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요즘 뉴스에서는 ‘분노’로 인한 이해하기 힘든 범죄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분노에 차 흉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에 대한 분노가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사태들을 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거나, ‘분노는 하나의 결점이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일부 윤리학자들의 판단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았던 드라마 <글로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할 때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분노는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가, 아니면 때때로 선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에 관한 이론은 이런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분노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발견된다. 선과 악을 모두 지향하는 분노의 원인 토마스는 분노를 ‘복수에 대한 욕구(ira est appetitus vindictae)’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분노는 사소한 일보다는 ‘중차대한 것’에서, 곧 어렵고 심각한 악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분노는 자신이 겪은 상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며, 그 안에는 욕망하고 희망하고 향유했던 선을 옹호하려 하고, 동시에 공격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그 악이 갚아 지기를 바라는 이중의 목표가 함께 들어 있다.(I-II,46,2) 그래서 토마스는 “분노는 겪은 고통에서 생겨나고 복수에 이르며 즐김으로 끝난다”(I,81,2)고 말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분노하는 사람을 거슬러 행해진 어떤 악’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면, 또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특히 ‘마땅히 있어야 할 존중의 결핍’, 즉 경멸(parvipensio)이 분노를 크게 자극한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이 모멸감을 더 크게 느끼고, 반대로 아주 낮은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I-II,47,4) 예컨대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이 크게 폭발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도 ‘부당한 모멸감’을 당할 때, 얼마든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분노와 이성 - 동반과 방해 흔히 분노를 ‘이성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의 관점은 더 세밀하다. 제대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당한 악과 겪게 될 벌을 저울질하는 정확한 비교와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분노는 언제나 이성을 동반한다”고 말한다.(I-II,46,4) 그러나 분노가 이성을 동반한다고 해서, 분노가 항상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분노는 다른 정념들보다 더 명백하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한다”(I-II,48,3)고 말한다.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몸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불(火)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가 심해지면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빨라지며, 심지어 혀의 움직임까지 방해해서 말을 더듬게 하거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수 있다.(I-II,48,2) 이런 신체적·정신적 동요 때문에 분노는 깊은 사유와 관상, 차분한 판단을 크게 어렵게 만든다. 분노를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정의와 사랑 위해 사용해야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불의하며 죄악의 근원이 돼 정당한 분노와 죄가 되는 분노 그런데 토마스는 분노를 무조건 죄로 보지 않는다. 분노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불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분노는 불의(iniustitia)보다는 정의(iustitia)에 더 가까운 셈이다.(I-II,46,7) 분노가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서 일어나 ‘정당한 복수’일 경우, 그것은 정의라는 덕의 발로로 여겨진다. 반대로, 분노가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 법적 질서를 벗어나 사적인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거나, 죄를 없애기보다 죄인 자체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려 할 때 - 그것은 죄가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토마스는 분노를 칠죄종(七罪宗, 추요죄)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분노에서 말다툼, 고성, 저주, 폭력 등 여러 악습이 흘러나온다고 분석한다. 분노는 정당하게 다루어질 때 정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지만, 방치될 때는 많은 죄악을 낳는 ‘악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도 하나의 악습으로 본다. 그는 정당한 원인에 대해서 그 느낌에 상응하는 움직임의 부재, 곧 처벌하려는 의지의 결핍을 분노의 결핍이라는 악습으로 설명한다. 즉 분노해야 할 자리에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 불의 앞에서 무감각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증오(odium)가 분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한다. 증오는 악을 그 자체로서 원하지만, 분노는 ‘정당한 복수라는 선’으로 악을 원하기 때문이다.(I-II,46,6) 분노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고, 그에게 내리는 벌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증오는 상대에게 그 어떤 선도 바라지 않고 악을 그 자체로 원하므로, 분노보다 훨씬 사악한 정념이다.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는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분노’를 인정한다. 이성에 앞서 선행하여 이성을 어지럽히는 분노는 악하지만,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을 따른 후속하는 분노는 선하며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는 교회의 선익, 사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덕의 도우미가 된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칠죄종으로서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신앙인은 분노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정의 감각과 어떤 상처에서 나오는지 살피면서, 그것을 정의와 사랑을 위한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 19,1-10)

