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처음 네 개의 봉인이 열리다(묵시 6,1-8)

봉인이 열린다. 숨겨진 진실이 혹은 감추어진 계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 시작은 ‘오너라’(Ἔρχου)라는 명령형의 동사다.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Henry Barclay Swete)와 같은 고전적 성서학자들은 ‘오너라’라는 동사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믿는 이들의 외침을 읽어내곤 했다. 요한묵시록은 ‘오다’라는 동사를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수차례 언급하기도 한다.(1,4.7.8; 2,5.16; 3,11; 4,8; 16,15 참조) 요한묵시록 끝자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예수님께 ‘오시라’고 외치기도 한다.(22,17 참조) ‘오다’라는 동사를 두고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도드라진다. ‘오너라’의 외침이 들리는 처음 네 개의 봉인은 어쩌면 예수님을 향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봉인이 열리면서 네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타나는 병거 넉 대와 말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네 마리 말들로 인해 벌어지는 재앙들 때문에 탈출기의 열 가지 재앙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아니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종말’의 징표로 이해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석이 네 마리 말들로 표현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드러내신다는 해석으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첫 번째 말의 색깔이 하얗다는 데 있다. 대개 천상의 기쁨이나 영광을 드러내는 하얀색이 다른 말들의 색깔들, 그러니까 붉고 검고 푸르스름한 색깔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하얀색의 말을 탄 이는 ‘활’을 들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이야기할 때, 활을 등장시킨다.(신명 32,41-42; 하바 3,8-9; 에제 5,16-17) 활이라는 형상은 인간 세상사 그 어떤 대목에서도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이 가득하다는, 그리하여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적하지 못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서 마지막 시대, 마지막 승리자로서 백마 탄 기사, 곧 예수님을 소개한다. 6장의 백마 탄 기사는 19장의 예수님을 미리 알리는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린양이 여는 봉인의 시작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계시의 첫 자리로, 그 자리에서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을 갖추도록 독자를 이끈다. 첫 번째 말의 색이 하얗다는 건, 우리가 누릴 천상의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어떻든, 그 세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든, 우리에게 유일한 승리자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꽃길만이 보장된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다. 어린양이 두 번째 봉인을 뜯고 나서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말 위에 탄 기사는 큰 칼을 들고 있다. ‘칼’의 형상은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이사 27,1; 에녹 90,19.34; 91,12) 유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칼’을 통해 메시아 시대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느꼈을 또 다른 마지막 시대의 징표를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서 찾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시무시한 로마의 군사력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비로소 마지막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의 징표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살해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일로 파멸이 아닌 메시아 구원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신앙의 해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함으로 맞닥뜨리는 눈물겨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다짐일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삶의 애환과 고통은 배가된다. 세 번째 말은 기근과 결핍을 가리키는 검은 색을 지녔고 그 말 위의 기사는 저울을 가지고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묵시 6,6)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깝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기사의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는데, 그는 포도밭을 갈아엎어 보리를 심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만큼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고, 요한묵시록은 배고픈 시대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고민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다의 전통은 마지막 메시아 시대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빵과 포도주의 결핍을 이야기한다.(요엘 1,10-11 참조) 현실이 결핍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희망과 그 신앙은 결코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삶을 직시하게 독자들을 이끌며, 그 속에서 각자의 신앙 자세를 다시금 다듬어 볼 여지를 살피게 한다. 네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말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에제키엘서 5장 12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대목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께 불충하는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킨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좌절과 포기의 삶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가 네 번째 봉인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한 경고의 메시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하고 싶은 요한묵시록의 의도는 명확하다. 어린양이 봉인을 열면서 보여주고자 한 하느님의 계시는 결코 인간 세상의 부조리나 아픔을 외면한 유토피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늘 마주하고 살아가는 인간 삶 그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전하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사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의 것이고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꿈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이 삶을 살아내기를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것이다. ‘오너라’라는 그 외침을 향한 응답은 이 삶을 온전히, 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의 몫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하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고통의 길’입니다. 지금은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끄러운 시장이 됐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골고타까지 가다 보면, 순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상인과 행인들의 눈길이 꽂혀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형틀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행렬을 많은 이들이 구경하였듯이 말입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구경하며,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고 혀를 찼을 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골고타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형 집행이 이루어졌고, ‘해골터’라는 지명 뜻처럼 무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종류로서, 베드로도 이 형벌이 두려워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며 세 차례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은 고통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당일 운명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이 그런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점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마르 15,38) 광경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전은 예부터 주님의 현존이 상징적으로 자리하신 곳으로서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전이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곳임을 암시해 주는 실마리는 성경에 여럿 존재합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원조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곳 모두 죄 없는 상태,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죄를 지어 합당한 정결함을 잃어서였고, 옛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과 9장의 실로암 못이 예수님 시대 사용한 대표적인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셋째,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이 불 칼과 함께 지켰고, 성전에는 지성소의 계약 궤에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지켰듯이, 지성소 또한 커룹이 자리해 있음으로써 일반 백성의 접근을 상징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곳의 공통점은 ‘기혼’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납니다. 