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 축일은 얼마나 많을까?

누가 “성모님의 축일이 언제냐”고 물으면 언제라고 답을 할까요? 많은 분들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례력을 잘 살펴보신 분이라면 ‘어? 성모님 축일이 또 있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몇 번일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전례력」을 꺼내서 2024년에 성모님에 관련된 축일이 몇 번인지 하나씩 세어봤습니다. 축일은 크게 대축일, 축일, 기념일로 나뉘는데요. 먼저 성모님을 기념하는 대축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그리고 ‘성모 영보’를 기억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있습니다. 축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있고요. 그리고 기념일들이 11개 있습니다. 이렇게 2024년 전례력에 있는 성모님 축일을 세어보니 16개나 됩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참 많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축일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성모님의 축일이 더 있습니다. 이를테면 올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월 8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2월 11일)들이 전례력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이 축일들이 주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축일과 같은 전례일에는 등급과 순위가 있는데요. 축일과 기념일은 주일과 같은 더 큰 전례일이 같은 날에 겹치면 그 해에는 지내지 않습니다.(「전례력 규범」 60항) 교회는 초기 교회부터 성모님을 공경하며 기념해 왔습니다. 특히 431년 에페소공의회를 통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면서 축일들이 제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에페소공의회가 끝난 후 곧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는 8월 15일에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축일을 거행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은 날을 축일로 삼듯이, 성모님이 승천하신 날을 축일로 삼았던 것이지요. 이후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다양한 축일들이 생겨나 오늘날처럼 많은 성모님의 축일이 생겼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성모님의 축일이 새롭게 제정됐는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18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전례력에서 이렇게 많은 성모님의 축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축일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신비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의 이 연례 주기를 지내는 동안, 거룩한 교회는 당신 아드님의 구원 활동과 풀릴 수 없는 유대로 결합되어 있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한다”면서 “그분 안에서 교회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를 경탄하고 찬양하며, 이를테면 그 지순한 표상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열망하는 모습을 기쁨으로 바라본다”고 가르칩니다.(「전례헌장」 103항)]

[알기 쉬운 미사 전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신경’

정신없이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덥다’와 ‘춥다’로 표현하는 단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참 이쁘다’라는 감탄,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감성에 열린 마음이면 인간 역사에 개입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에 대해 고백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했지요. 신자들은 강론 후에 잠시 침묵을 하면서 막 들은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고 한 목소리로 ‘신앙 고백’(Professio fidei) 곧 ‘신경’(Symbolum)으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합니다. ‘신앙 고백’이 처음 행해진 곳은 ‘미사’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성 치프리아노(+258)가 처음으로 세례 때 행하는 신앙 고백에 ‘상징’을 뜻하는 ‘Symbolum’이라는 용어를 적용합니다. 특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간의 상호 식별과 인정 수단인 ‘Symbolum’을 신앙 고백에 사용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게 하는 ‘상징’이라는 의미이지요. 다양한 신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경 예루살렘의 세례 고백문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초엽 히폴리투스 교부가 저술한 「사도전승」에 수록된 세례 고백문입니다. 미사 중에 신앙 고백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며, 안티오키아 교회가 가장 먼저 도입하였고, 6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의 톨레도 시노드(589년)를 시작으로 하여 갈리아 등 서방에도 번져갔습니다. 당시 교회가 미사에 신경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도리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경의 위치가 현재와 같이 복음 후로 변경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으며, 1014년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서는 신경이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두 신경, 곧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을 바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예루살렘에서 사용하던 세례 신앙 고백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신경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거쳐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에서 발달했으며, 3세기경에 이미 기본 골격이 형성됐습니다. ‘사도 신경’이라는 명칭은 성 암브로시오가 393년에 성 시리치오 교황(재위 384~399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신경’은 주일과 대축일 및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미사 때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신경을 바칠 때, 구원의 시작인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구절에서 깊은 절을 하여 육화의 신비와 파스카 신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5000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라고 묻는 군중처럼, 많은 신자들 경우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시며, ‘먼저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답하십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0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믿음과 용기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칼렙

