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 특집 - 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 (1) 증언하다: 박순집 베드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순교 역사를 증언하고, 찾아내며, 연구해 온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교회 전체의 노력이 있었지만, 순교의 현장을 기억하고 전한 평신도들의 역할 또한 매우 컸다. 올해 순교자 성월을 맞아 순교 역사를 지켜 온 평신도들을 조명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며 한국교회 순교사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순집(베드로, 1830~1911)이다. 그는 어떻게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가 됐나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의 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박해 시기인 1830년 10월 9일 지금의 서울 후암동에 해당하는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에서 아버지 박 바오로와 어머니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난 박순집의 삶은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과 안장, 그리고 행적 증언으로 요약된다. 박해가 끝난 뒤 조선교회가 순교자 시복을 추진할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증언자였다. 시복 수속 과정에서 그의 증언을 기록한 「박순집 증언록(朴順集 證言錄)」(이하 증언록)이 세 권으로 편찬된 것은 그가 한국교회 순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준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8년 순교자 시복을 위해 프와넬(Poisnel) 신부에게 순교자 행적 조사를 지시했다. 프와넬 신부는 박순집의 증언을 들었고, 서기를 맡은 권 타대오는 그 내용을 한 마디도 바꾸지 않고 기록했다. 그 결과 증언록에는 150여 명의 순교자가 수록됐다. 그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심 깊은 가문이 있었다. 할머니가 ‘갸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신자였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로 일하며 여러 신자의 순교 현장을 목격했고, 비밀리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 박 바오로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목숨을 걸고 시신을 찾아내 왜고개(瓦署)에 안장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이 사실을 들었을 뿐 아니라, 김대건 신부가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됐고, 병인박해 당시 순교 현장에 있었다. 그는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우세영(알렉시오) 등 순교자 7위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인근에 임시 매장한 뒤 왜고개에 안장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요한)과 성 최형(베드로)의 시신도 왜고개에 묻었다. 순교하지 못한 이가 선택한 보속의 길 그가 평생 순교자들의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아픔도 있었다. 병인박해 한가운데 있었지만 검거망을 피해 살아남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1866년 10월 고모 박 막달레나와 조카 박 바오로, 1868년 3월 아버지 박 바오로가 순교했다. 문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박순집 집안에서 순교한 이는 20여 명에 이른다. 증언록에는 그의 친인척을 비롯해 여러 순교자의 체포 과정과 신앙 고백, 순교에 이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겪은 고통과 끝까지 신앙을 지킨 영광이 함께 기록됐다. 인천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김규성(요셉) 신부는 논문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에서 그가 증언자로 살아간 배경에 대해 “집안에 순교의 영광을 얻은 이들이 많았지만 자신은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남았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고, 이를 보속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박순집과 인천교구 갑곶 순교 성지 인천교구사에서 박순집은 ‘교구 발전의 초석’으로 표현된다. 그는 서울 홍제동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고 살다가 1889년경 인천 제물포 신자들의 요청으로 1890년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당시 제물포에는 사제가 없었고 조선인 신자 두 가정, 일본인과 중국인 신자가 있을 뿐이었다. 박순집은 답동본당 주임 빌렘 신부의 부탁으로 1892년부터 1902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했고, 이후에도 회장과 같은 역할을 이어 갔다. 1911년 6월 27일 81세로 선종한 그는 인천 용현동에 묻혔다가 1961년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다. 이후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2001년 5월 24일 도화동성당 성체조배실 안에 그의 유해를 봉안한 뒤 같은 해 9월 갑곶 순교 성지로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해 이장 당시 인천교구장 고(故) 나길모 주교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신앙을 증거한 박순집 베드로의 정신을 본받기 위한 교우들의 노력과 실천이 요청된다”고 당부했다. 