‘할렐루야’라는 외침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히브리어 ‘할랄(הלל, 찬양하다)’과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야(יה)’가 결합된 말, 곧 하느님을 향한 가장 큰 찬미의 호응이다. 이 외침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대탕녀 바빌론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바빌론을 경제적 사치와 부의 폭력으로 이해해 왔다. 바빌론으로 은유 되는 로마의 번쩍이는 문명 뒤편에서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제국의 욕망을 가차 없이 고발했다.(17–18장) 이제 그 고발은 한 시대의 끝맺음으로 응답받는다.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묵시 19,2)는 표현은 열왕기 하권 9장 7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구약 전통에서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내리는 최종적 심판의 은유였다. 그리고 그 심판은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묵시 19,3)는 표현이 바로 그 비극적 결말을 연기로 형상화한다.(이사 34,14; 묵시 14,11 참조)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다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4~5장에서 천상과 지상의 만남을 상징하던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 앞에서 또다시 하나의 찬미로 모인다. 그 하나 됨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찬란히 서 계신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자연스레 “아멘, 할렐루야!”(묵시 19,4)가 된다. 시편 106편 47절의 외침처럼,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하느님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5절은 그 장엄한 찬미 안으로 더 많은 존재가 초대됨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종, 낮은 이든 높은 이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그 찬미 안으로 부름을 받는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종말 묘사의 오랜 전통을 잇는다. 그 찬미의 소리는 거대한 물살 같고, 굉음의 천둥 같고, 무수한 무리의 목소리 같다.(시편 113,1; 134,1; 135,2 참조)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로,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찬가로 빚어내신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곧 하느님에서 어린양으로 이동한다. 어린양의 혼인날이 도래했고, 신부는 이미 단장을 마쳤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아내로 그리던 예언자들의 오래된 이미지(호세 2,16; 이사 54,6; 에제 16,7–8 참조)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마르 2,19–20; 마태 22,1), 바오로는 이 이미지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2코린 11,2) 어린양의 신부는 특정 집단의 특권적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묵시 5,9; 7,14; 14,3–4 참조) 신부가 몸단장을 마쳤다는 표현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교회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지만(에페 5,26–27), 그 은총은 특정 제도나 사람들의 이름으로 독점되지 않는다. 이미 앞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바빌론의 몰락과 함께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권세가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모든 민족이 속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묵시 5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고운 아마포 옷”(묵시 19,8)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입히신 의로움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록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 책이 ‘행복’을 위해 쓰였음을 기억한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약속하는 부·명예·권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과의 일치, 상호 개방과 존중,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요한 묵시록이 가리키는 행복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며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하느님의 편과 어린양의 자리에서 흐르는 것은 언제나 ‘보편’의 은총이며, 용과 짐승과 대탕녀 바빌론의 편에 흐르는 것은 오직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쇄적 집착뿐이라는 것을. 10절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로 소개된다. 그들은 천사와 같은 위상을 부여받지만, 천사의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 위치가 아니다. 천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동료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느님을 따라 사는 이들, 하느님의 구원 안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바빌론의 멸망은 인간 사이를 가르던 모든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와 배제와 증오가 사라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선포하는 일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말한 한 문장이 이 지점에서 더욱 깊게 와닿는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인생의 역사」 168쪽)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격렬한 불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사랑에 대한 진리를 우리가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풍요롭게 분석했다. 아가서를 혼인의 가시적 표징인 몸의 언어를 올바르게 읽는 것에서부터 해석해 혼인의 성사적 표지를 이해하도록 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고 지속시키는 사랑은 영적임과 동시에 관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대의 젖가슴은 야자 송이 같구려. … 그대의 젖가슴은 포도송이, 그대 코의 숨결은 사과, 그대의 입은 좋은 포도주 같아라.”(아가 7,8-10) 두 연인은 서로가 선물임을 발견하며 체험한다.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지만, 몸의 언어와 서로를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몸의 뿌리는 영적인 사랑이다. 마음이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갈망은 몸의 감각으로 이어져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의 울림을 듣는다. 아가서 7장은 가장 관능적이고, 8장은 완전히 신학적이다. ‘몸의 언어’인 에로스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사랑을 드러낸다. 