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가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수됐다.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은 12년 동안 재임한 뒤 4월 21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평화롭게 선종했다. 교황의 장례미사는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주례했고, 전 세계 추기경단과 주교단, 사제단이 공동집전했다. 장례미사에는 수도자와 신자, 시민 등 20여만 명이 참례했다. 세계 각국 전현직 정상들은 장례미사 제단 가까운 곳에서 교황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장례미사가 시작되기 전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교황의 관을 봉인하는 예식이 먼저 거행됐다. 관 봉인 예식은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주례했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기록한 문서에 서명했으며, 패럴 추기경은 이 문서를 낭독했다. 봉인된 관은 14명의 운구자들이 어깨에 메고 장례미사 장소인 성 베드로 광장 제단으로 운구했다. 미사가 시작되면서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는 관 위에 복음서를 열어 올려놓았다. 곧이어 레 추기경이 관 주위를 돌며 분향 예식을 집전했다. 레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12년간 수많은 성체성사를 집전하셨던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슬픔을 안은 채 그의 시신 둘레에서 기도하고 있다”며 “우리는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 해가 지지 않는 행복한 삶 안에서 마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서 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하는 교황님의 마지막 모습은 심각하게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기 원하던 모습”이라면서 “우리는 지금 기도를 통해 교황님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행복을 그에게 허락하시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레 추기경은 강론을 마치며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제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하늘에서도 교회와 전 세계, 희망의 불을 높이 드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도 축복해 주소서”라고 간구했다. 1시간30분에 걸친 장례미사가 끝난 후,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이용했던 차량에 실려 로마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등을 지나 안장 장소인 로마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약 6km 거리에는 장례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시민 15만여 명이 나와 교황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안장 예식은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의 유언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적혀 있는 안장지 앞에 관을 놓고 패럴 추기경이 다시 관 덮개 위에 봉인 인장을 찍은 후 안장하면서 예식을 마쳤다. 교황의 무덤은 4월 27일 오전부터 신자들과 시민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추기경단도 27일 오후 교황 무덤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아울러 4월 23일 열린 추기경 전체회의 결정에 따라 5월 4일까지 9일간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추모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국 각 교구는 주교좌성당 및 교구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미사’를 거행했다. 서울대교구는 4월 24일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주례로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서울대교구 주교단과 사제단,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가 공동집전한 이날 미사에는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 조그라포스 대주교(한국명 조성암), 에밀리아 가토 주한 이탈리아 대사, 호르헤 엔리케 발레리오 에르난데스 주한 코스타리카 대사, 한홍순 전 교황청 대사를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 신자 2400여 명이 함께해 깊은 애도를 표했다. 정 대주교는 강론 중 “교황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길을 몸소 보여주셨다”며 “생전 늘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겸손히 부탁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하자”고 미사에 참례한 모든 이들과 함께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가스파리 대주교는 추도사를 통해 “교회를 환대와 자비의 장소로, 신자 모두가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이끄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라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불러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교황 프란치스코를 맡겨드린다”고 말했다. 한국정교회를 대표해 미사에 함께한 조그라포스 대주교는 “교황님의 지극한 순수함과 주님의 고통 받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 모두의 행동과 봉사에 있어서 선한 본보기가 됐다”며 “교황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고 기도하며, 가톨릭교회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한 애도를 표한다”고 전했다. 대구대교구는 4월 23일 주교좌계산대성당에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24일 주교좌범어대성당에서 총대리 장신호(요한 보스코) 주교 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조환길 대주교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 작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복음 정신을 그대로 실천했던 분”이라며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땅히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말했다. 