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물리학, 화학이 우리 산업과 생활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생명과학이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7월 4일 열린 WYD 수퍼클래스에서 구본경 박사는 생명과학이 바꿔 놓을 세상의 모습을 과학자의 눈으로 그렸다. 예전에는 10년이 넘게 걸리던 인간 DNA 전체 분석은 이제 하루면 가능하다고 한다. 최근 유전자 편집 기술은 염기 단위 조작까지도 넘보고 있고, 얼마 전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 세포’가 공개되기도 했다. 생명을 마치 ‘데이터’처럼 가장 작은 단위까지 뜯어 분석한 인류는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시 조립하려 하고 있다. 생명과학 발달은 질병 치료에 큰 희망이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어쩐지 희망보다는 ‘바벨탑’처럼 느껴진다. 레오 14세 교황은 회칙 「고귀한 인류」에서 “‘바벨 증후군’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벨 증후군이란 이윤의 우상숭배, 획일화, 그리고 인격(인간)의 신비까지도 ‘데이터’로 번역할 수 있다는 허상이다. 물론 생명과학 기술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립도 아니다. 그 기술을 고안한 것도, 사용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선이 될 수 있을까? 같은 날 열린 ‘청년들의 성·생명·사랑 이야기’ 취재에서 그 힌트를 얻은 듯했다. 참가자들은 교육에서 “나를 왜 여성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물음을 통해 받은 감동을 표현했다. 생명 창조의 이유에 사랑이 빠질 수 없다.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떼어 놓을 때 선에서 멀어져 바벨탑을 쌓게 된다. 생명과학의 발전이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길을 향하도록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이 필요하다.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3면

캄보디아 불교와 가톨릭의 아름다운 동행을 보며

캄보디아 인구 1800만 명 가운데 대다수는 불교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는 2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교세 차이와는 무관하게, 캄보디아 불교계와 가톨릭교회가 아름답게 협력하고 있다는 훈훈한 소식이 전해졌다. 프놈펜대목구장 올리비에 슈미트하우슬러 주교가 불교와 오랜 세월 동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지하는 위대한 원로 재가 신자’라는 명예 호칭을 받았다. 슈미트하우슬러 주교는 20여 년 전 캄보디아에서 본당 사제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불교계와 지역 개발 사업, 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협력했다. 가톨릭교회는 타 종교와는 대화를 장려하고 그리스도교 교회와는 일치를 촉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교황청에는 종교간대화부와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가 설치돼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교황청 두 부서의 기능을 하나로 합친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종교들이 대화에 힘쓰기도 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등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일치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 종교간 대화와 교회일치 증진은 레오 14세 교황이 6월 26~27일 교황청에서 소집한 특별 추기경회의 논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추기경단은 현대사회의 심화되는 양극화와 개인주의 심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어머니 같은 존재이자 환대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 방편의 하나로 종교간 대화와 교회일치 증진을 제시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하나 되기를 바라셨다. 포용과 공존의 가치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이기도 한 종교간 대화와 교회일치에 가톨릭교회가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3면

모두가 ‘예스’를 말할 때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최근 종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의도적으로 AI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들을 만났다. 일상적으로 AI를 활용해 온 기자에게는 뜻밖의 답변이었다. ‘이 시대에 한 번쯤은 사용해 봤겠지’라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단정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6월 18일 종교환경회의가 개최한 종교인대화마당에서는 ‘장자의 양생과 AI시대 종교인의 역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천주교를 비롯해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AI시대에 종교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종교인이 이 시대에 건넬 수 있는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종교가 다른 만큼 AI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AI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드러냈다. 실제로 기자 주변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AI로 타로나 사주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직접 점집을 찾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손가락 하나로 답을 얻을 수 있으니 편리하다. 하지만 편리함이 의존으로, 의존이 맹신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어쩌면 AI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다는 이들은 기술 자체를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가 AI에 “예스”를 말할 때 누군가는 “노”를 말하며 기술의 한계를 묻고, 인간다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의 위로와 용기를 주고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신앙이고 종교가 아니었던가. AI가 수많은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종교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인간이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3면

