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 속에서 청년들은 언제나 변화와 쇄신의 주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 또한 박해와 격동의 혼란 속에서 청년 신앙인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성장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용기와 열정 덕분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신앙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과제이기도 하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신앙이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이는 교회가 청년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들이 단순한 수동적 신자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에 함께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과 소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청년들이 신앙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는 다양한 노력에 힘써야 한다. 아울러 청년들 스스로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 교회는 더욱 활력을 얻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앞으로 다가올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그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청년들을 성숙한 동반자로 환대하고, 이들이 주도적으로 행사를 이끌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청년들이 교회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교회는 더욱 열린 마음으로 청년들을 맞이하고, 청년들은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
어느덧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가 4주째를 맞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사순 시기마다 주님 수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기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회는 이 뜻깊은 시기를 신앙인답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 금식과 금육, 자선의 실천을 권고한다. 교회의 규정에 의하면, 신앙인들은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단식을 지켜야 하고, 재의 수요일과 사순 시기의 모든 금요일마다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식하던 것을 본받아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본지가 최근 단식과 금육재 준수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65%의 응답자가 매주 금육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의 수요일에 단식재를 준수한 응답자는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47%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단식과 금육의 실천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기도와 같은 것이며,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단식과 금육의 실천은 과거처럼 엄격하게 의무로 강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는 남을 위한 자기희생과 자선이라는, 단식과 금육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건강을 해치는 과도한 수준의 단식과 금육이 아닌,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이라는 적극적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단식과 금육은 소중한 신앙 실천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랑 나눔에 나설 필요가 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가난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어긋나고 균열이 가 폐허 된 세상 곳곳을 바라보며 ‘희망의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간을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실존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큰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 길을 내시고, 급기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 솟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내신 예수님의 우주적 사랑을 거슬러 사사로운 생각의 틀에 붙잡힌 악의 하수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은 집행되었다. 여전히 행해지는 불의의 한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희망을 품은 순례자’로서 발걸음을 떼어갈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 정치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사유’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정을 다루며,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를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공무원’으로서의 아이히만의 진정한 무능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보고했다. ‘현실에 맞서 말할 수 없는 무능’,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무능’,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 안에 깃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닌 이가 곧 아이히만이다. 악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머물러 아무 식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드러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명령 혹은 사적 안위만을 따르는 것은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참사, 심지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낳은 참상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직사회 상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해 수행하는 것이 명령 혹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질이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상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군 장교 중에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뒤로 메라고 한 이도 있었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맡은 직위에서 숙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유하는 상급자는 항명하며 수하들을 바르게 통제할 수 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12·3 비상계엄에 대항했던 성숙한 시민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진실한 증언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성 있는 이들과 달리 법 지식을 악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조인들과 위헌·위법에 위증을 일삼는 최고 통치권자에 대해 마땅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다려 왔다. 십자가는 생사를 넘나드는 식별을 통해 수락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예수님이 받아안은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답하는 말씀(프란치스코 교종)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서도 묵묵히 정의를 지켜내고, 마음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길어 올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잠깐 멈춰 십자가에 깃든 하느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둠 한가운데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고 모든 인간의 난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제게 큰 힘이 됐어요. ‘운’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모든 것의 시작에 시작을 만든 ‘누군가’(하느님)가 존재한다면, 또 그의 행동 원리가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기서 살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죠.” 성유빈 씨(에디트 슈타인·21·인천 마전동본당)가 바쁜 일상에서도 ‘청년, 희망의 현재진행형’ 기획 인터뷰에 선뜻 화답하고 들려준 말이다. 성 씨를 비롯한 청년들 모두 각자의 인터뷰에서 결이 같은 말을 해서 감동이었다. 개인 영성과 평안함 추구에서 기도가 그치는 이들과 달리,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통찰하는 청년다운 순수함이 녹아 있었다. 그런 청년들이 과연 신을 거부하기에 종교를 떠나갈까. 취재하며 만난 청년들은 냉담 중이더라도 존재론적이었고 물질 너머의 가치를 좇았다. 독실한 집안 분위기에도 냉담 중인 현아(가명·30·안젤라) 씨는 착취적 가축 산업에 반대해 채식주의자가 됐고 피혁 제품도 쓰지 않는다. “인간은 착취자가 아니다”라며 제로웨이스트도 실천한다. “그럼에도 신앙을 느낀 적 없다”는 현아 씨는 “나처럼 스스로 떠나온 부류에게는 교회에도 천국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없을 줄을 안다”며 적적하게 웃었다. 그런 청년들에게 “늦기 전에 회개하시오”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게 있을까. 그때 내가 주변 신부님께 받았던 위로가 기억났다. 큰 상처에 대해 털어놓은 어느 날, 신부님은 “하느님은 오로지 공감하시는 분”이라며 단죄는커녕 포옹해 주셨다. 그래서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현아 씨, 우리는 같아요. 당신을 이해해요.”