조 대주교는 이어 “교황님은 유언에서 마지막까지 이 세상에 평화와 형제애를 호소하고 당신을 봉헌하신다”며 “우리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동시대에 살았고 그분을 뵐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광주대교구는 4월 25일 교구청 성당에서 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를 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추모미사에는 전임 교구장인 김희중(히지노) 대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 등 400여 명이 참례했다. 옥현진 대주교는 강론에서 “교황님께서 2014년 방한 중에 보여주신 모습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경험 그 자체이셨다”며 “이제 우리는 교황님이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무가 생겼다”고 말했다. 교황의 출신 수도인 예수회에서도 추모 미사가 마련됐다. 예수회 한국관구(관구장 김용수 파스칼 신부)는 4월 24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는 김용수 신부와 서강대학교 총장 심종혁(루카) 신부 등 예수회 사제 50여 명을 비롯해 서강대학교 교직원, 신자 등 400여 명이 참례했다. 김용수 신부는 강론에서 “교황님께서는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인이 보여준 삶의 모범을 따라 선종하시는 그날까지도 예수님과 깊이 일치하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셨다”며 “교황님이 묻히시길 원하신 성모대성당도 이냐시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한 곳”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어 “또한 교황님은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당신 말씀과 행동을 통해 충실히 살아내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참례자들은 특히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 한국관구를 방문했던 생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김 신부는 “교황님은 한국 예수회 사제들에게 ‘성직자이기 이전에 양 냄새 나는 사목자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며 “실제로 교황님은 몸소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의 사명을 수행하셨다”고 말했다. 한편 각 교구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3만여 명의 신자들이 방문, 교황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23일부터 25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시간 추모미사와 연도를 바치고, 분향소를 운영해 온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도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미사참례와 연도, 분향으로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또 청주교구의 분향소에는 2800여 명이, 마산교구의 분향소에는 27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각 교구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많은 이가 방문했다. 25일 주교좌명동대성당의 분향소를 방문한 박영숙(헬레나·79·서울 태릉본당) 씨는 “양 냄새 나는 목자의 모습으로 온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신 교황님께 신자로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분향소를 찾았다”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낮은 이들 곁에 함께하신 교황님의 모습을 저희도 본받아 살아가려고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특별 취재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교황직 수행의 역사와 업적을 살펴본다.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로 선출됐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새 교황의 첫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두워진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 앞에 그가 나섰을 때,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가 시작됐다. 교황을 드러내는 아무런 상징도 없이 그저 소박한 흰색 수단을 입은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적 저녁 인사인 ‘보나 세라’(Bouna sera)로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 백성에게 겸손하게 기도를 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소개함으로 교황이기 앞서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드러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아시시의 ‘가난한 작은 사람’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정했다. 선출 직후 그는 콘클라베 기간 머물렀던 숙소로 돌아가 자신의 짐을 직접 싸고 숙박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교황궁을 마다하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기로 했는데, 이는 흔히 짐작하듯 그저 가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만은 아니다. 교황궁 자체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쩌면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는 ‘사목자’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가정 출신 바티칸공의회 가르침 따라 살며 빈민들과 어울리고 청빈 실천 잘못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아픔 껴안고 자비 베풀던 사목자 ■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목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록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과 사제직은 공의회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고, 실제로 교황 재임 내내 공의회의 가르침을 모든 교황직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1973년 예수회 종신서원을 한 그는 같은 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됐다. 불과 36살의 나이였다. 그리고 1992년 5월 베르골료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됐고 1998년에는 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주교직 수행의 시기는 훗날 그가 교황이 되어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이끌면서 보여준 신학적 전망과 사목직 수행의 바탕이 됐다. 그는 250만 명 이상의 교구민이 있는 대교구를 이끌면서 스스로를 ‘사람들 가까이 있는 목자’로 자리매김했다. 항상 버스로 이동했고 거리낌 없이 빈민가를 방문했으며 소박한 아파트에서 직접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호르헤 신부’로 불렀다. 