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카리타스’라는 말처럼, 지난 50년간 한국 카리타스는 한국 사회와 세계 곳곳의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사랑과 나눔의 길을 걸어왔다. 1975년 ‘인성회’ 설립으로 시작한 한국 카리타스는 가난과 재난, 전쟁과 박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복음적 사랑을 실천해 왔다. 단순한 원조를 넘어, 연대와 회복을 통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이끌어온 여정이었다. 이 아름다운 사명의 뒤에는 조용히 손을 내민 수많은 후원자들과 독지가들이 있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나누며, 카리타스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그 덕분에 ‘받는 교회’로 출발했던 한국 교회는 이제 다른 나라의 아픔까지 품을 수 있는 ‘주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모든 여정은 결국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사람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고, 나눔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진리를 함께 증명해 왔다. 한국 카리타스의 50년은 단순히 한 기관의 역사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냈는지를 보여주는 ‘나눔의 역사’이다. 이제 다음 50년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낮은 곳으로, 더 외로운 이들에게 나아가는 용기야말로 참된 교회의 본질이며, 카리타스 정신의 핵심이다. 50년을 함께 걸어온 모든 이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한국 카리타스가 앞으로도 세상의 눈물이 머무는 곳에 가장 먼저 다가서는 사랑의 이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최근 부산에서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 3명이 함께 숨진 이유가 학업 스트레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입시와 학업 부담, 진로에 대한 고민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큰 압박감에 시달렸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5월 발표한 ‘2025년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2023년 청소년 자살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당 11.7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2위인 안전사고로 인한 청소년 사망자 수(3.2명)의 4배에 달해 2011년 이후 13년째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이 현행 교육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며 고도 경쟁 위주의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이번 사건을 청소년들이 처한 삶의 조건과, 학교·사회·국가가 함께 만들어 낸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했다. 굳이 전문적인 진단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 아이들과 그 친구들의 참담한 현실을 매일 눈으로 보고 있다. 더 이상 우리 청소년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아야 한다. 사실 문제는 교육제도와 학교 현장의 모순에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 전반의 문제이기에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정책으로 온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극도의 입시 경쟁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교육 제도와 학교 현장은 반드시 개선돼야 하며, 아이들의 정서적 건강을 돌보는 시스템과 안전망의 강화는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다.
2009년 2월 미국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서 침팬지가 사람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침팬지의 이름은 트레비스. 산드라 부부는 14년 전 아기 침팬지를 5만 달러(한화 약 6700만원 정도)에 샀다. 트레비스는 옷이 가득한 옷장을 가지고 있었고 식탁에서 밥을 먹었으며 열쇠로 문을 열 수도 있었고 간단한 컴퓨터 검색도 했다. 그는 유명해졌고 사랑받았고 각종 광고에도 출연했다. 트레비스가 사춘기가 되던 무렵, 나들이를 가고 있던 트레비스는 옆 차의 아이들이 던진 코카콜라 캔에 맞았는데 그는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어내려 그 아이들이 탄 차를 공격했으며 그 차가 도망치자 다른 차들도 공격, 순식간에 스탬퍼드 시내를 혼란시켰다. 경찰들이 출동했고, 이미 코카콜라 광고에도 출연한 이력이 있는 트레비스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달래 차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 이후 당국은 트레비스에게 공공장소 출입 금지령을 내린다. 부부는 넓은 그들의 정원에 트레비스 우리를 마련했고, 놀이 시설을 설치해 주었다. 그러나 트레비스는 점점 더 포악해져갔고, 부부 중 남편이 먼저 죽고 나자 산드라는 그를 통제하기가 버거워진다. 침팬지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인 그는 스트레스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친구 찰라 내쉬라는 여인이 트레비스의 보모로 고용된다. 찰라 역시 트레비스를 극진히 돌보았고 트레비스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드라는 찰라에게 급히 전화를 건다. 트레비스가 집안에서 난폭해졌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급히 집으로 달려온 찰라를 공격한 90킬로의 트레비스는 그녀의 두 손과 얼굴 자체를 다 찢어버렸다.(같은 체중의 경우 침팬지는 인간보다 1.5배의 힘을 가진다고 한다) 산드라는 경찰에 전화해 말한다. “총을 가지고 오세요. 그를 쏘세요!” 총에 맞은 트레비스는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그는 자신이 쓰던 침대 기둥을 붙들고 쓰러져 죽은 채 발견된다. 나는 성경 중에 창세기를 가장 좋아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묵상할 게 정말 많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뭐 하러 선악과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하셨을까’ 궁금했지만, 훗날 알게 되었다. 그건 ‘네가 피조물 인간임을 알라’는 메시지였다. 