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인들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 나누자

교회는 매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특히 고통스런 시간을 지낸 노인들을 위해 교회가 언제나 노인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이 날을 제정했다. 교황은 평신도 일원이자 동반자, 세대 간 연결 고리로서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인 노인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 왔다. 교황의 이러한 뜻은 올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황은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를 주제로 한 담화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이 들고 쇠약해졌을 때에도, 사회에서의 역할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덜 생산적이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위험이 있을 때에도 당신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이미 초고령화에 접어들었고, 우리 사회도 초고령화에 매우 근접해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목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정부교구의 요양 사목이 바로 한 예다. 전국 10만여 곳의 요양병원에서 사목자의 돌봄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바로 교회가 나서야 할 과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늙고 병든 노인들을 향해 눈을 감아버리는 세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느님의 한 자녀로 노인들에게 열린 마음과 기쁜 얼굴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태아 생명보호법 즉각 제정해야

최근 유튜브에 한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정부가 살인 혐의로 수사를 의뢰함에 따라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현행법상 이에 대한 처벌이 모호하다. 왜냐하면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의 혐의 역시 낙태죄가 아니라 살인죄다. 동영상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조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나타난 생명 의식의 심각한 훼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이에 따른 보건의료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2020년 말까지 관련 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4년이 가까워지도록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더 극심해져 드러난 낙태 건수만 해도 2019년 2만6985건에서 2020년 3만2063건으로 증가했다. 낙태가 대개 은밀하게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법이 인간 생명, 특히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의 생명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낙태 과정을 볼거리로 제공하는 심각한 윤리의식의 퇴행을 보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면서, 태아 생명을 보호하는 관련 법 제정에 즉각 나서야 한다.

방주의 창

연령과 사랑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이 늘어나고 연상연하 커플도 늘어나는 추세다. 또한 이들의 나이 차는 열 살을 넘어 스무 살 이상인 경우도 있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고 나이로 인한 현실의 장벽은 낮아진다. 두 사람이 사랑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이 아동, 청소년, 성인과의 사랑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나이 어린 여성들은 가치 있고 예쁘다고 해석되거나, 좀 더 어린 여성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남성들은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유엔에서는 여성차별철폐조약에 따라 가입국의 경우 아동결혼을 금지하고 있지만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조혼이 관습으로 남아 있다. 부모들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아들을 중년 또는 노년의 남성과 결혼시킨다. 여아들의 인권유린적 현실과 더불어 부모들의 태도는 공분을 자아낸다. 하지만 딸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고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성규범과 함께 가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을 개인의 무지라고만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아들은 신체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고 임신, 출산을 하면서 건강이 악화하거나 사망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결혼생활은 존중받지 못하고 경제적, 연령의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불평등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 영화 ‘프리실라’(소피아 코폴라 감독, 2024)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아내이자 유일한 사랑이라는 프리실라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영화는 극 영화이지만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를 참조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프리실라는 중학생 때에 팬으로서 엘비스를 만났다. 그녀의 첫사랑은 결혼으로 맺어졌지만 이들의 관계는 낭만적이지 못하다. 친구들이 학업에 몰두하고 꿈을 갖고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보낼 때, 그녀는 우상이었던 엘비스의 구애를 받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믿고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의 외도와 폭력, 거짓말로 상처받고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곁을 떠난다. 이러한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은 그녀의 사랑이 그루밍 성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면서 길들이고 무력화시키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폭력은 존경과 신뢰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연령, 경제적, 지적으로 취약한 아동, 청소년과 심리적 유대를 형성한 후 성적 가해를 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기는커녕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루밍 성폭력은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자,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디지털 공간에서 성인 남성과 아동, 여성 청소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성폭력은 오프라인으로 연동되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여성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은 성인 남성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해석하면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어린 여성들을 선호하고 이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는 여성 청소년의 성적 피해와 고통을 간과해 왔다. N번방 사건 이후 여성 청소년의 위치를 고려해 만 13세 이상 16세 미만 청소년과 성인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규정이 마련됐다.(‘청소년성보호법’ 8조 2항 참조) 그러나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여성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한 구조를 인식하고 이들의 고통과 피해를 예방,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들의 인권이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적 처벌을 넘어서서 여성 청소년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거래하는 남성 중심 성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요구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7-28
현장에서

