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보편적 형제애로 이주민 감싸안자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제44회 인권 주일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올해 인권 주일 담화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는 혐오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특히 이주민 혐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처럼, 경쟁과 배제의 논리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향한 연대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행동해 왔다. 최근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천안 모이세가 마련한 ‘국악과 함께하는 대림 특강’,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추진하는 ‘희망 날개’ 사업 등은 교회 공동체가 펼치는 중요한 연대의 실천이다. 제주교구 이주사목위원회 나오미센터와 주변 신자들의 도움으로 제주에서 둥지를 내리고 있는 나디아 씨 오 남매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이를 보듬을 수 있다. 이주민 혐오는 결코 개인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거짓 정보와 집단적 불안이 뒤섞일 때 혐오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힘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의 벽을 허물고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앞장서야 한다. 낯선 이와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허위와 편견에 저항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책임이다.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이다. 이주민과 난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척을 멈추고, 우리 안에 오신 아기 예수의 마음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선택하자. 교회가 걸어온 이 연대의 실천에 모든 신자가 함께 나설 때 인권 주일의 외침은 우리의 삶 안에서 열매 맺을 것이다.

아시아 선교의 새 지평, 한국교회의 사명

지난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린 ‘희망의 대순례’는 아시아교회가 하나 되어 복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뜻깊은 자리였다. 19년 만에 개최된 제2차 아시아 선교대회에는 32개국 1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도 7명의 주교 등 27명이 동행해 아시아 선교에 대한 열의를 드러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안에서 그 비중과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땀으로 뿌리내린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은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아시아 선교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귀중한 영적 자산이다. 아시아는 세계 인구의 60%가 거주하지만 가톨릭 신자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교회는 짧은 기간 급성장을 이룬 경험, 다종교 사회에서 쌓아온 복음화의 노하우 그리고 분단 상황 속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해 온 체험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아시아 지역교회의 복음화에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번 대회가 강조했듯, 아시아 복음화는 고통받는 교회들과의 연대에서 출발한다. 박해의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는 어려움을 겪는 아시아 형제자매들과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며, 활발한 평신도 사도직과 청년 활동 역시 다른 나라 교회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페낭교구장 프란시스 추기경이 개막 미사에서 당부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아시아의 이야기를 잇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과 신앙적 열정, 다양한 선교 경험은 아시아 복음화의 중요한 자원이다. 이번 ‘희망의 대순례’가 아시아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한국교회에 더 북돋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사설

보편적 형제애로 이주민 감싸안자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제44회 인권 주일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올해 인권 주일 담화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는 혐오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특히 이주민 혐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처럼, 경쟁과 배제의 논리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향한 연대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행동해 왔다. 최근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천안 모이세가 마련한 ‘국악과 함께하는 대림 특강’,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추진하는 ‘희망 날개’ 사업 등은 교회 공동체가 펼치는 중요한 연대의 실천이다. 제주교구 이주사목위원회 나오미센터와 주변 신자들의 도움으로 제주에서 둥지를 내리고 있는 나디아 씨 오 남매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이를 보듬을 수 있다. 이주민 혐오는 결코 개인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거짓 정보와 집단적 불안이 뒤섞일 때 혐오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힘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의 벽을 허물고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앞장서야 한다. 낯선 이와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허위와 편견에 저항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책임이다.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이다. 이주민과 난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척을 멈추고, 우리 안에 오신 아기 예수의 마음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선택하자. 교회가 걸어온 이 연대의 실천에 모든 신자가 함께 나설 때 인권 주일의 외침은 우리의 삶 안에서 열매 맺을 것이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방주의 창

