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성혈 대축일 특집] 포도주가 ‘미사주’ 되려면?

설탕이 든 포도주를 미사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무알코올 포도주는 어떨까? 답은 원칙적으로 ‘사용 불가’다. 다만 우리나라 미사주 ‘마주앙’은 한국 포도 특성 상 주교회의 승인 하에 설탕을 첨가한다. 이처럼 미사주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성찬례 거행에 쓰일 포도주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루카 22,18 참조) 것으로,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천연 포도주’여야 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22항) 성경에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사용하셨고 그 외 재료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26,27-29) 또한 포도주는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여 시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23항)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교회법전」 제924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포도주가 부패해 식초가 되면 포도주의 형상은 남지 않기에 식초로 성사를 행할 수 없다”(제3부 문제 74, 제5문 반론에 대한 답변 2)고 했다. 예외적으로,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인 ‘무스툼(Mustum)’은 교구장의 인가를 받을 경우에 한해 사용할 수 있다. 교황청 경신성사부는 2017년 「성찬례에 쓰는 빵과 포도주에 관하여 주교들에게 보내는 회람」(제4항 ㄴ)에서 “신선한 포도즙이거나, 본질은 변화시키지 않고 발효만 막는 방법으로 보존된(예를 들면, 냉동) 포도즙(Mustum)은 성찬례 거행에 유효하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무알코올 포도주는 정상 발효된 포도주에서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제거한 것이므로 허용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조건을 충족하는 포도주는 모두 미사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제조 과정을 완전히 통제하거나 세부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구장이나 교황청 인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롯데칠성의 ‘마주앙’ 브랜드만 미사주로 사용하고 있다. 포도주 소비와 종교적 수요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수십 종의 미사주 브랜드가 있다. 대형 회사뿐 아니라 수도회 와이너리 등도 소규모로 생산한다. 이탈리아는 지역 특화 브랜드가 많다. 시칠리아의 ‘Martinez’(마르티네즈) 등이 유명하다. 특히 바티칸은 교황의 여름 별장 부지 내 약 2만㎡ 규모의 포도원에서 자체적으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 포도주는 2026년부터 교황청 라벨이 부착된 ‘HOLY SEE’ 브랜드 미사주로 사용될 예정이다. 한편 바티칸 인구 한 명의 평균 포도주 소비량은 연 약 79리터다. 영국의 세 배이자 세계 최고다. 이는 미사 전례와 공식 행사, 손님 접대 등으로 쓰이는 모든 포도주가 1000명에 미치지 않는 바티칸 인구가 소비한 것으로 집계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성체 성혈 대축일 특집]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와 성체 신심

우리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는 성체성사를 “하늘나라로 가는 고속도로”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처럼 실제로 ‘하늘나라에 이른 이’가 되어, 곧 성인 반열에 오를 예정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6월 22일)을 앞두고, 성체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복자가 되었고 9월 7일 시성을 앞두고 있는 카를로 아쿠티스의 삶과 성체 신심을 살펴본다. 성체 사랑한 평범한 소년,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 ‘성인’이나 ‘복자’라고 하면 흔히 특별한 성덕이나 위대한 업적을 지닌 인물을 떠올리지만, 1991년생인 카를로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소년이었다. 2006년, 15세의 나이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피카츄’를 좋아하고 컴퓨터와 게임, 축구를 즐겼으며, 고양이와 강아지를 아끼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교회가 공식적으로 덕행을 인정하고, 두 건의 기적을 통해 시성이 확정된 인물이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 소년은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생전의 말과 삶은 그 이유를 가늠케 한다. “태양 앞에 머물면 우리는 햇볕에 그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 성체 앞에 머물면 우리는 성인이 됩니다.” 카를로는 7살 때 첫영성체를 하면서 “내 삶의 계획은 언제나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 조배를 했으며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님, 편히 오세요.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라며 예수님과 대화했다. 또래 친구들과 첫영성체·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성체의 중요성을 자주 전했다. 카를로는 성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참 독특한 분이세요. 빵 한 조각에 숨어 계시거든요. 오로지 하느님만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어요!” 이렇게 신앙에 열심이었던 카를로도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마다했다. 성체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성지순례를 제안했을 때 카를로는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여기 성당들에도 감실이 있고, 어느 때나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서 “성당 감실에 갈 때도 성지순례와 같은 마음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되물었다. 카를로에게 성체성사란 “예수님 시대에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걷고 계시는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을 직접 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참으로 세상에 현존하시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 ‘성체 기적’ 알리다 카를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성체는 바로 예수님의 심장(예수 성심)”이라고 즐겨 말했다. 그러면서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을 소개했다. 2002년 이탈리아의 대규모 가톨릭 행사인 ‘리미니 미팅’에 참석한 카를로는 성체 기적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후 2년 6개월에 걸쳐 교회가 인정한 136건의 성체 기적을 가족과 함께 조사했고, 각 기적의 사진과 내용을 정리해 전시물을 제작했다. 60×80cm 크기의 전시 패널 166개를 완성했고, 컴퓨터에 능숙한 카를로는 이 전시물들을 온라인 공간에 담았다. 10대 소년이 기획한 작은 일이었지만, 이 온라인 전시는 상상도 못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카를로의 성체 기적 전시회는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전시로, 카를로의 모국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필리핀, 아르헨티나, 베트남 등 여러 나라 주교회의에서 전시를 공식 후원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등 비가톨릭국가 뿐 아니라 과달루페 성지, 파티마 성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와 성당에서도 전시가 열렸다. 