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징(묵시 1,1-2)

“왜 요한묵시록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흔한 답들은 이런 것이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알고 싶으니까, 그 종말의 시간에 도대체 무엇이 펼쳐지는지 궁금하니까, 아니면 종말의 심판, 재앙 등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무엇일까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답들. 종말을 염두에 둔 이런 답들은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낯설다. 우리 일상과는 멀어도 한참 먼 시간의 일들이라 낯설고, 그 먼 시간에 대한 얼마간의 호기심이 어른거리는 답을 얻고자 성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요한묵시록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종말에 대한 괜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두려움은 우리의 독법과 무관하다. 요한묵시록의 첫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로 시작한다. 그리스말로 ‘아포칼립시스’라는 ‘계시’는 ‘장막을 걷어낸다’는 뜻을 지닌다. 숨겨지고 가려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문법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Ἰησοῦ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말 명사의 속격(屬格·Genitive case) 형태로 쓰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말의 속격은 주체적 의미와 객체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두 의미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주체) 예수 그리스도를(객체)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 요컨대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여러 상징들을 통해 찬찬히 풀어놓은 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알고 그분을 이미 믿고 있다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새로울 게 없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간략하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분의 공생활이 모든 계시의 절정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계시라는 말마디는 밀교나 신비주의자들의 감추어진 정보 따위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계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으로 이해했고(로마 16,25; 갈라 1,16 참조), 복음서에서 계시는 젖먹이 어린이들에게조차 건네어진 하느님의 구원에로의 초대로 읽혀진다.(마태 11,25 참조) 그럼에도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염두에 둔 태도가 흔한 이유는 아마도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란 문장 때문일 것이다.(묵시1,1) 특별히 ‘머지않아’로 번역한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가 아직 남아 있을 또 다른 계시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엔 타케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시간 개념이다.(다니 2,28 참조) 이를테면, 종말의 시간이 ‘이미’ 다다랐다는, 그래서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간이 지금 여기서 펼쳐졌다는 의미가 엔 타케이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엔 타케이를 ‘갑자기, 곧, 느닷없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떠한 시간적 여유나 기다림조차 허락치 않는, 지금이야말로 계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지금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의 사건들이어야 한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사건들을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으로 해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한 요한묵시록은 그 읽기가 끝난 지점에 예수님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묵시록의 모든 읽기는 예수님을 찾는 것으로 방향 지워진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마지막 시대의 구원에 관련된 것이고 요한묵시록 스물두 개의 장을 읽는 것은 그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곧, 그리고 느닷없이’ 이루어졌다는 희망과 위로를 얻어 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열거하는 요한묵시록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장 1절은 계시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그리고 요한에게 ‘알려졌다’고 말한다. ‘알려졌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세마이노’(σημαίνω)로 ‘상징화하다’는 뜻을 지닌다.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두고 여러 상징으로 새롭게 소개한 글이다. 요한이 보고 듣고 그래서 기록한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가진 수많은 상징들로 꾸며진 새로운 예수님이다. 다만 그 상징들은 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오래된 것들이라 누구나 이미 알고 있어서 새로울 게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익숙한 상징들의 새로운 조합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님을 제 삶의 언어(상징)로 수없이 상상하며 갈망하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읽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을 더 알고, 더 챙겨서 내 신앙의 정도를 한껏 들어 높이려고 요한묵시록을 읽지는 말자. 지금 내가 읽는 요한묵시록은 언젠가 내 삶의 어느 곳에서 이미 만난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는 희망과 설렘의 기록이기에.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한 그 사람, 요한을 우리는 부러워해야 한다. 그의 믿음을, 그의 사랑을….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하는 「신학대전」 제2부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가 지닌 ‘인간관’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인 행복 논의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고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적 동물’, 또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표현들 안에는 함축적으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이원적인 사고가 야기한 여러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근대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이를 창안한 인간마저도 ‘하나의 검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만을 분리시켜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려던 서구 의료제도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최근에 등장한 AI를 활용한 로봇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도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은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신화 등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이다. 