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하느님은 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밝히고 소통한다. 모세에게도 그랬다. 모세는 호렙산의 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 존재를 인식하고,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적극적인 자세) 이때 하느님은 모세를 불렀고, 모세는 응답했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어떤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에 의해 부름 받고 응답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건너간다. 모세는 하느님께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는 사명과 파견을 듣는다.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하느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라 계시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는 분명 죽었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산 자, 즉 죽음의 문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께 들어감으로써 산 자가 됐음을 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닿았고, 그들을 위해 모세가 해야 할 사명과 파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을 불러오고,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밖에 있지 않았고, 모세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세 측면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살아있으며 직간접으로 소통하는 형상이다. 예수님에 의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다시 불러오고 확인된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죽음은 그 사람의 존재 안에 부활한 생명이 있음을, 그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는 구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에 두지 않고 인간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생명의 실재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워진 계약은 인간이 죽음으로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두가이들에게 한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 죽음 이전 상황이었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거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부활에 대한 통합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몸으로ᅠ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ᅠ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44) 부활은 인간에게 역사의 차원을 벗어난 저 세상의 이야기고, 하느님 편에서 주도하는 일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론 수용이 다 되진 않는다.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는 생물학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음을, 죽은 이가 무(無)로 추락하지 않고 본래적 실재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지혜 2,3: 16,13 참조) 누구도 이름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그분인데, 누구도 언급할 자격이 없는 그분인데,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라 다가오셨다. 해방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온전히 신뢰하고 그 신비에 들어갈 때 선물이 된다. 매년 부활초에 ‘알파요 오메가’를 쓰고 듣고 찬양하는 이유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과 지혜] 악습과 싸워라!(상)

악습(악한 생각)과의 싸움은 관상 생활과 더불어 우리 영성 생활의 또 다른 축인 수행 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이 싸움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여러 악습을 제거하고 거기에 상응한 덕을 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치열한 투쟁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요 악한 생각을 여덟 가지로 제시했다. 곧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다.(프락티코스 6)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요한 카시아누스에 의해 여덟 가지 악습으로 서방교회에 소개되어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에 의해 ‘칠죄종’으로 정착됐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영혼의 질병인 각 악습과의 싸움에 대한 수도 교부의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그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음을 정화하고 다스리는 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육체의 양면성 먼저 육체에 대한 교부들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싸움의 참된 목적과 올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게 된다. 교부들은 인간 육체를 원수이자 친구로 이해했다. 즉 원죄로 인해 손상되었기에 원수이고,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영혼과 함께 성화되고 변모되어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았기에 친구라는 것이다. 그들은 욕정 혹은 악습을 하느님이 우리 육체나 영혼에 심어주신 자연적 충동(본성)의 왜곡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은 본성의 억압이 아닌 변형이며, 근절이 아닌 교육이라는 것이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영혼의 어떤 욕정이 본성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본성적 속성들을 사악한 욕정들로 바꿔 놓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본성에 따른 생식능력의 경우가 그러한데, 우리는 그것을 음욕을 위해 남용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분노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뱀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웃에게 쏟아냅니다. 경쟁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덕을 겨루다가 시기심에 빠집니다. … 식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방탕을 위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천국의 사다리 26,167) 첫 번째 악습, 탐식 사막 교부들은 ‘배는 인간의 온갖 파멸의 원인’이라 생각하여 위(胃)를 정복한 사람은 정결을 향한 도상에서 장족의 진보를 한다고 말한다. 탐식은 우리를 폭식과 미식으로 이끌며 우리 안에 잠재된 선천적 욕정들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한다. 탐식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욕정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욕정들의 극복 여부가 탐식의 극복 여부에 달려 있을 정도로 탐식을 극복하기란 좀체 쉽지 않다. 에바그리우스는 우리 영혼이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줄이라고 권고한다.(프락티코스 16) 빵과 물은 하루 한 끼 식사했던 사막 수도승의 주식이었다. 사막의 한 원로는 말했다. “하루 한 끼 식사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하면 짐승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09) 하루 세 끼에 간식도 곁들이는 우리에게 에바그리우스의 처방전은 비현실적이고 무익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에서 점차 다음과 같은 극기의 원칙이 정착됐다. “배불리 먹으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기 체력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양을 취하는 것이다.”(담화집 2,22,1) 카시아누스는 폭식으로 이끄는 온갖 남용을 피하고 무분별한 단식 연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매일 합리적이고 일정하게 식사하는 것이 며칠 동안 단식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지나친 배고픔은 정신의 항구성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피로로 인해 우리 기도의 힘과 활력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규정집 5,9) 탐식의 치료제는 절제와 극기지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악습, 음욕 탐식에 굴복한 영혼은 음욕에 넘겨진다. 