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무금은 십일조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시기가 왔습니다. 대림시기하면 아무래도 성탄을 위한 여러 준비가 떠오르는데요. 우리가 준비해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교무금 책정입니다. 교무금은 ‘교회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내는 봉헌금’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교회 유지를 위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예물이라 하면 떠오르는 규정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규정인데요.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줬고(창세 14,20 참조), 야곱도 하느님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창세 28,22 참조). 이 전통은 구약성경에 십일조 규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며 언급(루카 11,42 참조) 하시지요. 십일조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교회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222조 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무금만이 이 활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외국에는 교무금 제도가 없습니다. 유럽 국가에서는 ‘종교세’의 형태로, 미국 등의 나라는 기부금이나 주일헌금으로 교회 운영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신자들은 주교회의나 교구의 규정에 따라 교무금, 주일헌금, 기타 헌금과 모금 등으로 교회 운영 활동비를 부담해야 한다”(165조)고 밝히고 있는데요. 교무금만이 아니라 여러 헌금 등도 교회 운영을 위해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는 교회 운영비 외에도 2차 헌금이나 모금 등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금과 십일조가 동일하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무금은 우리 신앙선조들의 공소전(公所錢)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부족하던 시절, 공소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공소와 공소공동체 운영을 위해서 모았던 기금입니다. 이 전통이 1931년 ‘전조선지역 시노드’를 통해 교무금 제도로 정착됐습니다. 교무금이라는 제도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제 없이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무금 액수를 규정하지도 않고, 미납한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사정이나 수입 감소로 교무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자신의 수입에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정도를 책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적어도 한 달 중 하루의 수익은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취지입니다. 다만 교무금은 수입을 기준으로 책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쓰고 나서 남은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입 즉 하느님께 받은 것 중 일부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주님의 기도를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성무일도 아침·저녁 기도와 미사 등 하루에 세 번씩 바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및 그와 유사한 시기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마태 6,9-13;루카 11,2-4; 디다케 8,2)가 주님의 기도를 전하며 후대에 삽입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마침 영광송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모두가 사용합니다. 종말론과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 유다교는 여러 청원 기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청원을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내용상 그와 유사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로 모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넘어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주권자이시면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와 유혹과 악 등 우리의 구차한 삶을 돌보시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의 품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과 관련되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첫 번째 청원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청원에 답하실 때 기도하는 이는 이 거룩함에 사로잡히고 변화됩니다. 두 번째 청원은 하느님이 지니신 임금의 주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나라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곳으로 기대했고(이사 9,6; 32,15-17; 52,7; 60,17)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은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자기 뜻을 억누르거나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인 정의와 평화는 기도하는 이가 하느님이 원하신 피조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 하느님과 함께 자기 뜻을 펼치고 행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네 번째 청원은 유일하게 물질적 선물에 관계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신뢰, 타인과 함께 나눌 시간 등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하시고 과거에 대한 미련 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온전히 살도록, 영원한 현재인 하느님 앞에서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다섯 번째 청원은 상처받은 삶의 치유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얽히고설킨 자기 삶의 역사 전체의 화해를 청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너그러우심을 청하듯이 자신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른 마음을 드러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이끌어 주십사는 여섯 번째 청원은 일상의 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궁극적 유혹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늘 동행해 주시기를,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청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청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눈감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청합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지시어 그분의 품 안에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일곱 가지 청원 중 용서의 청원에서만 인간의 행위가 나타나므로 주님의 기도는 완전히 하느님 중심적인 기도이며 그 안에 그분 안에서 평화로이 숨쉬고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의 여여함이 드러납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신뢰하는 보잘것없는 이들: 루카복음서의 기도

성전에서 시작해서(1,8-10)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끝나는(24,53)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은 기도 자체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19)라는 시편 말씀을 예수님의 입에 올리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6)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제시한 루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 드러내며 죽음도 봉헌의 의미로 달리 해석 같은 루카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등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스테파노는 그분의 첫 증인입니다. 분명 시편을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은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실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루카는 다른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과감하게 달리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재중에 사람들 멸시를 받으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당신에게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도 중에 봉헌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으시고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는 루카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뛰어난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14) 끊임없는 간청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11,2-4)를 해설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지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께서 비유에서는 친구의 청을 귀찮게 여기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마지못해 그에 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십니다. 비슷한 모습이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그다음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어떤 재판관의 모습과 하느님이 비견됩니다.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재판관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부가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그에 응합니다. 항구한 신뢰와 용기가 기도에 필요합니다. 과부와 세리가 지닌 용기와 겸손 하느님 향한 따뜻한 신뢰가 핵심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겸손도 필요한데, 이것을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라는 세 번째 비유가 이야기합니다. 성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남다름을 내세우며 장황한 감사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대비됩니다. 과부와 세리, 그들이 지닌 용기와 겸손을 연결하는 것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품는 따뜻한 신뢰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마무리됩니다(18,15~17). 루카는 기도하는 이들이 부모 앞의 어린이들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기도의 골자로 가르칩니다. 우리도 늘 자신의 사정을 하느님께 아뢰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리시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그러한 삶에 초대하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제2경전은 외경(外經)이다?

