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통해 도달하는 행복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지식은 특정 대상의 진리 추구하지만…지혜는 모든 인류의 원리 통찰하는 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 받으려면…파편화된 지식 넘어서는 지혜 필수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 통찰하고…마음 속 지혜로 하느님과 친교 이뤄야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덕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덕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단어이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구식 단어”라고 말했다. 사실 근대 이후에는 전통 철학에서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무론·공리주의·감정주의가 채웠다. 계몽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과 인간 안의 목적 개념을 배제했고, 이와 연관된 덕은 부수적이거나 개인적 성향 정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도덕과 관련된 언어가 남아 있으면서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공통된 기반이 붕괴돼 버렸다. 그나마 20세기 중반 이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앤스콤(E. Anscombe)과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학자들은 도덕 생활을 위해 덕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덕 윤리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덕 전통이 실제 삶을 포괄하는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에는 덕 윤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 이론’으로 취급될 뿐이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말처럼 덕을 강요된 사육이나 운동선수의 지나친 훈련처럼 여기며, 수도원에서나 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철학 상담의 창시자 아헨바흐(G. Achenbach)에 따르면, 오늘날 덕이 사라진 곳에는 악덕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덕은 특별한 것이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것으로서, 덕 없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에서 누구보다도 덕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까? 본격적인 성찰에 앞서 우선 철학사 안에서 덕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커다란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 덕 개념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혼에 따르는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혼에 따르며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며,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판단 기반 붕괴된 현대사회…덕의 윤리도 경쟁 이론으로만 취급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론…「신학대전」에서 종합해 계승·발전 하느님의 은총 통해 가지게 되는 신앙·희망 등 초인간적 덕까지 포괄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나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최종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즉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고전적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 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토마스는 “작용적 습성인 인간적 덕은 하나의 선한 습성으로서 선을 산출한다”(I-II,55,3)고 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마스에 따르면, 덕은 획득된 능력이자 작용적 습성이며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덕에 관한 규정뿐만 아니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에 관한 구분도 그대로 수용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이해,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도덕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또한 그 순서도 조금 변형시켰지만,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적 욕구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도덕적 덕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종합되고 놀라울 정도로 체계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덕에 관해서 단지 고대철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인간적 덕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가지게 되는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초인간적 덕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토마스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악덕이 잡초처럼 자라는 현대 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다음 호부터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훈련이나 ‘습성’이 있을까?

현대 사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더 맵고, 더 달고 심지어 이것이 합쳐진 ‘단짠’ 음식들이 대성공을 이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인생을 성찰하게 해주는 긴 영화나 강연보다는 순간의 관심을 사로잡는 숏폼이 인터넷 안에서 조회수를 집어삼킨다. 요즘 웬만한 궁금증은 AI에게 물으면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들이 과연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중요한 성찰이 「신학대전」의 일부인 ‘습성에 대한 논고들’(I-II, qq.49-54)에 등장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논고를 인간의 행복과 긴밀하게 연결된 윤리적 덕과 악덕에 관한 논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다룬다. 그의 성찰은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습성이란 무엇인가? ‘습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이가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따분한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반대로 각 분야의 천재들은 끝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생겨난 습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특이한 행위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토마스는 ‘습성’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 ‘습성’의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는 ‘소유하다’를 뜻하는 ‘하베레’(habere) 동사로부터 온 것으로서, “어떤 것이 잘 또는 나쁘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하나의 상태”(I-II,49,2)를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서 토마스는 “습성은 더 지속적이고 더 오래 간다는 점에서 (일시적) 상태(dispositio)와 차이가 난다”고 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런 습성은 능력(potentia)과 행위(actio)의 중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습성에 의해서 활성화된 능력은 추후 똑같은 행위들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습성 현대인은 인간보다는 동물을 습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하기 쉽다. 