그걸 어긴 인간은 범죄자나 독재자가 되는데 이는 신이 되고 싶었던 원죄의 반복이라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이 ‘솔방울로 포탄을 만드시고’ 같은 이야기는 더 꺼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독재자는 엄청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 자신도 미치광이처럼 파괴되어 버린다. 인간인 그가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신처럼 군림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혹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하다. 침팬지의 본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우리 트레비스는 착해요, 사랑받았답니다’라는 안이한 생각이 몇 사람의 인생을 영영 망쳐버리고, 인간의 허영과 안이로 인해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은 살인 괴물로 변하고 말았다. 침팬지에게 총을 쥐여 주면 안 된다. ‘그는 착해요’라는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시어 자신이 인간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시편 9,20 참조)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권력자에게 반드시 견제가 필요한 이유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그때에는 어떤 선의도 아름다움도 다 괴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아,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파도 속에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다 Indonesia, 2013. 2004년, 쓰나미가 아체 주민 수십만 명을 쓸어갔을 때 가장 먼저 해일이 덮치고 가장 처참히 파괴된 울렐르 마을은 거대한 폐허의 무덤이었다. 당시 스물다섯 살 청년 사파핫은 바닷물 속에 홀로 손가락만 한 바까오 나무를 심고 있었다. “이 여린 바까오 나무가 지진 해일을 막아줄 순 없겠지만 자꾸 절망하려는 제 마음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릎을 꿇고 나무를 심던 그는 끝내 파도처럼 흐느꼈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가느란 바까오 나무가 파도 속에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사파핫은 오늘도 붉은 노을 속에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건 희망이 아니지 않느냐고, 파도는 끝이 없을지라도 나는 날마다 나무를 심어갈 거라고. 박노해 사진 에세이 「다른 길」 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중학교 학창 시절, 성당 인근에 있던 수도원 덕분에 신문물을 조금 빨리 접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온 수사님들이 선보이는 슬라이드는 그야말로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5원 내면 빌려주는 만화경을 손에 넣고, 이 막대를 내려 몇 컷 안 되는 만화 장면들을 신기하게 보고 또 보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5원짜리 만화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예수님 이야기를 성경 줄거리에 따라 철커덩 철커덩 기계 소리와 함께 빛나는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기계의 신기함에 더 마음이 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영화 상영을 한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둥근 휠이 짜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서 빛 속의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포터블 영사기는 마음에 콕하고 들어왔다. 미아리에 있는 바오로딸 수녀원에 가서 필름을 빌려오는 심부름을 도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어느 순간 빔프로젝러라는 것이 등장하고, 이제는 안경 같은 것을 눈에 쓰면 영상이 펼쳐지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이라는 것도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교내 백일장이 되면 원고지 몇 장을 준비해야 했다. 200자 원고지에 칸을 채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는데, 신학교에 오니 학교 마크가 찍힌 리포트지에 과제를 써서 제출하게 되었다. 이도 잠시, A4용지를 끼워 넣고 손가락이 아프게 찍어 대던 마라톤 타자기가 활약을 했다. 신학원 복도에 울려 퍼지는 ‘타닥 탁탁’ 소리는 리포트 제출 마감이 다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신학교 때 일찌감치 타자기를 손에 익힌 덕분에 군대에 가서는 행정병이라는 꽃보직도 맡을 수 있었다. 먹지를 세 장이나 끼워 타자를 하다보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지곤 했었다. 막상 제대하고 돌아온 신학교에서는 타자기는 사라지고 감광지에 사진처럼 찍혀 나오는 워드프로세서가 활약하고 있었다. 서품을 받고 첫 보좌 신부 때는 도트(Dot) 프린터가 강론을 뱉어냈고, 곧이어 새로운 컴퓨터와 프린터로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뒤로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타자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7~8년이라면, 스마트폰에서 태블릿으로의 발전은 불과 1~2년 사이였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문물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 익히던 것들이 이제는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것은, 세월이 빨리 덤비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든다. 카페며 식당에서 주문하려고 문 앞에 서 있고, 식탁마다 매달려 있는 무인 주문 시스템의 기세에 눌린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래서 포기한 것들도 꽤 된다. 쓰고 그리고 구성하는 다양한 앱을 사용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하고, 다들 잘한다는 PPT(피피티)도, 동영상을 편집하는 것도, 어린이도 한다는 유튜브 방송도 먼 산 너머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제 포기해야지’ 하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본의 세상은 내 주머니 속의 작은 알갱이라도 빼먹기 위해서 조금 더 사용하기 쉬운 문명의 이기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쫓아가야지 하다가도 시대에 뒤처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이용하지 못 하는 것도 있어서 “그래, 여기까지만!”