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고통과 슬픔,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惡)일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와 ‘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즉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선’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선’,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선’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고통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특정 조건에서 선 될 수 있어 고통이 유용할 수 있다 해도 고통받는 이와 함께해주길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교회의 성사성과 가장 오래된 성사의 관계

“큰 신비”(에페 5,32)의 두 번째 부분은 교회의 성사성과 가장 오래된 성사 사이의 관계다. 곧 남편과 아내의 일치(창세기)라는 가장 오래된 표징과 “때가 차자”(갈라 4,4) 아들을 보내어 혼인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드러낸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두 표징을 하나의 위대한 표징과 성사로 봤다. 계시의 두 단계를 말한 ‘큰 신비’,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태고의 단계와 때가 찼을 때 말씀의 육화로 가능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 후자가 앞의 것을 비추며 이끌고 있다. 그리스도-교회, 남편-아내의 일치를 연결하는 것은 몸 신학 전체 맥락의 핵심 열쇠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하나의 위대한 성사를 형성하는 이 두 표징의 상호 관계, 곧 성사적 질서의 토대는 이미 예언서를 통해 호소 됐다. 이사야서, 호세아서, 에제키엘서, 아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조금씩 다르나 한결같이 신랑의 정결을 말하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는 아주 특별하고 풍부한 신학적 내용이 담겨 있는데, 아마도 하느님 편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의 선언이고 자신의 전부를 건 엄숙한 고백일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이사 54, 4-5) 불충실한 신부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신부를 향한 신랑의 자비로운 사랑의 동기를 강조한다.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관계는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인격적이다. 강생 사건은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당신의 자유롭고 영원한 사랑에서 왔다. 그러면서 사랑의 동기와 혼인 그리고 계약의 동기가 연결되며 창조주에서 구원자로 발전한다. 호세아서에서는 처음으로 부부 관계가 출산이나 재산 보장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로 ‘인격화’됐다. 잠언에선 혼인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2,17)이라 했고, 말라키서에서는 신부를 “너(신랑)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2,14)로 전한다. 구원적 사랑이 예언서들에서 어떻게 혼인적 사랑으로 드러나는가에 대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사도 바오로가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이란 말을 반복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오로는 구원자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을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음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도 바오로는 구원적 사랑을 교회와 혼인해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만드는 부부 사랑으로 계시한다. 성사에 대한 이해가 고대보다 넓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안에 숨겨진 신비의 계시와 성취를 의미했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준비한 ‘감추어진-계시한(hidden-revealed)’의 긴장 안에서 ‘신비-성사’의 관계로 이해한 것이다. 혼인이 계약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감정에 의한 순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이 메말라 갈 때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계약자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 포기가 아니라 도전해야 한다. 이때의 선택 하나하나가 파스카, 곧 죽음과 부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결정들에 현존하고, 우리의 변화 그 중심에 함께 하신다. 이렇듯 부부 사랑은 신적 사랑의 친교를 지향하고,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의 원천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좁은 의미로는 세례를 받은 신랑, 신부에게 해당되지만, 넓은 의미론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의 혼인도 ‘시원적 성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32)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유비로 선포하면서 ‘큰 신비’라 했다. 큰 신비에 함축된 여러 의미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1~2장 참조)에 대한 재조명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갈라 4,4 참조) 숨겨 두신 혼인의 계획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서 완성돼야 할 ‘한 몸’의 신비다. 혼인의 내적 의미인 이 세 가지가 혼인이 가야 할 길이고, 진리이며, 역동하는 생명, 곧 사랑의 길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과 가장 오래된 혼인과의 관계다. 사도 바오로는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그들의 혼인을 재조명하라는 이유는 부부가 나누는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성을 갖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동의하고 맺은 혼인의 계약은 존중과 신의 그리고 사랑의 충실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변화 성숙의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 슬픔과 즐거움의 일들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길이고, 이 참여를 통해 혼인의 성사성이 갖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제시된 이유는 혼인이 영원한 신적 신비의 가시적 표징이 되는 성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키는 이 유비에 놀라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 티도 주름도 없는(에페 5,27 참조), 즉 추함도 늙음과 노쇠함도 없다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랑이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을 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으로 이해했다. 