이 둘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클리마쿠스는 “자기 배를 채우면서도 음욕의 영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에 기름을 부으면서 불을 끄려는 자와 같습니다”(천국의 사다리 14,95)라고 말한다. 카시아누스의 다음 말은 음욕에 맞선 싸움이 얼마나 힘든지 잘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싸움은 음욕의 영에 맞선 싸움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다른 모든 싸움보다 더 끈질기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싸움입니다. … 다른 모든 악습을 극복하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규정집 6,1) 그러면서 그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갈망’에 기초한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이중의 치료제를 제시한다.(규정집 6,1)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영적인 불로 육체의 불을 끄면서 육체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몰아내는 사람은 순결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5,98) 정결을 위한 음욕과의 싸움은 육체의 성적 욕망을 통제하면서 시작되며, 그것들의 변형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결은 육체와 자연적 욕망의 억압이 아닌 변형을 목표로 하며, 인간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기혼자건 미혼자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성적으로 변형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악습, 탐욕 탐욕은 이 세상 재물과 물질에 대한 마음의 집착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과 질병, 궁핍의 고통 그리고 남들에게 생필품을 받는 데 따르는 수치심을 떠오르게 한다”(프락티코스 9)고 말한다. 한 마디로 탐욕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서 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3-34) 이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탐욕은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와 보호를 믿지 못하기에 우상숭배이자 불신앙의 자손과도 같다. 클리마쿠스는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것은 미움, 도둑질과 시기, 불화와 적개심, 격분과 복수, 잔혹한 행동과 살인을 유발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7,114)라고 말한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더 가지려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탐욕의 치료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 가난의 핵심이다. 천상의 것을 맛본 사람만이 이 지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육체적 선(善)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건강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신체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다’(집회 30,16)고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5복’ 안에 건강과 치아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프로필 사진 촬영, 식스팩 만들기’ 등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아직 젊은이들은 건강 자체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매우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된다.(욥 2,1-10 참조) 그렇다면 건강이나 쾌락과 같은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 성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에 있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을 능가해야 한다.(I-II,2,5) 그러나 육체의 선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많은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결코 사자의 용맹함이나 코끼리의 힘, 치타의 빠름을 능가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조차 나약한 인간들끼리 경쟁해서 얻은 성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선에만 인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살아가며 인간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생명 유지, 즉 인간 육체의 보존일 수는 없다. 성 토마스가 존경하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이미 “살아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보다 좋고, 인식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보다 좋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강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목적이 있다. 더욱이 성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게서 육체의 존재가 영혼에 의존할지라도 인간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 자체는 영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부자들조차 중병에 걸리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여기서 재물과 같은 외적 선들은 건강과 같은 육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자체는 ‘지나가 버리는’ 본성을 지닌다. “삶 자체는 지나가 버리고 […]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이다.”(I-II,5,3) 이렇게 육체적 삶의 유한성은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완전한 쾌락에 대한 성찰 그렇지만 육체의 선에는 건강만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최종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움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그러나 쾌락을 이렇게 간단히 행복의 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욕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즐긴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의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한 피한다.”(키케로, 「최고선악론」) 그런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가 누명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들의 오해와 달리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쾌락이란 결코 육체적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념에 사로잡힌 극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에서 찾았다. 따라서 쾌락은 그에게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 성 토마스는 육체적 쾌락을 인간이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삼켜버려 다른 모든 선을 경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이 곧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은 행복을 따라오거나 행복의 어떤 부분을 따라오는 하나의 고유한 우유(偶有)”, 즉 행복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I-II,2,6) 더욱이 그는 즐거움은 선(善) 때문에 욕구될 만한 것이며, 이런 경우 선은 즐거움의 근원이며 그것에 형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토마스는 만일에 인간이 자기에게 적합한 어떤 ‘완전한 선’을, 실제로 혹은 희망으로 혹은 적어도 기억 안에 가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불완전한 선’이라면, 그 쾌락이란 진정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만을 가진 것(分有)이나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완전한 선을 따라오는 즐거움 그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고 우유로서 행복의 본질에 따라오는 어떤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말하는 완전한 쾌락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선, 또는 정신적인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의 이해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마태 22,29)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교리서 본문은 예수님 이전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한 가르침을 제시한 이가 없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의미는 대단히 깊고 정확하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상응하는 차원이고, 또 인간이 하느님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화적 신들을 부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진 세계관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전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내용들이 있음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즉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 저 세상의 일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자신의 고통 앞에서 했던 욥을 만나 보자. 