2005년 「성경」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공동번역 성서」를 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성경」과 목차가 조금 다른데요. 몇몇 성경들을 ‘제2경전’이라는 목록에 따로 모아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외경이라 하면, 한자로는 ‘성경(經)의 바깥(外)’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2경전은 성경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성경이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성경인 걸까요? 제2경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그리고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들은 구약성경에 해당하는데요. 초대 교회 시기에는 두 종류의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십인역’이라 부르는 그리스어 번역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 번역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스라엘에서 70명(혹은 72명)의 번역가를 선출해 구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들이 각각 번역한 성경들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번역됐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성경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작성했습니다. 이때 구약성경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어 생활권에 살았기 때문에 칠십인역이 구약성경의 기준이 됐고 제2경전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리스도교 교양」 등의 책에서 성경 목록에 제2경전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제2경전은 히브리어 성경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없던 성경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지요. 특히 개신교가 갈라질 당시 개신교는 이 의혹을 내세우며 제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수용해야 할 성경과 성전에 관한 교령」으로 교회가 오래 전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 온 제2경전을 포함한 신·구약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쓰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된 것인데요. 이때 발견된 성경 중에는 그동안 토빗기나 집회서 같은 제2경전들도 있었습니다. 제2경전도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제2경전은 외경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정경입니다. 그렇기에 미사 전례 중에도 제2경전 역시 봉독됩니다. 교리면에서도 제2경전에는 천사, 연옥 등 교회의 여러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2’경전이라 불린다고 중요도도 두 번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의 공식 신경은 사도 신경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미사마다 신앙의 핵심을 표현한 신앙고백문, 신경(信經)을 바치며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사도 신경’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사도 신경을 외우고, 또 많은 본당에서 미사 중 사도 신경을 바치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 친숙한 신경입니다. 그런데 미사의 공식 신경은 따로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과 비교해 보셨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더 ‘길다’는 점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곰곰이 살펴보신다면 다른 내용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면,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내용이 특별히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와 그 다음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가 열릴 당시에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점을,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천명하면서 우리의 신앙,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믿음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의 믿음이기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른 그리스도교들에서도 고백하는 신경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큰 권위를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우리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천주성교공과」의 미사경의 경우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만 수록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미사 경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특히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에는, 이른바 사도 신경 곧 로마교회의 세례 신경을 바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신경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한 신경인데요, 사도들의 숫자처럼 12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라고 사도 신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사도 신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에 내려온 중요한 신경입니다. 그러니 미사 중 사도 신경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단지 길다는 이유로 사도 신경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새 미사전례서 총지침(2002)에 따른 간추린 미사전례지침’)

