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을 보는 즐거움

도깨비 풀의 씨앗에 바늘을 달아주기까지, 피조물이 졸랐을 하소연과 창조주가 조아렸을 사랑을 상상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들고, 그림자놀이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천덕꾸러기로 빚어 두시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네가 어때서?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온갖 잘난 것들이 설칠 텐데, 그 속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거든요.” “음~ 알겠다. 너의 씨앗에다 바늘을 달아줄게. 널 깔보는 것들이 있으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까지 가서 함께 살아 보아라.” 껄끄러운 그놈의 가시 바늘을 뜯어내어 아무데나 던지다 보니, 신작로 옆 풀숲이 온통 도깨비풀 천지가 된 이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게 틀림없다. 어쩌다 집에까지 붙어 간 풀씨는 애지중지 기르는 화분의 귀퉁이에서도 싹을 틔웠으니, 이 귀찮은 도깨비 풀이 번창한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편애가 빚은 실수 때문이야. 하하하. 성깔, 빛깔, 때깔, 맛깔처럼 ‘깔’이라는 글자가 붙은 말들이 있다. 창조론을 지나 진화론의 페이지에 실린 단어이다.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이 말마디는 서로의 관계나 비교를 드러낼 때 효과를 발한다. “저 성깔을 건드리면 골치 아파!”처럼 그의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 바로 ‘깔’이다. 예술가들은 이 ‘깔’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사물의 특징을 분명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그것만의 특징’이 그들의 그물에 포집되고, 증폭과 과장의 단계를 거치며 재탄생되어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 이것이 예술품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매력도 어쩌면 도깨비 풀씨의 바늘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예술가는 도무지 친절하지가 않다. 친절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고 신비롭지도 않다고 어떤 평론가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 불친절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과 미의식이 성장하게 된다나? 충분히 수긍이 되는 말이다. 암튼, ‘깔’을 대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거북한 일이기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많은 주목거리이고, 독을 품은 보약이다. ‘깔’을 채집하러 마실돌이를 나선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태양의 행로를 따라 목을 빼고, 시냇물의 송사리는 흐름을 거스르고, 언덕 위의 깃발은 뒤로 펄럭인다. 이 단순한 섭리로도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헤매던 길을 찾게 되는가? 내 그릇이 작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가! 작업장의 대나무 울타리도 바람에 서걱대며, “뭐하노? 지금 뭐하노?” 그러다가, 돌아와 작업대에 서면, “그거다! 맞다 그거다!”하고 응원가로 바뀐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에게 경계의 대상이어도, 자연은 도시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그래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행위는 누군가의 처음을 향한 질서회복운동이며 신에 대한 순명이다. 아니, 예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작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둥, 누가 어느 경매에서 어떤 작품을 사들였다는 둥, 마치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그 가식의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깔의 줏대로 바로 서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의 영과 함께 찬찬히 바라볼 일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2면

안배의 황금비율 7:1

사순의 고갯길, 시련과 고통의 역설적 은혜로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감각을 곤두세운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시작하는 사순 시기의 독서들은 꾸중으로 들리다가도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아내의 다그침 같기도 하다. 마음을 다독이는 따뜻함이 묻어 있으니, 겉은 바삭해도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감칠맛이라고나 할까. 나는 종종 월요일 새벽미사에서 독서 봉사를 한다. 언제 자리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맏물 봉헌에 대한 경외심이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다. 새벽미사에 오신 분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목소리의 피치를 가다듬고, 끊어 읽기의 마디 간격을 조율하고, 코에 걸친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게 나사도 조이고, 거울을 보며 입성도 살펴보고….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독서 내용을 대여섯 번씩 반복해서 읽다가, 불현듯 말씀의 내용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내가 읽게 된 제1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방주’ 부분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신 말씀이었다.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창세 7,2-3) 노아의 배에 올라 살아남게 된 여덟 쌍의 목숨들 중에 왜 부정한 것이 한 쌍 뽑힌 것일까? 세상의 혼탁함을 야기한 주범이었을 이 부정한 것들의 존재가치를 하느님은 어떤 관점에서 여전히 인정하시고, 새 판을 짜는 세상에다 동참시키려 하셨는가 말이다.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구글에다 ‘7:1의 비율’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어라? 이건 또 뭐지?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던 빅뱅 때에는 양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1:1이었다가, 점차 안정기에 들면서 그 비율이 7:1로 바뀌었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검색 페이지의 맨 윗줄에. 그 옛날 창세기의 저자가 첨단 천문학적 지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신기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었다. ‘칠대일, 칠대일, 왜 그랬을까? 7:1….’ 며칠을 입에 달고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아마도….’ 그 ‘아마도’의 물음표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반고비도 무한반복으로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릎을 쳤다. ‘맞다! 1의 역할이 7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구나!’ 미꾸라지를 키우는 도크에 천적인 메기를 풀어두면 미꾸라지가 살아남기 위해 민첩해지고 튼튼해진단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될 빌미를 주었다는 억측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화 노력을 통해 창조주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도 일곱 번쯤은 내 뜻에 맞았고, 한 번쯤은 참아내야 하는 시련이 왔던 거구나! 5:5는 균형이 아니고 대립이며 분열이었지! 그러고 보니 사순 시기의 날 수도 1년의 1/8인 7:1이 되는구나! 그러니, 지금의 시련도 1의 시간, 곧 7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거구나! 이 엄청난 유레카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단초였고, 내 몸에 내장된 소중한 유전자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풍경화를 그려내는지 상상하게 하여, 마음속에 따뜻하고 동그란 여백을 지어주었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매일미사의 은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었고.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2면