교회도 부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혼인적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적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고, 아가페적 사랑이 그 정점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눈물과 상처 그리고 좌절을 체험할 것이고, 후회와 간절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다. 즉 서로를 받아 내고 품는 과정을 통해 둘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고찰한 후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랑 신부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혼인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이는 둘이 하나되기 전 원고독의 이중성(본성 그 자체로서 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과 완전한 주체성, 상호주체성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교리서는 말한다. 결국 혼인의 본질은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가 그 원천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혼인적 사랑으로 시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신비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여정을 사랑의 신학 용어로 설명하면, 에로스적 특성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특징은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다. 자신을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과 자신들의 체험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발견되고 드러나야 할 신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의 의미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사랑일까? 감정에서 출발한 사랑이 영혼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사랑도 순종도 그 시작과 끝은 ‘나’가 아닌 ‘그리스도’가 근원이요 모델이다. 유비로 선포된 위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을 따기 위해선 먼저 감을 바라봐야 하듯, 주님의 선물을 먼저 바라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으로 너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혼인에 담긴 신비는 거룩함 그 자체를 관조할 때, 윤리적 도리나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얻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3) 그리고 “남편 여러분, …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는 교회에 당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인에 관계된 이 말씀들은 ‘처음’부터 혼인의 신적 제도를 지향하는 배우자적 사랑의 정신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한 몸”(창세 2,24; 에페 5,31)을 이루게 된 그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이 유비는 다른 서간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1코린 11,3)를 연결해서 보면 몸은 아내와 동의어로 쓰였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에서 몸적-혼인적 교회론을 볼 수 있다. 예수는 머리이자 구원자이지만, 남편은 머리이나 구원자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사도의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 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완벽하고,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순종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교회에 해당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상호 순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근원은 존중이다. 교리서에서는 존중을 인간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봤다. 한 가정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자각이다. 존중은 인간 사랑 그 자체의 뼈대가 된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리 눈을 열어준다는 것, 즉 다른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말씀의 육화에는 겸손이 전제되어 있듯 타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바라보고 그 인격성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그 고유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근원과 분리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적 신비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서로의 몸은 경계선의 벽으로 남을 것이고 혼인의 위대한 신비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손함은 사랑의 위대함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킴을 뜻한다.”(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랑과 책임」)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준비운동: 고통을 경감시키는 구체적 방법

우리는 지난 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이를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 충고를 듣고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에서, 현대 사회의 고통 경감법과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조작 가능하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연구 방향은 고통의 근원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경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취나 무통분만이며, 이런 경향은 일반 생활에도 널리 퍼져있다. 또한 현대인들의 다수가 정신적인 고통이 다가오면 알코올이나 마약 등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고, 심지어 많은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차단하려 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즐거움을 통한 고통의 약화 토마스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료법은 ‘잠과 목욕’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힘을 되찾게 해 주고 몸의 신체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어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게 해 준다.(I-II,38,5) 밤잠을 줄여도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까지 연구에 매진했던 토마스이기에 이런 충고는 더욱 유별나게 들린다. 