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주일 특집] “교황님이 스마트워치를?” 손목시계로 보는 교황 이야기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교회의 반석,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교황. 우리는 미사 때마다 교황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교황의 행보를 접한다. 교황 주일을 맞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황의 나라 바티칸 시국에 깃든 신앙과 일상의 모습, 그리고 교황이 손목에 찬 시계를 통해 전통과 변화, 영성과 인간미가 교차하는 교황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본다. “교황님이 애플워치를 차고 계시네?” 레오 14세 교황이 5월 9일 선출 후 첫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이 보도되자, 시계 애호가들이 술렁였다. 제의 사이로 ‘애플워치’로 추정되는 손목시계가 포착됐기 때문. 이후에도 교황은 선출 이전부터 사용하던 이 시계를 계속 착용하고 공식 석상에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전통적인 교황 복장에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모습에 언론도 주목했다. 여러 매체는 시계를 언급하며, 교황이 진보와 보수, 전통과 개혁의 균형을 이끌 인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교황의 시계가 화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원래 손목시계는 세속적인 시간 관리의 상징으로, 교황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역대 교황들은 회중시계처럼 주머니에 넣어 사용하는 시계를 사용하곤 했다. 이 관례를 깨고 처음 손목에 시계를 찬 교황은 성 요한 바오로 2세다. 그의 시계는 롤렉스(Rolex)의 ‘데이트저스트’ 모델이었다. 평소 검소했지만 시계만큼은 스위스 명품을 선택했다. 다만 롤렉스 중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모델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일으킨 변화는 비단 시계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황은 로마에 머문다’는 통념을 깨고 재위기간 129개국을 순방했고, 각 국 수장과 만나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그의 시계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 실용적인 도구, 외교 무대에서는 품격을 갖춘 상징이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독일 명품 융한스(Junghans) 시계를 착용했다. 빨간 명품 구두로도 화제가 됐던 그는 명품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언론은 교황의 시계가 고가의 제품이라거나, 또 시계 업체에서 홍보 효과를 노리고 선물했다는 등의 보도를 했다. 논란은 교황의 대담집 「세상의 빛」이 출간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책에서 그는 “1960~1970년대에 나온 융한스 손목시계를 차고 있느냐”는 질문에 “누님이 세상을 떠날 때 저한테 주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누나 마리아 라칭거는 2005년 교황 선출 당시 이미 선종했지만, 생전 남매는 매우 각별한 관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계에는 그의 청빈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위스 스와치(Swatch)의 ‘원스 어게인’ 모델로, 현재 국내 판매가는 8만 원 정도다. 교황은 2014년 한국 방문 때도 이 시계를 차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만났다. 교황의 청빈은 시계뿐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서 드러났다. 선종 시 교황의 재산은 100달러(약 14만 원)에 불과했다. 구매 당시 미화 50달러였던 그의 시계는 2022년 미국 장학재단의 요청으로 자선 경매에 출품됐는데, 무려 5만6250달러, 우리 돈으로 약 7300만 원에 낙찰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난’이 담긴 시계가 천 배가 넘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교황 주일 특집] ‘교황의 나라’ 바티칸 시국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교회의 반석,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교황. 우리는 미사 때마다 교황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교황의 행보를 접한다. 교황 주일을 맞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황의 나라 바티칸 시국에 깃든 신앙과 일상의 모습, 그리고 교황이 손목에 찬 시계를 통해 전통과 변화, 영성과 인간미가 교차하는 교황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본다. 면적 0.44km², 남성 비율 95%…가장 작고 특별한 나라 교황의 나라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면적은 0.44km²로 우리나라 경복궁(0.43km²)과 비슷하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도보로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엄연한 국가이기에 국기도 있다. 국기에는 황금과 은을 나타내는 노란색과 흰색 바탕에 황금 열쇠와 은 열쇠를 교차시키고 교황을 상징하는 삼중관을 배치했다. 열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며 황금 열쇠는 천상의 권위를, 은 열쇠는 지상의 권위를 나타낸다. 바티칸 시국 시민권자와행정직 직원과 가족 등을 합한 총 인구는 800여 명. 교황 외 성직자가 약 300명, 근위대는 140여 명, 일반 직원은 130여 명 등이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도 여기에 포함된다. 시민권자 약 600명 중 남성은 95%로 세계에서 남성 비율이 가장 높다. 시민권자 대부분이 성직자와 근위대원이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 그 자체로 ‘천국 열쇠’…바티칸 정원에는 한국 성모님도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과 레오 14세 교황 선출 당시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16~17세기에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사도 무덤 위에 세워졌다. 교황은 이곳에서 부활이나 성탄, 성유 축성 미사 등 주요 미사를 주례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 선출 직후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 등장했다. 대성당 북쪽 외벽에는 한진섭(요셉) 작가가 조각한 성 김대건(안드레아·1821~1846) 신부의 성상이 들어서 있다. 대성당과 성 베드로 광장, 그리고 로마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는 하늘에서 보면 커다란 열쇠 모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 베드로에게 전한 천국의 열쇠를 형상화했다. 광장은 최대 8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한 해 방문자 수는 약 670만 명으로 프랑스 루르드 박물관에 이어 세계 2위다. 