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친구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싸움’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날 때까지 바라보다 깜빡이면 지는 게임. 그때 나는 친구의 솜털 같은 눈썹과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존재를 주시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쳐다봄’이 아니라, 신비였다. 그 응시는 사회적으로 약 3초에서 5초 정도 허용된다고 한다. 물론 이와 달리 사랑하는 사이의 눈 맞춤은 길면 길수록 친밀감이 더하고…. 캐나다의 사실주의 화가 알렉스 콜빌(Alex Colville, 1920~2013)이 있다. 그는 일상을 그린 작품에 기묘한 불안과 긴장을 잘 숨긴다.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그리고 ‘정지된 순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내적인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작품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1965)에서는, 항해 중인 배 위에 한 여성이 쌍안경을 들고 바다가 아니라 관객을 보며 서 있다. 쌍안경의 렌즈가 나를 향할 때 그 시선은 도발적이게 된다. 어쩌면 ‘존재를 응시한다’는 건, 감시와 애정 사이에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성당 근처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이른 아침 성당 마당에서였다. 가끔 직장인들이 성당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하루에 세 번 그녀를 보러 왔으니까. 출근하기 전에 한 번 보러 왔고, 점심때도 틈을 내 다녀갔으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당 철문이 닫혔어도 문밖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성당 마당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바뇌의 성모상이었다. 벨기에 산골 마을 바뇌에서 ‘마리에뜨’라는 소녀에게 여덟 번 발현하신 성모님은 마지막 발현 때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원하셨다. 사랑은 머무는 시간에 비례한다. 때때로 그는 성당 뜰에 놓인 벤치에서 뭔가 풀리지 않는 듯 깊은 생각에 빠졌는데, 그러다 사라지면 성모상 앞에 서 있곤 했다. 누가 보면 성당에 사는 사제보다 성모님을 더 지키는 것 같았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그가 성모상 앞에 설 때마다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 신자들은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살금살금 다녔다. 나는 그 신태하 미카엘 형제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제님, 이렇게 오시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요?” 그는 순하고 조용했으며 수줍은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이라기보다,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여러 성당을 다녀봐도 여기만큼 성모님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분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퇴근할 때만 잠시 뵈었지요. 그때는 성모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온 것이 아니라 귀가 전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저녁에 오다 보니, 아침에도 오게 되고 저녁, 아침, 점심, 이렇게 성모님 앞에 자주 서게 된 겁니다.” 마음이 가서 자꾸 또 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주 보니까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묻고 싶었다. 성모님 앞에 서면 기도 외에도 어떤 기분이 드는지. 성모님도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분 앞에 서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감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만큼 따뜻한 곳이 없지요. 물론 성당에 오면 편안함이 있지만요. 저는 여기 성모님을 뵐 때부터 제 온몸이 포근하게 안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거룩한 변모를 한 예수님 앞에서 횡설수설했듯이(마태 17,4 참조)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도들을 고백하게 됐지요.” 꾸밈없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러면 기도하면서 일상의 변화도 있었나요?” 그가 말했다. “이렇게 5년 반 동안 같은 방식으로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대개 가족들이나 하는 일에 대한 기도였지요. 기도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기운을 느꼈다기보다는 잔잔한 변화들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다음 일을 못 했지요. 예전 같았으면 그것을 풀기 위해 혼자 노심초사했을 텐데 지금은 자동으로 ‘뭐가 풀리지 않아? 그럼, 성당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다녀오면, 술술 일이 잘 풀리는 일상의 작은 변화를 체험합니다. 제가 점심에도 자주 성당에 가니까 밥 먹으러 가자는 동료들도, 으레 ‘성당 갈 거지?’ 합니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에서 화가 알렉스 콜빌은, 한 장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그림 속 쌍안경을 든 여인이 보이지 않는 교감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는 서로의 응시.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번씩 자신을 보러 오는 한 사람을, 성모님도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는가.’ 그는 말했다. “성모님 앞에 서 있으면, 그분도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앞에 가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에게 아내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마 사제가 됐을 거’라고 그래요.” 오늘도 성당 마당에는 성모상이 그대로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올 수가 없다. 가끔 나는 빈 성당에서 그를 찾는다. 이제는 강원도의 한 부대로 전출한 그에게, 나는 오랜만에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했다. 강원도의 맑은 공기와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렸다. 한결같이 그는 일요일이면 군인 성당에서 미사드리고, 가끔 성당 청소 후에 군종 신부님이 사주시는 짜장면을 함께 먹는다고 했다. 가족들을 떠나 혼자 근무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그에게 가볍게 물었다. “미카엘 형제님, 여기에서처럼 그 성당에서도 매일 성모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부대와 성당이 거리가 있어서 퇴근길에만 들립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순간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진정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으니, 분명 바뇌의 성모님도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찾아주던 그를 그리워하고 계실 거라고….