밤에도 멈추지 않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열망과 긴장, 탐색에서도 사랑의 얼굴이 드러난다.(아가 2,17; 3,1-2; 5,6.8 참조) 관능이 넘쳐남에도 경건함이 드리워져 있다. 참된 사랑의 신비, 곧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열린 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선 성(性)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몸·성·사랑에 관한 올바른 앎이 자신을 제대로 세울 수 있고, 타자 또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욕망에 대한 두려움도 정화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은 하느님 신비로 넘어가기 위한 참으로 가치 있는 고통이요 견딤이다. ‘표징’에서 드러난 인간적 실재가 ‘계약과 은총’의 신적 실재를 표현한 것이라면, 에로스는 자신의 완성을 바라보고, 완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아가페)이 에로스를 이끈다. 도착점에 대한 황홀함이 현재를 자극하고 이끈다. 그 여정에서 에로스는 모든 착복이나 지배 단계들을 초월하고, 소유와 욕망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들에서 초월해 나간다.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에로스의 한계(몸의 약함, 죽음, 정열)를 뜻한다. 몸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교황은 연약한 몸의 제한성을 볼 때 ‘사랑은 몸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고, 사랑의 무한함은 몸의 유한함에 비해 대단히 거대한 것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은 ‘부서지거나, 폭발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사랑이 그랬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인간 몸에서 폭발한 것이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아가 8,6) 사랑은 결코 죽음에 굴복하려 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교황은 아가서가 세계의 어떠한 문학보다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말한다.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아가 8,6) 격렬한 불길은 큰 불길, 성령의 불꽃을 뜻한다. 결국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에서 출발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에로스가 신적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기 위해선 몸의 언어가 전례 언어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전례 안에서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입맞춤(만남)’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그 절실함도 우러나기 때문이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아가 8,6)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무한한 유혹, 재물을 선택한 젊은 부자 청년

동창 신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오래전 부인을 보내고 혼자된 한 부자 노인이 자녀들의 끈질긴 청을 이기지 못했다. 일생의 피와 땀이 얼룩진 그의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는 요구였다. 자식들에게 당장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는 고민 끝에 유산을 미리 상속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모든 형제가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게 되었고 오랜 시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부자 아버지는 병원 입원비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점차 발걸음을 끊더니 병든 아버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자식들의 배신에 관해 들은 담당 의사도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조언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연락하여 사실은 아직도 친구의 명의로 토지가 아주 많이 남아있으니 처분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라고 했다. 연락을 받은 자식들은 바로 아버지 계좌로 많은 돈을 보냈다. 그래야 더 많은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자식들은 생각했다. 돈을 받은 아버지는 돌아가실 게 뻔한데 뭐 하러 생돈을 쓰냐는 똑똑한(?) 자식들과 연을 끊었다. 돈과 재물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때론 가족, 부부관계 등 애틋한 인간관계도 파괴해 버리니 말이다. 물론 돈과 재물, 그 자체는 좋은 것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재물 역시 세상의 모든 만물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하지 않다. 재물 욕심이 너무 과할 때 자제력을 잃고 몸과 마음은 파멸에 이른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최고의 자리를 돈과 재물이 차지한다면 재물의 노예와 다름없다. 어느 날 한 금수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주님, 제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 청년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던 열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 능력도 출중하고 인생에서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조차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청년은 예수님께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등은 어릴 때부터 잘 지켜 왔다”며 의기양양했다.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꼭 하나 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재산을 모두 포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청년은 몹시 슬펐다. 부자 청년은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고 슬퍼졌다. 처음 느끼는 좌절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은 돈과 재물 자체를 최고인 양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이나 돈이 인생의 최종 목적,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생에서 올바른 최고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8면

