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 구분 인간적 행위만이 행복 찾는 출발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 본성 지닌 개별 실체 최고선은 ‘행복’으로 모두 동일해도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땅콩회항’ 사건, 모욕을 못 견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등 ‘갑의 횡포’가 연일 보도돼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는 최근에도 불거진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이 대상과 정도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이전에도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인격’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인격에 대한 정의 인격 개념은 근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특별한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이 중세철학의 전통 안에서 발전됐다. ‘인격’(persona) 개념의 정의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것이다. 보에티우스, ‘개별적 실체’ 개념 부각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 인정했지만 ‘관계성’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비판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라고 정의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선 보편적인 본성을 중시하던 그리스 전통에 따라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표현처럼 개별성을 중시하는 성경의 전통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인격을 보편적인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플라톤처럼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유물론자들처럼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스콜라철학이 시작되면서 보에티우스의 인격 정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이 정의로는 ‘관계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고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경우 ‘삼신론(三神論)’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성 토마스가 수용해서 확장시킨 보에티우스의 정의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 없이 해석을 심화시킴으로써 충분히 활용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비판까지 종합하여 ‘이성적’, ‘본성’, ‘개별적’, ‘실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담고 있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고, 다양한 입장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가 이러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의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 토마스는 인격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적 실체 안에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 자기 행위에 대해 지배권(dominium sui actus)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작용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용한다.”(STh I,29,1) 그는 이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본성’과 이에 따른 ‘자기의식의 중요성’, 윤리적 행위 결정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칸트를 비롯한 후대 인격 개념이 지녔던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개별적 실체’, 그 자신의 용어로는 ‘자립성’을 주목하면서 이를 인격의 ‘교환불가능성’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인격이 지닌 유일회성과 대체불가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타인의 인격을 대상이나 수단처럼 다루려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이를 넘어서 보에티우스의 정의에는 표현되지 못했던 ‘관계성’과 신과의 유비적 연결에 기반을 둔 ‘자기 초월성’에도 주목했다.(STh I-II,서문) 이러한 통찰은 현대에 각광받은 마틴 부버(「나와 너」)의 대화론적 인격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격이야말로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STh I,29,3)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가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발견한 셈이다. 성 토마스가 제시한 풍부한 인격개념의 활용가능성 물론 성 토마스의 이러한 종합이 결코 인격이 지닌 신비적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많은 인격론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풍부한 인격 개념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 및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의 존엄성이 위협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성 토마스, 신학적 통찰까지 더해 인격의 정의에 대한 해석 심화하며 이성적 본성·자율성·책임성 등 강조 예를 들어 토마스의 인격개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비판해 보자. 아마도 횡포를 부리는 갑들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의 ‘인격’마저도 구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부를 지닌 갑부도 결코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타인의 인격’은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직위나 부를 앞세워서 인격적인 모독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직장 갑질 방지법’, ‘교권 보호 위원회’ 등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가 각성하여 자신을 돕는 이들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완전한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 수용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던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유래한 이원론을 따르는 인간관은 우리의 경험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극복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전적인 단일성을 지닌다는 성경의 관점을 12세기부터 새롭게 유행한 그리스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정리했다. 이 작업은 성 토마스가 서방 세계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인간관을 계승해 변형시킴으로써 착수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가 결합돼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육체와 함께 할 때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활동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통해 사유하고 배우며, 사물을 관찰하는 지각 행위는 영혼이나 육체의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영혼이, 영혼을 통해서 육체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나름대로 고유한 도구를 가지고 자신의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듯이, 영혼도 각자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 즉 사유 능력을 영혼과 구별했다. 바로 이 지성과 육체의 형상인 영혼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함으로써 이후에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정신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불분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성경의 관점과 상응하는 인간관을 피력했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인간관 성 토마스는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어떤 것임이 명백하다.”(STh I,75,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어서 ‘영혼이 육체의 유일한 형상’(forma)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STh I,76,1&3) 여기서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영혼은 육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적 형상인 이성적 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이성 작용들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 기능을 수행하는 원리이기도 하다.(STh I,76,4) 성 토마스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복수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인간의 통일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란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음은 영혼이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STh I,84,6) 그는 영혼이 엄격하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란 몸에서 떨어진 손과 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게서 육체는 영혼과 대조적으로, 즉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다. 육체는 영혼의 현세에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나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오리게네스)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하는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운 것이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은 가톨릭교회의 공적 교리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이라는 두 개의 구성 원리로 이루어진 합일체로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인간관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플라톤적 이원론은 서구의 문화적 유산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이 지닌 의미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정신적으로 넘어설 수 있고 육체를 마치 대상처럼 관찰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화될지라도, 그의 정신은 건강하고 젊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존재는 단 하나의 유일 원리로 소급시킬 수 없는 복합적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두 요소를 하나로 환원하는 유물론자나 유심론자들의 일원론적 해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을 세계와 관계하도록 해주는 육체와 그 육체의 제약성을 극복하도록 상승시켜주는 영혼은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소우주’라고도 지칭되는 인간은 모든 영역 안에서 자신을 하나요, 동일한 인간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조화롭고 통합적인 인간관은 성경의 히브리적 사고에 잘 나타났으며, 성 토마스를 통해서 이론적인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서로 분리된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단 하나의 통합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바탕으로 타인이나 자연 사물을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간 존재를 현실화할 수 있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적 영혼에 의해 통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때, 참다운 인간 실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인간의 내적,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외적, 공적, 사회적 영역도 다루었다. 이렇게 그는 근대 데카르트 이후 널리 퍼져 있는 인간에 대한 이원론이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사고틀을 제공해 줬다. 