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시노달리타스? 왜 우리말 번역은 없을까

교회의 여러 문헌이나 교육 등을 통해 많은 분이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꾸 들어도 ‘무슨 뜻이었더라?’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곤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이해도 빠를 것 같은데 왜 ‘시노달리타스’는 우리말 번역어가 없는 걸까요? 실은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번역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202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원어 그대로 ‘시노달리타스’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번역어로는 새로운 개념인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온전히 담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에서 온 말입니다. 시노드(synodus)는 그리스어로 ‘함께(syn)’와 ‘길(hdos)’을 합성해 ‘함께 가는 길’이란 뜻에서 온 말로, 라틴어 콘칠리움(concilium)과 더불어 공의회를 일컫는 말로 쓰여왔습니다. 이 시노드의 형용사형 ‘시노달레’(synodale)에 명사형 어미 ‘타스’(-tas)를 결합시킨 단어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문자로만 보면 공의회적인, 그러니까 공의회가 보여준 활동의 방식·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노드의 경우 하나의 사건으로, ‘함께 모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라는 용어에서 유래했고, 의미 면에서도 많이 통하지만, 의사결정에 대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삶의 방식,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는 활동에 대한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라는 번역으로는 시노달리타스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교회의 삶과 사명은 2000년 넘게 이어져 왔고, 초대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같은 교회인데, 이것이 왜 새로운 개념일까요? 물론 교회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시대나 상황에 따라 교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새롭게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정의합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항)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고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선언합니다.(9항)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길과 품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11항 참조) 시노달리타스란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사명을 위해 서로를 협력자로 존중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찾아 실현해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민주주의나 의회주의와 다릅니다. 구성원의 소리를 경청하지만, 구성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식별한 성령의 말씀에 따라 각자의 고유한 은사에 따라 서로 다른 직무 안에서 제 몫을 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교회의 사명을 향한 길을 걸어갑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현명을 비롯한 덕의 훈련을 통한 행복 추구

TV의 아침 방송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건강식품을 꾸준히 섭취하더라도, 노화와 함께 늘어나는 다양한 질병을 막아낼 수는 없다. 병에 걸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지인들에게 물어 자신의 병을 치유해 줄 명의(名醫)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유명세를 탔던 의사들이 과도한 욕심으로 몰락하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된다. 이와는 달리 드물지만 우연히 들른 병원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의사를 만나 감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피하고 싶은 의사와 만나고 싶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최소 10년 이상의 교육과 실습 과정을 마친 전문의들은 가히 ‘이해’와 ‘지식’이라는 사변이성의 덕이나 ‘기술’이라는 실천이성의 덕까지 갖추었다고 볼만하다. 특히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나 선우경식 원장님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분들은 자주 ‘좋은 의사’를 넘어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이런 분들은 소위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사추덕(四樞德)’을 갖춘 분들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다면 ‘사추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추덕의 역사적 배경과 새로운 체계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시했던 사추덕을, 인간을 윤리적으로 완성하는 ‘도덕적 덕’들로 더욱 확장시켰다. 곧 용기, 절제, 아량, 관대, 웅지, 명예에 대한 사랑, 온유, 우정, 진실함, 재치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토마스는 이런 긴 목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I-II,60,5) 그 많은 덕을 플라톤의 사추덕으로 다시 환원해서 정리했다. 이 네 가지 덕들은 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모든 핵심 내용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I-II,61,3) 그에 따르면 ‘지복직관’이라는 인간의 최종 목적은 사후에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세에서 인간적인 삶은 바로 ‘도덕적 덕들의 실천에 기반을 둔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덕들은 우리 삶에 있어 주된 덕, 즉 ‘추요덕(virtutes cardinales)’이라 불린다. 이 세상에서 최선의 삶은, 문이 경첩(cardo)을 회전하듯, 주로 그러한 덕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전통적인 사추덕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한 틀로서 인간 영혼의 대표적 기능인 지성, 의지, 욕구를 사용한다. 지성의 행위들을 조절하는 것이 ‘현명(prudentia)’이다. 사변이성의 덕이자 행위의 목적과 연관된 ‘지혜’와는 달리, 현명은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의 선택에 관계하는 실천이성의 덕이다. 의사의 경우, 병든 이웃을 치료하려는 목적은 지혜에 의해서 추구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각각의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는 현명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올바른 치료 방법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그 치료 행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덕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습성들을 규제하여 욕구 능력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도덕적 덕들이다. 