1950년,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에서 아군은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처음으로 승리하면서 자신감과 사기를 되찾는다. 작은 지역의 전투였지만 전쟁 후반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 양평면 지평리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다. 미군 23연대 전투단이 지평리를 사수했다. 사흘 동안 7000명이 안 되는 병사들이 중공군 10만여 명을 상대로 포위된 채 3일 동안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대대의 몽클레르 중령 휘하에 한국군 180여 명도 참여했다. 특히 환갑에 가까웠던 몽클레르 중령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전장을 오가며 지휘했다. 꽹과리, 북을 치며 공격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은 칠흑 같은 밤중에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 상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 한국군 병사가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프랑스 병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손을 얹어 안심시켰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마치 큰 형님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라는 신호 같았다. 전투 중에도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사기를 북돋웠다 한다. (이정환 저 「지평리를 사수하라」에서 발췌) 어느 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사람들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공정하게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뽑아 가나안땅을 수색하게 했다.(민수기 13장 참조) 수색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사실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다. 12명의 수색대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40일 만에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탐한 사실을 알리는데 대원들의 의견이 서로 갈렸다. 일부는 강한 부족이 자리 잡고 있어 전쟁을 치르면 크게 패배할 것이라 미리 패배를 예상했다.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사람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든 것이다. 그때 유다 지파를 대표해 뽑혔던 칼렙이 나서며 이스라엘이 꼭 승리할 것이라 장담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론이 갈라지면서 갈팡질팡했다. 심지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팽배해졌다. 그때 옷을 찢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가나안 정복을 호소했던 이들이 여호수아와 칼렙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이 선조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 승리할 수 있다고 두 사람은 확신했다. 지도자는 늘 고독하게 결단해야 하고 결과와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칼렙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격은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평화 때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의 역량이 잘 나타난다. 칼렙의 승리를 확신했던 근거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칼렙은 노령에도 계속 전의를 불태우는 역전의 용사였다. 여호수아에겐 칼렙과 같은 충직하고 용기 있는 전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능력 있는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부하들의 사기와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05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5-0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피엑스(PX)’가 있다?

형제님들이 모이면 하는 군대 이야기 중에 종종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착각하고 일어난 사연입니다. 이등병 시절에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알고 선임병 몰래 성당에 갔다던가, 같은 이유로 천주교 종교행사에 참가했다가 실망했다던가 하는 이야기지요. 피엑스(Post eXchange)는 군대에 있는 일종의 매점입니다. ‘어떻게 성당에 피엑스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라며 우스갯소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기호에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떠올리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기다란 P의 기둥 아래에 작은 x모양이 합쳐진 형태의 기호입니다. 힘든 군 생활 중 마음을 달랠 군것질이 간절한 장병들이기에 이 기호를 보고 오해하게 된 것이지요.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일단 이 기호는 ‘피엑스’(PX)라고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엑스피(XP)도 아닙니다. 그리스어 ‘크리스토스’(ⅩΡⅠΣΤΟΣ)의 앞에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기호지요.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기호입니다. 글자라기보다는 기호다보니 ‘그리스도’라 불러도 되고, 사용한 글자대로 읽자면 ‘키’(Ⅹ)와 ‘로’(Ρ)를 합친 것이기에 ‘키로’라 읽을 수 있습니다. ‘키로 십자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합친 기호를 모노그램이라 하는데요. 특별히 ‘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모노그램을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이라 합니다. 크리스토그램에는 ‘키로’ 외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IHS’ 혹은 ‘IHC’는 예수(ΙΗΣΟΥΣ)의 그리스어 표기의 첫 3글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시그마(Σ)가 발음을 따른 S와 모양을 따른 C로 변형된 것이지요. 그리고 ‘IC XC’는 이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그리스어 ‘예수 그리스도’(ΙΗΣΟΥΣ ⅩΡⅠΣΤΟΣ)의 약자입니다. 이콘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동방교회에서 널리 쓰인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예언자,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공경하는 고유한 칭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임금이요, 사제이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자 메시아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신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어딘가에서 크리스토그램을 발견하셨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4-04-28

