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실존하지 않는 성인이 있다?

성인전을 읽다 보면 종종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성인이 실제 인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성 소피아(Sophia)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하고, 함께 순교했다는 세 딸, 성 피데스(Fides), 성 스페스(Spes), 성 카리타스(Caritas)는 각각 신덕(믿음), 망덕(희망), 애덕(사랑)을 뜻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 그리고 그 원천인 지혜를 공경하던 마음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추측합니다. 성 소피아만이 아닙니다.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어깨에 업고 강을 건넜다는 성 크리스토포로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 베로니카(Veronica)의 이름도 라틴어로 ‘참된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성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은 수건에 ‘참된 형상’,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밖에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용을 물리쳤다’는 성 제오르지오나 성 마르가리타가 그렇고, 석가모니를 연상하게 하는 성 요사팟의 이야기처럼 다른 설화를 차용한 듯한 성인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확실한 전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은 독서에 관해 “성인들의 수난 기록이나 전기는 역사적 진실성에 부합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92항) 이에 따라 1969년 개정된 전례력 축일표에는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들의 기념일이 제외됐습니다. 또한 시복시성 절차에서도 “하느님의 종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정보 탐구”(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 제2조 1항)를 중시하면서 생애·덕행·순교·명성 등을 증거와 문서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인물과 행적이 아니면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이런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분들이 ‘허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승 과정에서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각색되거나 덧붙여지거나 과장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인 공경, 성인에게 청하는 전구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향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준다”면서 “성인들의 통공도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고 우리가 성인들에게 보인 사랑의 증거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설명합니다.(50항 참조) 만일 성인의 전구를 단정하기 어렵더라도, 그 공경과 기도의 지향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고집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지만,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성인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 전승을 통해 교회가 바라본 복음적 덕과 예수님께 이르는 길이 아닐까요?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없는 기다림의 공허함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의미 없는 기다림 속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상징 하느님의 침묵 계속된다 해도 유혹과 허상 떨쳐내고 참된 부활 구원에 이르러야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이사 55,10-11 / 제2독서 로마 8,18-23 / 복음 마태 13,1-23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이자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습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①: 개괄적 이해

이번 편지에서는 구약성경 오경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 구약성경에 대해 간략히 소개드리고, 이어 오경과 창세기의 전체 내용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1)성경 성경에는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경륜을 통해 계시됩니다. (2)구약성경 구약성경은 성경의 전반부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후반부인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함) 구약성경에 속하는 46권의 책들은 그 내용과 문학 양식에 따라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입니다.(성경의 목차 참조) (3)오경과 창세기 오경은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며, 원역사, 성조시대, 이집트 탈출과 광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기원, 인간의 기원과 운명, 하느님 구원 역사의 시작,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구원 체험,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생활 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오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기원(起源)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에 따라 ▲세상과 인간의 기원, 인간의 운명, 원복음(原福音)에 대한 말씀인 창세기 1-11장(원역사) ▲구약의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전하는 창세기 12-50장(聖祖 이야기)으로 구분됩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1-11장에는 세상 창조에 이어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계시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창조되어 낙원에 있던 인간(1-2장)은 악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원죄) 스스로 고통과 죽음이란 운명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3장) 이어 나오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범하는 ‘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4,1-16), 카인의 후손 라멕(4,19-24), 거인족(6,1-4), 노아의 홍수(6,5-9,17), 노아의 가정(9,18-29), 바벨탑(11,1-9) 등이 그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인 12-50장은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성조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세 가지 축복 약속을 주십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세 번째 축복 약속을 통해 계시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이 축복 약속은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 약속은 아브라함에 이어 이사악과 야곱 이야기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경위를 전하는 요셉 이야기(창세 37-50장)는 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안배였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창세 50,20) 다음 편지부터는 창세기의 첫 부분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교회상식 더하기]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감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감각은 단순히 신체의 기능을 넘어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교회헌장」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며 모든 신자에게 ‘초자연적 신앙 감각’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 감각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12항, 35항 참조) 신앙 감각은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주는 감각입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성령의 도유를 받은 모든 신자가 이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 신앙 감각의 도움으로 우리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깨닫고,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교회헌장」 12항) 물론 공의회 이전에 신앙 감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이끄시며, 사도들에게서 받은 신앙을 교회 안에서 보존하고 고백하게 하신다고 믿어 왔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도적 신앙을 식별하고 지켜 가기 위한 시노드의 전통도 이런 믿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 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도 이 신앙 감각과 깊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인 동의’라고 하니 마치 ‘더 많은 신자의 의견이 정답’이라는 다수결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신앙 감각을 단순히 신자 다수의 의견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을 올바로 실천한 이들이 다수보다는 소수인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앙 감각은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 없이 나온 의견을 신앙 감각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앙 감각은 교도권과도 상충하지 않는데요. 