콘클라베가 열린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아테네 학당>,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의 <라오콘 군상> 등은 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힌다. 박물관과 연결된 사도궁에는 교황 집무실과 숙소를 비롯해 1000개 이상의 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이곳이 아닌 성녀 마르타의 집에 머물렀다. 실제 촬영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영화 <두 교황>의 배경이 된 바티칸 정원은 바티칸 시국 전체 면적의 절반을 차지한다. 교황의 개인 산책로이자 명상 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돼 있다. 자연 지형을 살린 영국식, 웅장하고 화려하며 분수 등을 설치한 프랑스식, 기하학적 구조와 대칭적 디자인으로 조각과 미로 등을 배치한 이탈리아식 정원이 혼합돼 있다. 2024년에는 <평화의 모후이신 한국 성모님 모자이크상>도 정원에 자리했다. 역과 슈퍼마켓, 우체국…눈길 끄는 일상 공간 바티칸 정원 남쪽에는 작은 역과 철도도 놓여 있다. 1934년 개통한 것으로 시국 내 약 300m 정도의 철길은 이탈리아 로마 산 피에트로 역과 연결된다. 성 요한 23세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실제로 이곳에서 출발해 아씨시로 이동했다. 슈퍼마켓도 있다. 근위대, 직원 등 상주 인구와 외교관들만 이용할 수 있다. 부가세가 없기에 상품 가격은 이탈리아 시중보다 20~30% 저렴하다. 바티칸 시국은 매년 바티칸 유로 주화, 금은화, 기념주화 등도 매년 발행한다. 수집 가치가 커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주화에는 보통 교황의 초상화가 들어갔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부터 초상화를 교황 문장 등으로 대체했다. 이외에도 바티칸 시국에는 헬리콥터가 이착륙하는 헬리포트, 40개 언어로 교황청 소식을 전 세계에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국뿐 아니라 인쇄소, 우체국도 있다. 연간 600만통의 엽서를 처리하는 우체국은 희년(Jubilee)을 앞둔 2024년 12월 성 베드로 광장 왼편 원형 회랑에 친환경 건축 재료를 사용한 새로운 이동식 우체국을 설치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0면

대전 문창동본당, 재생에너지로 ‘자립’ 성공…“작은 실천의 힘 느꼈죠”

대전교구 문창동본당(주임 김동훈 안토니오 신부)이 공동체가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자립, 교구 생태환경위원회로부터 탄소중립 ‘LUNA’(달) 인증을 받았다. 올해 교구 내 첫 탄소중립 인증이다. 성당 외부에서 드러나는 변화는 주차장과 옥상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정도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기도와 나눔, 실천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작은 변화와 실천은 공동체 전체의 인식과 참여로 확산됐고, 탄소중립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하느님 보시기 좋은 공동체의 첫걸음 본당이 탄소중립을 위한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나서기 전, 문창동성당은 38년 전 건립 당시 사용하던 등유 보일러와 전기 설비를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었다. 특히 사제관과 성당의 창문도 옛날 그대로여서 단열 성능이 낮고 에너지 손실이 큰 상태였다. 등유 연료에만 매년 1천만 원 이상이 소요되는 상황에서, 본당은 내부 리모델링을 결정했다. 2022년 대전교구가 전 본당을 대상으로 ‘2040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본당의 리모델링도 단순한 유지 보수를 넘어 탄소중립과 에너지 절약을 핵심 방향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2023년 본당은 전면적인 에너지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먼저 사제관의 창틀을 이중창으로 교체했고, 건물 전체의 조명은 LED로 전환했다. 창틀 교체가 어려운 공간에는 단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커튼을 설치했다.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해 기도 공간과 나눔 공간을 분리해 필요시 부분 냉난방이 가능하도록 설계했고, 성전 내부의 냉난방기도 앞쪽과 뒤쪽으로 구역을 나눠 미사 참석 인원에 따라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난방 설비의 전면 교체였다. 기존의 GHP(Gas Heat Pump) 방식의 화석연료 기반 난방기를 EHP(Electric Heat Pump) 방식으로 바꿔, 재생에너지와 연계한 전기 사용이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101.4kW 용량의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하며 본당은 실질적인 에너지 자립에 나섰다. 이는 교구의 탄소중립 목표 용량(67.27kW)의 1.5배를 초과하는 수치다. 지구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탄소중립 실현의 원동력은 ‘소통’이었다. 이번 리모델링은 단순한 시설 개선이 아니라 장기적인 에너지 절약과 생태 전환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적잖은 비용이 드는 만큼 신자들의 공감과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본당 사회복음화분과는 신자들에게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과 시설 교체의 이유를 주기적으로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적극적인 소통과 이해를 바탕으로, 큰 비용이 들어가는 리모델링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필요한 기금이 모였다. 재생에너지 전환도 중요한 변화였지만, 본당이 더욱 집중한 것은 ‘성당에서 소비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신자 개개인의 생활 속 실천을 독려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150여 명이 활동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중심으로, 소통과 실천이 활발한 조직망을 활용했다. 매주 활동 과제로 환경 관련 실천 사항을 제안해 작은 행동부터 하나씩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본당은 주보를 통해 매주 환경 실천 항목을 소개하며 전 신자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실천은 거창하지 않다. 일회용품 줄이기, 사용하지 않는 플러그 뽑기, 비닐 대신 장바구니 사용, 텀블러 들고 다니기 등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고 있다’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실천을 꾸준히 가능하게 했다. 환경보호를 위해 특별히 한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비닐 대신 장바구니, 플라스틱 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한 하루는 다른 내일을 만들었다. 특히 매주 찾는 성당에서 그 주에 할 수 있는 환경 실천을 확인하며 신앙 안의 생활 습관이 되고 있다. 문혜영(율리안나) 씨는 “잊고 있었거나 귀찮아서 미뤘던 실천들을 주보나 레지오 활동 과제로 상기시킬 수 있다”며 “막연하게 지구를 위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고 하는 것보다 구체적이고 쉬운 실천을 제안해 주니 성취감도 얻을 수 있고 뿌듯하다”고 밝혔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6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1) 경향신문 폐간