더욱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짐승의 행동이나 심지어 벌레 등의 작용을 관찰하는 연구는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엄밀하게 규정된 습성을 취득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의 경우에, 감각적 욕구의 활동은 그 본성과 더불어 바로 주어졌고 이미 규정되어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훈련을 받을 경우에만, 어느 정도의 습성이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I-II,50,3) 이와는 대조적으로 습성의 피조물이라 불릴 만한 인간은 장차 발전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잠재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능력들 자체는 다만 자라날 수 있는 씨앗들에 불과해서, 그것들이 결실을 풍부히 내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특별한 ‘습성’을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습성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육체적 구성이나 단순한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의 성질일 뿐이다.(I-II,50,1) 그래서 토마스는 영혼의 행위적 습성은 행위의 영적 원리들인 지성과 의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의 반복 통해 획득되는 습성 훈련 통해 한계 늘릴 때 강화 가능 본성적 목적으로 이끄는지 여부로 덕과 악덕으로 구분할 수 있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습성 토마스는 지성의 원리들을 손쉽게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들이나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입된’ 습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I-II, 51,1&4)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기본적인 ‘획득된’ 습성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습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획득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동일한 어떤 원초적 능력이 있다면, 각 개인이 획득한 습성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요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조성진이나 임윤찬과 같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예술성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수많은 훈련을 통해 획득한 ‘습성’이다. 습성은 실제로 힘들고 반복된 노력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계발된 능력으로 접붙여진 가치처럼 본성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두 번째 본성’이라 불린다. 습성이 시작될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습성이 강해질수록 노력은 덜 필요하게 되고, 같은 행위를 더 쉽고 무난하게 완수할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습성을 “행위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 습성은 전혀 자유에 반대되지 않는다.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습성의 강화와 약화 습성은 보다 ‘증대’되거나 ‘위축’될 수 있다. 습성의 성장은 단지 양적인 반복 횟수에 달려 있지 않고, 행위의 질과 의도,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의 깊이에 달려 있다. 습성은 모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습성 자체보다 더 강하고 더 진지한 행위들에 의해서만 증가된다.(I-II,52,2) 따라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한계를 확장하는 더 강렬한 훈련을 통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어떤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특정 습성과 합치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습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존의 습성이 파괴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행위를 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나태함만으로 충분하다. 오랫동안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대부분을 망각하듯이, 단순히 습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습성을 매우 약화시키며 때로는 완전히 소멸시킨다. 계속해서 지성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훨씬 하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급속하게 퇴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습성은 도대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본성과 마찬가지로 습성은 우리의 행위들이 더 쉽게, 더 유쾌하게 흐르도록 만들어 주므로 모든 진보의 조건이다. 천재적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습성을 통하여 그의 본성적 능력들에 완전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습성의 강화와 약화는 신앙인의 일상을 향해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습성을 키우고 있는가?” 습성은 인간을 본성적 목적으로 인도하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토마스는 이 선한 습성을 ‘덕’(virtus)이라고 부르고, 악한 습성을 ‘악덕’(vitium)이라 부른다. 자유의 결실인 습성은 덕의 경우에는 자유 자체를 강화하지만, 악덕의 경우에는 자유를 약화시킨다. 다음 호부터는 우선 자연적으로 획득된 덕들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요즘 뉴스에서는 ‘분노’로 인한 이해하기 힘든 범죄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분노에 차 흉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에 대한 분노가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사태들을 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거나, ‘분노는 하나의 결점이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일부 윤리학자들의 판단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았던 드라마 <글로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할 때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분노는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가, 아니면 때때로 선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에 관한 이론은 이런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분노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발견된다. 