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자

한국교회는 매년 5월 첫 주일을 생명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치시며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이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은총으로 내어주신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깨닫고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불리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가장 무기력한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이 침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낙태죄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관련 법이 제정되지 못했다.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관련 법이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만연한 혼인과 출산 기피 현상은 우리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못자리인 가정은 오늘날 그 보금자리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나아가는 가운데 노인들에 대한 돌봄과 보살핌의 필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보장 제도는 미미하다. 참담한 비극으로 기록된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경제적인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도외시하는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식의 결과다. 이미 오랫 동안 교회는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크게 안타까워하면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해 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그 뿌리를 되짚어 보면 결국 생명의 소중함을 소홀히 여긴 탓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크고 긴급한 소명이다.

통계 곳곳 ‘빨간불’, 근본적 사목 대안 고민할 때

「한국천주교회 통계 2023」는 팬데믹으로 타격을 받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엔데믹 선언과 함께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2022년 11.8%였던 주일 미사 참례율은 1.7% 포인트 오른 13.5%를 기록했고, 영세자도 전년보다 1만 명 가까이 늘었다. 견진·병자·고해 등 성사 건수도 완만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팬데믹 이전으로의 온전한 회복은 더디다. 감염병 전후의 기준점으로 여겨지는 2019년 통계와 비교하면 주일미사 참례는 74.5% 수준. 견진·고해 등 여타 성사 활동도 60~80% 회복에 그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 주일미사를 충실히 참례했던 신자 4명 중 아직 돌아오지 않은 1명을 성당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목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65세 이상 비율이 26.1%라는 통계가 보여 주는 신자 고령화는 교회가 맞닥뜨린 또 다른 과제다. 향후 5년 내 65세 이상 연령대에 접어들 60~64세 신자가 58만여 명으로 전체 신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고령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사목자들의 연령 지표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새 신부는 10년간 가장 적고 신학생 수는 줄어든 반면, 원로사목자 비중은 크게 늘고 있다. 사제 부족 현상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가시화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저출생 고령화는 교회에 더욱 빨리 찾아왔다. 사실 이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이 같은 현상이 예견됐다.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단순히 실버대학 몇 개 늘리고, 원로사목자 숙소를 짓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사목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현장에서

역설의 길

지난 4월 16일, 무료병원 요셉의원을 설립한 고(故) 선우경식 원장(요셉·1945~2008)의 16주기 추모 미사 및 「의사 선우경식」 출판 기념회가 열렸던 날, 서울대교구 총대리 구요비 주교는 강론 중 몇 번이나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구 주교는 선우 원장 생전에 사목 현장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격려했던 인연이 있었다. 고인의 삶을 회고하면서 함께한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선우 원장은 젊은 시절,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환자들을 보며 마음 아픈 경험을 했다. 그것은 ‘돈을 잘 버는 의사보다 병원비가 없는 가난한 사람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구 주교는 ‘이를 평생 정말 성실히 실천해 나갔던’ 고인의 면모를 들려주면서,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성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의사 선우경식」을 펼쳐 읽으며 기자에게는 그의 ‘의사다운’ 삶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푸코 성인의 말처럼 예수님을 따라 ‘아무도 위로해 주거나 돌보지 않는 이들을 위로하고 돌보자’ 했던 애씀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길은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인 내어줌으로써 얻는 역설의 길이고 바보의 길’이라는 한 사제의 말을 떠올렸다. 그처럼 고인이 걸었던 길은 무난하게 섬김과 부를 얻을 수 있는 세속의 길이 아니라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진정한 행복과 풍요로움을 얻는 길이었다. 1987년 무료병원 시작 때 그가 뿌린 겨자씨는 지금 연인원 600여 명의 봉사자와 하루 평균 100여 명이 진료받는 큰 나무가 됐다. 선우 원장의 일생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가는 길은 어떠한가.

