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유아세례만으로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

모든 신자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일치해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삶의 정점이 성찬례, 곧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주로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야에 세례성사를 거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의 경우 세례를 받았더라도 10세 무렵 첫영성체를 하기 전까지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 능력대로 이해하고 주의 몸을 신앙과 신심으로 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식과 정성된 준비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교회법」 제913조 1)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니면 자연스럽게 첫영성체도 받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일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성인이 된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성당에 오셔서 미사에 참례하셨다면 성체를 모실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별도의 준비와 예식 없이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는데,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걸까요? 당연하게도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요. 죽을 위험에 처한 분이 대세(代洗)를 받은 후 회복돼 신앙생활을 하게 됐거나,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적법한 방식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로 온 경우입니다. 모두 온전한 세례지만, 곧바로 성체를 모실 수는 없습니다. 이분들은 예비 신자들처럼 일정 기간 교리 교육을 받으며, 신자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고,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첫 고해성사를 하고, 대세를 받은 분의 경우 보충 예식(보례)을, 다른 그리스도교의 경우 일치 예식을 하면 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만 받은 어른들도 이 기간이 필요한데요. 교회는 이를 “정화와 조명의 기간”이라고 말합니다.(「어른 입교 예식」 21항)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회개하는 ‘정화’와 신앙의 빛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이 되는 ‘조명’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성체를 모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첫영성체에만 ‘정화와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라는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순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5항) 바오로 사도도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된다”면서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1코린 27-28 참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 앞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한 번쯤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31절에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주님은 “오시어”(요한 20,19.26) 제자들 가운데 서시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요한 20,20.27 참조) 이는 부활이 십자가를 지워 버린 사건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사랑의 현존임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토마스의 의심은 바로 이 상처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곧 십자가의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부활의 진실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상처를 통해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임을 알아보고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또한 이 상처는 토마스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날 저녁, 두려움 속에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의심 가운데 머물러 있던 토마스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같은 장소에 두 번 오셨다는 사실은, 부활이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 의심하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이 닫혀있어도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오심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청하지도, 맞이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준비와 자격을 앞섭니다. 또한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데도” 오셨다는 사실은,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초월적인 현존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 부활 신앙이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신앙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의 의심마저 껴안으시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주님은 토마스에게 왜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토마스를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도 아니며, 오히려 그의 의심을 당신의 상처 안으로 초대하시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세상을 향해 열린 하느님 자비의 문입니다. 토마스에게 주님의 상처는 실패와 좌절이 남긴 고통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마침내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가 이끌어 온 신앙의 정점이며 부활 신앙의 가장 완전한 언어입니다. 토마스는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상처를 만졌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분’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1베드 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산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새로 태어남은 상처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의심과 상처를 안고서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으며(1베드 1,8 참조) 그분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증거를 요구하며 두려움과 의심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닫힌 마음의 문을 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가 오늘도 고통받는 이들의 상처 안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부활의 믿음으로 이끕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초자연 신학과 신비신학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지난 연재에서 말한 것처럼 첫째, 자연신학을 통해서다. 이어 둘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과 증언(기적과 업적)을 통하여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초자연적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 체험의 기록인 성경과 성전을 읽는 것이다. 하느님 계시와 인간 신앙의 책인 성경과 성인전과 신심 서적을 읽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인류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힘찬 사랑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을 읽을 때 인생의 방향을 찾고 믿음이 깊어져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과 「성 프란치스코 성인전」을 읽을 때 큰 감동을 받게 되고, 우리 안의 무질서한 사욕편정(邪慾偏情)이 정화되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요즘 신앙생활이 힘든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경과 성인전을 읽기를 바란다. ‘요즘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한다면 신앙 서적과 신심 서적을 읽기를 바란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사랑을 기록한 복음서를 읽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느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느님인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셋째는 신비신학을 하는 것이다. 신비신학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기도는 한마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기도의 1단계는 내가 말하고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단계이다. 기도의 2단계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내가 듣는 것이다. 기도의 3단계는 하느님도 나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사랑 안에서 서로를 고요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대화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기쁘고 참으로 평화롭다. 이 작은 피조물인 인간이 위대하신 창조주인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은총인가? 믿음 안에서 기도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은총을 쏟아 주신다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믿음 안에서 기도하기만 하면 당신 자신까지 보여 주신다는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기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의 영과 그분의 뜻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게 된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게 된다. 기도하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깊어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흐려진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자연과의 만남을 소홀히 할 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성경과 성인전을 읽는 것을 소홀히 할 때 우리들의 마음이 늘 불안하게 되고 세상의 달콤한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때 하느님이 안 보이고 세상 것들이 더 크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나온 자연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나는 성경과 성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초자연 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나는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체험에서 나온 신비신학을 통하여 얼마나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되어 있는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어떻게 신자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가?

