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전하는 말

완성하고 보니 꼬박 10년이 걸렸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 이야기다. ‘바람이 전하는 말’은 작곡가 김희갑의 인생과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이다. 김희갑, 1970년대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에서부터 양희은의 <하얀목련>, 혜은이의 <열정>, 김국환의 <타타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한 바로 그 작곡가다. 그뿐인가. 온 국민의 애창곡인 정지용 시인의 <향수>, 올해 3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도 그의 작품이다. 너무 많아 작곡자 본인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그의 작품 수는 약 3천 곡. 김희갑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6년 시작되었다. 칠순을 기념하는 헌정 음악회 ‘그대, 커다란 나무’를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리면서 공연의 작가로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노래가 모두 한 사람의 곡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 후 가끔 부부 동반으로 만나 맥주도 마시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이번엔 인품에 반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나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늘 편안한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연장자라 하여 가르치려 하거나 ‘대가’라 하여 다른 이를 낮추어 보지도 않았다. 2014년 봄, 다큐멘터리 창작자인 우리 부부는 카메라를 들었다. 공연이나 연주회, 가족 모임 등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촬영을 시작했다. 2016년 신사동의 ‘룰라톤’에서 인터뷰할 적만 해도 선생님은 기억력이 꽤 좋았다. 난청이 시작돼 큰 소리로 질문해야 했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다. 그러다 본격적인 촬영을 하려던 참에, 코로나19로 세상이 닫혔다. 선생님이 사시는 곳은 실버타운이라 더더욱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2021년 겨우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인터뷰했을 땐 이미 많은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한 터였고, 난청이 심해져 대화가 어려웠다. 대화가 어려워지면 선생님은 예전의 그 맑고 순진한 미소로 웃기만 하셨다. 1936년생인 선생님의 시간은 우리와 달랐다. 속수무책으로 푹푹 사라졌다. 이러다 영영 다큐멘터리가 완성되지 못하는가보다 싶어, 선생님과 함께한 음악과 시절을 말해 줄 주변 분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눈동자>를 구성지게 부르는 장사익, <타타타>로 인생이 바뀐 김국환, 지금도 <열정>으로 통하는 혜은이,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 20여 명의 가수들과 연주자들, 평론가들과 뮤지컬 음악 감독을 만났다. 만나서 인터뷰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혹여 선생님께 이 영화를 보여드리지 못하게 될까 싶어 편집 작업을 서둘렀다. 영화는 완성되어 지난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가톨릭영화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할 때까지도 선생님은 극장에 나오지 못하셨다. 선생님의 컨디션이 좋아지길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아 극장은 아니지만 계신 곳 가까운 곳에서 상영회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그날 영화를 보시며 아이처럼 활짝 웃으셨다. 영화 속 혜은이의 말처럼 대중음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또 위로’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노래가 있어서 한고비 한고비 잘 살아왔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가지만, 다행히 작곡가 ‘김희갑’이 남겨준 수많은 노래는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의 노래에 기대어 많은 날을 또 살아갈 것이다. 더 많은 이와 김희갑의 음악과 인생을 나누고 싶어 올가을 영화를 개봉하려고 한다. 11월이 될 것 같다. 여덟 번의 ‘일요한담’ 연재를 마치며 개봉 소식을 미리 전한다. 길고 지루할 여름, 애창곡들과 함께 잘 견디시고 가을에 극장에서 꼭 뵙기를!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2면

