웠다. 명도원은 당시 한국에 선교사로 온 외국인 성직자·수도자들을 위한 ‘한국어 학교’로 1964년 문을 열었다. “수녀님들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목사님까지 다양한 분들이 명도원에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10명이었는데 졸업은 2명만 했지요.” 유 신부는 “난 명도원 2년 과정을 모두 마쳤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는다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한국어 ‘실전 훈련’은 따로 있었다. 서울의 한 신부님이 유 신부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 아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곤 유 신부에게 대전 갈마동에 작은 형제회가 운영하는 성심원 보육시설을 추천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아이들과 부대끼며 한국어가 좀 더 익숙해졌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거죠. 제가 말하다 틀리면 망설이지 않고 ‘한국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라며 교정해주는 겁니다. 어른들은 부끄러워해서 제가 뭔가를 틀려도 말을 잘 안 해주거든요.” 짧은 기간임에도 유 신부는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겁게 기억했다. 그 뒤로 산청 성심원에 오기 전까지 진주, 제주도 등을 돌며 다양한 한국 문화를 맛봤다. 프란치스코회 입회 후 서서히 깨달은 선교 사명 한국에 들어온 지 4년, 한국 문화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1980년 산청 성심원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 왔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부터 낯선 땅에서 언어를 익히고 한센인들의 안식처로 가기까지. 유 신부는 시종일관 즐겁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지만 타지에서의 삶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 신부가 행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성령에 이끄심에 몸을 맡긴 덕분이었다. 고향인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동네 성당에 가족을 따라 매주 나갔다. 성당은 집에서 겨우 5분 거리에 있었다. 삼촌이 프란치스코회 신부이기도 해 수도회 신부님들을 자주 접했다. 유 신부는 “신부님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분인지 잘 몰랐고, 처음엔 주변 말만 듣고 막연하게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릴 적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은 돈이 없어도 바닷가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도 ‘프란치스코회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삼촌 신부님을 따라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그때만 해도 사제 성소에 대해, 수도회 사명에 대해 전혀 몰랐다. 수도회의 각종 모임에 나가며 조금씩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사명을 마음에 새겼다. 선배 선교사들에게 아시아의 여러 국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린시절 라디오와 아버지에게서도 들었던 한국이었다. 유의배 신부가 전하는 신앙 프란치스코 성인도 한센인들과의 만남 이후 완전히 새사람이 됐다. 유 신부에게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을 물었다. 유 신부는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피하려고 하다가 그들을 안아주고 삶이 바뀐 것처럼,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갖고 복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고방식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자신이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령을 보내 달라고 청해야 한다”고도 했다. “천국이라는 좁은 길로 가기 위해선 정말 어린이처럼 돼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놀고, 마음이 가난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신 길이 바로 이거예요.”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유 신부도 편견 없이 한센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44년간 한센인들과 더불어 산 비결이었다. 성심원에서 만난 유 신부는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을 쏙 빼닮아 있었다.

