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깨어 있어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에 관한 앎, 세가지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살폈으니, 오늘은 1장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에 관한 앎을 더해보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ᅠ사람을ᅠ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 계시에서 혼자가 아닌 관계를 드러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사람이 당신들의 ‘모상’(imago)이며 또한 ‘유사함’(similitudo)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모상’은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 존엄성의 존재론적 뿌리가 당신에게 있음을, ‘유사함’은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다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그래서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마태 5,48; 루카 6,36) 인간에 역동적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로마 3,26: 8,30 참조) 완전함을 향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이 역동적 실현은 하느님 ‘모상’인 몸에 관한 이해와 속성 그리고 몸의 언어에 담겨있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나는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몸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몸은 어떤 언어를 표현하는가?’이다. 첫째, 몸은 선물이다. 나는 선택과 자유 없이 남자/여자로 태어났고, 또 그 성(남성성/여성성) 그대로 거두어진다. 한 번은 세상 안으로, 또 한 번은 세상 밖으로의 불림이다. 그 부름을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며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눈이나 세상의 눈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의 눈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으며,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생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 둘째, 몸은 혼인적 속성을 지녔다. 혼인적 속성을 살 것이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 안에 있다. 인간 몸이 육체성만 있지 않듯이 혼인적 속성 또한 결혼을 해서 나누는 성적인 육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몸이 지닌 내적인 질서, 곧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혼인한 이들은 부부 결합 방식으로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관계이지만, 동정이나 봉헌자들은 지향에 의해 생식성의 사용을 배제한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실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성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셨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삶의 형태이다. 만약 몸을 ‘선물’의 논리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내어줌은 자기 탈출, 자기 초월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의 놀라운 실현이다. 셋째, 몸은 사랑의 언어를 드러낸다. 눈짓, 손짓, 미소, 말 등으로 드러나는 이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인격의 표현 수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창세 1,26), 즉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받아들인다. 다른 분을 위해, 다른 분과 함께, 다른 분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누구를 향해’ 살아갈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쓰여진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에 대한 정의는 혼자가 아닌 관계에서 찾게 되고, 타자는 ‘나’를 보완하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나로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을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정점에 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선물로, 자신의 신부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혼인적 속성으로,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임이 곧 내어줌이 되고, 이 관계가 세상 안에서 변화되면서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여정이 된다. 몸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내려가라!

우리 스승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이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그분을 내려오게 하였고,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게 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예수님을 본받고자 전 삶을 투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부단히 노력했고 제자들에게도 ‘내려가라’ 권고하였다. 역설의 신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우리가 자신을 낮출 때 높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가장 높은 사람이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타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 가르침은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위로 올라가 남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역설의 길,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 남을 섬기는 길로 초대받았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겸손의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임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겸손을 위한 분투 사막 교부들은 겸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겸손은 그들 일상생활의 본질과도 같았다. 그들은 겸손에서 멀어져 교만에 빠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교만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제자란 상상할 수 없었다. 온갖 덕에 나아간 사람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래서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겸손을 위해 분투했다. 어떤 수도승들은 사제품을 주려는 주교를 피해 도망 다니곤 했다. 그들은 늘 초심자로 남아있기를 바랐고 매일 초심자로 시작하려 노력했다. 피누피우스 압바가 대표적이다. 매우 큰 수도원의 연로한 사제였던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열렬히 추구했던 겸손을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몰래 수도원을 도망쳐 신분을 감추고 먼 곳에 있는 다른 수도원에 지원자로 입회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기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본래의 수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오랫동안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겸손한 삶을 악마의 질투로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에 슬퍼했다.(규정집 4,30.31) 최상의 덕 오르 압바는 겸손을 ‘수도승의 화관’이라고 했다.(오르 9) 7세기 시리아 수도승 이사악은 겸손을 ‘하느님의 옷’이라고까지 하였다. 수도승 전통에서 겸손은 모든 덕의 절정이자 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참된 겸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완덕과 순결의 끝에 도달 할 수 없다”(규정집 12,23)고 말한다. 다음 일화는 교부들이 겸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형제가 ‘당신이 본 환시를 말해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파코미우스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죄인이라 하느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소.