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성체를 향한 인사는 ‘무릎 절’을 해야 한다?

외국에서 미사를 드릴 때 주례 사제가 제대에서 무릎을 꿇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외국인 신자가 감실을 향해 잠시 무릎을 꿇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낯선 풍경인데요. 바로 ‘무릎 절’이라는 전례 동작입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무릎 절은 오른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꿇는 것이며 흠숭을 뜻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향한 흠숭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감실이나 성체 앞에서 무릎 절을 합니다. 또 파스카 성삼일 중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부터 파스카 성야 시작 전까지는 십자가에도 무릎 절을 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274항) 서양에서 무릎 절은 특별한 존경을 나타내는 자세였습니다. 황제와 같이 높은 사람 앞에서 사용하는 예절이었지요. 이 자세는 교회 안에서 주교나 교황에게 인사할 때도 쓰이게 됐는데요. 후에 신자들은 제대, 십자가, 성인 유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성상 앞에서도 무릎 절로 공경을 표현했습니다. 11세기에 들어서는 성체 앞에서도 이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고자 무릎 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570년 출판된 「로마 미사 경본」에 무릎 절이 포함되면서 무릎 절이 전례 안에 정착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평소 무릎 절을 볼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무릎 절 대신 깊은 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전례를 민족의 특성과 전통에 따라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헌장」은 “로마 예법의 실질적 통일성이 보존된다면, 여러 집단, 지역, 민족들을 위해, 특히 선교 지역에서는 정당한 다양성과 적응의 여지가 남겨져야 한다”면서 관할 지역 교회가 결정하고 사도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38항) 한국교회는 유럽식 인사 자세인 무릎 절이 한국의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사도좌의 인준을 받아 깊은 절로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절을 대신해 다른 전례 동작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만이 아닙니다. 일본교회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깊은 절을 합니다. 인도교회는 인도의 전통 합장 자세인 ‘안잘리 하스타’를 동반한 깊은 절로 무릎 절을 대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릎을 굽히는 행위는 자신을 낮춰 온몸으로 순종을 표현하는 겸손과 공경의 행위입니다. 무릎 절에는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이 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실이나 성체 앞에서 우리는 주로 깊은 절로 인사하는데요. 표현은 다르더라도 무릎 절 안에 담긴 마음을 기억한다면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죄와 벌」: 거룩함

현대 종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종교현상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성과 속」이라는 명저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거룩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사회가 세속화와 물질주의로 물들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속세의 삶 안에서 신성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거룩함과 세속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호렙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계약의 궤가 있던 지성소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즉 거룩함은 인간 삶의 터전과 분리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러, 유한함과 죄스러움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거룩함이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필리 2,7 참조) 오로지 신성함만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1860년대 러시아 근대화 시기, 종교·도덕 거부하는 행태 유행 극단적 범죄행위 저지른 주인공, 오만·절망 오가며 내적 분열 소냐의 사랑으로 존엄성 되찾고 신앙 속에 새로운 삶의 길 열어 세계 문학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1860년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농노제 폐지 이후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문제들을 인간 내면의 심리와 도덕성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특히 인간의 죄스러움과 거룩함이 어떻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지식인 청년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고, 허무주의 혹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극단적 공리주의가 유행하였다. 법학도였던 라스콜리니코프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초인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누어지는데, 평범한 사람과 달리 비범한 사람은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도 법률을 범하는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은 극심한 생활고와 빚을 해결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이복여동생을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논리적 세계는 끔찍한 범죄행위를 정당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 같은 비범한 사람에 의해서 처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한 인간의 삶을 공공의 이익에 따라 저울질하고 계산한 후 폐기해 버린다. 그의 죄는 그냥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단순한 법적 차원이 아니라, 한 인간을 수단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이다. 비록 노파가 윤리적으로 부족한 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될 수 없다. 주차장 경비원이 부와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였을 때, 굴욕당한 자존감의 아픔은 몸의 상처와 비교될 수 없다. 살인 후에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면의 양심은 차가운 이성과 관념으로 무장된 주인공의 자기기만과 합리화를 치명적으로 흔들어 버린다. 아무도 보지 못한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로 양심은 그가 자신에게 강요했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열병 같은 오만과 짓눌리는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존재론적으로 고립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내적으로 분열된다. 여주인공 소냐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창녀의 삶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매춘은 당시 러시아의 극심한 빈곤과 사회적 억압을 암시한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국가가 발행한 ‘노란 감찰’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며, 시민으로서 기본권리를 박탈당하고, 최하층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와는 다르게,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소냐의 삶은 동시에 거룩한 희생의 사랑을 보여준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무책임한 계모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나중에 법정에서 계모는 소냐가 ‘노란 감찰’을 받은 이유는 “아이들이 굶어 죽게 되어서, 자기 몸을 판 것”이라고 소리친다. 