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기도를]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존경받아온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부산교구 원로사제)가 4월 27일 선종했다. 향년 89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29일 오전 10시30분 부산 주교좌남천성당에서 교구장 손삼석(요셉)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장지는 양산 하늘공원. 1934년 대구에서 태어난 서 신부는 1960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사제품을 받았다. 1965년 파리 가톨릭대학교 및 1968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76년부터 부산교구 총대리와 메리놀 병원장을 역임했고 1988년부터 서강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부산 사직본당 주임으로 사목한 뒤 2004년 은퇴했다. 서 신부는 국채보상운동 선구자이자 민족운동가인 고(故) 서상돈(아우구스티노, 1850~1913) 선생의 증손자이며, 서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고(故) 서인석(바오로, 1938~2005) 신부와 사촌지간이다. 활발한 저서 활동을 통해 복음과 신앙의 참다운 가치를 추구해온 그는 자기 쇄신과 권위 탈피를 강조하며 한국교회에 큰 울림을 전달했다. 서 신부는 또 지난 2002년 설립된 ‘한국교부학연구회’ 초창기 멤버로서 교부학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했다. 은퇴 후에도 한동안 부산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앙 강좌를 펼쳐 교구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손삼석 주교는 장례미사를 통해 “서 신부님은 뛰어난 학식과 높은 신앙심으로 존경을 받으셨으며, 사제들의 귀감이자 교구의 큰 별이셨다”며 “항상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셨던 신부님께서 이제 주님의 품 안에 편히 쉬시기를 기도드린다”고 애도했다.

2024-05-05

“의사이자 봉사자로서의 삶, 주님께서 이끌어 주셨죠”

“돈 몇 푼 더 받는 것보다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죠. 후배들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만나는 의사가 되길 바라요.” 지난 4월 5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제52회 보건의 날 행사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요셉의원 신완식(요셉·74) 전 의무원장은 소탈한 웃음과 함께 시종일관 겸손했다. 신 전 원장은 지난해 은퇴했지만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여전히 요셉의원으로 진료 봉사를 나오고 있다. 보통은 진료실에 있지만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있으면 직접 방문 진료를 가기도 한다. 그는 표창에 대해 “지금껏 받았던 상에 ‘대통령’상이 없어서 주신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이어 “요셉의원에서 16년째 봉사하는 노고에 대해 좋게 봐줬다고 생각한다”면서 “의사이자 봉사자로서의 삶은 그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감염내과 권위자로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신 전 원장은 정년을 6년 앞둔 2009년 3월 요셉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줄곧 언젠가는 꼭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던 그는 “교수 시절 은퇴한 선배를 찾아뵀는데, 봉사하고 싶어도 몸이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듣고 봉사에도 다 때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요셉의원에서의 생활은 대학병원과 사뭇 달라 적응하기 어려웠다. 신 전 원장은 “일반 병원과 가장 달랐던 건 몸과 마음을 모두 치유해야 하는 ‘전인적 치료’를 한다는 것”이라며 “세상에서 천대와 냉소를 받던 환자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처음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르고 달래며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하자 닫혔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막상 신뢰를 얻자 깨달은 건, 환자들이 마치 겉은 딱딱한 갑옷을 입은 것 같지만 속은 정말 여리다는 것입니다.” 신 전 원장은 “투덜대며 쌀쌀맞게 굴던 어느 할머니께서 다음 진료에는 머리핀까지 꽂고 해맑은 미소를 보였던 때 정말 큰 행복을 느꼈다”고 기억했다. 이런 소소한 행복은 그가 끝까지 봉사하는 의사로 남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신 원장은 “이곳의 많은 환자가 무시당할까 봐 일반 병원 가기를 꺼려했다”며 “여기는 그래도 나를 ‘인간’으로 대한다고 느껴 마음 편히 진료를 받으러 오신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환자를 대하고 있다. 그는 “봉사자들에게서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게 더 많다”며 “다들 시간을 쪼개가며 봉사하러 오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회상했다. 은퇴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옛날 같지 않지만 봉사자들을 보면 얼른 진료하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한다. 신 전 원장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사랑’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다. 그는 “의대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때 항상 왜 의사가 되고 싶은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라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후배들이 먼 훗날 ‘나는 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2024-05-05

“브뤼기에르 주교 알아가면서 우리 신앙 성장할 것”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정이 한 번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 신자들의 발걸음이 중국에 남겨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발자취를 따라 지속돼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조화수(바오로) 회장은 4월 16~21일 5박6일 동안 서울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중국에서 마련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에 참여한 뒤 아쉬움과 기대를 동시에 드러냈다. 이번 순례는 중국 내 미묘한 종교 정책에 의해 본래 순례하기로 정했던 목적지를 방문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속에서 희망도 찾을 수 있었다. “순례를 마치고 받은 소감을 말한다면, 신앙인으로서 모든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주도 하에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중국의 복잡한 종교 상황으로 인해 이번 순례의 중요 순례지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의 ‘시그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순례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암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번 순례를 통해 ‘불쏘시개’를 주신 것 같습니다.” 조 회장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새로운 깨우침을 얻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를 바치다 보면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기 기도문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어떤 성직자인지를 알려주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해 1831년에 임명된 초대 조선교구장이라는 사실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조 회장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한 모범을 보인 사제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홀대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이 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부름 받았을 때 순교까지 각오하고 ‘예’라고 응답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 중국 순례는 앞으로 지속해야 할,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의 예행연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조화수 회장은 “신자들이 한국교회사를 공부할 때 이승훈(베드로)이 첫 세례를 받은 뒤 평신도들의 주도로 한국교회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더라도 초대 조선교구장이 브뤼기에르 주교라는 점과 조선교구 설립 과정을 모른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한국교회의 초석이며 한 축이 된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신앙도 더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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