당시 그의 사목 활동의 요체는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빈민가에 거주하며 사목하는 ‘빈민가 사제단’을 창설해 항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고 둘째, 민중 신앙과 대중 신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셋째, 교회가 제대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교적 전망, 그리고 넷째 성직자를 사회의 지배 계급의 일부로 보는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에 거슬러 성직자의 특권을 거부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사제와 주교직을 수행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사목 활동의 체험과 가난한 이들과의 삶은 그의 교황직 수행 안에서 깊은 연관성을 드러내며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2007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아파레시다 문서’ 수석 편집자로서의 체험이 더해진다. 이 문서는 대륙적 선교를 촉구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는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 하느님 자비의 교황 교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2일 교황은 첫 해외순방지인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동성애 사제와 관련된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 동성애자인데, 그가 주님을 찾고 선의를 가졌다면 제가 그를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는 판단과 단죄보다는 위로와 격려, 치유의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목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대답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3년 3월 17일 교황이 된 후 첫 주일 삼종기도 자리에서 그는 위험한 진보주의자로 여겨졌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말을 인용해 “자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했다. 교황 선출 당시부터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가 교황직의 키워드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자비로써 하느님 백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치유하기를 원했던 교황은 2014년과 2015년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시노드를 소집했다. 피임, 동성애, 이혼 후 재혼자의 영성체 허용 등 민감한 현안들을 다룬 시노드 후속 문헌으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이 반포됐다. 물론 교황은 성과 생명, 가정에 대한 교리를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히 사목적 차원에서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즉 현대 가정의 잘못된 행동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또 2015년 3월 13일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고 4월 11일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반포했다. 교황은 「자비의 얼굴」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인종 학살, 집단 살육이 자행된 20세기에 이어 여전히 계속되는 비극적 상황들을 우려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항상 찾아 나섰다. 변방으로 나아가는 교회,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의 표상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활동과 교회 통치의 바탕이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의에 단호했다. 불의한 현실과 세력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와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가난한 이들의 현실로부터, 그는 경제 정의를 교황직 수행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인간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절대적 금지인 것처럼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반포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는 이른바 통합생태론, 즉 자연생태와 인간생태가 깊이 연관됐다고 피력했다. 공동의 집 지구 환경이 파괴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교황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지구 환경 보호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지향 불의한 헌신과 생태 위기 경고 교회 직면한 과제 해결하고자 새로운 법과 제도 틀 마련하고 ‘시노달리타스’ 주제 시노드 개최 ■ 개혁과 쇄신의 교황 교황은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당연히 교회의 개혁과 쇄신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 수행의 또 한 가지 축은 개혁과 쇄신이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됐던 당시 가톨릭교회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었다. 교회 안에 침투한 세속화로 사회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수십 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성직자 성학대 추문으로 도덕적 위신도 무너졌다. 교회는 사회적 위신도,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도 잃은 듯했다. 그는 자신의 교황직 수행의 청사진으로 여겨졌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나그넷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있다”(일치교령, 6항)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인용하면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을 강조했다. 교회 쇄신은 당시 두 가지 큰 과제의 해결을 먼저 요구했다. 하나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성직자 성학대 추문, 다른 하나는 교황청의 불투명한 재정 운영 문제였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교황은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새 법과 제도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교황직과 보편교회의 중앙 조직들’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보편교회 쇄신의 방향성은 당연하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특히 「교회헌장」이 제시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친교의 교회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스스로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로마의 주교’라고 칭하며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보다는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고자 했다. 