[알기 쉬운 미사 전례] 파스카 초의 상징

제단 위에서 빛을 밝히는 파스카 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설악산을 보좌 신부님과 선배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서 없어진 길을 헤치며 오르다가 해가 떨어지며 어두워지는 즈음에 만난 ‘산장의 불빛’이 파스카 초 촛불에 오버랩됩니다.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만난 희망의 빛이었지요. 예전에는 ‘파스카 초’를 ‘부활 초’라고 했었는데, 현재 전례서에서는 ‘파스카 초’라고 합니다. 이유는 라틴어 ‘Cereus paschalis’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파스카 신비에서 하나의 사건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전체를 드러내는 초의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파스카 초의 유래는 어떤가요? 이 초는 파스카 성야를 많은 횃불로 밝히던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크기의 초로 파스카 성야 동안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빛을 밝히던 로마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축복하는 관습은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바실리카에서만 국한된 관습이었으며, 5세기까지는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례에서 파스카 초는 단 하나의 큰 초로 제한했으며, 갈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상징성을 지닌 우의적인 요소들로 초는 장식됐습니다. 그 요소들로써 다섯 개의 향 덩이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와 당해 연도는 자유재량으로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거룩한 밤인 파스카 성야에 봉사자들은 성당 앞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주례자는 그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에 옮겨 붙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 파스카 초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끕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밤새 앞장서 이끄시며 자유를 향해 밝혀주셨던 불기둥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3,21 참조) 다른 한편으로 파스카 초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의 불꽃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불꽃은 돌무덤의 어둠에서 부활하시어 걸어 나오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파스카 초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스카 초를 선두로 제대를 향해 들어가는 행렬은 세 차례에 걸쳐 멈추어 서고, 그때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은 다음, 빛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독서대에서 노래합니다. 곧 파스카 초를 옆에 놓은 독서대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전례 공간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에 독서대 옆이나 제단에 마련된 촛대에 놓여있는 파스카 초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후에는 성당에 세례대가 있으면 그 옆에 둡니다. 세례식에서 세례자에게 촛불을 켜줄 때, 파스카 초에서 불을 당겨주고, 장례미사 때에는 파스카 초를 고인의 머리맡에 놓는 까닭은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인 모두가 세상에서 ‘파스카 초’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길 기원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8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전해주던 앞의 주일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저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성경 구절은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입니다. 하느님이 ‘농부’라니,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저에게 농부는 푸근한 인상, 그러나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땀 흘리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이 뭘 잘못하나를 감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좋은 포도나무들이 자라도록 땀 흘리며 애쓰는 농부라고 예수님은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밭에는 돌이 있고, 잡초도 있고, 해충들도 있기에 농부는 바쁩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거름도 주고, 비바람에도 대비하고 때론 가뭄이 들 때 물도 대어주어야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에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바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도록 온 인류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주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다 더 사랑하시는데 온 힘을 다 하실테니까요. 아니,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믿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가장 흡족해하는 포도나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따뜻한 햇빛, 적절한 비, 땅이 주는 영양분이 다 필요하듯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 은총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섬기는 삶 모두를 양분으로 해서 살아가셨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살아가는 내내 맺고 나누셨기에 그렇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장 건강한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내 인생이 별 관계가 없는데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인생은 나 혼자 알아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인생의 진실을 물으며, 그분의 삶에서 구원의 신비를 발견하고, 따라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아무 걱정도 없이 알아서 잘 살아가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한계와 어려움을 온전히 겪으면서도 인간의 삶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신 ‘나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내 삶의 근원적 지혜와 힘을 얻고 그분의 제자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은 너무 이상적이기에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이 쉽지 않고 치열하다고 느낄수록, 나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인생을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어떻게 인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배우도록 초대받은 것이 축복 아닐까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는 내 경험, 내 생각, 내 판단이 옳다고 믿고 그것들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 그분이 삶에서 가장 중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 역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맺게 해주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필요한 은총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고,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아버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과 연결지어 다시 묵상해 봅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사랑의 길이야말로 죽음을 이기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 길임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의 길을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사업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은 포도나무가 건강히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고, 건강한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달린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축복하십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4-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힘과 용기의 지도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시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전사로서 용맹하게 가나안의 각지에서 계속 싸우며 결국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찰하고 전략을 세워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세지웅(希世之雄)이란 사자성어는 난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보면, 때에 맞는 지도자가 나타나 활약하는 것은 그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는 큰 행운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지도자라고 하면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사(戰士)형 리더였다. 이미 오래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여호수아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한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실제로 국가를 세운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모세는 그를 무척 신임하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다.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많은 공을 쌓았고 실전 경험을 터득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측근으로 이집트 탈출을 하면서 광야 생활 내내 큰 공로를 세운 충직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 땅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광야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모세에 대해 반란이라도 할 기세였다. 게다가 이들이 맞이한 가나안에는 만만하지 않은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가나안에 있는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전투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필패이다. 이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 들어갈 수 있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하고 이집트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환경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이 제대로 먹힐리 없었다. 오히려 전투를 독려하는 여호수아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에서 포기해 버리고 모험에 나서지 않는 지도자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여호수아의 용기 있는 행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는 무엇보다 힘과 용기를 가지라고 하며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에서는 맨 앞장서서 싸우는 힘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스카풀라는 원래 옷이다?