그럼에도 잠이나 목욕 등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림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은, 이미 현대 의학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인 마취와 통증 완화의 방법을 통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방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토마스는 기쁨이나 쾌락이 슬픔이나 고통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쾌락(Delectatio)’은 고통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I-II,38,1) 만일 직면해 있는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겪고 있던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환자의 슬픔을 감소시킨다. 때로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좋은 영화는 우울함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 바람을 조금 불어 넣으면 다시 팽팽해지듯, 인간이 느끼는 쾌락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슬픔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다. 눈물과 한숨을 통한 슬픔의 배출 그렇지만 진정으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잠깐의 즐거움이 마치 한 여름의 뙤약볕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몇 방울의 물을 떨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해 ‘눈물과 탄식(Lacrymae et Gemitus)’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I-II,38,2)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해로운 요소는 영혼의 주의가 그리로 쏠릴 때 더욱 고통스럽지만, 바깥으로 분출될 때는 주의가 분산되어 내면의 고통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안정이 되고 슬픔을 이기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수용, 즉 눈물 흘리기나 깊은 탄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현대에도 적극 권장되는 방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위로와 공감…진리 탐구·종교적 묵상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 이뤄낼 수 있어 친구와 가족의 위로 토마스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위로가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참조) 마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을 때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짐인 심적인 고통도 동료들의 위로를 통해 가벼워진다. 또한 친구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가지고 있는 ‘공감(Compassio)’이나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교감과 위로는 고통 완화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 문제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토마스가 중요시했던 위로의 힘이다. 진리의 관조를 통한 고통의 극복 이런 일시적인 고통의 완화와는 달리 강렬한 즐거움을 포함하는 더 지속적인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진리에 대한 관상(Contemplatio Veritatis)’이다. 토마스는 이 관상이 고통을 대단히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관상의 쾌락은 ‘흘러넘쳐(Redundat)’ 감정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까지도 완화시켜 준다.(I-II,38,4) 지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관상이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킨다. 지복직관과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토마스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온갖 시련을 참된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야고 1,2)”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가올 기쁨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숯불 위를 마치 ‘장미 꽃밭’ 위를 걸어가듯이 걸어가는 순교자도 소개한다. 진리 탐구와 영적 명상, 신앙적 희망은 현대의 정신 건강과 영성 돌봄 분야에서 여전히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강조하는 명상, 마음 챙김, 종교적 혹은 철학적 묵상 방식들은 고통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신학대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슬픔 해소법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단순히 과거의 뒤처진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상호 관계, 몸과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의 길로, 오늘날 심리치료와 영성 상담, 공동체 활동 등 다양한 현대적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사고 등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2차 가해에 가까운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문제와 같은 ‘고통에 대한 오해’를 집중적으로 성찰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과녁을 겨냥하라!

‘과녁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겨냥하라’는 말이 있다. 과녁을 놓치면, 늘 엉뚱한 곳을 겨냥하게 된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종종 삶의 목표, 즉 과녁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엉뚱한 곳을 겨냥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필요한 시간과 힘을 쏟게 된다. 사막 교부들은 과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부들의 금언집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는 그들의 엄격한 금욕 수행에 지레 기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막의 관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자 그들의 생활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금욕 수행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결국 사막 수도승의 과녁은 하느님과 사랑이었다.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이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교훈적인 일화가 많이 있다. 과녁을 겨냥한 예들 다음 일화들은 인간이 정한 규정보다 하느님의 계명인 애덕이 우선임을 잘 보여준다. 압바 모세는 주간 단식 주간에 방문한 형제들을 환대하기 위해 요리를 조금 만들었다. 그러자 이웃 수도승들은 이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고발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압바 모세의 놀라운 처신을 알았기에 모두 앞에서 말했다. “오, 압바 모세, 당신은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모세 5) 또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수도승들이 단식 규정을 깨고 열렬히 환대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이 한 원로에게 그렇듯 쉽게 단식을 깨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단식은 늘 할 수 있지만, 내가 여러분을 항상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식은 확실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 선택에 달려 있는 반면, 하느님의 법은 우리에게 절대적 의무인 애덕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니, 나는 온갖 열성을 다해 여러분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는 다시 단식 규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카시아누스 1) 압바 포이멘은 사순절이라 주저하며 자신을 방문했던 한 형제를 환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무문을 닫으라고 배우지 않고 혀의 문을 닫으라고 배웠습니다.”