[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은 사해 동북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갈릴래아의 영주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비판한 결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안티파스가 헤로디아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두매아 출신으로서 유다의 통치자가 된 헤로데 가문은 늘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와 이혼하고 유다 독립전쟁의 영웅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의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기 아내를 버린 안티파스를 세례자 요한이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유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안티파스는 요한이 세력을 규합해 정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한 자신을 축출할지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감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전해 들은 요한은 두 제자를 보내 그분의 정체를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여기서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좀 이상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한 이래 오직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데 온 삶을 바쳤으며,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께 세례까지 베푼 요한이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지금 요한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힘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면 메시아가 맞는 것도 같지만, 그분이 이어가는 행보는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더 크게 보이는 모습은 정의로운 심판자보다 자비로운 치유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오히려 메시아의 정의를 외치던 자신이 안티파스의 불의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혀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요한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가 도래하면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요한에게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요한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서에는 위에서 언급한 메시아의 모습뿐 아니라 심판하는 메시아의 모습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심판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오심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음을 몰랐기에 오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인 심판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이는 세례자 요한처럼 메시아께서 오셨음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성경은 메시아의 시대에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닷물처럼 흐르리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우리가 체험하는 이 세상은 종종 더 아름답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져 가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왜 늦어지고 있을까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오셔서 시시비비를 준엄하게 가려 주시기를 학수고대할 텐데요. 아직 마지막 때가 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이 사람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설사 그가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비의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모든 것은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가 권고하듯이, 가을비와 봄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해야겠습니다.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8면

[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오늘 복음에는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마태 3,1-12 참조) 이는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루카복음 6장 44절과 맞닿아 있는 말씀이며, 열매가 없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마태 21,18-22 참조)도 떠오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 무화과나무는 철도 아니었는데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하고 죽게 하셨으므로(마르 11,12-14과 그 병행구 참조)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신 것일까요? 무화과는 우리나라에도 잘 자라지만 가나안의 일곱 토산물(신명 8,8 참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옛 유다 전승에서는 무화과를 선악과로 보았습니다. 원조들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책감을 느낀 뒤 선악과의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6-7 참조)고 풀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도 자랐고 가나안의 토산물에 속하는 무화과는 예부터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한 나무입니다. 호세아서 9장 10절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만나셨을 때 무화과의 맏물을 발견하신 듯 기쁘게 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무화과와 관련된 지명도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다는 마태오복음 21장 1절의 ‘벳파게’는 ‘덜 익은 무화과의 동네’를 뜻합니다. 벳파게 바로 근처에 자리한 베타니아(마태 21,17-19 참조)는 ‘무화과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을 주는 구절은 예레미아서 8장 13절입니다. “내가 거두어들이려 할 때 ···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이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인데도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기에 당신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건 나무가 상징한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기 위한 일종의 상징 행위였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뽑아와 가나안에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는데(시편 80,9 참조) 양질의 열매가 아닌 딱딱하고 시큼한 들포도만 맺으므로 이를 꾸짖은 것(이사 5,2.7; 예레 2,21 등 참조)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도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복음 11장 13절 등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당시 열매를 내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의 첫 열매가 5~6월에 나오지만, 보통 수확하는 건 당도 높은 8월 중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는 성경에서 ‘여름 과일’로 자주 통합니다.