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라파엘로 산치오

이형준
입력일 2025-07-16 08:47:58 수정일 2025-07-16 08:47:58 발행일 2025-07-20 제 345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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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건축 경계 넘나들며 르네상스 정신 완성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으로 불립니다. 그는 특히 회화의 표현 기법에서 전성기 르네상스를 완성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식과 투시도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건축을 발전시켰습니다.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고향이기도 한 르네상스 예술의 도시 우르비노에서 1483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는 화가이면서 인기 있는 미술 공방의 운영자로서,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프레스코 기법을 비롯한 회화의 기본 기술을 배웠습니다. 문학적 소양을 갖춘 아버지 덕에 라파엘로는 미술적 기교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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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라파엘로가 그린 생애 첫 작품 <산티 가정의 성모 마리아>, 1498년경. 출처 위키미디어

그 시기 어린 라파엘로는 자신의 첫 작품인 <산티 가정의 성모 마리아>를 그의 집 안 벽면에 남겨놓았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라파엘로를 움브리아 학파의 거장 페루지노에게 보내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아버지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일생 아버지를 추모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탁월함을 지녔던 우르비노는 어린 라파엘로에게 그 자체로 미술 학교이고 미술 교사였습니다. 특히 라파엘로는 우르비노의 두칼레 궁전에서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았는데, 우르비노 공작의 서재에서 이름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나서는, 누구의 설명도 없이 작품으로부터 직접 회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브라만테의 것으로 알려진 적막하고 황량한 이상적인 도시의 그림 한 점도 이곳에 있었는데, 그 그림은 라파엘로의 건축적 잠재성을 크게 자극하였을 것입니다.

라파엘로는 열일곱에 이미 마에스트로로 불릴 정도로 세간의 인정을 받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성모 마리아 대관식> 두 작품을 스승 페루지노에게 헌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페루지노의 같은 주제의 그림을 능가하는 <성모 마리아의 결혼>(1504년)을 통해서 라파엘로는 이제 동시대의 화가들보다 한 세대를 앞서가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습니다.

그즈음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피렌체에서 만나며 그의 피렌체 시대(1504~1508년)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서양 미술의 위대한 예술가 세 명이 피렌체라는 한 도시에 머무는 시기에 라파엘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 관한 연작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오색 방울새의 성모 마리아>와 <벨베데레의 성모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1506년) 이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와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작품인 <발다키노의 성모 마리아> 등을 완성했습니다. 건축 분야에서 라파엘로는 이 시기에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르네상스 건축물들을 접했고,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 형제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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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로마 시기(1509-1520)에 그린 로마 시스티나 경당의 태피스트리 작품 중 하나인 <고기잡이의 기적>, 1515년. 출처 위키미디어

1508년 말 스물다섯 살의 라파엘로는 같은 우르비노 출신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율리오 2세 교황의 부름을 받았고, 로마에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때 이미 서른세 살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라파엘로는 훗날 바티칸 박물관의 ‘라파엘로의 방’이라고 불릴 교황의 아파트에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서명의 방’에 있는 <아테네 학당>과 <성찬례 논쟁>, ‘헬리오도로스의 방’에 있는 <성 베드로의 석방> 등의 걸작을 남깁니다. 1513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레오 10세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과의 친분으로 라파엘로는 최고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제단화 분야에서도 <폴리뇨의 성모 마리아>와 예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두 천사’를 담은 <시스티나의 성모 마리아>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집니다.

무엇보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보고 칼이 아닌 붓으로 조각한 듯한 작품에 경외감을 느꼈으며, 동시에 그가 도전할 상대가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1514년 라파엘로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의뢰를 받고 수개월에 걸쳐 밑그림 작업을 한 후 플랑드르 공방으로 보냈습니다. 3년 후 완성된 태피스트리가 로마에 도착하여 시스티나 경당의 제단 좌우와 뒤편을 가득히 장식하였고, 교황청의 모든 추기경과 예술가들은 <고기잡이의 기적> 등의 작품을 보고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교황 아파트의 방들 가운데 ‘보르고의 불의 방’과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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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1520년. 출처 위키미디어

이 해는 또한 브라만테가 사망하고 라파엘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대성당의 설계에 힘을 쏟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보다 조금 앞서 시에나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의 의뢰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에 키지 경당(Cappella Chigi)을 설계하였고,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과 빌라 마다마(Villa Madama) 등을 건축했습니다.

1520년 3월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작업을 4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엘리야로 둘러싸여 거룩하게 변모한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가장 의미 있는 마지막 순간을 그분과 함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즈음 얻은 열병은 낫지 않았고 결국 그분의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바라보며 1520년 4월 6일 성금요일에 그분의 손을 잡고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육신은 판테온에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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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