머지않은 미래, 유전자는 이미 우리의 운명인가?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GATTACA)>가 최근 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람하게 되었다. 20여 년 전에 이 영화를 볼 때와, 그동안 변화된 세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된 ‘가타카’는 매우 달랐다. 특히, 첫 자막 “The not-too-distant future(머지않은 미래)”를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했다. 앤드루 니콜(Andrew Niccol)이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모두 맡았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90년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앤드루 니콜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윤리적 우려와 경고를 이 영화에 담아냈다. 머지않은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적격자(valid)와 부적격자(in-valid)로 나뉜다. 태어난 아기의 피 한 방울이면 그 아기의 모든 신체적·지적 잠재력, 수명까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적격자의 지위는 체외 수정을 통해 배아를 생성하고 유전자 검사를 거쳐 우성 유전자를 가진 배아를 선별한 뒤, 그 배아의 사소한 결함도 유전자 편집을 통해 모두 제거된 채 태어난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전자 선택을 거부하고 부부의 사랑 행위 안에서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를 지칭하는 ‘신앙에 의한 출산자(Faith birth)’에게 사회는 ‘부적격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자연 임신 출생자들은 건강 여부와 상관없이 최적화된 완벽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성 때문에 부적격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질 수 있는 직업 또한 한정되어 있다. 현실에서 유전 정보에 기반을 둔 고용 접근성의 제한 시도는 공평성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특권을 누려도 좋은 사람은 없다”는 전제하에 각 개인의 이익과 복리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특권층은 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그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기도 한다. 그 특권층에 도달할 사다리로서 우월한 유전자는 매우 매혹적이다. 최근 한 언론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 유전자 조작 아기 실험을 추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부 기업은 유전자 편집 없이도 ‘다유전자 스크리닝(polygenic screening)’을 통해 특정 특성을 예측하는 기술, 이른바 ‘진화형 선택 도구’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도 무분별한 신생아 유전체 검사 관행이 지적되었는데, 이는 유전적 운명론이 현실로 스며드는 위험한 징후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배아 또는 태아에게 시행되고 있는 유전자 검사를 가족계획을 위한 선별이나 낙태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생명윤리적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차별을 거부하면서도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이 사회의 모순에서 우리의 머지않은 미래가 어떤 사회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덧 보조생식술은 저출산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매우 유용한 도구처럼 비치고 있다. 여기에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결합되면서 윤리적 통제가 어려운 기술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할 때, 비윤리적 선택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어 이기적 이타주의로 포장될 위험이 커진다. ‘차별을 거부하지만 차별을 강화하는’ 모순된 사고가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했다. 그렇다면, 입법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출산이라는 명분이 이 위험한 사고의 흐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생명기술을 허용하고 있는가?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나의 하느님 공부

누구를 무엇을 믿어요?

내가 아끼는 한 후배는 요즘 많이 우울해했다. 믿었던 한 사람에게 큰 배신을 당해서였다. 그가 내게 물었다. 바오로 사도의 그 아름다운 구절,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를 들어 말이다. “감사하고 기도하는 건 그런대로 노력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쁨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선배는 기뻐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기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찬란한 해에 가슴이 뛰고 펼쳐지는 모든 구름에 가끔은 감동에 겨워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이탈리아 순례 중 수많은 명품을 보았는데, 집에 돌아오자 11월 정원에 장미들이 몇 송이 새로 피어나 있었다. 그 장미들을 화병에 꽂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떤 명품이 나를 이토록 감동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수억 원의 명품 이래봤자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장미는 신의 작품이었다. 내 손에 신의 작품을 무상으로 쥐어 드는 일을 하다니! 후배는 요즘 들어 믿었던 어떤 사람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야. 인간은 긍휼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래.” 가끔 정치인의 부정부패 비리와 성추문에 달리는 댓글들을 본다. “저는 믿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믿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살여탈권을 쥔 정치인들을 믿다니, … ‘하고싶은대로 하세요’라니. 정치인들은 감시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인간인 데다가 우리가 쥐여준 칼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토록 정치인의 성적·도덕적 결백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에게는 거짓말 말라고 다그친다. 나에게 와서 자신은 이성적인 사람이라 하느님을 믿지는 못하겠다고 점잖게 말한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기쁨이란 굉장히 귀하고 소중한 감정이야. 이 세상에서 기쁨을 느끼는 때는 정말 많지 않아. 로또가 당첨되었다 해도 좋기는 하겠지. 그런데 좋은 것과 기쁜 건 다른 거야. 돌아보니 내가 정말 기뻤던 날은 내가 믿음을 찾은 날이었어. 내가 회심하고 하느님을 받아들인 날이었어. 진리를 알았을 때, 그러니까 하느님을 알았을 때 나는 몇 달 동안 이런 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감정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진실로 나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그리하여 수많은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었을 때. 이상하지만 그래 정말이야. 그때 나는 기뻤어. 마음 깊은 곳에서 맑은 샘물이 새로이 솟아나는 것 같았지. 그리고 세 번째 내가 아주 약간 남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그리고 가끔 기도 해주었는데 그 남이 정말로 수렁에서 벗어나 잘 되었을 때 그때 정말로 기뻤어. 이 세 가지 외에 우리에게 지속되는 기쁨은… 난 아직 모르겠어.” 나는 안다. 기쁨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기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한가지는 안다. 인간을 믿을 때 반드시 비참해지고 만다는 것을.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만든 모든 것도, 그러니까 그중의 대표 주자인 돈 같은 것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만일 우리가 허방을 짚으면 무너져 내리고 무너져 내리면 반드시 그 허방과 함께 낙하를 맛보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기쁨은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것을 쥔 상대에게 두어야 한다. 사도의 말대로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에.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2면
일요한담