그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체에 속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영원을 인식하는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그 영혼이 지상의 육체 세계로 하강하여 “마치 감옥이나 무덤 안에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것으로 육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육체를 거스르고 통제함으로써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플라톤적 이원론은 플로티노스에서 아우구스티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서구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들어서며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自我)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 끝에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공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에 불과한 육체는 단지 기계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발견한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데카르트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한쪽을 편파적으로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의 작용만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를 너무나 격하시켜 육체노동의 천시, 더 나아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유심론이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할 경우, 인간 존재의 개별성을 가차 없이 말살하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작용을 모두 육체로 환원시키는 유물론(唯物論)은 인간 고유의 영적 고귀성을 해치기 쉽다. 육체만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육체와 성의 상품화 등 왜곡된 형태의 육체 중심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육체와 영혼 각각의 고귀함을 인정하며, 이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을까? 성경의 통합적 인간관 많은 신학자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놀랍게도 성경 안에 담겨있는 통합적인 인간관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성경의 통합적인 사유 방식에서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이 함께 합쳐진 전체로서 고찰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히브리 사상에 뿌리를 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리스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를 경멸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물질로 표현되는 육체와 세계 창조를 경시했으며, 영혼의 승천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성적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인간 영혼이 상부의 광명 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로 말미암아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강하게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만 파악했다. 이처럼 그의 육체-영혼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경시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고행과 금욕의 수행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이 퍼져 가면서,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조됐다.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감옥이며, 육체의 쾌감은 천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육체의 경시와 학대가 강화되고 있을 때, 성경에 나타나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성 토마스가 제시한 통합적인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025-01-19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두 번이나 언급한 ‘한처음’(마태 19,3; 마르 10,2)은 모든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처음에 중심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을 다시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무엇일까? 왜, 그와 내가 행복을 꿈꾸고 시작했던 혼인 생활을 끝내려 할까? 왜, 시작한 축성/봉헌생활을 그만두려 할까? 맞지 않아서? 두 사람은 원래 다르다. 겉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속속들이 다르다. 그러니 다름은 이혼 사유가 안 된다. 큰 어려움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다독이고 힘을 내자고 한다. 그럼 원인이 무엇일까?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사랑이 넘쳤는데 지금은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랑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이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처음’, 즉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 하신 것이다. 한처음을 확대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4장 1절까지를 말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하기 전 본성의 상태를, 3장에서 4장 1절까지는 타락한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역사의 인간은 이 둘이 통합된 본성이지만, 우리는 구원된 상태로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다. 두 상황의 경계선상에서 처음 상태를 기억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몸 신학의 전망이요 신학적 인간학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마태 19,8; 마르 10,5)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을 합법화했지만,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의미, 혼인과 사랑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찾도록 촉구한 것이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고 질문했는데 ‘사람’으로 응답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던 사과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알록달록하게 생긴 사과 하나가 창세기 1장에서 4장 1절의 나이다. 반으로 잘라 오른쪽에 있는 것이 창세기 1장과 2장 상태의 나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4장 1절의 상태의 나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1절에서부터 교육받았고, 또 결의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원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 그 껍질을 벗고 규범론적으로 만나보자.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무엇보다 표현이고, 이 표현에 변화를 줄 때가 왔다. 이 가르침은 내 삶의 변화를 희망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얻게 한다. 머리론 알지만 행동에는 두려움이 앞서기에 나를 숨기려 갈등하는 나에게 나의 근원과 완성을 바라보고 깨어 있어라 한다. 결국 이 가르침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요, 그 앎의 자리에 내가 있기 위함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은 사람과 그의 아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셨다. ‘무엇을 했느냐?’, ‘왜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 하지 않고,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 것이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곧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고, 그분은 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지난호(1월 12일자)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는 편집과정 상의 오류로 김혜숙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원고가 아닌 다른 글이 게재됐습니다. 이에 이번 호에 다시 게재합니다. 게재 오류로 불편을 겪으신 김혜숙 선교사님과 독자 여러분께 깊은 사과 말씀 올립니다.

