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율법과 예언서에서의 간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의 의미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서로 간 인격적 바라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상태로 변화됨을 표현한 말씀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 결핍이 발생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의 논리로 변화됐음을 성의 다름으로 말한다. 한처음 좋음에서 분출됐던 인간의 긍정적 욕망이 무엇 때문에 부정적 욕망으로 변했는지, 남자와 여자로 하지 않고, ‘남편’이라 말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부끄러움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심리적 현상과 비슷하여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편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처럼 남편은 다른 표징을 의미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한처음 충만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으로 결핍 상태에서 느끼는 욕구를 말한다. 한몸이 될 수 있는 관계는 표징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관계, 실제적으론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즉 혼인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에페 5,31-32 참조) 그런데 그의 욕망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한몸이 되어야 할 남편의 자리에 욕망이 들어와 그와 한몸처럼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이 주인이 되어 나를 조종하는 상태가 됐다. 내가 갈망하는 그 욕망들 즉 재물, 권력, 명예, 여러 소유욕 등이 주인으로 들어와 견고한 벽돌을 쌓게 됨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볼 것은 갈망으로 드러난 목마름(결핍)이다. 이는 여자의 결함이나 무능력, 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남편과 이루게 될 결합의 광범위한 정황에서 여자가 느끼게 될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가리킨다. 땅의 속성에 묶이게 된 인간의 욕망은 내어줌에서 얻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소유함에서 부유해지려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인격들의 친교 대신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 갈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 관계가 발생합니다.”(31과 3항) 욕망과 결합된 부끄러움은 남자로 하여금 ‘지배’ 충동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상대가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면 일치가 불가능해지나 일치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를 지배 혹은 통제, 소유하고자 하는 관계에 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지 않고 영원과 묶어주는 희망에서 얻는다는 진리를 덮고자 한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남자가 ‘남편’이라 불리는 첫 문장으로 친교-공동체의 근본적 상실을 의미한다. 성의 다름에서 인격의 우수한 점을 직감했고, 서로에게 순응하는 감수성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열리고 또 노출되도록 창조됐음을, 또 그들이 체험한 사랑은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향한다는 의미에 눈 감은 것이다.(48과 4항) 즉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이미 창조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상호 보완성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남을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타자의 몸에 대해서도 혼란을 가져왔다. 선물의 논리가 지배의 논리로, ‘한몸’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논리가 되어 높고 높은 벽이 그들 안에 들어왔다. 만약 성적 다름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지평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쾌락의 감각적 선(善)과 인격 상호 간의 좋은 삶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성에 대한 진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에 관한 질문을 안겨 준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하)

지난 호에서는,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사막 교부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그 핵심은 하느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실천적 방법이 ‘멜레테’(되새김) 수행이었다. 이번 호는 기도 자체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기도는 관상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내적 평정심을 얻은 수행자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목표로 하는 관생생활로 들어선다. 관상가가 된 그는 이제 마음 안에서의 순수한 기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로 나아간다. 기도에 대한 교부의 이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 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 토대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초월적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왔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교부들은 신학자와 기도의 관계를 말하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참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기도한다면 그대는 진정 신학자다.”(기도론 60) 고대에는 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관상가를 뜻했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자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기도)하는 사람이다. 대화의 본질 대화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대화를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 여기는 우리의 이해가 참된 대화를 가로막는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말을 주는 데 있기에, 각자 상대에게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주입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말만 늘어놓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참된 대화는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먼저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다. 그리고 경청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경청한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기도는 완성되고 우리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의 방법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서 단순성을 강조한다. 