(아모 8,1; 미카 7,1 등 참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과월절 직전이므로(마르 11,12-14과 병행구 참조) 말 그대로 무화과 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 11장 13절의 ‘철’은 그리스어로 ‘크로노스’, 곧 시계처럼 객관적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 곧 주관적이고 질적으로 의미화된 시간으로서 ‘때’를 의미합니다.(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등 참조) 이에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상징임을 감안하면, 이 ‘때’는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시기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지만 자기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은 건강해 보였지만 실속이 없어 빛 좋은 개살구와 같았다는 꾸짖음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처럼 그들이 변질시킨 성전이 특히 그러하였는데(마르 11,17 참조), 언뜻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도 하고 비싼 제물도 바치는 등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완고함과 그들이 타락시킨 공허한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리라는 예고를, 백성의 상징인 무화과나무를 매개 삼아 전달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 11장과 그 병행구에는 무화과나무와 성전 정화 사건이 나란히 나옵니다. 성전은 이후 예수님의 예고처럼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이제는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된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2코린 6,16 참조)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무화과나무 일화와 더불어 소리만 요란한 수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닥치므로(1테살 5,2 참조)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부와 사치, 그리고 사람(묵시 18,9-24)

울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예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한다. 티로의 멸망 앞에서 바다의 임금들이 통곡하던 모습(에제 27,16–18 참조)이 그러했고, 오늘 세상에서도 화려함에 매달리던 욕망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 앞에 무너져 내린다. 땅의 임금들이란 결국 부에 대한 집착이 무너질 때 폭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대변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 결핍과 가난 속에 있었다. 세상의 화려한 부는 가난한 자에게 ‘넘사벽’처럼 보였지만, 요한 묵시록은 그 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울어야 할 이는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와 사치를 붙잡던 이들이어야 했다. 그 울음은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삽시간에 닥칠 불가역적인 심판의 울음이었다.(여기서 ‘삽시간’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단 하나의 시간’을 뜻한다.) 부와 소유를 향해 목을 매고 사는 우리 역시, 늘 급박한 울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더디 오지만, 결핍과 상실은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삶을 무너뜨리곤 한다. 본문은 이러한 부의 붕괴를 상품 목록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12절부터 나열되는 물품들은 에제키엘 27장의 목록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활발한 무역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장로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연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얻었다고 한다.(1세스테르티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금, 은, 보석과 진주는 바빌론의 불륜을 상징했던 사치의 언어이다.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도 마찬가지다. 부와 사치를 하느님의 뜻과 대립하는 힘으로 바라보는 요한 묵시록의 시선은 보석의 화려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관철된다. ‘비단’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나무는 정교히 다듬어져 귀족의 탁자로 놓였고, 상아 공예품과 대리석 장식은 부유층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계피와 향료 역시 귀족적 취향의 일부였는데, 특히 계피는 인도에서 건너온 고급 향이었고, 귀족의 향수, 연회장의 공기 그리고 옷장과 침실의 향을 채우는 데 쓰였다. 한 리브라, 곧 300g의 계피는 2000데나리온에 해당했으니, 노동자가 5년 반 동안 일해 버는 임금과 맞먹는 가치였다. 올리브기름과 고운 밀가루는 당시 서민들이 심각하게 겪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가 치솟아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현실 속에서, 이 식품들은 단순한 재화를 넘어 굶주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등장하는 단어 - 노예, 곧 σώμα, ‘몸’ - 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부와 사치의 정점은 결국 사람을 몸뚱이, 노동 기계, 객체화된 신체로 만든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물건이었고, 오락과 향락을 위해 소모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은 값으로 환원되었다. 요한 묵시록은 말한다. 부와 사치는 인간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구조가 된다. 14절에서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물질과 권력이며, 그것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선언된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그 절정에 있다. 모든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까지도 바빌론의 몰락을 보며 울부짖는다.(17-20절 참조) 그들은 바다 무역의 번영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돈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은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이며,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피(24절 참조)는 증언의 흔적이고, 그 증언은 바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다. 세상의 사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만, 신앙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회복시킨다. 부와 사치는 한때 달콤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생활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대우받는 것,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 우리의 존엄이 가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그대는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아가서 사랑의 이중창에는 누이와 오라버니로 불리는 ‘형제적’ 구성과 “그대는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4,12)이라는 구성이 있다.