사이비 종교와 이단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가운데 하나는 ‘죄의식’이다. “너는 죄인이다”, “지도자를 떠나면 멸망한다”는 메시지가 반복될 때, 추종자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고 결국 지도자의 말에 매달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전통적 종교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그 구조는 완전히 왜곡된 형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다루는 죄에 대한 성찰(I-II, qq.71–89)은 그들의 허구성을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자유로운 인격에서 조종당하는 객체로 전락한 피해자 토마스에게서 죄는 단순히 사회적 규범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해야 할 최고 규칙인 이성과 영원법(lex aeterna)에 대한 거부이자 ‘이성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I-II,71,6). 그런데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는 죄의 기준이 음험하게 바뀐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뜻, 성모님의 뜻, 성령의 인도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도자의 명령과 집단의 규칙이 절대 기준이 된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이를 어긴 모든 것을 불순종, 배교, 불신앙으로 낙인찍어 죄로 규정한다. 피해자는 조종자가 설정한 자의적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이성적 판단보다 조종자의 목소리를 더 신뢰하게 된다. 토마스는 죄가 ‘무질서한 자기 사랑’(I-II,77,4)에서 생긴다고 보면서, 그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둔다.(I-II,75,1) 죄는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된 결과이며, 따라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도 가능하다. 자유로운 인격이 이성의 질서를 일부러 거슬렀을 때, 비로소 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이비 집단은 신자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공포나 본능적 감정의 흔들림까지 죽을 죄, 즉 ‘사죄(死罪)’로 몰아세운다. 지도자는 “너는 본질적으로 형편없다”며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수치심을 주입하고, 피해자의 ‘상상력(imaginatio)’에 지옥과 파멸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피해자의 이성을 어둡게 만든다.(I-II,80,2)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는 이렇게 선택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심리 상태로 밀려난다. 그런데 추종자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동요를 사죄로 규정하여 ‘정서적 노예’로 만드는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의지가 이성에 의해 도출된 ‘선택된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의 자유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자기 권력 아래 묶어 두려는 지도자의 행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질서(영원법)에 대한 반역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중대한 죄이다. 왜곡된 죄의식 강요하는 사이비 집단…‘정서적 노예’ 만들며 인간 이성 파괴 분별력 있는 신앙만이 참된 행복의 길…성찰과 회개로 은총과 자유 되찾아야 죄의 이중 구조: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피조물로의 전향 토마스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aversio a Deo)”과 “피조물로의 무질서한 전향(conversio ad creaturam)”의 긴장 속에서 이해한다.(I-II,72,2) 죄는 단순히 어떤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궁극목표이신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한정된 선(쾌락, 부, 명예, 권력 등)으로 대체하는 내적 방향 전환이다. 사이비 종교의 구조를 이 틀로 읽어 보면, 한 가지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겉으로는 “하느님, 성모님”을 연호하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 지도자와 공동체에 고정시키는 구조가 형성된다. 사이비 지도자는 이성을 거스르는 자신의 명령을 ‘정의’로 둔갑시켜 피해자의 의지를 굴복시킨다. 이로써 피해자의 영혼은 하느님과 이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에 빠지며, 오직 가해자라는 피조물에 집착하는 전도된 지향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만든 지도자는, 토마스가 “모든 죄의 시작”(罪宗)이라고 부르는 교만(superbia)의 죄를 범하고 있다. 스스로를 다른 이의 최종 목적처럼 대하며,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상습적인 형태의 죄 속에 있는 존재다. 더 나아가 사이비 종교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영적 벌’과 ‘체벌’은 하느님의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I-II,q.87) 그것은 하느님 이름을 앞세운 사적 폭력이며, 오히려 그 폭력을 행사하는 측의 죄를 늘려 갈 뿐이다. 영구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은총 토마스에게서 중요한 결론은, 현세에서의 죄는 언제나 용서와 치유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는 “죄는 용서될 수 있다”(I-II,88,1)고 분명히 말하며, 하느님은 그분의 은총으로 죄를 씻어 주신다고 가르친다.(「신학요강」146) 죄의식은 회개와 고해, 은총의 수용을 통해 평화와 자유로 나아가는 길의 일부이지, 영원히 붙들려 있어야 할 쇠사슬이 아니다. 반대로 사이비 집단에서 죄의식은 의도적으로 끝없이 연장된다. “아직도 네 죄가 충분히 씻기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죄책감은 은총과 자유로 향하는 출구로 안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의존과 공포로 몰아넣는 회로 속에 갇힌다. 이것은 토마스가 말하는 죄–형벌–은총의 구조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죄는 심각한 악이지만, 그 목적론적 지평에는 어디까지나 은총과 회복, 최종 행복이 놓여 있다. 죄의식은 자신을 정죄하고 타인에게 예속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더 높은 선을 향해 나아가는 성찰의 기회여야 한다. 죄의식이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아니라, 영구적인 노예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죄의식이 아니다. 사이비 집단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주입한 거짓 죄의식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적 선인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복원해야 한다. 토마스가 통찰했듯,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를 억압하는 사슬이 아니라, 오히려 결여된 선을 회복하고 이성적 자유와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지, 아니면 더 깊이 어떤 한 인간이나 폐쇄적인 집단에게 예속시키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성적 분별력을 갖춘 건강한 신앙만이 인간을 정서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참된 행복의 길로 복귀시킬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9면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나서의 가르침

