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스테르

6·25전쟁이 시작됐을 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에게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50년 7월 5일에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세계 최강인 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북한군에게는 소련제 전차가 있었는데 국군에게는 전차를 파괴할 만한 화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 전차에 직접 올라가 해치를 열고 준비한 수류탄, 화염병을 안으로 던져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차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국군들은 결사대를 자원으로 뽑았다. 6·25전쟁 하면 남성들만 주로 언급되는데, 사실은 1950년 8월에 해병대 4기 모병에 1300여 명 중 여성에 126명이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9월 6일 서울수복 후 여군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최근 한 모임에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전문직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입대해야죠”라고 담담하게 말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성경에서 용감한 여성을 꼽을 때 에스테르가 빠지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모르도카이는 왕궁에서 일을 했는데 용모가 빼어난 에스테르를 양녀로 삼았다. 나중에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왕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애국 여성이 되었다.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두 내시의 반역 모의를 듣게 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을 고발하였고 두 내시는 처형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로 왕의 신임을 더 얻게 된다. 한편 이 두 내시와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재상 하만은 이 일로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작정한다. 에스테르가 왕후가 된 후 모르도카이도 궁궐 대문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재상 하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하만은 왕에게 유독 유다인들만이 다른 민족과 화합하지 않아서 앞으로 위협이 되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고발하고 왕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하며 에스테르에게 소식을 전했다. 에스테르는 유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흘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왕궁에서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만나 유다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에스테르의 지혜로 하만이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죽게 되었다. 에스테르가 모르도카이에게 보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다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2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에돔의 멸망을 전한 예언자 오바디야

1943년 이전에는 구약성경이 가톨릭 신학생들도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자들을 구약성경에 접근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주일 미사 때 구약성경의 독서가 없었으나 지금은 제1독서에서 구약성경을 꼭 읽게 되어 있다. 이단 교회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생겨난다. 특히 구약 부분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아예 전문가들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하느님,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사상이나 성향을 극단적으로 거슬러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구약성경를 읽는 것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구약성경을 읽는 대신 준주성범을 오랜 세월 동안 읽었다. 사실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잘못 이해할 위험성도 많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점차로 가톨릭 내에서도 활발히 성서학 연구를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통해 정식으로 성경 문헌을 개방하고 성경 연구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어주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느님을 배신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한 에돔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가 오바디야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의 정보는 아주 부족하여 작성 시기는 물론 많은 논란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기 시대에는 오바디야가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앗시리아가 침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유배시켰다. 바빌론 유배의 전후로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굳이 나누자면 바빌론 유배 전후로 구분한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예언자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구원한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기고, 계약으로 맺은 율법을 지켜 신실하게 살라고 권고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을 믿고 있는 채 우상도 함께 주인으로 모신 죄였다. 종교혼합주의라 할까.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곳의 잡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스라엘은 벗어나지 못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지속해서 에돔의 멸망을 외쳤지만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유다인들은 비참하게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바디야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했다. 이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나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세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1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다윗에게 직언한 예언자 나탄

