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 바르톨로메오

철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했다. 부자나 관리, 유명 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겠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아테네 정부는 청년들을 미혹하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억울해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형을 받아들였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을 같은 인물이라 여긴다. 사도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항상 같이 짝을 이룬다. 실제로 필립보는 나타나엘의 친구였고 나타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참 예언자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란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멈칫한다. 나자렛은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곳이 아닌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자 필립보는 그래도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자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타나엘은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제자가 된다. 그리고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경건한 사람인 바르톨로메오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참다운 이스라엘 사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많이 알수록 새로운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했다. 그는 칼로 가죽이 벗겨지고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칼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성화의 상징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죽었던 진실한 사람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깨어 있어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7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열혈당원이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시몬

독립운동가 중에서 이봉창 의사(1900-1932년)는 처음으로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국인의 용기를 드러낸 인물이다.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일본인의 식민정책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1931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애국선서식과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슬퍼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봉창 의사는 사전답사를 하고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알려지자 특히 중국 신문들은 한국 청년 이봉창이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였다고 대서특필했다. 이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독립투사의 활동을 은연중에 많이 돕게 됐다. 1932년 10월 10일 일본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이봉창 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체포부터 심문, 재판, 심지어 교수형 직전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 열혈당원 시몬(마태 10,4)이 등장한다. 열혈당은 극단적인 유다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모임으로 우상숭배와 배교, 율법적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의로운 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께 헌신한 자들이다. 열혈당원들은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고 로마인들에 대한 세금 납부도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설명해서 대부분은 현대의 테러리스트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적인’ 유다인들에 대해서는 약탈, 살인을 저지르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서기 70년 열혈당은 로마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런데 열혈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시몬은 이집트에서 설교하였다. 시몬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화에서 시몬을 톱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예수님과 열혈당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에 대한 태도 속에 있다. 열혈당은 율법을 어기는 자를 엄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새 율법을 선포하셨다.(루카 6, 27-36 참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 행동의 중심이며 규준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의 모범이었다.(루카 10,30-37 참조)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지만 진정한 사랑과 화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오늘 제1독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양 떼를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명은 아닙니다. 이미 동족에게서 배척받은 과거가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답은 수많은 신학자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있는 나’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어떤 보충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수식어는 단순할수록 좋을 것이고 성서의 다른 부분이나 특히 탈출기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당신의 성향이나 행동 양식 등과 맥락이 맞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탈출기 3장의 하느님 말씀에서 찾아보자면,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장의 곳곳에서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탈출 3,7-10 참조)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니 그런 의미에서 늘 함께 계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8) “(나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3,17) 이 탈출기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시고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사 7,1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는 이름을 그분은 받으셨습니다. 구약에서 ‘있는 나’로 희미하게 계시된 그분이, 신약에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스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함께 있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이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말합니다.(1코린 10,5-6 참조)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살해한 사람들과 사고로 죽은 이들을 언급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배척하여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그가 열매를 맺었는지 찾아와 살펴보고 포도 재배인을 시켜 돌보시는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입니다.(루카 13,6-9 참조)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와 성사를 통하여, 특히 당신의 파스카로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과 우리는 함께 하면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함께 있는 분’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도 서로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도록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참조) 사랑은 함께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기입니다.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고 외면하기 쉬운 때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 하느님의 길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제때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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