흔히 예언서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신탁, 즉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1-2) 그러나 요나는 말없이 주님 말씀을 등지고 야포로 가서 타르시스로 가는 이방인의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한편, 뱃사람들과 니네베 주민들은 바삐 대비하고 행동합니다. 폭풍이 일어 생사가 위태로워지자, 선장이 배 밑창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요나에게 외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이렇게 그들은 요나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도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듯 움직입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 큰 물고기에게 통째로 먹힌 요나는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주 하느님께 있는 힘을 다해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요나 2,3) 기도 중에 요나는 깨닫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요나는 두 가지를 체험하며 배웁니다. 첫째 가르침은, 예언자로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 너무 버거워서 겁에 질려 말(선포)을 못 한다 해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님 말씀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요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바다도 큰 물고기도 바람도 뱃사공들도 다 덜덜 떨게 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요나 1,15) 이를 본 “(뱃)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6) 요나서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주 하느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보편 구원 의지’의 계시입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요나 3,3)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요나 4,11) 위에서 ‘사흘’은 충만의 숫자이며 ‘십이만’은 수학적 또는 통계수치를 뛰어넘는, 주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수요 구원의 숫자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적마다 더없이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인간애를 느낍니다. 요나를 살리고자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니 얼마나 감동입니까? “(뱃)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요나 1,13) 그때 사공들의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또 어땠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과연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2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주일, 즉 일요일은 휴일입니다. 그 유래를 물으면 많은 분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기 때문”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렛날’을 기억하는 날,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 20,8)라고 나옵니다. 성경은 ‘안식일’을 지키라 했는데, 왜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을까요?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제정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라고 알려줍니다. 안식일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기리는 거룩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카’를 떠올리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시어 성체성사로 파스카를 완성하신 것처럼, 안식일도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사실 안식일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빌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제자들의 활동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마르 2,27)라고 가르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부활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이 사건이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마태 28,1)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교회는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로서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주일이 됐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74항)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주일로 대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왔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은 이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옛 질서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됐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살아간다”며 “주님과 그분의 죽음으로 이날에 우리의 생명은 솟아나게 됐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날, 여러분은 어떻게 새로 나고 계신가요?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4면

[말씀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반전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생명에게 패배하고, 짙은 어둠이 영원한 빛에 자리를 내어준 ‘부활’의 아침입니다. 복음은 여명(黎明)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달려갔고, 뒤이어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이 달려갑니다. 이들의 ‘달림’은 단순한 물리적 속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는 영혼의 간절한 갈망입니다. 빈 무덤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신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빈 무덤’의 신비를 깊이 통찰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을 무효로 하셨음을 뜻합니다. 곧 죽음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했음에도, 무덤 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수제자인 베드로에 대한 존경이자, 동시에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신중한 영성이었습니다. 뒤따라온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상징을 발견합니다. 바로 무덤 안에 놓인 ‘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간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설명합니다. 