특히 미국에서의 호응이 컸다. 미국에서만 100개 이상의 대학교, 거의 1만 곳의 성당에서 카를로의 전시회가 열렸다. 비록 카를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카를로 아쿠티스의 친구들 협회’(Associazione Amici di Carlo Acutis)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협회가 운영하는 웹사이트(www.miracolieucaristici.org)에서는 전시 내용을 세계 여러 언어로 접할 수 있다. 이 전시는 책으로도 엮여 더 널리 퍼졌다. 바티칸 시국 교황 대리인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의 머리말과 함께 출간된 이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으며, 우리나라에도 「하늘나라로 가는 비단길 – 성체 기적의 발자취를 따라서 1·2」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0) 한국에 주교 3명 동시 임명

1953년 휴전으로 남북 분단은 안타깝게도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가장 먼 나라가 되었고, 피를 나눈 형제들은 갈라진 채 서로를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멈추고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자, 남한의 교회는 황폐해진 조국에서 다시 교회를 복구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교회 인사가 희생되었고, 할 일은 많았지만 일손은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외국의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 교회의 물질적 지원은 남한 교회의 피해 복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 독일의 미세레올(Misereor), 오스트리아의 부인회 등은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많은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남한 교회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 활동에 힘쓰며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이를 보여주듯, 1957년에는 한국에 주교 3명이 동시에 임명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 자는 이 반가운 소식을 1면 첫머리 박스 기사로 전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3월 7일, 지금까지 지목구(Prefect Apostolic)였던 한국의 전주교구(전북지구)와 광주교구(전남지구)를 대목구(Vicariate Apostolic)로 승격시키는 한편, 대구교구 관할의 감목대리구로 있던 경상남도지구를 독립 교구(대목구)로 설정한다고 발표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상 3개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셨는데, 전주교구에는 김현배(발도로메오) 교구장을 감목으로 승격시키고 ‘아그비아’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며, 광주교구 감목에는 하롤드 헨리(玄) 현 교구장을 승진시키고 ‘코리다라’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신설되는 부산교구(경남지구)의 감목으로는 현 대구교구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최재선(요왕) 신부를 임명하고 ‘푸사렌시스’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청 발표에 따라, 전주와 광주 양 교구는 1937년 4월 15일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부산교구는 1954년 6월 18일부터 감목대리구로 발족하여 교구 설정을 준비한 지 약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된 것입니다."(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자 1면) 1957년 전주·광주·부산대목구 승격·신설되며 각각 주교 임명 수도회·사도직 단체 성장…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세 교세 신장 따라 교구 증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하는 동시에 부산대목구를 신설하고 각각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전주와 광주교구는 1937년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부산교구는 1954년 대구교구 산하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후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처음 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의 일이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해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이후 조선교회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설정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28년에는 황해도 감목대리구와 연길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이어 1937년에는 연길이 대목구로 승격되고,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39년에는 춘천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인 1952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됐고, 1955년에는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에는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부산교구가 독립교구로서 대목구로 설정되었습니다. 이후 1958년에는 청주대목구와 대전대목구, 1961년에는 인천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특히 1962년에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13개 대목구가 모두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서울·광주·대구교구가 각각 대교구로 승격되어 3개 대주교 관구로 나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교계 체제가 온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후 신자 증가율 경이로워 이처럼 조선교회에 교구가 빠르게 증설된 것은 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율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1953년 당시 남한의 신자 수는 약 17만 명이었으며, 1950년대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무려 16.61%에 달했습니다. 특히 1958년에는 전년도보다 24.18% 증가하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신자 수는 50만 명에 육박했으며, 1962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1961년 말 기준으로 신자 수는 총 49만2464명이었고, 한국인 주교와 외국인 주교가 각각 4명, 몬시뇰은 4명이었습니다. 신부 수는 한국인 271명, 외국인 232명이었고, 수사는 한국인 51명, 외국인 45명, 수녀는 한국인 1,039명, 외국인 131명이었습니다. 대신학생은 330명, 소신학생은 323명에 이르렀으며, 본당은 261개, 공소는 1550개였습니다. 