갑곶 순교 성지 전담 민동규(다니엘) 신부는 그의 신앙에 대해 “그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신앙은 단지 믿고 간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전하고, 이어 가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며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희생을 너무 쉽게 과거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만, 박순집으로부터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되살려야 하는 책임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0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스테파니의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2004년 우리나라에도 번역·소개되었던 역사소설 「임프리마투르」에는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아토 멜라니(Atto Melani, 1626~1714). 그는 유럽 왕실을 누비던 카스트라토 가수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비밀 정보원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에는 노래와 정치, 밀사 임무와 첩보가 함께 했다. 가상 인물처럼 보이지만 무려 실존 인물이다. 동시대 네덜란드에는 콘스탄테인 하위헌스(Constantijn Huygens, 1596~1687)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부친이다.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는 류트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을 방문했을 때 제임스 1세 앞에서 연주했고 이런 말을 남겼다. “류트, 접견실로 들어가기 위한 나의 열쇠여.” 음악학자 폴 오데트는 “류트 연주자는 자주 스파이나 이중 첩자로 이용되었다”라고 말한다. 나지막한 음량을 가진 류트는 왕이나 최고위 측근들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연주하기 좋은 내밀한 현악기다. 한마디로 이는 정보원에 접근하기 최적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음악은 궁정 깊숙한 곳으로 사람을 데려갔고, 때론 외교의 강력한 무기가 됐다. 이런 시대에 작곡가와 외교관, 가수, 성직자 이력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 있었다. 아고스티노 스테파니(Agostino Steffani, 1654~1728)다. 스테파니의 삶을 한 가지 직함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 활동했고, 작곡을 공부했다. 뮌헨 궁정에서 일하다 1680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하노버로 옮겨 여러 오페라를 썼고, 외교 임무도 맡았다. 브뤼셀과 뮌헨을 오가며 협상에 참여했으며, 주교품을 받고 작센 지역 대목구장까지 올랐다. 그의 첫 출판 작품은 성음악집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인 1674년 로마에서 펴낸 「저녁기도 시편집(Psalmodia vespertina)」이다. 같은 시기 스테파니는 별도의 성음악도 작곡했다. 1673년 11월에 완성된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Laudate pueri)〉가 그중 하나다. 시편 113편을 바탕으로 한 이 곡은 오늘날 케임브리지 피츠윌리엄 박물관의 필사본으로 전한다. 아홉 성부로 쓰인 곡이지만 독창, 이중창, 삼중창과 합창이 번갈아 나타나고, 때론 두 합창이 합쳐지면서 음향의 크기와 밀도가 달라진다. 적은 수의 성부가 중창처럼 나서며 선율들이 서로를 모방하고 화답하며 얽힌다. 훗날 스테파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듀엣(실내 이중창)’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실제로 스테파니는 듀엣의 대가였다. 곡을 듣다 보면 궁금증도 생긴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 상대를 붙잡고 싶은 조바심, 질투와 희망, 체념과 격정이 작품 속에서 계속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후 주교가 된 사제가 사랑과 관련된 온갖 감정을 어떻게 이토록 세밀하게 그려냈을까. 바로크 시대 작곡가에게 인간의 여러 정감(affetti)을 표현하고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은 중요한 덕목이었다. 스테파니는 이런 면에서 탁월한 거장이었고, 그의 이중창이 유럽 전역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에도 그의 음악적 특기가 곳곳에서 보인다. 여러 목소리가 맞물리고 다시 합치되며, 텍스트에 섬세한 표정을 드리우는 감각. 사랑의 애틋함을 노래할 때도, 시편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때도, 그는 음악과 가사로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수이자 작곡가, 사제이자 주교. 때로는 외교관으로서 국경을 넘나들었던 이. 멜라니와 하위헌스 사례에서 보았던 17세기 음악가의 여러 모습이 스테파니에게서 모두 공존한다. 열아홉 살 청년이 남긴 아름다운 시편은, 훗날 그가 보여줄 천의 얼굴을 예고하고 있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7면

2026 WYD 세계 청년 한마당…“함께 놀며 문화·신앙 교류해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1년 앞두고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교를 나누는 장이 마련됐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과 이주사목위원회는 8월 30일 서울 혜화동 동성중고등학교 일대에서 ‘2026 WYD 세계 청년 한마당’을 개최했다. ‘우리 함께 놀아요!(Let's play together)’를 주제로 열린 행사에는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필리핀, 스페인,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청년 300여 명이 참가했다. 개막미사는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총괄 코디네이터 이경상(바오로) 주교 주례로 동성중·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영어로 봉헌됐다. 아울러 제1독서와 제2독서는 각각 몽골어와 인도네시아어로 봉독됐다. 참가자들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베트남어, 영어, 한국어 등 각자의 모국어로 보편지향기도를 바쳤다. 