2024-10-27

성스러운 영혼 기억하는 특별한 날…세상 떠난 이들 위해 기도를

11월 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고 다음 날인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다. 두 특별한 날은 서로 연관이 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성인을, 위령의 날은 앞으로 천국에 들어갈 연옥 영혼을, 곧 둘 다 ‘성스러운 영혼’을 기억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10세기에 정립된 위령의 날은 4세기에 시작된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 날로 정해졌다. 모든 성인 대축일과 위령의 날의 역사와 의의, 기념 방법과 이때 부여된 전대사에 대해 알아본다. 11월 1·2일, 영혼 위해 기도와 미사 봉헌 위령의 날에는 미사 세 번 봉헌하며 추모 11월 1~8일에는 전대사도 받을 수 있어 특히 숨겨진 성인들을 위한 ‘모든 성인 대축일’ 교회는 처음에 순교자만 기렸지만 다른 성인들에게까지 축일을 확대하면서 1년 365일이 전부인 전례력으로 수많은 성인을 모두 기념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생긴 ‘모든 성인 대축일’은 특히 역사 속에서 잊히거나 축일이 없는 성인들을 위한 날이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재위 608~615)이 로마 판테온 신전을 성모 마리아와 모든 순교자에게 바친 교회로 축성하며 5월 13일로 제정됐다. 그 뒤 731년 11월 1일 성 그레고리오 3세 교황(재위 731~741)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 부속 성당을 사도, 순교자뿐 아니라 모든 성인을 위해 바치면서 날짜가 바뀌었다. 그레고리오 4세 교황(재위 827~844)은 11월 1일 기념행사를 교회 전체로 확대했으며 1484년 식스토 4세 교황(재위 1471~1484)은 축일에 성탄, 부활 대축일과 같은 8부 축제를 추가했고 이는 1954년까지 이어졌다. 모든 성인 대축일 8부 축제는 오늘날 위령 성월 전대사 수여 기간으로 남아있다. 프랑스, 독일 등 많은 국가에서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축하하고 있다. 이 기쁜 날 신자들은 성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모범을 따라 하늘나라에서의 지복을 간구하며 미사와 기도를 봉헌한다. 또한 성인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소망하는 바의 중재를 청하고 성인들처럼 지상에서도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도록 간청한다. 미사를 세 대 드릴 수 있는 ‘위령의 날’ ‘위령의 날’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 정화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의 미사 봉헌과 기도, 희생 등은 연옥 영혼들이 죄를 씻어내는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1030년경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장 성 오딜로(961/962~1049)는 클뤼니 수도회의 모든 수도원이 매년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켜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는 후에 11월 한 달을 위령 성월로 보내는 것으로 발전한다. 실베스테르 2세 교황(재위 999~1003)은 위령의 날을 승인하고 여러 지역에서 기릴 것을 권고했으며 14세기에 들어 교황청은 이를 보편 교회에 널리 확대했다. 위령의 날에는 유일하게 미사를 세 번 봉헌할 수 있다. 물론 영성체도 세 번 할 수 있다. 1915년 8월 10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사자가 많고 교회가 파괴되며 전쟁이 끊이지 않자 베네딕토 15세 교황(재위 1914~1922)은 교황령 「제대의 피 없는 제사」(Incruentum Altaris)를 통해 위령의 날에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기를 간곡히 권고했다. 세 대의 미사 중 한 대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지향으로, 다른 한 대는 죽은 이들을 위해, 마지막 한 대는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하도록 하고 있다. 위령의 날은 우리가 모두 지상의 순례자이며 언젠가는 창조주인 하느님께 돌아갈 것을 상기시켜 준다. 많은 나라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신자들은 조상 혹은 가족의 묘소를 방문해 꽃으로 장식하고 촛불을 켜서 추모한다. ■ 위령 성월 전대사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을 전부 없애주는 것을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 plenaria)라고 한다. 교황청 내사원에서 펴낸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에 따르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신자들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혹은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또는 교구장이 동의하면, 그 앞이나 뒤에 오는 주일에, 또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성당이나 경당을 경건히 방문하여 그곳에서 주님의 기도와 신경을 바치면 전대사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때 받은 전대사는 본인에게 적용할 수 없고 연옥 영혼을 위해 양도만 할 수 있다.