그래도 ‘하느님의 뜻’을 찾다

하얀 아쿠아슈즈에 진흙물이 들었다. 수해 현장을 취재하러 물이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을 들어갔을 때 흙범벅이 된 것이다. 2~3일간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 내린 비는 419mm. 이번 장마에 내린 폭우로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 안 흙바닥은 펄처럼 돼 카메라를 들고 잠깐 몇 걸음 내딛는 데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복구작업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바닥의 수박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직 덜 빠진 물과 진흙에 잠겨 뒹굴고 있었고, 토사가 범벅된 방울토마토 옆으로는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100년 이상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집들이 많다는 나바위성당 인근 마을. 수확을 불과 이틀 앞두고 내린 비로 1년 농사를 망쳤다는 한 농부는 지난해에 이은 물난리에 앞으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걱정했다. 일제 강점기 간척 사업으로 논밭으로 바뀐 땅 지표면이 금강보다 낮아 문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노후화된 배수 장비를 교체할 예정이고 배수장도 새로 짓고 있다지만 그래도 내년 농사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멍한 상태”라는 이 농부는 특별재난지역 선포와 후속 보상 수속 등 몇 개월은 손 놓고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번에 내린 비에 나바위성지도 피해를 입었다. 십자가의 길로 쏟아져 내린 화산의 토사와 부러진 나무들이 심각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좋은 뜻이 있겠다’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해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농부의 말을 한 번 더 묵상하게 되는 날이었다.

2024-07-28
사설

노인들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 나누자

교회는 매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특히 고통스런 시간을 지낸 노인들을 위해 교회가 언제나 노인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이 날을 제정했다. 교황은 평신도 일원이자 동반자, 세대 간 연결 고리로서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인 노인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 왔다. 교황의 이러한 뜻은 올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황은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를 주제로 한 담화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이 들고 쇠약해졌을 때에도, 사회에서의 역할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덜 생산적이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위험이 있을 때에도 당신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이미 초고령화에 접어들었고, 우리 사회도 초고령화에 매우 근접해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목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정부교구의 요양 사목이 바로 한 예다. 전국 10만여 곳의 요양병원에서 사목자의 돌봄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바로 교회가 나서야 할 과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늙고 병든 노인들을 향해 눈을 감아버리는 세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느님의 한 자녀로 노인들에게 열린 마음과 기쁜 얼굴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2024-07-28
사설

태아 생명보호법 즉각 제정해야

최근 유튜브에 한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정부가 살인 혐의로 수사를 의뢰함에 따라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현행법상 이에 대한 처벌이 모호하다. 왜냐하면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의 혐의 역시 낙태죄가 아니라 살인죄다. 동영상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조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나타난 생명 의식의 심각한 훼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이에 따른 보건의료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2020년 말까지 관련 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4년이 가까워지도록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더 극심해져 드러난 낙태 건수만 해도 2019년 2만6985건에서 2020년 3만2063건으로 증가했다. 낙태가 대개 은밀하게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법이 인간 생명, 특히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의 생명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낙태 과정을 볼거리로 제공하는 심각한 윤리의식의 퇴행을 보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면서, 태아 생명을 보호하는 관련 법 제정에 즉각 나서야 한다.

2024-07-28
독자마당

[독자마당] 나가사키의 새벽미사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에 일본 나가사키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성지순례를 간 일행 한 분이 일본 성당에서 새벽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신자 수가 적은 일본인데 평일에 새벽미사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물어물어 숙소 근처에 성당을 찾아봤는데, 마침 가려는 날에 그 성당에 새벽미사가 있었습니다. 일본어로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는 일본 신자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기도를 하는데 어떤 분들은 기도서도 보지 않고 그 긴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일본천주교회의 아침기도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아침기도는 분명 1장정도 분량의 길지 않은 기도문인데, 일본의 아침기도는 장장 20쪽이나 되는 긴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긴 기도보다 더 놀랐던 것은 나가사키대교구의 성당들은 매일 새벽미사를 봉헌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새벽미사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가사키대교구는 일본 안에서도 신자비율이 높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보다는 신자비율이 높지는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신부님들의 수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가사키에서 선교하시는 한국 신부님들도 계실 정도지요. 나가사키는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은 신자들이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교 집안이 많은 것이지요. 그 신자들이 매일 새벽에 미사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해 왔기 때문에 이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매일 새벽미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적더라도 새벽미사는 매일 봉헌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나가사키의 성당에 새벽미사가 있는지 찾아보면서 ‘우리나라보다 신자수가 적은 일본인데 평일에 새벽미사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신자의 많고 적음으로 신앙의 깊이를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최근 다시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새벽미사를 없앤 우리나라 본당들의 모습을 보면서입니다. 코로나19로 미사 참례자 수가 줄어들고, 특히 새벽미사 참례자가 많이 줄어들자 본당에서 평일 새벽미사를 없앤 것이었습니다. 주변 신자분들께도 들어보니 생각보다 평일 새벽미사를 줄인 본당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 신자분을 통해 들은 것이지만, 어떤 신부님은 평일 새벽미사를 줄인 것에 대해서 “신자들이 적어서 미사 할 맛도 안 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신부님들께서 미사를 주례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됩니다. 주님의 제사를 정성껏 봉헌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요. 그것도 새벽미사를 매일 집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나가사키에서 드렸던 새벽미사가 자꾸 떠오르고 맙니다. 한국 성당들에서 봉헌하는 새벽미사는 분명 일본 나가사키의 성당에서 봉헌했던 그 새벽미사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참례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글 _ 이 요셉