선과 악을 모두 지향하는 분노의 원인 토마스는 분노를 ‘복수에 대한 욕구(ira est appetitus vindictae)’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분노는 사소한 일보다는 ‘중차대한 것’에서, 곧 어렵고 심각한 악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분노는 자신이 겪은 상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며, 그 안에는 욕망하고 희망하고 향유했던 선을 옹호하려 하고, 동시에 공격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그 악이 갚아 지기를 바라는 이중의 목표가 함께 들어 있다.(I-II,46,2) 그래서 토마스는 “분노는 겪은 고통에서 생겨나고 복수에 이르며 즐김으로 끝난다”(I,81,2)고 말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분노하는 사람을 거슬러 행해진 어떤 악’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면, 또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특히 ‘마땅히 있어야 할 존중의 결핍’, 즉 경멸(parvipensio)이 분노를 크게 자극한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이 모멸감을 더 크게 느끼고, 반대로 아주 낮은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I-II,47,4) 예컨대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이 크게 폭발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도 ‘부당한 모멸감’을 당할 때, 얼마든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분노와 이성 - 동반과 방해 흔히 분노를 ‘이성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의 관점은 더 세밀하다. 제대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당한 악과 겪게 될 벌을 저울질하는 정확한 비교와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분노는 언제나 이성을 동반한다”고 말한다.(I-II,46,4) 그러나 분노가 이성을 동반한다고 해서, 분노가 항상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분노는 다른 정념들보다 더 명백하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한다”(I-II,48,3)고 말한다.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몸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불(火)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가 심해지면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빨라지며, 심지어 혀의 움직임까지 방해해서 말을 더듬게 하거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수 있다.(I-II,48,2) 이런 신체적·정신적 동요 때문에 분노는 깊은 사유와 관상, 차분한 판단을 크게 어렵게 만든다. 분노를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정의와 사랑 위해 사용해야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불의하며 죄악의 근원이 돼 정당한 분노와 죄가 되는 분노 그런데 토마스는 분노를 무조건 죄로 보지 않는다. 분노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불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분노는 불의(iniustitia)보다는 정의(iustitia)에 더 가까운 셈이다.(I-II,46,7) 분노가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서 일어나 ‘정당한 복수’일 경우, 그것은 정의라는 덕의 발로로 여겨진다. 반대로, 분노가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 법적 질서를 벗어나 사적인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거나, 죄를 없애기보다 죄인 자체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려 할 때 - 그것은 죄가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토마스는 분노를 칠죄종(七罪宗, 추요죄)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분노에서 말다툼, 고성, 저주, 폭력 등 여러 악습이 흘러나온다고 분석한다. 분노는 정당하게 다루어질 때 정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지만, 방치될 때는 많은 죄악을 낳는 ‘악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도 하나의 악습으로 본다. 그는 정당한 원인에 대해서 그 느낌에 상응하는 움직임의 부재, 곧 처벌하려는 의지의 결핍을 분노의 결핍이라는 악습으로 설명한다. 즉 분노해야 할 자리에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 불의 앞에서 무감각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증오(odium)가 분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한다. 증오는 악을 그 자체로서 원하지만, 분노는 ‘정당한 복수라는 선’으로 악을 원하기 때문이다.(I-II,46,6) 분노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고, 그에게 내리는 벌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증오는 상대에게 그 어떤 선도 바라지 않고 악을 그 자체로 원하므로, 분노보다 훨씬 사악한 정념이다.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는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분노’를 인정한다. 이성에 앞서 선행하여 이성을 어지럽히는 분노는 악하지만,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을 따른 후속하는 분노는 선하며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는 교회의 선익, 사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덕의 도우미가 된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칠죄종으로서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신앙인은 분노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정의 감각과 어떤 상처에서 나오는지 살피면서, 그것을 정의와 사랑을 위한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한 순간도 어둡게 만들 수 있는 ‘두려움’의 그림자