욥은 의인이었고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부귀와 권세를 지녔다. 그런 그가 받은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소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병을 얻은 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욥은 그의 소유였던 집과 가축 그리고 귀한 자식을 잃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씩 잃을 때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라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는 병이 들었다.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큰 고통은 절망을 주었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욥 3,11-12)라며 자신의 생을 원망한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고난과 불행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무릎을 꿇지도 않고 하느님께 질문한다. ‘왜 입니까?’ 병으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고 또 그분만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입니까? 내가 죽어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욥이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속에서 거침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 38,4이하). 이는 ‘내가 너를 만들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다. 지혜로운 욥은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고 고백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뵈었습니다(보다)’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온몸으로 던진 질문은 존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불렀고, 만났고,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서 나와 그 사랑을 향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두가이들이 범한 오류는 성경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공로로 얻어진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부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과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만남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마음을 드러내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관찰하고 악한 생각과 선한 생각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악한 생각일 경우 시초부터 몰아내야 뿌리를 내려 발전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영적 스승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속 생각을 모두 밝히는 것이다. 수도승 생활 초심자에게 ‘마음의 개방’은 매우 중요했다. 이 주제는 지난 호의 ‘마음을 돌봐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마음 돌보기의 핵심 내용인 악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먼저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것은 초기 수도승 생활의 본질적 수행이었다. 영적 스승의 역할 초심자는 영적 수행과 영적 투쟁, 기도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수행과 관련해서 영적 스승의 조언과 도움과 격려를 받아야 했다. 영적 스승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즉 숱한 실패와 잘못,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마침내 분별력의 은사를 얻은 사람이다. ‘분별’(diakrisis)이란 ‘영들에 대한 식별’을 뜻했다. 수도승을 공격하는 생각이 악령에게서 온 것인지, 천사나 성령에게서 온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분별력을 얻은 사람만이 영적 투쟁 중인 다른 사람을 안내할 수 있다. 초심자에게는 열정만 있고 이런 분별력이 없기에 이 길을 먼저 걸어간 경험 있는 원로를 안내자로 삼고 그에게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제자는 영적 스승에게 마음속 생각을 남김없이 드러내야 스승이 그 생각들을 식별해서 적절한 처방을 내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제자 역시 점차 분별력을 얻고 영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로써 제자는 또 다른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누구도 남을 올바로 지도할 수도 없고 감히 지도해서도 안 된다. 분별력이 없는 안내자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순종하며 마음속 생각 남김없이 드러내야 교만은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마음 개방은 겸손 실천하는 수행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 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영적 스승에게 굳이 이처럼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는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령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초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악령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경험자의 조언과 도움이 없다면 초심자는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익명의 압바는 악한 생각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그것들을 감추지 말고, 즉시 영적 사부에게 이야기하라고 권고한다. 악한 생각은 구멍에서 나온 뱀과 같아서 드러나면 멀리 달아나지만, 감추면 감출수록 더 강해지고 많아져 나무 속에 있는 구더기처럼 우리 마음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즉시 치유되지만, 감추는 사람은 교만으로 병이 든다고 한다. 카시아누스는 악습과 악령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데, 곧 연로하고 경험 많은 영적 사부에게 자기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다.(규정집 4,9.37) 그 이점에 대해 안토니우스 압바는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죄짓기를 멈추고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안토니우스 생애 55,11-12) 수도승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기 마음을 영적 사부에게 개방하지 않고 자신 안에 가두는 것이다. 반대로 스승에게 마음을 연 제자는 스승의 기도와 조언으로 온갖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자기 뜻의 포기인 순종 제자가 스승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자기 뜻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모든 죄가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좋아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영적 사부에게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한다. 포이멘 압바는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에 가로놓인 황동 벽이자 걸림돌입니다. 인간은 의지를 포기할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을 뛰어넘습니다'(시편 18,3) 의지가 올바른 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인간은 참된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54) 초심자는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자기 마음을 갉아먹는 생각을 감추지 말고, 그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영적 사부에게 드러내라고 배운다. 그리고 그 생각을 분별하기 위해 자기 개인의 의견을 신뢰하지 말고, 원로가 검토한 후 나쁘거나 좋다고 판단한 것을 믿도록 배운다.