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은 불가침성을 말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표현을 언어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진리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한다.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의 은유적 표현은 여자의 몸이 갖는 신비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인 ‘나’의 전 구조 안에 가장 깊숙이 선물의 본질적인 진정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연인과의 일치가 갖는 심오한 측면과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은유는 닫힌 정원을 여는 열쇠가 여자에게 있음을, 매우 고귀한 가치를 지닌 여자의 신비를 말한다. 남자는 문을 두드려 열어줄 것을 청할 순 있지만 부수고 쳐들어가 침범할 수는 없다. 여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제공하며, 자신의 열망을 명백히 밝힌다.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아가 5,2) 신부는 여성성의 신비에 대한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남자의 눈앞에 내어놓는다. 친교의 일치를 살기 위한 전제는 바로 선물의 자유다. 이 은유적 표현은 인간이 인간에게 밝혀진 것 외에 또 다른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과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내적인 불가침성을 발견하도록 한다. 참된 사랑은 신비를 훼손하지 않고 인격의 신비에 근접해야 한다. 아가서에서 여자는 남자-신랑의 가장 깊은 체험 안에서 결코 훼손되지 않는 신부-누이이며, 자기의 여성성을 지닌 내밀한 신비의 주인이다. 아가서의 연인들은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고, 혼인적 행위를 통해 결합을 이루고 있다. 사랑의 대화 안에서 ‘닫힌 정원’이 신랑의 몸과 영혼 앞에서 열린다. 그리고 깊은 존경과 경이로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종속을 통해 드러난 그녀의 신비를 지킨다. 선택과 선물의 자유 안에서 그녀는 그에게 문을 열고 자신의 신비를 드러낸다. 신랑은 이 신비를 온전히 알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다가가 그녀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고, 그녀가 열어준 정원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표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내 몰약과 발삼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내 포도주를 마신다오.”(아가 5,1) 사랑의 노래에서 소유격 ‘나의’가 자주 불린다. 인격의 내적 진리에 부합하는 의탁의 심오함 전체가 담겨있음을 단언하는 의미이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배우자에게 소속되길 원하고, 상호 속함 안에서 심오한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서로에게 속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신의 운명이 지어졌음을 말한다. 인간의 삶은 우선 주어진 선물이다. ‘낳음’ 받았고 완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이는 큰 질서를 지녔고, 애덕의 훈련을 통해 성숙된다. 특히 정결의 덕은 인격체가 모든 성적인 욕망과 정서를 남편과 아내 사랑의 관계 안으로 통합하도록 돕는다. 부부관계에서 성적 결합은 이런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이 결합을 통해 자신도 타자도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만 자신을 선물로 기꺼이 내어주는 몸의 언어다. 그때 부부는 사랑의 일치에 의해 그들 몸의 일치를 이해할 수 있고, 타자의 몸과 그 몸에 쓰인 성에 대해 존중하는 방법도 배운다. 부부 관계는 하느님 안에서 존재(ut in Deo sit)로 향하는 최종 목적이 있다. 사랑은 두 인격(하느님의 위격과 인간의 인격)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친교이며, 일체 속 관계의 완성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9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계속 전진하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감은 일종의 여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적 여정’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정 중에 있는 존재다. 이 지상 여정은 마치 순례 여정과도 같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순례 중인 나그네이자, 순례자다. 사막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적생활에서의 진보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즉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이 순례 여정에서, 내적생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다. 장작에 불 붙이기 사막 교부들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혹시라도 타성에 젖어 내적생활에 퇴보하게 될까를 우려했다. 그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압바 모세가 압바 실바누스에게 물었다. ‘사람은 매일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부지런하다면 매 순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실바누스 11) 요한 콜로부스는 말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모든 덕과 모든 하느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요한 콜로부스 34) “압바 포이멘은 압바 피오르가 매일 새롭게 시작했다고 말했다.”(포이멘 85) 두 수도승이 영적 담화를 나누던 중 한 수도승이 다른 수도승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작을 우리 마음에 비유해 볼 때, 불은 우리의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은 우리 영성 생활의 가장 큰 장애다. 마음에 열정이 없을 때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해진다. 열정을 상실한 마음은 수도승의 고질병인 ‘아케디아’(영적 태만)로 이끈다. 사막 수도승들은 늘 수도승 생활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정의 불이 꺼지지 않게 돌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수도승은 누구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천국의 사다리」 1,6)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속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열정을 잃어 우리 마음은 불 꺼진 싸늘한 장작처럼 식곤 한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열정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붙여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이 여정에서 열정은 우리를 지치지 않고 계속 전진하게 하는 에너지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끝없이 나아간 모세의 삶처럼 매일 새로운 열정 가슴에 품고 영적 진보 강조한 사막 교부들 익숙한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 여정 멈춤 없이 계속하길 끝없는 진보 그리스어 ‘에펙타시스(epektasis)’는 끝없는 진보를 뜻한다. 