병원이 28개, 시약소 18개, 보육원 24개, 양로원 5개, 나병 수용소는 3개였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2개, 초등학교 6개, 중학교 26개, 고등학교 20개, 직업학교 3개, 대학교 3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 전후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수도회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북한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은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했으며,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남자 수도회가 새로 설립되거나 한국에 진출했으며, 여자 수도회도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르멜 여자 수도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성가소비녀회 등 많은 수녀회가 자리를 잡고, 한국교회와 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활성화된 각종 신심 사도직 단체들의 봉사와 활동은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1953년 전라남도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처음 출발, 개인 신심 수양을 넘어서 선교와 교회 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전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됐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후 한국사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8면

성가소비녀회 ‘평화의씨앗’, 외로운 북향민과 ‘사랑의 동행’ 펼쳐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관구장 김영옥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북향민들이 경제적·심리적으로 지원을 받아 남한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공동체 ‘평화의 씨앗’(원장 진 마리앙즈 수녀)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홀로 아파하던 북향민들은 이곳에서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이웃, 수녀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점차 고립에서 벗어나고 있다. 수녀회는 약 10년 동안 북향민들이 3~6개월 머물 수 있는 쉼터인 ‘꿈터’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북향민들이 남한 사회에 진정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하고 머물 수 있는 단기 쉼터이자 지원시설인 평화의 씨앗을 2022년 2월 경기 남양주시 별내에 새롭게 열었다. 사회복지 차원의 도움을 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동체를 이룰 장을 마련해 인격적 ‘동행’에 한층 집중하고자 한 것이다. 시설은 2024년 3월 의정부시로 이전했다. 평화의 씨앗은 북향민들에게 ▲생계·취업·장학금·후원품 지원 ▲정서적 돌봄 ▲경제적 어려움으로 치료를 중단한 이들을 위한 의료적 지원 ▲출산, 주말 근무 또는 중국에 남겨진 자녀 문제로 잠시 출국해야 하는 경우 자녀 돌봄 등 일상에 밀착한 동반자의 역할을 한다. 북향민 가정 간의 상호 연결은 물론 남한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도 돕고 있다. 북향민들은 수녀들의 도움으로 서로 공동체를 이루고 지역 신자, 민족화해위원회 회원들과의 만남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상식과 문화가 전혀 다른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북향민은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해도 따돌림을 경험해 일을 그만두는 이들이 많고, 남한 사회의 그늘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사기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고,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거나 은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평화의 씨앗에서 관계를 회복한 이들은 점차 사회 일원으로 건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울증을 앓다가 평화의 씨앗을 매일 오가며 호전된 한 주민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자녀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발적으로 교리를 배워 오는 7월 초 세례를 받는 김 엘리사벳 씨는 본당 민족화해위원회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마음이 쓰여서요’라며 지어주신 보약, 쫓기듯 사느라 꿈도 못 꾸던 여행, 명절 때마다 손수 만들어 주시는 북한 음식, 그 음식을 한자리에서 나눌 고향 사람들…. 수녀님들과 공동체의 온기 덕에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어요.” 2011년 남한에 온 장 미카엘 씨는 소통의 어려움과 노골적인 멸시 속에 한때 신앙생활마저 위기를 겪었다. 그는 “지붕 없는 집에서 비를 피하듯 살았던 제 인생이, 사랑과 믿음의 힘으로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평화의 씨앗’이라는 이름에는 “평화라는 작은 씨앗이 높이 날아 북녘 땅에서도 꽃피고, 모든 이가 그리운 사람과 고향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진 마리앙즈 수녀는 “북향민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잊지 말자”고 강조했다. 평화의 씨앗은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후원 계좌: 국민 793901-00-050720 (재)성가소비녀회의정부관구 평화의씨앗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2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

1506년 4월 18일 드디어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석이 놓임으로써 120년이 넘는 역사적인 공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여 메달을 발행하였는데, 오늘날의 기념주화와도 같은 이 메달은 브라만테가 설계한 원안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메달에 의하면 대성당은 거대한 반구형 돔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브라만테가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앙의 돔은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고 대각선 방향에 있는 네 개의 작은 돔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성당의 네 귀퉁이에는 종탑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브라만테의 설계 원안은 선형 평면보다는 중앙집중형 평면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브라만테는 대성당을 계획하면서, 그가 로마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계한 성 베드로의 순교 터에 세워진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당은 라틴 크로스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었고,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은 이교도의 신전에 사용되는 것이 통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순교자 기념 성당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할 때, 교구의 주교좌성당과 같은 대성당이 아니라,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지어질 순교자 기념 성당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바실리카형의 라틴 크로스가 아니라 중앙집중형의 그릭 크로스 형태를 대성당의 평면으로 취했던 것입니다. 