이라며 또 한 걸음 가기도 한다. 따라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어정쩡함을 동년배끼리 서로 나누며 허탈함을 물리기도 하지만 ‘낀 세대’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을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외다’로 뽑았는데, 위안으로 삼기에는 어째 어색하기만 하다. 그 수많은 변화를 겪는 인간들의 호소에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주를 통하여 구원하실까?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완성하고 보니 꼬박 10년이 걸렸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 이야기다. ‘바람이 전하는 말’은 작곡가 김희갑의 인생과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이다. 김희갑, 1970년대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에서부터 양희은의 <하얀목련>, 혜은이의 <열정>, 김국환의 <타타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한 바로 그 작곡가다. 그뿐인가. 온 국민의 애창곡인 정지용 시인의 <향수>, 올해 3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도 그의 작품이다. 너무 많아 작곡자 본인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그의 작품 수는 약 3천 곡. 김희갑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6년 시작되었다. 칠순을 기념하는 헌정 음악회 ‘그대, 커다란 나무’를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리면서 공연의 작가로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노래가 모두 한 사람의 곡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 후 가끔 부부 동반으로 만나 맥주도 마시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이번엔 인품에 반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나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늘 편안한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연장자라 하여 가르치려 하거나 ‘대가’라 하여 다른 이를 낮추어 보지도 않았다. 2014년 봄, 다큐멘터리 창작자인 우리 부부는 카메라를 들었다. 공연이나 연주회, 가족 모임 등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촬영을 시작했다. 2016년 신사동의 ‘룰라톤’에서 인터뷰할 적만 해도 선생님은 기억력이 꽤 좋았다. 난청이 시작돼 큰 소리로 질문해야 했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다. 그러다 본격적인 촬영을 하려던 참에, 코로나19로 세상이 닫혔다. 선생님이 사시는 곳은 실버타운이라 더더욱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2021년 겨우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인터뷰했을 땐 이미 많은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한 터였고, 난청이 심해져 대화가 어려웠다. 대화가 어려워지면 선생님은 예전의 그 맑고 순진한 미소로 웃기만 하셨다. 1936년생인 선생님의 시간은 우리와 달랐다. 속수무책으로 푹푹 사라졌다. 이러다 영영 다큐멘터리가 완성되지 못하는가보다 싶어, 선생님과 함께한 음악과 시절을 말해 줄 주변 분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눈동자>를 구성지게 부르는 장사익, <타타타>로 인생이 바뀐 김국환, 지금도 <열정>으로 통하는 혜은이,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 20여 명의 가수들과 연주자들, 평론가들과 뮤지컬 음악 감독을 만났다. 만나서 인터뷰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혹여 선생님께 이 영화를 보여드리지 못하게 될까 싶어 편집 작업을 서둘렀다. 영화는 완성되어 지난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가톨릭영화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할 때까지도 선생님은 극장에 나오지 못하셨다. 선생님의 컨디션이 좋아지길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아 극장은 아니지만 계신 곳 가까운 곳에서 상영회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그날 영화를 보시며 아이처럼 활짝 웃으셨다. 영화 속 혜은이의 말처럼 대중음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또 위로’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노래가 있어서 한고비 한고비 잘 살아왔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가지만, 다행히 작곡가 ‘김희갑’이 남겨준 수많은 노래는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의 노래에 기대어 많은 날을 또 살아갈 것이다. 더 많은 이와 김희갑의 음악과 인생을 나누고 싶어 올가을 영화를 개봉하려고 한다. 11월이 될 것 같다. 여덟 번의 ‘일요한담’ 연재를 마치며 개봉 소식을 미리 전한다. 길고 지루할 여름, 애창곡들과 함께 잘 견디시고 가을에 극장에서 꼭 뵙기를!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내가 천주교에 귀의한 것은 1964년 8월 14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실 그 전에 하느님을 뵐 수 있었던 기회는 있었다. 6‧25전쟁을 피해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 갔을 때였다. 계산동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부모와 함께 셋방살이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어령칙하다. 큰길가에 있는 개신교 건물 건너 골목길에 들어서면 계산동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있는 가톨릭 주교좌성당 앞을 늘 지나쳤다. 높다란 첨탑 가운데 십자가가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쳤다. 부모님도 가톨릭교회와 인연이 없었다. 하느님을 만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강원도 주문진에 이사 와서였다. 동네 여자 친구가 인도하여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벌써 62년 전의 일이다. 주문진본당에 교적을 두고 5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지금은 강릉 임당동본당에 적을 두고 있다. 