(규정집 4,9) 수도승 생활 초기에는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이 원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동굴이나 암자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때로 비참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어떤 이들은 금욕 수행으로 자기 몸을 해치지만, 그들은 식별력이 부족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안토니우스 8) 이처럼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젊은 수도승은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욕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스스로 남의 스승이 되어 지도하려는 유혹은 상존한다. 이런 유혹은 교만에서 나오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겸손으로 이끄는 순종 자기 뜻을 포기하는 순종은 우리를 모든 덕의 정점인 겸손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마음속 모든 생각을 드러내고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따르는 것은 겸손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이 수행은 결국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교만이다.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와 분별력이 아니라, 얄팍하고 피상적인 지식으로 섣불리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판단을 무시하고 자기 뜻과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자세는 모두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마음을 드러내라!”는 이 권고는 영성생활에서 경험 있는 안내자의 중요성, 분별력의 중요성, 마음의 개방성, 남의 조언을 청하고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 자기 뜻을 내려놓는 자유로움 등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육의 부활

너무나 특별하고 생명력 넘치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는 봄의 향연을 선물 받았다! 얼마 전 우리는 교리서2부 ‘마음의 구원’편을 시작했지만 잠시 멈추고, 전례 시기가 주는 은총과 함께 주님의 부활에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려 한다. ‘육의 부활’편을 6회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다시 ‘마음의 구원’편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야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루카 24,30-31 참조)는 말씀의 의미가 ‘마음의 구원’편에 강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쓴 최초 원고를 보면, ‘육의 부활’ 교리는 3장 1편 ‘육의 부활’(64과~72과), 3장 2편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73과~86과)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동정과 독신의 삶이 현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얻은 우리의 삶은 내 안, 즉 마음에서 그분의 현존을 찾는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의 만남을 전제한 죽음이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결실인 대사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 성야 전례에서 촛불을 들고 세례 때 한 신앙 서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결의론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벗어나 복음의 에토스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육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가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공관복음(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카 20,27-40) 모두가 이를 전하지만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단어의 의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 먼저 복음 간의 다름을 분석한 후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면, 육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야훼를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언어나 풍습, 민족성에 따라 당파가 지닌 종교적 색깔은 조금씩 달랐다. 사두가이파도 그중 하나로 종교적으론 보수적이었으며,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육의 부활, 천사, 영 등 이런 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도 23,8 참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또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고,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믿음은 부질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장 권위 있다 자부하며 성전에서 가르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가 그 하나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마르 12,26)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또 하나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탈출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탈출 3,2-6) 만난 하느님과의 대화를 불러오면서 부활에 관한 다른 차원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했고,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는 큰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부르셨다. 죽은 라자로가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들었을까? 우리가 부활에서 풀어야 할 질문들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권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부’도 ‘명예’도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재벌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재물을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재벌이야 자신에게 남는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치더라도, 여유가 없는 이들조차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하며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들곤 한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자들 일부는 자신의 지위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권력을 잃고 난 다음에도 자신과 가족들이 평생 호사를 누릴 만한 재물을 어렵지 않게 축적하기도 한다. 이런 부정을 저지르고도 대형 로펌 등을 활용하여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벗어나거나 ‘사면’이란 이름으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해되기 힘든 현상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권력이야말로 인생의 ‘최종 목적’, 즉 행복의 가장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선과 악 모두에 관련된 권력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논박되어야 할 이론 중에 하나로, “행복은 완전한 선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완전한 선이며 이런 것은 권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는 주장을 소개한다.(I-II,2,4,obj.2)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치는 목표가 불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타락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토마스는 ‘권력은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I-II,2,4) 권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만일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면 최악이므로 권력은 선과 악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이다.(ibid.,ad2) 우리는 우리나라의 길지 않은 민주주의의 역사 동안에, 심지어 최근에 벌어진 계엄 사태를 통해서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쉽게 공동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해 왔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해 왔다. 