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인은 이전 세대보다 자연재해, 궁핍과 기아, 갖가지 질병, 미신, 폭군들의 압정과 같은 많은 굴레에서 벗어나 생활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과학과 이에 함께 급성장한 교통과 통신의 기술은 인간을 제약해 왔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마저도 허물어뜨렸다. 이처럼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편리한 수단들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인간 본연의 천부적 권리, 즉 ‘자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참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 결정주의를 거슬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와 같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성찰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구속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결정주의’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인간이란 자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더 높은 힘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장은 많은 비판에 부딪혔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세계와 사회와 역사에 의존해 있는 상태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또한 외부적인 요인들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심리적 중압감 등으로부터도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보이고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어 보인다. 자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추구할 때 ‘불안’이나 ‘고독’을 느끼게 되고 때로 그 심리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단일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 자체는 필연적임(「진리론」 14,2)을 인정하면서도, 의지가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실행(Exercitii)의 자유는 의지가 자신의 의지 행위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곧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종별화(種別化, Specificationis)의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반대(Contrarietatis)의 자유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진리론」 22,6) ‘실행의 자유’는 전적으로 의지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 ‘종별화의 자유’는 권력, 명예, 재화 등의 가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외적으로 방해받지 않을 때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단계에서 프롬(E. Fromm)이 ‘~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라고 부른 ‘소극적 자유’, 즉 관계·강제·구속·방해 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을 위한 자유’(Liberty for~)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는 ‘반대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도 자유가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현대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듯하다. 외적인 성공에만 집착해서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팽배하고 희생, 절제, 정의, 이웃에 대한 배려 등을 경멸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애순과 관식의 사랑이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다. 양친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이 청춘 남녀가 단지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원했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벗어남, 혹은 도피만으로는 개인의 독립이 아니라 당사자와 양친들에게 더 큰 속박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을 뚜렷이 자각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결정을 통해서 엄청난 어려움들이 생겨났지만, 애순과 관식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관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확신에 찬 의식과 행동이 자신들의 결정에 반대했던 이들도 설득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양한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 자체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이것이 좋으니까 내가 한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하니까 좋은 것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기준은 행위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만약 인간의 의지가 나쁜 것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함을 의미한다. 비도덕적인 결정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자유의 모습을 지녔지만, 자유도 아니며 자유의 한 부분도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져드는 도박, 마약 등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중독이라는 부자유를 남길 뿐이다. 인간은 항상 선한 대상과 악한 대상 중, 자신의 자유를 성숙 또는 억압하는 방향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도덕적인 욕구가 의지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면, 의지가 확고히 선을 향하고 있을수록 그 자유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환경이나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 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면, 과연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있을까?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욕망의 다양한 얼굴

인간은 자신 앞에 나타난 다른 성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성 자체가 매우 유동적(Liquid)이면서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내적 변화가 시선으로 드러나기에 먼저 자신 안에 움직이는 그 변화의 원인, 즉 욕망을 보아야 한다.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녔지만 나의 자유와 지향에 의해 신호등처럼 바뀔 수 있다. 자신도 타자도 인격으로 바라봐야 하나 유혹에 의해 단지 성애적 필요를 만족하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킬 수 있다. 달라지는 양방향의 변화는 바라보는 시선, 즉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을 비추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체험과 구원 과업의 맥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38과 2항)라고 한다. 사랑은 단순히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경험되어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으나, 욕망은 그 질서를 바꾼다. 부정적 얼굴은 인간이 욕망을 느끼는 대로 실행하여 하강으로 빠지는 상태이고, 긍정적 얼굴은 성 충동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최종 목적에 비추어 충동을 조절하여 긍정적 힘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욕망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서 선택하게 되는 지향성이다. 감정은 파도처럼 우리를 높이 올라가게도 내려가게도 하지만, 지향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감정의 강도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욕망이 최종 목적을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은 삶에서 윤리가 크게 두 가지로 흔들리는 체험을 한다. 신앙과 행위를 분리시키고, 진리와 자유를 분리시켜 왜곡되게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27절과 28절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보게 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위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각 상황마다 규칙을 적용하는 결의론적 방법에서 탈피해, 윤리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한다. 윤리의 기초적 문제를 해석하는 인식 체계를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계명을 다 지키고도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이 지니고 있던 마음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마태 19,16-22) 예수께 어떤 사람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그의 질문에서 그가 최종 목적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7절)라며 ‘선한 일’로 물었는데, ‘선하신 분’ 즉 존재로 응답한다. 행위와 존재가 분리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젊은이가 지킨 율법 조항들은 외적인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21절 참조) 주는 것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별개로 행하는 계명 준수는 ‘슬픔’을 가져온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하는 이 슬픔은 ‘참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슬픔(“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근본적 의지의 존재를 언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블롱델(Blondel, Maurice Édouard, 1861~1949)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 젊은이의 질문을 해석한다. 