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말

올해부터 수원교구 주보 1면에 복음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 박경희 작가는 매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캘리그라피 작업을 한 성경 구절을 올리고 있다. 20자 남짓한 짧은 구절. 작가는 그 짧은 구절을 쓰기 위해 한참 동안 기도하고 사람들 마음에 잘 닿을 수 있게 고민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다고 말했다. 쓰는 이의 정성과 마음을 더해 새롭게 완성된 하느님 말씀은 보는 이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기쁨을 준다. 종이에 인쇄된 글자에 불과했던 하느님 말씀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때 생명력을 얻고 선한 마음을 퍼뜨리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하느님의 말씀 주일 강론에서 “사회 속 소셜미디어들이 언어의 폭력성을 떠올리게 할 때, 우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조용한 말씀에 가까이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자”고 요청했다.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말을 보고 듣는 사람들. 날카롭고 뾰족한 말은 때로 누군가가 생을 포기하게 하기도 하고, 더 많은 나쁜 말을 양산해 이 세상이 살아갈 만하지 못하다고 여겨지게 한다. 성경 속에 덮여 있는 말은 힘이 없지만, 세상에 꺼내 놓았을 때 비로소 생명을 살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가치를 알고 있는 우리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문제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에 집중하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실천하면 어떨까.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3면

“신자세요?”

사람을 함부로 갈라서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그런데 가톨릭신문 기자로 살다 보니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몹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두 부류란 바로 ‘신자’와 ‘비신자’다. 만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이 신자인지도 궁금하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대화 속 인물에 대해 혼잣말로 “신자인가?”하고 되뇌다가 “직업병”이라며 핀잔을 듣곤 한다. 그 직업병 덕분에 찾은 취재원도 여럿이다. 신자인지 알아보는 쉬운 방법은 “성당을 다니는지”를 묻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보통 “교회 다닌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명’까지 있다면 확실하다. 다만 ‘가톨릭’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교회나 성공회 신자들도 ‘성당’을 다니고, ‘세례명’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입 기자 시절 ‘세례명’까지 있는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걸 알고 속으로 당황한 기억이 있다. 성사로서 세례를 거행하는 정교회와 성공회의 세례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하다. 일부 개신교회의 세례도 그렇다. 가톨릭교회도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교 신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갈라진 형제’라 부른다.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이 일치 활동에서 갈라진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가르친다.(「일치교령」 4항) 물론 갈라진 형제들은 가톨릭교회의 성사에 참여할 수 없고,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치’를 말하는 이유는, 역시 우리가 믿는 주님이 ‘한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겠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새해를 맞이하며

지난 12월 24일 운전 중이던 기자에게 ‘기쁜소식 출판사’ 전갑수(베르나르도) 대표가 전화를 걸었다. 수원교구 천리본당 이영호(베르나르도) 총회장이 얼마 전 갑자기 선종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가톨릭신문 지면을 통해 이 총회장의 삶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이 총회장 이름을 들었을 때는 생소했지만 「독립군 의민단」을 쓴 작가이자 교회사 연구자라는 설명을 듣고 ‘아, 그분’이라고 떠올릴 수 있었다.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본당의 모든 미사에 참례했고, 교회사를 파헤친 저술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이 총회장과 소신학교 동문인 변진흥(야고보) 박사가 신문사로 보내온 추모글을 읽으면서 이 총회장이 타고난 성실성과 의지로 평생을 산 인물이고 그렇기에 사후에도 그의 삶이 많은 이에게 기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25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는 서울대교구 신도림동본당이 생명분과 주관으로 ‘하늘나라 기도편지’를 미사 중 봉헌하는 과정을 취재했다. 처음에 본당 주보에서 ‘하늘나라 기도편지 봉헌’이라는 공지를 보았을 때, 궁금증이 일었다. 하늘나라 곧,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쓴 편지가 하늘나라 기도편지였다. 자필로 쓴 50여 통의 편지는 저마다 글씨체는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은 하나같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앞둔 시점이어서 그런지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편지들이 여러 통 보였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부모님은 물론, 형제자매와 자녀도 있었다. 이영호 총회장처럼 많은 이에게 기억되지 않더라도 남겨진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한다면, 산 이와 죽은 이 모두에게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3면