2024-05-05
사설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자

한국교회는 매년 5월 첫 주일을 생명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치시며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이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은총으로 내어주신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깨닫고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불리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가장 무기력한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이 침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낙태죄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관련 법이 제정되지 못했다.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관련 법이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만연한 혼인과 출산 기피 현상은 우리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못자리인 가정은 오늘날 그 보금자리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나아가는 가운데 노인들에 대한 돌봄과 보살핌의 필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보장 제도는 미미하다. 참담한 비극으로 기록된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경제적인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도외시하는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식의 결과다. 이미 오랫 동안 교회는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크게 안타까워하면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해 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그 뿌리를 되짚어 보면 결국 생명의 소중함을 소홀히 여긴 탓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크고 긴급한 소명이다.

2024-05-05
사설

통계 곳곳 ‘빨간불’, 근본적 사목 대안 고민할 때

「한국천주교회 통계 2023」는 팬데믹으로 타격을 받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엔데믹 선언과 함께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2022년 11.8%였던 주일 미사 참례율은 1.7% 포인트 오른 13.5%를 기록했고, 영세자도 전년보다 1만 명 가까이 늘었다. 견진·병자·고해 등 성사 건수도 완만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팬데믹 이전으로의 온전한 회복은 더디다. 감염병 전후의 기준점으로 여겨지는 2019년 통계와 비교하면 주일미사 참례는 74.5% 수준. 견진·고해 등 여타 성사 활동도 60~80% 회복에 그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 주일미사를 충실히 참례했던 신자 4명 중 아직 돌아오지 않은 1명을 성당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목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65세 이상 비율이 26.1%라는 통계가 보여 주는 신자 고령화는 교회가 맞닥뜨린 또 다른 과제다. 향후 5년 내 65세 이상 연령대에 접어들 60~64세 신자가 58만여 명으로 전체 신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고령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사목자들의 연령 지표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새 신부는 10년간 가장 적고 신학생 수는 줄어든 반면, 원로사목자 비중은 크게 늘고 있다. 사제 부족 현상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가시화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저출생 고령화는 교회에 더욱 빨리 찾아왔다. 사실 이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이 같은 현상이 예견됐다.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단순히 실버대학 몇 개 늘리고, 원로사목자 숙소를 짓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사목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2024-05-05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불법’인 사람은 없다

서울 종로5가의 한 빌딩 지하에 있는 서울 디아스포라 교회는 교인들 다수가 미등록 필리핀 노동자다. 한국에 온 지 5년부터 25년이 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대부분 고국에 있는 부모의 의료비와 자녀 혹은 동생들의 교육비를 책임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없는 주말과 저녁 시간에 잔업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매년 ‘불법’ 노동자 특별단속 기간이 되면 이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적발되어 벌금을 물고 추방당하면 다시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올봄에도 이렇게 한국을 떠나는 교인이 계속 생기고 있다. 교인이 단속에 붙잡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면 정진우 담임목사는 회사를 찾아가 못 받은 임금과 퇴직금을 받아내고 그가 살던 방에 가서 짐을 정리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아 전해 준다. 비행기표도 추방되는 노동자가 사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회사 사정에 미등록노동자 고용으로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며 퇴직금을 못 준다는 사장도 있다. 어떤 집주인은 외국인보호소에 억류된 당사자와 연결해 주어도 정 목사를 믿지 못해 다시 자기에게 직접 전화하라고 요구한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 단속을 강화하면서 인권 침해도 잇달아 발생했다. 작년 3월 대구에서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주일 예배를 보다가 토끼몰이식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11월에는 경주의 공단에서는 법무부 남성 직원이 미등록 이주 여성 노동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작업장에서 끌어내는 영상이 국제적인 공분을 자아내었다. 정부는 한쪽으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매년 수천 명씩 외국인노동자를 추가로 들여온다. 이른바 3D업종뿐 아니라 농어촌에도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데 20년 넘게 시행되고 있는 ‘고용허가제’는 노동자가 일터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들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한다. 아무리 강력히 단속해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줄지 않고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43만 명을 헤아린다. 그들 가운데는 20년 넘게 한국에 산 사람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는 필리핀 가사도우미 100명이 7월에 입국해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빠르면 8월 말부터 서울 지역에서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의 증가하는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기에 시범사업으로 해 본다는 것이다. 공론화 과정에서 노동계와 인권단체의 반대와 비판도 적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가 오는 것은 노동력에 앞서 무엇보다 사람이 오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는 이웃이다.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이민 이주민 이주노동자 정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05
방주의 창