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이다. 그런데 광고에서 가장 자주 클로즈업되는 광경은 특정 상품을 썼을 때 느끼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앞으로 다가올 불행들을 나열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는 보험 관련 광고도 적지 않다. 행복감을 느끼는 장면과 끊임없이 다가올 불행을 예방하라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두려움은 행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의문이 생겨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취업, 노후, 건강), 사회적 평가와 비교(열등감, 실패), 과거 경험과 후회, 생활환경 변화, 병리적 요인(불안 장애, 공포증), 생존 본능(자연재해, 범죄)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성찰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두려움을 정념으로 다루기도 하고 성령의 선물로 다루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념으로서의 두려움과 그와 반대되는 담대함에 대해서만 고찰하도록 하겠다. 두려움에 대한 토마스의 정의와 성찰 토마스는 두려움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자연적인 두려움(timor naturalis)'과 ‘자연적이지 않은 두려움(timor non naturalis)’을 구분한다.(I-II,41,3) 자연적인 두려움은 그야말로 본능에 의한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그에 비해 비자연적인 두려움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은 아무리 체구가 작고 못생겼어도 폭군이나 독재자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나타나면, 벌벌 떨면서 피하게 된다. 이어서 토마스는 두려움을 ‘미래에 일어날 재난이나 고통’ 앞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정으로 규정한다: “두려움은 ‘미래의 악’과 관련되는데, 그 악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역량을 넘어서는, 즉 그에 맞서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I-II,41,4) 따라서 두려움은, 지각·상상에 의해 인간의 마음으로 미래에 마주칠 악의 이미지가 들어올 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이를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발생한다. 두려움은 이성의 판단과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로 생긴다. 물론 선도 그 선을 애호하는 이들이 그것이 상실될까 봐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간접적 대상은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악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은 동시에 두려움이 우리 영혼에 침입할 수 있는 길들을 보여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직접적 대상은 악이다.’(I-II,42,1) 두려움의 원인과 결과 그렇다면 무엇이 다양한 두려움들을 불러일으키는가? 토마스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대상의 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즉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 뜻밖에 발생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은 더 지속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I-II,42,5&6) 단순히 환상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주체의 나약함’도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I-II,43,1&2) 다가오는 악을 물리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빠진다. 나약한 우리는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흔하다. 두려움의 연쇄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토마스는 두려움의 다양한 결과도 보여준다. 두려움은 심장을 수축시키고 숨을 멈추게 하며, 떨게 하고 창백하게 하고, 육체의 힘도 사라지게 한다. 두려움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은 움츠러들고 행동이 제한되며 자신 안으로 물러나게 된다. 또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악이 임박해 있지 않을 때보다 잘 숙고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가 더 기꺼이 조언을 구하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지나치지 않다면 영혼의 힘을 촉진하기도 한다.(I-II,44,1-4) 두려움에 맞서는 ‘담대함(audacia)’이란 정념 악이 다가온다고 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정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그 악이라는 동일한 대상은 때로는 우리 안에서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정념인 담대함을 일깨운다. 담대함이란 끔찍한 악을 만났을 때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선을 추구할 때 취하는 충동적이고 용감한 움직임에서 성립된다.(I-II,45,1) 그것은 언제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한다는 희망에서 비롯된다.(I-II,45,2)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위험을 겪어낸 그의 체험, 그가 성공적으로 행위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고찰 등은 희망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킨다. 또한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것 등은 그 희망을 강한 담대함이 되게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겪게 될 어려움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정념으로서의 담대함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의 단계들을 거쳤기 때문에 어려움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담대함’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담대함은 위험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어려움과 패배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게 가까이에 있는 악에 맞서 싸우러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담대함이 이성의 규제를 넘어 과도할 때 두려움의 결핍 때문에 악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II-II,127,1-2) 현대 사회에서 쾌락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단순히 억압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성찰하고 대처하여 삶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기회로 변화시켜야 한다. 두려움은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행복을 방해한다. 토마스가 말한 대로 두려움은 삶을 위축시키지만, 이성적 성찰을 통해 담대함을 실천하면 극복과 성장이 가능하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두려움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도망가지 않고 점진적으로 직면하며, 자신을 격려하는 가족, 친구 등의 지지 체계도 잘 활용해야 한다. 토마스가 강조한 담대함의 개념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경험을 반복하면 두려움에 좀 더 잘 대처함으로써 결국 더 깊은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고통과 슬픔,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惡)일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와 ‘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즉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선’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선’,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선’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고통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특정 조건에서 선 될 수 있어 고통이 유용할 수 있다 해도 고통받는 이와 함께해주길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준비운동: 고통을 경감시키는 구체적 방법

