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11월 2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세계청년대회(WYD) 상징물인 WYD 십자가와 ‘로마 백성의 구원자’ 성모 이콘을 포르투갈 젊은이들로부터 전달받음으로써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준비가 본격화됐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다.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상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생 지고 가겠다는 헌신과 희생의 표지이자 구원이 선포됐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드러내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별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십자가는 두려움 없는 희망의 원천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선사하는 기쁨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이 자리를 그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참된 나눔과 기쁨의 장이 되도록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세계청년대회 개최 결정 후 교회 각계각층에서 이어지는 각종 세미나와 포럼 등이 그러한 고민을 보여준다. 때마침 국회에서 대규모 행사를 원활하게 치르기 위한 범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배려를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다. 이 행사는 교회만의 것이 아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 나아가 전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뜻이 충분히 실현되도록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과 함께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전국 각 교구에서 새해 사목 방향을 담은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새해는 은총의 해인 희년이자 축성생활의 해이고,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준비가 본격화되는 시기다. 아울러 3년여의 시노드 여정이 마무리된 후 처음 맞는 새로운 해다. 사목교서들은 ‘복음의 기쁨’을 더 깊이 체험하고 삶으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했다. 희년은 이러한 희망에 더없이 적절한 때이다. 또한 우리 삶과 신앙의 터전인 가정의 복음화에 사목적 역량을 집중할 것임을 밝혔다. 오늘날 세계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끝없는 정치적, 군사적 긴장과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중동 지역 분쟁은 국제사회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십 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은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북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고, 정치권은 국민들의 삶에는 관심없이 정쟁만 일삼고 있으며, 경제는 침체되고 사회적 불안 요소들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나라 전체가 양극화돼 계층과 성별, 연령에 따라 갈등과 긴장 속에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목교서들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신앙인들이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희년을 맞은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을 통해 스스로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이를 선포하기를 권고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특별히 지난 10월에 폐막된 세계주교시노드의 결실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시노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말이라 조용히 공원 산책이나 할까 싶어 나선 길, 저만치 앞에서 아저씨 한 분이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남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얼른 지나가려 했지만 티 나게 빨리 걸은 게 오히려 눈에 띄었던지 아저씨가 방향을 획 틀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세요. 불신지옥! 아시죠?” 아저씨는 계속 따라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지만 웬만해선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나 좀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가요. 이거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화를 꾹꾹 참으며 처음엔 점잖게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만 따라오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껌딱지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계속 말을 시켰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저씨 쪽으로 돌아서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면 진짜 천국 가요?” “그럼요. 천국 갑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저희에게...” “그러니까 언제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갑자기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잠시 주춤하는 아저씨. 그 틈을 노려 쐐기를 박았다. “그럼 전 죽기 하루 전부터 믿을게요. 언제든 상관없다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따라오지 마세요. 아셨죠?” “아니 그래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손에 전단지를 잔뜩 들고 서있는 아저씨를 바라봤다. 후줄근한 차림에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마른 얼굴. 언제든 천국이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치고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손에 들린 ‘불신지옥’ 종이를 받아주고 잠시 얘기라도 들어주면 될 일이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지만 여태 살면서 누구에게 성당을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해본 적 없다. 하물며 내 자식에게도 말이다. 첫째는 불교 쪽이 끌린다기에 그럼 절에 다니라 했고, 군대에 들어가 늘 배가 고팠던 둘째는 초코파이를 얻어먹기 위해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믿기 시작한 종교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고 불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는 건 일종의 협박이다. 그러므로 내가 좀 전에 한 행동은 ‘정당방위’라 볼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승에서 진심어린 용서를 받은 자는 저승에서 누군가가 다시 심판할 자격이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죽기 전에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거지, 실컷 죄짓고 살다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저 교회 목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전단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 추운 날, 사람들 내보내 고생시키지 말고 당신이나 부끄럽지 않게 사세요. 