기혼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 가운데 하나이자(창세 2,13) 예루살렘 성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옛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성전이 봉헌돼 있었고, 기혼 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혼강이 흘러나왔다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옛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전에서 에덴동산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2.29.33)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그 금지된 정원, 곧 에덴동산을 상징한 지성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비가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그분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지만, 이방인 백인대장은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만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준 성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덴동산을 상징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성전이 되셨고(요한 2,20-21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그 이후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됐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임산부를 2명으로 간주하는 등 비상식적인 세금 징수로 유다인들은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라고 부르곤 했다. 세리도 돈을 많이 벌고 호의호식했지만,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인간에겐 돈과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다. 명예와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인간 모두의 본성이다. 마태오도 적당히 법을 이용하여 재물을 많이 축적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나 지인보다 돈으로 얽혀있는 인간적인 만남이 많았을 것이다. 마태오는 주변 유다인이 자신을 도둑과 개처럼 멸시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전혀 새로운 만남에 감동한 마태오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사도들의 명단 속에는 항시 마태오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오 복음서만이 세리 출신의 제자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10,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쓰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팔레스티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타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교리서와 같은 책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 선교의 대상이 되는 유다 세계와 유다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집필연대는 내적 특성을 고려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에 결정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에서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해 날개 달린 사람, 다시 말해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에 대해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원과 경리,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기도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마음을 드러내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관찰하고 악한 생각과 선한 생각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악한 생각일 경우 시초부터 몰아내야 뿌리를 내려 발전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영적 스승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속 생각을 모두 밝히는 것이다. 수도승 생활 초심자에게 ‘마음의 개방’은 매우 중요했다. 이 주제는 지난 호의 ‘마음을 돌봐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마음 돌보기의 핵심 내용인 악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먼저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것은 초기 수도승 생활의 본질적 수행이었다. 영적 스승의 역할 초심자는 영적 수행과 영적 투쟁, 기도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수행과 관련해서 영적 스승의 조언과 도움과 격려를 받아야 했다. 영적 스승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즉 숱한 실패와 잘못,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마침내 분별력의 은사를 얻은 사람이다. ‘분별’(diakrisis)이란 ‘영들에 대한 식별’을 뜻했다. 수도승을 공격하는 생각이 악령에게서 온 것인지, 천사나 성령에게서 온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분별력을 얻은 사람만이 영적 투쟁 중인 다른 사람을 안내할 수 있다. 초심자에게는 열정만 있고 이런 분별력이 없기에 이 길을 먼저 걸어간 경험 있는 원로를 안내자로 삼고 그에게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제자는 영적 스승에게 마음속 생각을 남김없이 드러내야 스승이 그 생각들을 식별해서 적절한 처방을 내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제자 역시 점차 분별력을 얻고 영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로써 제자는 또 다른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누구도 남을 올바로 지도할 수도 없고 감히 지도해서도 안 된다. 분별력이 없는 안내자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순종하며 마음속 생각 남김없이 드러내야 교만은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마음 개방은 겸손 실천하는 수행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 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영적 스승에게 굳이 이처럼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는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령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초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악령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경험자의 조언과 도움이 없다면 초심자는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익명의 압바는 악한 생각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그것들을 감추지 말고, 즉시 영적 사부에게 이야기하라고 권고한다. 악한 생각은 구멍에서 나온 뱀과 같아서 드러나면 멀리 달아나지만, 감추면 감출수록 더 강해지고 많아져 나무 속에 있는 구더기처럼 우리 마음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즉시 치유되지만, 감추는 사람은 교만으로 병이 든다고 한다. 카시아누스는 악습과 악령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데, 곧 연로하고 경험 많은 영적 사부에게 자기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다.(규정집 4,9.37) 그 이점에 대해 안토니우스 압바는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죄짓기를 멈추고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안토니우스 생애 55,11-12) 수도승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기 마음을 영적 사부에게 개방하지 않고 자신 안에 가두는 것이다. 반대로 스승에게 마음을 연 제자는 스승의 기도와 조언으로 온갖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자기 뜻의 포기인 순종 제자가 스승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자기 뜻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모든 죄가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좋아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영적 사부에게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한다. 포이멘 압바는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에 가로놓인 황동 벽이자 걸림돌입니다. 인간은 의지를 포기할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을 뛰어넘습니다'(시편 18,3) 의지가 올바른 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인간은 참된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54) 초심자는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자기 마음을 갉아먹는 생각을 감추지 말고, 그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영적 사부에게 드러내라고 배운다. 그리고 그 생각을 분별하기 위해 자기 개인의 의견을 신뢰하지 말고, 원로가 검토한 후 나쁘거나 좋다고 판단한 것을 믿도록 배운다.(규정집 4,9) 수도승 생활 초기에는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이 원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동굴이나 암자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때로 비참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어떤 이들은 금욕 수행으로 자기 몸을 해치지만, 그들은 식별력이 부족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안토니우스 8) 이처럼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젊은 수도승은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욕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스스로 남의 스승이 되어 지도하려는 유혹은 상존한다. 