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愚公)의 희망

흔히 ‘끊임없이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의미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말만 보면 우공이 산을 옮긴 것 같지만, ‘우공이산’의 유래가 된 「열자」를 보면, 산을 옮긴 건 우공이 아니다. 우공이 산을 옮기기로 하자 가족들이 함께했고, 이웃도 동참했다. 1년이 지나자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우공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남아있고, 또 그 자자손손이 있으나, 산은 증가하지 않으니 걱정 없다”며 자신의 희망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확신했다. 여기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했다. 우공의 말을 전해 듣고 그 정성에 감명한 하느님이 산을 옮겨준 것이다. 산을 옮긴 건 하느님이었다. 매주 토요일, 500번을 이어온 의정부교구의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토요기도회에서 이런 ‘우공의 희망’을 느꼈다. 토요기도회는 남북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끊임없이 평화를 희망하며 열렸다. 6월 21일 열린 500차 토요기도회에는 마치 우공이 가족과 이웃과 함께했듯 기존에 오던 이들에 더 많은 이가 함께해 예상 참가자 수의 세 배가 넘는 1000여 명이 모여 기도했다. 손희송 주교는 이날 강론에서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렸다”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한반도 평화도, 세계 평화도, 나아가 공동의 집 지구 생태계의 평화도,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도저히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공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기에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3면

‘평양교구 신우회’가 갖게 하는 꿈

꼭 13년 전이던 2012년 6월 ‘평양교구 신우회’ 총무로 일하던 김만복(로사) 씨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80세였다. 평양에서 기차 한 정거장 거리인 평안남도 서포에서 태어난 분이다. 6·25전쟁 중 1950년 12월 7일 대동강을 건너 월남해 남대문시장에서 평생 장사를 하며 건실하게 살았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 서포와 평양이 함께 나오는 위성 지도를 손에 들고 어릴 적 고향과 성당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13년 만에 평양교구 신우회를 다시 취재하며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평양교구 1세대 신자들은 대부분 선종했거나 생존해 있어도 외부 활동은 어렵다고 한다.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문화관 소성당에서 매월 넷째 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리는 평양교구 신우회 정기미사에는 자제들 위주로 10명 정도가 모이고 있다. 평양교구 신우회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형적으로 작아진 것보다 더 큰 변화는 한국 사회가 갖는 통일에 대한 당위성과 열망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평양교구 신우회를 지도하는 장긍선(예로니모) 신부가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했던 말이 크게 다가왔다. 분단 80주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 한 나라였고 그렇기에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사실조차 낯설게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청년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평양교구 신우회는 교회 안에서 분단과 6·25전쟁의 아픔을 가장 크게 안고 있는 단체다. 평양교구 신우회를 바라보며 남과 북이 다시 만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가 하나의 나라가 되는 꿈을 꾸게 된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3면

삶을 건넨 집

누군가 집 한 채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자칫 단순한 기부 미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이 단지 부동산이 아니라, 한 사람, 한 가족의 시간과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공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한 재산 이전이 아니라, 삶의 일부를 건네는 일이다. 소유의 이전을 넘어선, 존재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20여 년을 살아온 아파트를 자립 준비 청년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김춘미 씨의 선택은 물질적 나눔을 넘어선 상징적 행위로 다가왔다. 그것은 가진 것을 비우는 결단이자, 청년 세대의 내일을 믿고 지지하는 어른의 마음이었다. 뿌리내릴 흙 한 줌 없이 사회에 내던져지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살 수 있는 공간’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라 ‘살아갈 가능성’이다. 재산을 불리거나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김 씨의 결단은 청년들이 절망 대신 희망을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디딤돌이 되었다. 기성 세대가 청년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꼭 크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묵묵히 믿어주는 시선, 실패해도 괜찮다는 여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응원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이다. 김 씨가 봉헌한 ‘함께 살 수 있는 집 한 채’는 그 모든 응원이 ‘공간’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사례였다. 그 집은 청년들이 자립의 뿌리를 내리고, 훗날 또 다른 이에게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는 씨앗이 되었다.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현관문을 나서는 청년들의 발걸음이 그려진다. 그들에게 세상은 이제 조금 더 믿을 만한 곳,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내미는 손길로 이어질 것 같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3면