도둑이라면 서둘러 시신만 챙겼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의 옷을 정돈하여 남겨두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몸을 입으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는 것은 외적 표징에서 내적 확신으로의 내면의 변화를 말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보고 믿음’이 단지 물리적 빈 공간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을 영적으로 깨달은 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무덤, 즉 절망과 고통, 상처의 빈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그곳에서 단지 ‘없음’과 ‘상실’만을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덤 밖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 빈자리 안으로 용기 있게 들어갈 때, 죽음의 흔적은 남아있으되 생명은 그곳을 빠져나와 우리 곁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목격하는 신앙인의 시선입니다. 부활은 내면을 밝히는 영원한 광명입니다. 동방 정교회의 영적 보화인 필로칼리아의 영성가들은 부활을 단지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가두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마음의 정화(Hesychia)를 통해 내면의 빛이 다시 타오르는 것’입니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영혼 안에서 매일 일어나야 한다. 정욕에 묶여 있던 마음이 기도를 통해 빛을 발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라자로가 일어나는 것이요, 주님이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시는 순간이다.” 부활은 외부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 안의 ‘자기중심성’이라는 무덤 문을 부수고 나오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필로칼리아는 권고합니다. “네 마음을 지켜라. 그곳이 바로 주님이 묻히신 곳이며, 동시에 부활하실 장소다.” 우리가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 때, 부활하신 주님의 빛은 태양보다 더 밝게 우리 영혼을 비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들고 성당 문을 나서야 하겠습니까? 빈 무덤의 아마포는 주님께서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지 않으심을 선포합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이를 온전히 깨달은 것은 오직 부활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죄의 습관과 미움의 수의를 무덤에 남겨두고 나옵시다. 부활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모하는 현재의 능력’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할 때 부활은 시작됩니다. 절망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 때 무거운 돌무덤은 굴러갑니다. 오늘 내 마음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이라는 넓은 들판을 향해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가셨듯이, 그분은 이미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진실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2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위대한 개츠비」: 물질주의의 허상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미국은 유럽과 달리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금주법, 방황하는 젊은 세대, 광란의 20년대, 재즈시대라는 특징들이 암시하듯 불확실성과 혼란, 불만과 허무함 등이 동시에 공존하는 시기였다. 1925년 출판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아메리칸드림과 그 이면의 모순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상류층 출신의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과 부의 차이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나중에 막대한 부를 축적해서 돌아온 주인공은 이미 결혼해 버린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메리칸드림이 제시하는 물질적 가치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교회도 성경과 다양한 교회 문헌을 통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꾸준히 제시한다. 구약시대 아모스, 이사야, 미카 예언자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비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부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문헌과 강론에서 현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심각한 폐해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물질 자체가 악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인간 태도의 문제이다. 데이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개츠비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며 그녀를 경제적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꾸며진 자아의 경험은 공허함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달콤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부유한 집과 부유하고 충만한 삶 속으로 사라졌고, 개츠비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한 자신이 아닌, 꾸며진 자신이 한 경험은 아침 이슬처럼 해가 떠오르면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가면 쓴 자기 모습이 언제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의 현재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청년이고, 군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림막은 언제 벗겨질지 몰랐다.” 육군 장교로서 입고 있는 군복이 감추고 있는 가난을 그녀가 발견할까 두려워한다. 꾸며진 자아는 결코 안정감을 줄 수 없다. 사랑 얻으려 재물에 집착했지만…자신의 정체성 잃어버린 개츠비 잠깐의 욕망 채우는 물질적 성공…진정한 삶의 행복 이룰 수 없어 결국 데이지와의 사랑에서 개츠비는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나중에 부자가 된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 톰에게 “당신과 결혼한 건 오직 내가 가난하고 기다리기 힘들어서였어”라고 소리친다. 자신을 버리고 같은 상류층에 속한 톰을 선택한 그녀의 판단은 남성으로서 개츠비의 존재 가치를 가난과 연결한 것이다.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서 그는 가난한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전적으로 돈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침내 막대한 부를 이루고 돌아온 개츠비는 잃어버린 자존감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어도, 자존감을 내적 가치나 도덕적 온전성에 두지 않고, 물질주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자아를 형성한다. 그는 데이지와 다른 사람들의 존중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부를 과시해야 한다. 고급스러운 저택을 자랑하거나, 화려한 파티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인정받아야 한다. 자존감은 끊임없는 자랑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랑이 멈춘 순간 자존감도 멈추어 버리는 약함이 있다. 심지어 주인공은 “사랑하는 데이지의 눈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재평가한다.” 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데이지가 감동을 받으면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것이라도 의미가 없다. 