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가톨릭교회는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의무를 되새기고,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보여 준 자비와 연민을 본받고자 노력한다. 레오 14세 교황이 즉위 후 발표한 첫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불평등과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금 강조한다. 교황 권고가 전하는 가난의 개념,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알아본다. 빈곤의 다양한 형태 교황은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권고의 전체 주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love for the poor)’이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 곧 가톨릭교회의 ‘나침반(Compass)’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되고 가난한 메시아(The True Poor Messiah)’이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서 구유에서 태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에게 가까이 계셨다고 소개하는 교황은 이처럼 예수님 삶의 모든 측면에 가난이 스며들어 있음을 전한다. 한다. 이어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면서 “가난한 이들과 동반하는 일은 언제나 교회의 중심 활동이었다”고 강조한다. 물질적 가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인간답지 못한 조건에서 겨우 생존하는 현실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문화에 맞설 것을 요청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난(New Forms of Poverty)’에도 깊은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인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의 빈곤 외에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자신의 존엄성과 능력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빈곤, 도덕적·정신적 빈곤, 문화적 빈곤, 개인적 또는 사회적 허약함이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 이들의 빈곤, 권리와 공간, 자유가 없는 다양한 이들의 빈곤도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부를 증대시키면서도 공정성을 높이지 않는 경제 법칙에 의해 보다 ‘더 미묘하고 위험한(More Subtle and Dangerous)’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도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빈곤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잊는다면 ‘교회 삶의 커다란 흐름(The Great Current of the Church's life)’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우려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교황은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를 ‘교회 사명의 불타는 심장(The Burning Heart of the Church’s Mission)’이라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되게 사랑한다는 가시적인 증거”라며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복음 선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경고하고 있다. 아울러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Almsgiving)’에 대해 언급하며, “자선만으로 세계의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최소한 무엇인가는 하는 편이 언제나 낫다”는 표현으로 자선 활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청했다. 자선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피하게 해 주고,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과의 접촉, 만남, 공감의 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자선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이런 삶의 선택은 복음적 삶의 가장 높은 형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교황은 또한 복음 선포를 사회적 참여로부터 분리하고, 이 문제를 정부에 위임하려는 교회 내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시장(Invisible Market)’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유경제 논리를 경계하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장선상에서 다수의 가난한 이가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 가난하다고 보는 왜곡된 관점을 지적한 뒤 “신자 중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어떤 교회 공동체도 붕괴 위험에 처하며, 비생산적인 회의와 공허한 말로 위장된 ‘영적 세속화(Spiritual Worldliness)’에 빠져 표류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교황은 권고에서 “불의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자”고 요구하면서 “기회가 더 적게 주어진 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낮은가? 그들은 그저 생존에만 만족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도덕적, 영적 존엄을 되찾든지 아니면 ‘오물통(Cesspool)’에 빠지든지 결정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비록 어리석거나 순진하게 보일지라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냄으로써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의무이며, 고용 분야에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일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환경과 도시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거나 시간을 보내는 장소, 주택, 동네, 도시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를 다시 읽자고 권유한 교황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나눔 정신을 ‘본받아야 할 모범(an Example to Imitate)’이라 부각시킨 뒤,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고, 돌보고, 해방하고, 교육하고, 동행해 온 2000년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다. 레오 13세 교황이 천명한 사회교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아파레시다 문헌 등을 언급한 교황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일은 늘 교회 활동의 중심에 자리해 있었다“고 전했다. 교황은 권고의 결론을 통해, 고통받고 곤궁한 이들의 얼굴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식함으로써 생겨 나는 빛과 생명에 참여하자고 신자들을 초대하고, 가난한 이들은 사회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Flesh of Christ)’이라고 강조했다.