2024-10-27

[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130년 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서 사목하던 임 가밀로 신부(Camille Buillon, 파리 외방 전교회)가 본당 사목지로 안성맞춤인 자리를 찾았다. 장호원과 이웃한 감곡 매산(梅山) 아래,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109칸짜리 집이었다. 그리고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성당의 주보는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거짓말처럼 목자의 기도는 현실로 이뤄졌다. 1896년 성모 성월, 임 가밀로 신부는 모든 집터와 산을 얻고 그해 묵주 기도 성월 이 자리에 본당을 설립한다.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땅, 성모님과 관련된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곳,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된 성소의 보금자리 그리고 한국의 루르드라 불리는 곳.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의 처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해발 160m 남짓한 매산을 병풍 삼아 가까이는 감곡 시내, 멀리는 경기 장호원의 너른 들판을 내려보는 자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마당에서 본당 초대주임 임 가밀로 신부 동상을 가장 먼저 만난다. 1947년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 기도하며 선종할 때까지 51년간 이곳에서 사목한 임 가밀로 신부. 1869년 프랑스 루르드 인근 빌레아드루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루르드를 찾았고 루르드 성모께 자신을 봉헌하며 사제의 꿈을 키웠다. 1893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해 조선에 입국해 성모님 사랑의 역사를 이곳 감곡에서 꽃 피운다. 동상 발아래는 그가 평소 자주 신자들에게 전하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 성당 입구를 지나면 성모자상과 옛 사제관인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든 그늘을 머리에 이고 몇 걸음 더 걸으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라 쓰인 글귀 곁으로 예수 성심상이 예수 성심 광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길가에 놓인 국화 화분 하나하나를 묵주알 삼아 묵주 기도 바치며 성모 광장으로 향한다. 성모 광장은 임 가밀로 신부의 성모님 사랑과 이에 응답하신 성모님의 큰 은총을 보여주는 자리다. 1943년 일본인들이 매산 중턱, 성당보다 더 위쪽에 신사를 지으려 터를 닦자 그는 공사 터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주신다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묘하게도 공사 중 기상 이변이 자주 일어나며 공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이내 해방을 맞이한다. 1955년 성모승천대축일 이곳에는 성모 광장이 들어섰고 100차 성체대회가 열린 2018년에는 프랑스 루르드의 것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성모 동굴이 봉헌됐다. 환희의 신비로 시작해 영광의 신비로 마친 묵주 기도의 끝. 신사가 지어질 뻔했던 광장 가장 높은 곳에 성모님이 두 손 모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21,8) 감곡 시내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고딕식의 붉은벽돌성당은 1930년 세워졌다. 제대 위 성모상은 아픈 역사와 이를 감내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루르드 성지에서 만들어져 성당 봉헌 당시 안치된 성모상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총탄에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7개의 탄흔은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연상케 한다. ‘매괴의 어머니’, ‘칠고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많은 이가 외적·내적 치유를 받는 자리. 정갈하게 차려입은 한 신자가 홀로 앉아 묵상하는 모습을 성모님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성당을 나서는 길. 라틴어 문구가 순례자의 발아래 새겨져 있다. 그 마음 간직하며 순례를 마친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21,8) ◆ 순례 길잡이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www.maegoe.com)은 2006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발표된 청주교구장 교서를 통해 ‘매괴성모순례지’로 지정됐다. 