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인간도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 교리는 현대 지성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과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과거의 비합리적 관행이었던 ‘연좌제(連坐制)’가 폐지된 현대적 법 감정에서, 원조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논리는 시대착오적인 신화로 치부되기 쉽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인간을 교회의 권력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불순한 통제 도구’라고 비판하며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적 낙관론을 앞세웠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보편적 악, 즉 구조적 불평등과 환경 파괴, 그리고 집단적 광기는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재구성한 원죄론 원죄론이 가톨릭의 정통 교리로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어떤 사람들의 죄를 통해서 죽음이 들어왔고”(로마 5,12 참조)라는 말씀을 근거로 ‘유아 세례’라는 초대교회의 관습을 원죄의 실재를 증명하는 신학적 토대로 삼았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가 세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인격적 죄는 없을지라도 원초적 죄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며 당시 유행하던 펠라지우스의 낙관론에 맞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는 육체적 욕망과의 투쟁에서 좌절했던 그의 개인적 체험이 투영되어 있다. 그에게 원죄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헛된 의지로 창조주께 반항한 결과 발생한 무질서한 상태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의 실재를 선언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더욱 정교한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 재구성한다. 토마스는 원죄를 단순한 행위가 아닌 ‘본성적 습성(habitus naturalis)’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를 ‘본성의 질병’에 비유하여 설명하며, 원죄를 분석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있던 ‘본래의 의로움(iustitia originalis)’이라는 조화 구조를 상정한다.(I-II,82,1) 본래의 의로움은 세 단계의 위계적 질서를 갖는다. 첫째, 이성이 하느님께 복종하고, 둘째, 하위 능력인 욕구가 이성에 복종하며, 셋째,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는 상태이다. 원죄는 이 질서의 정점인 이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전체 조화가 붕괴된 상태이다. 즉, 하느님을 향한 질서가 사라짐으로써 내면의 욕망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이 원죄의 본질이다. 원죄의 구조적 분석에 이어, 이 부패가 어떻게 인류 전체에 전수되는지에 대한 전이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토마스는 인류 전체를, 아담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는 “인류는 한 몸의 많은 지체들”과 같다고 비유한다.(I-II,81,1) 그에 따르면, 원죄는 개별 인격의 죄가 아니라 ‘본성의 죄(peccatum naturae)’이기에, 자연적 출산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이된다. 그는 원죄가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 타락’임을 강조한다.(I-II,82,4) 아담이 인류 본성의 첫 기원이기에, 그가 훼손한 본성은 그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후손에게 결핍된 채로 전달된다. “우리 모두가 곧 아담이다”라는 명제는 인류가 맺고 있는 존재론적 유대를 의미하며, 각 개인이 자신의 근원적 죄성에 대해 책임을 공유함을 뜻한다. 원죄는 인류의 원초적 타락…비록 본성이 훼손됐다 해도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냐 ‘선’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면…하느님과의 관계 회복하고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 행복의 가능성 토마스는 인간 본성이 원죄로 인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위축된 것이라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한다.(I-II,85,2)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개신교적 ‘전적 타락론’에 대한 반론이 된다. 토마스에 따르면,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악의, 무지, 나약함, 탐욕이라는 ‘네 가지 상처’가 남았다. 이 상처들은 인간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겪는 내적 마찰과 저항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는 자연적으로 덕에 끌리는 힘이 감소하였고, 그 힘은 “죄 때문에 지속해서 감소한다.”(I-II,85,3)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덕으로 향하는 본성적 이끌림’과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특별한 은총 없이도 ‘집을 짓거나 포도나무를 심는’ 등의 자연적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본다.(I-II,109,2) 원죄로 인해 본성은 상처 입었으나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선을 인식하고 부분적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둔 토마스의 견해는 현대의 사회 구조적 악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원죄와 구조적 악 현대 신학은 원죄를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 재해석한다. 칸트의 ‘근본악’ 개념과 현대 신학자들의 관점은 원죄를 ‘사회악이 널리 퍼진 조건’ 속에서의 실존적 상황으로 설명한다. 아기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뒤틀린 세계의 선택들에 의해 방향 지어져 있다는 ‘인생 출발의 훼손’은 원죄의 현대적 형태이다. 이러한 “세상의 죄”(요한 1,29)의 관점은 구조적 악이 개인의 무지와 탐욕을 어떻게 증폭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원죄 교리는 인간의 ‘자력 구원’이라는 오만을 경계하고, 개인이 구조 내부에서 발현하는 악의 보편성을 인정하게 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결국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며, 초자연적인 회복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원죄 교리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 본성에 대한 폄하와 혐오가 아니라, 원초적 죄성과 상처의 정체를 직시함으로써 시작되는 ‘치유의 여정’을 제시하는 데 있다. 토마스가 논증하듯 인간 본성에는 여전히 선함이 존재하지만, ‘병자’와 같은 상태에 처한 인간은 치유하는 은총 없이는 초자연적 선은 물론 자연적 선조차 완벽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원죄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은총의 필연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사멸의 길에 놓였으나, 부활찬송에 나오는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는 역설처럼 이 결핍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다. 원죄 교리는 인간 실존의 어둠을 밝힘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빛과 은총의 신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참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이정표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죄와 벌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장애물인가?