디저트 말고 메인 요리를 먹으렴

우리 6학년 친구들은 미사 중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뻥긋 안 하다가 파견성가가 끝남과 동시에 나불나불 떠들곤 한다. 내가 아무리 훌륭한 교리 수업을 한다 해도, 미사가 주는 기쁨과 은총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미사가 주요리고 교리는 디저트인 셈인데 아이들은 아무래도 디저트가 그나마 먹을 만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교리에 집중하게 하려고 가급적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니 그럴 거다. 반면 미사는 그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여 참맛을 알지 못하면 지루하다. 정해진 형식이 있어서 일단 몸에 익으면 마음까지 기울이지 않아도 그럴싸하게 참여할 수 있다. 방금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기도문을 유창하게 외우는 식인데, 이는 곧 지루함의 원인이 된다. 6학년쯤 되면 미사 중에 옆 친구랑 떠들거나 몸을 배배 꼬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저학년에 비해 교사가 주의를 줄 일은 거의 없다. 덕분에 미사 시간에 분주한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나는 할 일은 크게 없지만 이 조용한 6학년이 지금 온 마음을 다해 미사를 드리는가를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 본당은 평화의 인사 시간에 모든 어린이가 차례로 제대 앞으로 나와서 신부님, 교사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고 들어간다. 나도 제대 앞에 서서 아이들과 한 명씩 손바닥을 맞대며 인사를 하는데 고학년으로 갈수록 아이들의 얼굴이 무표정하다. 매주 하는 인사인데도 할 때마다 신이 나서 손바닥을 부딪치는 저학년 아이들과 달리, 5·6학년은 시큰둥하기 그지없다. 일부러 6학년 친구들의 손바닥을 꽉 움켜쥐어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웃지 않아서 다소 당황했다. 미사 시간에 누구보다 얌전한 6학년이지만 찧고 까부는 꼬마들보다 더 미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미사의 중요성을 알고 온 마음을 다해 미사를 드린다면 기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에 어울리는 표정은 웃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평화를 빌어주려면 나부터 평화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기쁨을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평화의 인사를 잘해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는 사제의 당부를 실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될 수 있다. 그리하여 교리 교사로서 가장 우선 달성해야 할 과제는 이거다. 아이들이 미사의 참맛을 느껴서 기쁜 얼굴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 평화가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낼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매달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힘이니 성실한 그분의 손길을 기다린다. 주님의 섭리로, 이 아이들이 미사 시간에 뭔가에 홀려봤으면 좋겠다. 성체를 모시면서 뜬금없이 눈가가 시큰해진다거나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르면서 울컥해서 목이 메는 당황스러운 순간을 경험한다면, 예수님과 하나 되는 데서 오는 진정한 평화의 기쁨을 알 수 있을 거다. 글 _ 정신후 블라시아(방송작가)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2면
사설

아시아 선교의 새 지평, 한국교회의 사명

지난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열린 ‘희망의 대순례’는 아시아교회가 하나 되어 복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뜻깊은 자리였다. 19년 만에 개최된 제2차 아시아 선교대회에는 32개국 1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도 7명의 주교 등 27명이 동행해 아시아 선교에 대한 열의를 드러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안에서 그 비중과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땀으로 뿌리내린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은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아시아 선교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귀중한 영적 자산이다. 아시아는 세계 인구의 60%가 거주하지만 가톨릭 신자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교회는 짧은 기간 급성장을 이룬 경험, 다종교 사회에서 쌓아온 복음화의 노하우 그리고 분단 상황 속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해 온 체험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아시아 지역교회의 복음화에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번 대회가 강조했듯, 아시아 복음화는 고통받는 교회들과의 연대에서 출발한다. 박해의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는 어려움을 겪는 아시아 형제자매들과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며, 활발한 평신도 사도직과 청년 활동 역시 다른 나라 교회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페낭교구장 프란시스 추기경이 개막 미사에서 당부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아시아의 이야기를 잇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과 신앙적 열정, 다양한 선교 경험은 아시아 복음화의 중요한 자원이다. 이번 ‘희망의 대순례’가 아시아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한국교회에 더 북돋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100년 신앙의 숨결 되살리다”… 백암공소 신자들, 신앙 유산 보존 위한 환경 정비 봉사