용돈의 가르침

신부님, 평안히 계시지요? 은퇴 후 잘 지내신다는 안부는 건너 건너 듣고 있지만 넘쳐 나는 그 열정은 어떻게 다스리고 계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신부님 중에 가장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점잖으시면서 발휘하시는 어마어마한 유머 감각도 그립고요. 일 년에 몇 번 성당에 행사 갈 때마다 신부님 생각이 먼저 떠 오르곤 한답니다. 20여 년 전, 부평1동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계셨을 때 함께 했던 가을 음악회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늘 기분이 좋아집니다. 얼마 전 가수 남궁옥분님도 근사한 신부님, 참 감사한 신부님으로 기억난다고 신부님의 안부를 궁금해했습니다. 예산은 적지만 우리 본당 신자들과 멋진 가을 음악회를 하고 싶으니 스테파노가 힘 좀 써보라고 말씀하셨죠. 충분치 않은 예산이었지만 신부님의 기에 눌려 한소리 못하고 준비하게 되었지요. 다행히도 그날 초대된 가수 남궁옥분님과 유익종님도 흔쾌히 수락해 주신 덕분에 성황리에 잘 마쳤지요. 앉아서, 서서 빈틈없이 성전을 꽉 채운 형제자매님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웃음으로 만든 추억이 지금도 맴맴 돌고 있습니다. 농담조차도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묘한 매력을 지니셨지요. 갑자기 성가 가수들은 많이 왔다 갔으니까, 이번엔 대중 가수들로 가을 음악회를 하고 싶다는 말씀에 다소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대중가요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이 좋아하시는 유익종님은 꼭 섭외해야 한다는 말씀에 취향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웃겨도 잘 웃지도 않으시면서 다른 분들에겐 무지하게 웃기니 섭외하면 후회 없을 거라며 여기저기 매니저 역할까지 해 주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을 생각하면 꼭 따라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감동’이란 단어입니다. 가을 음악회가 끝나고 그다음 주일에 저를 호출하셨죠. 혹시 음악회 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걱정 속에 달려갔는데, 그 걱정을 오히려 감동으로 반전을 주신 신부님. 정말 열의를 다해 무대를 꾸며주신 가수분들에게 본당에서 준비한 예산이 민망해서 잠을 못 잤다 하시며 건네주신 봉투 3개. 잘은 몰라도 그 당시 신부님 한 달 월급을 봉투 하나씩 담으신 3개월분 월급을 꼭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따로 챙겨 주셨지요. 이건 개런티가 아니고 신부가 주는 용돈이라고 안 받으면 혼난다고 아주 강경하셨죠. 두 가수분도 신부님에게 받는 용돈은 생전 처음이라며 당황해하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저는 더더욱 이게 맞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했지요. (그 뒤로 다른 신부님에게 받은 적은 아직 없습니다.) 아마도 이 용돈의 추억은 제가 100번도 넘게 자랑하고 다녔을 겁니다. 성당 밖에서요. 왜냐하면 제가 성당 행사에 갔을 때 이 신기하고 기쁜 추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 본당 신부님이 부담 느끼실까 봐 그때마다 꾹꾹 눌렀답니다. 지금이야 말씀드립니다. 그때 주신 용돈, 제 주머니에 없습니다. 나만의 용돈이 아닌 공동체가 같이 쓰는 용돈이라는 가르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어딘가에서 유용하게 역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 이후로 신부님이 주신 용돈의 가르침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안부를 드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건강하시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윤화 베드로 신부님.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2면