믿지 않아 지옥을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 아니겠어요? 올바른 종교는, 전단지 나눠주며 겁이나 주는 게 아니라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오늘 하루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구원 팔이나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라고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야산에 파묻힐 수 있으니, 일단은 안 하는 걸로. 아저씨는 불신지옥에 떨어질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노상 전도의 발걸음을 돌렸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따르지 않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공허한 헛소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망쳐놓지도 말고!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중단하지 않는 한 실패가 아니다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작품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열리는 사진전 ‘다른 오늘’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년 3월 2일까지.
지난 11월 3일 인천교구 풍무동본당 공동체는 충남 공주에 자리한 대전교구 황새바위 순교성지를 찾아 주일미사를 드렸습니다. 순교성지를 둘러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 얼마나 많은 이가 생명을 바쳐 투쟁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머리를 숙여 순교자들의 믿음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러한 순교 유적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너무나 귀중한 것으로, 이를 잘 돌봐 이웃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 관광객도 찾아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과정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평신도의 자발적인 신앙으로 한국교회가 시작된 이래 신자들이 교황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원하고 외국 선교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한국 땅을 찾아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하며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아 믿음의 폭을 더욱 넓히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번에 다녀온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지닌 귀한 보물을 좀 더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나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지’ 등은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이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도 무수한 사람들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는 성지를 중심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세계 방방곡곡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성지는 순교의 뼈아픈 역사가 바탕이 되었고, 이것은 귀한 신앙 유산입니다. 다만 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더구나 2027년에는 세계청년대회(WYD)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데 이는 좀 더 우리가 지닌 신앙 유산의 가치를 돋보이게 닦고 손질해서 새롭게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황새바위’라는 아름다운 성역을 중심으로 숨어있는 전설은 없는지, 이를 중심으로 있었던 소문은 없었는지 등 자세히 확인해 보고 이러한 내용을, 사진을 활용해 영상자료로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지를 중심으로 내려오는 순교 장면에 관한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처럼 엮어도 좋고 단순한 수필을 모은 것으로 해도 좋겠습니다. 가능한 대로 많은 사진을 곁들인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성지 소개와 성지가 있는 고장의 특이점 및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소개하면 누가 찾아와도 볼거리가 풍성해져 좋을 것입니다. 또한 이 같은 내용으로 모든 공주 시민을 대상으로 일종의 공모전을 열고 입상자에게는 상을 준다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입상작으로 책자를 만들어 널리 홍보하며 성지에서 판매한다면 외부에서 찾아온 사람들 또한 소중한 신앙 유산을 접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영어, 스페인어 또는 프랑스어로 번역해 판매해 외국인들이 와서 보게 되면 그 지역은 널리 알려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홍보 책자 작업은 지자체와도 협의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보물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보존하고 알려야 합니다. 글_조갑동 테오도시오(인천교구 김포 풍무동본당)
최근 몇 달 동안 보도된 뉴스의 젠더폭력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교제 중 폭력을 당하던 피해자가 살해당한 사건, 불법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받으며 온·오프라인의 성폭력을 당한 사건, 사진을 도용당하고 딥페이크 동영상 유포를 협박받고 금품을 갈취당한 사건 등이 있었다. 한 유명 여성 유튜버는 전 남자친구에게 불법촬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많은 돈을 갈취당했다고 고백했다. 다른 남성 유튜버들이 이 사실을 알고 피해자를 협박해 돈을 요구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존중과 배려를 기본적 예의로 생각하기보다 나의 이익, 욕망을 관철한다면 상대방의 피해는 상관없다는 태도가 팽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 부족은 가난, 연령, 성, 장애 등의 층위에서 주변화된 집단을 위한 복지나 정책을 특혜나 역차별로 해석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육, 고용 등 성평등에서 진보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과소대표성은 해결되지 않고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고나 여성혐오에 기초한 폭력에서 안전하지 않다. 젠더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공정성이나 독립, 동등한 주체로서 여성들에게 행동하라고 요구할 때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적 피해들은 사소화된다. 이러한 문화는 여성들이 피해를 자초했다고 비난하는 통념을 지지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이용하거나, 초범인 경우 처벌이 경감되는 것 또한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미국 코넬대 철학과 교수 케이트 만(Kate Manne)은 「다운걸: 여성혐오」에서 남성 가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동정심을 ‘힘퍼시’(Himpathy)로 명명한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이면에서 가해자를 연민하고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석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괴물이나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가해자의 상황에 대해 연민으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연민이 부족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 사회에는 피해자가 유혹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면서 피해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여성학 연구자 김보화는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 성폭력 피해에 관한 법적 처벌 규정을 만들어낼수록 가해자들이 악랄해지는 상황을 기술한다. 