이 진보 개념은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부각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성 생활에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변의 존재이신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끝없는 움직임, 이것이 그레고리우스의 진보 개념이다. 영혼이 하느님과 동일하지 않다면, 선에 참여하는 영혼의 이러한 진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만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한을 향하는 유한한 존재다. 이는 이동 중인 존재, 갈망의 존재를 의미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간 삶을 산 모세가 그 전형이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덕과 사랑은 현세에서건 내세에서건 한계나 종료점이 없다고 말한다. 진보는 단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생명의 표지라고 한다. 완전함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절대 완전해지지 않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위(僞)마카리우스에게서도 이 진보에 관한 주제가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 은총을 더 많이 받을수록 천국에 대한 그의 갈망은 더욱더 만족을 모르게 되며,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더욱더 타오른다. 그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더욱더 은총을 받아야 하고 그 은총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그가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가난하게 생각한다. 천상 신랑에 대한 그의 영적 갈망은 만족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모음집 2,10,1) 따라서 ‘충분하다. 나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주님은 무한하시고 도달하기 어려운 분이시며, 그리스도인은 감히 자신이 주님께 도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밤낮으로 그분을 찾으며 겸손히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모음집 2,26,17)이다. ‘수도 생활에는 졸업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이는 수도 생활이 일시적 과정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해 이어지는 지속적 여정이라는 의미에서다.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교’(규칙 머리말 46)다. 이 학교에서 졸업이란 아마도 자의건 타의건 이 학교를 떠나게 될 때, 그리고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일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멈춤은 퇴보이자, 죽음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있다. 성인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한 이러한 완성은 단지 부활 후, “부활한 육신이 새로운 신적 옷으로 덧씌워지고 천상 양식으로 양육될 때”(모음집 2,12,14) 얻게 될 바를 미리 맛보는 것일 뿐이다. 완성에는 끝이 없다.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멈추게 되고 결국 뒤로 처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늘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끝없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까지, 아니, 저세상으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7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사도단에 치맛바람 일으킨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유다인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천재들이 많은 것은 그들의 특별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교육이 지식이나 암기, 연역적 방법을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감성이나 지혜에 초점을 두고 토론이나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장이며 제사장이며 교육자의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 식사 시간은 성경 공부 시간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율법을 직접 받은 것 같은 감동으로 자녀들에게 토라를 가르친다. 논리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그런데 과학계는 지능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주장한다. 유다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어머니는 자녀 정서교육의 원천이며 최고의 심리치료사이며 교육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자녀의 거룩함, 올바른 행위, 좋은 성품을 계발해 주고 남편과 자녀들이 하느님 말씀을 배우게 도와준다. 자비로운 어머니는 동시에 능력이 있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교육열이 유별난 우리나라의 어머니들도 치맛바람(?)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좀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식만 챙기다 보니 교권을 침해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사도단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어머니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예수님께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여성 제자그룹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을까? 유다 사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사상과 활동에 매력을 느껴 전심전력으로 사도단을 도왔다. 살로메는 보통 유다인 가정처럼 아들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살로메는 인간적으로도 예수님께 큰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청탁한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하나씩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 언젠가 큰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치할 큰 인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도들 안에서는 당연히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물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로메의 치맛바람으로 사도단 내에 말썽이 난 셈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제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친 후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했던 의리있는 여장부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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