우리는 지난 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이를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 충고를 듣고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에서, 현대 사회의 고통 경감법과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조작 가능하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연구 방향은 고통의 근원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경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취나 무통분만이며, 이런 경향은 일반 생활에도 널리 퍼져있다. 또한 현대인들의 다수가 정신적인 고통이 다가오면 알코올이나 마약 등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고, 심지어 많은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차단하려 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즐거움을 통한 고통의 약화 토마스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료법은 ‘잠과 목욕’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힘을 되찾게 해 주고 몸의 신체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어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게 해 준다.(I-II,38,5) 밤잠을 줄여도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까지 연구에 매진했던 토마스이기에 이런 충고는 더욱 유별나게 들린다. 그럼에도 잠이나 목욕 등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림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은, 이미 현대 의학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인 마취와 통증 완화의 방법을 통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방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토마스는 기쁨이나 쾌락이 슬픔이나 고통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쾌락(Delectatio)’은 고통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I-II,38,1) 만일 직면해 있는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겪고 있던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환자의 슬픔을 감소시킨다. 때로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좋은 영화는 우울함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 바람을 조금 불어 넣으면 다시 팽팽해지듯, 인간이 느끼는 쾌락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슬픔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다. 눈물과 한숨을 통한 슬픔의 배출 그렇지만 진정으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잠깐의 즐거움이 마치 한 여름의 뙤약볕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몇 방울의 물을 떨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해 ‘눈물과 탄식(Lacrymae et Gemitus)’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I-II,38,2)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해로운 요소는 영혼의 주의가 그리로 쏠릴 때 더욱 고통스럽지만, 바깥으로 분출될 때는 주의가 분산되어 내면의 고통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안정이 되고 슬픔을 이기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수용, 즉 눈물 흘리기나 깊은 탄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현대에도 적극 권장되는 방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위로와 공감…진리 탐구·종교적 묵상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 이뤄낼 수 있어 친구와 가족의 위로 토마스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위로가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참조) 마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을 때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짐인 심적인 고통도 동료들의 위로를 통해 가벼워진다. 또한 친구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가지고 있는 ‘공감(Compassio)’이나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교감과 위로는 고통 완화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 문제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토마스가 중요시했던 위로의 힘이다. 진리의 관조를 통한 고통의 극복 이런 일시적인 고통의 완화와는 달리 강렬한 즐거움을 포함하는 더 지속적인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진리에 대한 관상(Contemplatio Veritatis)’이다. 토마스는 이 관상이 고통을 대단히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관상의 쾌락은 ‘흘러넘쳐(Redundat)’ 감정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까지도 완화시켜 준다.(I-II,38,4) 지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관상이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킨다. 지복직관과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토마스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온갖 시련을 참된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야고 1,2)”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가올 기쁨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숯불 위를 마치 ‘장미 꽃밭’ 위를 걸어가듯이 걸어가는 순교자도 소개한다. 진리 탐구와 영적 명상, 신앙적 희망은 현대의 정신 건강과 영성 돌봄 분야에서 여전히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강조하는 명상, 마음 챙김, 종교적 혹은 철학적 묵상 방식들은 고통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신학대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슬픔 해소법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단순히 과거의 뒤처진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상호 관계, 몸과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의 길로, 오늘날 심리치료와 영성 상담, 공동체 활동 등 다양한 현대적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사고 등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2차 가해에 가까운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문제와 같은 ‘고통에 대한 오해’를 집중적으로 성찰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하기 위해 고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도 고통은 육체적·정신적 차원에서 질병, 실직, 사랑하는 이의 상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능력 위주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고통을 무조건 없애버리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누구도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상가가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도 육체적인 통증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이처럼 고통의 실재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삶이 단지 ‘고통의 바다(苦海)’일 뿐이라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섭고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고통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수한 정념들에 관한 모든 논의 가운데 ‘가장 적절하게’ 정념이라고 불릴 만한 고통을 매우 길게 무려 다섯 개 문제(I-II,q.35-39)에 걸쳐 다룬다. 