행위의 실행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지성적 욕구인 ‘의지(voluntas)’를 따르는데, 이와 연관된 덕이 바로 ‘정의(iustitia)’다. 정의가 의지를 완성하여 타자에 대한 행위의 올바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적 부분은 이성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저항하기도”(I-II,58,2)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적 욕구’에 따라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했을 때 다가올 수 있는 위험과 고통이 무서워서 피하고 싶다면 ‘용기(fortitudo)’의 덕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욕정적 욕구’에 따라 자신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생활의 올바른 균형을 깨트릴 위험이 있다면 ‘절제(temperantia)’의 덕을 통해 이를 억제해야 한다. 복잡하게 확장됐던 도덕적 덕들 대신 ‘지혜·용기·절제·정의’의 사추덕 재정립 지성·의지·욕구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도덕적 덕 설명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 특히 강조…덕의 훈련 통해 진정한 행복 추구해야 사추덕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갑자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인터뷰 도중에 예외적으로 눈물을 터뜨리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우리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다. 김 추기경님은 “하느님은 한국인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는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라고 한탄하셨다. 황 교수와 그의 연구팀들은 최고의 과학적 지식과 유전자 치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술로 난치병 환자들을 모두 치료하려는 선한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 결과를 정의롭게 취급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할 용기도 지니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수령한 막대한 연구비와 이에 따른 명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명하지 못하게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세상을 속이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뛰어난 손기술을 통해 발달해 온 의학적인 발전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면, 사추덕이 필요해 보인다. 현명의 덕이 지닌 특별한 중요성 토마스는 도덕적 덕에 관해 논의하면서 “도덕적 덕은 현명 없이 존재할 수 없다”(I-II,58,4)고 말함으로써 현명의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지성적 덕들이 충만해도,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이 결여되면 발달된 지식과 기술은 전체 삶과 공동선의 관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나 행정가들은 현명의 덕이 없다면 희귀질환 치료제, 유전자 편집, 고가 중환자 치료의 자원 배분에서 누구의 생명을 우선하고 어떤 취약성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 바르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학의 발전도 사추덕이 결여되어 있을 때, 오히려 구조적 부정의를 실행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세속적인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건강을 얻고자 한다면, 뛰어난 의료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 각자가 자신의 상황을 ‘현명’하게 인식하고, 의사가 제시한 치료 수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도 지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라면, 수술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 자신이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당뇨병 위험이 있다면 케이크와 단 음료의 섭취는 ‘절제’해야 한다. 이렇게 사추덕을 지니는 것이 어찌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과정에서만 유용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인생의 거의 모든 경우에 사추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란?

숲을 바라볼 때 숲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부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신앙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인 신앙의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신앙이라는 전체 숲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신앙(Fides)이 있기 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을까? 계시(Revelatio)가 있었다. 계시가 없었다면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계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이 생겨났다. 가장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느님께(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통교, 자기 증여) 그분을 받아들여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하느님께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계시의 원천(Fons revelationis)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Deus Revelans)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침묵만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셨기에 신앙이 생겨났고 이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다. 세 번째, 그렇다면 계시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시의 전달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성경(Biblia Sacra)과,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Traditio Sacra)을 통해서 전달된다. 네 번째,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되는 계시를 현실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의(Dogma)이다. 그리고 계시의 이해를 현실화 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학(Theologia)이다. 신학이란 ‘학문적 방법에 의한 계시와 신앙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결국 신학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 같지만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신학보다는 교의가, 교의보다는 계시와 신앙이, 계시와 신앙보다는 하느님이 더 큰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에는 ‘아빠’가 많다?