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마귀가 가지지 못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하느님은 그걸 우리 인간에게 주셨어. 그걸 아니?”하고. 나는 별생각 없이 “사랑 아닐까?”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가끔 마귀도 자식 정도는 사랑하지 않을까? 그것에 ‘참’ 자가 붙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정말로 마귀가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희생’이야. 네가 어떤 사람이 악한지 선한지 살펴보려고 할 때 이 부분을 유의해. 그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지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지.” 나는 이 땅에 여성으로 살면서 오랜 세월 희생이라는 것에 대해 민감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내 또래 중에서도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으며, 경제력 없는 어머니가 남편에게 맞고 살면서도 아이를 위해 헤어지지 못하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이에 열거한 사례들에 대해 반항심 가득한 내가 반감을 품었음은 물론이며, 나는 희생이라는 말이 가지는 폭력성이 싫어 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회심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명제를 묵상하면서 오래전 들었던 마귀의 일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소녀들에게 강요되었던 희생, 힘없는 아기 엄마에게 강요되었던 희생, 더 나아가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이나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에게 강요되었던 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희생은 선로에 떨어진 할머니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청년에게 걸맞은 단어이다. 신장이 망가진 늙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주는 큰딸의 의지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강한 자가 약자에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희생이라기보다 그냥 폭력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 보였다. 자신의 미각을 위해 신자 전체에게 다른 음식을 강요하는 사제부터,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런 희생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뻔뻔함은 전염병처럼 더 무섭게 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도소 봉사를 오래 한 법륜 스님의 말 중 하나는 그 정곡을 찌른다. “처음에 나는 교도소에 가서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썼어요. ‘희망을 가지셔야 한다’고도 했고,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인생을 사시라’고도 했죠. 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죠. ‘여러분 다들 억울하시죠?’ 그 순간 엄청나게 힘찬 합창이 들려왔어요 ‘예!!’ 하고. 교도소에는 억울하다는 사람이 이미 만원입니다.” 사순 기간 동안 나는 십자가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세 분의 희생이 수놓아져 있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내놓으신 하느님, 자신을 오롯이 희생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침묵으로 견디신 성모님. 그래서 십자가에는 악을 물리치는 힘이 있나 보다. 우리보다 만 배는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마귀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하는 그것,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이자 어리석음으로만 보였다는 그것, 십자가의 희생. “그러니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사순의 때는 회개의 시간 잘못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제, 나는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십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 한없이 내어주신 펠리컨 사랑 그 사랑 앞에 고개 숙이고 나를 돌아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무심히 던진 무례한 말과 행동들,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 죄악들을 돌아보며 주님께 참회의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사순의 때는 은총의 시간 십자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 지고 가시는 골고타 언덕길의 주님 고통을 아파하며 내 죄의 허물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는 은총 입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질투, 완고함과 교만함. 탐심과 집착으로 칭칭 감겨진 내 몸을 주님 십자가 희생 사랑으로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타작마당의 빛나는 알곡처럼 언제나 주님 앞에 수정같이 맑은 모습으로 서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순의 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한없이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인류를 위해 비우고 비우신 사랑 죄악에 가득 찬 세상 구하시려 권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사랑 찢기고 상처 난 성체에 피 흘리시며 한없이 낮아지신 희생의 사랑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무례함과 무지와 완악함을 용서하시며 그 성혈과 생명수로 온 인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사순의 때는 거듭나는 축복의 시간 이제는 미움과 분열로 닫힌 마음이 주님의 영을 받아 용서와 화해로 강물 같은 평화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은혜로 내려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약동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끌어안는 사랑,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 안는 뜨거운 사랑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주님! 이 사순의 때에 제 존재와 하느님 사랑 기억하게 하시어 십자가 주님의 희생 사랑을 닮아 가게 하소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글 _ 김영희 요셉피나(서울대교구 묵동본당)