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 환시인지 들어 보시오. 당신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위대한 환시요.’”(「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300쪽) 겸손한 사람은 바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마태 11,29) 닮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지 못한 수도승이나 신앙인은 스승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겸손은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덕이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겸손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다. 악령은 겸손한 자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악령이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다가와 그의 발을 자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악령이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두 가지고 있다. 너는 단지 겸손 때문에 우리와 구분된다. 너는 겸손으로 우리를 능가한다.’”(대大마카리우스 35) 카시아누스는 겸손 없이 우리는 어떤 악령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규정집 6,1) 이처럼 겸손은 악령이 범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반면, 교만은 악령이 공격해 들어오는 빈틈과도 같다. 우리가 교만할 때 악령은 우리를 쉽게 공격한다. 악령은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악령의 공격을 심하게 받는다면 하느님께 앞서 나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수록 악령은 우리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악령의 공격을 피하는 최상의 무기는 교만일 것이다. 순종의 토대 아담은 스스로 올라가려 했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다. 교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불순종의 토대라면, 겸손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해주는 순종의 토대다.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겸손과 순종의 길을 가고자 그토록 노력했고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싸웠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못 없이 배를 만들 수 없듯이, 겸손 없이 구원될 수 없습니다”(신클레티카 26)라고 말했다. 또 테오도라 암마도 “금욕 수행이나 철야 혹은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테오도라 6)고 말했다. 겸손이 구원의 유일무이한 무기인 순종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인간적 성숙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사람의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오래전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떠나는 날 한 노(老) 신부님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이 죄인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필자가 몸 둘 바를 몰라 “신부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자, 그분이 말했다. “우리 노인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죄를 지었기에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그분에게서 묻어나는 겸손을 강하게 느꼈었다. 이런 겸손한 모습은 평생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감추어진 삶을 통해 몸에 밴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인격과 언행을 통해서도 이런 겸손이 묻어나온다면,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참 제자일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몸 신학 교리]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고독-일치-순수는 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로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자신을 초월하여 너(altro-Altro)에게 건너갈 수 있는 장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를 만나 이루는 하나됨의 기쁨은 순수가 있어야만 영원히 가능하다. 이 본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우리를 찾아 하늘에서 오셨고(물리적·역사적인 몸), 교회 안에서 영원히 내어 주신 그분 안에서 찾은 몸의 의미다.(성체적인 몸) 그래서 몸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인간도 사랑도 신비로 가득하다. 인간에겐 땅(자연적인)의 가치를 열심히 찾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반대로 초월적 가치를 부지런히 찾아도 닿지 않는 무엇이 있다. 자연적인 가치와 자아 초월적인 가치가 함께 있는 긴장감, 그 긴장감으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매력이다.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 사랑이 신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낳음 받았고, 행복하라고 몸을 주셨다.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이 몸과 눈물만을 거두어 영광으로 완성시키실 것이다. ‘원순수’에 대한 가르침이 교리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순수 상태를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데, 루카 복음 15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멀리 간 지방의 의미, 돼지들의 먹잇감이라도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먹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탕진됐음을 알았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원체험을 기억하고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순수의 회복은 인간이 가야 할 진리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처음 상태를 회복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반복 체험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궁극적 목적이다.(로마 8,23 참조)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정합적 인간학(Antropologia adeguada)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인간을 정의했고, 교리서를 통해 선포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페르소나(persona)라 정의한다. 우리말에선 인격, 사람, 인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그 어느 단어도 본래의 뜻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통해서 연주하다’(per-suona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 아내는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고,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넓혀졌다. 인간 본성의 내적 특징이 강조된 ‘Persona’를 첫 글자 ‘P’가 대문자일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칭하는 ‘위격’으로, 소문자일 때는 대체로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역동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을 생각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것은 ‘낳음’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그 정점에 이르면 하느님을 만난다.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독-일치-순수가 인간 편에서 느끼는 내적 지각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을 보이는 모습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 구분 인간적 행위만이 행복 찾는 출발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 본성 지닌 개별 실체 최고선은 ‘행복’으로 모두 동일해도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들어라!