즉,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과 삶을 희생한 거룩한 죄로 인식된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매개체도 된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참혹함을 온전히 인식하였을 때, 그녀는 매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며 손을 비튼다. 그 앞에 쓰러지고 흐느끼며 말한다, “당신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살해당한 노파뿐만 아니라, 살인자 자신도 겪었을 자신의 인간 존엄성 파괴에 대하여 암시한다. 그리고 꼭 껴안아 준다. 결코 도덕적 무관심, 혹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먼저 그가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도록 초대한다. “네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에 키스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땅에도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하여 큰 소리로 ‘전 살인자입니다!’라고 하세요.” 소냐는 그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전에 그녀의 방을 찾아간다. 그녀는 라자로의 부활(요한 11장 참조) 이야기를 읽어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상징적 장면이 아니다.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부서진 삶 그리고 죄의 깊은 심연 한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삶이 열릴 수 있다는 그녀의 신앙이 실제로 현실 안에서 재현됨을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이끄는 방법은 논쟁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와 함께하며, 그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고 결과에 따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죄의 결과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홀로 짊어지지 않도록 함께 견디어 준다.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고난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간다.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는 ‘참지 못하고 자수해 버린 것’만 인정할 뿐, 여전히 자기 죄악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수하기 전에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한다. 또한 자신을 위해 험난한 이곳까지 따라온 소냐를 “늘 화가 난 말투로 맞았다.” 마침내 그는 소냐가 “원래 그의 삶만을 자기 삶으로서 살아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가 온전히 그를 위해서만 살아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끌려 그녀 발밑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피었다.” “그는 소생한 것이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난 자기의 전 존재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냐의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한 구원과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래로 내려와서, 곁에 머물며, 함께 고통을 겪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였다. 죄를 지워버리거나 정의를 건너뛰지 않고, 죄와 고통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조건 안에 머물며, 그곳에서 인내하며 구원의 빛을 밝힌다. 거룩함의 원천은 오로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 바로 그곳에 거룩함이 머문다. 도스토옙스키는 급격한 근대화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페테르부르크 뒷골목의 지옥 같은 공간을 포기하지 않고, 소냐의 거룩함을 통해 새 생명을 잉태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앎은 믿음을 요구한다

근대의 학문 이론은 앎과 믿음이 서로 보완하고 의존한다는 통찰에 이른다. 앎과 믿음은 고유한 영역을 지니면서도, 서로 필요로 한다. 믿음 없는 앎은 오만이요, 앎을 포기한 믿음은 맹신이다. 앎이 믿음을 요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이성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이성의 인식 능력과 용어 파악 능력을 신뢰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 근본적인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성립할 수 없다. 둘째, 학문은 주로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통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며, 단지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며 ‘중력 법칙’을 배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공간에서 물체가 반드시 동일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100%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력의 보편성을 믿는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조차 실제로는 세계의 질서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학자도 자기의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고, 동료 학자들의 정보에 기댄다. 이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이성의 실험 정신만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협력과 신뢰, 앞선 세대와 현세대의 협력과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다. 넷째, 지식은 실재의 이해에 방향을 맞추고, 원인 중의 원인이자, 개별 실재를 초월하는 존재의 마지막 원천을 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은 경험적으로 체험될 수 없고, 오직 신뢰에 기초한 인격적 관심을 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종교관이 달라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실재를 ‘무(無)’, ‘제일원인(第一原因)’, ‘궁극적 실재’라고 객관적으로 부르고 여기서 멈추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서성이는 철학자나 지식인이 된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하여 ‘신(神)’,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신앙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학자나 신앙인이 되며, 지식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결국 인간의 지식과 존재 추구가 그 마지막 정점에 다다르면, 이제는 증명을 넘어선 인격적 응답과 신뢰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 인격적 투신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가르멜의 성녀 대데레사(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큰 믿음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이라는 처절한 자기 비움을 지나, 큰 믿음을 가지고 존재의 궁극적 원천인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들의 삶과 체험은 앎의 끝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결코 허황된 집착이 아니라, 실재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증명해 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제대에 7개의 초가 올라가는 미사가 있다?