아기가 태어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역시 ‘엄마’, ‘아빠’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아기가 발음하기 쉬운 발음이다 보니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언어권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르는 유아어가 ‘엄마’, ‘아빠’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아람어에서도 ‘아버지’의 유아어는 ‘아빠(abba)’입니다. 아람어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중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되던 언어인데요. 우리말과 의미도 비슷해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를 부를 때, 또 성장한 뒤에도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아빠(abba)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아빠에서 유래한 호칭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바로 아빠스입니다. 이집트, 시리아 등 동방 지역에서 수도자들은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로 자신들의 스승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빠스의 직무와 역할이 체계화됐습니다. 오늘날 아빠스는 주로 성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서」를 따르는 대수도원에서 장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대수도원이 ‘아빠티아(Abbatia)’입니다. 아빠티아는 수도원을 일컫는 영어 ‘Abbey’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여자 대수도원장은 ‘아빠티사(Abbatissa)’라고 부릅니다. 모두 아빠에서 온 말입니다. 사실 아빠스 말고도 교회 안에는 아빠가 많습니다. 일단 교황님을 뜻하는 ‘파파(Papa)’가 그렇습니다. 발음 면에서도 아빠와 유사한데요. 파파는 아버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파스(πάπας)’에서 온 말입니다. 본래 교구장·대수도원장 등 지역 교회의 최고 장상을 부르던 말인데, 8세기 이후부터 로마교구장, 바로 교황님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사도들을 이어 교회를 이끌고 신앙을 가르치는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도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의 말입니다. 더 가깝게는 ‘신부(神父, pater spiritualis)’님도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의 호칭이지요. 교회 안에 이렇게 많은 아빠가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아빠들은 한 분이신 아빠를 향해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앞서 ‘abba’가 아람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람어는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언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소리와 같은 의미로,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아주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다”고 가르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2항, 갈라 4,6 참조) 혹시 하느님이 멀고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한 번 “아빠”라고 친근하게 불러보면 어떨까요?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돈키호테」 :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

밀란 쿤데라가 “모든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지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라고 극찬한 것처럼, 유럽 문학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는 「돈키호테」는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 위치에 있다. 특히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그려내는 주옥같은 우정은 400년이 넘은 세월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16세기를 거치면서 우정의 시학은 다양한 장르에서 중요한 문학적 서사 구조였다. 정치적, 문학적 측면에서 황금 시기였던 당시의 스페인은, 동시에 여러 위기에 직면하면서 상업화, 도시화, 계층 이동에 따른 불안의 변혁기를 겪고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우정이라는 가치를 통하여 흔들리는 사회의 토대를 다시 세우려 한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문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망상에 사로잡힌 방랑 기사이다. 산초는 소박한 농민으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사회 신분은 희극적이면서도 진지한 갈등을 만들어낸다. 현실주의자인 산초가 주인의 이상적 환상에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반복적인 말다툼이 일어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종자가 믿음이 부족하다며 화를 내고 비난하게 된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은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정 안에서, 사회 안에서 혹은 국가 간의 싸움은 대부분 서로 다름에서 시작하였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서로 다름은 누군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의 핵심적인 원리이다. 하느님은 6일 동안 매일 다양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는 그의 저서 「창조의 6일 강론」에서, 다양한 자연 세계는 하느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책”과 같다고 하였다. 제2의 성경인 피조물의 각각 고유한 창조 목적은 반목과 경쟁, 혼돈과 상대주의,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창조주의 선함과 질서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창조주의 질서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다툼과 갈등을 일으킨 돈키호테와 산초의 서로 다름은 길 위의 여정에서 우정의 가치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 망상에 사로잡힌 기사 돈키호테·현실적이며 소박한 농민 산초 모험 속 다툼과 갈등 많았지만 서로의 생각 받아들이고 존중 솔직한 대화로 장벽 넘어서면 진정한 마음의 일치 이룰 수 있어 16세기 유럽 귀족들은 자신의 인품과 상관없이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도덕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하층계급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귀족인 돈키호테와 농민인 산초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라는 틀 안에 있었지만, 산초는 종종 주인의 명령에 반하는 현명한 조언을 한다. 돈키호테는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며 산초의 평민적 지혜를 무시하며 갈등이 발생한다. 