사이비 종교 집단이 과도하게 ‘죄의식’을 이용해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죄 자체나 죄의식을 경감하려는 경향도 널리 퍼져 있다. 현대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죄를 실재하지 않는 심리적 위축으로 치부하거나, 오히려 죄를 ‘매력적인 벗’으로 여기며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인들은 대개 ‘안락’과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 행복을 찾으며 고통과 불편을 악(惡)으로 간주하여 회피한다. 이런 경향에 따라 많은 이가 죄란 실재하지 않거나, 설령 실재하더라도 그 결과가 별것 아니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강조하는 ‘죄(Peccatum)’와 ‘벌(Poena)’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 자율성을 침해하는 비이성적 권위의 압제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과 이에 따른 거부감이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심리적 욕구 충족에 따른 자아 긍정과 ‘무질서한 자기 사랑’의 대비 내면의 평안과 욕구의 충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심리학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는 ‘무질서한 자기 사랑(inordinatus amor sui)’을 모든 죄의 뿌리로 규정한다.(I-II,77,4) 이는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사랑의 서열이 뒤바뀐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올바른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보존하고 최고선인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세상의 선에 집착함으로써 불변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어리석음(愚)에 빠지고 만다. 현대인은 죄를 개인적 실수나 트라우마의 산물로 보며 자기 용서에 집중하는 반면, 토마스는 이를 이성의 규칙과 영원법에 대한 무질서로 규정한다. 무질서한 자기 사랑이 결국 본래적 자아를 포기하고 가변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과정임을 깨달을 때, 토마스의 엄격함은 인간 본성을 지키기 위한 경고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성적 본성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된 죄 토마스에게 죄는 외부 권력의 명령을 어긴 행위이기 이전에, 인간의 행복을 스스로 침해하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이다. 그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가변적인 선으로의 무질서한 전향’으로 정의한 바 있다.(I-II,84,1) 죄를 짓는 자는 이성이 사려 깊게 정한 목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내면의 무질서(chaos)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죄가 인간다움의 실현을 방해하는 비본성적 행위임을 입증한다. 죄를 경계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상대주의 윤리는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라며 책임을 외부 환경이나 운명으로 전가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죄의 원인을 무지, 정념, 혹은 악의(malitia)라는 내적 요인으로 세밀히 분석함으로써(I-II, qq.76-78), 인간이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을 역설한다. 즉,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 죄가 본성의 왜곡임을 이해할 때, 그에 따른 ‘벌’의 의미 또한 단순한 보복에서 질서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죄는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스스로의 존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벌은 파괴된 질서 다시 세우는 ‘환원’…하느님 은총으로 인간 본성 회복해야 이성적 성찰로 자신의 결여 직시할 때 진정한 행복과 평온함 되찾을 수 있어 응보를 넘어선 죄악의 치료와 질서 회복을 위한 벌 토마스에 따르면, 벌은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복수가 아니라, 파괴된 질서를 다시 세우는 ‘정의의 환원’이자 ‘죄악의 치료제(medicina culpae)’이다. 죄는 세 가지 질서 즉 개인의 이성,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 질서를 동시에 파괴한다. 죄의 결과로 수반되는 양심의 가책, 사회적 불명예, 신적 진노는 현대인에게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만, 이는 사실 파괴된 질서에 대한 본성적 경고이다.(I-II,87,1) 따라서 벌은 이 세 영역에서 정의를 재정립하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엄격한 응보와 처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유와 욕망을 존중하는 인간들을 죄책감의 노예로 만드는 체계처럼 느껴진다. 특히 정의를 일종의 공평함이나 비례로 보는 현대인들은 시간 안에서 저질러진 일시적인 죄에 대해 영원한 벌(poena aeterna, 영벌)이 부과된다는 점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낀다. 토마스는, 하느님이 그런 벌을 내리시는 것은 멸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정의의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영벌이 하느님의 강요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완고함’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I-II,87,3) 인간이 궁극 목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영구히 돌아서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기를 고집했기에 영원한 벌이 성립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벌을 ‘영원한 처벌의 벌(poena damni)’과 ‘유한한 감각의 벌(poena sensus)’로 정교하게 구분한다.(I-II,87,4) 또한 그는 죄의 경중을 생명 현상에 비유한다. 사죄(死罪, peccatum mortale)는 최종 목적으로부터의 회복 불가능한 전복(顚覆)으로서 ‘죽음’과 같으며,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는 질서의 방향은 유지하되 수단에 혼란이 생긴 ‘질병’과 같다. 벌은 이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의 질서를 정의로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I-II,89,2) 이렇게 벌의 치유적 성격을 이해하면, 인간은 은총을 통한 본성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 담론은 현대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왜곡된 본성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심리적 해부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본성의 손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치유된 본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관계적 회복이 필수적이다.(I-II,87,7) 이는 자기만의 힘으로 자아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대적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자신과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참된 행복은 죄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메커니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있으며, 벌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의 과정으로 수용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직시하고 책임질 때, 비로소 인간은 주관적 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평온함에 도달하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어떻게 신자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가?