심지어 「사피엔스」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민주주의 사회에선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권력을 누릴 수 있기에 인물이나 정당이 권력을 돌려주기 싫으면 빈번히 법을 파괴하곤 한다”고 말했다. 권력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불법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다 보면 권력이 선으로 기울기보다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악으로 기우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권력의 무상함을 직접 보여준 보에티우스 추상적으로 들리는 성 토마스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예가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권력을 가져봤고, 이를 모함으로 허무하게 빼앗긴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자신의 삶을 통해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격’ 개념의 정의로 유명한 보에티우스는 로마 최고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아테네 유학 등을 통해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는 그를 발탁해 가장 큰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려 하자, 반대세력이 ‘보에티우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했다’고 모함하며 그를 반란죄 혐의로 고발했다. 보에티우스는 제대로 변론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그 책 안에서 그는 자신을 신뢰하는 척했다가 권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왕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즉, 권력의 허망함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근심의 괴로움과 공포의 아픔도 물리치지 못하는 이 권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신하들을 두렵게 만들면서도 신하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신하들을 두려워하여 항상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그리하여 그의 권력에 대한 권리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을 너는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철학의 위안」, 제3권, 산문5) 최고선에 따라야 하는 권력 성 토마스도 권력과 행복이 관련성이 있다면, 어떤 행복은 권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권력을 덕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력을 지닌 자는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시민들의 덕스러운 삶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II-II,47,10)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이렇게 권력이란 최종 목적이라기보다는 올바로 사용되어야 하는 ‘행위의 시원’(principium)이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성 토마스는 특히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진정한 권력을 인간이 자기 스스로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 이웃 위에 군림하고 예속시키려는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여기서 ‘원죄’의 본질이 어떤 계명의 위반이나 육체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 독립과 자율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소유하려 함에 있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 없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고자 하는 ‘무질서한 의지’(disordinata voluntas)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권력을 탐하려는 인간의 욕심이야말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죄로 떨어지기 쉽고, 이는 불행을 예약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행복과 연관해서 살펴본 재물, 명예나 명성, 권력 등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인간이 이성과 의지를 통해 행복에 이를 채비를 갖추기 때문에 그의 행복은 외부적 원인에 좌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우리 자신을 이루는 육체와 영혼에게 좋은 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회부터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1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욕망,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의 근본적 변화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형태를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라 했다.(2,16-17 참조) 이 욕망들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 즉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히며 인간에 관한 진리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그리고 사람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2,23) 외치며 서로를 보았던 신적 시야가 ‘음욕을 품고’ 바라봄으로써 그를 소유 혹은 사용하려는 대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자신들의 실존 뿌리인 알몸을 부정하고 숨었지만 그분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그분을 부정한다 해도 나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알몸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부끄러움과 연관되는데, 사람이 그 의미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자.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3,7)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부끄러움이 두려움으로 변화했다. 존재 자체를 뒤흔든 ‘두려움’, 감정으로 느낀 이 두려움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것을 덮으려 했을까? “타락의 증상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 안에서 숙고되어야 하고, 부끄러움은 그 순간 가장 심오한 차원을 건드립니다.”(27과 1항)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인 인간 본성은 선물로서 스스로 내어줌인데 그것을 덮겠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없는 내가 되겠다는 것이고, 나 또한 너에게 선물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먼저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물었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너’라는 존재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알몸이 두려워 숨었다고 말하지만 따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그 사실을 두려움으로 덮어 놓은 부끄러움, 그의 잘못을 일깨운다. 사람의 대답에서 하느님에 대한 앎의 결핍이 드러남을 묵상할 수 있다. 놀랍게도 하느님에 대한 앎이 부족하면 자신에 대한 앎도 부족하고, 앎에 대한 결핍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에서 그 구체성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정확함이 우리를 놀랍게 한다. 육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표현과 깊이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을 지닌 인간 몸의 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선물로 나에게 왔고, 그 선물을 다시 내어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관계의 단절은 곧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앎의 결핍이 인간 정신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욕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깊이 와닿는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6-19)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떠나면 남을 탓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고,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때는 관계 속의 ‘너’에게 참회와 고백을 한다. 그래서 먼지로 돌아가라는 말씀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한 선상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마음을 돌봐라!