본질의 자리

수도원 순례를 20년 가까이 이끌어온 사제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에 남은 것은 특정한 답변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었다. 이 여정이 오래 지속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지만, 끝내 마음에 남은 것은 ‘왜 수도원을 찾는가’라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영적 체험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으로 이어져 왔는지를 되묻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가 이끈 수도원 순례의 방향은 일관됐다. 오랜 시간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의미인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은 무언가를 더하는 공간이 아니라, 군더더기처럼 덧붙여진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며 본질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그래서 이 순례는 수도원을 통해 신앙의 핵심과 원천, 목표와 길을 다시 확인하려는 과정에 가까웠다. 인터뷰를 하면서 오래된 수도원이 지닌 힘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완벽한 복음적 가치를 살아보고자 했던 열망에서 출발한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은 넘어지고 실패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삶을 반복해 왔다. 복음적 완덕은 단번에 성취된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을 끌어안고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선택들의 축적 속에서 형성돼 왔다. 그 시간의 두께가 수도원의 영성을 이루었다. 이렇게 볼 때 수도원 순례는 과거를 향한 향수가 아니다. 종교가 선택지처럼 소비되는 시대에, 신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이다. 더 나은 체험을 기대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신앙이 처음 어떤 삶의 형태로 뿌리내렸는지를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수도원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질문을 보존하는 일이다. 교회가 끝내 놓지 않았던 그 본질을 오늘 다시 선택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일이 아닐까.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3면

한 명 한 명, 한 알 한 알

장관이었다.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 상징물 아시아교회 순례 감사예식 ‘순례의 빛을 서울로, 세상으로!’에서 참례자 한 명, 한 명이 묵주가 되어 불을 밝힌 모습을 보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이들의 표정은 묵주 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누군가는 처음 참가하는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두고 있는 긴장감을, 누군가는 전 세계 청년들을 맞이할 것이라는 설렘을 표현하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 얼굴이었다. 서울 WYD가 2년도 채 남아있지 않은 현재, 각 교구도 이처럼 다양한 모습과 감정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교구별 조직위원회를 발대하고, 교구대회 준비를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교구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미사도 봉헌하고, WYD와 닮아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하면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날 현장에서 본 모습은 교회가 WYD를 어떻게 준비해 나가면 좋을지에 대한 힌트를 줬다. 대회를 위해 힘쓰고 있는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묵주 알이 되어 ‘공동체 묵주’를 완성한 것처럼 WYD 역시 봉사자, 참가자, 실무자 등 모두가 역할을 다해야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 거대한 행사 앞에서 한 알, 한 알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길, 이들이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는 서울 WYD 주제 성구를 살아낼 수 있길 바라며 묵주 알을 굴렸다. “주님, 세상에 현존하는 불의와 증오에 맞서, 희망과 사랑을 말하고 증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모여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소서.”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3면

하느님 앞의 같은 자리

전국 각 교구에서 교정사목 활동을 하는 사제와 수도자, 봉사자들이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에 모였다. 성지 순례로 일정을 시작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자리에 서기 위해 새벽 4시에 길을 나선 이들도 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해 성전에는 간이 의자까지 놓였다. 전날 서울에 내린 눈으로 공기는 차가웠지만,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추위의 피로보다 반가움이 먼저 묻어 있었다. 미사에는 정복을 입은 교도관들도 함께했다. 성심회 회원으로 참석한 이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교도관이 있었다. 성체를 모신 뒤 묵상하는 동안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교정 현장의 단단한 얼굴보다는, 어린아이가 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미사 후 그를 찾아가 어떤 기도 지향을 바쳤는지 물었다. 인천교도소에서 근무한다는 그는 수용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 앞에 덧붙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저도 죄인이지만요.” 법을 어긴 이들을 대상으로 ‘교화’를 담당하는 직업이지만, 그는 자신을 그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같은 위치에 서 있음을 먼저 고백하고 있었다. 법을 어긴 이들을 교화하는 현장에 서다 보면, 자신이 더 올바른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감옥 안과 밖을 가르기보다,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자리를 먼저 바라보고 있었다. 감옥이라는 경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 하느님 앞에서는 감옥도, 직업과 역할의 차이도 의미를 잃는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으로서 용서와 회복을 향해 다시 걸음을 떼고 있었다.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27면