공간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3년 전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으로 촬영을 다닌다. 지금은 그저 인적 없는 고갯길이고 갈대 흔들리는 강둑이나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인 곳들. 그 한쪽 곁엔 표지판이 서 있다. ‘여순1019사건’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시다. ‘경찰은 이곳에서 주민 30여 명을 네 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이 작은 표지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무심코 지나쳤을 공간에서 시간을 본다. ‘기억은 평범한 순간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중에야 그들이 남긴 상처에 의해 기억된다’는 크리스 마크의 말처럼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 남아 있는 공간, 그 상처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10여 년 전, 남편은 혼자서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터널과 굴, 참호와 진지, 탄광을 찾아다녔다. 컴컴한 지하에 들어가서 별로 찍을 것도 없는 굴 속을 촬영하기 시작한 지 4년, 대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따라가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하 공간에 살았던 또 일했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온천으로 알려진 관광지인 일본 미이케 탄광. 그곳은 92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나가사키의 하시마섬과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그곳뿐 아니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오름 360여 개 중 120여 개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결호작전’의 지하 진지였다. 송악산에도 수월봉에도 일출봉에도 제주도민들의 노동과 굶주림과 고통으로 만들어낸 지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는 그야말로 온 섬이 눈물 구멍이었다. 내가 선 땅의 시간을 알아가면서 그 공간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고 해서, 그저 웃고 먹고 떠들며 놀다 올 수는 없었다.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선 이 땅, 저 아래는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시간이 남겨져 있다. 마을 입구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의 나고 자람을 지켜보며 나이테를 넓혀왔듯이, 이 땅에도 그 위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간이 스며들며 쌓여왔다. 어떤 땅은 슬픔이 가득 차 있고 어떤 땅은 한이 서려 있고 어떤 땅은 축복이 깃들어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땅, 그 공간의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슬픔이 있다면 위로를, 한이 있다면 해원(解冤)을, 축복이 있다면 감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맨 끝, 시간의 겹 맨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끝에, 그래서 맨 앞이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슬픔과 한이 서린 공간에 가게 된다면, 먼저 그 공간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역사, 특별한 사건은 기억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 그것이 맨 앞에 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그곳을 오래 걷거나, 풍경을 감상하고 또 즐거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시간을 그 공간에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의 시간이 모두 흘러넘치도록 말이다. 우리는 공동의 사건을 기억하며 위로하기 위해 표지와 기념의 장소를 만든다. 아프고 억울한 사회의 공동 기억은 지우거나 잊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치유되기 때문이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2면

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필사적으로 필사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게 독서는 두 번 읽는 것이었다. 눈으로 한번 읽고 손으로 쓰면서 한 번 더 읽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로 옮기기도 하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단편은 아예 전체를 다 필사했다. 문장은 내게 스며들었고 필사는 습관이 되었다. 새해가 되면 두꺼운 노트를 준비하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무술을 연마하는 듯 필사를 시작했다. 연말이 되면 빛나는 문장들이 빼곡히 적힌 노트가 뿌듯하게 남았다. 필사를 하려고 독서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방송 원고를 보내고 맥주 한 잔을 옆에 두고 천천히 써 내려가는 필사였다. 원고를 쓰느라 쌓인 피로를 다른 글을 쓰며 풀었다. 좋아하는 책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고 애정하는 색이 담긴 만년필이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매일 읽고 매일 쓰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내 삶의 표어였다. 필사의 독서는 환희였고 보람이었으며 나의 성실한 습관이었다. 소리 내어 독서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필사 이전의 독서 방식이었는데 말 그대로 낭독을 했다. 눈으로 읽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맛이 달랐다. 어떤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작가가 얼마나 리듬감 있게 쓴 글인지 느낄 수 있다. 시나 에세이를 읽을 때 특히 좋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정끝별 시인의 ‘은는이가’ 같은 시를 읽을 때면 가슴이 설레도록 좋았다. 내가 쓴 시도 아닌데,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나무 아래서도 읽고 창가에 앉아서도 읽었다. 시인이 쓴 시는 내 목소리를 통해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날아갔다. 그럴 때 나는 읽는 게 아니라 노래한다. 그렇게 노래한 글들은 마음에 오래 남아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슴을 쭉 펼 수 있게 해 주었다. 낭독의 독서는 위로였고 기쁨이었으며 나의 비밀스런 독창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함께 읽는 ‘동아리’ 독서다. 다양한 독서토론 모임을 통해 벗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도서관 독서동아리, 동네 책방 책모임, 녹색평론 읽기 모임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모여 책을 읽고 밥을 먹는 모임까지. 15년 가까이 지속되는 모임도 있다. 함께 읽는 독서는 풍성해서 참 좋다. 혼자 읽을 때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책들만 읽게 된다. 어려운 책,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은 읽을 기회조차 없다. 그러나 동아리에서는 책을 고를 때부터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모임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만큼 추천하는 책들은 전 분야에 걸쳐 무궁무진하다. 그뿐 아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해보면 하나의 책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만나게 된다. 혼자 읽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세상을 알게 되고 발견하지 못했을 문장들을 찾아낸다. 지루하고 힘든 ‘벽돌책’ 독서도 동지가 있어 밀고 끌어주어 완독을 가능하게 해 준다. 혼자 읽기도 좋지만 함께 읽기는 더 좋다. 책은 참 묘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참 한결같다. 책 속에는 분명 길이 있다. 하여 읽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길을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분명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신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독서의 축복이다. 필사를 하며 읽거나, 소리 내어 읽거나 함께 읽거나 어떤 방법도 좋다. 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2면