그것은 “삶의 충만한 의미”에 관한 것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열망이요, 자유를 움직이는 은밀한 추구이며 내적 충동”의 발로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절대선을 향한 간구”인 동시에, “인간 생명의 원천이자 목적인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의 반향”이다.(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4항은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 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교리는 ‘몸에 관한’ 신학일 뿐 아니라 인간학과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방법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덕을 채집하라!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회·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간음, 표징의 왜곡과 인격적 계약의 파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간음은 구약을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 기초를 둔 인간학에서 간음을 바라본 복음적 에토스다. 그리고 간음을 명백히 ‘몸의 죄’라 한 것은 참된 몸의 결합이 아니기에 그렇다. 표징을 왜곡하고 인격적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우자와 계약으로 갖게 된 ‘너에게만’ 하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했고, ‘하나’, ‘한 몸’을 말하는 표징을 허위로 만들었고, 상호 조건을 지닌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 계약을 크게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은 첫 번째로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 곧 ‘한 몸’을 허위로 만드는 ‘몸의 죄’다. 두 번째로 계약에 의한 배타적 관계로 사랑에서 나온 서약이 몸의 표현을 통해 이뤄지는 선(善)에서 정반대인 탈선, 윤리악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혼인 서약의 정상적 표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 본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영의 표현이 되고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인격체들의 친교 가운데 실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32과 1항)에 더 깊이 다가갔다. 복음의 에토스는 ‘몸의 복음’을 살라는 초대이고, 창조의 신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에토스는 구성상 이미 완성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실현했고,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영원히 그분은 살아 있고 인격적인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말씀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죄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간음과 죄를 동일시한다.(요한 8,7-11 참조) 율법의 조항을 들어 여인을 고발하러 온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이 아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며 당신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어디에 호소하셨는가? 각자의 양심이다. 바로 한처음 상태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땅인 인간의 마음에 말한다. 마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즉 원순수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에토스를 향하는 길은 창조의 에토스, 즉 사람이 누구인지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에토스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첫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는 인간의 길이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본질을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은 ‘누구’로 바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받은 곳은 그분의 빈 무덤 앞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그리움, 즉 그분이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내 안에 그분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것이요, 발견한 그 참된 보화를 사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율법과 예언서에서의 간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의 의미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서로 간 인격적 바라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상태로 변화됨을 표현한 말씀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 결핍이 발생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의 논리로 변화됐음을 성의 다름으로 말한다. 한처음 좋음에서 분출됐던 인간의 긍정적 욕망이 무엇 때문에 부정적 욕망으로 변했는지, 남자와 여자로 하지 않고, ‘남편’이라 말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부끄러움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심리적 현상과 비슷하여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편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처럼 남편은 다른 표징을 의미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한처음 충만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으로 결핍 상태에서 느끼는 욕구를 말한다. 한몸이 될 수 있는 관계는 표징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관계, 실제적으론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즉 혼인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에페 5,31-32 참조) 그런데 그의 욕망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한몸이 되어야 할 남편의 자리에 욕망이 들어와 그와 한몸처럼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이 주인이 되어 나를 조종하는 상태가 됐다. 내가 갈망하는 그 욕망들 즉 재물, 권력, 명예, 여러 소유욕 등이 주인으로 들어와 견고한 벽돌을 쌓게 됨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볼 것은 갈망으로 드러난 목마름(결핍)이다. 이는 여자의 결함이나 무능력, 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남편과 이루게 될 결합의 광범위한 정황에서 여자가 느끼게 될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가리킨다. 땅의 속성에 묶이게 된 인간의 욕망은 내어줌에서 얻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소유함에서 부유해지려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인격들의 친교 대신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 갈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 관계가 발생합니다.”(31과 3항) 욕망과 결합된 부끄러움은 남자로 하여금 ‘지배’ 충동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상대가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면 일치가 불가능해지나 일치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를 지배 혹은 통제, 소유하고자 하는 관계에 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지 않고 영원과 묶어주는 희망에서 얻는다는 진리를 덮고자 한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남자가 ‘남편’이라 불리는 첫 문장으로 친교-공동체의 근본적 상실을 의미한다. 성의 다름에서 인격의 우수한 점을 직감했고, 서로에게 순응하는 감수성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열리고 또 노출되도록 창조됐음을, 또 그들이 체험한 사랑은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향한다는 의미에 눈 감은 것이다.(48과 4항) 즉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이미 창조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상호 보완성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남을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타자의 몸에 대해서도 혼란을 가져왔다. 선물의 논리가 지배의 논리로, ‘한몸’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논리가 되어 높고 높은 벽이 그들 안에 들어왔다. 만약 성적 다름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지평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쾌락의 감각적 선(善)과 인격 상호 간의 좋은 삶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성에 대한 진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에 관한 질문을 안겨 준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하)