‘DMZ 평화의 길’을 걷는 또 다른 의미

2년 전 ‘DMZ 평화의 길’ 순례를 처음 접했다. 이후 몇 차례 취재할 기회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화의 길’이 지닌 의미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기사에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담을 순간을 찾는 데 마음이 더 바빴다. 순례가 품은 의미를 차분히 곱씹어 볼 여유는 많지 않았다. 6월 11일 DMZ 순례자들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의 길> 시사회에 다녀왔다. 그날만큼은 사진을 찍을 필요도, 누군가를 붙잡고 인터뷰할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오롯이 관객의 자리에서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를 따라갈 수 있었다. 천주교를 비롯해 7대 종교 종교인들로 구성된 육로 순례단은 비록 전례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평화라는 한 가지 바람을 간직한 채 서로 도우며 긴 순례 여정을 극복해 냈다. 한 수녀님은 타 종교인의 뜯어진 배낭을 휴식 중에 수선해 주기도 했다. 한편, 평화 운동가들이 참가한 해상 순례단의 여정은 더 고달팠다. 배가 고장이 나면서 일정이 늦춰져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뜬눈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난관을 겪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려는 영화 속 순례단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며 겪는 감정과도 닮아 보였다. 때로는 걷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 시원한 바람에 즐거워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을 때도 있지만, <평화의 길>에 출연한 한 수도자의 말처럼 “앞사람 발만 보고 걷는” 무료하고 힘든 시간과 싸움도 해야 하는 게 똑 닮았다. 이 순례의 의미는 남북 평화와 생태환경 보전의 필요성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만 있지 않았다. 그 여정 자체가 더 이상 한반도에 아픔이 찾아오지 않길 바라는 참가자들의 간절한 기도였다.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3면

온기의 마태오 효과

‘마태오 효과(Matthew effect)’라는 경제 용어가 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는 복음에서 유래했다. 1969년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동일한 연구 성과를 놓고도 저명한 과학자가 무명의 과학자에 비해 많이 보상받는 현실이 이와 같다고 주장하며 처음 사용했다. 무료급식소를 취재하며 오늘날 마태오 효과가 벌어지는 현장을 봤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일어난 후 방위산업체들의 주가 상승 기대가 커졌다. 실제로 발발 직후 주요 방산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반면 전쟁이 초래한 물가 상승은 누군가의 밥 한 끼를 앗아갔다. 라면 하나, 빵 한 쪽으로 저녁을 때우는 이들에게 그마저도 빼앗아 갔다. 급식소에서 만난 한 이용객은 저녁을 못 먹을 것에 대비해 맨밥만 한가득 퍼 두었다. 동시에 희망도 목격했다. 누군가의 한 끼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이들이 존재했다. 돈이든 물품이든, 가진 것을 내놓는 이가 있었다. 정성스럽게 밥을 차리고 정리하는 이도 있었다. 역시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실현하는 이들이었다.(마태 14,13-21 참조) 마태오 효과가 다른 뜻을 갖길 꿈꾼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처럼 말이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온기가 더 많은 이익을 불러일으킨다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이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3면

내일도 같은 시간, 일터로 간다는 것

“직업재활시설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공공 일자리가 장애인 노동의 중심축을 단기적인 공공 참여와 상징적 활동 쪽으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5월 28일 서울가톨릭장애인복지시설협의회 세미나에서 서울 서초구립 한우리보호작업장 정영수(체레알리스) 원장은 공공 일자리가 내실이 있으려면 직무훈련과 직업적응, 보호고용, 전환지원으로 이어지는 체계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전했다. 특히 고령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성 참여가 아니라, 매일의 리듬을 유지하고 건강 변화에 대응하며 관계와 소득을 지속시키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일자리’라는 말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장애인 일자리의 성과를 참여 인원, 예산 규모, 활동 건수 등 수치로 확인한다. 산술적 참여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직업재활의 본질을 대신하는 순간, 일은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 일회성 행사처럼 소비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장애·비장애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일터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삶의 필수 여건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자기 효능감을 찾고, 일상 리듬을 지키며, 돌봄·부양 부담을 덜고, 인간관계를 맺으며, 내일도 같은 시간 출근해 삶을 이어갈 이유를 얻는다. 더욱이 일터는 고령장애인에게는 복지 수혜자 입장을 넘어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게 해주고 돌봄, 건강, 관계, 소득을 종합 보장하는 삶의 축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회 회칙 「노동하는 인간」도 “인간 노동은 전체 사회문제의 열쇠”(3항)라고 밝힌다.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장애인 노동이 시혜나 참여 실적을 넘어 ‘인간’이 존엄하게 늙어 갈 수 있는 구조로 자리 잡기를.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3면

내 목소리와 얼굴을 지키는 방법

2025년 7월 수원교구는 사제들을 대상으로 생성형 AI(AI)의 기본 원리와 활용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AI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폐단을 줄이고 바람직한 활용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서다. 기술을 활용해 사목적으로 신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긍정적 이야기와 방대한 가톨릭 정보 속에서 진짜를 식별할 수 없다는 우려가 공존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났다. 빠르게 진화한 AI 기술은 더 똑똑해졌고 더 정교하게 인간을 닮아갔다. 편리성의 가면을 쓴 이 기술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다. 휴대전화를 켜고 AI를 향해 질문 한마디를 던지면 어려운 일은 쉽게 해결됐다. AI 기술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을 누리는 와중에 누군가는 ‘내가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는 기술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더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5월 21일 수원교구에서 열린 ‘AI 리터러시 통독반’ 강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였다. 가장 획기적이고 현대적인 기술을 앞에 두고 참가자들은 몇천 년 전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느님과 관계 맺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인간. 참가자들은 육체와 지성을 가진 인간의 고유함은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AI 시대에 우리가 얼굴과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고유함을 되찾는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연대하고 공감하는 것.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나를 스스로 기억할 때 내 얼굴과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23면