평신도들은 사목 대상이나 보조자에 머물지 않고, 시노드 교회를 함께 이끌며 선교 사명을 실현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회장 안재홍 베다, 담당 김연범 안토니오 신부, 이하 한국평단협)는 11월 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평신도 용어에 대한 인식과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한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신학연구소(소장 박문수 프란치스코)가 주관한 이번 조사는 8월 4일부터 31일까지 전국의 일반 신자 2964명과 본당 사목위원 및 평단협 임원(이하 사목위원) 1906명의 응답을 분석했다. 조사에 따르면 평신도들은 현재 자신들의 위상을 사제의 사목을 돕는 보조자(30.7%)·협력자(32.6%)로 인식하고 있었다. ‘평신도가 본당 사목 결정에 책임 있게 참여한다’는 응답은 약 40%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평신도도 교회의 중요 직무와 책임을 맡아야 한다(일반 신자 74.7%, 사목위원 87.5%)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런 주체적 역할 수행을 위해 ‘신앙교육이나 리더십 교육이 필요하다’(일반 신자 85.9%, 사목위원 93.6%)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아, 선교 사명의 공동 책임자로 나아가고자 하는 평신도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평신도’라는 용어 변경에 있어서는 ‘변경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30% 수준에 그쳤다. 용어 변경보다 평신도의 실질적 위상과 역할 변화를 더 중요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신도를 대체할 용어로는 하느님 백성을 아우르는 ‘교우’나 ‘신자’를 꼽았다.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인지도는 교회에서의 역할과 신앙 활동 정도에 따라 격차가 컸다. 사목위원 그룹(71.7%)이 일반 신자 그룹(45.8%)에 비해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일반 신자 그룹 안에서도 신앙 활동 정도와 비례했다.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한 중요한 요소는 ‘경청하는 태도’가 5점 만점 중 평균 4.74점으로 첫 번째로 꼽혔지만, ‘경청하는 태도’를 잘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다른 문항 보다 낮은 3.87점에 그쳤다. 특히 본당의 시노달리타스 실천에 관한 문항에서 ‘정기적으로 전체 신자들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항목이 9가지 항목 중 가장 낮은 점수(3.46점)를 받아 교회 내에서 여전히 소통이 부족한 현실임을 보여줬다. 이날 발표를 맡은 우리신학연구소 경동현(안드레아) 연구실장은 “평신도들이 단순히 수동적 참여를 넘어 교회의 핵심 직무와 책임을 나눠 맡기를 바라는데, 그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시키는 구조는 여전히 미비하다”고 평가하면서 “사제 중심의 사목 운영을 수평적 동반 구조로 전환하는 일이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가치인 공동 책임과 동반 문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주교회의(의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11월 11일 ‘올바른 가톨릭 미디어 콘텐츠 접근을 위한 추가 안내’ 제목의 공문을 각 교구에 발송하고,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교회 권위를 가장하거나 왜곡하는 영상·이미지에 각별히 유의하고, 교도권이 승인한 공식 채널이나 가톨릭신문 등 교계 언론사를 통해서만 신앙 콘텐츠를 확인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번 공문은 지난 9월 9일 주교회의가 유튜브 등 온라인 매체에서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지 않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영상들이 마치 레오 14세 교황의 말씀으로 잘못 전달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주의를 요청한 데 이은 추가 안내다. 주교회의는 공문에서 “최근 일부 온라인 채널이 AI 기술을 활용해 각 언론사 또는 교구에서 제작한 영상을 바탕으로 주교들의 얼굴을 합성한 영상이나 이미지를 무단으로 제작·유포하는 사례가 확인됐다”며, 이는 본인의 동의 없는 초상권 침해이자 언론사와 교구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교도권의 승인이나 지도 없이 개인적 견해를 주교의 발언이나 가르침으로 가장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혼란을 일으키고 교회의 공적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전했다. 주교회의는 또한 “영상이나 게시물에 주교의 얼굴, 음성 또는 발언이 포함돼 있더라도, 출처가 교황청·주교회의·교구 등 교도권의 공식 채널 또는 가톨릭신문·가톨릭평화신문·가톨릭평화방송 등 공식 승인된 교계 언론사가 아닐 경우, 무단 편집 또는 합성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고 안내했다. 주교회의는 “출처가 불분명한 영상이나 게시물을 접할 때는 본당 사제나 교구에 문의하거나 주교회의·가톨릭신문 등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안내해 줄 것”을 요청했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s://www.cbck.or.kr □ 가톨릭신문 https://www.catholictimes.org □ 가톨릭평화방송(CPBC) https://www.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https://news.cpbc.co.kr
11월 4일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를 발표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공동구속자’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속자임을 강조했다. 본지는 교황청 복음화부 첫복음화와 신설개별교회부서 국장 한현택(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의 기고를 통해 공지의 주요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 성모님에 관한 표현과 성모신심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며칠 전 성모 신심과 성모님의 호칭에 대한 교황청 신앙교리부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를 읽어봤다. 논쟁적이지 않고 차분하며, 강요하지 않고 친절히 논증을 전개하는 참 아름다운 문헌이다. 성경, 교부, 스콜라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넘나들며 성모님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도모하는 문헌을 읽으며, 많은 기도와 연구로 이 문헌을 준비하셨을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면 신부님, 수도자, 신학생들은 물론이고 마리아론에 관심 있는 분들은 모두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길지도 않고, 영적 독서가 되면서 신학 공부가 되는 문헌이다. 그리고 이 문헌을 읽은 지 며칠 후 교황청이 성모님을 '공동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수백 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간단히 전하는 기사를 보았다. 