고통(Dolor)과 슬픔(Tristitia)의 구분 우선 토마스는 고통(Dolor)을 그 원인이 육체에 있긴 하지만, 영혼의 한 정념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손에 화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아픔과 같은 육체의 상처, 질병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육체의 정념이라면, 친밀했던 친구와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에서 오는 비통함은 영혼의 정념이다.(I-II,35,1) 이어서 그는 지성이나 상상력의 깨달음에서부터 오는 정신적 고통에게 슬픔(Tristitia)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다.(I-II,35,2) 슬픔은 단순히 괴로움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취하려는 어떤 선(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느끼는 낙담은 성취, 자부심 같은 선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기쁨과 슬픔은 그 대상인 선과 악이 대립되기 때문에, 서로 반대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저 서로 다르기만 할 뿐 상호 배척하지 않는 수도 있다. 친구의 죽음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천상 행복을 누리리라는 영생의 기쁨으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I-II,35,4) 이어서 토마스는 ‘내면적 고통은, 다만 육체만 아프게 하는 외적 고통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외적 고통을 일부러 찾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5,7) 또한 그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슬픔의 다양한 종류를 검토하며 그것들이 육체적 고통과는 달리 과거, 현재, 미래의 악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슬픔을 느끼는 역량이야말로 인간됨의 한 조건인 것이다.(I-II,35,8) 삶에 필연적인 고통과 슬픔…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 자기 성찰 계기로 삼는다면…내적 성장 도모할 수 있어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분석 토마스는 계속해서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을 다룬다. 감각적 욕망을 증가시키려는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이 동시에 슬픔의 원인들을 증가시킨다. 즐거움이 많아지면 불가피하게 그에 반대되는 것도 많아진다. 만일 한 사람이 어떤 선을 상실하고 또 그 손실을 하나의 악으로 포착한다면, 슬픔의 정념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또한 현존하게 된 악뿐만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그릇된 바람도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다.(I-II,36,1) 특히 정신적인 고통은 우리가 재능이나 노력을 통해서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이다. 토마스는 슬픔이 우리의 의지와 사랑에 근거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증오 없이는 고통도 없고 또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기 때문에, 사랑(Amor)이 ‘고통의 보편적 원인’이라고 밝힌다. 해로운 것에 대한 욕망, 원하는 선을 얻지 못함, 누리던 선의 상실이라는 세 가지 경우에 갈망은 모두 슬픔을 낳지만, 그 가운데 ‘결합의 욕구(Appetitus Unitatis)’가 특히 강렬하다. 특정 대상과의 결합의 욕구가 클수록, 그 대상이 상실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온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 애정을 쏟은 반려동물의 죽음은 짧게 관계 맺은 다른 대상보다 더 큰 슬픔을 유발한다. 더 나아가 재물들을 소유하고 싶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I-II,36,2), 사랑하는 이와 하나로 결합되고 싶은 바람이 채워지지 못할 때도 고통은 발생할 수 있다.(I-II,36,3) 우리의 슬픔은, 우리의 사랑과 미움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지표다. 이렇게 시작된 고통과 슬픔은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에, 모든 활동 능력을 위축시키며, 심하면 사람들의 지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감각적 고통이 심할 경우 정신적 능력도 저하시켜 학습 능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토마스는 고통과 슬픔을 심장으로부터 오는 생명 운동과 대비시키면서, 다른 어떤 ‘영혼의 정념들’보다 더 육체에 해를 끼친다는 결론을 내린다.(I-II,37) 고통의 성찰을 통한 인간적 성장 이러한 고통과 슬픔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누구나 고통 또는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토마스는 슬픔이 올바르게 조절되기만 한다면 상당히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의 가장 큰 유용성은 인간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저 고통 혹은 슬픔을 제거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그것을 제거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I-II,37,3)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내적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반면, 고통의 원인과 구조 그리고 그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단순 회피를 넘어 자기 삶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신학대전」에 나오는 토마스의 섬세한 연구는 우리를 고통에 관해 성찰하라고 초대한다. 고통 없는 완전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으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더 온전히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는 고통의 문제를 피하기보다, 이를 통해 윤리적·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기를 촉구한다. 잃어버린 선에 대하여 괴로워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내면에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면 곧 행복한가?