어른의 교회, 어른인 교회

한국교회의 고령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2019년에 65세 이상 신자 비율이 20%를 넘어섰고, 2025년에는 28.9%에 달했다. 반면 젊은 세대는 줄어, 이제 정작 청년 자리가 비어 있는 청년미사의 씁쓸한 풍경도 다반사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앞둔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취재처에서 만난 한 사제는 “세계 ‘청년’ 대회인데 준비하는 봉사자나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청년이 아닌 ‘어른’”이라며 답답한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청년위원회가 개최한 토크쇼 ‘홀로, 그리고 같이’도 발표는 청년이 했지만, 행사를 준비한 청년위원회 위원장도, 행사에 온 청중도 청년이 아닌 어른이었다. 청년 없는 청년 행사. 언뜻 모순 같지만 청년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어른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날 발표한 자립준비청년들은 “어른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지자체 등을 통해 여러 지원을 받지만, 정말로 세상에 홀로서는 데 힘이 된 것은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고, 곁에 있어 준 어른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른의 존재가 어떻게 자립에 도움이 됐는지 증언했다. 그저 어른끼리 모이고 마는 ‘어른의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 청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어른인 교회’라면 어떨까? 불안과 어려움에 지친 청년들이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준다면 말이다. 박경숙(마르가리타) 청년위원장의 말이 와닿는다. “우리가 이 청년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때, 이 청년들도 우리의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청년들에게 ‘어른의 교회’일까 ‘어른인 교회’일까?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3면

발달장애인 화가 전시회에 다녀와서

서울대교구 가양동본당이 관할구역 내 ‘기쁜 우리 복지관’에서 활동하는 발달장애인 화가들의 작품을 성당 1층 로비에서 전시한다는 소식을 본당 주보 공지에서 보았다. 발달장애인 화가들의 전시 소식은 가끔 접할 때가 있었지만 본당 차원에서 복지기관과 협력해 마련한 전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한 번 더 살펴보게 됐다. 5월 10일 주일 취재에 앞서 기쁜 우리 복지관 홍보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이번 발달장애인 화가 전시의 취지와 개요를 먼저 들었다. 복지관에서는 미술 방면에 독특한 재능을 지닌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특성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발달장애인들이 그린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전시회를 개최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복지관 홍보 담당자는 가양동본당 신자들이 복지관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서로 인연을 맺어오던 중에 본당에서 발달장애인 화가들의 전시 기회까지 마련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가양동본당 발달장애인 화가 전시회를 취재하면서 가톨릭교회 본당과 지역사회 협력의 소중함과 더불어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유독 본당 여성 신자 한 분이 한 작품 한 작품을 유심히 오랫동안 감상하고 계셨다. ‘최수진 안나’라고 이름과 세례명을 밝힌 그 신자가 직업 화가이거나 미술계에 몸담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 물었다. 그는 “미술과는 관계없다”고 답하면서 “작품들을 발달장애인이 아니라 ‘화가’가 그렸다고 생각하고 감상했다”는 말을 했다. 발달장애인 화가의 작품은 장애인이 아닌 화가의 작품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임을 문득 깨달았다.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23면

성모 마리아와 아이들

3월의 유럽은 아직 겨울 끝자락이었다. 포르투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 벨기에의 보랭과 바뇌 등 네 곳의 성모 발현지를 취재하는 내내 한 가지 물음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아이들이었을까. 1858년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는 실직한 방앗간 주인, 가족은 폐기된 감옥 창고에서 살았다. 1917년 파티마의 세 목동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는 겨우 열 살, 아홉 살, 일곱 살이었다. 양 떼를 몰던 산골 아이들이었다. 1932년 벨기에 보랭의 다섯 아이와 바뇌의 마리에트 베코도 다르지 않았다. 공장 노동자의 딸, 가난한 농부의 자녀들. 세상이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이들이었다. 마리아 역시 로마 제국의 변방, 갈릴래아 지역 나자렛의 가난한 처녀였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곳, 아무것도 아닌 신분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그 낮은 자리를 들어 쓰셨다. 발현지의 아이들은 그 선택의 연장선 위에 있는 듯했다.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그 아이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루르드의 샘물은 지금도 수백만 순례자의 발길을 모은다. 파티마의 기도 요청은 교회 전체를 관통해 흐른다. 보랭에서는 "착한 아이들이 되어야 해"라는 단순한 말이, 바뇌에서는 "나는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야"라는 한 마디가 그 발현지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아이들의 입을 빌렸지만, 세상을 향한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성모님이 찾아가실 '아이들'은 누구일까.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세상이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그 자리, 어쩌면 그곳이 지금도 발현의 자리일지 모른다. 마리아는 언제나 낮은 곳을 먼저 아셨으니까.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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