이 주교는 강론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청년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가는 모습을 두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청년들은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며 새로운 땅에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환대를 베풀고, 함께 성장하는 길을 찾아가기 바란다”며 “외국 청년들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배우면서 서로의 다양성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풍요로움을 이루어 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또한 이 주교는 2027 서울 WYD 주제 성구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를 언급하며 청년들이 서로의 이야기와 꿈, 고민과 신앙을 나누면서 희망의 표징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러한 만남을 통해 우리는 누구도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함께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희망의 표징이 될 것”이라며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이 바로 그 희망의 시작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미사 후에는 운동장과 강당 등에서 문화 교류와 체험 부스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한국의 전통놀이인 ‘딱지치기’와 ‘고무신 던지기’, 일본의 전통 목제 놀이 ‘다루마오토시’, 필리핀의 전통 죽마 놀이 ‘까당까당’ 등 각국의 놀이를 체험했다. 또한 물총을 활용한 팀 대항전 ‘말씀을 지켜라’, 팀 협동 게임 ‘공 굴러가유’, ‘청홍판 뒤집기’, ‘붐샤카라카 챌린지’, ‘미션 릴레이’ 등의 부스 프로그램도 호응을 얻었다. 전통놀이를 체험한 베트남 유학생 응웬 투이 응언 씨는 “서울 WYD를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내년에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부스 봉사자로 참가한 이장범(모세) 씨는 “덥고 습한 날씨에 힘들기도 했지만 색다른 놀이를 체험하고 즐거워하는 외국인 참가자들을 보니 기쁜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성 프란체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성 요세피나 바키타, 성 가롤로 아쿠티스 등 수호성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2027 서울 WYD 수호성인 포토월’을 비롯해 ‘WYD 카드 짝 맞추기’, ‘수호성인 키링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등 서울 WYD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됐다. 탄자니아 출신의 봉사자 마이클 보니파시오 음줄리 씨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년 대회가 잘 치러지도록 계속 기도하고 있다”며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 문화도 접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WYD 홍보단의 공연으로 마무리됐다. 홍보단은 한량무와 소고춤 등 한국무용을 비롯해 케이팝(K-POP) 댄스를 선보이며 참가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행사를 주최한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유상혁(요한 세례자) 신부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이 서울 WYD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오늘의 만남이 내년 대회까지 이어져 청년들이 서로를 기억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7면

[AI 말고 인간!] AI가 분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맥락을 읽는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나 잘 지내.” 짧은 한마디인데 어머니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말끝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고, 웃음소리 뒤에 미세한 머뭇거림이 섞여 있다. 몇 초의 침묵, 그 틈에서 어머니는 이미 알아챈다.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정작 딸은 그 어떤 사정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같은 말을 인공지능(AI) 스피커에게 건네면 어떨까. 문장은 정확히 인식하고, “다행이네요”라는 다정한 답이 곧바로 돌아올 것이다. AI는 문장을 읽지만, 문장 뒤에 숨은 떨림은 읽지 못한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교 연구진은 2025년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간극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이미지, 영상, 언어를 다루는 AI 모델 350여 개를 모아 실험했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3초짜리 영상을 AI에게 보여 준 뒤, 연구진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 매긴 평가와 뇌 반응을 AI가 얼마나 정확히 예측하는지 비교했다. 물체와 장면을 처리하는 뇌 영역의 반응에서는 AI가 비교적 사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무엇을 하는지, 서로 소통하는지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이 걸린 장면에서는 한계가 뚜렷했다. 특히 그 장면을 볼 때 나타나는 사회적 시각 처리 관련 뇌 반응을 인간 수준으로 예측한 모델은 없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었다. 사람이 쓴 문장 설명을 함께 받은 AI는 영상만 보고 판단한 AI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비슷하게 맞혔다. 언뜻 사람과 비슷하게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볼 때 사람의 뇌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니 결과는 달랐다. 문장 설명을 받은 AI조차 사람의 뇌 반응은 제대로 맞히지 못한 것이다. 답은 비슷하게 냈지만, 그 답에 이르는 방식은 사람과 달랐다는 뜻이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나 상황을 판단하는 일을 맡은 뇌 부위에서는, AI가 사람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지금의 AI는 정지된 장면을 읽는 데는 능숙해졌지만,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살아 있는 장면을 인간처럼 읽어 내기에는 아직 서툴다는 것이다. 