(포이멘 58) 이 애덕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형제들을 보호했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듣거나 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죄를 지어 집회가 소집되었고 압바 모세도 초대되었다. 가기 싫었던 그는 마지못해 구멍 난 바구니에 모래를 가득 채워 가져갔다. 마중 나온 형제들이 의아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죄가 뒤로 줄줄 새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형제의 잘못을 심판하러 가고 있습니다.”(모세 2) 포이멘의 다음 일화도 우리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몇몇 원로가 압바 포이멘에게 와서 물었다. ‘공동기도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기도 중에 깨어 있게 해야 합니까?’ 압바 포이멘이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입니다.’”(포이멘 92) 압바 디오스코루스는 거지를 만나자 좋은 투니카를 내주었다. ‘어째서 헌 투니카가 아니라 집회에 갈 때 입는 좋은 투니카를 주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같으면 예수님께 헌 투니카를 드리겠소?” 이 일화는 애덕이 전례의 성대함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사막 교부들은 늘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오직 하느님 향한 마음으로 관대한 애덕 보여준 교부들 수단과 목적 혼동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하느님 뜻 실천 주객전도 주객전도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예컨대,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대한 의존 혹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되 그 겉모습을 보고 거기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바라봐야 할 본모습,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을, 영성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든 간에 직접 사물의 본질을 향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늘 피상적인 차원으로 끝나게 된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강을 건너라고 만든 뗏목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수단, 방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주객전도의 우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내면의 깊은 뜻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신앙과 문화,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과녁을 겨냥하라 중국에 임제 의현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살불 살조사(殺佛 殺祖師)’,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섬뜩하고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어떠한 것에 얽매여 본질(과녁)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뼈 있는 가르침이다. 임제 선사는 여기서 ‘무의도인(無依道人)’, 즉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주체적, 자립적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직접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통찰함으로써 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 안에는 하느님 현존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안에도 그분을 닮은 참된 인간 본성(眞我)이 깃들어 있다. 이것을 찾고 깨달아가는 여정이 우리 영성생활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기에 우리는 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 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없이 인간을 막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사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는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 깨달음 자체가 우리 삶을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문자로 표현된 책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내용, 곧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하느님 뜻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과녁이다. 우리는 길을 간다. 함께 가지만 결국 혼자 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과 핵심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무의도인의 자유로움으로 홀로 우뚝 서서 타인의 지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고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상호 순종의 의미

에페소 5장은 현시대에선 공감하기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순종을 점진적으로 전개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21절)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2절)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23절)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설정한 사도 바오로의 21절 말씀은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과는 달라 분명 논쟁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비롯됐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먼저 주셨고, 남자와 여자는 선재한 이 선물에 의해 상호 순종을 받아들이고, 그 순종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받아들인 순종의 근원은 그리스도이고, 타자를 그분의 인격 안에서 대하는 것을 말한다. 교리서는 순종을 존경의 차원에서 열었다(교리서 89과). 존경은 부부 관계의 바탕을 구성하는 골격이고, ‘선물’에 대한 믿음과 몸이 지닌 성사적 의미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리를 이해할 때 더욱 깊은 인식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 방향의 중요한 교차점이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비로,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으로 교회 안에서 실현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세례 받은 사람과 공동체들이 신적 계획에 동참하는 삶을 말한다(교리서 88과). 