“정부 당국은 지난 4월 30일 밤 10시를 지난 경향신문사에 대해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하여 발행 허가를 취소’한다는 통지서를 보냄으로써 폐간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 한 조각의 통지서로 인하여 이 나라가 자유를 얻은 이듬해인 1946년 10월 6일에 복간된 이래 13년간 다른 어떤 신문에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열렬하였으며 민국의 수립과 반공전선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고 발행부수 20만 수천부를 헤이게 되어 한국에서 둘째가는 대신문의 지위를 차지해 온 가톨릭의 일간지는 지령 제4324호를 마지막으로 뜻하지 못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가톨릭시보 1959년 6월 10일 자 1면 사설 중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의 폐간은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입니다. 1959년이 시작되면서, 당시 84세의 이승만이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경향신문은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이 갈아치울 수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가뜩이나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천주교회와 경향신문이 눈엣가시 같았던 터라, 정부는 결국 그해 4월 30일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경향신문 폐간 명령을 내리고 밤 10시를 기해 윤전기를 멈추도록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가 원래부터 이처럼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바탕으로 교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 독재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교회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신자 정치인인 장면(요한, 1899~1966) 총리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장기 독재 꿈꾸던 이승만 정권, 교회 운영 언론사 탄압 가톨릭시보, 정부 조치 강력 비판…4·19 혁명 이후 경향신문 복간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는 1969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나의 回想錄: 병인교난에 꽃피는 비화」(가톨릭출판사, 335쪽)에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박사는 이런 난국(6·25전쟁)에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다가온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재선을 노리고 자유당을 조직하여 자기 세력 확장에 급급했다. ⋯ 이 박사의 독재는 점점 심해갔고, 한편 경향신문은 이 박사의 독재를 규탄하는 논조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면) 박사는 이 박사의 정적(政敵)이 되고, 나도 이 박사에게 정치가가 아닌데도 야당 정치 주교로 낙인찍히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는 신자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투표를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는 장면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의 정치권 진입을 위해서 힘을 모았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6년 5월 6일 자 2면에서 ‘병든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앙 깊고 학식 넓은 인격자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장면 박사의 출마 인사와 공약을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투표하실 때는 부통령 후보자 여덟 명 중에 첫 번째로 적혀 있는 두 자 이름 ‘장면’ 밑에 표를 찍으시기 바랍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덧붙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교회 탄압 선거 결과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장면 박사가 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자유당 대통령과 민주당 부통령이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 창출된 것입니다. 장면 박사의 부통령 당선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승만과의 정치적 공존과 예상되는 대립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부통령으로서 장면 박사의 정치적 삶은 유배 생활과도 같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천주교회 탄압은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해 1955년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매일신문사를 습격하고,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1958년부터 1959년 사이 교황청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신자 공무원들은 파면과 좌천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 폐간 조치의 신속한 재고 요청 가톨릭시보는 폐간 조치가 내려진 4월 30일 이후 발행된 6월 10일 자 사설에서, 정부의 경향신문 폐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바탕으로 정부 조치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면 전체의 절반 가까운 지면을 할애한 이 사설에서 정부의 폐간 조치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을 강조했고, 정부가 제시한 폐간 사유 다섯 가지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 오직 민주적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지 관권에 의해 그 존재마저 말살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니,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반공과 민주 언론 창달의 한 횃불이었던 유력한 일간신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사설은 이어, 경향신문이 순수한 종교 신문은 아니었기에 이번 폐간 조치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아닐 수 있지만, “무신론적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항해 반공의 대열을 지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우’인 