사이비 종교와 이단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가운데 하나는 ‘죄의식’이다. “너는 죄인이다”, “지도자를 떠나면 멸망한다”는 메시지가 반복될 때, 추종자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고 결국 지도자의 말에 매달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전통적 종교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그 구조는 완전히 왜곡된 형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다루는 죄에 대한 성찰(I-II, qq.71–89)은 그들의 허구성을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자유로운 인격에서 조종당하는 객체로 전락한 피해자 토마스에게서 죄는 단순히 사회적 규범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해야 할 최고 규칙인 이성과 영원법(lex aeterna)에 대한 거부이자 ‘이성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I-II,71,6). 그런데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는 죄의 기준이 음험하게 바뀐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뜻, 성모님의 뜻, 성령의 인도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도자의 명령과 집단의 규칙이 절대 기준이 된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이를 어긴 모든 것을 불순종, 배교, 불신앙으로 낙인찍어 죄로 규정한다. 피해자는 조종자가 설정한 자의적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이성적 판단보다 조종자의 목소리를 더 신뢰하게 된다. 토마스는 죄가 ‘무질서한 자기 사랑’(I-II,77,4)에서 생긴다고 보면서, 그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둔다.(I-II,75,1) 죄는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된 결과이며, 따라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도 가능하다. 자유로운 인격이 이성의 질서를 일부러 거슬렀을 때, 비로소 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이비 집단은 신자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공포나 본능적 감정의 흔들림까지 죽을 죄, 즉 ‘사죄(死罪)’로 몰아세운다. 지도자는 “너는 본질적으로 형편없다”며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수치심을 주입하고, 피해자의 ‘상상력(imaginatio)’에 지옥과 파멸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피해자의 이성을 어둡게 만든다.(I-II,80,2)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는 이렇게 선택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심리 상태로 밀려난다. 그런데 추종자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동요를 사죄로 규정하여 ‘정서적 노예’로 만드는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의지가 이성에 의해 도출된 ‘선택된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의 자유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자기 권력 아래 묶어 두려는 지도자의 행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질서(영원법)에 대한 반역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중대한 죄이다. 왜곡된 죄의식 강요하는 사이비 집단…‘정서적 노예’ 만들며 인간 이성 파괴 분별력 있는 신앙만이 참된 행복의 길…성찰과 회개로 은총과 자유 되찾아야 죄의 이중 구조: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피조물로의 전향 토마스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aversio a Deo)”과 “피조물로의 무질서한 전향(conversio ad creaturam)”의 긴장 속에서 이해한다.(I-II,72,2) 죄는 단순히 어떤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궁극목표이신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한정된 선(쾌락, 부, 명예, 권력 등)으로 대체하는 내적 방향 전환이다. 사이비 종교의 구조를 이 틀로 읽어 보면, 한 가지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겉으로는 “하느님, 성모님”을 연호하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 지도자와 공동체에 고정시키는 구조가 형성된다. 사이비 지도자는 이성을 거스르는 자신의 명령을 ‘정의’로 둔갑시켜 피해자의 의지를 굴복시킨다. 이로써 피해자의 영혼은 하느님과 이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에 빠지며, 오직 가해자라는 피조물에 집착하는 전도된 지향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만든 지도자는, 토마스가 “모든 죄의 시작”(罪宗)이라고 부르는 교만(superbia)의 죄를 범하고 있다. 스스로를 다른 이의 최종 목적처럼 대하며,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상습적인 형태의 죄 속에 있는 존재다. 더 나아가 사이비 종교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영적 벌’과 ‘체벌’은 하느님의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I-II,q.87) 그것은 하느님 이름을 앞세운 사적 폭력이며, 오히려 그 폭력을 행사하는 측의 죄를 늘려 갈 뿐이다. 영구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은총 토마스에게서 중요한 결론은, 현세에서의 죄는 언제나 용서와 치유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는 “죄는 용서될 수 있다”(I-II,88,1)고 분명히 말하며, 하느님은 그분의 은총으로 죄를 씻어 주신다고 가르친다.(「신학요강」146) 죄의식은 회개와 고해, 은총의 수용을 통해 평화와 자유로 나아가는 길의 일부이지, 영원히 붙들려 있어야 할 쇠사슬이 아니다. 반대로 사이비 집단에서 죄의식은 의도적으로 끝없이 연장된다. “아직도 네 죄가 충분히 씻기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죄책감은 은총과 자유로 향하는 출구로 안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의존과 공포로 몰아넣는 회로 속에 갇힌다. 이것은 토마스가 말하는 죄–형벌–은총의 구조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죄는 심각한 악이지만, 그 목적론적 지평에는 어디까지나 은총과 회복, 최종 행복이 놓여 있다. 죄의식은 자신을 정죄하고 타인에게 예속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더 높은 선을 향해 나아가는 성찰의 기회여야 한다. 죄의식이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아니라, 영구적인 노예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죄의식이 아니다. 사이비 집단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주입한 거짓 죄의식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적 선인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복원해야 한다. 토마스가 통찰했듯,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를 억압하는 사슬이 아니라, 오히려 결여된 선을 회복하고 이성적 자유와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지, 아니면 더 깊이 어떤 한 인간이나 폐쇄적인 집단에게 예속시키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성적 분별력을 갖춘 건강한 신앙만이 인간을 정서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참된 행복의 길로 복귀시킬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령의 선물과 참된 행복(I-II, qq.68-70)