이런 유혹은 교만에서 나오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겸손으로 이끄는 순종 자기 뜻을 포기하는 순종은 우리를 모든 덕의 정점인 겸손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마음속 모든 생각을 드러내고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따르는 것은 겸손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이 수행은 결국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교만이다.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와 분별력이 아니라, 얄팍하고 피상적인 지식으로 섣불리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판단을 무시하고 자기 뜻과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자세는 모두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마음을 드러내라!”는 이 권고는 영성생활에서 경험 있는 안내자의 중요성, 분별력의 중요성, 마음의 개방성, 남의 조언을 청하고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 자기 뜻을 내려놓는 자유로움 등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육의 부활

너무나 특별하고 생명력 넘치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는 봄의 향연을 선물 받았다! 얼마 전 우리는 교리서2부 ‘마음의 구원’편을 시작했지만 잠시 멈추고, 전례 시기가 주는 은총과 함께 주님의 부활에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려 한다. ‘육의 부활’편을 6회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다시 ‘마음의 구원’편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야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루카 24,30-31 참조)는 말씀의 의미가 ‘마음의 구원’편에 강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쓴 최초 원고를 보면, ‘육의 부활’ 교리는 3장 1편 ‘육의 부활’(64과~72과), 3장 2편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73과~86과)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동정과 독신의 삶이 현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얻은 우리의 삶은 내 안, 즉 마음에서 그분의 현존을 찾는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의 만남을 전제한 죽음이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결실인 대사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 성야 전례에서 촛불을 들고 세례 때 한 신앙 서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결의론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벗어나 복음의 에토스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육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가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공관복음(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카 20,27-40) 모두가 이를 전하지만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단어의 의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 먼저 복음 간의 다름을 분석한 후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면, 육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야훼를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언어나 풍습, 민족성에 따라 당파가 지닌 종교적 색깔은 조금씩 달랐다. 사두가이파도 그중 하나로 종교적으론 보수적이었으며,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육의 부활, 천사, 영 등 이런 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도 23,8 참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또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고,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믿음은 부질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장 권위 있다 자부하며 성전에서 가르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가 그 하나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마르 12,26)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또 하나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탈출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탈출 3,2-6) 만난 하느님과의 대화를 불러오면서 부활에 관한 다른 차원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했고,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는 큰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부르셨다. 죽은 라자로가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들었을까? 우리가 부활에서 풀어야 할 질문들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권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부’도 ‘명예’도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재벌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재물을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재벌이야 자신에게 남는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치더라도, 여유가 없는 이들조차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하며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들곤 한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자들 일부는 자신의 지위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권력을 잃고 난 다음에도 자신과 가족들이 평생 호사를 누릴 만한 재물을 어렵지 않게 축적하기도 한다. 이런 부정을 저지르고도 대형 로펌 등을 활용하여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벗어나거나 ‘사면’이란 이름으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해되기 힘든 현상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권력이야말로 인생의 ‘최종 목적’, 즉 행복의 가장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선과 악 모두에 관련된 권력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논박되어야 할 이론 중에 하나로, “행복은 완전한 선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완전한 선이며 이런 것은 권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는 주장을 소개한다.(I-II,2,4,obj.2)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치는 목표가 불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타락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토마스는 ‘권력은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I-II,2,4) 권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만일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면 최악이므로 권력은 선과 악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이다.(ibid.,ad2) 우리는 우리나라의 길지 않은 민주주의의 역사 동안에, 심지어 최근에 벌어진 계엄 사태를 통해서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쉽게 공동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해 왔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해 왔다. 심지어 「사피엔스」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민주주의 사회에선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권력을 누릴 수 있기에 인물이나 정당이 권력을 돌려주기 싫으면 빈번히 법을 파괴하곤 한다”고 말했다. 권력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불법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다 보면 권력이 선으로 기울기보다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악으로 기우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권력의 무상함을 직접 보여준 보에티우스 추상적으로 들리는 성 토마스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예가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권력을 가져봤고, 이를 모함으로 허무하게 빼앗긴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자신의 삶을 통해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격’ 개념의 정의로 유명한 보에티우스는 로마 최고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아테네 유학 등을 통해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는 그를 발탁해 가장 큰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려 하자, 반대세력이 ‘보에티우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했다’고 모함하며 그를 반란죄 혐의로 고발했다. 