사진의 의미

나에게는 만나보지 못한 외할아버지가 있다. 해방 이후 가치와 이념의 대혼란을 겪던 1949년, 그는 젊은 아내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북으로 떠났다. 가는 이도 보내는 이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줄 알았기에 작별의 인사는 짧았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으로 간 아버지’가 있는 남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었다. 남매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오빠인 외삼촌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야 남매는 그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헤어질 당시 세 살과 여덟 살이던 남매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아버지의 모습은 희미하기만 했다. 사진, 어딘가에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북으로 간 가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얼굴이 드러나는 사진은 이미 태워지고 버려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찾았을까? 처분의 운명을 피한 단 한 장의 사진이 남매의 손에 들어왔다. 고향 집 앞에 나란히 선 두 명의 청년. 하지만 남매는 그 두 사람 중 누가 아버지인지 가려낼 수가 없다. 어떤 날은 동그란 얼굴의 왼쪽 청년이, 어떤 날은 안경을 쓴 오른쪽 청년이 아버지일 것 같다. 결국 남매는 두 청년을 모두 아버지라 여기기로 했다. 때로 쓸쓸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매에게 사진은 아버지가 있었다는 유일한 징표였다. 엄마를 모시고 강릉으로 2박3일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 손녀도 다 두고 오로지 엄마가 낳은 4남매만 동행했다. 우리는 모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고 깔깔거리며 바닷가를 거닐고 오죽헌을 둘러보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그러다가 마지막 여정은 사진관이었다. 우리는 여러 포즈로 가족사진을 찍었고 다음은 엄마의 독사진 차례였다. 엄마는 준비한 새 옷을 입고 더 곱게 화장을 하고 멋지게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뇌경색으로 표정이 사라진 왼쪽 얼굴이 덜 보이도록 신경을 써서 포즈를 취했다. 훗날 인화된 사진을 보고 엄마는 무척 마음에 든다 하셨다. 그리고 당부하듯 덧붙이셨다. 이 사진으로 엄마를 기억하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사진은 세상에 남겨질 또다른 자신이었다. 핸드폰 속 사진 보관함을 열어봤다. 거기엔 ‘34359’라는 엄청난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찍은 사진의 숫자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보기 전에, 찍는다. 우리는 찍음으로써 기억하고 찍은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단 한 장의 아버지 사진이 절실했던 어머니와 달리, 지금 우리에게 사진은 ‘삶을 구성하고 연출하며, 공유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사진의 숫자만큼 우리의 기억은 단단해지고 추억은 풍성해지고 있는 것일까? ‘34359’. 디지털 시대에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도 나는 잊지 않고 싶다. 어떤 사진은 여전히 삶을 증명하고, 누군가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람을 꺼내어 보여주는 창이다. 사진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2면

내가 너를 안다는 그 말!