성범죄 이력은 열람되고 취업의 제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고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기도 한다. 여성단체에서는 성폭력 가해자의 기부금 계좌이체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이러한 기부는 가해자가 범죄에 대해 반성하는 자료로 악용되면서 형량을 낮추는 데에 도움이 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에도 가해자가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 개인이 응징하는 내용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심판하면서 공분을 가라앉히고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로한다. 하지만 사법체제가 부정의를 심판하지 않을 때 사적 처벌은 성찰의 부재로 권력이나 폭력의 남용을 낳을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분노와 용서」에서 피해자에게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도 용서를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한다. 또한 피해자와 가족이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이들의 분노나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지만 같은 범죄의 피해를 반복하는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한 사회가 피해자와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낌없이 위로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범죄, 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도록 예방 및 대처의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처벌을 위한 감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젠더폭력에 민감해질 때 여성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글_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지적장애를 지닌 자녀를 둔 부모와 인터뷰를 하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자녀를 돌보는 것 자체도 벅차고 힘든 일이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남겨진 자녀의 삶이 그보다 더 큰 마음의 짐이다. 누가 부모처럼 자녀들을 돌볼 수 있을까.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 취재로 만난 이원명(페르페투아) 씨도 분명 그 짐이, 그 멍에가 무거운 부모였다. 그러나 이 씨는 자신이 떠난 이후 자녀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예순을 넘은 그는 지적장애인 자녀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돌보고 있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씨는 자녀들로 인해 힘든 상황 중에 “기도를 하던 중 문득 ‘네 자녀이기 전에 내 자녀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며 “자녀들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하나만 알고 살아간다면 걱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의 믿음 어린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비단 장애를 지닌 자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지원하고자 의원연구단체를 구성한 김희영(루치아) 용인시의원도 인터뷰 중 “부모로서 아이들의 인생 전체를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부족함을 항상 느낀다”면서 “그래서 신앙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의원에게 세계청년대회도, 젊은이들에게 열린 성지도 우리 자녀들, 아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한 일이었다. 자녀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걱정을, 그리고 그 걱정 때문에 많은 일을 하고, 또 자녀에게 많은 일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예레 1,5)고 말씀하시듯, 우리 자녀는 우리가 낳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 속한 자녀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지난 11월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가 세 명의 국회의원과 함께 개최한 이 토론회에서는 국가인권위 권고 이행을 위해 법무부가 시행하고 있는 ‘장기체류 미등록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이하 구제대책)이 내년 3월 종료됨에 따라, 지난 4년간 운영한 해당 제도의 의미와 문제점, 향후 관련 제도 마련 시 고려해야 할 점들을 논의했다. 여러 발제들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이제는 청년이 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증언이었다. 다섯 명의 청년들 중 네 명은 구제대책으로 체류 자격을 얻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한 명은 새롭게 이주한 도시에서 전학갈 학교를 찾지 못해, 더 정확히는 학교마다 전학을 거부해 자격요건을 상실하면서 체류 자격을 얻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에 토론회 참석자들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 나왔다. 잠깐의 휴식 후 이어진 지정토론 시간에 법무부 이민조사과 사무관이 토론문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싶다고 해, 발제자와 토론자는 물론 참석자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나 역시 얼마 전 구제대책으로 체류 자격을 얻게 된 본당 이주민 신자의 사례를 소개하며, 지역 단위 외국인출입관리소 운영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본당 이주민 신자의 경우, 외국인출입관리소로부터 연락을 받아 다음날 방문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직장에 이야기를 해 겨우 오전 반차를 쓸 수 있었지만, 문제는 돈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구제대책에 따르면 부모 각각 미등록 체류기간에 따른 벌금을 내야 하는데, 70%를 감면해 주기는 하더라도 이주민들이 하루 만에 수백만 원에 이르는 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본당 이주민 신자의 경우 이 사실을 알려줘서 급히 본당 사회사목기금으로 지원을 하고 천천히 갚아 나가는 것으로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벌금을 마련하지 못해 체류자격을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문제는 법무부에 이 구제대책을 계속 이어나갈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참석한 법무부 사무관은 구제대책을 ‘악용’한 사례들이 너무나 많다며 내부적으로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더 크다고 밝혔다. 