2025-01-19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희년의 기쁨을 체험하고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족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신비를 되새기며 연중시기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혼인 잔치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 희년의 삶을 살아갈지를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져 잔치를 주관하는 이들이 당혹해할 것을 헤아리셨을 뿐 아니라, 아들 예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임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대답하심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동이들이 물독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일꾼들에게 말씀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개의 물독에 가득 찬 물을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일꾼들은 이 놀라운 기적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신랑도 그리고 과방장도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 덕분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아들 예수님께 상황 해소를 청한 성모님 덕분에, 더 나아가 실제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느님이신 예수님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 덕분에 사는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그리고 그분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들의 도움의 손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깨워 주는 교회 공동체 덕분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성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덕분에’라는 마음을 간직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곧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 덕분에, 곧 사랑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과 실천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회 공동체 덕분에 감사하다, 하느님 덕분에 감사하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와 하느님을 칭송할 수 있도록 하는 삶이야말로 희년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때에는 세상살이에서 오는 갈등과 상처와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견디어 내고, 극복해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길고 어두운 터널이라고 해도 그 끝에는 환한 빛을 가져다주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하느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감사합니다!’라는 마음과 표현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증거의 삶을 살아가라고 각자의 직분과 활동에 맞게 적합한 은사를 주십니다. 곧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각자가 선물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을 두고 노래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이루신 첫 번째 표징 덕분에 제자들을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키울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하느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의 손길 덕분에 더욱 감사하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 31,25)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조성풍 신부는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학했다. 서울대교구 해방촌본당 주임, 서울대교구 사목국 일반교육부 담당,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등을 거쳤다.

2025-01-1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께 희망을 안고 기다린 신앙인, 엘리사벳

세계 어린이들의 친구인, ‘미키 마우스’를 창조한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는 창고에서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쥐를 모델로 미키 마우스를 창조했다. 디즈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미술관에서 많은 명화를 보았다. 이 체험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전쟁 후 미국으로 돌아와 광고회사에서 일하다, 19세에 동료들과 낡은 창고를 빌려 만화사를 설립했다. 1919년 처음으로 만화영화를 만든 디즈니는 계속해서 만화영화를 제작했지만, 대공황으로 그의 회사는 한순간에 도산하고 말았다. 디즈니는 더러운 창고에서 지내면서도 사업을 구상하는데 몰두했다. 심심한 디즈니는 창고에 들어오는 쥐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었는데 한 마리가 유독 디즈니와 친해졌고 ‘모티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27세가 되던 해 빈털터리의 디즈니는 할리우드로 향하는 기차에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모티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꺼리는 동물인 쥐를 유쾌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만드는 기발한 발상을 했다. 처음 이름은 ‘모티마 마우스’였는데 그의 아내 릴리안이 미키가 좋겠다고 해서 ‘미키마우스’가 탄생했다. 디즈니는 만화영화 <미키 마우스>를 제작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디즈니랜드를 세워 오늘까지 미국의 대표적 명소가 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나락에 떨어지고도 계속해서 기회를 기다리며 노력을 통해 끝내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친척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한마디로 기다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제약을 받는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이 믿음을 갖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늘에 닿는다는 말처럼 기적처럼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늙은 나이에 자녀를 잉태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도 천사를 보내시어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마리아는 임신을 한 후 며칠 동안 험한 산길을 걸어 엘리사벳을 찾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칭송한다.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응답을 기다렸던 인물이다. 믿음의 기다림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할 때 즉시 응답이 없으면 실망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특히 고통의 삶이 지속될 때 우리는 신앙이 뿌리째 흔들린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은 언젠가 우리의 기도에 꼭 응답하신다는 것을 증거한 인물이다. 신앙은 희망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열매를 맺는다. 엘리사벳의 삶은 아무리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께 희망을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19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세례는 유다교의 ‘미크바’라고 하는 물로써 부정함을 씻어내는 예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제사의 가치가 상대화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씻는 예식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특히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고 광야로 들어간 꿈란 공동체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여러 세례 운동가가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씻는 예식이 반복적이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해 근처의 요르단강 하류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회개하게 하는 세례입니다.