성체성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드러내기 위한 성체현양대회는 1914년부터 매년 10월 첫 주 목요일 거행된다. 올해 106차 성체현양대회는 지난 10월 3일 미사와 성체행렬, 산상 성체강복 순으로 열렸다. 옛 사제관을 개축한 박물관에는 임 가밀로 신부가 1914년 국내 첫 성체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등과 본당의 옛 문서, 사진 등 본당과 한국교회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기도에 맛 들이고 삶의 현장에서 사랑하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기도와 찬미의 밤’은 매월 첫 토요일 저녁 열린다. 순례자들의 개인 묵상과 기도를 위한 ‘소울 스테이’(매주 금~주일)도 운영되고 있다. ※ 미사 수~토 오전 11시 주일 오전 10시30분(본당 교중미사) ※ 순례 문의 043-881-2808 매괴성모순례지 사무실

2024-10-20

다양한 교회 구성원 목소리 눈길, 제작 관행 깨려는 노력 필요

◎ 일시 : 2024년 10월 10일 오후 6시30분 ◎ 장소 : 한국프레스센터 ◎ 참석자 김지영 이냐시오 위원장(전 동국대 교수)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상봉동본당 주임) 김재홍 요한 사도 위원(시인,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성용규 도미니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신평본당 주임) 엄혜진 헬레나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기획마케팅팀) 정다운 안젤라 위원(예수회 마지스 청년센터 청년사목 코디네이터) 최현순 데레사 위원(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가톨릭신문 편집자문위원회(위원장 김지영 이냐시오)는 10월 1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27차 회의를 열었다. 편집자문위원들은 가톨릭신문 7월 7일자(연중 제14주일)부터 10월 6일자(연중 제27주일)까지 보도된 기사와 기획·연재에 관한 의견과 개선 방향을 제안했다. □ 김지영 위원장 - 7월 28일자 1면 톱기사는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나 발표자료를 보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와 관련된 의정부교구 노인사목 현장을 소개했다. 발표 저널리즘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들어가 심층 취재해 기사를 준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반면 7면 세계교회면에는 이미 일주일 전 일간지와 인터넷 신문에 보도된 ‘조바이든 미 대통령 후보 사퇴 선언’ 기사가 실렸다. 주간지의 특성을 전혀 살리지 못한 기사와 제목이다. 계속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사람과 사람’ 면의 경우 지나치게 고위성직자 중심의 동정 보도에 치중돼 있다. 게다가 고위성직자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만나기 보다는 신임 장관이나 배우 등 유명인이나 고위공직자를 만났다는 내용 위주로 보도되고 있다. 교회 언론뿐 아니라 일반 매체에서도 잘못된 관행으로 지적받는 부분이다. 추석 연휴 탓이라 할 수 있지만 같은 필자의 연재가 2개 면에 걸쳐 연이어 나오는 관행도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미리 필자의 양해를 구해 조절을 해야 할 것이다. □ 성용규 신부 - ‘이웃종교 만남’ 섹션은 매번 관심을 끄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신교에서 발간한 「한국교회 트렌드 2025」소개, 개신교 통계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 소장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 교회도 배우고 참고할 점이 많음을 알게 됐다. 8월 25일자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 봉헌금은 꼭 앞에 가서 내야 할까?’는 봉헌금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로 신자들이 앞으로 나가 봉헌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생각이 다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 봉헌금을 내는 것은 오히려 전례의 흐름을 방해한다. 앞으로 나가 봉헌하는 교회는 한국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꼭 이렇다’고 하기보다 유럽 등 다른 나라의 예도 참고해 균형을 잡은 내용을 실었으면 한다. □ 김재홍 위원 - 1면 톱기사 제목이 전반적으로 길다. 짧고 쉽고 기사의 내용을 명확히 전달하는 제목이어야 한다. 