오랜 친구들이 있다. 십대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헤아리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타까운 첫사랑도 알고 꿈을 찾느라 흘린 땀도 알고 엄마로서 딸로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도 안다. 하지만 처음 만날 때는 똑같은 단발머리였는데 이젠 다르다. 살아가는 도시도 자주보는 사람도 지지하는 정당도 다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친구가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물으나 마나다. 안다. 참아야 한다. 부자 지간이라도 종교와 정치 얘기 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상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니, 친구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서 그 거짓의 선동에서 헤어나오라고 소리치고 싶다. 어떤 날은 그 후보가 싫으니 친구까지 이상하게 보인다. 이래저래 저 혼자 속이 시끄럽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같은 학교를 다녀 어릴 적부터 알고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는 사이, 이 사람은 친구일까? 지인일까?” 예리한 질문이었고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선거에다 질문까지 겹쳐 복잡한 마음으로 무릎이 아프도록 걸었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보다가 ‘폭삭’ 울었다. 나를 울린 드라마는 ‘폭삭 속았수다’ 였다. 명장면 하나가 있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세상 풍파와 시련을 겪은 애순이 치매로 기억을 잃은 할머니 곁에 앉아 있다. 애순이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할머니 이는 까막새가 안 갖다 주잖아, 이제 내가 해 드려야지.” 그때 할머니는 천천히 애순의 손을 잡고 말한다. “니 속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그 한마디에 애순은 눈물보가 터지고 만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세월의 기억을 다 지운 듯한 할머니였지만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손녀가 가장 마음 아픈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힘들다 속상하다 말한 적 없지만 할머니는 듣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속을 다 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다는 것은 그런 힘이 있는 말이다. 그래, ‘친구’는 속을 아는 사람이다. 또 다른 나, 그래서 말 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알고 눈물을 알고 짐을 아는 사람이다. 함께한 시간 속에 쌓인 깊은 이해, 그리고 형식보다 진심이 앞서는 마음,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연결이 바로 친구인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그의 짐과 허물을 같이 져줄 수 있다면 그는 절친이다. 우리가 언제 정당의 지지 성향을 보고 친구를 먹었던가! 그랬으면 이렇게 오래 함께 할 리도 없지만 친구일리도 없다. 그저 지인일 뿐. 그날 밤 굳이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읽었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를 고이 적어 친구에게 보냈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이것은 고백이자 다짐이었다. 너는 나를 아는 사람이므로, 나 역시 너를 앎으로.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2면