한 생을 담담히 배웅하며

제3대 군종교구장을 지낸 유수일 주교가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는 자주 접했지만, 선종 소식은 여전히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군종교구 담당 기자와 함께 고인을 기리는 빈소부터 장례미사까지 동행하며 기록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사진과 글로 담아낸 건 처음이었다. 입사 후 주로 본당 사목 모범 사례나 교회의 사회교리 실천 현장을 취재해 왔다. 이번엔 달랐다. 죽음을 마주하는 현장은 낯설고 감정은 무거웠다.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조심스러움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수도복을 입고 눈을 감고 계신 고인의 마지막 모습, 그 옆 영정사진, 관 앞에서 기도하는 조문객들을 한 장면에 담고자 애썼다. 혹여 행동이 고인과 조문객들에게 불편함을 드리진 않을까 선배 기자에게 물었고, “이 기록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생전에 뵌 적은 없는 분이었지만, 그분의 삶은 이미 기사와 서적을 통해 여러 갈래로 남아 있었다. 수도회 출신의 사제, 조용히 나눔의 삶을 실천하신 분. 남겨진 기록 속에서 고인의 삶을 조금씩 그려볼 수 있었다. 그를 기억할 누군가가 다시 고인을 떠올리는 데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도록, 그 마지막 여정을 조심스럽게 기록해 나갔다. 평소에도 겸손함 속에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삶을 실천해 오셨던 유수일 주교. 그분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며 기록할 수 있었던 건 기자로서도, 한 신앙인으로서도 큰 울림이자 감사였다. 생애의 끝자락까지 따라가 담아낸 한 장의 사진, 몇 줄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분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지도가 되길 바란다.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3면

전해야 하는 본질

‘이분 신부님 맞아?’ 홍보 주일 특집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속에는 눈길을 끄는 방법으로 선교하는 ‘인플루언서’ 신부가 여럿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본인의 재능을 적극 활용하는 신부들의 콘텐츠를 찾다 보니, 그 매력에 빠져들어 늦은 밤까지 잠 못 든 날도 많았다. 여러 플랫폼에서 노래하고, 강연하며, 숏폼 콘텐츠를 만들고, 심지어 디제잉까지 하는 모습은 그동안 알고 있던 ‘사제’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인플루언서 신부들의 선교 방법만큼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이 운영하는 SNS에 남은 이용자들의 다양한 반응이었다. 댓글 창에는 각기 다른 국가와 인종의 사람들이 남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인상적인 점은 출신과 배경은 달라도 모두 한 마음으로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의 말씀 덕에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졌어요. 사랑합니다.” 다양한 언어로 적힌 사랑의 말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바쁜 신부들을 섭외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로 즐거움과 배움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그러나 결국 본질은 전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 자체였다. 서면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던 신부들이 입을 모아 강조한 것도, 그들의 SNS를 찾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장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미디어 사도직을 수행하는 기자는 그 사랑을 담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홍보 주일을 맞아 그 사명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2027 서울 WYD, 미리 맛봤습니다.

지난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혜화동 대학로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등에서 개최된 유스 페스티벌 ‘희희희’에 다녀왔다. 많은 본당의 주일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혜화동을 찾았다. 볼거리, 체험거리가 가득했다. 특히 체험 부스들이 눈길을 끌었다. ‘희희희’는 청년 세대가 관심을 가질만 한 기후위기, 인신매매 문제, 평화, 세대 간 갈등 등의 이슈들을 설문조사와 이벤트, 전시회 등으로 부담 없이 접하도록 했다. 더불어 초등학생들도 즐기도록 두더지게임, 토종 씨앗 심기, OX퀴즈 등 직관적이면서 간단한 즐길거리들이 보였다. 또한 한양여대 유기견 봉사 동아리 ‘도그어스플래닛’ 부스,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들에게 후원하기 위해 공예품을 파는 ‘무카나’ 부스 등 색다른 주제들도 있었다. 이번 축제는 ‘미리보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라고 한다. 신자들은 마음껏 즐기고 비신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톨릭과 청년대회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행사에 반영된 이유다. 일반 시민들과 더 가까운 곳에서 교회를 마음껏 홍보했다. 홍보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복음과 신앙을 주제로 한 콘텐츠도 충분했다고 본다. 2023년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국내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행사에 대한 우려를 키웠다. 사실 대회의 규모면에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도 그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관련 특별법 발의를 두고 타 종교계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교회는 차근차근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채우고 준비해나가고 있다. 그 모습이 ‘희희희’에서 엿보여 기대를 품게 된다.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3면