보에티우스는 제대로 변론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그 책 안에서 그는 자신을 신뢰하는 척했다가 권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왕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즉, 권력의 허망함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근심의 괴로움과 공포의 아픔도 물리치지 못하는 이 권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신하들을 두렵게 만들면서도 신하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신하들을 두려워하여 항상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그리하여 그의 권력에 대한 권리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을 너는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철학의 위안」, 제3권, 산문5) 최고선에 따라야 하는 권력 성 토마스도 권력과 행복이 관련성이 있다면, 어떤 행복은 권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권력을 덕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력을 지닌 자는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시민들의 덕스러운 삶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II-II,47,10)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이렇게 권력이란 최종 목적이라기보다는 올바로 사용되어야 하는 ‘행위의 시원’(principium)이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성 토마스는 특히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진정한 권력을 인간이 자기 스스로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 이웃 위에 군림하고 예속시키려는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여기서 ‘원죄’의 본질이 어떤 계명의 위반이나 육체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 독립과 자율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소유하려 함에 있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 없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고자 하는 ‘무질서한 의지’(disordinata voluntas)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권력을 탐하려는 인간의 욕심이야말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죄로 떨어지기 쉽고, 이는 불행을 예약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행복과 연관해서 살펴본 재물, 명예나 명성, 권력 등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인간이 이성과 의지를 통해 행복에 이를 채비를 갖추기 때문에 그의 행복은 외부적 원인에 좌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우리 자신을 이루는 육체와 영혼에게 좋은 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회부터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1면

[말씀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40) 이 증언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구세주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복음은 그저 역사 속의 한 의인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넘어서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부활 사건을 명백히 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수식어 등으로 독자를 현혹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체험하고 목격한 것을 담백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데, 때로는 비유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예고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요나의 표징에 빗대어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40)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당신이 고난을 받아 죽으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세 차례나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모든 예고를 제대로 알아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것을 믿게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 먼저 예수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결국 그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뵈온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을 꾸짖으시고(마르 16,11-14 참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믿게 하시려고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고 음식을 함께 드셨습니다. 복음은 이렇듯 솔직하게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경험을 통해,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이들을 독려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을 믿고 있습니까? 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애초에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는 하였나요? 믿음이 가벼운 선택일 리는 없지만,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던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의 신자들과 그 무게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살아가려 한다면 우리도 목숨을 걸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새 생명을 믿어야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이들에게 성공적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박해 시대에 기꺼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언변이나 논리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헌신으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력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이 되었고 부활의 확증이 되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을 믿기 쉽게 가공해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것을 믿어서 목숨을 바치는 삶으로써 믿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같은 믿음으로 이어지다 이 땅에서도 순교자들을 내었고 그분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도 주어진 것입니다.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올해에도 우리는 서로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해 받은 이 믿음을 어떻게 또 전할 수 있을까요?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사도들과 교회를 도와주신 성령께서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욕망,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의 근본적 변화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형태를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라 했다.(2,16-17 참조) 이 욕망들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 즉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히며 인간에 관한 진리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그리고 사람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2,23) 외치며 서로를 보았던 신적 시야가 ‘음욕을 품고’ 바라봄으로써 그를 소유 혹은 사용하려는 대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자신들의 실존 뿌리인 알몸을 부정하고 숨었지만 그분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그분을 부정한다 해도 나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알몸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부끄러움과 연관되는데, 사람이 그 의미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자.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3,7)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부끄러움이 두려움으로 변화했다. 존재 자체를 뒤흔든 ‘두려움’, 감정으로 느낀 이 두려움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것을 덮으려 했을까? “타락의 증상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 안에서 숙고되어야 하고, 부끄러움은 그 순간 가장 심오한 차원을 건드립니다.”(27과 1항)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인 인간 본성은 선물로서 스스로 내어줌인데 그것을 덮겠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없는 내가 되겠다는 것이고, 나 또한 너에게 선물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먼저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물었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너’라는 존재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알몸이 두려워 숨었다고 말하지만 따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그 사실을 두려움으로 덮어 놓은 부끄러움, 그의 잘못을 일깨운다. 사람의 대답에서 하느님에 대한 앎의 결핍이 드러남을 묵상할 수 있다. 놀랍게도 하느님에 대한 앎이 부족하면 자신에 대한 앎도 부족하고, 앎에 대한 결핍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에서 그 구체성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정확함이 우리를 놀랍게 한다. 육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표현과 깊이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을 지닌 인간 몸의 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선물로 나에게 왔고, 그 선물을 다시 내어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관계의 단절은 곧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앎의 결핍이 인간 정신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욕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깊이 와닿는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6-19)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떠나면 남을 탓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고,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때는 관계 속의 ‘너’에게 참회와 고백을 한다. 그래서 먼지로 돌아가라는 말씀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한 선상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삶과 죽음(묵시 5,6ㄴ-14)