내지 1개면을 할애하는 특집 기사의 경우, 이 기사가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유추할 수 없는 제목들이 있다. 제목과 전문까지 읽었는데도 어떤 내용을 핵심으로 한 기사인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이 지면을 보고 한눈에 내용을 인식할뿐 아니라 관심있는 부분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도록 박스기사 등을 넣는 등 편집에 더욱 신경을 썼으면 한다. 발표 저널리즘 벗어난 노인 관련 심층 취재 눈길 시의 지난 외신 보도 아쉬워…주간지 특성 잘 살리지 못해 이웃종교 만남 기획 흥미…교회 경종 울리는 보도 기대 □ 엄혜진 수녀 - 현재 연재 중인 정민(베르나르도) 교수의 ‘일요한담’은 신앙인이 겪는 다양한 경험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글로 주의깊게 읽고 있다. 이동옥(헬레나) 교수의 ‘방주의 창’ 또한 여성과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돌아보고 신앙인의 역할을 환기시키는 글이다. 9월 1일자 출판면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기사는 책 표지와 함께 이미지가 실렸다. 보다 친절하게 책의 내용을 전하겠다는 편집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기사의 내용과 어울리는 이미지였는지는 의문이다. 이미지의 출처 또한 꼭 밝혀야 한다. □ 정다운 위원 - 청년들의 목소리가 실린 기사가 늘어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청년 관련 기사의 경우 고위성직자의 강론이나 멘트 보다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기사에 더욱 많이 할애해줬으면 한다. 9월 1일자 1면 톱기사(유아사목 활성화 앞장서는 인천교구 시흥 은계본당) 제목은 ‘눈총’과 ‘은총’을 한 문장에 넣어 기사의 의도를 적절히 그리고 재미있게 전했다고 본다. 다만 ‘우리 성당은 항상 예스키즈존’이라고 특정 성당으로 제한하기보다 교회의 과제라는 관점에서 ‘우리’를 빼고 ‘성당은 항상 예스키즈존’이라고 하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다양한 수호성인 정보 소개, ‘묵주 닥터스’ 활동, 신부들의 ‘부캐’ 트렌드 등 시의적절하고 흥미로운 기사가 지면을 채우고 있다. □ 김민수 신부 - 세계청년대회 그 자체를 잘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 패러다임 아래서 청년 사목을 활성화 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10월 6일자 사설을 눈여겨봤다. 앞서 위원들께서도 언급했지만 유아사목 활성화에 앞장서는 인천교구 은계본당 사례 기사는 지난 몇 십년 간 영유아 사목과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적절한 보도였다. 앞으로도 교회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역할을 가톨릭신문이 해줘야 한다. □ 최현순 위원 - 9월 29일자 ‘내눈의 들보’는 교회 내 봉사자를 교회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냉철하게 지적하고 봉사자의 입장을 뚜렷하게 밝힌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 백성이 목소리를 전할 공간을 마련하고, 독자들에게 그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교회 언론에 주어진 몫이자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다. 그 자체로 시노달리타스를 언론이 실천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청년대회 관련 기사 비중이 높지만 기사가 편중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다른 중요한 사안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균형 잡힌 편집방향과 폭넓은 시각으로 신문 제작에 임해야 한다. □ 김지영 위원장 - 지난 2년간 편집자문위원으로서 가톨릭신문 지면을 꼼꼼히 살펴보고 아낌없이 조언해 주신 위원님들 그리고 위원들의 지적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변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해 주신 가톨릭신문사 사장 신부님과 편집국 모든 임직원들에게 편집자문위원장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그동안의 제작 관행을 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관행에 안주해서는 발전이 없다. 가톨릭신문이 앞으로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발맞춘 변화의 노력을 꾸준히 해 나갔으면 한다. 곁에서 응원하겠다. □ 본지 사장 최성준(이냐시오) 신부 - 가톨릭신문 구성원 모두는 편집자문위원들께서 제안하신 내용을 귀에 담고 마음에 새겨 교회 복음화를 위해 제 역할을 하는, 독자들이 신앙의 길잡이로 여겨 열독할 수 있는 가톨릭신문을 만들어가는데 힘쓸 것이다. 지난 2년간 가톨릭신문의 발전을 위해 귀한 시간 내어 고견을 전해주신 편집자문위원들에게 감사 드린다.