미사 중 제대 위에는 초를 밝혀 둡니다. 전례 봉사를 하는 분이라면 평일미사에는 양쪽에 하나씩, 주일미사나 대축일에는 양쪽에 2개나 3개씩 초가 올라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스카 초(부활초)나 대림초 말고, 제대초만 7개가 올라가는 미사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미사 전례 안에서 초는 단순한 장식이나 조명이 아닙니다. “전례의 거행에는 창조(빛, 물, 불)와 인간 생활(씻음, 기름 바름, 빵을 나눔)과 구원의 역사(파스카 예식) 등에 관계되는 표징과 상징들이 포함”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9항) 빛을 밝히는 초는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초대교회부터 초가 전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엔 주로 저녁 기도 때 주위를 밝게 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다 3세기부터 장례 때, 특히 순교자의 무덤에 초를 사용했습니다. 이어 4~5세기경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예수님을 상징하는 형상들 앞에 초가 놓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초는 세상의 빛이며 부활인 그리스도, 하느님의 현존, 기도, 선행, 봉헌, 희생, 사랑, 희망, 하느님의 은총 등의 상징으로 부각됐고 교회의 전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미사에 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부터입니다. 「그레고리오 성무 집전서」에는 교황의 행렬에 앞서 각각 촛대를 든 7명이 들어왔고, 그 일곱 촛대가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제대 주변에 놓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제대 위에 초가 놓였습니다. 17세기 초반부터 미사에서 제대초 사용이 의무화되고 초의 수도 정해졌습니다. 일반 미사에는 2개, 장엄한 축일 미사에는 6개, 교구장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는 7개의 초가 사용됐다고 합니다. 7개의 초에는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묵시 1,12-13)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대변한다는 상징이 담겼고, 또 교구장 주교가 교회의 일곱 성사를 집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미사’의 준비사항으로 “모든 거행에서 제대 위나 곁에 적어도 두 개, 또는 주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에서는 네 개나 여섯 개, 또는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일곱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 놓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17항)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는 제대의 초는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신자들이 세상 안에서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는 제대 위의 초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빛을 내 안에 잘 담아 보시면 어떨까요. 그 빛이 한 주간 생활 안에서도 은은히 빛나길 바랍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신앙’을 통해 참된 행복을 ‘미리 맛봄’

현대 한국 사회는 전례 없는 성과 중심주의와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되어 있다.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의 자살률과 극도로 낮은 행복 지수는 가변적인 외부 조건인 물질적 성취, 사회적 지위, 타인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현대인의 위기를 여실히 증명한다.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세속적 가치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빈곤과 실존적 불안을 야기하며, 이는 곧 인간다운 삶의 근간을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신앙론은 단순한 종교적 위안의 차원을 넘어, 흔들리지 않는 내적 토대를 구축하고 참된 행복을 회복하기 위한 최고의 전략이 된다. 물질적 가치에 매몰된 현대인 맹목적 정신·우둔한 감각 속에 영적인 선 추구하는 능력 상실 정신의 맹목과 감각의 우둔함이 만연한 현실 토마스는 인간이 신앙의 덕을 잃어버려 영적인 선을 보지 못하는 원인으로 ‘정신의 맹목(caecitas mentis)’과 ‘감각의 우둔함(hebetudo sensus)’을 제시한다.(II-II,15,1-3) 그의 정교한 분석에 따르면, 육욕(luxuria)에서 비롯된 정신의 맹목은 지성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영적인 원리에 대해 반감을 갖거나 낮은 가치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발생한다. 또한 탐식(gula)에서 비롯된 감각의 우둔함은 정신을 무디게 하여 영적인 선들을 고찰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 보편화된 성형수술과 같은 외모 지상주의,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에 집착하는 과도한 소비 열풍은 지성의 렌즈를 좁히는 현대판 ‘정신의 맹목’이다. 감각적인 자극과 즉각적인 만족에만 매몰될 때, 인간의 내면은 무수한 ‘감각적 표상’으로 가득 차게 되어 더 높은 진리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절제(temperantia)’와 ‘정결(castitas)’의 덕은 지성적 작용의 완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화 장치’다. 