속담을 사용하는 산초에 돈키호테는 “속담은 시대의 지혜를 응축해 놓은 것이지만, 너는 종종 그것들을 억지로 끌어다 써서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처럼 보이게 한다”라고 질책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산초의 조언을 무시할 때마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 망신과 육체적 처벌을 겪게 된다. 모험을 거듭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계층적 구분이 흐려진다. 마침내 돈키호테는 산초를 동등한 대화 상대이자 조언자로 대한다: “산초, 네 말이 옳다. 둘시네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공주를 동행하라는 네 조언을 따르겠노라.” 그러면서 그를 “친구,” “아들,” 심지어 “친구이며 안내자”라고 호칭한다. 진정한 우정이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초월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초기 교회도 민족, 계층, 성별, 사회적 지위에 의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부자와 가난한 자, 남성과 여성 등의 불평등으로 인한 다툼과 분열은 낙원에서 타락한 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성 유스티노 순교자는 「제1변증서」에서 우리가 “이전에는 서로를 미워하고 해치며, 풍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의 사람들과는 함께 살기를 거부하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 서로 친밀하게” 지낸다고 언급하며, 그리스도교가 인종적, 민족적 갈등의 장벽을 허물었다고 강조한다. 유다인과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겪고 있었던 갈라티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3,28)라고 권고한다. 역할의 구분을 상대화하면서, 근본적인 평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사에도 “천한 백정을 점잖게 대해 주니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다”라고 고백한 황일광 시몬 성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우정이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정의하였다. 서로 간의 차이는 그대로이지만, 동일한 가치를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동등한 친구가 된다. 제2부 도입부에서 산초가 자신의 주인에게 한 시골 소녀를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 공주라고 우기는 유명한 장면에서, 이제는 종이 주인의 이상적인 기사도 세계관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자기 상상력으로 마법을 만들어 내는 변화를 보게 된다. 또한 가족들의 계략에 속아 현실로 돌아와서 삶의 활력을 잃고 죽어가는 돈키호테에게, 산초는 다시 모험을 떠나자고 간절히 애원한다. “죽지 마세요, 주인님. 이 세상에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어리석음은 더 이상 해볼 것도 없이 스스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산초는 이제 주인의 이상적 비전을 자신의 경험적 현실보다 우선시하며, 주인의 가치관을 내면화시켰다. 친구가 되어가는 여정에서 산초는 점차 이상주의를 받아들여 “돈키호테화”되고, 돈키호테는 현실 감각에 눈을 뜨며 “산초화”되어 마침내 둘은 같은 정신으로 연결된다. 산초는 처음에 돈키호테가 약속한 물질적인 보상을 기대하며 따라갔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보살피고, 존중하며,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마음의 일치를 이룬 동등한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멈추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화였다. 비록 산초의 어설픈 속담, 불평, 주인의 망상을 노골적으로 의문시하는 항의, 그리고 돈키호테의 얼토당토않은 일장 연설과 꾸지람 등으로,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는 솔직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가 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 (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통해 도달하는 행복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지식은 특정 대상의 진리 추구하지만…지혜는 모든 인류의 원리 통찰하는 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 받으려면…파편화된 지식 넘어서는 지혜 필수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 통찰하고…마음 속 지혜로 하느님과 친교 이뤄야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는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단순히 가르침이 적힌 책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가 글로 담겨지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이라면서 “사도의 신앙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을 그 각 부분과 함께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람이 기록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몸소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셨기에 궁극적으로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되기를 바라신 진리가 성경에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 11항 참조) 이처럼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기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으로 구원의 양식과 거룩한 힘을 얻고, 성경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합니다. 미사 입당에도 사제에 앞서 성경(복음서)이 행렬하고, 교회가 거행하는 모든 전례 안에 성경의 말씀이 함께하지요. 성경이 지닌 위상이 이렇듯 특별하다 보니 우리 신앙이 모두 성경으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말씀’이란 바로 사람이 되시어 살아계신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요한 1,14 참조)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사람의 방식으로 썼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바로 성경 저자들이 살아간 시대와 문화뿐 아니라 당시의 문학 유형, 이해·표현·서술 방식 등을 알아야 성경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유의”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 46권과 신약 성경 27권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의 동일한 한 ‘말씀’이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聖傳)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성전은 사도들에게서 이어온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 그리고 성령을 통해 배운 것을 전해온 교회의 거룩한 전승입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믿으며, 이 둘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상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의 유비”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신앙 진리들이 서로 일관성을 지녀야 하고, 또 계시의 전체 계획 안에서 일관성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에서 특정 한 구절만 가져와서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그 교리는 틀렸다”는 식의 해석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계시헌장」 12항 참조) 성경 해석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신부님들께서 강론을 통해 이런 기준에 따라 해석한 성경 내용을 잘 풀이해 주실 테니까요. 거기에 교회가 마련한 성경공부도 하면 금상첨화일 듯합니다.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한다