그의 상상 속에는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가 바티칸 언덕의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서 있었을 것입니다. 브라만테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집중형 평면은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된 브라만테의 서명이 있는 평면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현재까지 브라만테의 원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평면도는 크로싱에 강한 중심성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문을 맡았던 파비아 대성당(Duomo di Pavia)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성당은 라틴 크로스의 평면을 가지고 있지만 양쪽의 아일 뒤편에 경당을 둠으로써 선형성을 줄였고, 크로싱의 팔각형 돔을 받치는 두꺼운 기둥으로 크로싱의 중심성을 강조하여 크로싱으로부터 트란셉트, 아일, 앱스 등이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이 평면은 산 비탈레 성당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평면과도 유사점이 있는데, 브라만테가 밀라노에 머문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중앙집중형 성당에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관련한 브라만테의 도면들은 대체로 그의 로마 공방에서 후계자인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re Peruzzi, 1481~1536)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브라만테가 목재 모형을 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16세기의 스케치가 메니칸토니오 데 키아렐리스(Menicantonio de Chiarellis)의 도록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도면들 역시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중앙집중형 평면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브라만테의 설계가 라틴 크로스 평면을 유지하면서 네이브 부분을 증축하려는 계획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로 브라만테의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은 라파엘로가 그린 평면은 라틴 크로스로 되어 있습니다. 브라만테보다 스무 살 정도 젊은 동시대의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는 로마 공방 출신인 페루치로부터 도면을 전해 받았는데, 세를리오는 그의 「건축론」(전 7권)에서 페루치에 대한 언급에서는 중앙집중형 평면을 실었고, 라파엘로를 언급할 때는 라틴 크로스 평면을 실었습니다. 이는 브라만테가 여러 형태의 평면을 구상하였지만, 결국은 그릭 크로스 평면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할 당시에 지어진 그의 설계 흔적이 남아 있는 성당들을 통해서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티 첼소 에 줄리아노 성당(Chiesa dei Santi Celso e Giuliano)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집중형 평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은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와 함께 설계하고 페루치가 완공한 성당으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성당과 유사하며, 전반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집중형 평면과 돔이 같은 유형입니다. 몬테풀치아노의 산 비아조 성당(Chiesa di San Biagio)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Antonio da Sangallo il Vecchio, 1453~1534)의 작품입니다. 이 성당은 브라만테의 영향을 받은 순교자 기념 성당입니다. 중앙집중형으로 구성된 그릭 크로스 평면에서 동쪽에 앱스가 추가되었고, 서쪽 파사드에는 종탑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15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착공 기념 메달에 나오는 대성당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토디의 산타 마리아 델라 콘솔라치오네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Consolazione)은 콜라 다 카프라롤라가 로마 공방의 페루치 영향을 받아 중앙집중형의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설계하였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그린 도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이 성당 역시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 평면 형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브라만테는 1514년 만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늦은 나이에 로마에 도착하여 15년간 많은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 공방을 운영하면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업적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고 그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의 후원자인 율리오 2세 교황이 그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후 라파엘로와 페루치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총감독을 승계하여 새로운 평면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약탈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오랫동안 톱질과 망치질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0면

평양교구 신우회, 분단·전쟁 아픔 간직하며 ‘남북 화해’ 기도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6월 25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며,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분단의 현실과 6·25전쟁의 아픔을 기억한다. 이 날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분단의 상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평양교구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가장 깊이 간직한 교구다. 교구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평양교구는 지금도 살아 있는 교구로,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가 그 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다. 교구 역사 이어가는 ‘평양교구 신우회’ 평양교구의 역사를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신자들이 있다. ‘평양교구 신우회’ 회원들이다. 현재 서울대교구 장긍선(예로니모) 신부가 지도신부를 맡고 있다. 평양교구 신우회는 1949년 11월 6일, 남북 분단 이후 서울로 내려온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이 명동대성당에서 결성했다. 초대 지도신부는 평양교구 중화본당 주임을 지낸 고(故) 강현홍(요한 사도) 신부였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월남한 신자들도 많아지면서 ‘평양교구 신우회 부산지부’도 설립됐다. 설립 당시부터 평양교구 신우회 회원들은 명동대성당에서 정기 미사를 봉헌했고, 지금도 매월 넷째 주 수요일 오전 11시 명동대성당 문화관 소성당에 모여 미사를 이어가고 있다. 