절제는 인간의 욕망을 맹렬하게 끌어당기는 감각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지성이 신적 빛을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II-II,15,3) 그렇다면 토마스가 이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신앙의 덕’이란 무엇인가? 불확실한 가변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확실성 토마스는 ‘신앙(fides)’을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도록 만드는 정신의 습성이며, 명료하지 않은 것에 지성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II-II,4,1)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엄밀한 ‘지성의 행위’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신앙은 ‘지식(scientia)’과 ‘이해(intellectus)’ 같은 명백한 직관이 결여되어 있지만, 한쪽 편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의견(opinio)’과도 구별된다.(II-II,2,1) 현대인이 겪는 불안의 근원은 가변적인 인간적 지식과 불확실한 세속 가치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거는 데 있다. 반면, 신앙의 확실성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결코 속일 수 없는 ‘제1진리’(Veritas Prima)라는 견고한 원천에 근거한다.(II-II,4,8) 신앙의 역동적 구조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이 ‘의지의 명령’에 의해 완성되는 지성적 동의라는 사실이다. 지성은 대상을 명확히 직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적 권위를 신뢰하는 의지는 지성을 결정적인 동의로 움직이게 한다. 이는 가변적인 인간 이성의 한계를 자각한 주체가 자신을 오류 없는 신적 진리에 고정시키려는 실존적 선택이자 투신이다. 현대 사회의 불신앙은 대개 진리를 능동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고집하는 ‘의지의 완고함(pertinacia)’에서 기인한다. 절제·정결 통해 지성 정화하고 진리 거부하는 ‘불신앙’ 버려야 진정한 행복 경험할 수 있어 형상화된 신앙: 사랑으로 완성되는 실천적 행복의 전략 토마스에게 신앙은 미래에 완성될 완벽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체험하게 하는 ‘미리 맛봄(prelibatio)’을 가능하게 해 주며,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도록 만드는 정신의 습성’이다.(II-II,4,1)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토마스는 지성적 동의에만 머무는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fides informis)’과 참사랑(caritas)을 통해 완성되는 ‘형상화된 신앙(fides formata)’을 엄격히 구분한다.(II-II,4,5) 신앙이 참된 덕이 되기 위해서는 의지가 사랑을 통해 궁극적인 선인 하느님을 향해 오류 없이 지향되어야 한다. 사랑이 결여된 신앙은 ‘죽은 신앙’과 같으며, 오직 사랑으로 형상화될 때만 신앙은 인간을 최종 목적인 행복으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힘이 된다. ‘미리 맛봄’의 개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미래에 완성될 참행복은 “일종의 시작의 형태로 우리 안에 현존”(「신학요강」 1, 2)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고단한 일상의 염려 속에서도 천상의 기쁨을 현재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나약해진 의지를 회복시키는 구체적인 기제이다. 개인주의와 고독사 문제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신앙의 형상화는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특히 토마스는 인간의 행위 안에서 ‘말보다 강력한 실례(實例)의 힘’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생활의 모범을 보일 때, 이는 단순한 논쟁이나 강요보다 더 강력하게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참사랑에 의해 형상화된 신앙은 자신의 가치를 사회적 성취가 아닌 신적 토대 위에서 발견하게 하며, 이러한 발견은 필연적으로 이웃을 향한 나눔과 헌신으로 이어진다. 이는 현대인이 처한 고립과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적 행복을 창출하는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토마스의 신앙론이 보여주는 정신의 정화, 신앙의 확실성 그리고 사랑을 통한 완성은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항구를 제공한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투신이지만, 그것은 주체의 내면에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현대인이 외부적 성취나 타인의 시선이라는 가변적 토대를 버리고, 내면의 신적 토대 위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때, 비로소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토마스가 강조한 것처럼, 신앙을 통해 미래의 행복을 오늘 여기에서 미리 맛보며 사랑의 실례를 남기는 삶이야말로 성과 중심주의의 그늘을 벗어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실존하지 않는 성인이 있다?