부대낌의 미학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는 5월 11일 마을 어르신을 초대해 어버이날 행사를 열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경로당 등을 내어준 어르신들의 따뜻함에 대한 보답이었다. 물론 처음 외국인들이 동네에 늘어날 때는 낯설고 생소해 서로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이 어색함을 해소하고자 센터는 지난해 처음 어버이날 행사를 기획했고, 성공리에 친교의 시간을 보냈다. 화합을 강조한 백 번의 강연보다, 한자리에 앉아 밥 한 끼 같이 먹고, 공연 보며 웃고 즐긴 ‘부대낌’ 한 번이 벽을 허물게 했다. 나와 다른 줄 알았던 존재가 나와 똑같은 걸 먹고 마시고, 하나의 큰 공감대 안에서 울고 웃는 한 인류임을 체감한 것이다. 이러한 동질감은 미사 중에도 경험할 수 있다. 한 분이신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눠 먹고 마시고, 서로 마주 보며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손잡고 성가를 부를 때 우리는 성령 안의 한 형제임을 깨닫는다. ‘남’, 이주민에 대한 이질감의 해소 방법은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선에서의 이 ‘부대낌’에 있지 않을까. 유럽 출신 이주민의 자손인 레오 14세 교황은 페루에서 사목하는 동안 페루에 온 베네수엘라 이주민들에게 관심이 컸다고 한다. 또한 추기경 시절 자신의 SNS에 반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게시글을 여러 번 공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의 이주민 포용 뜻을 우리도 새기며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7면

용감한 사랑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네오콘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일컬으며 군사적 선제공격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오콘 중 하나인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 개입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북녘에 평화의 겨자씨를 심으려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프로세스도 중단됐다. 이백만(요셉)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의 책 「나는 갈 것이다, 소노 디스포니빌레」를 읽으며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국제가톨릭평화운동 단체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4월 29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이 대사를 초청해 연 북토크에서 책을 받았다. 2019년 기자회견에서 “장벽을 건설하는 사람들은 그 장벽 안에 갇힐 것”이라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생각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취임 후 “이주민의 침입을 막겠다”며 미국과 멕시코 사이 장벽을 건설한 데 대한 일침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욕심쟁이 거인」에서 같은 교훈을 찾았다.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이었던 거인은 아이들더러 “내 정원을 망치지 마!”라며 내쫓고 정원을 장벽으로 ‘가뒀다’. 그 후 정원은 이상하게도 혹독한 겨울뿐이었다. 어느 날 장벽에 난 틈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뛰놀자 그곳에만 봄이 찾아와 있었다. 거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도끼로 담을 부숴 아이들이 마음껏 들어오게 해 봄을 회복했다. 이처럼 장벽을 무너뜨리는 용기만이, 원초적인 대응으로 깊어지기만 했던 분단의 상처에 특효약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기도하게 됐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황의 용감한 사랑을 목격한 우리가 순수함을 되찾게 되길.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3면

천사의 발자취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뭐하는 사람이야?” 4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 분향소가 마련됐던 수원교구 주교좌정자동성당 앞에는 조문을 기다리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엄마 손을 잡고 온 한 아이는 긴 줄을 보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세상을 지키려고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분”이라고 설명하자 아이는 “천사가 하늘나라로 돌아갔으면 이제 세상은 누가 지켜?”라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가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라 정한 교황. 그의 삶은 늘 소박했고 그의 옆에는 집을 잃은 이주민과 노숙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함께했다. 또한 교황은 복음적 가치를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2016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했고, 이주민과 난민의 권리 옹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종교계를 넘어 전 세계가 생태위기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2014년 방한 때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은 고통받는 이들이었다. 당시 교황은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유가족과 한국의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감쌌고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언장의 끝에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누리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한다”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세상의 평화와 형제애를 위해 기도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천사는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고자 발자취를 남겼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3면

기도

브라질, 한국, 일본, 교황청…. 여러 나라를 다니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취재했다. 그때마다 계속 귓가를 맴도는 단어가 있었다. ‘기도’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교황. 취임 당시부터 교황은 입버릇처럼 어딜 가나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아마 전 세계 신자들이 이미 교황을 위해 기도할 터다. 그럼에도 교황은 “기도해 달라”고 하기에 참 인상적이었다. 2023년 성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상 축복식을 취재하면서 교황과 악수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짧은 인사에 무어라 말할까 고민 끝에 “교황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악수를 하고 다음 인사할 사람을 위해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교황이 손을 강하게 잡았다. ‘꽉’이라는 부사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체온과 악력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그렇게 손을 잡고 말했다. “I need.”(기도가 필요합니다.) 당황하는 내 눈과 마주친 교황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문득 2014년 한국 방한 당시 교황을 만난 한 청년이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며 “나도 그렇게 기도하고 싶다”고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신자인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리가 없다. 아마 그동안 교황처럼 진심을 다해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나오는 말이리라. 그리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 이상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부활 엠마오를 떠난 교황을 위해 두 손을 모아본다.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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