수도승 생활의 사부 안토니우스 압바는 말한다. “사막에 거주하며 평화를 찾는 사람은 세 가지 싸움에서 벗어났는데, 곧 귀와 혀와 눈의 싸움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마음의 싸움, 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안토니우스 11) 사막의 깊은 고독과 침묵 속으로 물러난 수도승에게 더는 귀로 듣거나 입으로 말하거나 눈으로 볼 대상이 없다. 그는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밖에서 자신을 유혹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 그에게 남은 일은 오직 내부의 위험에서 보호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과 싸우게 된다. 마음을 돌봄 독수도승들은 마음을 돌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에 대해 깨어 분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속적 깨어 있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늘 깨어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prosoche)이다. 수도승은 죄를 피하기 위해 주님을 언제나 자기 눈앞에 두려고 노력하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하느님 경외’의 기본자세로서 항상 그분의 시선 아래서 생활한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수도승은 우연히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매우 주의 깊게 살폈다. 이시도루스 압바는 우리가 생각들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야생동물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악한 생각은 우리 마음을 더럽히기 위한 악마의 공격 수단이며, 그 시작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권고한다. “우리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악한 생각의 시작을 주의 깊게 살피십시오. 악마는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 영혼에 슬며시 들어오려고 합니다.”(규정집 6,13,1) 일반적으로 수도승은 ‘하느님 경외’와 ‘깨어 있음’을 통해 생각에 대한 분별의 은사를 얻었다. 하지만, 이 은사를 얻기까지는 오랜 기간 경험 있는 스승에게 자기 마음을 열고 지도를 받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과의 싸움 사막 전통에서 생각과의 싸움은 금욕 수행의 핵심 내용이었다. 단식과 철야, 극기와 같은 외적 수행보다도 더 본질적이며, 더 힘들고 치열한 수행이었다. 보통 수도승 전통에서 ‘생각들’(loghismoi)은 악령들이 불러일으키는 ‘악한 생각들’을 의미한다. ‘생각’은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된 수단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 정신을 분산시키고 우리 마음을 동요시켜 마음 안에서의 순수한 기도를 방해한다. 따라서 악한 생각의 시작은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포이멘 압바는 나쁜 생각들로 공격을 받고 슬퍼하는 형제를 바람이 부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했다. “가슴을 열고 바람을 가두어 보십시오.” 그 형제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을 뿐입니다”(포이멘 28)고 했다. 사막 교부들은 어떤 생각이 악하거나 헛된 것으로 식별되는 순간 즉시 거부하라고 가르친다. 악한 생각은 마치 쥐와 같아 즉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번식하여 나중에는 몰아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포이멘 압바는 솥이 불 위에 있는 한, 모기는 그 위에 앉을 수 없듯이 영적 수행에 항구한 수도승에게 악령은 어떤 것도 앗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 수도승은 자기 양편에 바구니 하나씩을 두고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 오른쪽 바구니에, 나쁜 생각이 떠오를 때 왼쪽 바구니에 돌을 하나씩 넣었다. 저녁에 돌을 세어 보고 왼쪽 바구니의 돌이 오른쪽 바구니의 돌보다 많으면 그날은 식사하지 않았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이러한 방법은 너무 세심하게 보이지만 그들이 악한 생각에서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생각과의 싸움은 금욕 수행의 핵심 순수한 마음과 평정심 유지해야 탁월한 무기 악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기도는 가장 탁월한 무기였다. 카시아누스는 간교한 원수가 우리 안에 침투하여 정신을 빼앗으려 할 때마다 악한 생각으로 분산된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관상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다.(규정집 5,10) 포이멘 압바는 “생각과의 싸움은 자기 왼쪽에는 불을, 오른쪽에는 물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만일 불이 붙으면, 그는 물을 퍼서 불을 끈다. 불은 원수의 씨앗이고, 물은 하느님 현존을 생각하는 것이다”(포이멘 146)라고 말한다. 요한 콜로부스 압바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 암자에 앉아 나에게 다가오는 악한 생각들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그들에게 저항할 힘이 없을 때 기도로써 하느님께 피신하여 적으로부터 구원됩니다.”(요한 콜로부스 12) 사막 교부들에게 기도는 영적 싸움을 위한 가장 탁월한 무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온종일 성경 말씀을 암송함으로써 늘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어떤 유혹도 성공적으로 물리치기는 힘들다. 우리가 유혹이나 위험에 처할 때 기도는 우리의 최후 보루다. 내적 평화 악한 생각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는다. 이제 마음은 순수하고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게 된다. 