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 참 아름답죠?”

“우리말이 참 아름답죠?” 10월 12일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제20회 심포지엄 중 황경훈(바오로) 박사가 발표 중 한 말에 수원교구청 강당이 웃음바다가 됐다. 이유인즉 앞서 3번의 발제가 필리핀·대만·인도네시아에서 온 이들의 발표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어가 모국어인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신학 발표는 가뭄의 단비 같았던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외국어는 아무래도 답답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좋지 않은 번역이라면 원문을 보는 것만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번역가의 노고를 치하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이 아무리 좋은들 이를 와 닿지 않게 번역했다면 노벨문학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좋은 번역의 중요성은 비단 노벨문학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 신학도 좋은 번역이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부들이나 성인들의 말씀도, 그리고 2000여 년에 걸쳐 쌓아온 신학연구도 대부분 우리말이 아니다. 언젠가 한 신학자가 유학 당시를 회고하며 “현지인들은 단어만 들어도 쉽게 이해되는 개념을, 우리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고 익혀야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좋은 번역이 있었다면 그도 그런 어려움이 적었을 터다. 위대한 신학 작품들을 좋은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신학계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국가톨릭학술상 본상으로 번역 작품들이 선정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금 나오는 좋은 번역을 딛고 언젠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신학을 하는 것이 더욱 자유로운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2024-10-20

또 하나의 밀알

1994년 2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에서는 한 장학회가 만들어졌다. 엘리사벳장학회로 이름 붙여진 장학회는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이혜경(엘리사벳) 씨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가족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씨의 뜻을 받들어 기금을 출연하자, 본당은 이런 귀한 뜻을 받아들여 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장학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그 장학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꾸준하게 3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오는 사이에 600명에 가까운 청소년들이 장학금으로 학업을 지속하고 사회로 진출할 힘을 얻었다. 장학회 출범 당시 신문사 자료들을 검색하다 보니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생전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던 고인의 마음, 가족 모두 비신자였음에도 이를 교회에 봉헌한 정성을 본당은 명동대성당 역사와 함께 길이 이어지고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한 모습이었다. 이후 본당은 공동체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을 텃밭으로 조용하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장학 활동을 이어온 여정을 보며 밀알 하나가 싹을 잘 틔워서 여러 나이테를 품은 큰 나무로 성장한 느낌을 받았다. 가족들은 그때 성금 전달식에서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에게 나눠진 기금을 통해 죽은 딸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아마도 고인의 넋은 나눔 속에서 매번 새로운 밀알로 뿌려지는 게 아닐까. 장학회 첫 회 기금을 받은 학생들은 이제 장년 세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삶에서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다시 나누는, 그래서 다시 또 다른 밀알이 싹을 틔우는 따뜻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2024-10-13

인공지능의 시대가 왔다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엔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만 하려는 이들과 감정을 배제할 수 없는 인간 사이 갈등은 이 시리즈의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소재다. 인간과 묘하게 비슷하지만 다른 인공지능에 대한 불쾌감도 영화는 잘 그려낸다. 영화에 나오던 인공지능이 이젠 뉴스에 나오고 있다. 미래 기술에 대한 기대 가득한 소식이 아니라 범죄와 관련된 뉴스들이다. 딥페이크, 딥보이스 등 AI 기술이 상용화되기도 전에 범죄에 먼저 이용됐다. ‘AI, 봉사자인가, 지배자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선 가톨릭을 포함한 그리스도교가 AI 기술에 대해 취하는 명확한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가 함께 이 주제에 대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건 고무적이다. 다만 AI 기술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종교가 이에 발맞출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오히려 심할 경우 교회가 AI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이 AI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때부터 그 윤리적 활용에 대해 말해왔다. 교황은 2019년 9월 ‘디지털 시대의 공익’이라는 콘퍼런스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대해 개방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절실하다”고 했다. 최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에서도 교황은 인공지능이 피조물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윤리적 제한’을 둬야 한다고 언급했다. AI 기술이 학문의 차원을 넘어 실무영역으로 다뤄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심포지엄에서 발표자 한창현(모세) 신부가 말했듯 AI와 같은 최첨단 기술을 인간에 이롭게 하는 데에 교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2024-10-06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성서모임을 다녀온 청년이라면 한 번쯤 들으며 감동의 눈물이 고였을 법한 ‘시편 8편-야훼 우리 주여’ 생활 성가가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리노) 주교의 입당과 함께 교구청 지하에 울려 퍼졌다. 9월 7일 수원교구 청년성서모임 25주년 기념 미사가 2024 가을 만남의 잔치와 함께 열렸다. 이는 교구는 달랐지만 창세기에 이어 탈출기 청년성서모임 봉사까지 했던 나에게도 감회가 새로운 행사였다. 미사에 참례한 청년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움직이던 나와 팔이 부딪혀가며 성가와 미사곡마다 열정을 담아 찬양과 율동을 했다. 이들의 열과 성이 담긴 소리와 몸짓을 통해 나는 특히 창세기 연수 때 받았던 은총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주교는 강론에서 성서모임의 시초는 천진암의 강학회였음을, 우리는 이 땅의 순교자들을 본받고 넋을 기려야 함을 강조했다. 이 주교의 강론 이후, 입당 시 불렀던 성가가 그냥 들리지 않았다. ‘주의 이름이 우리나라 온 땅에 자유롭게 가득하기까지’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피와 땀이 어려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보통 한 시간이면 끝나는 미사는 축하식과 기념 촬영 등이 더해져 두 시간을 꽉 채워 마무리됐다. 길다면 긴 두 시간은 높은 밀도로 진하게 연대한 서로와 함께, 미사라는 축제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듯한 영혼의 울림으로 남았다.