어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양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ἑστηκὸς ὡς ἐσφαγμένον) 어린양이 과연 가능한가. 죽었는데 서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어린양의 모순적 양태성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어린양은 분명 죽었고, 또한 분명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은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 고백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한묵시록은 삶을 죽음의 대척점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가는 자리를 동시에 껴안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여 선명하다. 우리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찬바람을 끝끝내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신앙인 곁에 예수님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 위에 포개져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형상은 단순히 역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놓고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신앙인의 삶과 죽음이 포개져 ‘어린양’의 형상으로 소개된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의 동사들은 어린양을 꾸미는 형용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을 문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남성형 분사다. ‘어린양’(ἀρνίον)은 중성 명사이기에 중성인 명사와 남성인 동사의 결합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다. ‘살해되었다’는 동사가 남성형이라서 몇몇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을 통해 바라보지만, 중성인 어린양에 대한 해석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스파조’(σφάζω)로 쓰여있다.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살해된 어린양을 굳이 예수님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한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 어린양이 중성 명사라면 굳이 남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을 언급하기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님의 죽음에 신앙의 증거로 함께 한 모든 순교자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사실관계에 머물러 성경을 읽다 보면 무리수가 발생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앙의 해석과 상상을 가미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역사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죽음마저 우리에겐 생명의 선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자유를 어린양을 통해 마련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상상을 펼쳐나가는 요한묵시록 5장은 6절 후반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권능을 가리키는 뿔과 지혜를 암시하는 눈을 각각 일곱 개씩 가진 어린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친교의 상징체로 소개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공간은 천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눈은 땅으로 파견되어 하늘과 땅이 어린양의 형상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이러한 친교와 통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주님의 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너의 피로’(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어린양’은 지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에게 ‘너’라는 친근한 이웃이 된다.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모든 이’가 진정으로 ‘모두’, 어린 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으로 어린양을 통한 신앙의 상상은 마무리된다. 천상의 주님이 지상의 ‘너’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너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한다.(1베드 1,18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거저 우리 사람을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 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친교의 원동력은 끝없이 내려놓고 비워내고 스스로를 대가로 지불하는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 덕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린양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은 실은 죽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죽음이 생명일 수 있는 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 모든 이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을 열어 보이실 어린양은 그러므로 새롭고 신비한 천상의 놀라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살아내는 숱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다시금 살펴보게 할 것이다. 그 일상이 죽음을 향할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겐 천상이요, 생명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천둥의 아들’ 충직한 제자 야고보

세계 어디서나 간호사가 되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물려받자는 뜻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간호사로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발생하여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이 뉴스가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성이 전쟁터에 가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은 없어 나이팅게일의 부모님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부상한 병사들을 돌보았다. 늦은 밤에도 램프를 켜서 들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이런 봉사의 모습은 널리 퍼져나가 세계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녀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이팅게일은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나는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이팅게일은 모든 간호사의 모범이 됐지만 그저 항상 주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국적,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기에 나이팅게일과 같은 소명의식을 가진 의료인들이 더욱 필요하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요한의 형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성격 탓에 예수님께 꾸지람(?)도 들어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과 수의사, 의사, 목수의 수호성인이다.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교회에서는 그를 ‘대(大)야고보’라고 부른다. 그는 동생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1-22 참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스승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랐던 제자였다. 야고보는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에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베리아반도까지도 다녀갔다는 교회전승이 전해진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9세기경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알폰소 국왕은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스페인과 유럽의 신심이 약화되던 시기에 젊은이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순례하는 피정 프로그램이 오늘날의 꾸르실료 신심운동을 탄생시켰다. 현재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의 순례길은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순례지다. 지금도 대성당 안에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순례 끝에 충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야고보 사도를 만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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