설립 76년이 흐르며 평양교구 신우회는 외형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6·25전쟁 이전에도 명동대성당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정기 미사에 참여했고, 전쟁 이후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이 더해지면서 신우회는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1세대 신자 대부분이 선종했고, 생존해 있는 소수 역시 고령으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는 그 자녀 세대를 중심으로 매월 약 10여 명이 정기 미사에 모이며 교구의 신앙과 전통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다. 82년간 이어진 ‘평양교구 봉헌문’ 비록 단체의 규모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평양교구 신우회의 상징과도 같은 신심 활동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정기 미사 후 바치는 ‘평양교구 봉헌문’이다. 회원들은 미사 후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이 봉헌문을 자주 바치며, 여전히 살아 있는 평양교구의 역사와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평양교구는 1927년 3월 17일 서울대목구로부터 분리돼 평양지목구가 설정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1943년 3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제6대 교구장으로 부임했다. 홍 주교는 같은 해 5월 1일 ‘평양교구 봉헌문’을 반포했다. 당시 그는 교구 내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공식 예식과 매일 미사 후 그리고 가정에서도 이 봉헌문을 바치도록 독려했다. 이는 일제에 의해 교구장을 비롯한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 전원이 구금, 추방되는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이 기도로 결속해 신앙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해방 이후 공산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평양교구 신자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교구 주보인 예수성심께 ‘평양교구 봉헌문’을 바쳤다. 평양교구 신우회 회원들은 현대어로 일부 문구를 다듬은 봉헌문을 현재까지도 계속 바치고 있으며, 이는 2027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그 신앙의 맥을 지금까지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7년 교구 설정 100주년 향해 장긍선 신부는 “2027년 평양교구 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2026년에는 「평양교구 100주년사」 발간과 함께 홍용호 주교가 생전에 남긴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100주년을 계기로 평양교구 신우회의 활동 역사 또한 새롭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장 신부는 특히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두고 교황님의 북한 방문 가능성이나 북한 청년들을 서울에 초청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희망을 잃지 않고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일이 실현될 수 있다”며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양교구 신우회 전구호(막시미노·71) 총무는 “1세대 회원들은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90대가 되어 정기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안타까움을 표하고 “그분들의 자녀 세대가 일상 속에서 신우회 활동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2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합덕성당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을 나와 충남 내포(內浦)의 너른 평야를 달린다. 11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솔뫼성지 방문 이후, 이곳 내포는 교황 방문 성지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솔뫼와 신리, 여사울 등 천주교 성지를 알리는 입간판들이 교차로마다 세워져 있는 걸 봐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말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전교로 싹튼 ‘내포교회’는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이자 신앙 못자리라 불린다. 초기 조선교회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가 공동체를 이뤄 신앙생활을 했고 때문에 신해박해(1791년) 이후 무진박해(1868년)까지 크고 작은 박해마다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성직자 대부분도 이곳 내포를 터전으로 활동했다. 합덕삼거리에서 신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농촌의 여느 풍경과 전혀 다른 이국적인 모습. 대전교구 합덕성당이다. 내포가 한국교회 신앙 못자리라면 합덕성당은 내포교회의 중심이다. 그 수식어를 대변하듯 성당은 내포의 너른 평야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아담한 성모동산이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라 새겨진 비석과 어우러져 순례자를 맞이한다. 합덕본당의 역사는 1890년 충남 예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본당’(현 예산 양촌공소)이 설립되며 시작됐다. 이후 1899년 현재 자리로 성당을 옮기면서 본당 이름을 합덕으로 바꿨다. 현재 성당은 제7대 주임인 필립 페랭(Philippe Perrin, 백문필 필립보) 신부가 1929년 세운 것이다. 계단 맨 위 예수성심상과 하늘 높이 뻗은 두 개의 첨탑이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다. 두 첨탑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한 순례자는 두 첨탑이 마치 하늘 향해 두 손 뻗은 기도 손이라 표현했는데 직접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성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는 말씀 그대로다. 제대까지 줄지어 선 회색 기둥이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성가정을 주보로 모신 성당답게 제대 뒤에는 ‘성가정화’가 십자고상을 대신해 걸려 있다. 1930년대 당시 본당 주임이던 페랭 신부의 사촌이 그린 것이다. 좌우 스테인드글라스의 은은한 빛 머금은 성화를 마주하며 자리에 앉는다. 제대 우측으로는 성 김대건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와 페랭 신부의 유품인 십자가가 모셔져 있다. 성당을 나서 골고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옛 사제관 건물 뒤로 돌아가면 황석두(루카) 성인, 그리고 한국전쟁 때 순교한 페랭 신부, 총회장 윤복수(라이문도), 복사 송상원(요한)의 순교비와 봉분이 14처 곁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합덕에서 30년째 사목하던 페랭 신부는 신자들의 피난 권유에도 “내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며 성당에 남아 있다가 8월 14일 고해성사 중 인민군에 체포됐다. 그때 곁에 있던 윤복수와 송상원 또한 자신들은 신부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신부님과 함께 갈 것”이라며 페랭 신부를 따랐다. 체포 한 달 후 페랭 신부는 대전 목동에서 두 평신도는 당진에서 순교했다. 이들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속해 있다. 