맥락을 읽는다는 것은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내놓는 일이 아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을 알아채는 일이다. 목소리의 떨림, 시선이 머무는 시간, 침묵의 무게 그리고 그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봐 온 시간의 축적.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맥락이 완성된다. 정답을 맞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알고리즘은 어제와 오늘의 표정을 나란히 비교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살아 있는 존재로 대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말보다 먼저 마음을 읽고, 정답을 찾기보다 상대를 살피는 것. 그 능력은 데이터를 쌓는다고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함께 밥을 먹고, 눈을 맞추고, 서로의 침묵을 견뎌온 시간 속에서만 조용히 자란다.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말 뒤에 숨은 표정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AI가 분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맥락을 읽는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7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2) 가톨릭신문 속 그때 그 사람들

가톨릭신문은 창간 99년이라는 오랜 역사 안에서 여러 인물의 발자취도 기록해 왔다. 오늘날 교황과 주교, 사제를 양성하는 대신학교장 등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는 이들도 과거에는 한 명의 사제, 수도자, 신학생으로 가톨릭신문에 등장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이들의 ‘그때 그 시절’을 살펴본다. 레오 14세 교황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다섯 차례 한국을 찾았다. 가톨릭신문은 2002년과 2005년 수도회 한국지부 방문, 2010년 수도회 한국 진출 25주년 기념행사 참석 당시의 소식을 알렸다. 2002년 1월 27일자는 “수도회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가 내한했다”며 “한국지부의 청소년 사목·영성 상담·피정 지도 등의 사도적 활동 현장을 둘러보고 회원·재속회원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2010년 10월 10일자도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를 비롯한 각국 장상들과 회원 250여 명이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군종교구장 서상범(티토) 주교는 군종 사제로 동티모르에 파견돼 있던 1999년, 여러 차례 현지 상황을 전했다. 당시 서 신부는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투 병력이 해외에 파병된 상록수부대의 일원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서 신부는 가톨릭신문을 통해 동티모르 현지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독자들의 응답에 서 주교는 1999년 12월 26일자에 실린 편지로 “가톨릭신문사의 적극적인 홍보에 힘입어 동티모르 형제자매들이 성금과 구호품을 받았다”며 “옷·신발·영양제·분유·세탁비누·학용품 등 요긴한 물품들이 도착하고 있어, 우리의 기도와 사랑의 마음에 감격해하고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서 주교는 2000년 4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21년 6개월간 해왔던 군 사목을 마무리 지을 때도 인터뷰로 소회를 밝혔다. 2012년 12월 16일자는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 때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 주교의 말을 인용했다. 이후 서 주교는 2021년 4월 9일 제4대 군종교구장에 착좌해 군 사목으로 돌아왔다. 사제가 되기 전의 모습도 담았다. 가톨릭신문은 1994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민범식(안토니오) 신부의 소감을 실었다. 1994년 1월 16일자는 “권위 있고 엄숙한 신부님보다는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민 신부의 포부를 전했다. 꿈꿨던 모습의 사제가 된 민 신부는 2025년 2월 18일부로 제20대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장에 임명됐다. 취임을 앞둔 2025년 3월 16일자 인터뷰에서 민 신부는 “앞으로는 성소자와 양성자 간의 ‘밀접 동반’으로 변화를 꾀하며 사제 양성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면

[성미술 산책]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예술가, <해바라기>의 작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동생, 그리고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테오와 무려 7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덕분에 그의 깊고 진솔한 내면세계와 예술철학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27세에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그는 가장 가난한 자들인 농부, 광부, 매춘부 등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았고, 생을 마감한 37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여 년간 작품 제작에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의 팔레트는 처음부터 밝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고향 네덜란드에서 활동할 때는 갈색조로 어두웠는데,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와 빛을 접하며 대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고흐가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에 체류할 때 그린 작품으로, 보랏빛의 드넓은 양탄자가 깔린 듯한 밀밭 우측에 힘차게 걸어 나오며 씨를 뿌리는 농부가 있습니다. 