(루카 3,3) 그런데 회개해야 할 죄가 없는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실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였기에 세례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모든 죄인과의 연대를 봅니다. 예수께서 요르단강 변에 길게 줄지어 서서 자기 차례의 세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죄인들 사이에 계신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 없으신 분이 가련한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우리 모든 죄인 가운데 하나가 되십니다. 요르단에는 ‘내려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더 낮춰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를 낮춰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의 자리에서 받으신 세례 구원의 문 활짝 열어주신 의미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뱃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물속에 던져지기를 청했던 요나가 떠오릅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에 비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온 백성’.(루카 3,21)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구원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옛 아담의 원죄 이후 닫혔던 하늘과 땅이 새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하기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께서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이)이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6) 그리고 하늘에서 성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짧은 문장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먼저 메시아를 가리키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와의 관계와는 다름도 알려줍니다. 사실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맏아들이라 불렸습니다.(탈출 4,23 참조)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리스어로 ‘사랑하는’이라는 단어가 아들이나 딸과 함께 사용될 때는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유일무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현재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아들, 성부의 뜻을 잘 헤아려 받드는 순종적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구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자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 성령을 받은 메시아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유다 전승에 따르면, 하늘의 열림, 성령의 강림, 하느님의 목소리는 종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세 가지 표지입니다. 종말은 믿는 이에게는 두려운 멸망이 아니라 바라마지않는 궁극적인 구원의 때이죠. 예수님의 세례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 (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안동교구 함원식 신부는 1999년 사제품을 받고 2017년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논문 「욥기 안에서의 조화 혹은 불협화음」으로 성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영덕·안계본당을 거쳐 현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겸 안동교구 성서 사도직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2025-01-12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물러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서 듣게 되는 첫 마디는 ‘물러나라’는 권고가 아닐까 한다. 이 권고는 본래 ‘세상에서 달아나라’(fuga mundi), ‘세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물러남 물러남의 대표적 인물은 압바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황실 고관으로 황제의 아들들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렸던 고관대작이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났다.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금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황궁에 살던 시절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고독한 생활로 나아가면서 그는 다시 같은 기도를 바쳤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세니우스,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아르세니우스 1-2)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는 권고는 구원을 위한 길로 간주되어 이후 수많은 동방 수도승의 모토요 생활 지침이 되곤 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행에 옮긴 대표적 인물로 제시된다. 아르세니우스는 스케티스 사막(4세기 이집트 북부의 수도승 생활 중심지 중 하나)의 한 암자에 살면서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고독과 고요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 로마의 한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매몰차게 대하였다.(아르세니우스 28) 그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섰다. “압바 마르쿠스가 압바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왜 우리를 피하시는 겁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소. 수천수만의 하늘의 군대는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자고 하느님을 떠날 수 없소.’”(아르세니우스 13) 물러남의 이유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독과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는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고독과 고요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독과 고요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내적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과 일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아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막으로 물러난 동기와 목적은 적어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물러남 우리는 분명 가정과 사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 모두 사막으로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세속적 가치와 정신,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라는 울타리,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에고일 것이다. 이런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음’이 사람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고요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일상과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고독과 고요 중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혹은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셨다. 