자고로 권력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독재자들이 국민을 돌보는 갖은 연출을 하는 것은 민심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음을 얻는 것은 비단 정치뿐 아니라 직장이나 사회, 가정 등 모든 인간관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옛날의 왕이 가진 권력은 절대적이라 왕에게 직언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실제로 권력자에게 직언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예전의 일만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직언을 피하고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고집이 세지는 경향을 자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세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중 하나이고 뇌의 신경세포와 접촉하여 정보가 오고 가는 부분이 줄어들어 뇌가 굳어지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경우 새롭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하던 사고경로만 따른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계속해서 사고방식이 발전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나탄 예언자는 위세가 당당한 다윗 왕의 통치 시기와 이스라엘이 최고의 발전을 누리던 솔로몬왕 시대에 활약했던 예언자이다. 다윗 왕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계획을 나탄에게 상의한다. 다윗이 나탄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잘 나타난다. 나탄은 처음에는 다윗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나탄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이 아닌 그의 후손을 통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탄이 성경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윗 왕에게 직언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탄은 다윗에게 우화를 들려준다. (사무엘기 하 12장 참조) 한 부자가 한 마리의 양을 가진 가난한 사람에게 빼앗아 자기 손님에게 대접한 이야기를 나탄에게 들은 다윗은 매우 분노하며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탄은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아내를 데려다 임금님의 아내로 삼았다’며 다윗에게 직언했다. 나탄의 갑작스런 책망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 여기서 다윗이 어떤 아량을 가진 사람인지 잘 드러난다. 나탄의 직언에 다윗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잘 드러낸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나탄이 다윗 왕의 죄와 잘못을 용기있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일은 예언자의 모델로 여겨진다. 나탄은 참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어 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0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아람 장군, 나아만

오늘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이 좋아야 한다. 6·25전쟁 중공군 공세 때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특별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패튼 사령관이 최고로 칭찬한 지휘관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장기적인 국군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장교 인력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재를 털고 주변의 돈을 모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유명한 일화는 6·25전쟁 중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 공군 대위가 북한 순천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었다. 이틀에 걸친 수색이 효과가 없자 불필요한 희생을 걱정해 직접 수색을 중지시킬 정도로 공과 사가 엄격했다. 그는 전쟁 후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리 한국의 발전을 위해 자주 방문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전쟁영웅인 그는 정치권의 부름을 거절하고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러모로 한국을 도왔다. 자신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들의 혼이 묻혀있는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오늘날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있는 까닭이다. 아람 군대의 장수인 나아만은 임금이 소중하게 여기는 큰 인물이었지만 불행하게 나병 환자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병 환자를 사회에서 추방했지만 아람에서는 왕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데려온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 소녀는 주인의 병을 고칠 이스라엘 지역의 유명한 예언자를 소개했다. 몸종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면 주인의 심성이 좋고 잘 대해주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통해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인 땅에도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나아만은 임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아람 임금은 친서를 써주었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과 함께 이스라엘 임금에게 향했다. 편지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다면서 옷을 찢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엘리사는 왕실에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 한다. 나아만은 대규모 군대와 함께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나와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예언자의 말만 전한다. 나아만은 긴 여행 끝에 도착했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엘리사에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부하들이 막아서며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가르침대로 하니 나아만은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교만과 자존심을 버렸고 부하들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넓은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치유 후에도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더더욱 어떤 분야든지 겸손하고 인성이 좋아야 한다. 교만과 이기심은 자신과 주변까지 추락시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2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 스승 엘리야를 백성들과 이어준 엘리사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천혜의 방어망 라인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라인강은 강폭이 넓고 회오리치는 곳이 많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적지이다. 히틀러는 라인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중부 라인강변에 도착한 미군 일부는 아침 안개가 걷히고 포연이 사라진 뒤 기적을 목격했다. 라인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을 잇는 철교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에서만 폭발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특공대는 다리 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한발씩 전진해 1945년 3월 7일 다리를 접수했다,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셈이다. 연합군은 라인강 너머로 교두보를 마련했고 대공포대를 설치했다.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독일의 전략요충지로 계속 병력과 탱크와 물자를 수송했다. 히틀러는 크게 화를 내며 지휘한 장교들을 처형했고, 독일군은 여러 번의 공습과 심지어 실험 중이던 V2로켓까지 10발 이상 발사했지만 다리를 폭파시키지 못했다. 열흘 정도 지나 다리 중간이 무너졌지만 이미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는 연합군 심리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마겐의 철교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와 전쟁에서 다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레마겐 철교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예언자도 결국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이어주고 백성들에게 예언을 전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엘리사가 처음 예언자로 활동할 때는 아합의 통치 말년이었다.