현대 사회는 정치, 이념, 세대, 젠더 등 다양한 층위에서 극심한 양극화와 분열을 겪고 있다. 특히 온라인의 정치적 공간에서는 상대를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특정 진영의 대표나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며 분노와 혐오를 쏟아낸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 주장하는 세상은 성공, 쾌락, 안락을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며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신다.(마태 5,3 이하 참조)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자비로운 사람들’ 또는 ‘온유한 사람들’, 더 나아가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진복팔단(眞福八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제1권 제68-70문을 통해 이러한 진정한 행복들이 인간의 단순한 노력을 넘어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통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실재하는 행복임을 역설한다. 오늘의 불안과 분열 속에서 신자들이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맛보는 길을 살펴보자. 본성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이끄심으로 인간은 이성의 판단과 주입된 덕(대신덕)을 통해 본성적인 목적에 도달하려 노력하지만, 자연본성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비록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신학적 덕, 즉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 주입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이라는 초자연적 목적을 향한 질서를 확립하는 데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대신덕은 우리 영혼을 직접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향해 정위시키는 시작일 뿐이다”라고 강조하며, 인간적인 이성의 숙고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함을 지적한다.(I-II,63,3,ad2)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의 선물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활동과 격려에 잘 따르도록 만드는 내적 준비이다.(I-II,68,2) 이는 우리가 단순히 자신의 의지로 고통을 견디거나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신비로운 충동(instinctus)을 온순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초자연적인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성령의 선물은 이성의 결함을 보완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으로 완성시킨다. 하느님 뜻 따르게 하는 ‘성령칠은’…인간 삶에 작용하며 참된 영혼 완성 덕행으로 얻는 성령의 열두 열매…신앙인이 추구하는 ‘진복팔단’과 연결 깊은 내면의 자유·평화 경험하며…분열된 세상 속 복음 살아낼 수 있어 영혼을 완성하는 성령칠은과 참된 사랑의 질서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인간의 인식 능력과 욕구 능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준비시킨다. 토마스는 이사야서 11장(2-3)에 따라, 사변 이성을 위해서는 통찰(깨달음, intellectus)과 지혜(슬기, sapientia)를, 실천 이성을 위해서는 의견(깨우침, consilium)과 지식(앎, scientia)을, 그리고 욕구 능력을 위해서는 용기(굳셈, fortitudo), 효경(공경, pietas), 경외(두려워함, timor)를 배치한다.(I-II,68,4) 특히 지혜의 선물에 대해 그는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키며, 마치 맛보는 것처럼 하느님을 아는 일종의 인식을 준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단순한 지식을 넘어선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임을 밝힌다.(II-II,45,2) 통찰은 신앙의 진리를 깊이 꿰뚫고, 의견은 실천적 분별을 돕는다. 굳셈은 두려움 속에서도 선을 지속하게 하고, 효경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공경을 불러일으키며, 주님을 경외함은 피조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을 떨쳐 버린다. 이러한 선물들은 모두 참된 사랑(caritas)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지식과 통찰의 선물은 고통을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바라보게 하며, 용기의 선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게 한다. 오랜 병간호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평화를 유지하며 ‘참된 사랑을 배우는 학교’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힘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선물들이 영혼 안에서 작용한 결과이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인간이 수행하면서도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하느님 나라의 열매와 행복 성령의 선물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토마스는 이를 “성령에 따라 행하는 행위들 가운데 특히 달콤한 기쁨을 동반하는 것들”로 정의한다.(I-II,70,1) 토마스는 성경(갈라 5,22-23; 묵시 22,2)을 토대로 (참)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온유, 성실, 신의, 절제(절도), 자제, 정결의 열두 열매를 열거한다. 열매는 단순히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덕행을 통해 얻게 되는 완성된 기쁨이며,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맛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I-II,70,2) 비록 궁극적인 완성은 내세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열매들은 신자가 여정 중에 경험하는 목적지의 안식과도 같다. 진복팔단 역시 미래에 대한 약속일뿐만 아니라 성령의 선물에 의해 형성된 행위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모습이다.(I-II,69,1) 토마스는 은총으로 시작되는 행복은 “완전한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참행복의 시초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현세의 삶 안에서도 지복직관의 시작 단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한다.(I-II,69,2) 토마스는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 안에 어떻게 싹트는지 설명하는 열쇠로 본다. 따라서 그는 각 진복을 특정 선물과 연결 짓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함의 선물로,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이다. ‘온유한 사람들’은 굳셈의 선물로, 분노를 이기고 부드러운 강인함을 드러낸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효경의 선물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돕는다. 가령 온라인 논쟁에서 상대를 적으로 보지 않고 형제자매로 대하며 온유함을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은 당장의 승리보다 더 깊은 내면의 자유와 평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공격보다는 자비를, 지배보다는 온유를 선택했을 때 맛보는 행복’이며,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구체적인 복음의 초대이다. 토마스의 성찰은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성령의 어느 선물을 통해 어떤 진복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일상을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수 있는 장소로 바꾼다. “성령님,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신앙·희망·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긴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을 울컥하게 했다. 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렸다. 치열한 성과 경쟁과 구조조정의 불안, 회사 정책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적 압박 속에서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 소문에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버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주인공 김 부장은 겉으로는 성공한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무엇이 정말 옳은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손에 잡은 듯했던, 자신의 성공을 놓치고 좌절하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진 능력과 강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對神德)’, 곧 신앙(fides), 희망(spes), 참사랑(caritas)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 성인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김 부장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해 줄 수 있을까? 자연적인 덕과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대신덕 토마스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 적합한 덕들과,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덕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토마스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들”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이 덕들을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향주덕(向主德) 또는 ‘신학적 덕’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덕들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I-II,62,1) 여기에는 지성에 있어서 ‘신앙’, 의지에 있어서 하느님을 향하는 ‘희망’ 그리고 그분과 일치하게 해주는 ‘참사랑’이 속한다.