순수한 마음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보게 하고, 평정심은 어떤 악한 생각이나 유혹에도 동요되지 않고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한 상태를 유지해 준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마음 안에서 하느님과 참된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온갖 악한 생각으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려 부단히 마음을 돌보았던 것이다. 우리 마음은 늘 불안하고 외부의 자극에 요동친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과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하루에도 여러 번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 나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공격을 당하여 동요하기도 한다.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런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외부로 향했던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이제 우리 자신에게 돌려 늘 깨어 마음을 살피고 돌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마음을 돌봐라!’는 사막 교부들의 오랜 권고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시다

“구약의 여러 책들에 나오는 결의론은 외적인 기준들에 따라 그러한 ‘몸의 행위’를 구성했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집착하였고, …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비롯된 다양한 타협들 탓에 율법 제정자가 원하셨던 계명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24과 4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2부의 주제, 인간 몸의 존재론적 진리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규범적 성격으로 풀기 위해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된다. 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힌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ᅠ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3,22) 이제 사람에겐 스스로 선과 악을 식별하는 인식과 지성의 능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 또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기 계시(“우리 가운데 하나처럼”)를 복수로 일컫고, 이제 사람도 절대 진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22절의 후반부가 선명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하면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이제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원상태로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인간 편에 주어졌다. 사람이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어 한처음의 상태와는 달라졌고, 그 달라진 상태의 원회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비추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마음은 인간 몸의 의미에 대한 감각과 이 감각의 질서와 연관된 인간성의 차원입니다.”(25과 2항) 인간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자신 안에 있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느님의 거처, 곧 선의 거처이기에 그리스도는 단죄가 아니라 회복해야 하기에 호소를 한 것이다. 더 나은 영적 삶, 그리고 완성을 원하는 삶이라면, 자신이 겪은 일과 결과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마음’을 살펴야 한다. 「티베트의 지혜」에서는 “마음을 안쪽으로 되돌려 마음의 본성에서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과 행위는 모두 마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하고, 또 이해하는 통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예민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쉽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데, 이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길입니다”고 했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은 절대적 자유를 원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문제는 결국 인격 의식과 정신적 자유의 문제로 돌아가고, 마음의 절대적 자유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짧은 말씀 안에 간직된 세 가지 요소,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의 의미, 그리고 ‘마음으로 범하는 간음’에 대해 우리는 차근차근 묵상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유를 거두지 않으시고, 앎에 의한 그들의 선택이 땅에 묶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마음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마음 교육은 인격적인 본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세상의 어떤 욕망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내적 힘을 갖게 한다. 그럴 때 많은 배움들은 자신만이 살겠다는 바벨탑으로 변하지 않고, 인류에게 나누는 능력이 된다. 앎과 나눔은 한 선상에 있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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