넓은 잔디마당의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성당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푸르름을 뽐낸다. 고목(古木)만큼이나 오랜 세월, 합덕성당은 이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해 냈다. 본당 출신 사제·수도자만 100명을 넘는다. 내포 순교자들의 신앙 열정이 이곳 합덕 사람들의 면면으로 이어져 결실을 이룬 것이다. 본당이 한국교회 ‘성소의 못자리’라 불리는 이유다. 미사를 마친 할머니들이 하나둘 교리실로 모인다. 레지오 회합을 위해서다. 지팡이와 보행기에 의지하는 불편함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둘 모인 할머니들이 성모님 곁에 촛불 밝히고 묵주기도를 봉헌한다. 할머니 한분 한분의 정성 담긴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합덕성당의 지금,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게 했음을 마음에 새긴다. 성가정의 어머니 성모상 바라보며, 할머니들처럼, 성모송을 봉헌한다. ◆ 대전교구 합덕성당 - 주소 :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 미사 : 주일 미사(오전 6시·10시, 토요일 오후 5시) 화 오후 5시, 수~금 오전 10시 - 문의 : 041-363-1061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3면

교회 밖으로 나가 ‘이웃 사랑’ 실천…“청년 사목 대안”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산하 청년해외봉사단(단장 김군선 프란치스코, 지도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은 2014년 서울대교구 불광동본당에서 공식 출범한 후 같은 해 여름 제1기 활동을 시작으로 매년 여름과 겨울 해외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봉사단의 활동은 청년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체험하고,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정체된 청년 사목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청년 그리스도인을 길러내다 청년해외봉사단이 출범할 당시 본당 청년 활동은 미사와 전례, 성경 공부, 성가대, 교리교사 활동 등이 대부분이었고, 청년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주도할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불광동본당 주임이자 교구 제3은평지구장이었던 김민수 신부는 당시 본당 자부회 김군선 회장 등 평신도들과 함께 고민을 나눴고, 지구 내 9개 본당에서 청년 35명을 모집해 7박8일간 필리핀 바그나에서 첫 해외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청년해외봉사단은 매년 도움이 필요한 지역을 찾아 집수리와 재건축, 교육 봉사, 후원 물품 전달, 가난한 아이들과의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팬데믹 이후 6년 만에 재개된 제12기 청년해외봉사단은 올해 2월 8일부터 16일까지 필리핀 바그나를 찾아 조수간만의 차로 매일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르는 현지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데 힘썼다. 주민들이 제대로 잠잘 수 있도록 바닥을 새로 만들고,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치며, 벽돌과 목재로 실내외 공간을 구분해주는 활동에 나섰다. 쓰레기 더미에서 지내는 이들을 위해 쉴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이외에도 과거 미얀마에서는 유치원을 건립했고, 라오스에서는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신축한 학교 내 보건소와 도서관, 공방 내부 공사도 향후 계획하고 있다. 청년해외봉사단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11년 동안 총 12차례 해외 봉사를 이어왔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청년들이 신앙인으로 꾸준히 성장해가는 과정을 함께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청년 사목의 대안 탈종교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청년 세대는 그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고 있다. 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4」에 따르면, 20~39세 청년 신자는 2014년 전체 신자의 28.6%였으나, 2024년에는 23.7%로 급감했다. 김민수 신부는 “청년들이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꼭 가난 때문이 아니더라도 1인 가구로 살아가며 외롭거나 우울하진 않은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사목자들이 확고한 사목적 비전을 갖추지 못한 채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년해외봉사단은 청년들을 ‘찾아가는 현장 사목’이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봉사활동에 참가한 청년들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픔을 끌어안을 용기를 회복하고, 그로써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자긍심을 품게 된다. 김 신부는 “가만히 앉아 청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안일한 교회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현장 사목이 더욱 필요하다”며 “청년해외봉사단은 그런 지향을 실천에 옮기기에 매우 적합하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으로 많은 본당이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 청년해외봉사단 사무국, 운영 전반 도맡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청년 지원 나서 청년해외봉사단은 봉사 장소 섭외와 선정, 기금 마련, 세부 프로그램 기획, 동선 설계 등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사무국의 헌신 속에 운영되고 있다. 김군선 사무국장, 이내광(안드레아) 전례부장, 김종성(안드레아) 셰프 등 3명의 평신도는 봉사단이 공식 출범한 2014년부터 구성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규율과 의무로 접하며 교회에 거리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한국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하느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하자”는 공통된 목표를 품고 봉사에 나섰다. 2013년 꾸르실료를 함께 체험하면서 청년 사목의 절실함을 느꼈고, 김민수 신부의 사목적 비전에 공감하며 동참했다. 각자의 탤런트도 봉사에 더한다. 전통 목가구 디자이너인 김 사무국장은 대학 강단에서 청년들을 지도해온 경험을 살려, 전체 운영과 구체적 활동(목공·기계 기술 등)을 총괄한다. 김 셰프는 봉사단의 식사와 건강 관리를 전담하고, 이 전례부장은 공구 제작과 전례 전반을 김민수 신부와 함께 맡아왔다. 해외 봉사는 정해진 일정이나 예산, 장소가 미리 확보된 구조가 아니다. 사무국은 모든 것을 ‘영점’에서부터 기획해야 하며, 때로는 예산이 부족하거나 신청자가 없기도 하고, 천재지변 등으로 계획이 전면 중단되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청년들이 해외의 가난한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마주할 수 있도록 묵묵히 준비해 나간다. 김 셰프는 청년들이 기도를 어려워하지 않도록 봉사 전 10일간 직접 묵주를 만들어 각 단원에게 선물한다. 봉사 중에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청년들의 기도 여정을 이끈다. 이 전례부장은 “청년이 우리의 미래라고들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물으며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작더라도 우리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은 제13기 청년해외봉사단을 모집 중이다. 아울러 오는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동교동 청년문화공간 JU에서 ‘제1회 서울가톨릭페스타’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청년과 일반 신자, 시민이 함께 체험 교실, 토크 콘서트, 초대 공연 등을 통해 가톨릭 신앙과 문화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장으로 준비되고 있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6면