아기 버끄리를 안은 소녀 Pakistan, 2011. 아침에 일어난 소녀가 맨 먼저 하는 일은 어린 버끄리들을 꼬옥 안아주는 일이다. 아픈 데는 없는가, 젖은 잘 먹었는가, 소녀는 금세 안다. “우리 동네 버끄리는요, 제가 안아주면 나아요. 많이 아픈 애들은요, 밤에 안고 자면 다 나아요.” 어디 동물뿐이겠는가.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나 홀로 버려져 있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세상을 다 가졌어도 진정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 박노해 사진 에세이 「다른 길」 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 풀의 씨앗에 바늘을 달아주기까지, 피조물이 졸랐을 하소연과 창조주가 조아렸을 사랑을 상상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들고, 그림자놀이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천덕꾸러기로 빚어 두시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네가 어때서?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온갖 잘난 것들이 설칠 텐데, 그 속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거든요.” “음~ 알겠다. 너의 씨앗에다 바늘을 달아줄게. 널 깔보는 것들이 있으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까지 가서 함께 살아 보아라.” 껄끄러운 그놈의 가시 바늘을 뜯어내어 아무데나 던지다 보니, 신작로 옆 풀숲이 온통 도깨비풀 천지가 된 이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게 틀림없다. 어쩌다 집에까지 붙어 간 풀씨는 애지중지 기르는 화분의 귀퉁이에서도 싹을 틔웠으니, 이 귀찮은 도깨비 풀이 번창한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편애가 빚은 실수 때문이야. 하하하. 성깔, 빛깔, 때깔, 맛깔처럼 ‘깔’이라는 글자가 붙은 말들이 있다. 창조론을 지나 진화론의 페이지에 실린 단어이다.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이 말마디는 서로의 관계나 비교를 드러낼 때 효과를 발한다. “저 성깔을 건드리면 골치 아파!”처럼 그의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 바로 ‘깔’이다. 예술가들은 이 ‘깔’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사물의 특징을 분명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그것만의 특징’이 그들의 그물에 포집되고, 증폭과 과장의 단계를 거치며 재탄생되어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 이것이 예술품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매력도 어쩌면 도깨비 풀씨의 바늘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예술가는 도무지 친절하지가 않다. 친절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고 신비롭지도 않다고 어떤 평론가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 불친절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과 미의식이 성장하게 된다나? 충분히 수긍이 되는 말이다. 암튼, ‘깔’을 대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거북한 일이기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많은 주목거리이고, 독을 품은 보약이다. ‘깔’을 채집하러 마실돌이를 나선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태양의 행로를 따라 목을 빼고, 시냇물의 송사리는 흐름을 거스르고, 언덕 위의 깃발은 뒤로 펄럭인다. 이 단순한 섭리로도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헤매던 길을 찾게 되는가? 내 그릇이 작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가! 작업장의 대나무 울타리도 바람에 서걱대며, “뭐하노? 지금 뭐하노?” 그러다가, 돌아와 작업대에 서면, “그거다! 맞다 그거다!”하고 응원가로 바뀐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에게 경계의 대상이어도, 자연은 도시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그래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행위는 누군가의 처음을 향한 질서회복운동이며 신에 대한 순명이다. 아니, 예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작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둥, 누가 어느 경매에서 어떤 작품을 사들였다는 둥, 마치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그 가식의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깔의 줏대로 바로 서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의 영과 함께 찬찬히 바라볼 일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경북 청송군 경북북부제1교도소 교육관에서 진행된 교정 사목 현장 취재는 교도소 관계자분들과 사단법인 꿈나눔 재단, 수용자분들의 큰 협조로 이뤄졌다. 소공동체 모임 후 개별 인터뷰 시간, 방문 전 미리 전달해드렸던 질문에 한 분씩 다가오셔서 건넨 답변지에는 손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감 27년째라는 한 수용자는 “사회에 있을 때 자장면이 20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새삼 이곳이 사회와 동떨어진 곳임을 느꼈다. 얼마 전 기자가 보도한 꿈나눔 재단의 ‘네팔바람부 폴 직업기술학교’ 설립 기사 얘기가 나왔다. “기사 잘 읽었다. 스크랩해서 붙여놨다”는 수용자분의 말에 가톨릭신문을 교정 시설에 후원하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마무리하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꿈나눔 재단 신원건 이사장은 자신이 끼고 있던 묵주 팔찌를 빼서 오늘 모임에 새로 온 수용자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동행한 꿈나눔 재단 후원자 김미자 씨도 팔에서 묵주 팔찌를 뺐다. 생각해 보니 내 팔목에도 언젠가 한 교구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가 걸려있었다. 신기하게도 세 명 모두 비슷한 나무 묵주 팔찌였다. “제 것은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에요.” “아이구야, 오늘 새로 온 함영(가명) 씨가 주교님 것으로 가져요.” 주교님께 받았다고 해서 더 효험(?)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예비신자가 됐다는 두 분께도 묵주 팔찌를 드리고 인사를 나눴다. 기도 안에서, 또 교회와 세상에서 성령과 함께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한국 내 이주민은 2024년 말 기준 265만 명에 이르며, 이는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한다. 그러나 법적·정책적 보호는 여전히 미흡하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 취지를 거스른다. 인권 보호가 아닌 통제를 우선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임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임시 구제책 또한 추가 대책 없이 오는 31일 종료된다. 법의 테두리 밖 이주민, 그리고 한국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미성년 아동을 추방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교회는 이주민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돌봄과 연대의 정신을 줄곧 강조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여러 차례 이주민을 향한 환대와 사랑을 촉구하며, “이주민과 난민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복음의 요구”라고 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 2월 국내 각 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을 위해 네트워크를 꾸렸다. 한 수도회가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는 이주민을 위한 기본적인 지원활동과 더불어 본당과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연대의 공동체 구현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주민 사목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포괄적인 접근과 사목이 필요하다. 정부의 부당한 법과 정책에 대응하며, 이주민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야 한다. 이주민 사목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사명임을 다시금 되새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