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말한다. “빈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손을 펼치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또 당신께서 아시는 대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유혹이 다가오면,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마카리우스 19)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탁월성은 단순히 그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 이것은 성전에 들어간 두 사람을 통해 입증된다”(기도론 151)고 말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이렇게 권고한다.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세리와 탕자는 간단한 기도로 하느님께 호의를 구했습니다. … 기도할 때 말을 세세히 고르려 애쓰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재잘거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랩니다. 그대는 많은 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걱정은 정신을 분산시킵니다. 세리는 한마디 말로 주님을 달랬고, 믿음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도를 구원했습니다. 많은 말은 정신을 망상으로 가득 채워 기도 중에 주의를 흩뜨립니다. 한마디 말이 정신을 집중하게 해줍니다.”(천국의 사다리 28,188.189) 교부들은 기도의 순수성도 강조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는 가장 성숙하고 이상적인 기도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 기도의 첫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복음 속 세리의 자세로,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자세는 감사다. 기도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끝으로 인내다. 안키라의 닐루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혜롭게 견딜 줄 안다면 기도에서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닐루스 5)라고 말한다.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울림을 준다. “그대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청했던 것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영적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과 결합해 있을 수 있고, 그분과 부단한 일치를 지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고한 선이 어디 있겠습니까?”(천국의 사다리 28,191) 기도는 우리의 영적 진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기도를 사랑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릴 것이다. 기도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지속성을 띤다.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잠잘 때조차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와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결국 우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갈 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 길은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그분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리라!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성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의미

“인간성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은 내재적인 동시에 상대적입니다.”(28과 1항) 부끄러움은 자신의 욕망과 직결되어 양심이 불안한 상태임을, 인격 형성에 근본이 되는 자기 다스림을 위협하는 신호이다. 동양 사상에서도 수오지심을 의(義)의 발단이며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 하나로 보았다. 지난 주(22회)는 영육의 내적 불균형으로 자기 다스림이 어려운 부분을 살폈고, 오늘은 상대적 의미로 ‘성적’ 특성 부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부끄러움의 직접적 내용은 성적 가치이지만 간접적 대상은 한 인격, 즉 타자의 인격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인간의 성은 욕망, 특히 ‘육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불균형이 잘 드러나고, 수치심의 현상으로 느껴진다. 이는 추구하는 가치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편으론 가치에 대한 위협이고, 또 다른 편으론 그 가치를 보존하려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의 본질적 특징은 성적 가치를 숨기려는 경향을 띤다. 특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성적 가치가 타자에게 ‘잠재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비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랑이 부끄러움을 흡수한다’라는 사실에 의하면, 참된 부끄러움은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할 긍정적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은 사랑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창세3,1-5).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는 분명 다른데, 뱀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점을 헷갈리게 말한다. 그들에게 금지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하느님의 독자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다는 것은 원래의 근원에서 생명의 물을 끌어 올리지 않고 스스로 샘이 되고자 한 것이다. 뱀의 말을 듣고 사람이 잘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더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 ‘만지지도 마라’를 덧붙여 자신들의 말로 강조했지만 사실은 선물에 대한 의심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자기 증여로 창조한 그 사실에 대한 의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인간성을 의심하기에 선물과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어왔다.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결핍이 무화과나무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게 했고, 인간 본성에 새로운 상태가 더해지게 된다. ‘가림’, ‘숨김’은 그들이 세상에서 온 욕망을 알게 됐음을 말한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다스리기 어렵고, 자신을 가림으로써 너에게서 고립된다. 다 가질 것 같았는데 자신마저도 갖지 못하는 상태다. 교리서는 이 관계에서 특히 성적 부끄러움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성의 다름을 통해 더 넓게 이루어졌던 친교가 어려워졌고, 가리고 숨김으로써 상호 소통 능력의 상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 다름을 탓하며, 책임이 ‘너’에게 있다면서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다. 상호 친교 안에서 충만함을 가능케 했던 단순함, 원체험의 순수, 아낌없는 자기 증여 능력은 포장되어 버렸다. 마치 흙 위를 아스팔트로 포장한 것처럼. 그러자 인간과 땅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창세 3,17-19). 그러나 완전한 절망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그대로 두셨고, 동물과 같이 본능에만 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사실 몸은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요소로, 인격으로서 인간은 이 초월에 힘입어 다른 생물들의 가시적 세상을 뛰어넘습니다.”(27과 3항)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 변화