2024-11-1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도의 길잡이인 마태오(마태 6,5-8; 18,19-20)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산상설교(5~7장)의 한가운데 주님의 기도를(마태 6,9-13) 배치하고 그의 서두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드러내면서, 당시 유다교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의 기도와 구분을 시도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환경에서 쓰인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너희의 단식은 위선자들의 단식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한다. 하지만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것처럼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마라.” 여기서 단식과 기도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실천이 사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나 디다케가 쓰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달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행동을 통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마태오 복음서는 기도를 개인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유일하신 분과의 친밀함을 기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입에는 오르지만, 마음에는 없는 기도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그런 기도를 오래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식과 같이 그분을 신뢰하는 이만이 하느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몇 사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남자 10명을 정족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마태오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또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질입니다.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튼튼한 공동체, 보이지 않게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이 바로 기도가 이루어질 정족수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 아니면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것, 아니면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 성대히 미사를 거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느님을 푸근한 아버지로 느끼는 이에게는 이 모두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자신의 소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그중 어떤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나의 기도에 대한 확신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인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0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연도가 났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왜 모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아마 비신자들에게는 마치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연도(煉禱)라고 불러왔습니다. 연도는 연옥의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온 말인데요. 지금은 ‘위령기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연도가 났다”는 말은 주로 ‘상이 났으니, 위령기도를 바치러 가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느 신자의 집에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도가 났다”고 서로에게 알립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여러 신자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빈소에 ‘연도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연도 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위령기도, 연도는 보통 선창자와 후창자가 주고받으며 우리 고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바칩니다. 우리 소리에 담긴 기도문에 어쩐지 더 정감이 가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입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위령기도를 노래로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도는 단순히 노래로만 바치는 위령기도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기도가 우리 문화와 정서, 전통에 잘 융화된 우리 고유의 기도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위령기도에 우리 가락을 붙여 연도를 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미 박해시대부터 연도가 자리 잡았다고 추정됩니다. 박해시대 우리 선조들은 신자 집에 장례가 나면 밤을 새워 기도해 줬다고 하는데요. 이때 연도를 바쳤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연도는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가락으로 노래해 왔는데요. 1991년 연도의 가락이 오선악보에 수록됐고, 2003년 한국교회 차원에서 「상장예식」을 마련하면서 전국 모든 신자들이 같은 가락으로 연도를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신앙선조들은 연도를 노래로 바쳤을까요? 신앙선조들이 상장례 때 사용한 「텬쥬셩교례규(천주성교예규)」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텬쥬셩교례규」에는 “왜 소리 높여 노래하며 연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노래하는 소리로써 내 생각을 들어 주께 향하게 해 내 마음을 수렴하게 하고 더욱 구원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밝히고, 또 “우리가 죽음의 슬픔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슬픔은 희망 없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라 전합니다. 혹시 ‘연도를 노래로 바치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고 불편해하신 적 없으신가요? 하지만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 빈소에서 이어지는 연도 소리는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에게 연도는 신앙 공동체가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부활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노래하는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이번 위령 성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한 번쯤 연도를 바치시면 돌아가신 분께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11-1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활동과 기도: 마르코 복음서가 가르치는 기도

기도는 거룩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함이 기도와 활동을 연결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2-38)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군중에 휩싸여 계시지만 당신의 활동에 매몰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는 복음서 끝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에 질려 이 시간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시는 동시에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지막 활동, 즉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세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로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찾는 것이고, 셋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결하고 급박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즉각적인 특징을 지니며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은 바로 고요함으로 물러감 내지 홀로 하느님과 기도함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마치 생리 과정처럼 숨을 들여 쉼과 내심으로, 묵상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긴장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각인시켜 왔습니다.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도미니코회의 ‘묵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수회의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가르멜 영성과 일반 직업 생활을 연결하는 최근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모습 등은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을 낸다’, ‘충분한 시간’, ‘시간이 가는 것을 잊는다’, ‘시간을 투자한다’, ‘시간표’, ‘시간을 쓴다’, ‘예약 시간’, ‘시간을 희생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적다’, ‘후회되는 시간’, ‘시간 낭비’, ‘무의미한 시간’, ‘시간을 죽인다’ 등.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활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동은 기도를 실제가 되게 하며 기도는 행동을 진리 안에 놓는다.”(에버하르트 베트게: 개신교 신학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친구)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0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미사는 위령미사가 아니다?

‘연미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옛 말이라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들어보지 못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전에는 성당에 성가를 표시하는 안내판에 ‘연’, ‘생’ 등으로 미사 지향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연(煉)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생(生)은 ‘산 이를 위한 미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위령미사도 역시 죽은 이를 위해 드리는 미사일 텐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요? 먼저 ‘연미사’와 ‘위령미사’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미사라는 말은 박해 시대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박해 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해 1880년 출판된 「한불자전」에는 연미사를 “연옥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미사”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연옥은 죽은 신자들이 천국에 이르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대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미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위령미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라면서 “위령미사와 연미사는 본래 동일한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연미사는 위령미사의 옛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마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전례와 죽은 이를 지향으로 하는 미사의 차이점을 두고 하신 말씀일 듯합니다. 앞서 예전에는 안내판에 ‘연’이라고 표시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미사 지향을 의미합니다. 교회법은 “사제는 산 이들이거나 죽은 이들이거나 누구를 위하여서든지 미사를 바쳐 줄 자유가 있다”(제901조)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신부님께 돌아가신 분을 미사 지향으로 부탁한다면 그 신부님은 그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바칩니다. 그러나 미사 지향이 연미사, 즉 죽은 이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전례가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연미사여도 그날의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미사 경본」에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고유한 기도문과 독서가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미사 지향은 신부님 개인이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치는 것이라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는 전례를 통해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 전체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친다 것이 다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어떤 지체를 위해 영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다른 지체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379항) 돌아가신 분들도, 살아있는 우리도 모두 예수님을 통해 연결된 지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연미사, 위령미사를 포함해 모든 미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잔치입니다.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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