(1열왕 19,1-17)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와 같이 기적으로 유명하다. 엘리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 스승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야의 옷을 집어 들고 내리쳐 요르단강물을 갈라친 것이었다.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을 다시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엘리사를 그들의 지도자와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섬겼다. 대부분의 기적 설화들은 깊은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지닌 예언자 그룹과 목격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엘리사는 기적 설화들이 쌓여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기적은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고친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엘리사의 기적은 중단되지 않았다. 죽은 엘리사의 몸에 닿은 다른 주검이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탁월하고, 동정심 많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엘리사의 인간성이 예언자 그룹의 제자들 기억에 깊이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준 영향력에 대한 진정성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우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았다. 그가 행한 무수한 기적들도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평생을 스승과 제자단, 그리고 백성들을 이어주는 평화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언자들의 스승 엘리야

신학생 시절 한 선배가 소개해 준 헬렌 켈러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글을 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장애인이었다. 그는 장애를 훌륭히 극복한 현대의 위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한 스승이 있다. 헬렌이 7세 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스턴의 한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았다가 만난, 평생의 교사가 될 앤 설리번이었다. 당시 앤 설리번은 겨우 21살이었다. 앤 설리번도 5세 때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평생 실명의 불안과 싸우면서 살아야 했다. 앤 설리번의 이러한 체험이 헬렌의 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엄마가 아기에게 말을 걸듯이 끊임없이 헬렌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말을 써 주었다. 헬렌도 마찬가지로 손가락 말로 대답했다. 헬렌은 1904년 하버드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3중 장애의 몸으로 대학 교육을 마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학교 강의실에서 언제나 곁에 앉아 강의를 손가락 말로 헬렌에게 전해 주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을 점자로 다시 적어 읽게 하였다. 이처럼 헬렌 같은 위인의 생애에서 앤 설리번이라는 스승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인생의 큰 행복은 없을 듯하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예언자 엘리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의 종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 엘리야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혹독했는지 고증된 심각한 가뭄이 닥쳐올 것을 경고한다.(1열왕 17,1) 아합은 엘리야에게 나라를 불행하게 만든 자라고 힐책했지만, 엘리야는 오히려 임금의 잘못이라고 맞받아친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으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모아 대결을 벌인다.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고 백성들은 반대편의 예언자들을 죽인다. 엘리야의 승천(2열왕 2,1-12 참조)은 엘리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정당성을 부과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혼자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여정을 같이 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곧 승천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적 능력 가운데 장자로서 받아야 할 몫을 요구했다. 예언자들은 분명히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을 내렸다고 확신한다.(2열왕 2,15) 엘리야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으로 바알과의 투쟁을 선도한 예언자이다. 그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가르침을 계속 오랫동안 기억하며 실천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일편단심 예언자 느헤미야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율곡 이이(李珥)는 1582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는데, 그곳에는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양반집 딸에서 기생이 된 ‘유지’(柳枝)라는 소녀가 있었다. 총명하고 시도 잘 쓰는 유지는 율곡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말벗이 되었다. 얼마 후 율곡은 한양으로 떠나 둘은 이별했다. 그 후 어느날 율곡이 황해도 재령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은데 문을 두드려서 보니 성숙한 여인이 된 유지였다. 그리운 임을 보기 위해 험한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연을 시로 남겼는데 “수용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면서, 천한 기생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유지가 걱정이 되고 만약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만나겠다”고 노래했다. 당시에 율곡이 유지를 소실(小室)로 두는 것에 걸림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율곡의 건강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 어린 유지를 돌볼 수 없다는 책임감에 소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담은 세 편의 편지 ‘유지사’(柳枝詞)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삼년상을 치렀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나서도 율곡을 그리는 시를 썼다. 유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율곡을 일편단심 마음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 일편단심한 인물로 느헤미야 예언자가 떠오른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을 책임지는 시종이었다. 황제는 늘 독살의 위험이 있어 술 시종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어느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굶주리고 성전은 폐허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통탄하며 슬피 울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왕에게 ‘고향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제는 느헤미야를 신뢰했기에 그의 예루살렘 귀환을 적극 도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난 뒤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에 시달렸고 정치가들은 여러 파로 갈려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도록 이끌었다. 