순종은 개인성이 무시된 무조건적 따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완전히 하나를 이룬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과 사랑의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발타사르는 순종을 내어줌의 힘(능력)이라 표현했다. 이렇듯 순종의 내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부부 상호 관계 안에 영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이고, 가지가 원천을 경외하듯이 서로에게 순종함을 말한다. 이는 세상의 부부들이 서로 배려하고 받아들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 삶의 모습에 그리스도 현존의 향기가 있고, 이 현존은 그들에게 선물 된 사랑을 보존하는 질서가 된다. 선물을 살아가는 본래적인 방법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균형적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원죄는 이 균형적 사랑을 파괴했고, 욕정에 사로잡혀 선물의 삶이 아닌 지배 구조로 타자를 바라보게 했다. 상호 순종은, 서로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유혹과 자신에게 기울어져 닫혀 버린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최종선을 바라볼 줄 아는 더 높은 호의적 사랑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상호 순종의 소명은 남성성 여성성의 서로 다름에서 상호 보완성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나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자유의지가 동화되어 일어날 때까지 사랑과 은총으로 감싸고 기다리시듯, 상대에 대한 사랑이 수용성과 감수성으로 넓어질 때, 상호 순종의 빛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혼인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출발하지만, 그 출발 안에는 그들의 과거도 함께 들어온 크나큰 사건이다. 남성성 여성성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 달라, 사고하는 것과 그 외 많은 것이 다르다. 때론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그대 앞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일치되지 않는 크고 작은 아픔들, 미움도 거리도 생긴다. 이때 있는 그대로 보아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은 순종의 덕이고, 이 덕은 더 나은 변화를 위한 기폭제가 된다. 그래서 상호 순종은 복음적이며,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숨겨진 계획은 두 사람의 완성을 희망하게 된다. 만약 혼인이라는 배가 출항할 때, ‘상호 순종’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거센 파도가 있을 수 있는 바다에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교적 혼인

교리서 제5부(87과부터 113과)의 주제는 에페소 서간과 예언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혼인이다. 땅에서 맺은 혼인의 근원과 최종목적지는 어디인지, 어떻게 할 때 순항할 수 있는지를 선포한 부분이다. 혼인은 공적 계약이고,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노래가 두 인격의 본질을 이룬다. 수많은 아픔과 기쁨, 고통과 죽음을 헤쳐가면서 두 인격의 관계가 전 생애를 통해 서로를 성숙하게 하고 완성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람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성장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만약 혼인이 문화와 인간학적으로 단순하게 축소된다면, 인류에게 주어진 혼인의 그 위대한 신비에 이르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다. 5부에서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는 말씀은 에페소 서간 5장 22절부터 33절까지다. 사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익숙하고, 혼인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가 몸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유비(類比)가 에페소 서간을 통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2,24 참조)이 지닌 참뜻을 반추하고 완성하는데, 그 신학적 의미가 사뭇 깊고도 놀랍다. 혼인은 창조 질서이며 은총의 질서에 속하고, 또한 구원의 성사다. 만약 혼인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만 바라본다면, 평행선에 자신들을 두게 되어 세상이라는 파고를 헤쳐 나가기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이 평행선에서 다른 한 점을 발견할 때, 즉 그리스도와 관계를 둔 삼각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혼인에 깃든 은총과 인간의 구원적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혼인과 가정을 사목 중심에 두는 중요한 이유다.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친교가 신랑 그리스도가 신부 교회에 대한 사랑에 실제로 참여하는 방법이고, ‘영원히’와 연결돼 있기에 교회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목이다. 교리서 전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5부는 ‘한처음’(마태 19,4; 마르 10,6 참조)과 인간의 ‘마음’(마태 5,28 참조) 그리고 미래의 ‘부활’(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5 참조) 그 정점에 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관점에 이르기 위해선 인간 몸에 관한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조명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페소 서간은 다양성과 성의 다름에 기초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을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에페 5,1)으로 살아가길 초대했고, 그 절정에 남자와 여자의 혼인을 그리고 이 관계의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관계를 선포했다. 한처음부터 성의 다름은 단순히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내어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와 만나고, 보이는 타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절대 타자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담고 있기에 혼인은 새로운 계약과 은총의 표지이며, 창조와 은총의 질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혼인적 사랑에는 하느님 계획 안에 다른 최종 목적지가 내재해 있음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유비를 통해 혼인이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이라고 에페소 서간은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계약적 의미를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 본성과 그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며, 윤리 조건의 근본 가운데 하나인 ‘혼인과 가정’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하기 위해 고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도 고통은 육체적·정신적 차원에서 질병, 실직, 사랑하는 이의 상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능력 위주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고통을 무조건 없애버리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누구도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상가가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도 육체적인 통증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이처럼 고통의 실재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삶이 단지 ‘고통의 바다(苦海)’일 뿐이라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섭고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고통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수한 정념들에 관한 모든 논의 가운데 ‘가장 적절하게’ 정념이라고 불릴 만한 고통을 매우 길게 무려 다섯 개 문제(I-II,q.35-39)에 걸쳐 다룬다. 