가톨릭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유감스러운 처사”라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한 이유는 다음 다섯 개 기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1959년 1월 11일 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支離滅裂相)’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 사실을 날조,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2월 4일 자 단평 ‘여적(餘適)’이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 셋째는 2월 15일 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 처분 기사가 허위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4월 3일 자에 보도된 공산 간첩 하모 씨의 체포 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다는 점, 마지막으로 4월 15일 자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 기사 ‘교안법 개정도 반대’가 허위 기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부의 폐간 사유를 반박한 후 사설은 경향신문의 폐간이 영구적인 조치, ‘완전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이 결정을 하루속히 재고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361일 만에 복간 경향신문은 정부의 폐간령에 대해 행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이 6월 26일 행정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려 발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직후, 정부는 폐간 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다시 무기한 발행 정지라는 행정 처분을 내려, 발행은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대법원 특별부는 연합부를 구성해 군정법령 제88호의 위헌 여부 심사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키로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전인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했고, 대법원 연합부는 4월 26일 경향신문에 대해 행정처분 집행 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경향신문은 정간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습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8면

[당신의 유리알] 신부님의 마지막 음악수업

명동성당에서 친구 비오 신부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 나와 함께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방문했었다. 지하성당 입구에 도착하자, 젊고 뚝심 있는 차 신부님의 장례 상본사진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차 신부님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대신학교 성음악 수업시간이라든가, 「가톨릭 성가」를 편찬하신 인물 정도로 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와 첼로를 즐겨하시며, 신학교 출강 때는 가끔 차에 키우던 개를 데리고 오셨다고 기억했다. 가난했던 로마 유학 시절, ‘동료 사제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성지까지 태워 줬다’ 하여 생긴 별명이 ‘의리의 차돌쇠.’ 보통 교구 사제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 기간 성당에 마련된 냉장 유리관에 모시게 된다. 미사 전, 고인과 함께했던 교우들은 슬픔을 노래하는 연도로 성당을 채우고…. “(사제 차 알로이시오)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소서.” 무심코 나온 가사 빈칸에 신부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슬쩍 넣어본다. 어쩌면 연도 음이 틀린 걸 아시고, 신부님이 “다시 불러봅시다!” 하시며, 일어나시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해봤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들의 헛된 바람일 뿐. 신학생들은 금요일 오후 5시가 되면, 대성당에 모여 그레고리안 성가를 배웠다. 대성당 중앙 복도를 통해 신부님이 오시면 정적 속에 ‘딱! 딱! 딱!’ 구둣발 소리만 들렸다. 차 신부님은 무거운 서류 가방을 제단 앞에 내려놓고, 수업 전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수업 중 ‘키리에’의 선율을 타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직접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나는 성음악보다 신부님이 해주시는 옛날이야기가 더 좋았다. 내 기억으로 ‘신부님의 마지막 수업’에는 이런 말씀이 있었다. “너희가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이제 함께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애틋하게 평생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 하물며 그럴진대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냐.” ‘우웅~’하고 차 신부님을 품고 있던 냉장 유리관의 모터가 다시 답하듯 으르렁댄다. 바람과 달리 누워 계신 신부님은 표정도 미동도 없으셨다. 나는 유리관 곁에서 노 사제의 구두와 상복을 살폈다. 사제들은 자신의 장례식 때 서품식에서 입었던 제의를 상복으로 흔히 입었다. 다시 3주 전 찾아뵐 때 기억이 나를 붙든다. 죽음을 앞둔 스승에게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방 안을 채우는 침묵과 거친 숨소리가 이어진다. 동생 차 알로이시아 수녀는 “조금 더 빨리 오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재차 아쉬움을 표했다. 두 제자를 보셨을 때, “아주 많이 아프다”며 미풍보다 작은 기운으로 맞아 주셨다. 제자가 물었다. “차 신부님. 늦게 뵈어서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흔한 질문이었다. 고통 앞에서 질문은 이미 힘을 잃었고…. “우연히 가게 된 거야. 성당에 가다 보니까 신학생들을 자주 보게 되었고, 우연히 가다 보니까 신학생들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성당 활동을 하다가, 사제가 되고 싶으니까 신학생처럼 행동하고 그랬던 거지.” 그러나 동생 수녀님의 말씀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저희는 원래 다섯 남매인데 둘은 유산되었고, 한 명은 천연두로 죽었어요. 둘만 남았지요. 어머니는 그냥 자녀들이 살아있어서 좋다고 하셨어요. ‘숙제 잘하고 나가 놀아라’ 그뿐이었지요. 전쟁 이후 아이들은 갈 데가 없었어요. 집들은 모두 무너졌고요. 그런데 용산성당 시약소 수녀님이, ‘얘들아, 저녁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오너라’ 하셨어요. 거기서 「요리강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교리를 배웠고. 신부님은 성당 복사를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했지요. 