멀리 후경에는 아직 수확을 기다리는 황금빛 밀밭이 지평선 너머 펼쳐지고 그 뒤로 강렬한 노란 태양이 눈부신데, 고흐는 그의 그림 속 ‘태양’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빛은 이 세상 어디 후미진 곳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고흐는 자신이 정신적 지주로 삼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와 같이 ‘일상에서 거룩함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진실된 신앙고백’이라는 신념을 함께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갈라 6,7)라는 ‘노동의 숭고함‘의 교훈을 전해줍니다.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수확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 시작은 좋은 씨를 뿌리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그가 한 화가 친구에게 한 진솔한 고백은 그의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면모를 보여 줍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선하고 쓸모 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일상의 다사다난한 문제들을 풀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고단한 우리 삶의 운명입니다. 고흐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가득 담은 햇살을 받으며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리고 이 귀한 삶을 얼마나 열정적이고 의미 있게 채워야 하는지…. 글 _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4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새들과 이야기를 나눈 ‘프란치스코의 사막섬’

포조 부스토네의 거룩한 동굴에서 선교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형제들만 낯선 땅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신앙을 ‘틀린 신앙’으로 여겼던 이 시기의 선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형제들을 비그리스도교 지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프란치스코는 1219년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 다미에타까지 갔습니다. 당시 십자군은 나일강 범람과 홍수, 역병,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37세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측 교황 대리 펠라조의 허락을 받아 39세의 이슬람 술탄 말릭 알 카밀을 만났습니다. 그는 평화의 필요성을 말하며 술탄과 그 백성들에게 개종을 권고했습니다. 또 자신의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 제사장과 함께 그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 때문이고, 살아남는다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로 불을 등진 채 달아났고, 술탄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감탄해 보물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을 서약한 프란치스코는 재물을 먼지처럼 여겼습니다. 이를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간 프란치스코는 말릭 알 카밀을 만나 평화를 전한 뒤, 베네치아인들의 배를 타고 돌아오다 사막섬을 발견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있었다는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성 보나벤투라가 쓴 「대전기」에 나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1263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유해를 확인하고 대성당으로 옮기기 위해 파도바에 머물며, 프란치스코 성인이 베네치아의 사막섬에 머물렀다는 전승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의 석호를 건너는 동안 많은 새 무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 형제들이 창조주를 찬미하고 있으니 새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시간경을바치자고 했습니다. 새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지만, 새소리가 기도 소리와 뒤엉켜 시간경의 응송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성인은 새들에게 자신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잠시 소리를 멈춰 달라고 했습니다. 새들은 알아들은 듯 성인과 동료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다시 지저귀어도 좋다고 허락하자, 자기들의 방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작은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프란치스코는 동료인 일루미나토와 함께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섬은 오래전부터 ‘두 포도나무의 섬(Isola delle due vigne)’으로 불렸고, 소유주는 베네치아 사람 야곱 미키엘이었습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인 1233년, 야곱 미키엘은 이 섬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했습니다. 이때부터 섬은 ‘프란치스코의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 무렵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섬은 한때 방치되어 황폐해졌고, 지형적 의미에서 ‘사막(deserto)’이라는 말이 붙어 ‘프란치스코의 사막섬’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오히려 긍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곧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고요한 은수처’라는 뜻으로 더 빛나게 된 것입니다. 