2024-10-20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심순화 작가

잊고 있었던 화가의 꿈 저는 충청남도 아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동네에 20가구도 채 살지 않는 작은 곳이었어요. 어릴 적엔 진짜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고, 동네엔 또래 친구 2~3명 밖에 없었어요. 뭐 맨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게 낙이었어요. 맑은 시골 하늘에 피어나는 구름을 그린 것이 기억나는데요,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궁금해했어요. 그리고 주머니에는 색실을 모아 항상 지니고 다녔어요. 형형색색의 색실 색깔이 너무 예뻤고 저를 설레게 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될 거야’라고 했는데, 지금 그렇게 살고 있네요. 그렇게 그림은 저와 굉장히 가까운 존재였어요. 학교에서도 미술 시간만 되면 너무 행복했어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존재감이 없던 제가 드러나는 순간이었거든요. 저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제가 상업고등학교에 가길 바라셨죠.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저는 그렇게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친구들과 놀러 다닌 것만 기억나요.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증만 땄고요. 학교에 가기 싫어서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했어요. 그런데 회사 경리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100원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계산해야 할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을 가려고 준비했어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은 자연스럽게 잊게 됐어요. 뭐 그때도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 나눠주기는 했지만요. 그렇게 일반대학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언니가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전기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요. 실기시험날 물감의 화학물질 때문에 갑자기 눈이 안 보여 그림을 망쳐버렸어요. 후기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이번에 떨어지면 영영 대학교는 못 다닐 것 같았어요. 그래서 충분히 합격하고 전액 장학금으로 갈 수 있는 학교를 지원했어요. 그리고 다행히 원하는 조건으로 대학에 합격했어요. 성화 작가의 길로 대학에서는 열심히 그림 그리고 공부만 했어요. 4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정해진 학점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동기들이 나보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라고 수군대기도 했어요.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원을 열었어요. 아이들을 좋아하고 뭔가 내가 가진 탈렌트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아이들이 천사로 보였어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싶어 유아교육 자격증도 딸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장애인 학교에 있던 수녀님이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장애인 아이들에게 꿈과 사랑,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림을요. 그림 규모가 커서 그 학교 창고에서 작업을 했어요. 그림이 완성된 후, 수녀님께서 그 그림으로 카드 1만 장을 찍어서 여기저기 뿌렸어요. 저에게도 한 500장을 주셨어요. 200장 정도는 주변에 돌리고 나머지 300장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서 그 카드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제가 갖고 있던 것을 드렸어요.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당장 그만두라’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탈렌트를 주셨는데 무엇을 하는 거냐고요. 성화를 그리라면서요.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라, 신부님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았어요. 제가 ‘아니요’라고 못하기도 했고요. 당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 신부님께서 부임하셨어요. 그런데 저보고 성화를 그리라고 하셨던 그 신부님이었어요. 저보고 대뜸 ‘여기서 만나는군요 작가님’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수원교구 나경환(시몬) 신부님이였어요. 수원가톨릭미술가회 담당이기도 하셨는데, 저보고도 가입하라고 해서 들어갔죠. 그래서 전 신부님께 ‘이제 뭘 그려야 하죠?’라고 물었어요. 성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신부님은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미술가회에 가입하고 전시회에 그림을 내야 하는데, 제가 당시 감명 깊게 읽었던 ‘아일랜드의 시’라고 아이가 매일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시를 내용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한 사제가 거양성체를 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막 퍼지는 거예요. 그게 1999년이었어요. 그렇게 제 그림이 퍼지면서 2002년 ‘서울주보’에 실리게 됐고, 또 프랑스 루르드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이어서 교황청에까지 제 그림을 보낼 수 있게 돼서 정말 큰 영광이에요. 주님 주신 탈렌트 최선을 다해 쓰고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후 제가 생각할 수 없었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어요. 지난 25년 동안 쉼 없이 계속 성모님 성화를 그리고 있어요. 한국의 성모화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사는 꿈을 꾸면서 행복했던 기억으로 시작됐어요. 한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성모님을 그리자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어느 수녀님이 ‘아베 마리아’ 테이프를 주셔서 들었는데, 뭔가 모르게 제가 붕 뜨고 설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후로 한 2년 정도 성모님의 꿈도 꿨어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네 성모님을 그리게 됐어요. 지금까지도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해요. 제 힘으로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건강도 주셨고요. 그리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시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천사처럼 느껴져요. 그림 그리는 일은 제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주님의 뜻에 따라 쓸 수 있도록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제 그림으로 조그마한 경당을 하나 꾸며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탈리아 피렌체 성 마르코 수도원 방마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이 있는 것처럼 어느 수도원이나 피정의 집 방에 제 그림이 한 점씩 두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 심순화(가타리나) 작가는 1961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999년부터 성화 전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루르드 성지를 비롯해 교황청 복음화부와 성직자부, 당고개 순교성지 등 국내외에 다양한 작품이 소장돼 있다. 최근에는 교황청 바티칸 정원에 ‘평화의 모후’를 봉헌하기도 했다.