더욱이 이러한 해결책은 르네상스와 근대를 넘어 서양 사상 안에서 명시화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에 기초를 제공해 준 ‘인격’ 개념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다음 회에서는 ‘인격’ 개념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하는 「신학대전」 제2부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가 지닌 ‘인간관’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인 행복 논의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고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적 동물’, 또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표현들 안에는 함축적으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이원적인 사고가 야기한 여러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근대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이를 창안한 인간마저도 ‘하나의 검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만을 분리시켜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려던 서구 의료제도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최근에 등장한 AI를 활용한 로봇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도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은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신화 등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이다. 그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체에 속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영원을 인식하는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그 영혼이 지상의 육체 세계로 하강하여 “마치 감옥이나 무덤 안에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것으로 육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육체를 거스르고 통제함으로써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플라톤적 이원론은 플로티노스에서 아우구스티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서구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들어서며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自我)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 끝에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공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에 불과한 육체는 단지 기계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발견한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데카르트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한쪽을 편파적으로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의 작용만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를 너무나 격하시켜 육체노동의 천시, 더 나아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유심론이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할 경우, 인간 존재의 개별성을 가차 없이 말살하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작용을 모두 육체로 환원시키는 유물론(唯物論)은 인간 고유의 영적 고귀성을 해치기 쉽다. 육체만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육체와 성의 상품화 등 왜곡된 형태의 육체 중심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육체와 영혼 각각의 고귀함을 인정하며, 이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을까? 성경의 통합적 인간관 많은 신학자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놀랍게도 성경 안에 담겨있는 통합적인 인간관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성경의 통합적인 사유 방식에서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이 함께 합쳐진 전체로서 고찰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히브리 사상에 뿌리를 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리스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를 경멸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물질로 표현되는 육체와 세계 창조를 경시했으며, 영혼의 승천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성적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인간 영혼이 상부의 광명 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로 말미암아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강하게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만 파악했다. 이처럼 그의 육체-영혼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경시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고행과 금욕의 수행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이 퍼져 가면서,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조됐다.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감옥이며, 육체의 쾌감은 천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육체의 경시와 학대가 강화되고 있을 때, 성경에 나타나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성 토마스가 제시한 통합적인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왜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을 읽기란 쉽지 않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학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성인이다. 성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성 토마스 탄생 80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박승찬(엘리야) 교수의 글을 통해 성 토마스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유례없이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라졌고,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첫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화적으로도 K-드라마, K-영화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이런 안정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는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K-방역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2년 넘게 지속됐다. 간신히 팬데믹 상황을 벗어나서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기상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폭염, 상상조차 못 할 폭설로 변한 첫눈 등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 기상 이변에 이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계엄군을 막아선 일반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할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더 이상 각 개인이 ‘소확행’만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나빠지던 경제 사정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힐링과 워라밸을 추구하는 주관적 행복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라고 지탄받던 MZ 세대가 비상계엄의 위중한 시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추위에 떨면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는 자기 개인의 행복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추구되던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생각할수록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인간들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인 꿈을 꾸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 안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강조하던 내세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게 됐고, 현세적인 행복에 매몰되어 버린 수많은 대중이 양산됐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낮은 행복지수와 높은 자살률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이미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근대 사상과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이성과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제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 발전은 상상조차 힘든 놀라운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이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면서도 인간이 그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답해 줄 멘토가 바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완성해 가톨릭교회의 스승으로 선포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5~1274)이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78항). 성 토마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서 신학과 세속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정했다. 이렇게 그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가지고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러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신학대전」의 분량은 엄청나서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만 쪽에 달하고,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대전」 번역 작업이 완료된다면 총 72권에 달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작을 공식 가르침의 튼튼한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대전」을 통독한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성 토마스 연구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신학대전」 제1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엄청난 충고들이 담겨 있는 「신학대전」 제2부는 아직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최종목적인 행복, 올바른 행위를 판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기준들, 이를 실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 주는 덕과 이를 방해하는 악덕들, 악을 피하고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구체적인 충고 등 무수한 보화가 가득 담겨 있다. 더욱이 2025년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 이번 특별 연재에서는 「신학대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물질적인 풍요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및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신 앞에 선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II」, 「존재자와 본질」, 「신학대전: 31 & 32(STh II-II, qq.1-13)」 및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라틴어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

발행일 2025-01-05 제3424호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