사실 이 문헌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이 호칭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교황청의 권위로 단순히 최종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한두 페이지의 선언문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 문헌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이해 위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고 여겨진다. 이 문헌에서 무척 반가웠던 부분은 성모님께서 무엇보다 사도들보다도 먼저 부르심을 받으신 첫 제자, 가장 완전한 제자라는 가르침이었다.(73항) 또 성모님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명확한 교의적 설명을 제공한 것도 반가웠다. 성모님의 중재자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중재자 역할에 참여함으로 가능한 것이지, 성모님께서 ‘마치 그리스도와 평행한 어떤 중재적 역할’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과 사랑으로 모범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 주고 계신다. 마치 땅 위에 계신 어머니들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서로를 위한 중재자가 되어줄 수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성인들의 통공’ 교리의 가르침이다. 물론 거룩한 이의 기도는 더 큰 힘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러운 신앙 감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생활을 깊이 하시는 분들께 기도 중에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기억해 주길 자주 부탁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가까운 수녀님께 기도를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점에 대해 문헌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는 배타적이지 않다고 가르친다.(28항)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을 독점하지 않으시고 당신 피조물들 특히 인간과 나누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이 선의 ‘유비(analogia boni)’라는 원리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자적 역할에 ‘동참(participatio)’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장 완전한 제자이시자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천국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누구보다 더 깊이 일치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신 제자 즉,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어머니’로 주신(요한 19,27 참조) 성모님의 전구는 무척 힘이 있다는 것도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부 하느님이나 성자 예수님은 뭔가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지만, 성모님은 편하게 다가가서 부탁할 수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모님께 기도한다는 생각은 심각하고 위험한 신학적-영성적 오류이다.< 다음 호에 계속 > ▶ 공지 전문 보기 글 _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교황청 복음화부 첫복음화와 신설개별교회부서 국장)
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장 이성효 주교(리노, 교황청 문화교육부 위원·마산교구장)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일부 사람에게만 유익한 선(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공동선’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주교는 11월 5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서울신문 주최로 열린 ‘제10회 서울미래컨퍼런스’에서 ‘AI 시대, 사회적 약자의 존엄과 참여’를 주제로 발제하며,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AI 시대의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AI 윤리에 대해 제언했다. 이 주교는 100년 전 독일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의 통찰을 빌려 AI 시대의 사회적 약자를 규정했다. 과르디니는 ‘기술 문명 속 새로운 인간’에 대해 성찰하며, 기술 문명이 인간 내면을 파괴하고 형태 없는 존재로 만들 때 인간은 자연·세계·이웃과 단절되며 새로운 형태의 약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 주교는 “기계를 중심으로 자신을 재형성한 인간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더 이상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며 “새로운 기술 문명 앞에서 인류는 깊은 정신력과 내면의 힘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교황청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가 발표한 AI와 인간 지성에 관한 문헌 「옛것과 새것」을 통해 AI의 양면성에 대해 진단했다. 「옛것과 새것」은 ‘AI 시스템의 설계·실행·사용은 언제나 인간과 공동선에 봉사해야 하며,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이들을 어떻게 포함시키는가가 우리의 인간성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못박는다. 이 주교는 “문헌은 AI의 발전에 따라 사회적 약자의 존엄이 가장 먼저 위협을 받을 것으로 예측한다”며 “데이터 기반 사회에서 AI가 ‘능력’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의료·교육·노동 영역에서 부유한 계층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게 작동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AI는 맞춤형 학습 도구로 학습 장벽을 낮추고, 노인과 장애인 등을 위한 조기 진단과 원격 돌봄 등에서 놀라운 기회로 기능할 수 있다”며 AI의 가능성을 짚었다. 이 주교는 AI 시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회의 과제를 강조했다. 이 주교는 “참여 없는 존엄은 공허하고, 존엄 없는 참여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교회는 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시선으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프랑스 추기경 앙리 드 뤼박의 말을 인용해 “인간의 행복은 미래에서 추구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현재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다”며 “존엄이 배제된 행복은 결코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컨퍼런스에서는 ‘인류와 손잡은 휴머노이드: 기술과 감성의 접점’, ‘AI 국가의 지능, 기술사회 정책의 뉴프레임’, ‘인간 중심 AX의 미래 비전’ 등 세션이 마련됐다. 발제에는 하정우 대통령실 AI 수석, 린이빙 전 대만 과학기술부 차관, 오가타 데쓰야 일본 AI로봇협회장, 천선란 SF 작가 등이 참여했다.