행복의 소리를 듣다

오월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아이와 같이 달린다. 얼굴과 팔뚝에 바람이 닿는다. 참 좋다. ‘행복’이라는 관념에 몸이 있다면 그건 ‘바람’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내 곁에 있고, 떠난 뒤에야 항상 또렷해지는 바람.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바람이 팔에 닿는 속도, 바람이 닿는 그 온도가 바로 행복의 느낌이라고. 늦은 오후 아이를 앞세우고 천천히 달려가며 아이를 바라본다. 작은 몸에도 넘어지지 않고 참 잘도 달린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면 살짝 일어서서 페달에 번갈아 체중을 실어 밟으며 달려간다. 자전거에 서툰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사실 나는 마흔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래서 여전히 자전거는 좋으면서도 불안하고 두렵다. 행복처럼. 최초부터 나에게 자전거는 핸들을 잡고 페달을 구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어 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였고 자전거는 아버지였다. 학교에 갈 때면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탔다. 아버지의 등 뒤에 앉아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면 아버지는 힘차게 페달을 굴렀다. 그렇게 둘이 함께 바람 속을 달려갈 때 나는 행복했다. 교차로를 지나며 아버지가 속도를 높일 때면 체구가 작은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더욱 바짝 달라 붙었다. 아버지의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내 왼쪽 귀에 들려왔다. ‘쿵쾅쿵쾅’ 내 심장도 그렇게 아버지의 심장 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을 언덕을 몇 번 넘어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내려주고 직장으로 달려가셨다. 나는 언제나 교문 앞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를 오래 바라 보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그냥 자전거에 앉아 비를 맞기엔 날씨가 조금 추웠다. 아버지는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 멈춰 서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나를 태웠다.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잠시, 내 손에 버스비가 없었다. 안내양 언니에게 무어라 해야 할까 작은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가까워지자, 너무 두려워 현기증이 났다. 드디어 버스는 정거장에 멈췄고 버스 문이 열리자 아버지가 보였다. 흠뻑 젖은 아버지는 벌써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를 보니 와락 눈물을 터졌다. 아버지는 안내양 언니에게 버스비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내게 달려오셨다. 그 아끼는 자전거가 쓰러지는데도 상관치 않고 내 앞에 앉아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비에 맞지 않게 하려고 버스에 태우는 것만 생각했노라고, 너를 태워 보내고야 버스비를 주지 않았단 생각에 지름길로 달려 버스보다 먼저 왔노라고 아버지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가 아닌 가슴에 안겨 한참 울었다. 안도와 행복의 그 순간. 그때 아버지의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들렸다. 아이와 함께 호수까지 달려간다. 나보다 힘이 좋은 아이는 엄마와 속도를 맞추느라 천천히 달려준다. 내가 호수를 한바퀴 도는 동안 아이는 두바퀴를 돈다. 그러다가 제 속도에 맞게 쌩쌩 달려 금세 호수를 한바퀴 더 돌고 내 앞으로 온다. 행복과 충만함이 가득 찬 얼굴. 나는 아이를 부른다. 벤치에 앉은 내 앞으로 아이가 다가오면 나는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본다. 쿵쾅쿵쾅 심장이 크게 뛴다. 아이가 내게 묻는다. 어떻게 들리느냐고. 그러면 나는 내 가슴에 아이의 귀를 대어준다. 지금 네 심장소리는 꼭 이렇다고. 아이가 내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아이를 안고 나는 오래전 떠난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바람 속에서 듣는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2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나는 다큐멘터리 작가다. 글로도 쓰고 영상으로도 쓴다. 내 직업을 밝히면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 또 묻는다. “오래 살피고 깊이 질문합니다.” 별로 친절하지 못한 답이지만 실상이 그렇다. 질문하는 자, 그것이 나의 업이다. 하여 나는 이름난 의사에게도 묻고, 남부군 마지막 전사에게도 묻고, 대통령에게도 물었다. 그것이 나의 일이었으므로 나는 질문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세상의 깊이를 쟀다. 의학 다큐멘터리 작가로 17년간 일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이름난 의사를 찾아온 이들이니 중한 병을 앓는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다시 수술장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들이었다. 생과 사, 그 갈림길에 선 이들이라고 하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도 물었다.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살아서 수술장 문을 나온다면, 다시 살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정해진 시간을 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누군가를 통해 인생을 배워야 했다. 그러니 질문은 늘 같았으며 놀랍게도 누구의 대답이든 늘 비슷했다. “다시 살수 있다면, 몇 년 만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가족들과 여행을 하고 싶어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들의 소망은 살아서 가족들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여행일까? 느닷없이 유물 유적이 보고 싶다거나 이름난 건축물이나 절경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여행을 떠올리는 이유는 하나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추억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행이라는 말 앞에 달린 전제, 사랑하는 이들 혹은 가족들과 ‘함께’다.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여행은 무엇인가? 나를 일로부터 해방하게 해 주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순수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일에 좇기고 버스 시간에 허덕이고 성적이나 성과에 눈치 보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 하고 맛있게 먹고 ‘아, 좋다’ 하며 온전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것이다. 진정한 나, 진정한 당신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의 최상의 표현이 ‘여행’인 것이다. 그 다음 많은 답은 “사랑한다” 였다.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딸과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쉽다면 쉬운 그 말을 왜 하지 못 했을까? 후회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쉬운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면 그 사랑에 조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가 어떤 상황이든 너를 무조건 지지하고 추앙하며 환대한다는 것이다.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는 이들은 아프게 깨우친다. 아프게 깨우친 이들을 통해 우리는 또 배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천애고아처럼 떨어진 한 생명, 가장 가깝게 살았던 이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상대가 가진 생명에 대한 최대의 찬사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일로써 또 배움의 방편으로써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답을 들고 나는 세상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나는 오늘 당신에게 묻는다. 유한한 당신의 시간 동안, 무엇을 꼭 하고 싶으냐고.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6면