소소함으로 보는 리더십

한국을 방문한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마시모 푸사렐리 신부를 처음 만났다. 전 세계 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수도회의 총봉사자는 어떤 사람일지 내심 궁금했다. 만나기 전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것과 수도회 영성답게 이민자를 비롯한 약자들과 함께해 온 인물이라는 점 등이었다. 그는 12월 4일 경기도 파주시 파티마 평화의 성당에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까지 수도자, 재속회원들과 함께 도보로 순례했다. 공원에 도착해 저만치 북한이 보이는 전망대에 오르자 재속회원들이 그에게 삼삼오오 몰려갔다. 아마 짧은 휴식 시간 동안 푸사렐리 신부는 이들과 스무 장은 족히 넘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그 와중에도 공원 내 분단과 평화를 상징하는 전시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한국 수도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무심한 듯 소소한 것에 관심을 두는 모습은 총봉사자라는 직책보다는 수도회의 평범한 ‘수사’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반면 그와 인터뷰를 시작하자 부드러움에 감춰졌던 확고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의 수도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인 유럽 내 이민자들, 전쟁과 폭력, 불평등 문제와 이에 대해 수도회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따라 행하는 활동들에 대해서는 일관되고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건전한 신념과 뚝심, 겸손함과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세심함보다는 거친 언행과 자극적인 발언을 곁들여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지도자가 마치 유행인 듯하다. 지도자의 발언 하나하나가 세계 경제를 술렁이게 한다. 하지만 리더십은 청중을 향해 크게 외치는 발언이 아니라 그 지도자의 작고 소소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푸사렐리 신부의 세심함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태아 인권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인가?’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은 11월 28일 제5차 가톨릭 의료윤리 심포지엄 ‘생명의 시작과 가톨릭 의료윤리’를 개최하고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다뤘다. 발제자는 ‘사람이 되는 시기’에 대해서도 살폈다. 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한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입장은 다르다. 2008년에는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밝혔으나(2004헌바81 결정), 2019년 자기낙태죄·의사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서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인 생존’을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훨씬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며 아직 사람과 같지는 않다는 태도를 취했다. 임신 22주 내외 태아의 ‘독자적 생존 능력’을 기준으로 낙태 허용 주수를 정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사실 ‘독자적 생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모태의 영양분을 받아야 하든, 모유나 분유를 먹여줘야 하든, 더 나아가 일해 번 돈으로 음식을 사 먹어야 하든, 우리 모두는 ‘세상의 도움’을 공급받아 성장하고 생존하고 있다. 여성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더 약한 자를 제거하는 쉬운 해결은 약자 인권에 대한 보호를 되려 퇴보시킨다. 일부 여성이 태아를 ‘내 몸에 기생하는 짐’으로 여기게 만든 것은, 사회적 지원 부족과 생명 교육 부재 등 다방면의 사회적 책임이 크다.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이다. 하느님이 미천한 우리를 기억하여 아기 예수님을 보내셨듯 자꾸 기억해 본다. “나도 태아였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전부를 주는 사랑

“학교 등록금도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어요. 잘 데가 없어 서울역에서 노숙까지도 했고요.” 11월 1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씨젠 천경준(마티아) 회장이 아내 안정숙(카타리나) 씨의 보유 주식 30만 주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 대신 기부하며 열어 보인 가난의 상처다. 두 부부가 “기금이 무의탁 영유아와 독거노인을 위해 쓰이기를 바란다”고 밝힌 것도 고통 속에 홀로 버티는 아픔을 깊이 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웃의 상처를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성덕으로 자신의 거의 전부를 내어주는 신자들의 애틋한 실천을 그간 많이 목격했다. 아내와 함께 평생 기부에 앞장서 왔던 최영길(시몬) 씨는 국제개발협력단체 한국희망재단의 오랜 후원자로서, 암 투병 중에도 재단에 선종 후 자택을 기부할 것을 지난 4월 기꺼이 서약했다. 지난해 8월에는 대장암 4기로 항암치료 중이던 오종순(바울라) 씨가 강원도에서 뱃일과 식당 일로 평생 고생해 모은 재산 20억 원을 사단법인 올마이키즈에 기부했다. 극빈국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던 본인과 달리 교육 기회만큼은 박탈당하지 않기를 간구하며.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는 영적 존재”라는 격언을 남겼다. 신적 존재의 초자연적 현현 없이도 우리 스스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하는 힘은 이렇듯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헌신에서 나왔다. 그래서 믿게 된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허무가 아닌 초월을 그릴 수 있게 되리라고.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23면

성경이 이뤄 준 소원

“성경을 쓰다 보면 말씀에 빠져서 집에 불이 나도 모를 정도예요. 오죽하면 성경 필사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무려 26번이나 필사한 윤정구 씨의 집. 그가 29년간 방에서 성경을 쓰는 동안 부인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성경 쓸 때만큼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는 탓에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이 돼서다. 그야말로 성경 쓰기에 미쳤던(?) 윤정구 씨는 수원교구 내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매일 성경을 썼을 뿐인데 신자들 앞에서 강의하기도 하고 교황님의 선물을 받고 싶다던 평생소원을 이루기도 했다. 올해 성경잔치에서 수원교구 총대리 문희종(요한 세례자) 주교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받은 기념품을 윤 씨에게 선물한 것이다. 성경을 쓰고 소원을 이룬 이들은 또 있었다. 올해 전 신자 성경필사를 한 안산성안나본당에서는 냉담했던 남편이 성당을 다니게 되거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흔들렸던 가정이 다시 회복된 일들이 있었다고 신자들은 전했다. 단순히 성경을 보고 쓴 것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진 사람들. 신자들의 말을 곱씹으며 그 비결을 생각해 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성경을 쓰면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혼자인 줄 알았던 순간,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 내 옆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찾았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줬다. 신자들은 힘들었던 순간,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찾아왔다고 입을 모았다. 신자들이 신앙의 빛을 찾을 수 있도록 성경사목을 통해 등불을 밝혀준 교구의 동행도 신자들의 신앙을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성경 필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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