또 교황청 각 부서와 교회의 여러 직무에 평신도들, 특히 여성의 참여를 확대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였다. 3년 여의 긴 여정 동안 진행된 이번 시노드는 여러 면에서 이전의 시노드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하느님 백성의 의견을 교구와 본당 단계에서부터 실질적으로 경청하는 단계를 강화했고,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참여했다. ■ 긴장과 갈등 재위 초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저항은 단지 스타일의 차이나 언론의 과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6년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이 이혼 후 재혼 신자의 영성체 허용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열게 되자 보수파의 반발이 강경해졌다. 미국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 등 5명의 추기경이 5가지 교리적 질문을 제기했다. 2018년에는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과 교황청이 시어도어 맥캐릭 추기경의 성학대 사건을 은폐했다고 공개 비난하며 교황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도전은 보수진영 그 반대쪽으로부터도 다가왔다. 독일교회의 ‘시노드의 길’(Synodal Path) 추진 문제다. 독일의 주교와 평신도들은 교회 개혁의 ‘속도 조절’ 경고에 전혀 응답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논쟁적 개혁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과 쇄신 작업이 온전히 궤도에 오르지는 않은 상태에서 후임 교황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개혁과 여전히 이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다시 하나로 이끌어야 하는 고된 사목적 도전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혁과 쇄신의 문이 아직 활짝 열리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잠금쇠는 열렸고, 그 문을 다시 잠글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삼천년기 쇄신된 교회를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걸어온 길 >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1958년 3월 11일 예수회 입회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 1992년 6월 27일 주교품(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 1997년 6월 3일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부대교구장 임명 1998년 2월 28일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착좌 2001년 2월 21일 추기경 서임 2013년 3월 13일 교황 선출 2013년 4월 13일 교황청 개혁 위한 추기경위원회 구성 2013년 7월 5일 회칙 「신앙의 빛」 반포 2013년 7월 8일 람페두사 사목방문 2013년 11월 26일 권고 「복음의 기쁨」 반포 2014년 8월 14일 대한민국 사목방문 2015년 6월 18일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2015년 11월 29일 ‘자비의 희년’ 선포 2016년 4월 8일 권고 「사랑의 기쁨」 반포 2018년 4월 12일 칠레 성직자 성추행 사과 2018년 4월 21일 신앙교리성(현 신앙교리부) 첫 여성 위원 임명 2018년 9월 22일 중국과 주교 선출에 관한 ‘잠정협약’ 체결 2019년 2월 21일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단 회의 소집 2020년 3월 27일 코로나19 팬데믹 겪는 인류 위해 특별 강복 2020년 10월 4일 회칙 「모든 형제들에게」 반포 2021년 10월 10일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 개막 2022년 3월 19일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포 2024년 10월 24일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반포 2025년 4월 21일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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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장례미사 이모저모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면에 들어갔다.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장례미사에 이어 성모대성당에서 안장예식이 거행됐다. 장례미사는 전 세계에서 로마에 모인 추기경단과 주교단 등이 공동집전했다. 교황이 항상 낮은 곳에서 겸손한 삶을 살며 남겨 준 뜻에 따라 치러린 장례미사와 안장 예식 모습을 모아 본다. 교황이 4월 21일 평소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88세를 일기로 선종하고 23일 교황의 관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운구된 뒤 같은 날 오전 11시경부터 25일 오후 7시까지 조문객 수는 25만여 명이나 됐다. 조문객들은 길게는 5~6시간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관 안에 고요히 누워 있는 교황을 조문했다. 장례미사 전날 오후 8시부터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서 진행된 교황의 관 봉인 예식 또한 교황의 평소 모습 그대로 단순하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가 교황의 얼굴에 흰색 비단을 덮은 뒤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성수 예식을 집전했다. 이어 나무 관 위에 아무런 장식 없이 십자가, 교황명과 간략한 생애,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아연 덮개를 씌움으로써 교황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패럴 추기경은 아연 덮개에 인장을 찍어 봉인된 사실을 확인한 후 아연 덮개 위에 다시 십자가와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나무 덮개를 덮고 교황청 직원들이 테두리를 따라 못을 박으면서 관 봉인 예식을 마쳤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서명한,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요약한 문서 마지막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성과 성스런 삶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를 훌륭히 증거했다”고 기록됐다. 