꽃이 찬란한 이유

이번 봄도 찬란했다. 꽃 덕분 이었고 신록 덕택이었다. 겨울이 너무 길다 싶을 때, 무채색을 못 견딜 것 같을 때 느닷없이 꽃들이 핀다. 봄꽃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도무지 생명이라곤 없는 것 같은 마르고 앙상한 가지에서 첫 꽃들이 터져 나온다. ‘설마 여기서 꽃이 피겠어?’,‘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어?’ 싶은데 꽃이 핀다. 꽃이 피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감사한데 꽃이 피면 비로소 그 나무를 알게 된다. 그러니까 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벚나무구나, 목련이구나, 산당화구나 그렇게 이름을 부르게 된다. 지난 삼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있었다. 그때 그곳은 온통 꽃밭 이었다. 색을 가진 모든 꽃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기서 흰빛이라 할지 연한 분홍이라 할지 안개처럼 몽글한 꽃을 보았다. 노오란 꽃이 핀 초록 들판 위로 줄맞춰 심어진 끝없는 꽃나무들. 벚꽃보다는 꽃잎이 크고 꽃술이 짙었다. 가까이 가면 연연한 향기가 피어났다. 온갖 지식을 동원해 봐도 무슨 꽃인지 답을 낼 수 없었다. 꾀를 내어 나무 아래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연초록 들풀이 피어나는 나무아래 조개처럼 생긴 갈색의 단단한 껍질이 보였다. 혹시 아몬드 나무? 그럼 이 꽃이 아몬드 꽃인가? 고흐의 그림 한점이 떠올랐다. 그의 그림 중 가장 환하고 빛나는 푸른빛을 띤 작품. 동생 테오의 아들이 태어나자 선물로 그린 꽃이 바로 ‘꽃피는 아몬드 나무’다.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에서 아를로 떠났다. 어둡고 숨 막히는 파리의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던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아를은 봄꽃이 피어나는 시절이었다. 긴 겨울을 이기고 스스로의 존재를 감출 수 없어 터져 나오는 환한 빛이 바로 아몬드 나무였다. 고흐는 그 찬란한 꽃을 보고 강렬한 생명을 느꼈고 이때부터 ‘아몬드꽃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시 잘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아몬드 꽃에서 느낀 것이다. 동생 테오로부터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1890년 1월, 고흐는 조카를 위해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려 선물하며 이런 편지를 덧붙인다. ‘너희 부부 소식에 나는 다시 희망을 느꼈어. 희망이란 별게 아니야. 풀처럼 꽃처럼 흙처럼 자연을 느끼는 일이지.’ 테오는 자신의 첫 아이에게 형의 이름인 ‘빈센트’를 붙여주었고 훗날 그 아이는 자라서 ‘고흐 뮤지엄’의 설립자가 된다. 우울했던 고흐를 일으킨 것은 아몬드 꽃이었다. 꽃 스스로가 펼쳐내는 빛나는 존재에 대한 감동,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는 그 찬란 때문이었다. 애써 다른 것들과 닮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빛과 모양과 크기와 향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꽃은 자신의 고유성을 찾은 존재의 환호 혹은 신호 같은 것. 나무가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절창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꽃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색으로 나만의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도록 말이다. 당신이 오늘 꽃피면 좋겠다. 당신의 것으로 온전히 추앙 받으며 빛나면 좋겠다. 그러면 일 년 내내 봄날일테니 말이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2면

올인(all in)과 해노비듣

좀 과분한 비유지만, 사도 바오로의 회심과 비슷한 인생전환은 내게도 있었다. 1980년대 한국수묵운동의 일원으로 서울 인사동을 누비고 다니던 먹 냄새 절은 화공이 지금은 한가한 산골에서 세상의 흐름과 비껴나 있으니, 그 먼 간극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명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리라. 그게 지금의 내 좌표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삼십 대 중반, NGO 단체의 국제회의가 있어서 한 달 정도 유럽에 갔다. 여정 중, 독일의 ‘비스 순례 성당’(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모셔졌던 눈물 흘리는 목각 예수성상과의 대면은 나를 단숨에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 마주한 예수님의 눈물이 내 감각증폭기에 윤활유가 되었고, 현재도 멎지 않는 눈물에서 알지 못할 주님의 고통이 내 마음으로 전해져 오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비로운 천장화와 조각품들, 마음이 흐르는 대로 형상이 된 건축의 유려한 선들을 보며, 내게 주신 미술적 탈렌트로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그 일방적 약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내 안의 예수를 따라나섰던 그 사건은 글자 그대로 올인(all in)이었다. 처자식이 있는 몸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고민은 무시한 채, 교회라는 광야(?)로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데, 잘 근무하던 교사직에도 사표를 썼다. 그와 동시에 뛰어든 성당신축 공사장에서 전례미술과 관련된 미술장식을 힘닿는 데까지 작업했다. 하느님이 나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겠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볼 수야 없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성체조배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켜켜이 얽힌 인간관계와 그에 맞선 나의 열정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었고, 나를 좌절의 벼랑으로 몰았다. 혼자의 외로움은 참으로 깊었고, 주님과의 동행은 날마다 서러웠다. 마음도 몸도 병들었고 살림살이도 거덜 났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풀잎에 매달렸던 한 방울의 이슬이 구르고 굴러 바다에 이르듯이, 나는 길을 거슬러 산촌에다 터를 잡았다. 선행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고, 고독한 자기정화마저도 단죄하려고 덤비는 세상을 살다 보니, 모났던 고집도 조약돌만큼 닳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사는 산마을에서는 누군가가 허세를 부리면 당장 들통이 난다. ‘생태계는 확장 없는 생존이 지속되는 곳’이라고 했던 백남준 화백의 말처럼, 원형적 생존본능들이 매 순간 올인하며 서로의 높낮이를 조율하는 곳이다. 이사를 오던 날, 울타리에는 새들이 수시로 다녀갔고, 소나기가 내리자, 제비들이 전깃줄에 어깨를 붙이고 모였다. 속 깃털이 젖지 않게 목을 움츠려 교회의 첨탑 모양처럼 주둥이를 하늘로 향하고 눈을 감는다.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새들을 보라’는 성경의 비유가 바로 연상되었다. 그 자체로 그림이고 노래였다.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해가 뜨면 노래하고 비가 오면 듣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작업장의 당호를 ‘해노비듣’으로 지었다. 하루를 닫으며, 애비의 고민을 아는 자식처럼, 하느님의 고민을 넘겨 짚는 아들이고 싶어 그 현판을 올려다본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2면

