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이승훈
입력일 2025-02-19 06:37:32 수정일 2025-02-19 06:37:32 발행일 2025-02-23 제 3430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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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회항’ 사건, 모욕을 못 견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등 ‘갑의 횡포’가 연일 보도돼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는 최근에도 불거진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이 대상과 정도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이전에도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인격’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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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정언명령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보에티우스는 인격의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보에티우스>(이탈리아 「철학의 위안」 필사본, 1385년) 출처 위키미디어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인격에 대한 정의

인격 개념은 근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특별한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이 중세철학의 전통 안에서 발전됐다. ‘인격’(persona) 개념의 정의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것이다.

보에티우스, ‘개별적 실체’ 개념 부각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 인정했지만
‘관계성’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비판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라고 정의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선 보편적인 본성을 중시하던 그리스 전통에 따라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표현처럼 개별성을 중시하는 성경의 전통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인격을 보편적인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플라톤처럼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유물론자들처럼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스콜라철학이 시작되면서 보에티우스의 인격 정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이 정의로는 ‘관계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고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경우 ‘삼신론(三神論)’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성 토마스가 수용해서 확장시킨 보에티우스의 정의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 없이 해석을 심화시킴으로써 충분히 활용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비판까지 종합하여 ‘이성적’, ‘본성’, ‘개별적’, ‘실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담고 있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고, 다양한 입장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가 이러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의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 토마스는 인격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적 실체 안에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 자기 행위에 대해 지배권(dominium sui actus)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작용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용한다.”(STh I,29,1) 그는 이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본성’과 이에 따른 ‘자기의식의 중요성’, 윤리적 행위 결정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칸트를 비롯한 후대 인격 개념이 지녔던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개별적 실체’, 그 자신의 용어로는 ‘자립성’을 주목하면서 이를 인격의 ‘교환불가능성’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인격이 지닌 유일회성과 대체불가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타인의 인격을 대상이나 수단처럼 다루려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이를 넘어서 보에티우스의 정의에는 표현되지 못했던 ‘관계성’과 신과의 유비적 연결에 기반을 둔 ‘자기 초월성’에도 주목했다.(STh I-II,서문) 이러한 통찰은 현대에 각광받은 마틴 부버(「나와 너」)의 대화론적 인격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격이야말로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STh I,29,3)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가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발견한 셈이다.

성 토마스가 제시한 풍부한 인격개념의 활용가능성

물론 성 토마스의 이러한 종합이 결코 인격이 지닌 신비적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많은 인격론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풍부한 인격 개념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 및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의 존엄성이 위협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성 토마스, 신학적 통찰까지 더해
인격의 정의에 대한 해석 심화하며
이성적 본성·자율성·책임성 등 강조

예를 들어 토마스의 인격개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비판해 보자. 아마도 횡포를 부리는 갑들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의 ‘인격’마저도 구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부를 지닌 갑부도 결코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타인의 인격’은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직위나 부를 앞세워서 인격적인 모독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직장 갑질 방지법’, ‘교권 보호 위원회’ 등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가 각성하여 자신을 돕는 이들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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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