현대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아마도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해 대부분 자기표현이나 말은 잘하지만, 남의 말을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사실 자기 말을 하기보다 남의 말을 듣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공통된 경험이란 생각이 든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오늘은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주는 ‘들어라!’는 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압바 요셉이 압바 니스테루스에게 물었다. ‘제 혀를 통제할 수 없으니,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말을 할 때 평화롭습니까?’ 그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원로가 말했다. ‘평화롭지 못하다면 어째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입을 다무십시오. 그리고 대화가 있을 경우,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니스테루스 3) 이 금언은 경청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말이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하고 공허한 말은 오히려 내적 고요와 평화를 앗아간다. 우리는 너무도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듣지 못하는 곳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대화와 타협, 화해와 일치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왜 그럴까? 들음, 대화의 전제 들음은 대화의 전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참된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받고 주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말을 주는 데, 즉 자기 생각과 의견 혹은 주장을 관철하는데 강조점을 두다 보면 대화는 늘 공전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마찬가지다.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기보다도 끊임없이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참된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하며 선행되어야 한다.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듣더라도 잘 들어야 한다. 잘못 들으면 그릇된 응답이 나올 수 있다. 각자 자기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기에 늘 동문서답이다. 잘 듣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침묵과 열린 마음이다.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아무리 침묵하고 있어도 마음을 닫아걸고 있으면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닫힌 마음을 지배하는 고정관념과 편견, 선입견이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듣게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것은 참된 들음이 아니다. 들음은 경청이 되어야 한다. 경청은 한자어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귀 기울여 들음’(傾聽)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음’(敬聽)이다. 따라서 참된 들음은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런 경청이야말로 참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갈등과 대립, 불목과 분열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들음, 순종의 시작 들음은 순종과 직결된다. 순종이 우리 구원 여정에서 중요한 이유는 침묵에 관한 지난 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듣다’(audire)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한 ‘순종’(oboedientia)은 간단히 말해 ‘말을 듣는 것’이다.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곧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순종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들은 것을 실행할 때 완성된다. 순종은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다시 그분께 되돌아간다. 이는 곧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있다. 따라서 순종의 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가신 길은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길이었고,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는 그분이 가신 이 순종의 길, 즉 사랑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들음, 제자의 표지 사막에서 ‘들음’은 주로 제자에게 강조된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자였고,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고 명령하는 자였다. 제자는 스승이 하는 모든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스승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순종함으로써 제자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격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된다. 수도승은 ‘듣는 자’다. 이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제자임을 뜻한다. 그의 참된 스승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래서 늘 듣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늘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 안에 담긴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세상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늘 배우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축적된 자신의 경험으로 말이 많아질 수 있다. 또 남을 가르치려는 유혹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말이 많아지면 추해질 수 있다. ‘나 때는~’이나 ‘꼰대’ 취급받지 않으려면 말을 줄이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말 많은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들음(경청)일 것이다. 들음은 제자의 표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이기를 바란다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순수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는 원순수의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원순수는 원고독·원일치와 함께 사람이 누구인지 계시되는, 인간 창조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을 열어보는 결정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 “원초적 알몸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인간학의 첫 밑그림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학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교리서 11과 2항)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갓난아이와 같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지도, 결혼하고 첫날을 지낸 신랑신부가 배우자의 몸을 보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몸의 언어가 갖고 있는 더 깊은 차원을 표현한 것으로 성의 다름,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에 가톨릭 사상의 놀라운 변화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성사 이전의 성사입니다.’ 오직 영원한 사랑(Amore)의 가시적 표지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Trittico romano, II, 3) 이는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다른 이를 향해 있는 존재라는 것,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하느님을 닮은 그것,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고자 하는 선(좋음)이 타자를 향해 본성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서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dono di sé)을 알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한 의식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안 것을 숨기거나 남기지 않고 주었기에 알몸이었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의 언어인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다’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다. 어떤 강압이나 다른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움 안에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음을, 내 몸은 이미 하느님의 성사임을 기억할 때, 상호 인격적 내어줌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선물로 주셨고, 죄성이 발견된 후(창세기 3장의 상태)에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가, 자유는 진리 안에서 가능하다(요한 8장 참조).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다스림과 절제가 가능하고 덕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교리서에서는 알몸의 의미를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 ‘인격주의적’이라고 정의한다. 벗어서 알몸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입지 않은 ‘존재’, 선물의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원순수의 존재와 양심이 살아나야 하는 것, 우리가 되돌아가야 하는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몸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랑이 가진 두 관점, 즉 본능과 자유, 신앙과 이성, 에로스와 아가페를 분리하지 않고 한 인간을 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종교학자 크리스티나 트라이나는 “육신은 성사적 의미를 갖는다” 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는 순간 내 마음도 삶도 자신의 욕망에 갇힐 수 있다.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앞에서 어떤 전망을 갖기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고, 그 답은 한처음 즉 이미 나를 창조하실 때 그분의 계획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당시 사회 지도자들)에게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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