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말씀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 주일

오늘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케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마태 16,18 참조) 베드로는 아람어 케파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촌 벳사이다(어부의 집)에서 요나의 아들(시몬 바르요나)로 태어나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불림을 받습니다.(마태 4,19 참조)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순수하고 솔직하기도 하지만, 수제자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로 허술하기도 합니다.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겁도 많습니다. 스승은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계시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마태 26,40 참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마태 14,30 참조) 결국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작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하물며 갈릴래아인 특유 억양의 사투리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임이 탄로 난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마태 26,70 참조)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태 26,74 참조)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은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하지만 베드로는 죄에 절망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주저앉아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고, 회개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한편,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울은 유다 땅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17㎞나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 서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울은 눈이 멉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이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9,8 참조) 이는 영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영적인 혼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박해자가 되기로 작정했지만, 이제는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바오로는 더는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외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그 치명적인 죄를 말입니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니아스로부터 성령의 안수를 받아 사울은 눈을 뜨게 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사도 9,18 참조)은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눈을 뜬 바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바오로로, 최악의 박해자가 최고의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1코린 15,10)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 모두 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담대히’(사도 4,13; 28,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어찌 보면 뻔뻔한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누구나 회개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율법과 예언서에서의 간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7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 바오로)의 소설 「침묵」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서 33년 동안 체류한 일본 교회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제자인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일본인 젊은이 기치지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입국하게 된다. 로드리고는 신자들의 환영을 받고 사목활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나가사키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관가에 붙잡히고, 수많은 신자가 고문을 당한 뒤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힘없이 죽어가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침묵에 점점 믿음을 잃어간다. 그는 배교한 자신의 스승을 직접 보게 되고, 더욱 혼란에 빠진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예수나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를 밟게 된다. 후미에는 일본 내 기리시탄(가톨릭신자)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였다. 그가 동판에 발을 올리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리라.” 그제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엔도 슈사쿠는 평소 강연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를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테파노 부제였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 외에도 처음으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사도들이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심 깊은 신자 중 일곱 명을 뽑아 부제로 세우고, 음식 분배와 재정 등을 담당하게 했다. 스테파노 부제는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고발과 위증으로 체포되어,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외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해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다.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라고 기도하였다. 이어 더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성 스테파노의 유해는 415년경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어 스페인, 아프리카,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등지로 나뉘어 전해졌다. 유해가 안치된 기념성당들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두 사람

1896년 10월, 인천의 교도소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고종 황제. 당시 그 교도소에서는 일본군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 일본인을 살해한 청년 김창수의 사형이 임박해 있었다.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하고, 교도소에 전화를 걸어 사형을 일단 멈추도록 명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사형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으로,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며칠 늦었으면 김창수는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김창수는 젊을 시절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이름이다. 김구 선생은 가장 상징적인 독립운동가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운영해 대한민국의 적통성을 지켜냈다. 김구 선생은 8·15 광복 후 귀국해 한반도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남북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9년 경교장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생전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김구 선생은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피격 당시 박병래 성모병원장(요셉, 1903~1974)은 경교장에서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줬고, 간호 수녀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 사형수 두 명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중 한 명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런 심리는 무엇일까? 다른 쪽의 사형수는 그에게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며 예수님을 옹호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라고 화답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성경에 있는 가장 극적인 회개의 장면이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신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했다. 두 사형수의 태도는 죽음을 맞이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골고타 언덕의 두 사형수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매 순간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큰 은총이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비문에는 감동적인 글이 적혀있다. “나는 바오로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 하느님, 나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주셨던 은혜를 구합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스라엘 빵 가게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면, 납작하고 둥그런 것이 광야의 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실 때 사탄이 빵으로 유혹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오래 굶고 나면 눈앞의 것이 빵인지 돌인지 헷갈릴 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먹이셨다는 빵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다 못해 식이 조절을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상들은 굶는 자식을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시편 126장 5~6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옛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보리 빵, 부유한 이들은 밀 빵을 먹었다고 하니 ‘꽁보리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하권 7장 16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밀 가격은 보리의 두 배였습니다. 요한 6장 9절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징을 일으키실 때 한 어린아이가 마중물처럼 내어놓은 빵도 보리 빵입니다. 요한 6장 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신 때는 파스카 즈음입니다. 곧 보리를 수확하던 때입니다. 사실 파스카 축제는 맏배의 재앙에서 백성이 구원받은 기적을 기념하지만, 농사와 관련된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탈출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주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주님의 계명도 상대적으로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주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체감하지는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탈선을 방지하려고 오경에서는 백성이 자자손손 이집트 탈출의 구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파스카를 비롯한 명절들을 주님의 현존 앞에서 지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다만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팽개치고 주님 현존을 찾아가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성경에서는 주요 명절들을 농사 절기와 맞물리게 제정하였습니다. 탈출기 23장에도 그런 명절이 무교절, 수확절, 추수절이라는 농경 용어로 등장합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므로 파스카를 가리키고요, 수확절은 밀을 수확하는 주간절, 추수절은 포도와 올리브 등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무교절, 곧 파스카 즈음에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명절은 농사 절기와 맞물리므로 기후와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9절도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때가 파스카 즈음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 자리 잡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나라이므로 풀밭이 푸른 시기는 늦가을부터 늦봄까지의 우기뿐입니다. 파스카를 지내는 봄에 늦은 비(신명 11,14)가 내리고 나면 건기로 접어들며, 그때부터는 온 들판이 누렇게 뜹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기적은 천지가 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은 봄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성전도 갈릴래아 바닷가에 자리했습니다. 예부터 ‘일곱 샘’이 있던 장소라 하여 그리스어로 ‘헵타페곤’인데,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 ‘타브가’라 합니다. 이곳 성전의 제대 아래 검은 돌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장소라고 합니다. 제대 앞에는 비잔틴 성당의 유적인 사병이어 모자이크도 있습니다. 다만 오병이 아니라 사병인 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한자리를 차지하신다는 상징성을 살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기적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아이 말고도 군중에게는 비상식량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도, 식당 등의 시설이 흔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나누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내 식량을 타인에게 주었다간 언제 굶게 될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을 예수님께서 나누기 시작하시자 덩달아 제 것을 꺼내다 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분명 빵이 많아진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나눔 끝에 풍성하게 돌려받은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의 의미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서로 간 인격적 바라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상태로 변화됨을 표현한 말씀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 결핍이 발생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의 논리로 변화됐음을 성의 다름으로 말한다. 한처음 좋음에서 분출됐던 인간의 긍정적 욕망이 무엇 때문에 부정적 욕망으로 변했는지, 남자와 여자로 하지 않고, ‘남편’이라 말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부끄러움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심리적 현상과 비슷하여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편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처럼 남편은 다른 표징을 의미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한처음 충만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으로 결핍 상태에서 느끼는 욕구를 말한다. 한몸이 될 수 있는 관계는 표징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관계, 실제적으론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즉 혼인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에페 5,31-32 참조) 그런데 그의 욕망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한몸이 되어야 할 남편의 자리에 욕망이 들어와 그와 한몸처럼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이 주인이 되어 나를 조종하는 상태가 됐다. 내가 갈망하는 그 욕망들 즉 재물, 권력, 명예, 여러 소유욕 등이 주인으로 들어와 견고한 벽돌을 쌓게 됨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볼 것은 갈망으로 드러난 목마름(결핍)이다. 이는 여자의 결함이나 무능력, 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남편과 이루게 될 결합의 광범위한 정황에서 여자가 느끼게 될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가리킨다. 땅의 속성에 묶이게 된 인간의 욕망은 내어줌에서 얻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소유함에서 부유해지려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인격들의 친교 대신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 갈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 관계가 발생합니다.”(31과 3항) 욕망과 결합된 부끄러움은 남자로 하여금 ‘지배’ 충동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상대가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면 일치가 불가능해지나 일치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를 지배 혹은 통제, 소유하고자 하는 관계에 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지 않고 영원과 묶어주는 희망에서 얻는다는 진리를 덮고자 한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남자가 ‘남편’이라 불리는 첫 문장으로 친교-공동체의 근본적 상실을 의미한다. 성의 다름에서 인격의 우수한 점을 직감했고, 서로에게 순응하는 감수성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열리고 또 노출되도록 창조됐음을, 또 그들이 체험한 사랑은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향한다는 의미에 눈 감은 것이다.(48과 4항) 즉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이미 창조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상호 보완성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남을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타자의 몸에 대해서도 혼란을 가져왔다. 선물의 논리가 지배의 논리로, ‘한몸’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논리가 되어 높고 높은 벽이 그들 안에 들어왔다. 만약 성적 다름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지평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쾌락의 감각적 선(善)과 인격 상호 간의 좋은 삶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성에 대한 진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에 관한 질문을 안겨 준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두려움(묵시 9,13-21)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하)