꼭 좋은 일에는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성전재건은 불가능하며 반대하고 심지어 느혜미야가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 건축을 한다는 가짜 뉴스도 성행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고 지혜롭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전 건립이라는 대공사를 밀어붙였다. 느헤미야에게 성전 재건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전쟁보다 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환난 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돌파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역시 필요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니네베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는 청년 시절 문학적이며 지성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사회주의 이념에 진심이었다. 무솔리니는 19세 때 병역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쳐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사회주의를 연구했는데, 선동가로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11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10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파멸 상태를 본 그는 사회당원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뒀다. 1918년 무솔리니는 구체제의 악습들을 완전히 청산해 낼 수 있는 단호한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파시스트 운동은 민족주의와의 결합에 힘입어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재향군인들의 실업과 정부의 취약성, 국회의원들의 부패 사이를 파고들어 무솔리니는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폭동을 이용해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 권력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국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한 지도자의 정책이 나라의 운명을 지옥과 같은 고난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그의 시체는 밀라노 미잘로 로레토 광장 과거 공산당원들을 공개 처형하던 바로 그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렸다. 예레미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예언자 나훔은 고향이 ‘엘코스’라는 것 외에는 별로 정보가 없다. 나훔서는 지도자들의 불의한 시책이 국가를 패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니네베의 폐허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들의 올바른 지도와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예언자 나훔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예언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팽창하는 시기였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100여 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 기원전 652년부터 왕좌 계승을 위한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통해, 결국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해 추락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멸망하고 시리아 하란 지역의 아시리아 군대도 공격으로 전멸당해 기원전 609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훔은 이름 그대로 고통 중에 억압받던 유다인 위로하며 악행의 말로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전체적으로 나훔서에는 앗시리아의 지배에 고통 당하던 유다인의 울분과 증오가 잘 담겨 있다. 나훔은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뜻이며, 심판의 날에 악인은 처벌당하고 성읍은 완전히 파멸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한다. 나훔서의 내용은 니네베의 멸망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니네베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결국 포악한 통치자들 때문이다. 나훔은 불의는 결국 망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결국 승리한다는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외친 예언자 에제키엘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긴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파스칼은 본래 착실하고 검소한 청년이었는데 갑자기 노는 일에 빠져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1654년 11월 23일에도 파스칼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밤에 약 2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초월적인 체험을 했다. 그 이후 파스칼은 사교계에 발을 끊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파스칼은 죽기 얼마 전부터 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져들어 신앙을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유명한 「팡세」(Pensées,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이 메모는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600여 단어의 신앙고백은 뜨거운 체험에 대한 확신과 기쁨, 감동이 서려있다. 이처럼 신비롭고 초월적인 체험은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에제키엘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정복하고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바빌론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에제키엘은 제사장인 동시에 예언자였다. 에제케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경고하지만 동시에 위로하며 격려한다. 유배 기간이 지나면서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는데도 많은이들이 그냥 정착하려고 했다. 유배 기간 중 배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도덕,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개탄했다. 에제키엘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속에 끼어있다가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로운 발현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때 에제키엘이 본 것은 바람, 구름, 불이었다. 이어서 네 짐승, 바퀴, 홍수와 같은 소리, 말소리 등을 보고 듣게 되었다. 에제키엘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이다. 에제키엘은 환시, 환청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영(靈)에 이끌려 예언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에제키엘도 미움과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 가운데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에제키엘은 젊은 나이에 포로가 되어 고국을 떠나게 되었고 나라가 망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장래에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민족중흥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본국 귀환을 예언하고 회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켜야 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다. 누구라도 삶에서 신비롭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체험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5장에서 열매로써 하느님에게 온 것인지 악의 세력에게 온 것인지를 분명히 식별하게 해주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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