2024-10-20

[저를 보내주십시오]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상)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와 한국의 한센인들과 무려 44년을 동행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Louis M. Uribe). 한센인들의 안식처 경남 산청 성심원에서 만난 유 신부는 턱수염 풍성한 할아버지의 포근함을 지니고 있었다. 왜 하필 한국이라는 나라에, 또 한센인들과 오랜 기간 동행하게 된 걸까. 산청성심원 유의배 신부의 소박하고 따뜻한 선교 이야기를 소개한다. 환자 돌보는 일은 익숙했죠 유 신부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을 즈음, 수도회엔 나이 지긋한 수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간병 일을 배웠다. 그 덕에 환자와 동반하는 삶이 익숙해졌다. 적성에 맞았는지 수도회 사람들은 유 신부에게 “나중에 선교 나가도 환자를 돌보고 싶으냐”고 묻기도 했다. 고향 스페인에서 한센인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의학 발달로 한센병 전염성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럼에도 훗날 한국에서 한센인들과 생활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때였다. 유 신부는 고향에서 환자를 돌보고 한센인들에 대해 알게 된 걸 하느님의 이끄심이라고 확신했다.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꿈에도 몰랐지만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주신 거죠.” 첫 선교지 볼리비아에서 한국에 오기까지 한국 선교에 대한 소망은 전부터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듣던 라디오에서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었는데 6·25전쟁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유의배 신부는 그 뒤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마음속에 간직해왔다. 수도회 입회 후 그는 한국 선교를 원했지만 관구장 신부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같은 스페인어를 쓰는 남아메리카 국가를 추천했고, 볼리비아에서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뗐다. 해발 4000미터 티티카카 호수 인근 마을에서 주민들과 2년간 살았다. 볼리비아 공용어 중 하나인 아이마라어도 열심히 배웠다. 2년 후 한국에 올 기회가 찾아왔는데, 막상 정든 볼리비아를 떠나는 결정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한다는 선교사로서 사명에 따라 1976년 한국에 왔다. 당시 한국 도시의 모습을 본 유 신부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한국의 모습은 유 신부 눈에 미국 뉴욕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난한 곳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던 유 신부는 “도대체 여기서 내 역할이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산청 성심원에서 한센인들과 더불어 살다 그러던 중 한센인이 모여 사는 성심원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하느님의 섭리를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스페인에서 배운 간병 경험과 한센인들에 대해 배운 기억이 떠오르며 비로소 자신이 왜 한국에 오게 됐는지 깨달은 것. 그렇게 산청 성심원으로 와서 지금까지 44년을 지내고 있다. 유 신부는 고향에서의 경험으로 한센병이 타인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견뎌왔지만, 타인의 사소한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는 여린 마음의 그들을 위한 배려이자 사랑이었다. “나에게 음식을 같이 먹자며 쓰던 수저를 건네더라고요. 저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그들이 상처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전염이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눠 먹었죠.” 한국 사회는 한센인들을 배척했지만 오히려 한센인들은 순박하고 마음이 넓었다. 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는 자신을 돌보는 유 신부에게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할아버지의 선하고 반가운 웃음을 유 신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저보고 먼 타지에서 생활하시느라고 힘들지 않냐며 말을 건네시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죠. 제가 위로를 해 드리러 갔는데 역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심원엔 550명 정도가 생활했다. 유 신부가 그 많은 이들의 가족관계를 파악하게 된 건 어린이집 아이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유 신부에게 “저분은 우리 어머니고, 저분은 할아버지예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고 한다. 아이들 덕에 성심원 사람들의 가족관계를 거의 알게 됐다. 한센인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성심원에서 지내던 유 신부는 한국 내 다른 선교지로 떠날 기회를 마다했다. 성심원에서 생활이 행복해 다른 곳으로 떠날 마음이 없었다. 볼리비아에서처럼 한센인들과 사랑에 빠졌다. 유 신부는 “한센인은 예수님 수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부끄럼 없이 보여주길 바랐다. 유 신부가 한센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뭘까. 유 신부는 “모든 사람은 언젠가 아프고 늙는다”며 “결국 인간은 모두가 육적인 고통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했다. 다만 한센인들은 그저 조금 이른 시점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일 뿐. 유 신부는 이어 한센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이 아름답게 살게 하려고 십자가 형벌을 당하신 예수님 모습을 손수 입은 이들이 당신들입니다. 자신을 세상에 자랑하며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2024-10-20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탈핵 위한 한·일 연대