주인공의 자존감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그녀의 반응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라캉의 모방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여 자신의 욕망으로 만든다. 부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은 바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자신의 부에 대해서 데이지가 만족할 때, 자신도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그 만족은 데이지의 만족인 것이다. 욕망은 개츠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지로부터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데이지의 욕망을 모방한 개츠비의 욕망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채울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은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이지,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인들이 자존감과 행복을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서 찾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비판한다. 「찬미받으소서」에서 그는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라고 언급한다.(204항) 소비주의는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하고 더 단단한 내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물질적인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중요하지만,” 결코 “삶에 충만함을 주지 못한다.”(2022년 9월 18일 삼종기도 훈화) 루카복음 12장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저장된 재물이 안정되고 지속적인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물질적 성공이 자존감과 동일시될 때, 도덕적 양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소비 만능주의가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하찮은 쾌락을 열병처럼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무뎌진 양심이다.”(「복음의 기쁨」 2항) 물질과 소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경제적 성공만이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주인공은 약국에서의 불법 주류 사업을 통하여 부를 획득하였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며 자신의 과거까지 위조한다. 데이지는 뺑소니로 남편의 애인을 죽였지만, 자신이 “저지른 엉망진창을 개츠비가 치우도록 만들고,” 자신과 남편은 “자기들의 돈과 그 거대한 무책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결국 데이지는 개츠비라는 고유한 한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물질적 화려함에 이끌렸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자 그녀는 울먹이며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셔츠들이에요. 슬퍼져요,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찼다.” 주인공의 파티에 왔던 수많은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장례식에는 “경찰과 사진사들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인간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물건처럼, 더 이상 화려한 파티를 열어줄 수 없는 개츠비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찬미받으소서」 중 ‘버리는 문화’(20~22항) 참조)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만 가면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을 보면서, 1920년대 아메리칸드림이 경제적 풍요로움 뿐만 아니라, 왜 혼란과 불확실성, 불만과 허무함을 동시에 가져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3면

[말씀의 우물] 성결법이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 나오는 ‘성결법’에 대해 잠시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성결법전으로도 일컫는 성결법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주 하느님의 거룩하심(聖性, 성성)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 성결법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성화(聖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성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짐승을 잡을 때도, 그것을 제물로 바칠 때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피든 피를 먹으면, 나는 그 피를 먹은 자에게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 내겠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0-11) 당시에는 피를 모든 생물체의 생명(혼)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를 먹거나 함부로 다루면 생명체의 주인이신 하느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가 되므로, 이는 곧 그분께 불경죄를 짓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부부관계가 아닌 성관계나,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짐승과 교접하는 일체 행위는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하나라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레위 18,29) 레위기는 이어서 주 하느님과 부모 공경은 물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레위 19,2-3) 아주 큰 죄에 대한 형벌 규정을 봅니다. “제 자식을 몰록에게 바치면,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2) 사제직의 성스러움, 품위 유지에 관한 규정을 봅니다. “사제들은 머리를 밀거나, 수염 끝을 깎거나,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 자기들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사제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이다.”(레위 21,5-7) 제물을 성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일러,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봉헌하는 거룩한 예물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여라.”(레위 22,2) 안식일과 축일 규정(레위기 23장 참조), 성소(聖所)와 그 유지 지침(24장)에 이어서 안식일과 희년 규정이 뒤따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11) 옛날 이스라엘의 성결법은 주님께 성스럽게 다가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 절정을 우리는 레위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에 거행하는 속죄 예식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해에 한 번씩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너희의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라.”(레위 16,3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그 기본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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