2024-09-29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

몸으로 나누는 사람들의 실천은 어째서 물질적인 나눔 이상의 짙은 감동을 자아내는 걸까.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고 꾸준히 헌혈까지 해온 두 군종교구 사제를 인터뷰하면서, 사람이 자기 몸을 이웃에게 나눈다는 건 어떤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육군 화랑본당 주임 박현진(마르코) 신부는 일면식 없는 혈액암 환자를 위해 8월 22일 기꺼이 조혈모세포를 기증했다. 해군 동해본당 주임 이현선(데니스) 신부는 9월 2일 50번째 헌혈을 했다. 두 사제 모두 인터뷰에서 “대가 없는 나눔이 안겨 주는 기쁨을 맛본다면 나눔이 오히려 자신에게 축복임에 눈뜰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크게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기부처럼 안전한 나눔도 괜찮지 않으냐”는 우문에 두 사제는 현답을 돌려줬다. “나눔은 절박한 사람이 찾는 그 절박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언젠가 그마저 줄 수 없게 될 때 후회하지 않도록 나눌 수 있을 때 나눠야 한다”고. 그때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라는 한 성가가 떠올랐다. 돈이 아닌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이라도 좀 줄게”라는 식의 도움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 돈 외에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인간이 인간에게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위로, 조건 없는 포용, 용서…. “헌혈과 조혈모세포 기증은 작은 희생일 뿐”이었다는 두 사제 말대로 우리도 돈이 아닌 사소한 실천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질이 인류를 구원할 핵심 수단이었다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부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안다. 그저 사랑이란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성사 같은 것임을 되새길 따름이다.

2024-09-15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지구가 나아질까?

기후소송 선고가 열렸던 8월 29일 오후 2시. 방청인들로 꽉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십 건의 사건 선고가 이어지고 시계는 어느새 3시를 가리켰다. 아기기후소송 청구인인 9살 한나 양과 12살 제아 양은 어려운 법률 용어가 이어지는 가운데도 지친 기색 없이 재판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윽고 한숨을 삼킨 재판관은 “주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선고했다. 내내 불안한 표정이었던 제아 양은 이내 엄마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재판정 곳곳에서 환호와 함께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간의 마음고생과 간절함이 전해져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손을 놓았을 때, 아이들과 청소년은 함께 힘을 모으면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행동했다. 무모할 것 같던 시작에 몇몇 어른들이 힘을 보탰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었다. 물론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보다 강화된 기후 대책을 수립하고 실질적인 실천이 수반돼야 하지만 국민의 주요 기본권이 ‘환경권’임을 인정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정치나 경제 같은 어른들의 논리가 아닌,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아이들의 순수한 바람이 현실이 된 순간. 생태환경 기사를 쓰면서 내내 흐릿하고 모호했던 목표가 환기됐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과연 지구가 나아질 수 있을까?” 이제 이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하느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편에 서 계시다”라고.

2024-09-08

텀블러 쓴다고 기후가 변하나요?