가위바위보를 아십니까

‘가위바위보’를 처음 한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일단 우리나라는 아닙니다. 가위바위보의 원조는 중국입니다. 중국의 도교 사상에서 비롯되어 장사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숫자놀이 게임인 ‘수권’으로 발전, 그것이 나가사키 무역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수입됐다고 합니다. ‘잔켄폰’이라는 이름으로 사무라이부터 노동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가위! 바위! 보!” 여러분은 주로 어떨 때 가위바위보를 하십니까?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순서를 정하거나 편을 나눌 때? 승부가 지지부진하거나 팽팽할 때? 이기면 기분이 참 좋지요. 졌다고 해도 못 견디게 기분이 나쁘진 않습니다. 설령 졌다고 해서 크게 화를 내거나 고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년 전, 모 광역시 관광과 직원들과 도시 관광 유치에 관한 아이디어로 가위바위보 대회를 하자고 했더니 팀장이란 분이 대뜸 “그거 유치한 거잖아요”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일어나 사무실을 나온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질 않습니다. 가위바위보란 게임이 유치하다면 승패에 대한 과정이나 이기는 방법에 쉽게 통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기는, 부동의 승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가위바위보는 게임 방법이나 규칙이 간단합니다. (게임 방법이 다 동일하지만, 운영 방식이 조금씩 다른 나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고 싶다고 이기고, 지고 싶다고 질 수 없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운에만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깊은 전략과 고도의 심리전이 뒷받침돼야 하는 흥미진진한 게임입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에서는 주로 ‘동전 던지기’를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가위바위보로 합니다. 앞이냐 뒤냐, 그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독백’이며 결정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하지만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입니다. 요즘처럼 대립의 세상이라면 가위바위보 한 판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구식 게임인 이항 대립의 동전 던지기만 하고 있는가? 앞면 아니면 뒷면. 오로지 흑백 논리로만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도 아니면 모’ 식의 중간 결과 없이 성공 아니면 실패, 전부 아니면 전무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위바위보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줍니다. 주먹이 아니면 보자기의 뻔한 싸움에는 양자택일의 대립밖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의 힘자랑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위바위보의 가장 큰 매력은 삼자 견제의 철학이 있다는 겁니다. 가위는 바위에게 지고 바위는 보자기에 지고 보자기는 다시 가위에게 지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임입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보자기’가 단단한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덕’(德)이 있다지만, 이 두 개만으로는 가위바위보를 할 수 없습니다. 바위와 보 사이에 절대 승자를 없게 만드는 반쯤 열리고 반쯤 닫혀 있는 ‘가위’가 있습니다. 가위바위보는 세 개로 하는 겁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해서 결론 내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가위바위보 한 판 합시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2면