수녀님들이 성소를 키워 주신 거예요.” 새벽부터 내리는 명동의 비는, 퇴장성가와 함께 마무리되어 갔다. 나는 고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음이 틀릴까 성가 가사만 붙잡고 있었다. 처음보다 유리관 속 신부님은 편안해 보이셨다.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는 단 한 가지 질문만 드리려고 했다. ‘살아오시면서 어려울 때, 어떤 성가 곡이 위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러나 말씀이 없으셨다. 그 차분한 침묵은, 어쩌면 당신이 공부한 성음악이 단지 개인의 재능 발휘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동생 차 알로이시아 수녀가 말했다. “차 신부님은 라틴어 공부를 참 열심히 하셨어요. 천체, 과학 공부를 좋아하셨고요. 또 화석을 좋아하셨어요. 이 생선 화석 좀 보세요. 무엇보다 오빠 신부님은 평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셨어요. 그 많은 고통 앞에서 어떻게 조용히 참으셨나 싶어요.” 단단한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무너지는 자신을 기도와 자비의 손길에 의탁해야 했던 한 영혼은, 평소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유언처럼 남기셨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저 후배들이 세상 물을 좀 덜 먹고, (누워 계시면서도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수줍게 웃으셨다)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갔으면… 그게 선배 신부들의 바람이겠지… 싸우지나 말고 잘 지내. 작은 거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양보도 좀 하고.” 마지막 질문은 “신부님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였다. 이 질문에 말문이 막혀 하셨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하려니까 확 막히네. 우선 그보다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계셔! 그걸 느껴야지 그 다음이 되지. 하느님은 계셔.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야지만 되는데… 그렇게 못 느낄 수도 있거든.” 모든 존재는 마지막 숨결을 하느님께 향하며 사라진다. 순간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이 되고. 한 제자가 신학교 때 ‘차 신부님의 행복’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신부님을 따로 뵙고 ‘행복한 순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제관 거실에서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들으며, 긴 소파에 누워 계실 때 신부님은 가장 행복하셨다는 말씀을.” 그랬다. 그분은 하느님 곁에서 베토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갖고 계시리라. 언젠가 차 신부님의 새 수업을 듣게 될 날이 다시 올까.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가 잘 느낄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럴 것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3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라파엘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립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로마가 역사적 난관을 맞이했을 때도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순례 성당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중세 천년의 세월도 견뎌온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에 이르러 니콜라오 5세 교황(1447~1455 재위)의 지시로 베르나르도 로셀리노가 제단과 성가대석의 공간을 확장하는 계획을 시행하였습니다. 이후 바오로 2세 교황(1464~1471 재위) 때,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5~1516)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를 일부 진행하였습니다. 16세기에 들어 율리오 2세 교황(1503~1513 재위)은 선대 교황이 시작한 확장 및 보수 공사를 이어 나가려고 하였지만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조언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506년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브라만테의 설계로 시작되었으나, 1513년 율리오 2세 교황의 선종과 이듬해 브라만테의 사망으로 돔을 떠받치는 네 개의 거대 기둥을 위한 기초를 놓는 작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514년 브라만테의 후계자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대성당 공사를 이어받았습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새로운 대성당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브라만테에게 영향을 주었고, 브라만테 사후에 대성당 공사의 총괄 책임자로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피렌체로 귀향했습니다. 이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는 온전히 라파엘로에게 맡겨졌습니다. 건축가로서 라파엘로는 고대 로마의 고전을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에 구현한 브라만테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영향을 받았는데, 브라만테와 함께 산텔리지오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을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괄 책임을 맡았을 때,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 연구를 통해 고대 로마의 건축에 필적하는 대성당을 지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라파엘로의 대성당 설계는 단계적인 몇 개의 계획안에 담겨있습니다. 1514년 브라만테 사후에 곧이어 설계한 초안이 있고, 1515~1518년의 멜론 본(Codice Mellon), 그리고 라파엘로의 설계라고 일컬어지는 1519~1520년에 계획한 최종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레오 10세 교황은 대성당 건설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로마 교회를 둘러싼 시대 상황도 녹록하지 않아서 라파엘로의 계획안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라파엘로의 대성당 설계 최종안을 보면,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계획과 다르게 라틴 크로스의 선형 평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3랑식 평면에서 네이브는 다섯 베이로 되어있으며 양측에 아일이 있고 네이브와 아일 사이에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라틴 크로스 평면을 선택한 것은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트란셉트와 앱스의 삼엽형 반원형 공간은 라틴 크로스의 선형성을 줄이고 평면의 중앙집중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네이브와 아일과 경당으로 이어지는 세 겹의 공간 역시 선형성을 약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알베르티가 산탄드레아 성당에서 시도한 방식입니다. 