이 문서는 관이 봉인되기 전 관 안에 놓여졌다. 장례미사가 봉헌된 26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장례미사에는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세계 각국 정상들은 물론, 이주민과 난민, 노숙자 등 교황이 재임 중 늘 가까이 다가갔던 외롭고 소외된 이들도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참례할 수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장례미사 시작 훨씬 이전부터 신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일부 신자들은 전날 저녁에 미리 광장에 도착해 교황을 추모하는 기도를 바치고, 광장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 뒤 장례미사에 참례하기도 했다. 장례미사를 주례한 레 추기경은 강론에서 교황이 생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교황에게 “이제는 지상에 남아 있는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레 추기경의 강론을 듣던 신자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짓는가 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교황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사용했던 전용 차량에 실려 포로 로마나 유적지와 콜로세움 등을 거쳐 약 6km를 이동해 안장지인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성모대성당에 이르는 운구 행렬 역시 패럴 추기경을 포함한 추기경 일부, 교황의 가족과 친지 등 소수만이 참여해 소규모로 이뤄졌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도로변은 교황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 군중들로 북적였다. 군중들은 교황의 관이 자기 앞을 지나갈 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거나 “교황님, 감사합니다”, “교황님, 영원히 사세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장은 교황청에 의해 21일 공개됐지만, 성모대성당 부수석사제 롤란다스 마크리카스 추기경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교황의 말을 25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공개했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힐지를 분별하고 있을 때 성모 마리아게서 교황에게 “무덤을 준비하여라”라는 말을 들려줬고, 교황이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잊지 않고 계셔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마크리카스 추기경에게 성모대성당에 “무덤을 준비하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관이 성모대성당 안으로 옮겨지는 동안 교황에게서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이주민과 노숙자 등이 꽃을 들고 교황을 맞이했다. 로마에 사는 어린이들도 성모대성당을 찾아 성모 마리아 이콘 아래 꽃을 올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장예식은 패럴 추기경이 비공개로 주례했으며, 교황 유언장에 적혀 있는 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새겨진 곳에 교황은 안장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잠든 성모 대성당은?

“저는 언제나 저의 삶과 사제직, 주교직을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제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교황 대성전인 성모대성당에서 쉬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작성한 유언을 통해 자신을 로마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의 지하에 묻어주길 희망했다. 성모대성당은 전 세계에 4곳뿐인 대(Major) 바실리카 중 하나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대성당은 성모님의 지시로 세워졌다. 328년 8월 5일 성모님은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로마 귀족 조반니 부부의 꿈에 나타나 “눈이 내린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 성 리베리오 교황을 찾아간 조반니 부부는 교황 역시 같은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들은 한여름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눈이 쌓인 기적을 봤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성모대성당이다. 이런 전설로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대성당에 묻힌 첫 번째 교황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도 호노리노 3세·니콜라오 4세·성 비오 5세·식스토 5세·클레멘스 8세·클레멘스 9세 등 6명의 교황 무덤이 성모대성당에 있었다. 성모 순례지로 유명한 세계의 많은 곳들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구대교구 성모당,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등 30여 곳의 성당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성모대성당은 한국교회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를 반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이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와 교구장으로 사목할 당시 로마에 올 때마다 이 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선출 다음날 첫 일정으로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고, 이후로도 사목 방문 전후나, 기회가 될 때마다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다. 특히 교황이 기도하기 좋아했던 곳은 ‘로마 백성의 구원 성모성화’(Salus Populi Romani) 앞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 담긴 이 성화는 복음사가인 성 루카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를 순회하는 세계청년대회의 상징물의 성모 성화가 이 성화의 사본이기도 하다. 교황은 유언을 통해 성모대성당에서 자신의 무덤이 자리할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했는데, 바로 이 성화가 있는 파올리나 경당 옆의 공간이다. 교황은 자서전 「희망」에서도 “교황으로서 사도 순방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도 꼭 (성모대성당을) 들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며, 제 모든 행보를 보살펴 주시기를 청한다”며 “저는 성모님과 함께할 때 참된 평안을 느낀다”고 성모대성당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유흥식 추기경, “교황님은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23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에 관한 메시지를 주교회의를 통해 한국교회에 전했다. 