2024-07-28
일요한담

아기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 사랑

나는 9개월차 규영이 엄마다. 마흔이 넘어 결혼해 다들 노산이라며 걱정했지만, 다행히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자연임신이 되어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고 열심히 모유 수유 중인 ‘육아맘’이다. 신선한 모유를 제공하기 위해 직접 수유하고자 출산 후부터는 맘 놓고 외출 한번 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루하루 감사함 속에서 몸소 신앙을 느끼며 살고 있다. 사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런 감사함을 모른 채 불안함과 우울함이 앞섰다. 나이가 있어 임신이 어려울 테니 애초부터 시험관을 시작해 보라거나 임신 준비를 위해 한약을 먹어 보라는 등 주변에서 염려와 우려 섞인 말들 많이 해주신 터라 임신 준비를 1년 정도 잡아놓은 상태였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한약도 먹고 산전 검사도 하며 1년 동안 몸을 만들면 ‘임신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도 1년 동안 정리해놓으면 되겠다는 치밀한 계획까지 잡아놨었다. 다행히 좋은 드라마 두 편의 섭외가 들어왔고 드라마 촬영과 경성대 AI미디어학과 학과장을 하며 1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막 임신 준비를 시작할 무렵, 이미 임신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적 같은 기쁜 일인데도 불구하고 촬영 번복과 학교 휴직을 순식간에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언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는 앞날을 생각하니 그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내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흘렀다. 두통, 메스꺼움, 속쓰림, 부종, 당 등 임신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고생스런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잉태의 신비로움에 따른 신앙적 생각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내 몸에 콩알 하나가 생기더니, 갑자기 콩닥콩닥 심장이 만들어지고 혈관이 하나씩 이어져 몸통과 머리가, 그리고 팔다리가 뿅뿅 생겨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나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필요한 신체 일부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지면서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는지…. 이건 신이 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느님의 대단하심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는 더했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엄마 품에 안기면 포근함을 느끼고 잘 들리지도 않으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나면 울음을 그치는 모습은 그 어떤 마술쇼보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가서 하느님의 따스한 품을 느끼며 안정감을 찾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가 뭐길래….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도 나를 따르고 나를 의지하고 나를 제일로 생각해 주는 내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큰 감동이 밀려와 힘듦과 고통은 사라지고 울컥함만 남는다. 아직도 산후통이 있어 일어나서 첫발을 디딜 때마다 뼈가 아프고 아기를 안느라 팔목은 시큰하고 수유하느라 어깨는 말려있고 골반도 틀어져서 처녀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내 품에 안기면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난 하느님처럼 해준 것도 없는데, ‘내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행복해 할까’ 순간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왜 제 부탁 안 들어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하며, 내가 원하는 것만 쭉 늘어놓고 투정만 부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기가 나를 만날 때 해주듯이, 하느님을 만날 때 환한 웃음으로 좋음을 표현하고 함께 계셔주심에 감사하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7-28
방주의 창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교회가 요한 세례자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던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 한 공장에서는 참담한 죽음이 발생했다. 일차 리튬 전지 업체인 아리셀에서 이주노동자 18명을 포함 23명이 사망하는 중대재해 화재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직원이 아닌 인력 파견 업체 소속이었기에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위험한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이고 이번 참사 며칠 전에도 화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인 17명, 한국인 5명, 라오스인 1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화재 사고 열흘 뒤인 지난 7월 2일 오후 7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동이 열렸다. 추모행동 소식을 듣고 교구 이주민, 난민 활동가들과 함께 그 행사에 함께하기로 했다. 행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현수막 속 글귀였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말이 마음에 박혔다. 그들 모두 좀 더 나은 여건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날만을 위해 낯선 이곳에 온 것인데, 누군가의 무성의와 부주의와 안일함 때문에 이제는 영영 가족과 함께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경위나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참사 전에 일어났던 화재 때 제대로 된 안전 대책만 마련했다면, 아니, 노동자들에게 비상 탈출구 위치 및 탈출 방법 교육만 제대로 했더라면 스무 명이 넘는 귀한 생명이 사라지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로 마음을 채울 뿐이었다. 이런 유의 비극이 처음은 아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김군 사망사고(2016년),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사망사고(2018년), 평택항 이선호씨 사망사고(2021년) 등 몇 년마다 비극이 반복돼 일어나고 있다. 특히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과도한 하청 및 재하청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죽음의 외주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결국 ‘김용균 법’으로도 불리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법을 적용한 첫 판결 결과가 집행유예로 나오면서 실효성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 정권에서는 이 법이 기업의 사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개정할 뜻을 비추기도 하는 등,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번 참사는 이제 죽음이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국적 희생자 17명 중 대다수는 흔히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동포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재외동포 신분이기에 엄밀히 말해 이주민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대한민국이 아닌 국가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적자들이 기피하는 업종에 외주 인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상황이 타 국적의 이주민들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외려 언어 장벽이 없기 때문에 소위 ‘가성비 좋은 이주노동자’로 취급되고 있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총 812명이며, 그중 이주노동자는 85명으로 10.4%에 달했다. 올해 1분기 기준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자 비율은 11.2%(213명 중 24명)로 벌써 지난해 비율을 넘어섰다. 지난해 이주노동자 수가 총 92만3000명으로 전체 취업자 수(2841만6000명)의 3.2%를 넘겨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통계청의 발표를 고려할 때, 이런 유의 참사가 반복될 경우 희생되는 이주민의 수는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들의 외침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7-21
열린마당

