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풀의 씨앗에 바늘을 달아주기까지, 피조물이 졸랐을 하소연과 창조주가 조아렸을 사랑을 상상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들고, 그림자놀이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천덕꾸러기로 빚어 두시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네가 어때서?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온갖 잘난 것들이 설칠 텐데, 그 속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거든요.” “음~ 알겠다. 너의 씨앗에다 바늘을 달아줄게. 널 깔보는 것들이 있으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까지 가서 함께 살아 보아라.” 껄끄러운 그놈의 가시 바늘을 뜯어내어 아무데나 던지다 보니, 신작로 옆 풀숲이 온통 도깨비풀 천지가 된 이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게 틀림없다. 어쩌다 집에까지 붙어 간 풀씨는 애지중지 기르는 화분의 귀퉁이에서도 싹을 틔웠으니, 이 귀찮은 도깨비 풀이 번창한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편애가 빚은 실수 때문이야. 하하하. 성깔, 빛깔, 때깔, 맛깔처럼 ‘깔’이라는 글자가 붙은 말들이 있다. 창조론을 지나 진화론의 페이지에 실린 단어이다.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이 말마디는 서로의 관계나 비교를 드러낼 때 효과를 발한다. “저 성깔을 건드리면 골치 아파!”처럼 그의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 바로 ‘깔’이다. 예술가들은 이 ‘깔’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사물의 특징을 분명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그것만의 특징’이 그들의 그물에 포집되고, 증폭과 과장의 단계를 거치며 재탄생되어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 이것이 예술품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매력도 어쩌면 도깨비 풀씨의 바늘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예술가는 도무지 친절하지가 않다. 친절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고 신비롭지도 않다고 어떤 평론가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 불친절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과 미의식이 성장하게 된다나? 충분히 수긍이 되는 말이다. 암튼, ‘깔’을 대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거북한 일이기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많은 주목거리이고, 독을 품은 보약이다. ‘깔’을 채집하러 마실돌이를 나선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태양의 행로를 따라 목을 빼고, 시냇물의 송사리는 흐름을 거스르고, 언덕 위의 깃발은 뒤로 펄럭인다. 이 단순한 섭리로도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헤매던 길을 찾게 되는가? 내 그릇이 작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가! 작업장의 대나무 울타리도 바람에 서걱대며, “뭐하노? 지금 뭐하노?” 그러다가, 돌아와 작업대에 서면, “그거다! 맞다 그거다!”하고 응원가로 바뀐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에게 경계의 대상이어도, 자연은 도시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그래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행위는 누군가의 처음을 향한 질서회복운동이며 신에 대한 순명이다. 아니, 예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작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둥, 누가 어느 경매에서 어떤 작품을 사들였다는 둥, 마치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그 가식의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깔의 줏대로 바로 서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의 영과 함께 찬찬히 바라볼 일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