스카풀라를 아시나요? 성물방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성모님 그림이나 글귀가 적힌 두 개의 작은 천이 긴 끈으로 연결된 형태의 물건입니다. 스카풀라는 생김새 때문에 ‘목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카풀라는 목걸이가 아니라 옷입니다.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꼭 앞치마 비슷하게 몸 앞뒤로 길게 걸쳐 입고 있는 옷을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옷이 바로 스카풀라입니다. 스카풀라(scapula)는 라틴어로 ‘어깨’라는 뜻입니다. 어깨너비의 천을 몸 앞뒤로 길게 늘어뜨려 입는 소매 없는 겉옷이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스카풀라는 초기에는 수도자들이 일할 때 수도복 위에 걸쳐 입는 옷이었는데요. 점차 어깨에 지는 십자가와 멍에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평신도들도 13세기경부터 스카풀라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6세기부터 점차 간소화되고 작아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스카풀라의 모습이 됐습니다. 특별히 스카풀라 하면 ‘성모님’이 떠오릅니다. 성물방에서 파는 스카풀라들도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곤 하지요. 스카풀라와 성모신심이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된 것은 1251년 가르멜수도회 성 시몬 스톡 신부님께 성모님이 발현하시면서부터입니다. 성모님은 스톡 신부님께 갈색 스카풀라를 보여 주면서 “이 스카풀라를 죽는 순간까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특권을 누릴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첫 번째 토요일에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톡 신부님께 나타난 성모님만 스카풀라를 언급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님은 묵주와 함께 스카풀라를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파티마 성모님을 목격한 가경자 루치아 산토스 수녀님은 이것이 “모든 사람이 스카풀라를 착용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라면서 “스카풀라는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봉헌의 표시이며 스카풀라와 묵주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보통 스카풀라라고 하면 갈색을 떠올립니다. 수도복에서 온 것이니 갈색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녹색 스카풀라도 있습니다. 1840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쥐스틴 비스케뷔뤼(Justine Bisqueyburu) 수녀님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녹색 스카풀라를 보급할 것을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지니고 (녹색)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신앙이 없는 이들과 냉담한 이들을 회개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카풀라는 언제까지나 옷일 뿐입니다. 스카풀라가 아니라 스카풀라를 착용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겠지요. 가르멜 수도회 윤주현(베네딕토) 신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착용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부적처럼 여긴다면 왜곡된 신심에 빠질 수 있다”면서 “성모님의 마음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스카풀라를 통해 늘 상기시키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4-21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4-21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