유 추기경은 “생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그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며 “영원의 삶을 보여주신 교황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한국의 교형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애도하였으면 한다”고 청했다. 다음은 메시지 전문. 교형 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 Farrell 추기경님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셨습니다”라는 선종 소식을 알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며 저는 슬픔과 고통, 외로움보다는 고요한 평화를 봅니다. 그분은 슬퍼하기보다 우리가 평화롭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멋있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교황님에 대한 큰 부러움도 있었습니다. 2025년 4월 20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 미사 후 발코니에서 전 세계인에게 교황님이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랑이 증오를 이겼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진실이 거짓을 이겼습니다. 용서가 복수를 이겼습니다. 악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부활의 은혜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권세를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약한 손을 그분의 크고 강한 손에 위탁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희망의 순례자가 되고, 사랑의 승리를 증명하는 증인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움직여 행동으로 조금 더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생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그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영원의 삶을 보여주신 교황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한국의 교형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애도하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서 희망과 부활을 보았으며,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부활의 모습으로 이웃과 사회로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한국의 대전이라는 지방 교구의 교구장을 전 세계 성직자와 부제, 신학생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사제의 쇄신없이 교회의 쇄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황님을 가까이 보좌하면서, 그분이 바라는 교회와 성직자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늘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눈높이에 맞춰 함께 고민하고 길을 찾으셨던 교황님의 발자취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대한민국의 분단 현실을 특별히 안타까워하시며 형제와 가족이 갈라진 이 크나큰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당신께서 직접 북에도 갈 의향이 있다고 하셨을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교황님의 기도 가운데 한국에 관한 기도에는 남과 북이 모두 포함된 기도였음을 기억합니다. 화해와 평화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선이 있다고 믿으셨던 교황님의 다음 말씀이 오래 우리 안에 살아있길 함께 기도합시다. “선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말아 주십시오.” 희망을 잃지 않고 선을 행하는 여러분의 부활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것입니다. 2025년 4월 22일 바티칸에서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드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예수회 한국관구, 서강대에서 추모미사 봉헌

예수회 한국관구(관구장 김용수 파스칼 신부)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추모하고, 2014년 방한 당시 교황이 예수회 공동체에 보여줬던 따뜻한 성품과 진심 어린 조언을 되새겼다. 예수회 한국관구는 4월 24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김용수 신부와 서강대학교 총장 심종혁(루카) 신부 등 예수회 사제 50여 명을 비롯해 서강대 교직원과 신자 등 4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김용수 신부는 강론에서 “교황님께서는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인이 보여준 삶의 모범을 따라 선종하시는 그날까지도 예수님과 깊이 일치하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셨다”며 “교황님이 묻히시길 원하신 로마 성모 대성당도 이냐시오 성인이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한 곳”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어 “또한 교황님은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당신 말씀과 행동을 통해 충실히 살아내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참례자들은 특히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 한국관구를 방문했던 생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김 신부는 “교황님은 한국 예수회 사제들에게 ‘성직자이기 이전에 양 냄새 나는 사목자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며 “실제로 교황님은 몸소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의 사명을 수행하셨다”고 말했다. 심종혁 신부도 추모 메시지를 통해 “교황님의 선종 소식에 깊은 슬픔과 상실감 안에서 기도를 올린다”며 “교황님이 방한 당시 서강대학교를 찾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던 그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교황님을 위해 기도드릴 시간”이라고 전했다. 이어 “가난한 이들과 지구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신 교황님의 뜻을 기억하며 영원한 평화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방한 일정 중 예수회와 서강대를 깜짝 방문하는 등 특유의 소탈하고 검소한 행보를 보인 바 있다. 예수회에 따르면 당시 교황이 앉았던 의자가 지금도 예수회센터에 그대로 놓여 있다. 미사 후에는 추모식과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성당 제대 앞에 차려진 프란치스코 교황 분향소를 오는 25일 오후 5시까지 운영한다.