이는 라파엘로의 평면이 라틴 크로스 형태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그릭 크로스의 평면을 선호하는 르네상스의 경향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라파엘로는 네이브와 아일 사이에 두꺼운 벽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상부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거대한 벽기둥과 같은 두께의 벽 공간으로, 아일 바깥쪽에 있는 경당과 경당 사이의 벽기둥도 같은 형태를 보입니다. 크로싱에는 브라만테가 설계한 돔을 받치기 위해 모든 구조물을 내력벽체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라파엘로가 브라만테의 돔을 그대로 수용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의 대성당 계획도 함께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성당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3세 교황 때인 1538년, 브라만테가 만든 로마의 건축 공방 출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4~1546)가 대성당 공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부서진 대성당의 보수 공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브라만테가 놓은 기초를 바탕으로 돔과 기둥의 형태를 새롭게 설계했는데 그것을 담은 판화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상갈로는 고령으로 인해 자신이 공사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설계에 따라 대성당이 건설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목재로 대성당의 모형을 만들었으며,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상갈로의 평면 계획은 브라만테의 그릭 크로스 평면과 라파엘로의 라틴 크로스 평면을 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갈로의 설계에도 중앙에 대형 돔이 있는데 브라만테가 설계한 로마 고전의 돔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의 돔은 브라만테의 돔보다 구조와 장식 면에서 매우 정교한데, 아케이드로 구성된 2단의 원통형 구조물 위에 반구형 돔이 리브와 함께 있고, 그 위에 매우 커다란 랜턴이 올려져 있는 모습입니다. 파사드 양쪽에는 높은 종탑이 있는데, 입면 상 이 종탑은 중앙의 돔에 대한 집중성을 흩어 놓고 있습니다. 또한 파사드는 평면의 구성에 따라 수직으로 다섯 등분되고, 양쪽 탑은 십여 층, 중앙 돔은 여섯 층, 그 아래는 다섯 층으로 수평 분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페디먼트의 신전 파사드가 수평 분할의 중간층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상갈로의 평면과 입면 계획은 그의 사후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파기되었는데, 미켈란젤로는 그의 평면을 비판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0면

5대 종단 종교환경회의, “인간 중심 ‘법 체계’ 넘어 지구 전체 고려해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는 종교인들이, 개발 논리에 따른 무분별한 환경 파괴 앞에서 법적으로 자연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5대 종단 종교인들이 모인 종교환경회의(상임대표 원불교 오광선 교무)는 6월 20일 서울 용산구 원불교 서울교당에서 ‘지구법과 종교가 만나 환경영향평가를 바꾸자’ 주제로 대화마당을 열었다. 이번 대화마당은 지구법, 야생생물법,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강연과 토론으로 진행됐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태현 교수는 ‘지구법과 야생생물법’ 발표를 통해, 인간 중심의 법체계를 넘어 지구 전체를 고려하는 법적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구법은 ‘인간은 더 넓은 존재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그 공동체에 속하는 각 성원의 안녕은 전체로서 지구의 안녕에 의지한다는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는 법과 인간 거버넌스에 관한 철학 또는 사상’을 말한다. 박 교수는 “지구법은 지구공동체의 우선성에 기반한 관리 체계와 법률을 요구한다”며 “이를 위해 기존의 인간 중심적 규범에서 생명 중심, 지구 중심 규범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 교수에 따르면, 지구법학의 핵심은 존재할 권리, 거주할 권리, 그리고 생태계 내에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권리 등 인간 외 생명체 역시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 한국의 야생생물법이 이 같은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짚은 박 교수는 “현행법은 멸종위기종을 지정하더라도, 필수 보존 서식지 지정이 자동으로 수반되지 않는다”며, “이후 별도 행정 절차와 행정청의 재량에 따라 보호구역이 지정되기 때문에 생물 보호에 실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야생생물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 그 자체의 권리와 서식지에 대한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연 후 이어진 토론에서 종교인들은 “모든 종교는 생명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지만, 우리는 왜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가, 종교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말고, 동등한 관계를 회복하며 생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6면

한국 카리타스, 50주년 기념행사 열고 ‘사랑의 여정 다짐’