매년 10월이면 한국과 일본교회의 탈핵운동 활동가들은 양국을 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가 아니었다. 핵발전소와 가까운 접근금지구역 인근이거나 핵발전소 사고로 사람들이 떠난 황폐화된 마을이었다. 도시에서 ‘탈핵’을 외치는 그들을 보는 시선도 곱지만은 않았다. 편안하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핵발전을 도시 사람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일 탈핵 평화순례 10년은 어려움을 견뎌내는 고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10일, 10번째 순례를 시작한 순례단의 표정은 아름답고 결연했다. 하느님이 주신 나침반을 따라 옳은 길을 가는 이들의 여정에는 희망의 빛이 따랐기 때문이다. ■ 한일 교회 탈핵운동 10년의 시작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인근 마을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젊은이들이 떠난 도시에는 남은 생을 고향에서 보내려는 노인들만 남았다. 천혜의 어장이었던 후쿠시마현 해변은 고기를 낚을 수도, 해수욕을 즐길 수도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됐다. 사고 이후, 더 많은 문제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핵발전소에서 일하거나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물었으나 “문제가 없다”며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기업과 정부의 잔인한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 그리고 내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은 없었다. 같은 해 일본 센다이교구에서 열린 한일 주교 교류모임에서 주교들은 핵발전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리고 일본주교단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핵발전소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교회는 탈핵운동을 위한 교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파괴하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핵발전소를 유지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2014년 한국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가 합류하면서 탈핵평화운동의 형태로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순례하는 ‘한일 탈핵 평화순례’가 시작됐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총무 양기석(스테파노) 신부는 “핵발전소는 세워질 때부터 시민들 특히 해당지역의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시작될 뿐 아니라 전기를 편하게 쓰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핵발전소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피폭문제가 숨겨지고 있다”며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힘없는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하느님께서 원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인 모습이기에 신앙인들은 탈핵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핵발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 위해 동행할 것 격년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10년간 이어진 순례. 지난해에는 일본 센다이교구 안에 있는 핵발전소와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을 둘러봤다. 올해 한국으로 넘어온 순례단은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경주의 월성핵발전소와 부산의 고리핵발전소를 순례했다. 11일 경주에 도착한 순례단은 월성원자력홍보관 앞에서 10년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주민들을 만났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5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인 가운데, 남은 핵발전소의 수명연장까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 황분희씨는 “핵발전소 인근에서 미세하게 공기로 방사능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환경에서 몇십 년간 살면서 내 자식, 손주들의 건강이 위험한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며 “한국수력원자력과 정부 등 핵발전소와 관계있는 모든 곳에서 주민들의 안전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방사능으로부터 위험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집이 매매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아리를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심정은 막막하기만 하다. 원전제한구역 914m 기준 대상에서 빠진 원전 1km 안 3개 마을 주민들은 10년째 “이주대책 마련과 노후원전 폐쇄”를 촉구하고 있으나 정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주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순례에 참여한 노리코 히루마 씨는 “몇 년째 월성핵발전소에 와서 주민들을 만났지만 이분들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며 “신앙은 인권과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이분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것에 저항하며 함께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기석 신부는 순례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1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핵발전소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만났고 진실을 은폐하는 거대한 벽을 마주했다”며 “이것을 깨기 위해 10년간 노력을 했듯이,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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