한국교회의 귀한 밀알이 된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숭고한 신앙을 증거한 대전교구 진산성지 소속 백암공소가 교우들의 뜨거운 애향심과 봉사 정신 덕분에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을 되찾았다. 백암공소는 1917년 당시 전주교구 고산성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이래, 1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역 신자들의 영적 안식처이자 신앙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유서 깊은 장소다. 비록 현재는 본당 신축 및 농촌 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상시 미사 예절이 중단된 상태지만, 이곳을 신앙의 ‘뿌리’이자 신앙 선조들의 헌신이 깃든 터전으로 여기는 교우들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공소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유태식 베드로 사목회장의 주도하에 백암공소 신자 16명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이들은 지난 11월 16일, 미사 재개에 대한 희망을 담아 공소에 자발적으로 모였다. 아침 일찍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대청소와 주변 환경 정비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봉사자들은 공소 마당과 경당 주변에 수북이 쌓여있던 낙엽과 잡초를 말끔히 정리했다. 건물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신앙 선조들이 땀과 눈물로 일구었던 거룩한 터전을 정갈하게 정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봉사에 참여한 한 교우는 백암공소가 걸어온 역사를 되새기며 깊은 감회를 전했다. “백암공소는 설립 이후 60년 동안 별도의 건물이 없어 공소 회장님댁에서 공소 예절을 하며 신앙을 지켜야 했던, 말 그대로 헌신의 장소”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은 미사를 봉헌할 수 없지만, 이 소중한 역사를 다음 세대에까지 전하기 위해 교우들이 당연히 힘을 모아야 한다”며 봉사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유태식 사목회장은 바쁜 가을 추수기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봉사에 참여해 준 모든 교우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또한 “이번 공소 환경 정비를 통해 우리 지역 신앙의 깊은 역사와 선조들의 숭고한 노고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며 “앞으로도 이 신앙의 터전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교우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다졌다. 이번 백암공소 환경 정비 활동은 교우들이 신앙 유산 보존에 대한 깊은 책임감과 살아있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 아름다운 사례로, 주변 지역사회에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글 _ 안찬 카르타고(대전교구 금산본당)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2면
현장에서

태아 인권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인가?’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은 11월 28일 제5차 가톨릭 의료윤리 심포지엄 ‘생명의 시작과 가톨릭 의료윤리’를 개최하고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다뤘다. 발제자는 ‘사람이 되는 시기’에 대해서도 살폈다. 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한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입장은 다르다. 2008년에는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밝혔으나(2004헌바81 결정), 2019년 자기낙태죄·의사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서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인 생존’을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훨씬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며 아직 사람과 같지는 않다는 태도를 취했다. 임신 22주 내외 태아의 ‘독자적 생존 능력’을 기준으로 낙태 허용 주수를 정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사실 ‘독자적 생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모태의 영양분을 받아야 하든, 모유나 분유를 먹여줘야 하든, 더 나아가 일해 번 돈으로 음식을 사 먹어야 하든, 우리 모두는 ‘세상의 도움’을 공급받아 성장하고 생존하고 있다. 여성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더 약한 자를 제거하는 쉬운 해결은 약자 인권에 대한 보호를 되려 퇴보시킨다. 일부 여성이 태아를 ‘내 몸에 기생하는 짐’으로 여기게 만든 것은, 사회적 지원 부족과 생명 교육 부재 등 다방면의 사회적 책임이 크다.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이다. 하느님이 미천한 우리를 기억하여 아기 예수님을 보내셨듯 자꾸 기억해 본다. “나도 태아였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대림초를 품 안에