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기념행사가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일대에서 열렸다. 한국교회 사회복지 활동가들은 세미나와 음악회, 감사미사와 기념식, 도보성지순례 등 다양한 행사를 함께하며 반세기 성장 여정을 돌아보고 앞으로도 더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마음에 새겼다. ◎… 6월 19일 오전 서울대교구 새남터 순교 성지. 서울대교구가 주관한 ‘희망의 길’ 도보성지순례 출발점에는 전국 각 교구 사회복지회(국) 직원과 활동가, 남녀 수도자, 해외 카리타스 초청 인사 등 450여 명이 모였다. 이번 순례는 4월 23일 출범식으로 시작된 전국 릴레이 도보성지순례의 마지막 여정으로, 참가자들은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절두산 순교 성지까지 5.2㎞를 걸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정진호(베드로) 신부는 “하느님의 사랑을 삶으로 증명하는 카리타스 가족은 순교자들의 신앙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순례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상계종합사회복지관 유채현(파우스티나) 복지사는 “많은 업무로 지칠 때도 있지만, 지원 대상자들의 응원과 사랑이 늘 힘이 되었음을 순례 중 묵상했다”며 “오늘의 더위를 내일의 열정으로 바꿀 힘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4월 26일부터 6월 5일까지 두 개 라인 167km 구간에서 열린 전국 릴레이 도보성지순례에는 35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1㎞당 1000원을 기부하는 나눔을 넘어 생태적 회심, 순교자 정신 등 카리타스 실현에 바탕이 되는 가치들을 묵상하고 실천했다. ◎… 도보성지순례에 이어 이날 오후 3시에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조규만(바실리오) 주교 주례로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가 봉헌됐다. 국제 카리타스와 아시아 카리타스 인사들도 행사에 참석해 한국 카리타스와의 협력 관계를 되새기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이라 모나첼리 국제 카리타스 제1국장은 미사 후 열린 기념식에서 6세기 성화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를 조규만 주교에게 선물했다. 성화는 신앙과 사명을 함께하는 우정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카리타스 회원 기구 간 연대를 상징한다. 모나첼리 국장은 “한국 카리타스의 세심한 협력과 위기 지역에 대한 지원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방글라데시 카리타스 활동가로 현재 아시아 카리타스 의장을 맡고 있는 베네딕트 알로 드 로자리오 박사는 축사에서 “한국 카리타스의 도움으로 디나즈푸르교구 성당이 재건되고, 인근 5개 마을의 무주택 가정이 새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며 “양국 카리타스 간 협력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 감사미사에 앞서 18일에는 명동대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발달장애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한우리오케스트라와 cpbc 소년소녀합창단이 <그를 따르겠어요>,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등 다양한 곡을 선보였다. 지휘를 맡은 전소영(아녜스) 음악감독은 “장애를 극복한 연주자들처럼, 한국 카리타스도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념행사 기간 명동대성당 마당과 1898 광장에서는 사진과 영상을 통해 한국 카리타스와 전국 가톨릭 사회복지회(국)의 역사와 주요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도 열렸다. 전시를 찾은 유영자(가브리엘라·서울대교구 서원동본당) 씨는 “한국 카리타스가 세계에 희망을 전해온 것이 자랑스럽다”며 “서로 돕는 세상을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 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기념 세미나 개최…‘신앙 유무 떠나 ‘카리타스 정신’ 공감’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 고유의 강점을 바탕으로, 종사자들이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복지 사명을 더욱 충실히 실천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제시됐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는 18일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기념 세미나’를 열고,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카리타스) 현황 및 종사자 정체성 인식 조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카리타스가 지닌 고유성과 정체성을 사회복지계 안에서 분명히 하고, 종사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영성과 연결해 사명감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객관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진행됐다. 연구는 가톨릭사회복지연구소장 김성우 신부(이사악·충북재활원 마리아의 집 원장)와 동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지현(아욱실리아) 교수가 전국 685개 카리타스 기관의 종사자 2454명을 대상으로 신앙생활, 종교적 요소와 카리타스 활동 간 상관관계 등을 양적·질적으로 분석했다. 조사 결과, 종사자 중 절반가량은 비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카리타스 정신에 공감하며 자신의 업무와의 연관성도 높게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의 77.2%가 소속 기관 또는 시설이 카리타스의 4대 핵심 가치인 ▲인간 존엄성 ▲공동선 ▲연대성 ▲보조성에 기반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답했으며, 86.1%는 신앙이 업무에 ‘매우 많이’ 또는 ‘많이’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했다. 이는 종교적 신념과 관계없이 종사자들이 현장에서 카리타스의 고유 가치를 체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적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카리타스의 강점으로 ▲교구(법인)와 시설 간 연대를 바탕으로 제도권 밖의 대상자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원 반경 ▲국제 카리타스와 같은 보편교회 조직을 통한 소속감 ▲체계적 교육을 통한 역량 강화와 운영 투명성 등을 꼽았다. 또한 공동체와 사랑 실천을 중요시하며, 모든 사업에 ‘이 일을 왜 하는지’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 활동에 열의를 가지게 한다고도 답했다. 하지만 카리타스 기관이나 시설에서 근무하기 위해 가톨릭 신앙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도 48.7%에 달했으며, 카리타스의 핵심 가치나 관련 용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또는 ‘대략 알고 있다’는 비율은 75.5%로 나타났다. 이는 ▲업무 특성상 주일미사 참석이 어려운 경우 ▲비신자 직원의 경우 체계적 교육 부재로 카리타스 정체성에 대한 이해 부족 ▲종교 행사가 형식에 그쳐 신앙이 일상 업무에 실질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사를 담당한 김성우 신부는 “카리타스 정신에 대한 교육, 전국적 연대와 실천 사례 공유, 카리타스 고유 특화사업 실시 등 타 사회복지 법인과의 차별성을 확보한다면 종사자들이 이미 실감하는 카리타스의 강점들과 가톨릭 영성이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한편,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이날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2025 해외원조 실태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해외원조 현황을 진단하고 국제 카리타스, 아시아·스리랑카 카리타스 사례를 살피며 전망을 모색하는 세미나도 함께 열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1면

[성체 성혈 대축일 특집] 포도주가 ‘미사주’ 되려면?

