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