벌써 대림(待臨) 시기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더더욱 하느님을 흠숭하며 성탄을 기다리는 조용한 4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28일 동안 기도로 성탄을 성스럽게 맞이하고, 마음가짐을 거룩히 하는 영적 준비 기간을 보낸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우리 삶을 변화시킬 시간을 주신 것이다. 집안을 털어내고 닦듯이 이 기간에는 성전을 더욱 깔끔하게 정돈하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환영한다. 단순히 외적인 청소가 아니라, 내면의 자리를 깨끗이 비우고 채비하는 과정이다. 만백성의 영광과 평화를 위해 오시는 주님을 두 손 모아 간절히 학수고대함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밝은 빛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와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는 영험하신 분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함은 물론, 이제는 더 나아가 이 땅에 전쟁의 포화가 없기를 바라며 예루살렘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 나누고 배우며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다. 자신의 영육 간의 잘못을 겸허히 돌아보고, 사랑의 힘으로 서로 의지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고 전파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림초를 품에 안을 상상을 하면 벌써 마음이 설렌다. 정갈한 네모난 꽃꽂이 화환 판에 물을 주며 네 가지 보라색과 분홍색, 흰색 양초가 참된 은총으로 내 품에 안길 날을 기다려 본다. 아침마다 꽃이 시들지 않았는지 정성껏 살펴보는 것은, 향을 품어내는 푸른 잎과 보라색 스타티스를 장식한 대림환을 통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건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맞이하기 위한 환영의 뜻이다. 대림은 이다지도 크고 숭고한 마음이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을 위하고 힘없는 이를 두둔해 주시며 빛으로 오신 분을 우리는 격하게 환대함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쁘게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자 소명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글 _ 이영숙 로사(수원교구 안양 매곡본당)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22면
방주의 창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2015년 프랑스 파리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전 세계 195개국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하기 이전(1850~1900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가능하면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파리협정’을 맺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산호초의 70~90%가 멸종하며, 극심한 폭우, 가뭄, 홍수, 태풍, 산불 등 각종 이변이 일어나 지구와 인류를 괴롭힐 것이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세계기상기구는 산업화 이전 대비 1.55℃가 올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제 인류라는 종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인가? 그래서 단순한 경고는 위기를 넘어 재앙이라고 표현된다. 이미 재앙의 시기는 다가온 것 같다. 작년에는 빗방울이 살짝 보이기만 해도 반가워 뛰쳐나온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하루 만에 1년 치 강수량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다. 성경 말씀대로 사막에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사태였다. 이런 위기 상황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벨렝에서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가 열렸다. 아마존을 배경으로 살아오던 남미의 8개 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선주민(원주민이라는 말과는 미묘한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요즘 사용되는 단어) 대표들이 에콰도르에서 출발해 벨렝까지 3000km를, 아마존강을 따라 항해했다. ‘물의 어머니’라는 배를 타고 그 먼 거리를 횡단한 이유는 정작 가장 적게 온실가스를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의 대표들, 트럼프도, 푸틴도, 시진핑도 오지 않은 회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짓을 더욱 결연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현장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보내온 레오 14세 교황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간곡한 당부에도, 행사 결과에서 ‘화석연료 퇴출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강대국과 산유국의 입김이 작용한 그저 그런 절충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자연보호운동이 있었다. ‘자연보호’ 헌장이 선포되고 국민적 운동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하여 멸종위기 식물 복원, 하천 정화 등 환경보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운동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려워졌다. 폐지를 모으고, 일회용품을 안 쓰겠다고 선언하고, 재활용을 생활화하자고 했고 이를 위한 ‘아나바다’ 운동도 있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단순한 운동이었지만 국민의 호응은 대단했다. 당시 각 성당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말자고 스테인리스 컵을 사서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비치하기도 했다. 성당 한구석에는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친환경 비누를 만들고, 공병과 폐지를 분리해서 수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풍경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아껴 쓰고 고쳐 쓰기보다는 싸고 편리한 일회용 세상이 되었다. 가정용품, 생활용품들도 고장이 나면 고치기보다는 ‘천원 가게’로 불리는 저가형 생활용품·잡화 전문 판매점에서 싼 맛에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일회용품은 차고 또 차는, ‘그래도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기후 위기와 지구 온도 1.5℃를 이야기하기 훨씬 전에도 지켜지던 소중한 가치들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우리의 일상에서 살리지 못한다면 세계 어떤 유력한 회의를 통해서도 이루지 못하는 창조 보전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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