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부활의 빛으로 전쟁의 어둠을 걷어내자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 후 첫 주님 부활 대축일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메시지에서 전 세계에 평화가 자리하기를 호소했다. “무기를 가진 이들은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은 평화를 선택하십시오. 강요된 평화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평화를 선택하십시오.” 부활은 단순히 기쁨의 축제가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폭력과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방식, 곧 평화의 근원을 드러낸다. 교황이 강조했듯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힘은 완전히 비폭력적”이며, 그 평화는 무기의 침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평화를 향한 초대이며, 전쟁의 논리를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이다. 오늘날 세계는 그 초대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을 비롯한 곳곳의 전쟁은 계속되고, 수많은 이가 고통 속에 놓여 있다. 비극의 이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무관심의 세계화’가 자리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뎌진 마음과 방관은 전쟁을 지속시키고 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이 무관심을 넘어서는 데서 드러난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할 삶이며,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으로 구체화된다. 타인의 아픔에 응답하는 작은 연대가 곧 부활 신앙의 증거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는 강요된 질서가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세계의 위정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를 선택할 때, 그리고 우리가 무관심을 넘어 연대로 나아갈 때, 비로소 전쟁의 어둠은 걷히기 시작할 것이다. 부활 시기, 우리 모두가 평화의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서울 WYD 준비의 전환점 되길

국회가 최근 ‘국제문화행사 지원에 관한 법률안’(국제문화행사 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준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제체육행사와 달리 국제문화행사를 체계적으로 지원할 법적 근거가 부족해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는 데 제도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법률 제정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행사 기반 시설 조성, 안전·의료 지원, 출입국 절차 간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 WYD는 단순한 문화행사를 넘어 전 세계 청년들이 한국을 찾는 초대형 국제행사이며, 교회와 국가가 함께 준비해야 하는 행사다. 특히 수십만에서 백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모이는 만큼 안전, 숙박, 교통, 자원봉사 운영 등 준비해야 할 과제가 매우 많다. 이번 법률 통과는 이러한 준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통과만으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다. 공공시설 이용, 교육시설 활용, 안전과 경호 체계 마련 등 여전히 추가적인 제도 정비와 행정적 협력이 필요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회와 시민사회가 함께 협력해 남은 과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다행히도 가톨릭신자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2027 서울 WYD 국회 추진단’이 발족하는 등 서울 WYD를 위해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 교회의 협력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서울 WYD는 한국교회만의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 청년들을 맞이하는 국가적 행사다.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통과를 계기로 더욱 안전하고 원활한 대회 준비와 운영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살리는 말 한 마디

사는 동안 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봄꽃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볕 좋은 곳의 개나리는 벌써 노랑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려 하고 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연구하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난겨울이 예년보다 추웠기 때문에 올봄 벚꽃의 휴면 해제 시기가 빨라진 거라고 하네요. 겨울엔 겨울나무처럼 단단하게 안으로 응집하는 힘을 키우려 기도했는데, 봄이 되니 수줍게 피어나 어느 순간 화르르 주위를 밝히는 봄꽃이 되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붓글씨 쓰시던 책상 위, 종이 뭉치 속에서 발견한 글귀입니다. 주로 한자로 붓글씨를 쓰셨기에 아버지 붓글씨 작품을 알아보려면 얇은 한문 지식으로 늘 더듬더듬 읽어야 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사는 동안 꽃처럼’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엄격하고 단아한 서체를 즐겨 쓰셨는데 이 문구는 캘리그라피를 하듯 꽃처럼 날아가게 쓰셨네요. 서예대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표구한 작품이 서재에 하나 걸려 있는 걸 제외하고는 아버지 쓰신 글씨는 이렇게 종이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숨결처럼 쓰다듬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처음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붓글씨 덕분에 이 봄 매일 새기며 생각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DMZ세계문학페스타’라는 행사에 참여해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요.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흘람 브샤라트는 어렵게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기적처럼 죽음을 건너온 사람이 환하게 꽃처럼 웃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이웃의 가족이 명절에 입을 옷을 사러 가다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살해되었다고 해요. 뉴스를 들어도 남의 일처럼 실감 나지 않던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으며, 도라산 전망대에서 가까운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감합니다. 평화는 매일 한 걸음씩이라도 더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꽃처럼. 성경에서 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자주 비유되는데, 저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자주 새깁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8) 솔로몬왕의 영광도 이 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라는 뜻이겠지요. 하나인 세상이 분열하고 나뉘어 서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불안이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이때, 평소 별생각 없이 쓰던 기름이, 원재료들이 모두 유한한 자원임을, 우리가 그동안 기적처럼 서로 돕고 나누며 이어왔음을 뒤늦게 실감합니다.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무 불안 없이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봅니다. 부는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질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피어 있는 꽃. 곧 사라질 영광이 이 찰나의 시간에 기입됩니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각자의 고투로 바쁘고 힘들지만, 사는 동안 꽃처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슬픔,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간직한 꽃들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오늘, 주님 부활하신 빛과 함께 흐르는 이 시간, 그대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일요한담