텀블러 쓰는 게 소용이 있나요? 생태를 위한 실천으로 적어도 텀블러와 손수건 정도는 지니고 다니려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취재원과 차를 마실 때도 텀블러를 꺼내곤 하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텀블러 사용을 응원해 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텀블러 사용에 회의적인 이들도 제법 있다. 정확히는 생태를 위한 실천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다. 문명을 포기하고 살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많은 실천을 다 하고 사느냐, 어차피 개인의 실천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는 식이다. 텀블러 사용만으론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러한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작은 실천이 생태적 회개를 부르고,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사랑의 작은 길을 가고,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모든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했다. 플라스틱·일회용품 줄이기, 물·전기 절약하기, 대중교통 타기, 먹을 만큼만 준비하기 등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이 모든 실천은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작은 몸짓들은 그저 환경운동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기도다. 재앙적인 기후위기가 온다는 지구 온도 1.5℃ 상승 시점이 이제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린다면, 서로 사랑한다면, 희망은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2024-09-01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너무 조용히 지나가는 것 같다.’ 8월 16일 서울대교구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콘솔레이션홀에서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10주년 특별미사를 취재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시복식 10주년이라는 큰 의미에 비해 미사 외에는 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간 듯하다. 거기다 미사 장소인 콘솔레이션홀에는 빈자리가 눈에 많이 띄어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124위 시복식을 취재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복식은 오전 10시에 시작했지만 멀리 제주교구까지 전국 16개 교구에서 모인 신자들은 대부분 이른 아침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 시복식 시작을 기다렸다. 기자도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아직 날이 훤해지기 전에 광화문광장에 긴장된 마음으로 도착해 취재를 시작했다. 시복식이 열린 날이 한여름이기도 했지만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한국교회 신자들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염 추기경은 124위 시복 10주년 특별미사 강론에서 ‘10년 전 오늘’을 뚜렷이 떠올리면서 “그날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시복 10주년을 경축만 할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오늘을 사는 우리 신자들이 따르려는 노력이 중요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사에 참례한 신자 수나 행사 외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염 추기경의 말대로 한국교회 신자들은 124위 복자 시복 10주년을 보내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삶 속에서 따르려 노력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4-08-25

열정과 지혜

지난 7월 28일 서울 명동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열린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발대식에서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중장년 신자들이 봉사에 나선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참석 청년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고 자리를 안내하는 그들의 모습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모두 함께 이뤄내는 여정이고 행사임을 느끼게 했다. 이날은 마침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었다. 내빈으로 참석한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글레이손 데 파울라 소자 차관은 축사에서 “조부모와 노인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했다.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 되면 한 신부님의 글에서 본 이콘 장면이 떠오른다. 이탈리아 북부 보제공동체의 한 수도자가 그린 것인데, 제목이 ‘원로를 업고 가는 젊은 수도승’이다. 이콘은 제목처럼 나이 든 선배 수도승을 젊은 수도승이 업고 가는 장면을 담았다. 젊은이는 힘을, 나이 든 선배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했다. 열정은 있지만 제대로 된 방향을 모를 수 있는 젊은이에게 원로 선배는 삶과 신앙의 경험에서 온 지혜로 가야 할 길을 조언해 줄 수 있다. 한국은 내년이면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한국교회는 이미 사회보다 앞서 전체 교구가 초고령화 지수를 넘어섰다. 고령화 진행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듦에 대한 시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들면 쓸데 없다’는 '에이지즘‘(Ageism·연령차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인구 5명당 1명이 노령 인구가 되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와 노년이 어우러지는 실질적인 해법이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열정과 지혜, 각자의 장점을 나누며 하느님께 함께 나아가는 이콘 속 젊은이와 원로처럼 말이다.

2024-08-18

묵주 꼭 쥐고 기다리는 ‘숨은 그리스도인’

의정부교구 요양 사목 현장 중 한 곳을 다녀왔다. 7월 17일 방문한 지역 요양원에선 거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어르신뿐 아니라 거동할 수 없고 의사소통마저도 어려운 어르신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어르신은 사제의 축복을 받는 와중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분들이 가족마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신자라는 것도 알려지지 못한 채 ‘숨은 그리스도인’으로 요양원에 있어야 한다. 언젠가 세례를 받아 명백한 인호가 새겨져 있을 텐데도 교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임종을 기다리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체 어느 부분이 아픈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데 ‘나는 신자라서 사제를 만나고 싶다’는 표현을 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취재 중 만난 한 어르신이 신자라는 건 묵주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 묵주를 손에 꼭 쥔 어르신은 사제가 축복할 때는 가만히 눈을 감기도 했다. 뇌경색이 온 어르신이다. 요양원에서 신부님이 오신다니 쥐여준 것일 수도 있지만,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니 분명 사제가 왔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요양 사목이 없었다면 아마 사제의 축복 없이 그저 묵주만 꼭 쥐고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어르신들이 비록 본당에서 활동할 수는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진 한 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사제가 왔을 때만큼은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은 어르신들이 얼마나 그 순간을 기다렸는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요양기관에 이런 어르신들이 계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당 혹은 교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신자 개인적 차원에서도 말이다.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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