설탕이 든 포도주를 미사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무알코올 포도주는 어떨까? 답은 원칙적으로 ‘사용 불가’다. 다만 우리나라 미사주 ‘마주앙’은 한국 포도 특성 상 주교회의 승인 하에 설탕을 첨가한다. 이처럼 미사주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성찬례 거행에 쓰일 포도주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루카 22,18 참조) 것으로,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천연 포도주’여야 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22항) 성경에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사용하셨고 그 외 재료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26,27-29) 또한 포도주는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여 시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23항)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교회법전」 제924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포도주가 부패해 식초가 되면 포도주의 형상은 남지 않기에 식초로 성사를 행할 수 없다”(제3부 문제 74, 제5문 반론에 대한 답변 2)고 했다. 예외적으로,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인 ‘무스툼(Mustum)’은 교구장의 인가를 받을 경우에 한해 사용할 수 있다. 교황청 경신성사부는 2017년 「성찬례에 쓰는 빵과 포도주에 관하여 주교들에게 보내는 회람」(제4항 ㄴ)에서 “신선한 포도즙이거나, 본질은 변화시키지 않고 발효만 막는 방법으로 보존된(예를 들면, 냉동) 포도즙(Mustum)은 성찬례 거행에 유효하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무알코올 포도주는 정상 발효된 포도주에서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제거한 것이므로 허용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조건을 충족하는 포도주는 모두 미사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제조 과정을 완전히 통제하거나 세부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구장이나 교황청 인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롯데칠성의 ‘마주앙’ 브랜드만 미사주로 사용하고 있다. 포도주 소비와 종교적 수요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수십 종의 미사주 브랜드가 있다. 대형 회사뿐 아니라 수도회 와이너리 등도 소규모로 생산한다. 이탈리아는 지역 특화 브랜드가 많다. 시칠리아의 ‘Martinez’(마르티네즈) 등이 유명하다. 특히 바티칸은 교황의 여름 별장 부지 내 약 2만㎡ 규모의 포도원에서 자체적으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 포도주는 2026년부터 교황청 라벨이 부착된 ‘HOLY SEE’ 브랜드 미사주로 사용될 예정이다. 한편 바티칸 인구 한 명의 평균 포도주 소비량은 연 약 79리터다. 영국의 세 배이자 세계 최고다. 이는 미사 전례와 공식 행사, 손님 접대 등으로 쓰이는 모든 포도주가 1000명에 미치지 않는 바티칸 인구가 소비한 것으로 집계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0면

[성체 성혈 대축일 특집]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와 성체 신심

우리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는 성체성사를 “하늘나라로 가는 고속도로”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처럼 실제로 ‘하늘나라에 이른 이’가 되어, 곧 성인 반열에 오를 예정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6월 22일)을 앞두고, 성체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복자가 되었고 9월 7일 시성을 앞두고 있는 카를로 아쿠티스의 삶과 성체 신심을 살펴본다. 성체 사랑한 평범한 소년,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 ‘성인’이나 ‘복자’라고 하면 흔히 특별한 성덕이나 위대한 업적을 지닌 인물을 떠올리지만, 1991년생인 카를로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소년이었다. 2006년, 15세의 나이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피카츄’를 좋아하고 컴퓨터와 게임, 축구를 즐겼으며, 고양이와 강아지를 아끼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교회가 공식적으로 덕행을 인정하고, 두 건의 기적을 통해 시성이 확정된 인물이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 소년은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생전의 말과 삶은 그 이유를 가늠케 한다. “태양 앞에 머물면 우리는 햇볕에 그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 성체 앞에 머물면 우리는 성인이 됩니다.” 카를로는 7살 때 첫영성체를 하면서 “내 삶의 계획은 언제나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 조배를 했으며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님, 편히 오세요.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라며 예수님과 대화했다. 또래 친구들과 첫영성체·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성체의 중요성을 자주 전했다. 카를로는 성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참 독특한 분이세요. 빵 한 조각에 숨어 계시거든요. 오로지 하느님만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어요!” 이렇게 신앙에 열심이었던 카를로도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마다했다. 성체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성지순례를 제안했을 때 카를로는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여기 성당들에도 감실이 있고, 어느 때나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서 “성당 감실에 갈 때도 성지순례와 같은 마음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되물었다. 카를로에게 성체성사란 “예수님 시대에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걷고 계시는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을 직접 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참으로 세상에 현존하시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 ‘성체 기적’ 알리다 카를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성체는 바로 예수님의 심장(예수 성심)”이라고 즐겨 말했다. 그러면서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을 소개했다. 2002년 이탈리아의 대규모 가톨릭 행사인 ‘리미니 미팅’에 참석한 카를로는 성체 기적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후 2년 6개월에 걸쳐 교회가 인정한 136건의 성체 기적을 가족과 함께 조사했고, 각 기적의 사진과 내용을 정리해 전시물을 제작했다. 60×80cm 크기의 전시 패널 166개를 완성했고, 컴퓨터에 능숙한 카를로는 이 전시물들을 온라인 공간에 담았다. 10대 소년이 기획한 작은 일이었지만, 이 온라인 전시는 상상도 못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카를로의 성체 기적 전시회는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전시로, 카를로의 모국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필리핀, 아르헨티나, 베트남 등 여러 나라 주교회의에서 전시를 공식 후원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등 비가톨릭국가 뿐 아니라 과달루페 성지, 파티마 성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와 성당에서도 전시가 열렸다. 특히 미국에서의 호응이 컸다. 미국에서만 100개 이상의 대학교, 거의 1만 곳의 성당에서 카를로의 전시회가 열렸다. 비록 카를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카를로 아쿠티스의 친구들 협회’(Associazione Amici di Carlo Acutis)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협회가 운영하는 웹사이트(www.miracolieucaristici.org)에서는 전시 내용을 세계 여러 언어로 접할 수 있다. 이 전시는 책으로도 엮여 더 널리 퍼졌다. 바티칸 시국 교황 대리인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의 머리말과 함께 출간된 이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으며, 우리나라에도 「하늘나라로 가는 비단길 – 성체 기적의 발자취를 따라서 1·2」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0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