놀라운 신비

4월이 되면 제주는 참 바쁘다. 봄 여행도 봄 여행이지만 부활 시기 많은 본당에서 ‘엠마오’로 제주를 방문하신다. 성지를 돌아보기도 하고, 봄꽃 가득한 곳을 찾기도 하고, 맛있고 풍경 좋은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끔은 “제주에 살고 계시니 좋으시겠어요?” 하며 뭐가 좋은지 묻는 분들도 있다. 이곳에 머물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좋은 점을 적어본다면, 첫 번째로는 자연이다. 매일 아침 보는 나무와 하늘이 같은 모습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난 창조주를 미술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머무는 서귀포의 가톨릭청년머뭄터 ‘혼숨’에서 보는 한라산은 하루하루가 다르고, 바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차에서 내려 바라보는 밤하늘은 늘 맑고 초롱초롱한 별들이 수고했다고 웃어준다. 두 번째로는 겉모습으로 판단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흙먼지 가득한 바지를 입고 다니더라도, 아주 오래된 차를 몰고 다닌다 하더라도 이곳 제주에서의 편견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사실 그런 분 대다수는 넓은 감귤밭이나 땅을 갖고 있다. 세 번째로는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는다. 혼숨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옆집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담이 낮다. 가끔 정원을 정리하느라 장비를 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상황이 되어도, 차량에 물건을 실어 놓고 문을 잠그지 않더라도 물건을 집어 가거나 훔쳐 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표현을 안 할 뿐 관심도 많다. 물론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도 많지만 이곳에 있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폐쇄적인 관계가 힘들 때가 있고, 오늘 말과 내일 말이 다르기도 해서 당황하기도 하고, 운전 문화도 달라 가끔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저 사람 왜 저럴까” 의심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4월이 되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4·3.’ 아직도 정확한 용어 정리도 되어 있지 못할 만큼 아픈 단어다. 제주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조선시대 200년이 넘도록 제주 사람은 육지에 가지 못하게 한 ‘출륙 금지령’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이처럼 아프고 힘든 시간이 많은 곳이다 보니 사람을 믿지 못하고, 웃음이 사라진 삶을 사는 분들도 있다. 그런 제주를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서울 할망’이라고도 불리는 정난주(마리아) 선조는 대정현에서 관비(官婢)로 유배 생활을 했지만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차귀도라는 곳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조난을 당하는 바람에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된 은총의 장소가 됐다. 또 제주교구 유일한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을 통해 제주도에 신앙의 씨앗을 맺게 하셨으니, 세상은 보잘것없고 가난한 곳을 외면할지라도 주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며 놀라운 신비를 보여 주신 곳이 제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_ 박우곤 알렉시우스(가톨릭청년머뭄터 혼숨지기, 안드레아여행사 성지순례 프로그램 담당)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지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중 수난 복음을 들으며 제 마음은 여느 해처럼 2000여 년 전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유다 지방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한 군중이 되어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 앞 광장에 서 있었습니다. 저 멀리 빌라도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빌라도는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어떻게 하기를 바라느냐?” 우리는 외쳐야 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입니다. 혹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더 크게 외쳐야 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십자가에 못 박으……” 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요. 어찌 보면 미사 전례 안의 한 장면일 뿐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차마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흉악범 바라빠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듭 소리쳐야 했습니다. 간신히 눈물은 삼켰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우리가 군중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 눈물과 무거움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용히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어리석고 완고한 군중의 모습 안에 저 자신도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마음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죄마저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개의 마음으로 봉헌하는 작은 기도까지 받아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곧 평화를 되찾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아버지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죄짓는 일뿐임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저에게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당신 성심에 찬미를 드립니다.” 얼마 전 읽은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에서 배운 기도도 함께 바쳤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시어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며 제가 다시 확인한 진리는 분명합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수난하셨다가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수난을 보시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성가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되뇌며 다시 주님께 마음을 봉헌합니다. “죄 많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오 주여 이토록 돌보나이까.” 아멘. 글 _ 주현웅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화성 병점본당)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현장에서