현대 사회는 눈부신 물질적 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루었으나, 이와 더불어 ‘즉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의 경험’이 곧 행복이라는 가치관이 널리 퍼졌다. SNS, 게임, 유튜브 등 각종 디지털 매체는 즉각적 도파민 자극과 일시적 즐거움을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음식, 여행, 소비, 오락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가운데 많은 현대인은 날마다 쉽게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행복’이라는 등식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선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정념들 가운데 특히 ‘쾌락’과 ‘고통’을 심도있게 다루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쾌락과 즐거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쾌락과 즐거움의 구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제1권(제31~34문)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단순한 감각적 향유 또는 일시적 충족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delectatio)’이 ‘선(善)’을 획득하고 소유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정념임을 강조했다. 즉, 우리는 선을 향한 사랑과 갈망에서 시작하여, 그 선을 추구하고, 마지막에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쾌락에 도달한다.(I-II,31,1). 더 나아가 토마스는 자주 쾌락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그 활용범위가 더 좁은 ‘즐거움(Gaudium)’을 구별한다. 즐거움도 쾌락의 일종이지만, 무엇보다 “이성이 인식하는 선의 현존에서 오는 주체 내면의 정서적 반응”에 좀 더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동물들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 말하지 않고, 쾌락이라고 말한다.”(I-II,31,3)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다양한 감정적 형태인 즐거움, 기쁨, 용약, 유쾌함, 참행복 등으로 나타난다. 즉, 육체적(감각적) 쾌락과 정신적(지성적) 쾌락 모두를 포함한다. 정신적 쾌락은 지식, 우정, 신적 관상 등에서 오는 쾌락으로, 영적 성장과 연결되는 쾌락이다. 그런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차이에 따라 강도, 가치, 도덕적 평가가 달라진다. 육체적 쾌락은 육체의 변화를 수반하며 더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정신적 쾌락이 차원의 깊이와 지속성에서 더 탁월하다.(I-II,31,5) 육체적 쾌락 중에서는 촉각(Tactus)의 쾌락이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장 강렬하지만, 시각(Visus)의 쾌락은 인식적 쾌락과 결합되어 더 고상하다.(I-II,31,6) 토마스는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쾌락들, 즉 건강한 본성에 따르는 것이 자연적 쾌락이지만, 오류에서 비롯된 비자연적 쾌락, 곧 자연에 어긋나는 쾌락도 있다고 강조한다.(I-II,31,7) 쾌락의 원인과 결과 쾌락은 선의 인식과 획득에서 유래하지만, 변화와 다양성, 기억과 희망, 사랑, 경탄까지도 쾌락의 원인이 된다. 토마스는 특히 친구에게 베푸는 행위, 선행과 같은 다른 사람의 선 역시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고 밝힘으로써 개인적인 쾌락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강조한다.(I-II,32,5&6). 인간은 갈망하는 선을 즉각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차츰 획득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쾌락은 “정신과 마음을 확장”시키고 활동을 완성하게 하며, 새롭고 더 큰 쾌락과 목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I-II,33,1&2) 특히 정신적 쾌락은 이성의 작용을 더욱 활발하게 한다. 쾌락은 그것을 낳는 행위를 더욱 기대하게 하고, 건강한 도덕적 활동의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I-II,33,4) 쾌락을 넘어 행복에 도달하기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본연의 선에서 비롯되고, 일정한 윤리적 질서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토마스는 극단적 금욕주의도, 무분별한 쾌락주의도 경계했다. 스토아학파처럼 감각적 쾌락 자체를 모두 부정하면 인간 본성과의 조화를 깨트리고 오히려 무감각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자연적 질서에 맞는 쾌락의 향유는 필요하다고 봤다. 자연은 쾌락을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기능들에 연결시켰다. … 따라서, 만일 누군가 자연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소홀히 할 정도로 이런 쾌락들을 삼간다면, 그렇게 자연적 질서를 위반하는 가운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II-II,142,1)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쾌락 그 자체를 목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거슬러 토마스는 절제가 사라지고 과도한 쾌락 추구가 목표가 되어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때, 행복은 오히려 멀어진다는 점을 경고한다. 쾌락이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만 선한 경우도 있고 또 보기에는 선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4,2) 더욱이 과도한 육체적 쾌락은 이성의 기능을 저해한다.(I-II,33,3) 실제로 현대 사회에 만연한 반복적인 감각 자극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내성을 높이고, 더욱 강한 자극, 더 짜릿한 경험을 찾아 헤매게 만든다. 그러나 만족은 순간적일 뿐, 남는 것은 더 큰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욕구의 반복적 악순환이다. 알코올, 도박, 게임, 쇼핑 등 쾌락적 욕구가 제어되지 않을 때 ‘중독’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자극, 강한 소비, 넘치는 경험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평범한 일상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런 인간의 욕구에 따라 끝없는 소비와 유혹을 제공하며, 결국 대중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불행함을 호소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에 이르기 위해 쾌락들을 삼가는 것은 때때로 찬사받을 만하며 필수적이다.”(II-II,142,1) 토마스는 쾌락 자체를 일률적으로 죄악시할 필요는 없으나, “이성에 일치될 때만” 선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절제(Temperantia), 자기조절, 선한 욕구로의 전환과 같은 덕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암묵적 믿음은 현대사회에서 삶의 공허, 중독, 공동체의 해체, 도덕적·인격적 위기 등 심각한 문제로 연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같은 흐름에 균형 잡힌 해답을 제시한다. 쾌락과 즐거움은 선한 삶, 자기 성찰,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 이성의 지배 아래서만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은 덕을 통해 절제되고, 고귀한 목적‧공동체의 선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인간다운 즐거움으로 승화할 수 있다. 