[당신의 유리알] 날개가 없는 이유

냇가에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오리를 노려보는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순간 상상은 저 너머로 향하고. ‘고양이에게 날개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에 이른다. 그러면 ‘물에 닿지 않고도 독수리처럼 오리를 사냥하고, 쥐 대신 박쥐와 높이뛰기를 하며, 이왕 날개를 달았으니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나 사람이나 하늘을 난다는 건 신비로운 상상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고양이는 너무 잠이 많다. 나는 지난해 ‘신학생들의 위로자’라고 불리던 남상근(라파엘) 신부를 만나러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앵무새 두 마리를 기르던 그는, 이제 통통한 고양이 아슬란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날개 달린 고양이가 그의 사제관 안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이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제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만화에서 나오는 로봇 박사님 같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좋았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제직 같아요. 변화무쌍하니까. 모르면서 시작했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했던 것들이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요. 새 신부일 때, 주교님이 첫 본당에 보내셨는데 열심히 살려고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요. 본당 신부님과 처음 차를 마시는데 패기를 보여주려고 대뜸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다부지게 말했지요.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냥 살아~’였어요. 그 말씀이 오히려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짝 얼어서 있었는데, ‘그냥 신자들과 살면 되는구나’ 아무 탈 없이 기쁘게!” 남상근 신부는 내가 ‘답’이 아니라 ‘위로’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주었다. “서품 50주년을 맞은,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수도회 신부님이 계셨어요. 누군가 할아버지 신부님에게 질문했다고 해요. ‘사제로서 어떻게 그리 잘 사셨나요?’ 보통은 하느님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하실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러셨대요.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 하다가 50주년이 되었다’고. 사는데 왜 힘들고 험한 갈등이 없겠어요. 그냥 사는 거지.” 입학을 함께 한 사이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어깨 같은 사람. 신학원 같은 반 친구가 짐을 싸서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나야 했을 때, 형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한참 울어주던 사람이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의 방에는 언제나 위로와 쉼이 필요한 신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때 우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았다. ‘저러다 공부는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한 명 빠지면 바로 다른 한 명이 그의 방을 채우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문제로는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기가 있는 그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때 그는 신학생다웠고 지금은 사제다웠다. 태어날 때부터 형님이 사제다웠을 거라는 생각에서 ‘부르심-성소’에 관해 물었다. 그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읽었던 ‘성가복지병원의 청년봉사자에 관한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에 그 병원이 있었고,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병원 간판이 보이자, 바로 내려 ‘봉사를 하고 싶다’고 시작한 것이 안내실 차트 정리였다. 그러던 중 병원의 한 수녀님이 ‘라파엘! 꼭 사제가 되면, 서품 첫 강복 받으러 갈게’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이게 부르심인가?’ 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입학한 지 4년이 흘러 신학교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첫 강복을 받으러 오신다던 그 수녀님을 우연히 만나 너무 기뻤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랜만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였다니! 당시 수녀님은 병원에 봉사 오는 모든 청년에게,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가라’고 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딱 걸린 것’이었다고. 이쯤이면 성소가 아니라 ‘착각’이 아닌가 싶은데. 그 후 형님의 서품식에 수녀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첫 강복을 받으셨다. 돌이켜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자주 인생의 ‘우연’을 사용하신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바스테트’(Bastet) 여신의 머리는 고양이상으로, 처음에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졌다. 후에 이 여신의 비밀스러운 눈인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다니며 악한 기운을 부수고 모두를 보호하자, 밤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다. 이쯤이면 이집트 고양이들은 적어도 그 위세에 날개가 없다고 사냥을 못 하거나 누구를 돕지 못해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때론 그런 생각도 든다. ‘고양이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천사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처럼. 2025년 1월 12일 주일 새벽. 내가 사는 성당에 불이 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상근 신부가 연락해 왔다. ‘성전에 불이 난 것을 이제사 들었다며.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늦게라도 꼭 오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차가 없었다. 분명 지하철로 그 밤에 왔을 것이다. 우리는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아직 유독가스가 가시지 않아 매캐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치지는 않았냐’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랜만에 만난 착한 동네 형 남상근 신부는 그렇게 찾아와 위안을 해주었다. 