한티성지가 안겨준 선물

성지순례는 반드시 하느님의 이끄심이 작용해야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성지의 홍보대사가 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 전, 나는 어느 수도회의 제3회 봉헌자가 된 기념으로 대구의 한티성지에 갔다. 삐뚤삐뚤 늘어선 그곳의 무덤들은 순교자들이 치명된 바로 그 자리에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결과라 했다. 박해를 피해 세상과 단절된 오지를 찾아 옹기종기 주님과 함께 살려고 했으나, 그 소박한 꿈마저도 사냥개 같은 군졸들의 광기에 무참히 동강나고 말았던 현장. 거룩한 영혼들은 모두 부활해 떠나고, 지금은 고요한 평화가 되어 골짜기의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무덤들 사이로 이어진 십자가의 길 기도처에서는, 순교의 전날, 하느님과 동거하며 평화로웠던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해서 맥없이 주저앉기도 하였다. 순교자들이 꿈꾸었던 지상의 평화를 묵상하고 있는데, 발 아래로 미니어처같이 나지막한 초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소유를 최소단위로 축약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지냈던 모습에서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비록 생존을 위해 내몰린 마지막 도피처였지만,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꿈꾼 마지막 정주의 모습이었음이 분명했다. 하느님의 일을 일상의 중심에 두겠다는 봉헌의 삶, 발 달린 동물이 뿌리박은 식물처럼 살겠다는 각오를 정주 서원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 일행은 한 명씩 십자가의 길 묵상을 자유기도로 바쳤다. 나는 기도할 때만큼은 미리 말마디를 준비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다른 일은 몰라도,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이 기도라고 생각되어, 순서가 닥치면 그때 입을 열어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해볼 요량으로 그런다. 마침내 나의 순서가 왔다. “제13처, 십자가에서 내려지심을 묵상합시다. 살아가는 곳이 바로 순교할 곳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아직도 정주할 거처를 찾지 못한 나그네이오니, 허락하신다면 제게 당신이 인도하시는 곳에서 당신과 결합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그로부터 한 달쯤 뒤, 일행 중의 한 분이 전화를 했는데, 나의 정주를 위해 줄곧 기도하다가 모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런다. 지금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보자고 그런다. 그러고 난 뒤에 또 기도해 보자고 그런다. 나는 단지 기도만 했을 뿐, 아직 땅을 살 돈을 준비하지는 못했다고 하자, 계약금을 빌려주겠다고 그런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일이 되도록 기도만 하면 된다고 그런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세상에…. 아무튼 그렇게 얼기설기 교묘히 이가 맞물리면서 지금의 작업장 ‘해노비듣’이 지어지게 되었다.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면 그건 분명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꿈을 꾼다. 나에게 일어난 그 기적을 그림으로 엮어, 몇 년 동안 가톨릭 뉴스 사이트에다 ‘하삼두의 정주일기’를 연재했다. 한티성지는 내게 삼랑진의 작업장 ‘해노비듣’을 선물로 주었다. ‘해뜨면 노래하고 비오면 듣지요’를 압축한 ‘해노비듣’을 당호로 짓고, 선물을 준비하듯 자연채집을 하는 중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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