지난 6주 동안 우리는 전례 시기에 맞춰 교리서 제3부 ‘육의 부활’ 편을 공부하면서 부활의 개념을 좀 더 선명하고 새롭게 정립했다. 이제 멈추었던 제2부 ‘마음의 구원’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한처음’과 더불어 ‘몸 신학’을 푸는 열쇠다. 간결한 문장 같지만 이 말씀의 정황과 의미는 매우 폭넓고 깊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혼으로 우리를 ‘한처음’, 즉 창세기 1장과 2장에 옮겨 줬듯이, 이 말씀도 창세기 3장까지 올라가야만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처음 인간은 기뻐하며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고백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자신들의 내적(마음) 상태와 거기에서 변화된 마음 상태를 행위로 드러낸 표현이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각하는 마음은 도덕의 안내자로 내적 진리를 말하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두려움 때문에 두 가지를 잃어버렸음을 드러낸다. 하나는, ‘하느님 모상’에 대한 원초적 확신을 잃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없게 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시각의 참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에 장애가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심오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의 존재요 선물이 아님을, 창조된 선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모습 그대로임을 볼 수 없게 됐다. 이는 인간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화됐다는 뜻이다. 타자는 나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관계로 변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는 원고독에서 타자에게 향했던 몸-인격의 통합체로서의 유일한 존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다.(28과 2항) 결국 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인격이 갖는 가치의 존엄성도 타자의 존엄성도 위협한다. 몸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모상인 그의 초월적 조직의 ‘일부’가 명백히 땅의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이다.(27과 4항) 이 사실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품위, 피조물임에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그분의 상대인 ‘너’로, 곧 책임 있는 주체이자 당신과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반자로 부르신 그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성에 참여하도록 인도한 그것을 땅에 묶어버린 것이다. 언뜻 보면 부끄러움은 어떤 외적인 사실이나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감추려는 경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분명 인격과 관계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인격의 존재가 내적이라는 사실, 인격은 자기 고유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격과 결부되어 있는 부끄러움은 인격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한다. “제가 알몸이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원초적 부끄럼은 그 자체 내에서 몸이 일으킨 구체적 굴욕의 표징들, 즉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내 자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고백록」 VIII, X, 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상)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도는 하느님께 정향된 그들의 삶 자체였다. 스케티스의 압바 이시도루스는 말했다. “젊은 시절 독방에 머무를 때 나는 기도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밤도 낮과 똑같은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이시도루스 4) 키프로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는 “참된 수도승은 자기 마음속에 끊임없이 기도와 시편 낭송을 품고 있어야 한다”(에피파니우스 3)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하고 밤샘 기도를 하고 줄곧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라는 법이 있다.”(프락티코스 49) 사막 교부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 외 것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기도 수행을 위한 그들의 치열한 노력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2회에 걸쳐 살펴볼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명령하셨다. 사도들은, 특히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권고하였다. ‘항상 기도하라’는 예수님과 사도의 이 권고는 초세기부터 우리 시대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항구한 이상으로 남아 있다. 이 권고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어떤 이들은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기도 하였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두 부류의 금욕단체, ‘에우키테스’(euchites, 기도하는 사람들)와 ‘아체미티’(acemiti,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기 위해 세속적인 일, 무엇보다도 손노동을 거부했다. 후자는 공동체에서 절대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여러 그룹의 수도승이 바치는 시간 전례로 ‘항구한 기도’(Laus perennis)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원칙은 ‘항구한 성체 흠숭’과 ‘항구한 로사리오’란 이름으로 서방에서 확산했다. 사막에서 꽃핀 이상 성 바오로의 권고를 명심한 초기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념했다. 그들은 부단한 시편 낭송과 묵상, 기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손노동 중이나 식사할 때, 또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휴식할 때조차 늘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이 ‘하느님 기억’을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언제나 카시아누스의 표현에 따른 기도의 상태(status orationis)를 살기 위해 기도에 할애된 시간을 늘리려 노력했다. 피곤함이나 분심도 그들의 외적 기도의 행위(actio orationis)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지속적 ‘기도의 행위’를 통해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기도의 상태’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와 삶 자체가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기억 사막 교부들이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삼았던 ‘하느님 기억’은 특히 성 바실리우스의 핵심 개념이다. 바실리우스에 의하면, 하느님 기억을 위한 주된 방법은 ‘성경에 대한 되새김(meletẽ)’이다. 이것은 영혼 안에, 하느님에 관한 생각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기억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의(prosoché)해야 한다. 