마음을 먹습니다

‘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건강과 상태가 결정된다’로 해석되는 서양의 격언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건강과 삶의 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식품학자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라는 학자가 그의 저서에 쓴 “당신이 먹는 것을 말해봐, 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게”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먹는 거’ 참 중요하죠. 일단은 먹어야 사니까. 음식을 먹으면서 에너지를 얻고, 각종 영양소를 공급받아 신체 기능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회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게다가 먹는 과정 또한 먹는 거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먹으면서 생기는 깊은 정감이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식사하면서 맺어지는 유대감은 하나의 문화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먹으면서 해소되는 스트레스, 심리적 만족감까지. 소위 잘나간다는 방송도 보면 기본 소재는 ‘먹방’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먹는 것은 음식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나이를 먹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좀 골똘히 생각하면 나이는 내가 먹는 게 아니고 시간이 ‘먹여 주는 거’ 아닐까요? 먹는다는 것은 내가 직접 나의 필요와 의지로 하는 건데 나이는 내가 먹고 싶다고 더 먹고, 먹기 싫다고 안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에게 억지로 먹이는 거 아닐까요? 간혹 모든 사람이 다 한 살씩 먹었다는데, 어떤 이는 한꺼번에 3년, 4년을 더 얹어서 먹었는지 ‘꼰대’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또 하나 먹는 게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말이 있죠. ‘어디 가서 욕먹고 다니지 마라.’ 내가 스스로 욕을 먹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하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누구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욕을 먹었던 경험이 몇 번씩은 있을 겁니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남이 나에게 먹여 주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먹는 것은 아니지요. 나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과 바로 ‘마음을 먹는 것.’ 보통 해가 바뀌는 신년에 새로운 계획과 의지를 다짐하며 먹는 마음도 있지만, 또 다른 먹는 마음은 신앙으로 먹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마음을 먹는 일입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위로와 희망을 받기도 하고, 힘든 상황을 견뎌내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게 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을 잡고 나란히 뛸 수 있는 마음,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공존해야 한다는 세상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마음을 먹게 합니다.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을 해칠 수 있듯이 맑은 마음을 먹는 방법이 바로 신앙 안에서 먹는 마음 아닐까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란 말도 있지만, 여든까지 글을 모르다가 몇 달 전 문해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열심히 성가를 따라 부르는 어느 할머니의 편안하고 인자한 얼굴에서 분명히 느끼고 배웁니다. ‘아~ 저 할머니도 오늘 맛있는 마음을 드셨구나.’ 비록 책이 말하는 양식은 모자랄지 몰라도 많이 먹고 뚱뚱해도 절대 밉지 않은 예쁜 마음의 비만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앞선 명언에 숟가락을 얹어 봅니다. ‘음식이든 마음이든 먹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22면

‘제 탓이오’를 실천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개그계의 중소기업 장용입니다!” 행사를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나만의 인사말이다. ‘중’보다는 ‘소’에 가깝다. 절대 돈을 많이 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평생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때그때 건건이 주어지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일자리보다는 일거리를 찾아서 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도 중소기업(?)으로서 축제 행사보다는 중소기업이나 관련 협회 행사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행사를 자주 하기가 어렵다. 규모로 보나 예산으로 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직원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으로 전문 사회자를 쓰겠다는 결정은 오롯이 대표의 넉넉한 마음이다. 20여 년 전, 수출도 많이 하는 아주 튼실한 한 강소기업의 송년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담당 부장님은 책임감도 강하고 나름 여기저기 조사해서 준비도 많이 했고, 그의 두 눈에는 행사를 멋지게 하고 싶은 의지가 가득했다. 1부 의식행사를 끝내고 2부 여흥 시간과 만찬을 안내하고 있는데 얼굴이 하얘지셔서 나에게 달려왔다. “홍길동님 축사가 빠졌어요!” 나도 당황스러웠다. 축사 명단에 홍길동이란 이름은 없었다. “주신 명단은 다 소개했고요, 홍길동이란 분은 명단에 없는데요?” “네에? 어디 봐요. 어! 진짜 없네요.” 담당 부장의 얼굴은 홍콩 무술영화에 나오는 강시처럼 더 하얗게 변했다. “어쩌죠? 제가 이분을 빼먹었네요” 하면서 곁눈질로 사장님을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훔쳐본 내 눈에 들어온 사장님의 얼굴엔 이미 천둥이 치고 있었다. “부장님, 괜찮아요. 일단 그 누락된 분은 잠시 후 만찬 때 건배사로 대체하면 되고, 사장님께는 사회자가 실수해서 빠진 거라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혹시나 또 펑크 나는 게 있으면 사회자한테 다 돌리세요. 부장님은 내일도 나와야 하고 계속 직장 생활해야 하잖아요. 나야 오늘 하루 왔다가는 것이고, 사장님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안 부르면 되고. 하하하~!” 담당 부장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전문회사를 안 쓰고 자체적으로 알뜰하게 준비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장면들이다. 나도 이런 경험이 익숙하지 않았을 땐 홍당무처럼 벌게진 담당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어느날 문득 기도문이 떠올랐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래! 이거야!’ 미사 시간에 습관처럼 중얼거릴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실천하자는 생각에 무릎을 치면서 나는 ‘내 탓이오 기법’을 쓰기 시작했다. 종종 ‘내 탓이오 기법’은 담당자들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로 그 담당부장님의 강력한(?) 노력 덕분에 몇 번 더 초대받아 내 일거리는 풍성해졌다. 신앙이 있다는 것, 성당을 다닌다는 것은 크게 대단한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상대방을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양심을 수련하는 것이리라.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22면