성인전을 읽다 보면 종종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성인이 실제 인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성 소피아(Sophia)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하고, 함께 순교했다는 세 딸, 성 피데스(Fides), 성 스페스(Spes), 성 카리타스(Caritas)는 각각 신덕(믿음), 망덕(희망), 애덕(사랑)을 뜻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 그리고 그 원천인 지혜를 공경하던 마음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추측합니다. 성 소피아만이 아닙니다.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어깨에 업고 강을 건넜다는 성 크리스토포로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 베로니카(Veronica)의 이름도 라틴어로 ‘참된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성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은 수건에 ‘참된 형상’,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밖에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용을 물리쳤다’는 성 제오르지오나 성 마르가리타가 그렇고, 석가모니를 연상하게 하는 성 요사팟의 이야기처럼 다른 설화를 차용한 듯한 성인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확실한 전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은 독서에 관해 “성인들의 수난 기록이나 전기는 역사적 진실성에 부합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92항) 이에 따라 1969년 개정된 전례력 축일표에는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들의 기념일이 제외됐습니다. 또한 시복시성 절차에서도 “하느님의 종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정보 탐구”(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 제2조 1항)를 중시하면서 생애·덕행·순교·명성 등을 증거와 문서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인물과 행적이 아니면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이런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분들이 ‘허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승 과정에서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각색되거나 덧붙여지거나 과장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인 공경, 성인에게 청하는 전구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향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준다”면서 “성인들의 통공도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고 우리가 성인들에게 보인 사랑의 증거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설명합니다.(50항 참조) 만일 성인의 전구를 단정하기 어렵더라도, 그 공경과 기도의 지향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고집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지만,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성인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 전승을 통해 교회가 바라본 복음적 덕과 예수님께 이르는 길이 아닐까요?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없는 기다림의 공허함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의미 없는 기다림 속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상징 하느님의 침묵 계속된다 해도 유혹과 허상 떨쳐내고 참된 부활 구원에 이르러야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감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감각은 단순히 신체의 기능을 넘어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교회헌장」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며 모든 신자에게 ‘초자연적 신앙 감각’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 감각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12항, 35항 참조) 신앙 감각은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주는 감각입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성령의 도유를 받은 모든 신자가 이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 신앙 감각의 도움으로 우리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깨닫고,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교회헌장」 12항) 물론 공의회 이전에 신앙 감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이끄시며, 사도들에게서 받은 신앙을 교회 안에서 보존하고 고백하게 하신다고 믿어 왔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도적 신앙을 식별하고 지켜 가기 위한 시노드의 전통도 이런 믿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 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도 이 신앙 감각과 깊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인 동의’라고 하니 마치 ‘더 많은 신자의 의견이 정답’이라는 다수결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신앙 감각을 단순히 신자 다수의 의견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을 올바로 실천한 이들이 다수보다는 소수인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앙 감각은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 없이 나온 의견을 신앙 감각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앙 감각은 교도권과도 상충하지 않는데요. 교회는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2항) 우리 각자에게 있는 신앙 감각은 ‘믿음의 본능’이라고도 합니다.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어려울 때 본능처럼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본능’, ‘육감’과도 같은 감각이다 보니 평소엔 신앙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잠들어 있는 나의 신앙 감각,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은 삶의 성화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무엇보다도 애덕의 증진”을 강조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의 습관이 신앙 감각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전례 참여, 고해성사, 교회의 사명과 봉사에 참여하는 등의 교회생활도 신앙 감각을 끌어올리는 좋은 방법입니다.(「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57항, 89항 참조)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한 나침반: 올바른 양심

현대 사회에서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이익 중심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지침인 양심의 목소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 질문보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인가”라는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론을 검토하는 것은 현대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고 악을 피하기 위해 내면의 주관적 확신과 객관적인 자연법적 이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했다. ‘양지’와 ‘양심’의 구분과 역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구조를 보편적 원리인 ‘양지(良知, synderesis)’와 구체적 행위의 적용인 ‘양심(conscientia)’의 역학 관계로 설명한다. 양지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같은 자연법의 제일 원리들을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habitus)이다.(I,79,12) 이 원리들은 인간 영혼에 각인된 ‘영혼의 불꽃’과 같아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있는 빛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진리론」 17,2) 반면, 양심은 이러한 보편 원리를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지성적 ‘행위(actus)’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양심을 ‘다른 것과 함께 알려진 지식(cum alio scientia)’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적용(applicatio scientiae ad aliquid)’이라 정의한다.