교회는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2항) 우리 각자에게 있는 신앙 감각은 ‘믿음의 본능’이라고도 합니다.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어려울 때 본능처럼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본능’, ‘육감’과도 같은 감각이다 보니 평소엔 신앙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잠들어 있는 나의 신앙 감각,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은 삶의 성화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무엇보다도 애덕의 증진”을 강조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의 습관이 신앙 감각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전례 참여, 고해성사, 교회의 사명과 봉사에 참여하는 등의 교회생활도 신앙 감각을 끌어올리는 좋은 방법입니다.(「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57항, 89항 참조)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말씀묵상]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2026년 1월 15일자)는 Open Doors의 2026년 보고서를 인용하며, 전 세계 약 3억88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박해나 차별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박해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옥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열아홉 번째 서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거룩한 이름을 증언할 힘을 청하였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는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참조)라고 전합니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시편 119,132 참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사명, 권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박해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오로를 두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도 결국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화답송에서는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시편 31,4-6 참조)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보호와 인도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박해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의 힘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순교의 칼날 앞에 서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내어주며, 먼저 용서하고, 평화와 희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드는 이에게 주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한 나침반: 올바른 양심

현대 사회에서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이익 중심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지침인 양심의 목소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 질문보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인가”라는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론을 검토하는 것은 현대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고 악을 피하기 위해 내면의 주관적 확신과 객관적인 자연법적 이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했다. ‘양지’와 ‘양심’의 구분과 역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구조를 보편적 원리인 ‘양지(良知, synderesis)’와 구체적 행위의 적용인 ‘양심(conscientia)’의 역학 관계로 설명한다. 양지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같은 자연법의 제일 원리들을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habitus)이다.(I,79,12) 이 원리들은 인간 영혼에 각인된 ‘영혼의 불꽃’과 같아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있는 빛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진리론」 17,2) 반면, 양심은 이러한 보편 원리를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지성적 ‘행위(actus)’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양심을 ‘다른 것과 함께 알려진 지식(cum alio scientia)’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적용(applicatio scientiae ad aliquid)’이라 정의한다.(I,79,13) 여기서 중요한 학술적 통찰은 양심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양지는 ‘모든 악은 피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공하고, 이성은 ‘학교폭력은 악이다’라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소전제를 도출하며, 양심은 ‘이 학교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최종적인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지점은 무류한 원리인 양지가 아니라, 소전제를 설정하거나 대전제를 개별 상황에 대입하는 추론의 과정이다. 즉, 보편 원리는 확고하나 구체적 적용 과정에서 이성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양심이 보편 원리를 개별 행위에 적용하는 이성적 활동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왜 양심이 왜곡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할 수 있다. 드라마 <참교육>을 통해 본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은 형성 과정과 환경에 따라 왜곡될 수 있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이 정립한 ‘이완된 양심(conscientia laxa)’과 ‘완고한 양심(conscientia stricta)’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책임 있는 실천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심각한 교육 현실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 드라마 <참교육>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왜곡된 양심의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동료 학생이나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받는 벌에 분노한다. 이는 도덕적 규칙을 무시하거나 마비된 상태인 이완된 양심의 전형이다. 반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타인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완고한 양심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교권보호국 사무관의 역할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류를 바로잡는 외부적 원조로 해석된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이 불행은 당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다’라는 올바른 소전제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잘못된 추론을 교정하고 그들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양심의 교정은 인간을 법의 맹목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도덕적 자유로 이끄는 과정이다. 양심의 왜곡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의 책임과 직결되기에,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선악 가려내는 본성인 ‘양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양심’ 이성적 활동이지만 왜곡 쉬워 도덕 규칙 무시하는 태도 버리고 올바른 양심 따라야 진정한 자유·행복 누릴 수 있어 올바르게 살아있는 양심의 형성과 도덕적 책임 토마스에 따르면, 양심은 그것이 올바르든 그릇되든 언제나 인간을 구속한다. 만약 자신의 양심이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판단했는데도 이를 행한다면, 비록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선일지라도 주관적으로는 악을 선택한 것이 되어 죄를 범하게 된다.(「진리론」 17,4) 그렇다면 드라마의 가해자들처럼 이완된 양심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죄가 없는 것인가? 토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양심에 따랐더라도, 그 행동이 태만이나 고의에 의한 ‘극복할 수 있는 무지(ignorantia vincibilis)’(I-II,19,6)에 근거하고 있다면, 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반대로 완고한 양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불가피한 무지’나 상황적 한계를 이성적으로 식별함으로써 지나친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잘못된 양심을 고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심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올바른 양심으로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양심,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향한 지성소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성소이다.(사목헌장 16항) 양심은 주관적 자아가 멋대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아니라, 이미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와 법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권고했듯,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외침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에 침잠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면에 이미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올바른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은 비로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도덕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결국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고 그 판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 지복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주는 왜곡된 양심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왜 양심의 빛을 밝히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닦아나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올바른 양심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9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편지를 시작하며