(I-II,62,3) 이 덕들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도덕적 덕)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입(注入)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신앙·희망·참사랑 뜻하는 ‘대신덕’…하느님이 신앙인에게 부여하는 은총 성공과 실패 앞에 항상 방황하며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직장인들 자만·절망 대신 신앙의 덕 갖추고 초자연적 행복 향한 여정 떠나길 ‘획득된 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사와 지상의 행복에 적합하게 만들어주지만, ‘주입된 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대신덕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대신덕으로서의 믿음(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 부장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진정한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인데, 이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참사랑이라는 다른 대신덕도 하느님의 결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대신덕을 통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 좌절했던 김 부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선 둘째 덕인 ‘희망’을 집중해서 살펴보자. 토마스는 희망을 자만(praesumptio)과 절망(desperatio) 사이의 중용이라고 분석한다.(I-II,64,4). 실제 직장 생활에서 이 중용을 찾기 어려운 것은 대기업 문화로 대표되는 경쟁 사회가 이 두 극단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의 김 부장처럼 승진에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내 능력과 인맥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중반 이후의 김 부장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 김 부장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으로 기울고 만다. 만일에 김 부장에게 희망의 덕이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이 “이 회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희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의 원천으로 사랑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덕은 성과주의와 번아웃 사이에서 김 부장이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최종 목적을 향한 긴 호흡을 제공한다. 신앙이 없는 김 부장들은 실적 압박과 보고서 조작의 유혹, 상사의 눈치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신앙이라는 덕을 갖추게 된다면, 사내의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고, 양심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김 부장은 팀을 위해 희생하고 부하 직원을 감싸는 모습에서 ‘좋은 상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팀원의 선과 공동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평판·이미지·승진이라면, 토마스의 기준에서 이는 “참되지만 불완전한 덕” 혹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일 뿐이다.(II-II,23,7). 그가 참사랑을 갖추게 된다면, 그의 모든 덕과 선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공동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맞게 재정렬하여, 팀 운영과 회사 정치 속에서도 타인을 수단이 아닌 친구이자 이웃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은 좌절하는 수많은 김 부장을 단지 ‘생존·승진·몰락’의 서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서, 대신덕 안에서 자연적인 덕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I-II,62,4; 63,3) 대신덕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현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를, 하느님과의 우정에 의해 통합된 인격의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힘으로 작용한다. 직장을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회사를 무대로, 신앙·희망·참사랑이라는 은총의 습성을 따라 자신의 직장 생활을 초자연적 행복을 향한 여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과도함도 부족함도 없는 중용을 통한 행복 추구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특히 미국 소비자 기술협회가 주관한 ‘2026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는 피지컬-AI를 대표하는 로봇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동작이나,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다양한 능력을 선보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개월간 벌어진 변화는 과거 한 세대가 겪었던 변혁에 맞먹는다. 기술이 예측을 추월했고, 투자 시장에 전례 없는 자금이 몰려들며, AI 혁명은 ‘가능성’에서 ‘현실’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이제 과도한 육체노동이나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AI를 통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행복’이 증대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곳곳에서 위태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많은 이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AI의 답변이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자주 빠진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더욱이 AI와 상담을 지속하던 학생은 그 충고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I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전력 수요 때문에 사라져가던 원자력발전소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특수가 버블이라는 의심도 나타나고, AI의 발전으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며, 범용지능(AGI), 초지능(ASI)까지 발전하면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찬성이나 반대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찾기 위한 덕을 ‘중용’이라고 불러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개념의 수용과 변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획득된 덕’에 적용되는 어떤 공통적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간’, 즉 중용(medium)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I-II,64,1) 도덕적 덕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습성’이며, 과도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습(vitium)이 발생한다.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지나치게 적어 무모해지는 것도, 지나치게 많아 비겁해지는 것도 모두 악습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과 대상, 행위자의 능력에 상응하는 ‘마땅한 정도의 두려움’을 지키는 것이 용기의 중용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이 중간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나 ‘미지근함’이 아니라, ‘이성의 중용(medium rationis)’을 의미한다. 무엇이 중용인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고 상황 판단력이 있는 ‘현명(prudentia)’의 덕을 가진 사람이 이 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들과 중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절제와 용기 같은 덕들은 정념의 내적 조절을 통해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규정되지만, 정의의 덕은 사물과 몫의 객관적 분배에서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갖는다. “정의 안에서 이성의 중용은, 정의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한에서, 사물들의 중용과 동일하다.”