감사합니다

공연이나 행사하는 사람들은 5월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는 달이다. 1일 근로자의 날,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9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 부처님 오신 날 등 기념일이 많기 때문이다. 행사 사회자로 초청받는 나로서는 늘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가정의 달인 만큼 나도 내 가정을 풍요롭게(?) 하는 달이기도 하다. 행사가 많은 시즌이다 보니 재능기부를 요청받는 경우도 많다. 가톨릭신자로서 당연히 성당 행사도 가게 된다. 20여 년 전에 일이다. 모 본당에서 어버이날을 즈음한 어르신 위안 행사에 사회자로 초대해 주셨다. 가기 전부터 많이 떨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보통 본당 지하에 있는 회합실이나 식당에서 하는 행사는 많이 진행해 봤지만, 성전에서 하는 행사는 처음이었다. 문제는 미사 때나 다른 예식이 있을 때 성사(聖事)가 거행되는 곳이고, 미사 중에 성체와 성혈이 축성되는 곳인데, 아무리 행사라 해도 과연 내가 올라가서 웃기고 가볍게 해도 되는 건가? 복사를 서 본 경험조차 없는 나로서는 제대 앞에 선다는 것이 무척 신경쓰였다. 늘 신부님만 서 계시던 자리에 선다고 하니 긴장도 됐다. 환호와 박수로 행사가 시작됐다. 멋지게 여는 말을 한다고 했는데, 멘트가 꼬였다. 늘 하던 말인데 발음도 새고, 긴장감이 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 이게 뭐지? 횟수로 보나, 각종 다양한 무대 경험으로 보나 이럴 수는 없는데?’ 순간 입술이 말랐다. 무조건 반사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십자고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에는 워낙 당황스러워 몰랐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예수님께서 ‘도와주세요’라는 내 목소리를 들으신 게 분명했다. 다시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이 포근해지면서 긴장했던 어깨가 풀리고 앞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이 한 분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호~ 어머님, 오늘 머리 잘 나왔네요~” “자매님은, 결혼하셨어요? 너무 젊어 보여서 얼핏 봐서는 모르겠네요.” 객석에 웃음이 터지면서 무대가 풀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등을 토닥토닥 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90분 정도로 예정했던 행사는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끝이 났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본당 측에서도 주로 생활 성가 가수분들을 초대했었는데, 개그맨을 초대하는 행사는 처음이라 사목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대만족. 나도 참 좋았다. 더더욱 기분이 좋았던 것은, 함께 무대를 꾸며준 가수들의 개런티만 말씀드렸는데 생각지도 않게 신부님께서 제 수고비까지 챙겨 주시는 것이다.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어르신들의 따뜻한 악수와 칭찬을 받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봐요, 사목회장님 내가 끝내줄 거라고 했잖아요. 오늘 행사 너무 즐거웠죠?” 신부님의 격앙된 목소리에 중년 신사 한 분이 계면쩍게 웃고 계셨다. 아마도 사목회장님이 다소 우려했던 장본인인 듯했다. 지하에서 올라오며 사무실에 들렀다. 내가 받은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본당 헌금 봉투로 바꿔 고대로 넣고 나왔다. 말 그대로 최고로 기분 좋은 감사헌금이었다. 다시 성전으로 올라갔다. 성호를 긋고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우리 둘만 아는 인사를 나눴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22면