오직 고통받는 신만이

“아내가 살던 마을은 군부의 공습·방화로 잿더미가 됐고, 처남은 불길을 피하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심장 질환 치료가 시급한 장인어른은 약도 못 구한 채 피난 다니고 계십니다. 군부는 제가 한국에서 시민군을 지지하는 걸 알고 본가를 급습해 형을 납치·고문했어요. 청년들은 강제 연행해 총알받이로 내몰고, 가족 등록부에 없는 사람은 시민군으로 몰아 박해하고 있습니다.” 3월 28일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별사랑이주민센터 수녀들의 이주민·난민 가정 방문에 동행하며 경기도 부천의 한 주택에서 만난 미얀마 난민 쿠알 응아이 망(37) 씨가 들려준 미얀마 내전의 참상이다. 수녀들 도움으로 난민 신청 등 할 수 있는 모든 싸움을 이어가는 부부의 품에는 4살과 15개월 된 두 아들이, 고향에서 일어나는 학살과 가족 앞에 드리운 죽음을 전혀 모르는 얼굴로 안겨 있었다. 미얀마 내전은 인도차이나의 먼 땅에서 6년째 진행 중인 참상을 넘어, 바로 우리 곁에 숨어 지내며,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숨을 쉬는 비극이었다. 어떤 간절한 기도만이 힘이 될까. 개신교 목회자인 쿠알 씨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치 독일에 저항하던 끝에 감옥에서 순교한 그는 「옥중서간」에서 “오직 고통받는 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남겼다.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 속에서 완결된 그 믿음은 이데올로기화한 신에 대한 맹신도, 죄책감 따위가 동기가 된 종교적 집착도 아니었다. 똑같이 고통받는 인간과 하느님이 서로의 짓무른 상처를 닦고, 구원을 주고 받는 관계를 넘어, 경계 없이 동화된 사랑이었다. 그 순간, 부천시 어느 주택에서 네 사람의 모습으로 내 앞에 숨 쉬고 계신 하느님을 발견했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3면
사설

부활의 빛으로 전쟁의 어둠을 걷어내자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 후 첫 주님 부활 대축일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메시지에서 전 세계에 평화가 자리하기를 호소했다. “무기를 가진 이들은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은 평화를 선택하십시오. 강요된 평화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평화를 선택하십시오.” 부활은 단순히 기쁨의 축제가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폭력과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방식, 곧 평화의 근원을 드러낸다. 교황이 강조했듯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힘은 완전히 비폭력적”이며, 그 평화는 무기의 침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평화를 향한 초대이며, 전쟁의 논리를 넘어서는 생명의 선언이다. 오늘날 세계는 그 초대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을 비롯한 곳곳의 전쟁은 계속되고, 수많은 이가 고통 속에 놓여 있다. 비극의 이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무관심의 세계화’가 자리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뎌진 마음과 방관은 전쟁을 지속시키고 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이 무관심을 넘어서는 데서 드러난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할 삶이며,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으로 구체화된다. 타인의 아픔에 응답하는 작은 연대가 곧 부활 신앙의 증거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는 강요된 질서가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세계의 위정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를 선택할 때, 그리고 우리가 무관심을 넘어 연대로 나아갈 때, 비로소 전쟁의 어둠은 걷히기 시작할 것이다. 부활 시기, 우리 모두가 평화의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3면
사설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서울 WYD 준비의 전환점 되길

국회가 최근 ‘국제문화행사 지원에 관한 법률안’(국제문화행사 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준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제체육행사와 달리 국제문화행사를 체계적으로 지원할 법적 근거가 부족해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는 데 제도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법률 제정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행사 기반 시설 조성, 안전·의료 지원, 출입국 절차 간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 WYD는 단순한 문화행사를 넘어 전 세계 청년들이 한국을 찾는 초대형 국제행사이며, 교회와 국가가 함께 준비해야 하는 행사다. 특히 수십만에서 백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모이는 만큼 안전, 숙박, 교통, 자원봉사 운영 등 준비해야 할 과제가 매우 많다. 이번 법률 통과는 이러한 준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통과만으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다. 공공시설 이용, 교육시설 활용, 안전과 경호 체계 마련 등 여전히 추가적인 제도 정비와 행정적 협력이 필요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회와 시민사회가 함께 협력해 남은 과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다행히도 가톨릭신자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2027 서울 WYD 국회 추진단’이 발족하는 등 서울 WYD를 위해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 교회의 협력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서울 WYD는 한국교회만의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 청년들을 맞이하는 국가적 행사다. 국제문화행사 지원법 통과를 계기로 더욱 안전하고 원활한 대회 준비와 운영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3면
방주의 창