고독과 고요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모르고 인간적 친교만을 추구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가벼움과 공허함을 종종 보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물러나 홀로 고요히 침묵 중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앞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물러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일상에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본문에서 인용된 사막 교부의 일화나 말의 출처는 알파벳순 모음집 사막 교부들의 금언(베네딕다 워드, 「사막 교부들의 금언」,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7 참조)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1-12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의 구조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요구한다. 대부분 주석서들의 첫 장은 요한묵시록이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이러 저러한 순서로 적어나간 글이라고 소개하는 이른바 서술의 ‘외형적 구조’에 관한 것을 다룬다. 요한묵시록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고,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약’이기도 해서 주석학자들마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한묵시록은 역사서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연대기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구약의 역사서처럼 어떤 임금이 즉위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갔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어디서 언제 태어나셨고 갈릴래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일과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결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게 요한묵시록이 아니다. 요한묵시록은 두 개의 크게 다른 문학적 장르를 선보인다. 2장에서 3장까지의 일곱 개 편지와 4장에서 21장까지의 묵시문학적 환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학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편집이 일곱 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와 모임 안에서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나갔고, 이후 일곱 개의 편지들이 소개하는 내용들을 묵시문학적 상징들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개한 4장에서 21장까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처한 현세적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여겼고 4장에서 21장까지는 그 현세적 상황에 대한 영성적 해석이라고 이해했다. 요한묵시록의 본격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 4장에서 21장 8절까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어린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봉인과 일곱 개의 나팔 이야기(4,1-11,19)가 첫 번째 부분이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나서 펼쳐지는 악의 세력들의 서술이 두 번째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왕관을 쓴 여인, 용, 두 짐승, 그리고 대탕녀 바빌론과 용의 멸망을 다루는 여러 장면들로 구성된다. 처음 일곱 개 편지는 문학적 장르가 바오로 서간이나 가톨릭 서간과 닮아 있고 대개의 내용이 훈계나 교훈에 관련된 것이라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4장에서 21장까지 역시 그렇다.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대탕녀 바빌론을 향하는 두 번째 부분과 대립하는 구도로 펼쳐지는데, 이것 역시 이야기의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주체, 곧 어린양과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묵시문학적 설명 혹은 해석으로 읽혀진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있어 또 다른 전통적 관점은 숫자 ‘7’과 관련이 있다. 일곱 개의 편지(2,1-3,22), 일곱 개의 봉인(6,1-8,1), 일곱 개의 나팔(8,6-11,19),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16,1-21) 순으로 요한묵시록은 짜여져 있다는 것. 각각의 ‘7의 시리즈’는 그 시작과 마침이 모두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상은 이른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는 공간이어서 요한묵시록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 설화적 흐름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고 풀어놓고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이해하는 데 각각의 ‘7의 시리즈’는 처음과 끝 사이에 세상의 비참함이나 한계성, 그리고 악의 상황을 천상의 공간과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7의 시리즈’가 끝나면 또 하나의 ‘7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구도로 짜여진 요한묵시록은 네 번에 걸쳐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은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이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서술의 본질이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살피다 보면, 요한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해서 ‘주 예수여, 오소서’라고 마치는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면서 마주치는 유혹과 일탈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에의 지향성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탕녀 바빌론의 악함에 맞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향한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천상의 삶이 이 혹독한 지상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요한묵시록은 찬찬히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고, 이미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갈망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수께서 오실 그날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현실의 무엇이 이미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기 위해 요한묵시록은 여전히 읽혀져야 한다는 것. 요한묵시록의 구조는 그래서 우리 삶의 ‘오래된 미래’에 예수님이라는 변치 않는 분을 끊임없이 상상하게끔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계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안에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2025-01-12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노래한 즈카르야

모스 부호(Morse Code)는 전신기발명자인 새뮤얼 모스(Samuel Morse, 1791-1872)가 고안하여 1844년에 완성한 전신 기호이다. 모스 부호로 짧은 발신 전류( · )와 긴 발신 전류(−)만을 가지고 전신부호를 구성하여 문장을 작성하여 전신기로 전송할 수 있다. 모스는 이전에는 유명한 화가로 유럽에서 작품활동을 한 후 미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다 최신 전자기학을 접하게 된다. 모스는 열심한 신앙인으로 전자기술을 탐구하면서 가장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에게 특별한 탈렌트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창조만을 묘사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에게 전신을 발명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 그는 채 2년이 안 되어 전신 기호 모스를 발명했다. 모스는 이 모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전신 기호를 완성하여 1844년 5월 24일 “하느님이 큰일을 하셨다”는 의미를 담은 민수기 23장 23절을 송신했다. 그 이후에 각국에서 전신을 개통할 때는 성경 한 구절을 송신하는 전통이 생겼다. 모스는 모든 활동과 업적을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役事)로 이해한 충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 즈카르야와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즈카르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였다. 즈카르야 부부는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자녀가 없었다. 