어머니의 성호

“엄마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형 오면 밥 잘 챙겨 주고 있어. 많이 늦지는 않아.” 고등학생인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5살 차이 동생은 엄마가 집을 나서며 남긴 말씀을 늘 내게 전했었다. 자식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을 못하시고 가끔 어머니가 볼일 보신다는 그 ‘어디’는 어디일까? 그 어디를 다녀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어느 날은 밝아 보였고, 어느 날은 신경질적이고 어두워 보였다. 방 두 칸의 전세를 살면서 삼 남매를 키우고 있는 우리 집의 살림은 누가 봐도 넉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주일이면 사나흘은 머리를 동여매고 있었고 늘 아프다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41세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젊은 나이였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어머니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가 무거웠을 거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쪼들리는 살림에 그렇지 않아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욕심 많은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꽉 막힌 듯한 일상이 나아질 수 있는 묘수를 찾던 어머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점집이었다. 어머니는 점집에 다녀오신 후 종종 그 결과를 말씀해 주셨는데 어린 내 기억에도 받아온 점괘가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꽤 여러 번 다니셨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도 어머니는 그 어디를 또 갔다 오셨다. 며느리에 대한 검증(?)이 궁금해서였다. 다행히 점괘가 나쁘게 나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큰 반대 없이 결혼을 했고 아내도 결혼하고 한동안은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어디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성당에 나가고 싶단다. 불규칙한 일정에 바쁘다는 핑계로 냉담 아닌 냉담을 하던 나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 뭔가 뒷머리를 세게 맞은 듯 ‘띵’했다. 그동안 신자인 내가 성당에 같이 다닌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내는 교리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구역 모임도 열심히 하고 성당 일에 진심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그 ‘어디’는 일체 발길을 끊었다. 어머니에게도 그 ‘어디’는 사라졌다. 지금은 어머니도 식사 전에 성호를 긋는다. 신기하게도 성호를 긋는 어머니 모습이 대견하다. 예의에 어긋난 표현이지만, 아마도 어머니보다 한참 전에 세례를 받은 나로서는 그렇게 보이는가 보다. 성당에 같이 나가자고 할 때 그렇게 화를 내시던 어머니도 2010년 세례를 받으셨다. 어떻게 세례받을 생각을 하셨냐고 여쭤보니 며느리가 성당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하신다. 남동생도 제수씨도 조카들도 다 세례를 받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위령미사에 가족 모두 참석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 뿌듯하고 편안하다. 아직 남은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데 잘 안되는 것이 있다. 혼자 지내시는 어머니 마리아 자매님께 성당 노인대학에 나가시기를 권유하고 있는데, 영 반응이 없다. 물론 마리아 자매님의 이유도 이해는 된다.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하신 어머니가 사람들이 많은 노인대학에서 한글을 더듬는 것이 창피해서 가기 싫으시단다. 노인대학도 며느리가 다니는 모습을 보고 다니시려나? 이제 환갑을 갓 넘은 며느리가 벌써 노인대학을 나가기는 그렇고. ‘아하!, 10년 정도 지나면 가능하기도 하려나?’ 마리아 자매님의 90대 중반 성당 노인대학 입학을 기대해 본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22면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겐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임신했을 때부터 잦은 병원 진료로 정말 어렵게 얻은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거 먹기를 즐기는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대뜸 부산에 있는 조리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부산에 있는? 아니, 얘가 벌써 우리와 떨어져 살고 싶어 하나? 아니면, 꿈이 셰프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일주일만의 설득으로 조리 고등학교는 접었습니다. 맹모삼천지교까지는 아니지만, 중3 1학기 말, 우연 반 의도 반으로 부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운이 좋아 목표로 삼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예민한 시기에 환경이 바뀌어서 여러모로 눈치도 보게 되고 걱정스러웠는데, 나름대로 큰 문제 없이 잘 적응하고 있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가겠다는 겁니다. 제 직업도 그렇고 혹시나 했는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지요. 왜 거기를 정했냐 물었더니, 연기가 하고 싶어졌답니다. 재미있을 것 같다네요. 평소에 아들에게 ‘네가 재미있는 거 하라’고 했던 저의 말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입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애 엄마도 기도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수시로 삼성산성지, 남양성모성지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발이 좋다는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고 부천에서 103일 동안 빠짐없이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옆에서 지켜보는 아비요 남편인 저는 늘어나는 날짜만큼 부끄러움이 쌓여 갔습니다. 아내는 얼굴도 핼쑥해지고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힘들면 그만하라 했더니 절두산순교성지 올라가는 언덕이 경사가 꽤 있는데 힘든 줄 모르겠답니다. 예수님께서 밀어주시는 느낌도 들고, 가볍게 즐겁게 하고 있답니다. 총 6개 대학 연극영화과에 응시했습니다. 결과는 모두 낙방. 공부만 중시했던 학교에, 없던 연극부를 만들어서 교장 선생님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예술제를 만들었던 열정적인 아들이었는데 말입니다. 본인도 기운이 쭉 빠졌고, 저도 난감했습니다. 실망이 더 큰 사람은 애 엄마였습니다. 전쟁의 전리품이 하나도 없는 셈이 된 것이지요. 세 식구가 상의한 끝에 재수를 결정했습니다. 전리품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내 스텔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서울 화양동에 있는 모 대학에 예비번호 4번이라도 받은 건 희망을 주신 것이요, 전리품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企圖)하고 기도(祈禱)한 사람은 뭔가 신호를 받은 모양입니다. 재수가 시작됐고 스텔라는 인천교구 중2동성당에서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를 비롯해 또 수시로 기도발 좋다는 성지를 신나게 찾아다니며 기도(企圖)하고 기도(祈禱)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응답이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응답이 왔습니다. 지난해 깜빡하고 못 주신 것에 보너스까지 얹어주셨는지 꿈에 그리던, ‘넘사벽’이라 생각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아들을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례를 받은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내 스텔라를 통해 체험했지만 정말 기도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아내의 기도에 기대는 제 자신을 오늘도 반성해 봅니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22면