(I-II,64,2) 이처럼 토마스는 도덕적 덕의 중용을 정념 중심의 주관적 측면과 정의의 객관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여 정교하게 구분한다. 인공지능 혁명에 큰 기대감도 있지만 ‘기술에 지배당할 우려’ 두려움 확산 중용의 덕으로 올바른 이성·윤리적 성찰 균형 찾고 모두의 행복 증진 추구 해야 중용과 다른 덕들과의 연결 여기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의 궁극 판단 기준을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에 두는 점에서 그 이론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다. 그에 따라 ‘현명’이라는 덕은 단순히 근시안적 실용 이익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곧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개별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덕이다. 따라서 도덕적 덕의 중용을 판단하는 궁극 기준은 ‘어떤 것이 최종 목적의 달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현명’의 덕은 도덕적 덕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컨대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도덕적 덕 또한 현명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한 덕에서 완전한 중용을 이룰 수 있으려면, 다른 덕들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덕 개개의 균형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덕의 연결(connexio virtutum)’까지를 강조한다.(I-II,65,1) 지성적 덕으로 확대된 중용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먼저 지성적 덕의 경우, 토마스는 진리를 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성의 지나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긍정’이며, 부족함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부정’이다.(I-II,64,3) 그러므로 지성적 덕의 중용은 AI 시대에 종종 망각되고 있는 ‘사물 자체와의 정확한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단지 논리적 형식이나 계산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정직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뜻한다.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중용은 ‘미지근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넘어서, 올바른 이성(현명)과 최종 목적(하느님)에 비추어 가장 정확한 선을 선택하는 덕이다. 이제 각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중용’의 덕이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열광으로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하던 러다이트 운동식의 무조건적인 반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토마스에 따르면, 중용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성이 끊임없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성찰 없이 최대한 빠른 상용화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제기된 위험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개발자나 투자자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길이야말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현명을 비롯한 덕의 훈련을 통한 행복 추구

TV의 아침 방송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건강식품을 꾸준히 섭취하더라도, 노화와 함께 늘어나는 다양한 질병을 막아낼 수는 없다. 병에 걸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지인들에게 물어 자신의 병을 치유해 줄 명의(名醫)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유명세를 탔던 의사들이 과도한 욕심으로 몰락하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된다. 이와는 달리 드물지만 우연히 들른 병원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의사를 만나 감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피하고 싶은 의사와 만나고 싶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최소 10년 이상의 교육과 실습 과정을 마친 전문의들은 가히 ‘이해’와 ‘지식’이라는 사변이성의 덕이나 ‘기술’이라는 실천이성의 덕까지 갖추었다고 볼만하다. 특히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나 선우경식 원장님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분들은 자주 ‘좋은 의사’를 넘어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이런 분들은 소위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사추덕(四樞德)’을 갖춘 분들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다면 ‘사추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추덕의 역사적 배경과 새로운 체계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시했던 사추덕을, 인간을 윤리적으로 완성하는 ‘도덕적 덕’들로 더욱 확장시켰다. 곧 용기, 절제, 아량, 관대, 웅지, 명예에 대한 사랑, 온유, 우정, 진실함, 재치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토마스는 이런 긴 목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I-II,60,5) 그 많은 덕을 플라톤의 사추덕으로 다시 환원해서 정리했다. 이 네 가지 덕들은 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모든 핵심 내용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I-II,61,3) 그에 따르면 ‘지복직관’이라는 인간의 최종 목적은 사후에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세에서 인간적인 삶은 바로 ‘도덕적 덕들의 실천에 기반을 둔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덕들은 우리 삶에 있어 주된 덕, 즉 ‘추요덕(virtutes cardinales)’이라 불린다. 이 세상에서 최선의 삶은, 문이 경첩(cardo)을 회전하듯, 주로 그러한 덕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전통적인 사추덕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한 틀로서 인간 영혼의 대표적 기능인 지성, 의지, 욕구를 사용한다. 지성의 행위들을 조절하는 것이 ‘현명(prudentia)’이다. 사변이성의 덕이자 행위의 목적과 연관된 ‘지혜’와는 달리, 현명은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의 선택에 관계하는 실천이성의 덕이다. 의사의 경우, 병든 이웃을 치료하려는 목적은 지혜에 의해서 추구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각각의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는 현명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올바른 치료 방법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그 치료 행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덕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습성들을 규제하여 욕구 능력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도덕적 덕들이다. 행위의 실행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지성적 욕구인 ‘의지(voluntas)’를 따르는데, 이와 연관된 덕이 바로 ‘정의(iustitia)’다. 정의가 의지를 완성하여 타자에 대한 행위의 올바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적 부분은 이성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저항하기도”(I-II,58,2)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적 욕구’에 따라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했을 때 다가올 수 있는 위험과 고통이 무서워서 피하고 싶다면 ‘용기(fortitudo)’의 덕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욕정적 욕구’에 따라 자신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생활의 올바른 균형을 깨트릴 위험이 있다면 ‘절제(temperantia)’의 덕을 통해 이를 억제해야 한다. 복잡하게 확장됐던 도덕적 덕들 대신 ‘지혜·용기·절제·정의’의 사추덕 재정립 지성·의지·욕구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도덕적 덕 설명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 특히 강조…덕의 훈련 통해 진정한 행복 추구해야 사추덕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갑자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인터뷰 도중에 예외적으로 눈물을 터뜨리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우리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다. 