고통(Dolor)과 슬픔(Tristitia)의 구분 우선 토마스는 고통(Dolor)을 그 원인이 육체에 있긴 하지만, 영혼의 한 정념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손에 화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아픔과 같은 육체의 상처, 질병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육체의 정념이라면, 친밀했던 친구와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에서 오는 비통함은 영혼의 정념이다.(I-II,35,1) 이어서 그는 지성이나 상상력의 깨달음에서부터 오는 정신적 고통에게 슬픔(Tristitia)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다.(I-II,35,2) 슬픔은 단순히 괴로움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취하려는 어떤 선(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느끼는 낙담은 성취, 자부심 같은 선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기쁨과 슬픔은 그 대상인 선과 악이 대립되기 때문에, 서로 반대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저 서로 다르기만 할 뿐 상호 배척하지 않는 수도 있다. 친구의 죽음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천상 행복을 누리리라는 영생의 기쁨으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I-II,35,4) 이어서 토마스는 ‘내면적 고통은, 다만 육체만 아프게 하는 외적 고통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외적 고통을 일부러 찾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5,7) 또한 그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슬픔의 다양한 종류를 검토하며 그것들이 육체적 고통과는 달리 과거, 현재, 미래의 악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슬픔을 느끼는 역량이야말로 인간됨의 한 조건인 것이다.(I-II,35,8) 삶에 필연적인 고통과 슬픔…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 자기 성찰 계기로 삼는다면…내적 성장 도모할 수 있어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분석 토마스는 계속해서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을 다룬다. 감각적 욕망을 증가시키려는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이 동시에 슬픔의 원인들을 증가시킨다. 즐거움이 많아지면 불가피하게 그에 반대되는 것도 많아진다. 만일 한 사람이 어떤 선을 상실하고 또 그 손실을 하나의 악으로 포착한다면, 슬픔의 정념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또한 현존하게 된 악뿐만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그릇된 바람도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다.(I-II,36,1) 특히 정신적인 고통은 우리가 재능이나 노력을 통해서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이다. 토마스는 슬픔이 우리의 의지와 사랑에 근거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증오 없이는 고통도 없고 또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기 때문에, 사랑(Amor)이 ‘고통의 보편적 원인’이라고 밝힌다. 해로운 것에 대한 욕망, 원하는 선을 얻지 못함, 누리던 선의 상실이라는 세 가지 경우에 갈망은 모두 슬픔을 낳지만, 그 가운데 ‘결합의 욕구(Appetitus Unitatis)’가 특히 강렬하다. 특정 대상과의 결합의 욕구가 클수록, 그 대상이 상실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온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 애정을 쏟은 반려동물의 죽음은 짧게 관계 맺은 다른 대상보다 더 큰 슬픔을 유발한다. 더 나아가 재물들을 소유하고 싶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I-II,36,2), 사랑하는 이와 하나로 결합되고 싶은 바람이 채워지지 못할 때도 고통은 발생할 수 있다.(I-II,36,3) 우리의 슬픔은, 우리의 사랑과 미움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지표다. 이렇게 시작된 고통과 슬픔은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에, 모든 활동 능력을 위축시키며, 심하면 사람들의 지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감각적 고통이 심할 경우 정신적 능력도 저하시켜 학습 능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토마스는 고통과 슬픔을 심장으로부터 오는 생명 운동과 대비시키면서, 다른 어떤 ‘영혼의 정념들’보다 더 육체에 해를 끼친다는 결론을 내린다.(I-II,37) 고통의 성찰을 통한 인간적 성장 이러한 고통과 슬픔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누구나 고통 또는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토마스는 슬픔이 올바르게 조절되기만 한다면 상당히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의 가장 큰 유용성은 인간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저 고통 혹은 슬픔을 제거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그것을 제거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I-II,37,3)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내적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반면, 고통의 원인과 구조 그리고 그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단순 회피를 넘어 자기 삶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신학대전」에 나오는 토마스의 섬세한 연구는 우리를 고통에 관해 성찰하라고 초대한다. 고통 없는 완전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으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더 온전히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는 고통의 문제를 피하기보다, 이를 통해 윤리적·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기를 촉구한다. 잃어버린 선에 대하여 괴로워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내면에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7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삶이 말하게 하라!