수도원 입구 현판에 적힌 ‘O BEATA SOLITUDO, O SOLA BEATITUDO(오, 복된 고독이여, 오, 유일한 행복이여)’라는 문구처럼, 이곳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고독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행복을 지금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인 13세기 사각 정원과, 염분 많은 섬에서 빗물을 받아 모아 사용하던 우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물은 육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의 생활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사각 정원 한쪽 벽에는 13세기 부조로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벌거벗은 팔은 예수님의 팔을, 옷소매가 있는 팔은 프란치스코의 팔을 나타냅니다. 두 팔의 손바닥에는 모두 못 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 모양으로 교차된 두 팔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따르고자 했던 열망을 상징합니다. 사각 정원과 붙어 있는 수도원 성당은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프란치스코가 시성된 해인 1228년에 처음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의 성당은 수 세기에 걸친 증축과 개축, 복원을 거치면서도 최대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성당과 성모 마리아 소성당 사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장소인 프란치스코의 기도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문장은 이곳이 성인께서 머물며 기도했던 자리임을 일깨웁니다. ‘Hic est locus ubi oravit seraphicus pater Franciscus(여기는 천사 같은 사부 프란치스코가 기도한 장소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땅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종교 간 갈등의 해소와 평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국의 이익만을 외치고 이웃을 적으로 돌리며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오늘,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3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2) 교구 시노드 봇물

“인천교구가 교구 대의원회의를 개막, 2000년대의 새로운 복음화를 모색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과 쇄신을 향해 나아갑시다’를 주제로 한 인천교구 대의원회의는 6월 6일 오후 2시 주안 3동성당에서 거행된 개막미사와 총회를 시작으로 2000년 9월 3일 폐막까지 1년 3개월간 교구의 목표와 현실을 점검하고 새복음화, 재복음화, 사회복음화의 기치 아래 2000년대 사목방향을 결정한다.”(가톨릭신문 1999년 6월 13일자 1면) “수원교구가 새로운 세기를 여는 대희년을 맞아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 보는 교구 시노두스(대의원회의)를 개막했다. … 수원교구는 이날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오는 2000년 12월 3일까지 교구 공동체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교회 기초 공동체 활성화’, ‘자율적인 젊은이 신앙생활’ 등 두 의안에 대한 새로운 방향점을 설정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시노두스를 개최하게 된다.”(가톨릭신문 1999년 7월 25일자 1면) 2000년대 새로운 복음화 모색, 전국 교구 시노드 잇따라 개막 사회 변화 속 사목적 한계 성찰… 교회 구조·의식적 변화 이끌어 대희년 앞둔 교회의 쇄신 노력 2000년 대희년을 앞둔 한국교회는 새로운 교회로 변화하기 위한 보편교회의 노력에 동참하면서, 새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고 참된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쇄신 노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교구 시노드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1999년은 이러한 교구 시노드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해였습니다. 우선 6월 6일에는 새복음화, 재복음화, 사회복음화를 기치로 2000년대 사목 방향을 결정할 인천교구의 시노드가 개막됐습니다. 이어 7월 17일에는 수원교구가 ‘새로운 복음화의 길 찾기’를 대주제로 시노드 개막미사를 거행했고, 1997년 개막된 대구대교구 시노드가 10월 10일 폐막됐습니다. 그리고 대희년이 시작된 2000년에는 서울대교구가 시노드를 개막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교구 시노드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청주교구는 2008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시노드를 개최했고, 대구대교구는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제2차 교구 시노드를 개최했습니다. 대전교구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며 새로운 사목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새 시대의 도전과 자기 성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전례 없는 사목적 성찰과 구조적 전환이 일어난 중대한 시기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구가했던 한국교회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사회가 세속화, 다원화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양적 팽창 이면에 가려져 있던 내적 빈곤과 사목적 한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세 성장 둔화, 주일미사 참례율 감소, 냉담 교우의 양산과 성사 생활 참여의 저하, 그리고 기복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 행태 등 복합적인 위기 