종합

[이런 사목 어때요] 서울대교구 목5동본당 마라톤동호회

서울대교구 목5동본당(주임 정대웅 요한 보스코 신부)에는 기도로 달리기 시작해 기도로 달리기를 끝내는 ‘목5동성당 마라톤동호회’(회장 이명덕 로사)가 운동 겸 신심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5동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목5런’으로 익숙하게 불리는 ‘목5동성당 마라톤동호회’는 2008년 4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중심으로 창단돼 본당 선교와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목5런의 창단 목적은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1베드 4,10-11)라는 성경 말씀이다. 목5런 회원 50여 명은 달릴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이 주신 은사로 여기고, 달리기가 직접적인 신심행위는 아닐 수 있지만 신자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훌륭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신념으로 활동한다. 회원들은 날씨와 상관없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오후 8시, 주일에는 오전 6시30분에 어김없이 모여 달리고 있다. 회원들은 본당 신자나 예비신자들이다. 이명덕 회장은 8년 전 목5런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신앙을 되찾아 현재는 목5런의 기둥이 되고 있다. 김진호(다니엘) 전 회장 또한 2013년에 세례를 받으면서 목5런 회원 모집 광고를 보고 마라톤을 시작한 뒤 42.195km 풀코스를 13회나 완주한 베테랑으로 우뚝 섰다. 김 전 회장은 “여러 가지 다른 운동을 중간에 그만두곤 하다가 살을 빼겠다는 생각으로 목5런에 입단한 후 마라톤의 매력을 알게 됐다”며 “마라톤을 하는 동안 내가 사는 한 번뿐인 인생을 늘 돌아보고 살면서 겪는 성공과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녀와 직장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를 지혜롭게 건너게 해 준 운동이 마라톤이었다”고도 덧붙였다. 목5런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회원 중에 육상 선수 출신은 없으며, 순수 동호인 모임이다. 아직 마라톤 경력이 짧은 안신해(가브리엘라) 회원은 “잘 뛰든 못 뛰든 동료 회원들이 늘 환영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목5런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이명덕 회장을 비롯해 목5런 회원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마라톤은 정말 정직한 운동”이라며 “내가 뛰고 노력한 만큼 그대로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신앙 성장에도 마라톤은 큰 도움을 준다”고 강조했다.

서울대교구-우리은행, WYD 위한 업무협약 체결

서울대교구와 우리은행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이하 WYD)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손을 맞잡았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와 우리은행 정진완(스타니슬라오) 은행장은 4월 16일 서울대교구청 교구장 접견실에서 WYD의 성공적인 개최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번 협약으로 서울대교구와 우리은행은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해산 시까지 협력하게 된다. 우리은행은 앞으로 WYD 지원을 위한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주요 후원사로 활동할 계획이다. 정순택 대주교는 “범국가적인 젊은이들의 축제인 WYD를 위해 우리은행이 긴밀히 협력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교회가 우리 사회를 위해 역할을 해야 하듯 우리은행 역시 대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해주시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정진완 은행장은 “이번 협약을 교회의 다양한 사업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함께 힘을 보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약속으로 삼고자 한다”면서 “WYD의 성공적인 개최는 물론 청년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 함께 호흡하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협약식에는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총괄 코디네이터 이경상 주교, 교구 사무처장 정영진(도미니코) 신부, 관리국장 김한석(토마스) 신부, 문화홍보국장 최광희(마태오) 신부,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양주열(베드로) 신부와 우리은행 조세형 기관그룹 집행부행장, 조운정(아녜스) 중앙영업본부장, 김병규(스테파노) 본점영업부 본부장, 장훈(레오) 기관영업전략2부장, 박소영(엘리사벳) 가톨릭회관지점장이 참석했다.​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 환경 개선 위해 정성 모아