이대로 내년 3월 구제대책이 종료되면 3000명이 넘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언제 강제출국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래서 초‧중‧고 재학 중인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당사자들이 모여 ‘WE ARE ALL DREAMERS’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지난 11월 1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등록 이주아동을 포함한 모든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 안정적으로 체류할 권리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를 냈다. 회견문에서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은 ”구제대책은 미등록 이주아동의 안정적인 거주와 정책을 보장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교육 이수’라는 신청 대상 요건, 신청 시 부모님이 내야 하는 커다란 범칙금, 고등학교 졸업 이후 부모님은 출국하셔야 한다는 규정은 신청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며 “무엇보다 구제대책이 정해진 기간 동안만 이뤄지고 고교 졸업 이후 진로에 대해 대학 진학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는 점도 짚었다. “우리에게는 머무를 권리가 있습니다! 미래를 꿈꿀 권리가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회견문 말미의 구호에 참 마음이 아팠다. 선주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을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걱정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잘못됐다는 증거가 아닐까?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수원역 북스 리브로에 주문해 놓은 책을 찾아 나오는데 멀리 버스 정류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진 게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단속반이 나와 노숙인들을 거칠게 쫓아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빈 박스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누워있는 노숙인들이 모여있었고 어떨 땐,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앉아있기도 했다.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역한 냄새 때문인지 버스를 기다리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군가 민원을 넣어서인지 가끔 단속반에서 나와 실랑이가 붙곤 했다. 한참을 고성이 오가다 그들 중 한 남자가 갑자기 웃통을 훌떡 벗어 던지더니 경찰에게 맞섰다. “왜 왜 왜 우리가 왜!!!”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 단속반도 더 이상 강압적인 행동을 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웃통을 벗고 달려드는 아저씨와 경찰들 사이에 껴서 싸움을 말리던 노숙인 한 분이 갑자기 ‘왜왜왜 아저씨’의 뺨을 냅다 갈겼다. “정신 차려 새꺄!!!” 뺨을 맞은 아저씨의 눈이 벌게졌다. 계속 이렇게 맞서다가는 경찰서로 연행될지도 모르니 먼저 선수를 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르르 몰려있던 노숙인 중 한 명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박스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는 막걸리 통을 주웠고 내 곁에 서있던 할아버지는 분하다는 듯 버스 정류장 쇠기둥을 맨손으로 퉁퉁 쳐댔다.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수원역 지하도로 자리를 옮기거나 골목에 숨어서 단속반이 가기만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왜 왜 우리가 왜!”라고 부르짖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을 긁었다.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왜 우리가 여기서 쫓겨나야 하는지 말해 보란 말입니다!” 단속반도 거기에 서 있던 많은 사람도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민원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냄새나고 불쾌하니 당신들이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다고 말한다면 그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질문이 아닌 항변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노숙인도 이런 식으로 함부로 쫓아내고 몰아내선 안 되는 거라는. ‘함께 사는 사회, 더불어 행복한 사회’ 이런 아름다운 문구들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지만 우리는 과연 그런 것들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불편함을 감내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를 배려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며칠 전, 맨발로 찾아온 노숙인에게 신발을 사서 신겨 보낸 가게 주인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열심히 일해 신발값을 꼭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행 속에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본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이런 작은 배려와 따듯한 마음이 누군가를 살리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올해 제40회를 맞은 성서 주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 안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우리 삶과 신앙의 지침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다행히 예전에 비해 성경 필사나 성경 공부 모임 등 성경 말씀을 새기고자 하는 노력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려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배우고 익혀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과 함께 성경 속에 담겨 있다. 열심한 전례와 성사 참여, 다양한 사도직 활동, 이웃 사랑의 실천 등 신앙 생활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은사에 참여함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더 잘 배우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항상 필요하다. 나아가 성경을 다만 지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성경 말씀에 대한 막대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다. 특히 첨단 과학 기술이 집약된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 우리는 이전에는 많은 노고를 들여야 했던 성경 관련 정보와 지식들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읽고 기도하고 묵상함을 통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하느님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삶과 신앙, 사회와 세상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데 혼란을 겪곤 한다. 성경 속에 담긴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과 신앙생활의 밝은 빛이요 지혜의 원천이다. 성서 주간을 맞아 성경을 지혜의 보고로 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