징후들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과거의 수직적 사목 방식으로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수 없다는 자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찰은 보편교회의 흐름과도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가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새로운 복음화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이라는 역사적 기점은 교회가 하느님 백성 전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교구의 미래 비전을 공동으로 식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교구 시노드의 결실과 한계 시노드를 통해 각 교구는 고유한 사목 환경과 여건에 맞춰 자기 쇄신을 위한 방안과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사목 정책을 수립해 나갔습니다. 특히 1990년대 말 집중적으로 열린 교구 시노드들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구조적, 의식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논의하고 ‘담대한 경청’을 하는 것이 교회의 본래 운영 방식임을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성직자 중심의 일방적이고 하향식의 지시와 순명에 익숙했던 신자들은 시노드 여정을 거치며 “하느님 백성의 상처 입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식별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첫 번째의 성과와 깊이 연결되는 것으로서, 평신도들의 위상 제고와 사목 참여 구조의 실질적 확대였습니다. 시노드 과정 자체에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평신도 대의원들이 동등한 하느님 백성의 자격으로 한자리에 모여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숙의한 경험은, 한국교회 내에 강렬한 시노달리타스의 체험으로 남았습니다. 셋째, 소공동체 사목의 전면 도입은 모든 교구 시노드에서 공통적으로 평가됐습니다. 시노드에서 강조된 사목 방향 가운데 하나도 소공동체 활성화였습니다. 이전까지 한국교회의 본당 조직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 행정 단위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시노드를 기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의 교회론을 바탕으로 본당을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재규정하는 신학적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청소년 사목이 교회의 주변부에서 핵심적 사목 의제로 승격됐다는 점입니다. 수원교구는 아예 젊은이를 핵심의제로 삼았고, 인천교구는 청소년·청년 영역을 세분화했으며, 서울대교구는 청소년·청년을 동등한 현재의 교회 구성원으로 보도록 명시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선제적 체험 교구 시노드들이 해당 교구의 미래 비전을 모색하고 교구를 새로운 면모로 일신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와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풍성한 논의와 결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고 구조적이며 제도적인 후속 작업을 통해 성과를 가시화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말 집중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교구 시노드의 체험은 외적 팽창과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한계에 부딪힌 한국교회가 복음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신학적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던 각고의 노력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보편교회의 화두인 시노달리타스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200주년 사목회의, 그리고 특히 교구 시노드들을 통해서 선제적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8면

교회 시선으로 시대 흐름 전달에 충실…‘해석과 질문’ 고민하길

◎ 참석자 현재우 에드몬드 위원장(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김은영 크리스티나 위원(경향잡지 편집장) 이진옥 페트라 위원(돈보스코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 선임연구원) 이혜정 에밀라스 수녀(생활성서사 교육연구팀장) 조성현 대건 안드레아 위원(전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위원(한님성서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신문 편집자문위원회 제31차 회의가 8월 27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2026년 5월 10일자부터 8월 30일자까지 가톨릭신문 지면과 홈페이지에 게재된 콘텐츠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위원들은 세계교회의 흐름을 전달한 기사, 사회적 관심사를 신앙과 연결한 콘텐츠, 신자들의 삶과 현장을 담은 기획들이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창간 100주년 기획 -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 ‘가톨릭 POLL’, ‘가톨릭 쉼터’, ‘세상살이 복음살이’ 등 가톨릭신문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눈길을 끈다고 전했다. 동시에 인공지능(AI) 확산과 그에 따른 선용 필요성, 주식 투자의 양면성, 혐오 문화의 확산 등 시대적으로 관심이 높은 주제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에 머무르기보다 교회의 시선과 해석을 담은 심층 보도로 발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최성준(이냐시오) 신부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가 1년 앞으로 다가왔고 가톨릭신문도 내년 4월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와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며 “신문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편집자문위원들의 고견을 적극 반영해 더 나은 신문을 제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내용, 좋아요 위원들은 세계교회의 흐름과 신학적 담론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편교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줬다고 평가했다. 