우리는 요즘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온갖 말이 넘쳐나지만, 권위 있는 말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말의 힘과 권위는 언행일치에서 온다. 말에 권위가 없는 것은 말에 행동과 삶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없는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삶을 통한 가르침 사막 교부들에게는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삶의 모범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스승은 제자를 받아들인 후에도 침묵을 지켰다. 가능하면 제자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네가 보는 바를 행하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압바 오르는 “가서 내가 행한 바를 본 대로 행하십시오.”(오르 7)라고 말했다. 압바 테오도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 공동체의 장상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원한다면, 그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행하리라.”(익명의 압바 373) 제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승의 말보다도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많은 방문객이 단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쁨에 가득 찼고, 충분히 선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안토니우스를 방문했던 한 형제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부님, 저는 당신을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익명의 압바 27)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일종의 등대가 되어 수많은 이를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삶을 통한 가르침이 낳은 열매이리라! 삶의 모범 사막에서 스승은 입법자도, 법 전달자도 아니었다. 그는 삶의 모범이었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몇몇 형제가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원로가 말했다. ‘아니요, 다른 무엇보다도 형제의 일을 하십시오. 그들이 형제처럼 살고 싶다면 스스로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 형제가 원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 그들은 제가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원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의 입법자가 아니라 모범이 되십시오.’”(포이멘 174) 스승은 말보다는 삶의 모범으로 더욱 스승이 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일종의 모범이지 법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말로써 규칙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 행동으로써 더욱 확고한 규칙이 된다. 펠루시움의 압바 이시도루스가 말했다. “말없는 삶이 삶 없는 말보다 더 낫습니다. 침묵하며 감화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리치며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삶이 서로 부합할 때 온갖 철학(금욕 생활)을 형성할 것입니다.”(펠루시움의 이시도루스 1) 행동과 모범으로 가르치고 제자와 함께 생활한 교부들 권위 내세우거나 명령하지 않고 침묵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 깊이 있는 인격이 스승의 조건 삶으로 받은 가르침 필자에게는 삶으로 가르침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 두 경험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나는 1990년대 초 양성기 때, 파코미우스의 생애를 읽었을 때였다. 거기서 접한 몇몇 일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파코미우스는 ‘코이노니아’라는 거대한 공동체 전체의 영적 사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형제와 똑같이 규칙을 준수했다. 코이노니아에 속한 각 수도원을 방문하면 그곳 형제들과 똑같이 기도하고 노동했으며, 식사 배식을 받기 위해 형제들과 같이 줄을 섰다. 어느 날 파코미우스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파코미우스를 방문한 테오도루스가 스승이 다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모습을 보고, ‘빨리 새 담요를 가져다 덮어드리라’고 수사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파코미우스는 테오도루스에게 “그대는 형제들 중 누가 아플 때 그를 방문해 본 적이 있느냐?”며 이를 만류했다. 이처럼 파코미우스는 장상으로서 어떤 특권을 누리거나 예외를 두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규칙을 준수하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유학 중이던 1999년, 여름 방학을 프랑스의 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지낼 때였다. 당시 이 공동체의 아빠스님은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과 모범적인 생활은 신선한 충격 자체였다. 장상이었지만 권위적이라든지 엄격하고 요란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조용하고 온화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소박하고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 안에 깊이 현존하는 분이었다. 아빠스의 모관도 쓰지 않았고, 나무로 된 소박한 목장(牧杖)과 평범한 반지와 목 십자가가 전부였다. 겉으로 봐선 다른 형제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곧 공동체가 이분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돼 있음을 느꼈다.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친구 수사의 다음 말을 듣고 궁금증이 풀렸다. “우리 아빠스님은 형제들이 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하셔!” 실제 식사 후 설거지며, 형제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공간 청소며, 본인이 할 시간과 여건이 되면 뭐든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을 보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형제들 모두 이를 평범한 일처럼 여기는 모습을 보고서였다. 그의 이런 솔선수범과 모범이 바로 공동체 일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우리 시대는 어찌 보면 스승이 필요한, 아니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같다. 우리에게는 본받을 모범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 스승을 찾아야 할까? ‘삶이 말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참된 스승 식별의 1차 기준일 것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속기 쉽다. 요란하고 현란한 말로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자는 흔히 짝퉁일 경우가 많다. 내적으로 공허하고 내실이 없을 수 있다. 말이나 외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봐야 한다. 우리가 본받을 스승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그런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일상 안에, 내 주변을 잘 보면 분명 화려하고 떠벌이진 않지만, 삶과 인격에 깊이가 묻어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잘 못 볼 뿐이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은 타의 지표가 된다. 우리도 삶으로 말하려 노력할 때 그러할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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