주문진본당에서는 두 번의 사목회장을 역임했다. 첫 번째는 31살 때였다. 본당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나섰다. 헌금에 10원짜리 동전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성당은 가난했다. 작은형제회 소속 스페인 신부들은 교무금과 주일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에서 들여온 헌 옷가지를 비롯해 식용유와 우윳가루 등 구호물자를 지원받아 나누어 주었다. 그때만 해도 ‘밀가루 신자’가 많았다.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낯선 땅 한국에 입국한 신부들은 일선 사목 경험이 없었다. 나는 본당 신부와 함께 수개월에 걸쳐 신자 가정을 방문했다. 가정방문을 끝내고 맞춤형 사목활동을 했다. 우선 본당 구역을 12개 지역으로 나눠 반을 조직하고 베드로회 등 12사도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매월 대화의 장인 ‘반회’를 개최했다. 친목을 도모하고 성당 사정을 알게 했다. 모임에는 본당 신부, 회장, 사목위원들이 참여했다. 저절로 자립의 기초를 다졌다. 오늘날 구역회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어려운 처지의 신자에게는 취업을 알선했다. 이때의 활동을 ‘우리는 이렇게 일한다’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에 기고하여 1977년 6월 12일, 19일, 26일 3회 연재되었다. 두 번째 사목회장은 본당이 침체의 늪에 빠져 어려울 때였다. 내 나이 38세였다. 냉담자는 늘어가는 데 비해 입교자는 적었다. 성당이 노후되도 개‧보수는 엄두도 못 냈다. 공교롭게도 화재가 발생해 사제관이 몽땅 타 버렸다. 주일학교를 사제관에서 했는데 고물 미제난로가 과열로 삽시간에 천정에 불이 옮겨붙어 전소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난감했다. 교회 재정 형편으로 수천만 원의 재원 마련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장 본당 신부가 거처할 곳이 없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이었다. 하느님께 매달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자들이 십시일반 거들었다.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영공사 체제로 공사를 했다. 하지만 공사비는 부족했다. 70%밖에 조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춘천교구장 박 토마 주교에게 읍소했다. 마침내 교구의 지원으로 동해 일출이 보이는 훌륭한 사제관이 건립됐다. 애초에 하느님과 연을 맺게 해준 소화 데레사와 주문진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고 부부가 되었다. 슬하에 4남매를 낳아 9명의 손주를 두었다. 이 모두 하느님의 가없는 은총의 덕분이다. 어느덧 산수(傘壽)가 되었다. 세상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회개하는 삶이다. 나의 인생, 하느님을 만난 것은 최대의 수확이자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글 _ 정인수 아우구스티노(춘천교구 임당동본당)
흔히 ‘끊임없이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의미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말만 보면 우공이 산을 옮긴 것 같지만, ‘우공이산’의 유래가 된 「열자」를 보면, 산을 옮긴 건 우공이 아니다. 우공이 산을 옮기기로 하자 가족들이 함께했고, 이웃도 동참했다. 1년이 지나자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우공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남아있고, 또 그 자자손손이 있으나, 산은 증가하지 않으니 걱정 없다”며 자신의 희망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확신했다. 여기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했다. 우공의 말을 전해 듣고 그 정성에 감명한 하느님이 산을 옮겨준 것이다. 산을 옮긴 건 하느님이었다. 매주 토요일, 500번을 이어온 의정부교구의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토요기도회에서 이런 ‘우공의 희망’을 느꼈다. 토요기도회는 남북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끊임없이 평화를 희망하며 열렸다. 6월 21일 열린 500차 토요기도회에는 마치 우공이 가족과 이웃과 함께했듯 기존에 오던 이들에 더 많은 이가 함께해 예상 참가자 수의 세 배가 넘는 1000여 명이 모여 기도했다. 손희송 주교는 이날 강론에서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렸다”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한반도 평화도, 세계 평화도, 나아가 공동의 집 지구 생태계의 평화도,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도저히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공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기에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
2003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 최초로 공휴일에서 제외된 날이었다. 출근했던 고정원 씨는 저녁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던 것. 한참 후 범인이 밝혀지는데 그는 유영철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그는 문득 죽기 전 아내가 “우리 함께 성당에 갑시다” 했던 제안을 떠올렸고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고 루치아노가 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허무하고 다친 마음은 위로받지 못했다. 그는 유영철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본 후, 이제 그 자신이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날마다 한강 다리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것은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 강물을 내려다보고 하염없이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지 말고 용서해 보지 그래, 죽을 용기가 있다면 까짓거 못 할 것도 없잖아. ”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아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천사의 목소리라고 회상했다. 그는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유영철을 용서하기로 하고 법무부에 탄원서를 내고 유영철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를 양자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유영철의 아이들도 돌봐주겠다고 덧붙인다. 