수원교구 성남지구(지구장 최병조 요한 사도 신부)는 4월 11일 성남동성당에서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 별관 리모델링 지원을 위한 후원금 500만 원을 센터장 이정은 수녀(케빈·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원관구)에게 전달했다. 센터는 현재 대쌍령2리 마을회관 2층을 임대해 이주민을 위한 상담·교육·지원 등을 제공하고 있으나, 이용자가 점차 늘면서 교육 공간이 절실한 상황이다. 센터 인근에 별관을 구했지만, 리모델링 비용이 수천만 원에 달해 모금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성남지구는 일회성 금전 후원보다 리모델링 자체를 지구 차원에서 책임지기로 하고 지원에 들어갔다. 지구는 신자의 재능기부를 통해 리모델링 비용을 절감하고, 공사비용 전액을 지구 차원에서 부담하는 방식으로 센터를 지원했다. 센터는 앞으로 별관에서 이주민을 위한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최병조 신부는 “지구 중심 사목 차원에서 이번 지원을 추진할 수 있었다”면서 “센터를 통해 다문화사회를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정은 수녀는 “이주민 사도직을 하면서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중요한 사도직이라는 걸 매번 생각하게 된다”며 “가끔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도 있는데, 이렇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시면 큰 힘이 된다”고 감사를 표했다. 전달식에는 성남지구 총무 이형묵(요셉·수진동본당 주임) 신부, 성남동본당 김동희(요셉) 총회장 등이 함께했다.

영화 통해 기후 위기 관심 높인다…작은형제회 JPIC ‘기후변화 씨네톡’

작은형제회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특별위원회(위원장 양두승 미카엘 신부, 이하 JPIC)가 매월 기후·환경위기 등 사회문제가 반영된 영화상영회 ‘기후변화 씨네톡’을 열고 있어 눈길을 끈다. 4월 17일 열린 상영회에는 감독을 직접 초청해 관객과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작은형제회 JPIC와 (사)푸른아시아는 4월 1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7층 체칠리아홀에서 영화 상영 프로그램 ‘기후변화 씨네톡’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재개발이 확정된 광주광역시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모습을 그린 박동희(바오로) 감독의 <광천동 김환경>이 상영됐다. <광천동 김환경>은 영화를 공동 연출한 김환경 감독이 직접 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아파트의 ‘마지막’ 주민들과 겪은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상영 후에는 관객들과 감독의 대화 시간도 있었다. 영화는 출연자 김 감독이 시민아파트 매물을 부동산에 문의하는 과정부터 세세하게 그린다. 관리인이 없어 관리비도 없는 곧 철거될 아파트에 입주하겠다는 김 감독을 의아하게 여기는 부동산 업자들부터 아파트 이웃들의 반응까지 정겨우면서도 익살스럽게 전한다. 영화는 남아 있는 아파트 주민들을 통해 광주라는 도시와 민주화 운동 역사가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아파트는 빈민·민주화 운동가이자 광천동 ‘들불야학’의 핵심이었던 김영철 열사, 윤상원 열사 등이 거주했던 곳이다. 박동희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 중 “시민아파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역사관 조성이 계획된 ‘나’ 동을 제외하고 철거가 확정돼 입주민이 모두 나간 상태”라며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곧 사라지고 단절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중 하나인 시민아파트와 주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 씨네톡은 작은형제회 JPIC가 푸른아시아와 함께 2018년부터 매월 개최하는 영화 상영회다. 푸른아시아는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시민네트워크로, 재생에너지 연구와 보급, 나무심기사업 등을 해오고 있다. JPIC 위원장 양두승 신부는 “신자·비신자 가리지 않고 기후 위기를 알리자는 차원에서 상영회를 시작해 최근에는 더 폭넓은 주제의 영화를 다루기도 한다”며 “씨네톡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잠시 주춤했지만 후원자들 덕에 잘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이가 기후 위기를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다”고 전했다. 5월 기후변화 씨네톡은 내달 15일 열린다. 기후위기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를 일반인들이 생생하게 촬영한 영화 <더 히어 나우 프로젝트>(THE HERE NOW PROJECT)가 상영된다. ※ 관람 문의 : https://climate-cinema.imweb.me(기후변화 시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