특히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는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신학자들의 연구와 고민을 소개하며 세계교회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의견을 냈다. 필리핀 여성 평신도 신학자인 애그니스 M. 브라잴 교수 인터뷰(8월 30일자)는 평신도와 여성이 신학의 새로운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흐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 현상을 신앙의 시선으로 바라본 콘텐츠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톨릭 POLL’을 통해 주식 투자, 혐오 문화 확산 등 사회적 관심사에 관한 교회의 여론을 확인하고 후속 ‘세상살이 복음살이’ 특집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독자 참여와 공론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주식 문제는 단순한 투자 정보가 아니라 신앙인의 경제생활과 윤리 문제로 확장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투자하는 기업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전쟁이나 생명윤리와 관련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 사회교리적 질문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쉼터’는 50년간 헌책과 사람을 품어온 글벗서점(6월 21일자), 수도회 수제맥주 공방 ‘홉플로우’(8월 23일자), 자립준비청년 앙상블(7월 19일자) 등 연성적인 일상 소재를 신앙과 연결했다는 점에서 좋은 사례로 언급됐다. 폭염 속에서 계절노동자들과 함께 생명농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은 농민주일 특집(7월 19일자), 태안 갯벌을 찾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특집(8월 30일자) 등 현장 르포 기사도 눈길을 끄는 기사로 이름을 올렸다. 여름 특집 ‘핫플 옆 성당, 성당 옆 핫플’(7월 19·26일자, 8월 2일자)은 젊은 세대가 관심을 갖는 소위 핫플레이스와 인근의 성당을 연결해 소개함으로써 관광지를 신앙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시도였다고 전했다. 성지순례, 신앙생활 안내 등과 연결해 온라인 콘텐츠로 확장할 가능성이 있는 기획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유튜브 8부작 ‘WYD 청년을 만나다’는 역대 WYD 참가자들의 체험과 신앙 고백을 생생하게 담아낸 콘텐츠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장애인들의 WYD 참여에 관한 의견을 낸 김재원 씨 인터뷰(6월 28일자), 전 신자가 성경 필사로 WYD 성공을 기원하는 제주교구 신창본당 기사(8월 16일자)는 WYD가 청년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교회의 축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자문위가 제안합니다 위원들은 가톨릭신문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시대를 해석하고 독자와 함께 고민하는 언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AI 관련 보도와 관련, 기술 자체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인간 존엄, 관계, 신앙생활의 변화, 윤리적 문제까지 함께 다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AI가 가져올 편리함뿐 아니라 인간성 상실 등 우려되는 지점도 균형 있게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교회 면에 보도된 ‘교황청 경신성사부, 미사 중 평신도 강론 불가하다’(6월 24일자) 기사는 단순 보도를 넘어 해당 논의가 제기된 배경과 의미, 한국교회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맥락을 설명하는 후속 보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회적 이슈를 다룬 기사 역시 교회만의 시선을 더욱 분명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학교폭력과 참교육 문제, 주식 투자와 경제 윤리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주제일수록 교회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과 지면 구성의 변화 필요성도 강조됐다. 문자 중심 콘텐츠에서 벗어나 사진, 그래픽, 아이콘, 레이아웃 등 시각적 요소를 강화하고, 제목을 단순히 활자로 제시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이미지와 컬러를 활용해 독자가 쉽고 재밌게 기사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주교 임명 축하 광고 등 기존 광고 방식에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단순히 ‘축하합니다’로 반복되는 문구에서부터 사진 사용이나 배치까지 기존의 틀을 탈피한 디자인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아울러 축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나 본당 공동체의 나눔과 실천 등 교회의 가치를 담아내는 콘텐츠형 광고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위원들은 한 목소리로 “가톨릭신문이 시대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공론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며 “창간 100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있고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신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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