유영철도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고, 그는 한번 면회하러 가겠다고 했다. 내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를 알게 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심이 사람들에게 감동만 주었다고 믿는 분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는 미쳤다’고 말하는 딸들과 오래 불화했고 후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맹비난에 직면한다. - 가톨릭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려고 구치소 봉사단에 참가하고 있던 때였다. 가톨릭 교정사목위원회는 이 외에도 피해자 구제 모임 ‘해밀’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정사목위원회는 유영철과 고정원 형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한편, 내가 만나고 있는 일반 사형수들과 해밀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주선했는데, 유영철은 끝내 그 만남을 거부했다. 도저히, 자기가 죽인 살인자 피해자의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그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걸까? ‘글쎄’ 싶었는데, 나중에 일반 피해자 가족을 만난 우리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형수들 또한 자신이 직접 가해한 사람이 아닌데도 일반 피해자 가족과 만남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자신의 범행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만남이 있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식은땀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밀양>의 그 위대한 문제 제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나는 인간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만나 그렇게 뻔뻔하게 ‘나는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했다고 해도 취재 중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살인마 사이코패스 유영철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닮은 사람들을 만들자" 하는 창세기를 떠올렸으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현인 양심“이라는 구절을 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주의 기도’, 예수님 친히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기도문에서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단 하나, 그게 아마도 ‘용서’이니 용서는 죽음마저도 이겨낼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드디어 처가에 왔다!” 제주도 서귀포 정난주 마리아 묘지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말했다. 황사영순교순례지 담당 민형기(안셀모) 신부다. 일행이 거들었다. “1801년에 헤어졌던 부부가 이백 년 만에 다시 만났네요.” 황사영(알렉시오)은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려다 발각돼 능지처참형을 당했고 아내 정난주와 아들 황경한은 제주의 관비로 유배당했다. 아들까지 관비로 살게 할 수 없었던 정난주는 추자도에 두 살배기 젖먹이 아들을 떼어놓는다. 37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모범을 보였고 ‘한양 할망’이라며 칭송을 받았던 정난주. 그래설까. 증거자 정난주의 묘는 일찍이 성지로 조성되었고 이름을 딴 순례길과 성당도 있다. 반면 순교자 황사영은 1980년에야 묘를 발견했으며 의정부교구가 성역화를 시작하는 단계다. 입구조차 찾기 힘든 황사영 묘와 다르게 정난주 묘는 공원처럼 잘 정비돼 있다. 진입로에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커다란 십자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모습은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성지에서 미사를 드린 후 모슬포성당까지 약 4km를 걸었다. 제주교구 순례길 중 고통의 길이라 불리는 ‘정난주길’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훈련장과 4·3 사건 때 주민을 가두었던 고구마 저장창고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도 만났다. 순교지를 순례하는 것은 고통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정이다. 가뜩이나 고달픈 인생인데 일부러 순교지를 찾아가 선조들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 가면 희망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순교는 희망을 가장 설득력 있게 증언하는 사건이다. 정난주는 낯선 유배지에서 선행과 친절을 베풀며 신앙의 씨앗을 심었다. 지난한 삶을, 주님을 뵈러 가는 관문으로 알고 희망 속에 살았다. 그러자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주에 복음화의 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난 어느 봄날 그 빛을 되새기는 여정에도 하느님 사랑이 가득했다. 제주에서 만난 따뜻한 마음마다 우정과 환대가 빛나고 있던 것이다. 제주교구 평협 임원들에게, 방문객과 동행하는 이 시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보였다.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나,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안달하질 않나. 3일 여정이 끝나고 공항에서 헤어지는데, 꼭 친정 식구들과 이별하는 것처럼 서운했다. 9월에 의정부교구 황사영 순교순례지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없다면 발걸음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삶이 고단하다 느껴질 때면 나는 친정과도 같은 제주를 떠올릴 테다. 교우들과의 만남과 순례지의 추억 안에서 기어이 희망을 건져 올릴 것이다. 그렇게 친정을 하나둘 늘려가는 것도 좋겠다. 제주에는 ‘한양할망’ 정난주가, 의정부에는 ‘신앙만이 세상을 구하는 약’이라 믿은 황사영이 있다. 그들을 만나러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는 희망이 우리 안에 있다. 글 _ 정신후 블라시아(작가·의정부교구 파주 목동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