김 추기경님은 “하느님은 한국인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는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라고 한탄하셨다. 황 교수와 그의 연구팀들은 최고의 과학적 지식과 유전자 치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술로 난치병 환자들을 모두 치료하려는 선한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 결과를 정의롭게 취급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할 용기도 지니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수령한 막대한 연구비와 이에 따른 명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명하지 못하게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세상을 속이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뛰어난 손기술을 통해 발달해 온 의학적인 발전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면, 사추덕이 필요해 보인다. 현명의 덕이 지닌 특별한 중요성 토마스는 도덕적 덕에 관해 논의하면서 “도덕적 덕은 현명 없이 존재할 수 없다”(I-II,58,4)고 말함으로써 현명의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지성적 덕들이 충만해도,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이 결여되면 발달된 지식과 기술은 전체 삶과 공동선의 관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나 행정가들은 현명의 덕이 없다면 희귀질환 치료제, 유전자 편집, 고가 중환자 치료의 자원 배분에서 누구의 생명을 우선하고 어떤 취약성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 바르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학의 발전도 사추덕이 결여되어 있을 때, 오히려 구조적 부정의를 실행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세속적인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건강을 얻고자 한다면, 뛰어난 의료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 각자가 자신의 상황을 ‘현명’하게 인식하고, 의사가 제시한 치료 수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도 지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라면, 수술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 자신이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당뇨병 위험이 있다면 케이크와 단 음료의 섭취는 ‘절제’해야 한다. 이렇게 사추덕을 지니는 것이 어찌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과정에서만 유용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인생의 거의 모든 경우에 사추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통해 도달하는 행복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지식은 특정 대상의 진리 추구하지만…지혜는 모든 인류의 원리 통찰하는 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 받으려면…파편화된 지식 넘어서는 지혜 필수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 통찰하고…마음 속 지혜로 하느님과 친교 이뤄야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덕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덕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단어이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구식 단어”라고 말했다. 사실 근대 이후에는 전통 철학에서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무론·공리주의·감정주의가 채웠다. 계몽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과 인간 안의 목적 개념을 배제했고, 이와 연관된 덕은 부수적이거나 개인적 성향 정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도덕과 관련된 언어가 남아 있으면서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공통된 기반이 붕괴돼 버렸다. 그나마 20세기 중반 이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앤스콤(E. Anscombe)과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학자들은 도덕 생활을 위해 덕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덕 윤리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덕 전통이 실제 삶을 포괄하는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에는 덕 윤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 이론’으로 취급될 뿐이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말처럼 덕을 강요된 사육이나 운동선수의 지나친 훈련처럼 여기며, 수도원에서나 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철학 상담의 창시자 아헨바흐(G. Achenbach)에 따르면, 오늘날 덕이 사라진 곳에는 악덕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덕은 특별한 것이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것으로서, 덕 없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에서 누구보다도 덕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까? 본격적인 성찰에 앞서 우선 철학사 안에서 덕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커다란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 덕 개념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혼에 따르는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혼에 따르며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며,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판단 기반 붕괴된 현대사회…덕의 윤리도 경쟁 이론으로만 취급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론…「신학대전」에서 종합해 계승·발전 하느님의 은총 통해 가지게 되는 신앙·희망 등 초인간적 덕까지 포괄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나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최종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즉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고전적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 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토마스는 “작용적 습성인 인간적 덕은 하나의 선한 습성으로서 선을 산출한다”(I-II,55,3)고 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마스에 따르면, 덕은 획득된 능력이자 작용적 습성이며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덕에 관한 규정뿐만 아니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에 관한 구분도 그대로 수용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이해,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도덕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또한 그 순서도 조금 변형시켰지만,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적 욕구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도덕적 덕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종합되고 놀라울 정도로 체계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덕에 관해서 단지 고대철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인간적 덕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가지게 되는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초인간적 덕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토마스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악덕이 잡초처럼 자라는 현대 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다음 호부터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훈련이나 ‘습성’이 있을까?