지난 호에서는,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사막 교부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그 핵심은 하느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실천적 방법이 ‘멜레테’(되새김) 수행이었다. 이번 호는 기도 자체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기도는 관상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내적 평정심을 얻은 수행자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목표로 하는 관생생활로 들어선다. 관상가가 된 그는 이제 마음 안에서의 순수한 기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로 나아간다. 기도에 대한 교부의 이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 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 토대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초월적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왔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교부들은 신학자와 기도의 관계를 말하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참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기도한다면 그대는 진정 신학자다.”(기도론 60) 고대에는 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관상가를 뜻했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자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기도)하는 사람이다. 대화의 본질 대화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대화를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 여기는 우리의 이해가 참된 대화를 가로막는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말을 주는 데 있기에, 각자 상대에게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주입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말만 늘어놓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참된 대화는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먼저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다. 그리고 경청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경청한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기도는 완성되고 우리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의 방법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서 단순성을 강조한다. 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말한다. “빈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손을 펼치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또 당신께서 아시는 대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유혹이 다가오면,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마카리우스 19)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탁월성은 단순히 그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 이것은 성전에 들어간 두 사람을 통해 입증된다”(기도론 151)고 말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이렇게 권고한다.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세리와 탕자는 간단한 기도로 하느님께 호의를 구했습니다. … 기도할 때 말을 세세히 고르려 애쓰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재잘거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랩니다. 그대는 많은 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걱정은 정신을 분산시킵니다. 세리는 한마디 말로 주님을 달랬고, 믿음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도를 구원했습니다. 많은 말은 정신을 망상으로 가득 채워 기도 중에 주의를 흩뜨립니다. 한마디 말이 정신을 집중하게 해줍니다.”(천국의 사다리 28,188.189) 교부들은 기도의 순수성도 강조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는 가장 성숙하고 이상적인 기도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 기도의 첫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복음 속 세리의 자세로,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자세는 감사다. 기도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끝으로 인내다. 안키라의 닐루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혜롭게 견딜 줄 안다면 기도에서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닐루스 5)라고 말한다.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울림을 준다. “그대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청했던 것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영적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과 결합해 있을 수 있고, 그분과 부단한 일치를 지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고한 선이 어디 있겠습니까?”(천국의 사다리 28,191) 기도는 우리의 영적 진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기도를 사랑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릴 것이다. 기도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지속성을 띤다.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잠잘 때조차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와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결국 우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갈 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 길은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그분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리라!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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