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꽃이 찬란한 이유

민경화
입력일 2025-05-07 09:13:28 수정일 2025-05-07 09:13:28 발행일 2025-05-11 제 344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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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도 찬란했다. 꽃 덕분 이었고 신록 덕택이었다. 겨울이 너무 길다 싶을 때, 무채색을 못 견딜 것 같을 때 느닷없이 꽃들이 핀다. 봄꽃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도무지 생명이라곤 없는 것 같은 마르고 앙상한 가지에서 첫 꽃들이 터져 나온다. ‘설마 여기서 꽃이 피겠어?’,‘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어?’ 싶은데 꽃이 핀다. 꽃이 피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감사한데 꽃이 피면 비로소 그 나무를 알게 된다. 그러니까 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벚나무구나, 목련이구나, 산당화구나 그렇게 이름을 부르게 된다.

지난 삼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있었다. 그때 그곳은 온통 꽃밭 이었다. 색을 가진 모든 꽃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기서 흰빛이라 할지 연한 분홍이라 할지 안개처럼 몽글한 꽃을 보았다. 노오란 꽃이 핀 초록 들판 위로 줄맞춰 심어진 끝없는 꽃나무들. 벚꽃보다는 꽃잎이 크고 꽃술이 짙었다. 가까이 가면 연연한 향기가 피어났다. 온갖 지식을 동원해 봐도 무슨 꽃인지 답을 낼 수 없었다. 꾀를 내어 나무 아래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연초록 들풀이 피어나는 나무아래 조개처럼 생긴 갈색의 단단한 껍질이 보였다. 혹시 아몬드 나무? 그럼 이 꽃이 아몬드 꽃인가? 고흐의 그림 한점이 떠올랐다. 그의 그림 중 가장 환하고 빛나는 푸른빛을 띤 작품. 동생 테오의 아들이 태어나자 선물로 그린 꽃이 바로 ‘꽃피는 아몬드 나무’다.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에서 아를로 떠났다. 어둡고 숨 막히는 파리의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던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아를은 봄꽃이 피어나는 시절이었다. 긴 겨울을 이기고 스스로의 존재를 감출 수 없어 터져 나오는 환한 빛이 바로 아몬드 나무였다. 고흐는 그 찬란한 꽃을 보고 강렬한 생명을 느꼈고 이때부터 ‘아몬드꽃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시 잘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아몬드 꽃에서 느낀 것이다. 동생 테오로부터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1890년 1월, 고흐는 조카를 위해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려 선물하며 이런 편지를 덧붙인다. ‘너희 부부 소식에 나는 다시 희망을 느꼈어. 희망이란 별게 아니야. 풀처럼 꽃처럼 흙처럼 자연을 느끼는 일이지.’ 테오는 자신의 첫 아이에게 형의 이름인 ‘빈센트’를 붙여주었고 훗날 그 아이는 자라서 ‘고흐 뮤지엄’의 설립자가 된다.

우울했던 고흐를 일으킨 것은 아몬드 꽃이었다. 꽃 스스로가 펼쳐내는 빛나는 존재에 대한 감동,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는 그 찬란 때문이었다. 애써 다른 것들과 닮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빛과 모양과 크기와 향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꽃은 자신의 고유성을 찾은 존재의 환호 혹은 신호 같은 것. 나무가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절창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꽃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색으로 나만의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도록 말이다. 당신이 오늘 꽃피면 좋겠다. 당신의 것으로 온전히 추앙 받으며 빛나면 좋겠다. 그러면 일 년 내내 봄날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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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