[내 눈의 들보] 젊은이들이 없는 텅 빈 성당을 바라보며 -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들이 없는 텅 빈 성당을 바라볼 때면 여러 상념이 들곤 한다. 젊은이들을 성당으로 부르거나, 이탈하지 않게 하려는 많은 사목적 배려와 노력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군종교구에서 훈련병, 특기병, 기간병, 간부와 군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15년째 예비신자 교리교육 또는 교우 재교육을 해 오면서 느낀 소회를 바탕으로 몇 가지를 제언한다. 혹자는 요즘 청년들을 ‘파편화 개인주의, 실속과 향락만 찾는 세대’로 지칭하며 그들에게 ‘탈종교 현상’이 심각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군종교구 한밭성당 가까이에는 개신교 교회, 불교 법당이 나란히 붙어 있다. 훈련병의 경우, 주일 종교 시간에 개신교 교회에는 120명 넘게, 법당에는 80여 명이, 성당에는 20여 명이 참석한다. 15년 전, 필자가 군선교사 활동을 시작할 때와 비교해 보면, 개신교와 불교는 참석 인원에 큰 차이가 없는 반면, 성당 미사 참례 인원은 크게 감소했다. 왜 그럴까? 요즘 젊은이들은 기회균등과 불평등에 대한 사회질서의 변혁, 기후위기와 지속 가능한 미래 공동체, 공동선에도 관심이 많다. 엄연히 종교심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성당에만 적게 나오는 것일까? 드물게 미사의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껴 스스로 세례를 받겠다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은 미사가 지루하고 불편하며 종교 의식행사일 뿐, 자신들의 삶과 무관하다고 느낀다. 미사 전례에서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며 주님께 구원받는 체험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날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짐’이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복음의 기쁨」 49항) 프란치스코 교황이 10년 전 우리에게 던진 ‘새 포도주’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기복적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한 카페테리아 신앙, 주일이면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시계추 신앙, 즉 ‘헌 부대’에 머물고 있다. ‘해오던 대로’의 신앙에서 벗어나 충만한 은총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가 쇠락을 반전시켜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응당, 새 포도주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잖은 청년들은 자신들이 항상 교회 뒷전에서 찬밥 신세이고, 교회가 자신들의 문제에 귀 기울여 들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등을 돌린다고 말한다. 가르치고 요구하기보다 배우고 수용하는 자세, 길을 내어주고, 함께할 공간을 만드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제언을 하지는 못하는가? 자신들의 공간을 요구하지는 못하는가? 해 보기는 한 것인가?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떠나도 되지 않을까? 교회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스스로 찾아가는 젊은이들이 보고 싶다. 젊은이 여러분! 조금이라도 갖춘 뒤에 나눔도, 배려도, 희생도 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3%의 소금이 바닷물 전체를 짜게 하듯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교회 안에서 소금이 되라! 글 _ 백인기(요한 사도) 군선교사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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