이 주의(注意)는 영혼의 약이며, 영혼의 참된 약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욕정은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을 방해하므로, 욕정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이에 대한 가르침은 그의 「서간」 2의 기도에 대한 정의 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영혼 안에 하느님 생각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훌륭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내주(內住), 즉 하느님 기억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이 세상 걱정으로 중단되지 않고 정신이 갑작스러운 욕정들로 동요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벗은 이 모든 것을 피하며 그를 방종으로 유혹하는 욕정들을 거부하고 덕으로 이끄는 행동 방식에 항구하면서 하느님께 피신합니다.”(「서간」 2,4) 멜레테 수행 사막 교부들은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들은 분심을 피하려고 반복해서 하는 짧은 기도문을 사용했다. 이 짧은 기도는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나이, 팔레스티나, 시리아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全)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기도의 일반적 특성은 간결성과 단순성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한 구절, 특히 시편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혹은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되뇌는 멜레테(meletẽ ,수행(되새김 수행))였다. 이 수행은 하느님 현존 의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사용한 멜레테 양식은 다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양식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복음의 세리의 기도를 즐겨 사용했다. 압바 암모나스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라는 세리의 말을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라고 권고하였다.(암모나스 3) 압바 루키우스는 “하느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크신 선과 풍성한 자비로 제 죄에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51,3)를 이용하였다.(루키우스 1)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압바 이사악은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1,2)를 지속적으로 암송하도록 권고하였다. “하느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려고 하는 수도승이면 누구나 갖가지 다른 생각을 쫓아버리고 마음속으로 이 문구를 끊임없이 되뇌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담화집 10,10) 그들이 되새김 수행을 위해 즐겨 사용한 기도는 결국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였다. 사막 교부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되새김 수행을 통해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며 늘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이로써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다음 호에서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부활에 관한 주님 말씀은 몸의 계시를 완성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부활을 믿었던 바리사이적 해석 유형을 완전히 넘어선 새로운 ‘몸의 계시’를 완성했다. 죽음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생 굽이굽이를 거치면서 ‘잘 살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할 뿐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 고민이 죽음의 진리에 자신을 놓는 성숙한 주체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복된 전망을 향해 신성한 진리를 갈망하고 엿보게 된다. 결국 해결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도전처럼 하늘을 향한 문을 여는, 즉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리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인식,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STh.,II-II,q.1,a.6)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인간이 일시적이고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하느님을 말함)에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현실에서 인간을 상승시키는 단계로 작용하여 사물의 해방을 넘어설 수 있는 경향을 얻게 한다. 여기에서 얻어진 체험은 지상 삶에서 그 어떤 일치보다 앞에 둔다. “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네, 갑니다”라는 인간의 적극적 응답이 삶에서 드라마틱하게 일어나고, 그러한 삶은 자신의 모든 것에 중심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매일 타자를 향해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곧 사랑(Amor)에 응답하는 삶이다. 이런 사랑의 전달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희망을 낳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타자의 삶에 주체로 들어가는 변화를 겪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희망과 선은 미래에만 유효하고, 오로지 희망을 품고 있는 그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제한적으로 보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희망을 사랑이라는 덕행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사랑의 보편성에서 희망의 보편성을 끌어낸 것이다. 부활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인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활’에 관한 답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틈은 사라졌고, 죽음과 삶, 허무와 존재가 새롭게 연결됐다. 그래서 종말론은 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격에서 시작된다. 구원을 개인의 이기주의 충족이 아닌 인격적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그분을 향해 돌아서야 하는 이유요, 오늘 내 삶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은 끊임없이 무한을 알려고 한다. 유한이 무한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무한이 품고 있는 속성, 곧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은 유한에서나 무한에서나 같은 속성이고,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 저곳에서 열매로 드러난다. 이 땅에서 유한인 우리는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날을 맞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몸의 혼인성은 무한을 향해 열려 있고, 그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어떠한 성소의 길을 가든 예외는 없다. 모든 이가 전 생애를 통해 부활 상태의 몸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응답의 삶이요 아름다운 파스카적 삶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기능이 다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로 부르심이요, 완성을 위한 전 존재의 부름이다.(「사목헌장」 18항 참조) 인간은 두 가지 차원, 즉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와 실존 모두를 하느님께 기원을 두며, 하느님께서 존재하길 원하시고 유지하고자 하시기에 존재할 수 있으며, 부활로 부르시는 그날 자녀로서 되돌아간다.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오늘’로 들어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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