수녀님의 마지막 미사

지난 1월, 재개발을 앞둔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에서 큰 화재가 났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200여 주민들이 한순간에 집을 잃었다. 23년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 이정숙(루치아) 수녀도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들의 공부방, 작고 초라한 방 한 칸이 전부인 수녀원도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 세월을 아이들을 돌보며 주민들과 밥을 나눴던 곳이다. 하루 250여 명 분의 식사를 준비했는데, 주방에 냉장고만 8대가 있었다. 그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이들을 위해 함께 일했던 분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수녀님의 헌신도 각별했다. 새벽 5시, 어느 빈집에서 시작된 불길이 솜과 비닐, 합판으로 지어진 판잣집들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보며 수녀님은 ‘그리스도의 몸’이 불타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이 마을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바글거리며 웃고 떠들던 어린이집과 노인들이 따뜻한 국 한 그릇에 잠시 시름을 잊던 공간이 화염에 싸여 사라지는 모습은 한 편의 거대한 수난곡이었다. 세상 끝으로 밀려나 금방이라도 사그라져 버릴 것 같았던 주민들과 함께 수녀님은 기쁨과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 폭력과 도박, 술에 절어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근심 가득한 말들은, 막상 돌멩이가 되어 다시 날아왔다. 이럴 때 수녀님을 견디게 한 힘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의 전례였다. 올해 부활 대축일 미사가 구룡마을 공동체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다. 부활 전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이 마지막 미사가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하나는, 말 그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기억이 될 것은 분명하다. 죽음 같은 현실을 생명의 활력으로 바꾸는 사랑의 역동 없이 여기서 견디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사로 대표되는 전례는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며, 살아가는 특권적인 장소다.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긴급하며, 필요한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이 사랑의 요구에 직면한다. 전례 공간은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더 나은 길을 찾고, 방향을 다시 가늠하는 곳이다. 전례의 공간 안에서 온 세상은 도전받고 새롭게 질서 잡힌다. 이미 우리 삶 자체가 전례적이어서, 단지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계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전례는 우리를 날마다 세상으로 보내는 환송식이다. 전례에 참여하며, 우리는 자신에 대한 걱정은 조금은 덜 하게 되고, 세상을 어떻게 잘 돌볼 수 있는지는 더 고민하게 된다. 전례는 아주 구체적이고 강력하다.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어느 가난한 이웃이 점심은 먹었는지,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머물 지붕은 있는지 염려한다. 자비송을 부를 때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고백한다.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섬기는 방식이며,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사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고 묻는다.(10권 6장)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인간, 사물, 사건에 참여하며, 우애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어지는 ‘사랑의 사건’에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다. 조금만 주의 기울여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랑의 사건이 넘친다.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곳에 화해의 말을 건네고,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함께하자는 작은 손을 건네는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건너가도록’ 도울 때, 그곳이 바로 부활의 현장이다. 루치아 수녀는 신당동 오래된 동네, 광희문 순교성지가 감싸고 있는 골목 한구석에 무료 밥집 ‘달그락’을 열어 그 사랑을 이어간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3면
현장에서

올해는 어떤 부활을 맞이했나요?

길었던 사순 시기가 끝나고 맞이한 주님 부활.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매년 단식, 절제, 희생을 실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올해는 조금 특별하게 사순을 보냈다. 사순 제2주일에 만난 수원교구 호매실동본당 청년들은 신자들의 망가진 묵주를 수리하며 사순 시기를 보냈다. 색이 바래고 줄이 끊어진 묵주는 생명이 다한 것으로 보였지만 청년들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청년들의 배려는 묵주 안에 켜켜이 쌓여있던 신자의 추억을 되살려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작은 비즈를 하나하나 꿰는 까다로운 작업에도 청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완성된 묵주를 받게 될 신자들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순 제5주일 수원교구 상현동본당 신자들은 빈 달걀에 생명을 불어넣는 알공예를 함께하며 부활을 준비했다. 작은 달걀에 그림을 오려 붙여야 하는 섬세한 작업. 눈이 침침해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 신자들은 몇 번이고 가위를 내려놨다 다시 들어가며 3시간 만에 알공예를 완성했다. “주임 신부님과 봉사자들이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신 프로그램인데 힘들어도 열심히 해봐야죠.”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자들은 완벽한 작품의 완성보다는 그곳에 함께한 사람들을 위해 그 시간을 값지게 보내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호매실동본당은 망가진 묵주를, 상현동본당은 속이 빈 달걀을 쓸모 있게 만드는 작업을 교우들과 함께 완성하며 사순시기를 보냈다. 쓸모를 다한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에 ‘우리’가 더해지자 기쁨이 커졌다. 부활을 기다리는 설렘도 배가 됐다. 함께여서 더욱 행복했던 사람들을 만났던 사순시기. 그 끝에 마주한 올해 부활은 함께 기다리고 준비한 사람들 속에서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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