예수님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신학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꿈이나 환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살과 피를 지닌 인간,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따라서 신학은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에 토대를 둔다. 모세는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양을 치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색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제자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다. 모세가 만난 그 하느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그 하느님을 신학은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인간 이성을 초월한 그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도 있지만 돌파구도 있는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안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하느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함을 통해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해할 때 더 큰 믿음이 생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생긴다. 모르고 믿으면 맹목적이 되지만 알고 믿으면 확실성을 얻게 되고 더욱 순종하게 되고 더욱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신학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 신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움직인다.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은 다르다. 모르고 믿는 사람은 인생 안에서 시련과 고통이 닥칠 때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이런 분이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신학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에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크게 성숙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앎의 세계, 신학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제대로 알면 제대로 믿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학을 하는 이유이다. 신학을 통해 사도들의 하느님 체험, 교부들의 하느님 체험,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 성직자 수도자들의 하느님 체험, 하느님 백성의 하느님 체험을 알게 된다. 이 앎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되고 신앙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알고 믿을 때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일리아드」 : 아킬레스의 눈물

“분노.”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몇 주간을 묘사하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는 이 단어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맹장 아킬레스의 분노이다. 기원전 1200년경 발발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는 5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경 대서사시로 승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는 두 번 분노한다.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선물로 받은 트로이 여인을 빼앗아 버린다. 전쟁의 영웅에게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전리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한다. 아킬레스는 빼앗긴 소유물이 아니라, 짓밟힌 명예에 대해 분노한다. 단 한 번도 숙여보지 않은 자존심에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여기에 대한 분노로 아킬레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군에게 차마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그는, 간접적 침묵의 폭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그가 전장에서 철수하게 되자, 그동안 전쟁에 거의 이겨왔던 그리스 군대는 궤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뛰어들며, 다시 아킬레스가 전장에 돌아온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의 왕자이면서 최고의 명장인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형제와 같았던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스는 두 번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킬레스가 트로이 적군들에게 직접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른다. 특히 제21권 강변에서의 전투는 피에 굶주린 아킬레스의 잔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아킬레스의 인간성 파괴에 이르는 분노의 표출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주검을 돌려주지 않고 갖은 모욕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한 모습이 조각된다. 아킬레스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안에 품었던 분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결과는 인간성 파괴까지 이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어쩌면 작가는 트로이전쟁보다, 인간 본성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싸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G. K. 체스터턴은 “모든 삶이 전쟁이기 때문에, 일리아드는 위대하다”라고 극찬하였다. 아는 선배가 가족들과 자동차로 유럽 여행을 하였다. 형수님과 자존심 대결하느라, 2시간 넘게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운전하였다. 결과는 어린 두 아이의 몸과 마음의 탈진으로 하루를 까먹었다고 한다.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4,26)라고 권고한다. 