현대 사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더 맵고, 더 달고 심지어 이것이 합쳐진 ‘단짠’ 음식들이 대성공을 이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인생을 성찰하게 해주는 긴 영화나 강연보다는 순간의 관심을 사로잡는 숏폼이 인터넷 안에서 조회수를 집어삼킨다. 요즘 웬만한 궁금증은 AI에게 물으면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들이 과연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중요한 성찰이 「신학대전」의 일부인 ‘습성에 대한 논고들’(I-II, qq.49-54)에 등장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논고를 인간의 행복과 긴밀하게 연결된 윤리적 덕과 악덕에 관한 논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다룬다. 그의 성찰은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습성이란 무엇인가? ‘습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이가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따분한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반대로 각 분야의 천재들은 끝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생겨난 습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특이한 행위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토마스는 ‘습성’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 ‘습성’의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는 ‘소유하다’를 뜻하는 ‘하베레’(habere) 동사로부터 온 것으로서, “어떤 것이 잘 또는 나쁘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하나의 상태”(I-II,49,2)를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서 토마스는 “습성은 더 지속적이고 더 오래 간다는 점에서 (일시적) 상태(dispositio)와 차이가 난다”고 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런 습성은 능력(potentia)과 행위(actio)의 중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습성에 의해서 활성화된 능력은 추후 똑같은 행위들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습성 현대인은 인간보다는 동물을 습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하기 쉽다. 더욱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짐승의 행동이나 심지어 벌레 등의 작용을 관찰하는 연구는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엄밀하게 규정된 습성을 취득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의 경우에, 감각적 욕구의 활동은 그 본성과 더불어 바로 주어졌고 이미 규정되어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훈련을 받을 경우에만, 어느 정도의 습성이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I-II,50,3) 이와는 대조적으로 습성의 피조물이라 불릴 만한 인간은 장차 발전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잠재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능력들 자체는 다만 자라날 수 있는 씨앗들에 불과해서, 그것들이 결실을 풍부히 내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특별한 ‘습성’을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습성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육체적 구성이나 단순한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의 성질일 뿐이다.(I-II,50,1) 그래서 토마스는 영혼의 행위적 습성은 행위의 영적 원리들인 지성과 의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의 반복 통해 획득되는 습성 훈련 통해 한계 늘릴 때 강화 가능 본성적 목적으로 이끄는지 여부로 덕과 악덕으로 구분할 수 있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습성 토마스는 지성의 원리들을 손쉽게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들이나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입된’ 습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I-II, 51,1&4)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기본적인 ‘획득된’ 습성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습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획득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동일한 어떤 원초적 능력이 있다면, 각 개인이 획득한 습성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요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조성진이나 임윤찬과 같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예술성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수많은 훈련을 통해 획득한 ‘습성’이다. 습성은 실제로 힘들고 반복된 노력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계발된 능력으로 접붙여진 가치처럼 본성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두 번째 본성’이라 불린다. 습성이 시작될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습성이 강해질수록 노력은 덜 필요하게 되고, 같은 행위를 더 쉽고 무난하게 완수할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습성을 “행위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 습성은 전혀 자유에 반대되지 않는다.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습성의 강화와 약화 습성은 보다 ‘증대’되거나 ‘위축’될 수 있다. 습성의 성장은 단지 양적인 반복 횟수에 달려 있지 않고, 행위의 질과 의도,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의 깊이에 달려 있다. 습성은 모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습성 자체보다 더 강하고 더 진지한 행위들에 의해서만 증가된다.(I-II,52,2) 따라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한계를 확장하는 더 강렬한 훈련을 통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어떤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특정 습성과 합치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습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존의 습성이 파괴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행위를 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나태함만으로 충분하다. 오랫동안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대부분을 망각하듯이, 단순히 습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습성을 매우 약화시키며 때로는 완전히 소멸시킨다. 계속해서 지성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훨씬 하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급속하게 퇴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습성은 도대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본성과 마찬가지로 습성은 우리의 행위들이 더 쉽게, 더 유쾌하게 흐르도록 만들어 주므로 모든 진보의 조건이다. 천재적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습성을 통하여 그의 본성적 능력들에 완전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습성의 강화와 약화는 신앙인의 일상을 향해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습성을 키우고 있는가?” 습성은 인간을 본성적 목적으로 인도하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토마스는 이 선한 습성을 ‘덕’(virtus)이라고 부르고, 악한 습성을 ‘악덕’(vitium)이라 부른다. 자유의 결실인 습성은 덕의 경우에는 자유 자체를 강화하지만, 악덕의 경우에는 자유를 약화시킨다. 다음 호부터는 우선 자연적으로 획득된 덕들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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