혐오를 대하는 자세

가톨릭교회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단죄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성찰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면서 후보들의 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후보에서 사퇴한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비판을 무시하고 후보로서 선거를 치르거나 당선된 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혐오뿐 아니라 장애인, 노인, 이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이들의 발언이 소셜미디어, 개인방송 채널을 통해 인기를 끌고 명성과 부를 가져오기도 한다. TV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거나 다양한 가족의 구성원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연예인들은 비판받기도 했고 한동안 출연이 정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혐오를 제재하거나 처벌할 근거가 강력하지 않아 혐오는 비판에 그치고, 혐오발언을 한 사람들은 잊히고 다시 방송에 등장한다. 개인방송 채널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 폭력적인 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혐오발언은 지지자들의 응원 속에서 간과돼 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의 혐오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 경우에도 몇몇 후보는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거나 본인이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고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실수했다고 얼버무렸다. 또한 이들을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투표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황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혐오발언은 발화자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좀 더 혐오발언을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차별에 감수성을 요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섞인 언어나 정책을 일절 삼가자는 신념을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이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자유로운 발언이나 토론이 억제되 민주주의의 발전에 저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표현과 행동에서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혐오발언이나 행동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 학교, 정치 등의 영역에서 혐오발언에 대해 개인 차원의 성찰을 넘은 자문과 심의, 교육, 법적 제재 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각 정당에서는 성인지교육이나 성폭력 예방교육 등을 통해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하고, 당원 자격 기준에는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미국의 여성주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저서 「혐오발언」에서 혐오발언을 하는 발화자의 입을 막는 것만으로 그 사회의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발화를 가능하게 한 집단 또한 사회의 지지를 받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혐오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혐오가 갖는 문제점을 인식할 때 혐오가 사라질 수 있고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나 미디어에서 발견되는 혐오발언은 혐오발언으로 주목을 끌고 스타가 된 사람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들의 혐오발언을 지지하고 환호한 사람들, 이에 대해 침묵한 사람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발언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톨릭교회 미사 강론이나 교리교육에서도 혐오발언이 무심코 사용되지는 않는지 감수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교회 조직 내에서도 성인지교육, 성폭력 예방교육 등 성평등 교육을 실시하고 매뉴얼을 만드는 한편, 교회가 사회의 혐오발언을 비판하고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5-05
독자마당