토마스의 성찰과 함께 외적 쾌락보다 정신적 즐거움, 자기실현과 공동체 가치, 이성적 삶과 고귀한 가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본질임을 되돌아보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해 피해야 할 사랑의 왜곡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행복을 꿈꾼다. 그렇지만 사랑의 시작이 반드시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불행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 3년간 대한민국에서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 신고와 검거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를 잡았다. 많은 여성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로에게 호감으로 시작되었던 만남이 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사랑의 다양한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그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사랑의 단계와 내포된 위험 사랑의 첫 단계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의 욕구(특히 성적 욕망)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상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기고 피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다음 단계는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단계다.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 상대에게 사로잡혔다는 느낌,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 등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외적 매력에만 의존하다 보니 상대방의 매력이 사라지거나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 역시 금세 식어버린다. 사람의 취향 또한 변하기 마련이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언제 식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의 외적 조건을 넘어서 내면과 본질적인 면모, 즉 인격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로 당신이기에 사랑한다”는 단계이며, 여기서부터 진정한 결합과 존중의 관계가 형성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원인으로 선, 인식, 유사함에 대해 설명한 이후에, 곧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참된 사랑의 결과: 합일, 내속, 무아지경 토마스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I-II,28,1)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구절로 사랑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만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소멸될” 실체적 합일이 아니라 즉 공동생활, 대화, 상호작용 등 다양한 방식의 ‘감정적 합일(Unio Affectus)’을 추구한다고 본다. 사랑이 발전하면 ‘내속(Inhaesio)’의 경지에 이르는데, 이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 속에 있고, 반대로 사랑받는 자도 사랑하는 자의 ‘삶의 중심’에 깊이 들어오는 단계다.(I-II,28,2) 우리의 정신과 기억 속에 사랑하는 대상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그 대상이 삶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황폐함을 겪는다. 더 나아가 ‘무아지경(Extasis)’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모든 정신이 상대에게 몰입되어, 완전히 자기 외의 존재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I-II,28,3) 사랑하는 친구의 슬픔이나 행복이 곧 나의 것이 되고, 우정의 사랑에서는 상대를 위한 선이 곧 자신의 선이 된다. 이처럼 사랑의 깊은 단계에서는 자기 존재와 타인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것이 심화되면, 상대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통이 된다고 해도 곧 자기의 행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왜곡과 불행의 원인 그러나 이런 깊은 합일과 자기초월이라는 결과만이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때로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사랑의 처음 두 단계에서 보이는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사랑은 치명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랑은 나눔이나 공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폭압적이고 소유욕에 의해 움직인다. ‘질투’(Invidia)는 강렬한 사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데, 사랑의 강도에 비례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한다.(I-II,28,4) 이런 태도는 결국 폭력과 불행을 낳는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성의 상품화’, ‘성적 사랑에 대한 탐닉’, ‘관계의 도구화’ 등이 더해져 사랑이 오히려 혐오와 파괴, 자기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욕구, 자기를 희생한다는 이기주의적 열망 등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스토커나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은 자신의 집착, 독점욕, 폭압적 감정마저 사랑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더욱이 부적합한 대상(마약, 음주, 도박 등)에 대한 집착은 내적 해체와 영적 붕괴, 심지어 신체적 파괴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토마스는 “사랑받는 대상이 위험한 만큼 사랑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사랑과 미움의 역동 - 정념의 변증법 토마스에 따르면, 미움은 사랑에 반대되고 사랑의 대상이 선이라면 미움의 대상은 악이다.(I-II,29,1) 미움은 나쁜 것, 해악이나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념이다. 그러나 모든 미움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즉 사랑받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사라지거나, 그 선에 반하는 대상이 등장할 때 미움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I-II,29,2)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사랑이 먼저다. 사랑의 결핍이나 변질이 미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악에 대한 미움만 남는다. 심지어 미움이 성장하면 악에 대한 집착이나 왜곡된 쾌감으로 굳어진다. 자기증오, 진리에 대한 증오, 도덕적 혼란과 자아상실 등도 사랑의 결핍 또는 왜곡에서 설명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한 욕구, 소유, 집착을 넘어 상대방의 인격과 자율성, 독립성, 성장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거나, 대화와 나눔 없는 결합은 오히려 지배와 종속만 남긴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존경과 책임의 균형, 나와 상대 모두의 성장, 인격적·상호적 나눔이 실현되는 사랑이어야만, 우리는 불행과 파괴를 막고 인간적 성취와 만족, 성숙을 얻을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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