(I,79,13) 여기서 중요한 학술적 통찰은 양심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양지는 ‘모든 악은 피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공하고, 이성은 ‘학교폭력은 악이다’라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소전제를 도출하며, 양심은 ‘이 학교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최종적인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지점은 무류한 원리인 양지가 아니라, 소전제를 설정하거나 대전제를 개별 상황에 대입하는 추론의 과정이다. 즉, 보편 원리는 확고하나 구체적 적용 과정에서 이성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양심이 보편 원리를 개별 행위에 적용하는 이성적 활동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왜 양심이 왜곡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할 수 있다. 드라마 <참교육>을 통해 본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은 형성 과정과 환경에 따라 왜곡될 수 있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이 정립한 ‘이완된 양심(conscientia laxa)’과 ‘완고한 양심(conscientia stricta)’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책임 있는 실천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심각한 교육 현실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 드라마 <참교육>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왜곡된 양심의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동료 학생이나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받는 벌에 분노한다. 이는 도덕적 규칙을 무시하거나 마비된 상태인 이완된 양심의 전형이다. 반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타인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완고한 양심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교권보호국 사무관의 역할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류를 바로잡는 외부적 원조로 해석된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이 불행은 당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다’라는 올바른 소전제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잘못된 추론을 교정하고 그들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양심의 교정은 인간을 법의 맹목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도덕적 자유로 이끄는 과정이다. 양심의 왜곡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의 책임과 직결되기에,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선악 가려내는 본성인 ‘양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양심’ 이성적 활동이지만 왜곡 쉬워 도덕 규칙 무시하는 태도 버리고 올바른 양심 따라야 진정한 자유·행복 누릴 수 있어 올바르게 살아있는 양심의 형성과 도덕적 책임 토마스에 따르면, 양심은 그것이 올바르든 그릇되든 언제나 인간을 구속한다. 만약 자신의 양심이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판단했는데도 이를 행한다면, 비록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선일지라도 주관적으로는 악을 선택한 것이 되어 죄를 범하게 된다.(「진리론」 17,4) 그렇다면 드라마의 가해자들처럼 이완된 양심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죄가 없는 것인가? 토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양심에 따랐더라도, 그 행동이 태만이나 고의에 의한 ‘극복할 수 있는 무지(ignorantia vincibilis)’(I-II,19,6)에 근거하고 있다면, 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반대로 완고한 양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불가피한 무지’나 상황적 한계를 이성적으로 식별함으로써 지나친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잘못된 양심을 고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심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올바른 양심으로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양심,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향한 지성소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성소이다.(사목헌장 16항) 양심은 주관적 자아가 멋대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아니라, 이미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와 법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권고했듯,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외침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에 침잠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면에 이미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올바른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은 비로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도덕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결국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고 그 판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 지복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주는 왜곡된 양심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왜 양심의 빛을 밝히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닦아나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올바른 양심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1+1=2이다’라는 수학적 진리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나, ‘인간이 사후 심판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에 간다’라는 교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믿음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는 것이 사물, 식물, 동물, 인간, 자연, 우주와 같은 가시적 대상을 향한다면, 믿는 것은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 영혼, 내세, 천사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를 향한다. 지식의 종착지에 다다르면 이 모든 가시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결국 믿음의 세계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실재를 다룬다. 우리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보이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우리의 시야와 지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시야 밖에 있는 분이다. 우리의 시야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현미경이든 천체 망원경이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볼 수 없는, 과학 기술 너머에 계신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세계이며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근원적인 실재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가시적인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했듯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지만, 지식은 경험에서 기인한다. 신앙은 교회의 공동체적 믿음에 뿌리를 두지만, 지식은 인류가 쌓아온 학문적 토대에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지식은 대상과의 ‘사물적 관계’라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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