내면의 분노는 우리의 눈빛, 말, 행동을 통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비인간적인 폭력 극에 달하며 아킬레스에 죽임 당한 헥토르 적장 앞에 엎드린 헥토르의 부친 함께 눈물 흘리며 인간성 회복 호머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으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킬레스는 당시 관행을 어기고, 적장 헥토르의 주검을 모욕하고 트로이 진영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늦은 밤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암 왕은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노구를 이끌고 홀연 단신으로 적진을 찾은 프리암의 모습에 아킬레스와 그리스 장군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이 자기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욕을 자행한 그 두 손에 입맞춤하는 프리암의 행동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식의 주검을 찾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아킬레스에게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라고 호소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간청하는 프리암의 호소에 분노로 가득 찼던 아킬레스의 마음은 누그러진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분노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은 강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용서하는 연민이다. 프리암은 “아킬레스의 발 앞에 쓰러져” 헥토르를 위하여,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위하여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감정의 정점으로 여기며, 주제의 흐름이 아킬레스의 분노에서 연민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해석한다. 아킬레스의 눈물은 프리암에게 느끼는 연민과 화해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회심과 용서의 표시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 임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한 여인, 밖으로 나가서 몹시 많이 울었던 베드로 사도 등 다양한 눈물을 만날 수 있다. 초대 교부들도 눈물의 은사를 두 번째 세례라고 여기며, 신앙생활에서 눈물을 강조하였다.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 잘못에 대해 울도록 권고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막의 철학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무엇보다도 눈물을 구하라. 울음이 당신 영혼의 거친 완고함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라고 초대한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측은지심의 눈물이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프리암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흘린 눈물을 통하여, 완고하였던 분노의 마음을 마침내 무너트렸다. 진정한 승자가 되었다. 호머의 작품들은 로마제국 귀족 자녀들의 필독서였다. 철인 황제라 불리는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의 평정심을 기초로 하는 스토아 철학의 정수인 「명상록」에서 “범법자들도 나와 같은 혈통이나 집안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연관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과 나는 신성을 지닌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프리암이 아킬레스를 찾아갔던 이유는, 분노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아킬레스조차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략 180명의 인물을 다루면서, 24권의 책과 1만 5000행 이상의 운문으로 쓰인 「일리아드」는 서양 문학의 초석이다. 동시에 다양하게 갈라져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정체성의 뿌리였다. 더 나아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묘사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측은지심을 깨닫도록 빛을 밝힌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만 세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비신자가 많이 방문하는 성당이나 큰 행사 등에서는 미사 중 성체 분배에 앞서 해설자가 이렇게 안내하는 것을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천주교(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만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라고요.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는 물론이고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가톨릭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성사를 교류할 수 없는 이유는 교리·신앙이나 성사, 제도 등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들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든지 적법한 방식으로 이뤄진 세례라면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합니다.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는 분이 계시다면 먼저 물로 씻는 예절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는 본인과 세례를 준 집전자의 의향이 적합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켜진다면 꼭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례는 유효합니다.(「교회법」 제869조 2항 참조) 이 기준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는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별도로 물로 씻는 예절과 천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형식을 확인할 수 있으면 인정합니다. 만약 적법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면 조건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세례가 불확실하거나 유효하지 못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두고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의 세례 유효성 관련 사목 지침」 참조) 이처럼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직제에 있어 온전한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은 분이 가톨릭교회에 입교할 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포함한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일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일치교령」 3항 참조)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일치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길 희망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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