그는 말미에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요한 2,1-12)를 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았냐고… 아직 이 좋은 술이 남아있었냐는. 우리가 눈앞에서 희망을 잃게 되고, 아픔이 찾아올 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변화시키신 그 좋은 술은, 바로 화재에도 서로를 지키고 있는 이 공동체가 아니겠냐고.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새 사제의 첫 번째 안수처럼 내 머리를 꼭 감싸며 기도를 해주고 그는 돌아갔다. ‘그의 위로’는, 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형님은, 키우는 앵무새와 고양이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 주님의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위안을 전한다. 형님 같은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3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는 기원후 1세기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로마는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도시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이 씻겨 사라지지 않고 땅속 깊이 스며들어 하느님 나라의 싹을 틔웠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렇게 두 사도의 두 기둥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전승과 후대에 쓰인 외경은 성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땅속 깊숙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넓고 밝은 데로 나와 성당을 짓고 성찬례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보편 교회가 11월 9일에 봉헌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며, 이곳이 로마교회의 주교좌성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318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 재위)은 네로의 원형 경기장 옆 바티칸 언덕 기슭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첫 번째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이 성당이 새로운 대성당이 들어설 때까지 12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민족의 약탈을 견뎌 내며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공공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의 유형은 크게 ‘바실리카’와 ‘신전’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 바실리카는 공회당 같은 세속적 모임의 장소였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서 장방형의 기다란 형태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신전은 종교적 모임의 장소로 제관만 들어갔고 일반인들은 신전 밖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정방형 혹은 원형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모임의 성격 면에서 본다면 성당은 사제가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곳이기 때문에 신전에 가깝고, 따라서 정방형이나 원형의 형태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제사인 성찬례(미사)는 모든 신자가 참석하는 전례이기에 사제만 들어가는 신전 형태보다는 다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바실리카 형태가 더 어울렸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 평면을 보면, 중앙에 신자들이 앉는 넓은 공간인 ‘네이브’(nave)가 있고 양쪽에 통행로인 ‘아일’(aisle)이 두 겹으로 있는, 5랑식 구성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에서 안쪽 깊숙한 곳에 외부로 돌출한 반원형 공간이 있는데 이를 ‘앱스’(apse)라 부르고 그곳에 제단을 두었습니다. 네이브의 천장고와 아일의 천장고 차이를 이용해서 ‘네이브월’(nave-wall)의 상부에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었는데 이를 ‘클리어스토리’(clerestory)라고 부르고, 이 창 덕분에 성당의 중앙 바닥까지 빛이 닿았습니다. 천장은 목재로 구조 형틀을 만들고 그 하부를 평평하게 마감한 ‘목조 평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금처럼 교황이 머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이 교황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고, 이런 이유로 교황은 바티칸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교황청을 마련했습니다. 이후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는데, 건축한 지 천 년이 넘은 이 대성당 역시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 공사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한 교황은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입니다. 그는 처음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를 통해서 새로운 대성당을 계획하였으나, 제단의 성가대석 부분을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즈음에 교회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인 1453년 5월 28일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는 마지막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서방의 로마 교회는 동방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잃으면서 로마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위상을 이을 대성당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오 5세 교황 이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다시 무관심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나고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은 즉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는 새로운 대성당이 가톨릭교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성당의 건립을 결정하였습니다. 1506년 브라만테의 설계로 새로운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으며, 브라만테는 이후 여러 차례 설계를 변경했는데 안타깝게도 설계 과정과 변경 내용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실 율리오 2세 교황은 브라만테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어느 시대도 비길 수 없는 건축과 예술의 대가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성당이 그대로 지어졌다면, <아테네 학당>이 있는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서 출발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들은 신앙과 예술의 향연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브라만테는 그들과 함께 영원한 건축가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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