광주대교구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이하 WYD)를 향한 힘찬 출발을 알렸다. 교구는 11월 8일 교구청 성당에서 사제와 신학생, 청년·청소년 신자 등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27 WYD 광주교구대회’ 발대식을 열고, 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 주례로 발대미사를 봉헌했다. WYD 교구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김영권 세바스티아노 총대리 신부)는 2027년 7월 29일부터 4박5일 동안 열릴 교구대회를 앞두고,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 되어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화합(Harmony)’을 주제로 발대식을 준비했다. 발대미사에서는 보편교회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제1독서는 영어, 제2독서는 베트남어로 봉독됐다. 이어 베트남 공동체가 WYD 주제 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를 주제로 복음 성극을 선보였다. 청년들은 행사 전 손도장을 찍어 만든 십자가를 미사 중에 봉헌하며 신앙의 결의를 다졌다. 과거 WYD에 참가했던 이들은 대회 참가를 통해 받은 은총과 체험을 참가자들과 공유했다. 옥현진 대주교는 강론에서 “교구대회를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가 살아 있는 성전으로서 기도를 통한 신앙 여정과 성화가 더 중요하다”며 “경청을 통해 청년들을 복음의 빛으로 이끌고 동시에 그들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신선한 목소리를 우리도 듣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구는 2026년 8월 15일부터 1박2일 동안 ‘광주대교구 청년 프리(PRE)WYD’를 열어 교구 청년 모두가 함께 성서의 못자리를 느끼는 영적 체험의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발대미사 후에는 공동체 기도와 버스킹 묵주기도, 떼제기도 등 청년 찬양 축제가 이어졌다. 청년성서기획부, 살레시오회, 보좌신부밴드 등 초대팀과 루체·온새미로·한울 등 본당 청년회의 공연도 열렸다.
서울대교구 우면동본당(주임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은 10월 26일부터 3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 요셉의원에서 ‘야전병원에서의 봉사 피정’을 주제로 의료·교육 봉사활동을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이번 활동은 ‘교회는 야전병원이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마련됐다. 치과팀 4명, 중의(침술)팀 3명, 약제팀 3명, 미용팀 2명, 태권도팀 1명, 한글팀 1명 등 총 18명의 본당 신자는 현지 주민들을 위한 치과 진료와 중의(침술) 치료, 한글·태권도 교육, 이미용 봉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본당은 봉사자들이 하루를 미사로 시작해 강복으로 마무리하는 피정 형식으로 봉사를 진행하며, 참여한 이들이 몸과 마음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현지 빈민촌 주민들은 평소 빈곤과 열악한 접근성으로 인해 의료·교육 복지를 누리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총 850여 명의 주민들이 이 기간 동안 요셉의원을 찾아 도움을 받았다. 특히 치과 진료에 대한 수요가 컸다. 필리핀에서는 칫솔 하나가 한화 약 8000원에 이를 정도로 공산품 가격이 높아, 월수입이 2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정에게는 칫솔 구입조차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심각한 충치로 발치를 해야 할 정도였던 한 여학생은 치료를 받고 새 앞니를 얻는 기쁨을 누렸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질환을 앓던 주민 역시 중의 치료를 통해 손가락을 다시 펼 수 있었다. 봉사자 최영인(루치아) 씨는 “새벽부터 의원 앞에서 기다리는 주민들이 여럿 있을 정도로 많은 분이 의원을 찾아주셔서 몸은 고되지만 감사하고 보람찼다”며 “봉사 피정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다”고 밝혔다. 백운철 신부는 “마닐라에 있는 5박6일 동안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야전병원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며 “하느님을 찾기 위해 봉사에 참여한 이들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많은 위로와 기쁨을 체험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춘천교구는 10월 21일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 산 72 현지에서 교구장 김주영(시몬) 주교 주례로 성사전담사제 공동사제관 ‘예수성심영성원’(원장 김동훈 라파엘 신부, 이하 영성원) 신축 건물 축복식을 열었다. 영성원은 대지면적 9006㎡, 연면적 3263㎡에 지상 4층 규모로 사제관동과 공동시설, 수녀원 등 3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영성원에 머무는 사제들이 공동으로 생활하고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사제요양실, 다목적실, 창고, 세탁실, 식당 등 생활 공간과 경당을 갖추고 있다. 