부부는 하느님께 자식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이고 드디어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즈카르야가 성전에 머물 때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천사는 부부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었고 곧 아내가 자식을 낳을 터인데 하느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인물이고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당황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바로 믿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부부가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벌로 아이가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할 것이라 했다. 즈카르야는 당연히 인간적인 판단을 했지만 그 순간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을 것이다. 천사가 떠난 후 실제로 즈카르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즈카르야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되자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라 사람들은 추측했다. 천사의 예고대로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고 아들을 출산했다. 친척들이 몰려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출산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를 축하했다.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고 할 때 비로소 입이 풀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즈카르야는 두려움과 기쁨을 안고 성무일도에서 매일기도를 바치는 즈카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67-79 참조)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 행위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수용하는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12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이번 주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 공식적으로 나타난 일을 뜻합니다. 곧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첫 사건을 경축하는 날로서,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드러난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따르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맨 먼저 방문해 경배한 이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성경에서 ‘동방’은 이스라엘 기준이므로 메소포타미아 방향이고, 동방 박사는 페르시아 전통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로 추정됩니다. 조언자로서 임금을 섬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로아스터’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책으로도 유명한 ‘차라투스트라’입니다. 말하자면,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로서 우리 문화권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의미의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속보다 천상의 일 중요시 메시아 만나는 큰 기쁨 누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던 점성술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는 학식이 뛰어난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마고스’를 번역한 말로, 페르시아어로는 ‘마구쉬’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천체 운동을 관찰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꿈도 풀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동방 박사는 동방의 세 왕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3세기 초에 들며 이들의 신분을 왕으로 격상했기 때문입니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라는 시편 72장 10-11절처럼 모든 권세가들이 메시아께 복종하리라는 예고가 실현되었음을 강조하려던 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점성술가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방의 임금도 도구로 쓰시고(예레 25,9 등 참조) 이방의 점술도 때로 진실을 말하게 하십니다.(에제 21,26-28 참조)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고(마태 2,1 참조) 헤로데의 왕실에서 현인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마태 2,6 참조) 그 현인들이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 나오리라.”라는 미카 5장 1절을 들려주며, 유다 임금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어야 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 덕에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내는데, 그 장소는 현재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짓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유서 깊은 성당입니다. 더구나 전쟁 많은 이스라엘에서 이 성당만은 보존되었는데, 이는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성화 덕분이었습니다. 7세기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 탄생 성당의 성화 속에 그려진 동방 박사들이 페르시아 복장을 한 걸 보고, 자기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줄 알고 파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멀리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이 죽어서도 메시아의 탄생지를 보호해준 셈입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를 셋으로 보지만, 사실 성경에는 몇 명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이 셋이라 세 명으로 추정해온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예수님의 거룩한 사제직을 예고하는 제사 ‘유향’,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몰약’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듯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였습니다. 사진 속의 제대가 그 장소를 상징합니다. 페르시아 왕실을 섬긴 이들이 초라한 구유 속의 아기에게 무릎을 꿇었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처세술에 따르면, 자신에게 와 줄 것을 청한 헤로데에게(마태 2,8 참조) 돌아가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겠지만, 동방 박사들은 세속보다 천상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마태 2,12 참조)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까지 왔고,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보는 세속의 일에 몰두하느라 천상의 일을 잊곤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먼 데서 구세주를 알아보고 찾아온 일은 이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이방인들의 예표도 되어줍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며 메시아를 찾아 나선 동방 박사들을 별이 인도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밤은 어두워도 별은 빛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가 때로 칠흑 같은 곤경에 빠져 길을 잃어도 주님께서 늘 희망의 별빛을 뿌려주고 계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김명숙 교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2012년부터 2024년 1월까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그해 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조교수에 임명됐다.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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