하느님의 계시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이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함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구약성경은 더욱 그렇다. 이번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연재는 성서학을 전공한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가 매주 주보를 통해 교우들에게 보냈던 편지 형식의 글을 재구성한 것으로, 구약성경 중에서도 처음 다섯 권의 책인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간결하고 쉽게 전한다. “신부님, 세례받은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세상사는 일이 바빠서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 신자 분이 답답해하시면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싶고, 그분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은 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 언젠가 하면 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삶의 자세와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 물음들에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십니다. 놀랍고도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먼저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啓示)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과,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거룩한 경전인 ‘성경(聖經)’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 삶의 근본과 참된 행복, 나아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하느님을 믿고 공경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성장을 위해,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 성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과 가르침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도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성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21항)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많은 분에게 생소하거나 어렵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귀중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하느님 구원의 의미를 충만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들이 하느님을 만나 그분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인생의 근본을 알아 삶의 참된 가치관과 희망을 가지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구원으로 나아가시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교우님과 함께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은혜로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1+1=2이다’라는 수학적 진리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나, ‘인간이 사후 심판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에 간다’라는 교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믿음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는 것이 사물, 식물, 동물, 인간, 자연, 우주와 같은 가시적 대상을 향한다면, 믿는 것은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 영혼, 내세, 천사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를 향한다. 지식의 종착지에 다다르면 이 모든 가시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결국 믿음의 세계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실재를 다룬다. 우리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보이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우리의 시야와 지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시야 밖에 있는 분이다. 우리의 시야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현미경이든 천체 망원경이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볼 수 없는, 과학 기술 너머에 계신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세계이며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근원적인 실재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가시적인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했듯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지만, 지식은 경험에서 기인한다. 신앙은 교회의 공동체적 믿음에 뿌리를 두지만, 지식은 인류가 쌓아온 학문적 토대에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지식은 대상과의 ‘사물적 관계’라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말씀의 우물] 그리움과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도 육신의 목마름도 있습니다.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래아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십니다. 햇빛이 강한 정오 무렵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그곳으로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여인은 매일 육신의 목마름을 달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여인은 깜짝 놀라 아룁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요한 복음사가는 짧게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한 4,9) 당시 유다인들은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인들을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보고 그들과의 접촉을 매우 꺼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 10,5)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여인이 생수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예수님 계시의 말씀을 듣던 여인은 아룁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요한 4,25)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명백히 선포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고대 그리스어 ego eimi, ‘내가 그 사람이다’ 또는 ‘내가 존재한다’).”(요한 4,26) 여기서 예수님 계시의 말씀이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신 계시 양식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놓아둔 채 마을로 달려가서 외칩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한 4,29) 날마다 붙들고 있던 생존의 무게보다 더 큰 기쁨, 곧 주님을 만난 기쁨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외침 덕분에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요한 4,39) 됩니다. 시카르가 복음화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 선포자가 되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뵙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전적으로 새롭게 됩니다. 영원성에 대한 그리움, 세상의 모든 아쉬움과 그리움을 삽시간에 다 채워주는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영혼은 천상 주님으로부터 나와 주님께로 향하여 그분 안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세상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 말씀을 듣다 보면, 결국 우리 내면의 가시지 않는 그리움과 목마름까지도 다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 그동안 ‘말씀의 우물’을 연재해 주신 신교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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