김동훈 신부(교구 관리국장)는 “많은 분의 도움으로 영성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며 “성사전담사제들이 영성원에서 사제다운 영성을 쌓고 교우들에게 다시 전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대교구가 2026년 1월 정기 사제인사에서 ‘젊은이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가칭)를 임명한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계기로 청년·청소년 사목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의 결단으로 읽힌다. 11월 4일 열린 대구대교구 사제총회에서 조환길 대주교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며 젊은이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 임명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교회가 청년 신자 부족 문제로 고민하는 가운데, 대구대교구도 이 같은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구 내 19세부터 39세까지 젊은이 신자 수는 약 12만 명(「대구대교구 2023년 교세통계표」 참조)이지만, 이 가운데 본당 청년회에 등록되어 활동하고 있는 젊은이 수는 1300명가량으로, 1% 수준이다. 이런 현실에 따라,지난 9월 대구대교구 주교평의회에서는 WYD 준비를 기점으로 젊은이 사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10월 각 지역 사제회의에서는 교구 모든 사제단이 이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 논의했고, 청소년과 청년을 아우르는 젊은이 사목을 위한 새로운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이에 조 대주교는 그 응답으로 사제총회에서 젊은이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 임명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새로 임명될 젊은이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 신부는 교구의 다섯 개 대리구를 각각 담당하는 기존 교구장 대리 신부와 달리, ‘속인주의(屬人主義)’와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조화롭게 결합해 사목 활동을 할 계획이다. 교구 내 모든 청년을 사목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 청년이 속한 본당·대리구와의 연계라는 속지주의적 요소도 함께 반영해, 교구장 대주교의 승인 아래 활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구 청년청소년국장 이지운(시몬)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중 “젊은이들은 세상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현재”(64항 참조)라는 내용을 언급하며 “WYD 준비가 대회를 잘 치르기 위한 과정을 넘어 교구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는 모든 교구민들의 성장과 변화가 이뤄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들이 중요하다”며 “그것을 좀 더 책임지고 강단 있게 밀고 나아갈 어떤 책임자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대전교구 해미순교자국제성지 해미신앙문화연구원(원장 조광 이냐시오)은 11월 8일 성지에서 제4차 학술대회 ‘순례의 역사를 딛고 내일로’를 개최하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가 성공적인 순례 여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권영파(베아트리체) 해미신앙문화연구원 부원장은 이날 발표에서 역대 WYD에서 ‘순례신학’이 어떻게 구현됐는지 분석하고, 한국교회가 서울 WYD를 계기로 청년 사목과 순례피정을 연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권 박사는 “WYD는 익숙한 삶의 자리를 떠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대회 장소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며 그분을 드러내는 거대한 순례 여정”이라며 “이 순례가 행사를 마침으로써 끝나지 않고, 사회적 투신이라는 변화된 삶으로 연결될 때 순례의 의미가 온전히 구현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WYD가 참가자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지역공동체에는 내적·외적 성장을 이끌 수 있는 방안도 제안했다. 권 박사는 “대전교구의 순교 역사를 반영한 ‘증언과 희망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순례를 단순한 ‘이동’이나 ‘참여’의 경험이 아닌 증언-관상-표현-파견이라는 영적 여정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며 “이를 씨앗-증언-고난-부활로 표현해, 신앙의 내적 체험이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전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양인성 박사(대건 안드레아·인하대학교 사학과)가 한국교회사에서 순례가 신앙 체험과 공동체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소개했다. 김성 신부(요한 세례자·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와 이우갑 신부(베드로·원주교구 서지마을 순교성지 주임)는 제주도의 ‘산들평화순례피정’과 원주교구의 ‘님의 길’ 순례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순례피정의 실제적 의미를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