[독자마당] 가시 없는 장미송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립니다. 덩달아 가슴이 열리며 심장의 붉은 색 날숨이 창공에 뿌려집니다. 로마의 창끝에 아파하였던 대지는 이렇게 핏빛이었습니다. 장미꽃 그 속에 감추어진 가시는 로마의 붉은 대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기억 속의 로마가 창끝의 핏빛이었기에 장미꽃 가시가 아프기만 합니다. 아드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찬란하고 영롱하신 빛의 색깔로 부활하셨습니다. 위대하신 분,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 그분의 어머니가 ​ 저희의 영원하신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5월은 화려합니다. 저희는 환호합니다. 성모님! 5월은 붉습니다. 저희는 붉은 장미가슴 가득하게 안아봅니다. 창공에 뿌렸던 붉은 날숨이 장미꽃 송이마다 춤추라고 속삭입니다. 어머니! 이제는 가시없이 춤추는 장미를 두르십시오. 기억합니다. 아랫목의 이불속 꽁보리밥 식을까 노심초사하시며, 허기를 달래시며 저희를 먹이셨던 세상의 어머니, 얼음 냇물 빨래터에서 누더기 옷 하얘지라고 손이 시리셨던 세상의 어머니, 머나먼 길, 성전 찾아 기도하셨던 어머니, 아드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픔을 감추시고 두 손 모으셨던 천상의 어머니, 이제, 쓰라림 버리시고 아름답게 피어나십시오. 어머니! 가시는 멀리하시고 장미꽃 향기만 맡으십시오. 어머니! 꼬마의 작은 손으로 묵주송이 돌리며 작은 장미꽃 만들겠습니다. 농부의 투박한 손으로 비뚤지만 커다란 장미꽃 만들겠습니다. 묵주송이 알알이 가슴속 공경의 날숨으로 불어 넣겠습니다. 저희 모두 안개꽃 다발되어 묵주송이 감싸겠습니다. 오늘을 허락하시고 매일을 기억하시는, 저희의 모든 것을 아끼시는 어머니, 굴리는 묵주알 소리로 어머니 귓전에 조심스레 다가섭니다. 가슴에 담은 ‘성모송’ 어머니께 바칩니다. 어머니! 나약한 영혼의 미약한 묵주기도, 향기 머금으신 웃음으로 받아 주시니, 여린 가슴 다져지고 차가운 가슴 녹아내립니다. 천상의 어머니! 저희의 성모님! 오늘 이 밤 세상은 기뻐하며 꽃향기 가득한 어머니를 공경합니다. 5월의 장미는 모두 어머니의 것입니다. 5월의 찬란함은 원래 어머니의 것이옵니다. 겸손하신 어머니! 기뻐 하십시오. 그리지 못하는 그림, 부르지 못하는 노래이지만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심장의 붉은 색 날숨으로 가슴에 그리며 장미꽃 송이마다 조용히 노래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시 _ 이재복(벨라도·마산교구 고성본당)

2024-05-05
일요한담

성모 마리아와 장미이야기

장미의 계절, 5월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장미축제가 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장미축제를 일컫는 ‘로살리아’가 죽은 자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된 의식 중 하나였다. 죽은 자들에 대한 숭배의식을 그대로 흡수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가시가 달린 장미를 순교자들의 고통으로 받아들였다.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을 때도 한겨울에 장미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프랑스의 라 살레트와 루르드에서 발현했을 때도, 성모님 곁에 장미꽃이 있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파티마의 어린 목동들에게 발현하시어 러시아가 자신의 오류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파티마의 기도’를 포함하여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요청하셨다. 따라서 묵주는 항상 이단과 곤경에 대항하는 무기였다. 사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 즉, 이교도에 대한 최초의 해전 승리는 신자들이 바친 묵주기도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에도 장미가 자주 등장한다. 1642년에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성모의 대관식’도 성모 마리아의 머리에 장미 화환을 씌우고 있다. 하트형 구도로 되어 있는데, 오른편은 성부 하느님께서 손에 투명한 지구를 들고 있고 아들 예수와 함께 장미꽃 화관을 들고 있다. 그리고 왼편은 성모의 아들 예수가 그려져 있다. 손에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홀이 들려져 있고, 성부와 함께 성자 예수는 장미꽃 화환을 성모의 머리에 씌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발하며 대관식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도 마리아와 장미는 깊게 이어져 있다. 묵주기도(Rosario)가 라틴어로 ‘장미 꽃다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마리아’라고 하면 가장 먼저 장미를 떠올린다. 장미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상징한다. 하지만 단순히 상징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연관이 있는 꽃이기도 하다. 로사리오의 기원은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코가 이단인 프랑스의 알비주아파와 싸울 때 성모 마리아가 출현하여, 영적 무기로서 묵주의 기도를 바치라는 계시를 함으로써 시작됐다. 이후 도미니코회와 로사리오형제회가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하게 되었고, 레오 13세교황은 10월을 묵주 기도 성월로 선포하였다. 동방교회의 수도원에서는 ‘비잔틴식 로사리오’라 하여 100개의 구슬로 엮은 것을 사용하였다. 묵주의 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인류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그리고 마리아의 신비를 요약 함축하고 있다. 묵주기도는 반복되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깊은 내적 일치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성모신심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 이 기도는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동행하셨던 성모님을 따라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하고 관상하는 데 탁월한 방법이다. 묵주기도는 대중 신심의 단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욱 깊은 관상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다. 또한 반복하며 묵상하는 특징은 개인적으로는 내적인 평화를 얻어 일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직시하게 해주며, 공동체로 바쳐짐으로써 구성원들 간의 평화와 화합을 촉진하게 한다. 글_윤여환 요한 사도(충남대 회화과 명예교수)