신기한 10대

“크게! 세우자! 대건!” ‘크게 세우자’는 모교 인천대건고등학교 동문들이 장난삼아 신나게 외치는 구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는 설레는 마음은 입학하던 날부터 시작됐다. ‘그래도 고등학교니까 더 멋있겠지?’ 입학하던 날, 내 눈에 들어온 대건고등학교는 며칠 전 졸업한 선인중학교보다 멋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1998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사한 모교는 당연히 시설도 좋고 근사하다.) 실망한 기색이 만연한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있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녹이 슬어버린 학교 교문 옆에 학교와는 자태가 전혀 다른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던 것이다. 화수동성당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아하, 역시 천주교 학교라서 성당이 큰집, 학교가 작은 집인가?’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생활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큰집에 꼭 가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금 같은 일요일엔 안 가도 됐다. 정확한 요일은 기억이 흐려졌지만, 주중에 한 번씩 미사를 드리러 갔다. 그렇게 나는 가톨릭교회를 만났다. 어린 시절에는 성탄절에 빵도 먹고 사탕도 먹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 재미로 교회를 다녔지만 1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는 반강제(?)로 성당에 가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녀님이 가르치시는 교리 시간도 있었다. 신기했다. 언제나 신비하고 차분한 모습의 동네 근처 수녀원 수녀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느님 얘기, 예수님 얘기, 성모 마리아님 얘기를 하면서 졸고 있는 우리에게 호통치시는 수녀 선생님은 훈육 선생님 다음으로 무서웠다. 더 신기한 것은 교리 시간이 한 주 두 주 지나면서 몇몇 친구들이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확실히 세례를 받은 친구들은 혼날 일이 없었다. 나도 그즈음에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례를 받은 성당은 학교가 있는 화수동성당도 아니고 집 근처 성당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우리 동네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그것도 두 번씩 갈아타고 가야 하는 만수3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쁜 여학생들이 많다고 나를 꼬드긴, 아니 선교한 친구들이 다니는 성당이었다. 그 성당에서 토요일마다 또 교리 공부를 했다. 주중엔 학교에서 주일엔 다른 동네 성당에서. 이 얼마나 열정적인 예비신자인가? 친구들의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얘가 여기서 여자 친구를 찾는 거 아니냐?’, ‘설마, 쟤가 신부님이 되려고 하는 건 아니지?’ 등등. 모든 추측은 다 빗나갔다.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자라나는 흑심은 다른 데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응원단장을 했던 끼를 마음 놓고 발휘할 수 있는 시간, 바로 교리 시간이 끝나고 이어지는 오락 시간이었다. 나에게 교리 시간은 단순한 요식 행위였고 오락 시간은 정말 즐겁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교리 공부 시간 학생들의 출석률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나의 능력인가? 본당 신부님의 은혜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매주 성당에 가는 나는 걱정도 없고 매일 신나는 10대였다. 남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 나의 신앙이 돼버렸다. 그렇게 내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10대는 점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찬미 예수님!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1-12 제342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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