지난 호에서는,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사막 교부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그 핵심은 하느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실천적 방법이 ‘멜레테’(되새김) 수행이었다. 이번 호는 기도 자체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기도는 관상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내적 평정심을 얻은 수행자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목표로 하는 관생생활로 들어선다. 관상가가 된 그는 이제 마음 안에서의 순수한 기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로 나아간다. 기도에 대한 교부의 이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 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 토대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초월적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왔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교부들은 신학자와 기도의 관계를 말하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참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기도한다면 그대는 진정 신학자다.”(기도론 60) 고대에는 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관상가를 뜻했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자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기도)하는 사람이다. 대화의 본질 대화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대화를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 여기는 우리의 이해가 참된 대화를 가로막는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말을 주는 데 있기에, 각자 상대에게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주입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말만 늘어놓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참된 대화는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먼저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다. 그리고 경청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경청한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기도는 완성되고 우리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의 방법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서 단순성을 강조한다. 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말한다. “빈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손을 펼치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또 당신께서 아시는 대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유혹이 다가오면,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마카리우스 19)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탁월성은 단순히 그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 이것은 성전에 들어간 두 사람을 통해 입증된다”(기도론 151)고 말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이렇게 권고한다.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세리와 탕자는 간단한 기도로 하느님께 호의를 구했습니다. … 기도할 때 말을 세세히 고르려 애쓰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재잘거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랩니다. 그대는 많은 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걱정은 정신을 분산시킵니다. 세리는 한마디 말로 주님을 달랬고, 믿음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도를 구원했습니다. 많은 말은 정신을 망상으로 가득 채워 기도 중에 주의를 흩뜨립니다. 한마디 말이 정신을 집중하게 해줍니다.”(천국의 사다리 28,188.189) 교부들은 기도의 순수성도 강조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는 가장 성숙하고 이상적인 기도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 기도의 첫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복음 속 세리의 자세로,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자세는 감사다. 기도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끝으로 인내다. 안키라의 닐루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혜롭게 견딜 줄 안다면 기도에서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닐루스 5)라고 말한다.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울림을 준다. “그대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청했던 것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영적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과 결합해 있을 수 있고, 그분과 부단한 일치를 지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고한 선이 어디 있겠습니까?”(천국의 사다리 28,191) 기도는 우리의 영적 진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기도를 사랑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릴 것이다. 기도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지속성을 띤다.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잠잘 때조차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와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결국 우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갈 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 길은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그분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리라!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성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의미

“인간성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은 내재적인 동시에 상대적입니다.”(28과 1항) 부끄러움은 자신의 욕망과 직결되어 양심이 불안한 상태임을, 인격 형성에 근본이 되는 자기 다스림을 위협하는 신호이다. 동양 사상에서도 수오지심을 의(義)의 발단이며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 하나로 보았다. 지난 주(22회)는 영육의 내적 불균형으로 자기 다스림이 어려운 부분을 살폈고, 오늘은 상대적 의미로 ‘성적’ 특성 부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부끄러움의 직접적 내용은 성적 가치이지만 간접적 대상은 한 인격, 즉 타자의 인격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인간의 성은 욕망, 특히 ‘육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불균형이 잘 드러나고, 수치심의 현상으로 느껴진다. 이는 추구하는 가치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편으론 가치에 대한 위협이고, 또 다른 편으론 그 가치를 보존하려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의 본질적 특징은 성적 가치를 숨기려는 경향을 띤다. 특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성적 가치가 타자에게 ‘잠재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비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랑이 부끄러움을 흡수한다’라는 사실에 의하면, 참된 부끄러움은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할 긍정적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은 사랑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창세3,1-5).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는 분명 다른데, 뱀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점을 헷갈리게 말한다. 그들에게 금지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하느님의 독자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다는 것은 원래의 근원에서 생명의 물을 끌어 올리지 않고 스스로 샘이 되고자 한 것이다. 뱀의 말을 듣고 사람이 잘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더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 ‘만지지도 마라’를 덧붙여 자신들의 말로 강조했지만 사실은 선물에 대한 의심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자기 증여로 창조한 그 사실에 대한 의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인간성을 의심하기에 선물과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어왔다.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결핍이 무화과나무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게 했고, 인간 본성에 새로운 상태가 더해지게 된다. ‘가림’, ‘숨김’은 그들이 세상에서 온 욕망을 알게 됐음을 말한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다스리기 어렵고, 자신을 가림으로써 너에게서 고립된다. 다 가질 것 같았는데 자신마저도 갖지 못하는 상태다. 교리서는 이 관계에서 특히 성적 부끄러움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성의 다름을 통해 더 넓게 이루어졌던 친교가 어려워졌고, 가리고 숨김으로써 상호 소통 능력의 상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 다름을 탓하며, 책임이 ‘너’에게 있다면서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다. 상호 친교 안에서 충만함을 가능케 했던 단순함, 원체험의 순수, 아낌없는 자기 증여 능력은 포장되어 버렸다. 마치 흙 위를 아스팔트로 포장한 것처럼. 그러자 인간과 땅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창세 3,17-19). 그러나 완전한 절망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그대로 두셨고, 동물과 같이 본능에만 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사실 몸은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요소로, 인격으로서 인간은 이 초월에 힘입어 다른 생물들의 가시적 세상을 뛰어넘습니다.”(27과 3항)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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