2024-05-05
사설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위한 현양운동에 박차를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4월 16~21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에 나섰다. 위원회는 순례길에서 그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뒤 사목지인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거쳐 간 여정과 유해 이송로를 따라가며 조선 복음화를 간절하게 기원했던 그의 정신을 되새겼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은 지난해 10월 12일 서울대교구가 교황청 시성부로부터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승인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시복 추진에 요구되는 외부 검증 절차, 즉 지역 주교회의와 교황청 시성부의 검증을 거친 결과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 추진을 하기 위한 사전 절차를 마쳤다. 이제 복잡하고 엄격하게 이뤄지는 시복 재판을 위해 서울대교구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영웅적 덕행과 성덕의 명성을 증거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힘쓰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교회의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현양운동이다. 하느님 백성들 사이에 그의 영웅적 덕행과 성덕의 명성이 널리 퍼진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자, 나아가 성인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울대교구와 한국교회 전체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현양을 위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바치는 기도와 현양의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복시성은 사실 그 대상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신앙 성숙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일이다. 신앙 선조들의 삶과 굳건한 신앙을 본받으려는 일상의 실천과 현양의 노력이야말로 시복 추진의 핵심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2024-04-28
현장에서

신자위탁? ‘시너지’ 얻으려면 우리도 적극적으로

‘민간위탁’이라는 말이 있다. 넓은 의미에선 국가나 지자체가 공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시민이 주체가 되도록 자원봉사에 위탁하는 것도 민간위탁에 들어간다. 요즘 교회 내에도 평신도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민간위탁처럼 지역에 대한 이해도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에서 평신도가 주체가 됐을 때 더 효율적인 일들이 많다. 수원 조원동주교좌본당의 집수리 봉사단체 ‘사랑나눔봉사단’은 평신도가 주체적으로 사목에 참여한 모범적 예다. ‘사랑나눔봉사단’은 평신도가 비신자 봉사단체를 경험하고 교회 내에도 어려운 이웃의 집을 고쳐주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인식해 자발적으로 결성됐다. 봉사단의 취지는 수원교구 사목 방향 중 하나인 ‘외적 복음화’에 들어맞았다. 덕분에 창단 취지에 공감한 본당 주임 신부의 지원 아래 본당 사회복지분과에 소속된 공식 단체가 됐다. 수원교구 도시변방위원회 이준섭(도미니코) 신부는 “교회에 집수리봉사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본당 소속으로 이미 있다는 게 놀라웠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봉사단을 보수가 필요한 지역 노숙자쉼터와 연결해 줬다. 평신도가 시작한 것에 본당과 교구 부서의 사목자가 공식성을 부여해 완성했다. 성공적인 ‘신자위탁’의 모습이다. 본당 사목자와 신자 간 협력은 좋은 ‘시너지’를 낸다. 하지만 교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민간위탁’보다 어려운 과제도 많다. 평신도 스스로 어색해하지 말아야 하고 사목자는 정확한 식별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듯 ‘사랑나눔봉사단’처럼 평신도로서의 장점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어떨까.

2024-04-28
사설

모든 노동자들의 인간존엄을 위해 노력하자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른다. 이날은 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됐다.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노동자와 가족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벌인 파업 집회에서 비롯됐다. 이후 1889년부터 전 세계 각국은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절 제정 이후 134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자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전히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또 노동자들 사이를 차별하는 법과 제도가 있다.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별, 국적에 따른 차별,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따른 차별 등이 바로 그 예다. 이러한 차별과 불의에 대항해 교회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고 노동자들과 끊임없이 연대하고 있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불의한 법 제정과 집행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올해 노동절 담화 제목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로 정했다. 김 주교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종류의 착취에서 인간을 막아주는 것이 안식일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안식일의 근본 정신에 따라 모든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그들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힘쓰는 모든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이들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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