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물’생활

3리터 정도의 물을 하루에 다섯 시간 걸려 길어와야 하는 나라, 그것마저 수질이 나빠 쉽게 병이 나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나라들이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남수단과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30항에 의하면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대한 접근권은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권이다.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물을 마실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커다란 사회적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에 맞갖은 생명권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을 마련해주려고 재정 지원을 확대하면 그 부채가 어느 정도 경감됩니다.”(「찬미받으소서」 30항) 내가 물 절약에 눈을 뜬 것은 2012년 어느 에코센터에서 나온 리플릿 내용에 한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 달 사용할 물의 양을 하루에 다 쓴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을 때다. 우리의 평상시 물 쓰는 모습을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중 어디에 물이 많이 쓰이는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설거지, 세탁, 샤워 등등이 있었지만, 화장실 변기가 눈에 들어왔다. 변기 수조엔 기종에 따라 대략 10~13리터의 물이 담겨있고 일을 볼 때마다 쉽게 버려진다. 용변 빈도를 고려하면 1인당 1일 평균 약 100리터의 물이 변기 사용에만 소모되는 셈이다. 구조적으로 물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나의 슬기로운 물생활이 시작되었다. 양치컵 사용은 물론이고 옛날처럼 소변통을 다시 사용하여 변기는 한두 번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빨래는 가능한 손세탁으로 바꾸었다. 그 후 물 사용에 또 한 번 정신이 들게 된 일이 있다. 로마에 있는 우리 노틀담수녀회 모원에 아프리카에서 온 수녀가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가 모원의 화장실을 보고 분노를 쏟아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물을 길어오려면 그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곳에선 너무나 좋은 물을 대소변 처리하는데 써버린다는 불공평함에 분개한 것이다. 그 분노가 나에게 깊은 회심을 일으켰다. ‘나도 아프리카에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대한민국에 태어나 손만 까딱하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맑은 물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었구나….’ 덕분에 화장실은 나에게 성당만큼이나 거룩한 곳이 되었다. 성당에선 오히려 매일 생각나지 않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화장실에 들어서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져 내가 쓸 물의 양을 조절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물부족국가는 아니지만, 지역과 계절에 따라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기후위기의 영향으로 해마다 이런 현상은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재난 사태가 선포되었던 강릉시에 이어 올해는 순천, 대구 등 남부 지역의 주민들이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정부와 시민사회, 산업계가 협력하여 효율적 물 분배, 재활용, 첨단 기술 활용 등을 통해 물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의 제1 목표인 지구의 울부짖음에 응답한다는 실천사항이기도 하다. 케냐의 경우는 물을 길으러 가려면 10km를 걸어야 했는데, 한국 정부가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여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수도시설을 70여 군데 설치해 준 좋은 사례가 있다. 민간 차원에서도 물을 제공할 수 있는 기부와 더불어 물을 절약하는 생활로 물부족을 겪는 이들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을 낭비한 것도 결국 기후위기의 한 원인이 되고 그래서 어딘가엔 물이 부족하게 되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3면

착시의 대가

얼마 전 우파 단체 ‘휴먼스 퍼스트’가 주도한 데이터센터 반대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그동안 미국 정부와 우파 진영은 인공지능 패권 경쟁에서 중국을 앞서려면 데이터센터를 더욱 빠르고 광범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데이터센터로 인한 과도한 전기 요금 인상, 극심한 물 부족, 소음공해와 수질오염 같은 심각한 폐해가 드러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이제 좌우 진영을 넘어 데이터센터는 ‘물과 전기를 많이 쓰는 시설’이라는 수준을 넘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키며 시민들의 삶을 직접 위협하는 파괴적인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아일랜드 등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알고리즘, 데이터, 클라우드 같은 ‘깨끗하고 무형’의 단어들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는 착시이며 환상이다. 광물 자원 없이는 그 어떤 인공지능도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 연구자인 케이트 크로퍼드와 마크 그레이엄은 인공지능의 본질을 지구의 천연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하는 대규모 ‘추출 산업’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추출의 대상은 자연 자원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 문명이 창조한 데이터와 노동력, 그리고 인간 자신마저 추출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마주하는 가상 세계는, 실제로는 이 모든 자원을 무자비하게 긁어모으는 물리적인 공간에 기반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핵심 기초 설비인 배터리와 전력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리튬이 필수적이다. 단 0.15g의 리튬을 내장 메모리 칩에 넣기 위해 미국 네바다주는 물론 볼리비아, 콩고, 몽골,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수많은 대지가 파헤쳐진다. 반도체 제작에 핵심적인 희토류 채굴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장시성의 경우, 채굴된 희토류 광물에서 실제 가치 있는 자원은 단 0.2%에 불과하다. 나머지 99.8%에 달하는 독성 폐기물은 고스란히 자연에 버려진다. 그 결과 바오투 지역에는 지름 8㎞가 넘는 유독성 검은 진흙 호수가 형성되기도 했다. 광물 자원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인공지능 산업은 지구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약탈의 역사와 다름없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증설되는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이미 웬만한 중소 국가 전체의 에너지 소비량을 넘어섰다. 막대한 화석연료를 태워 만든 전기가 거대한 기계 장치들을 돌리고 있으며, 수만 대의 컴퓨터 서버가 내뿜는 초고열을 식히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수자원이 소모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설비 확장과 대규모 투자가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은 환경 오염과 자원 부족, 저주파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직접적인 피해를 온전히 떠안지만, 데이터센터가 창출하는 막대한 부는 소수 빅테크 기업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50여 년 전 출간된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당시의 추세를 바탕으로 2100년 이전에 지구의 자원과 인구가 붕괴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면서 자원의 지속 가능한 관리와 재사용으로의 전환만이 장기적 안정을 가져올 해답이라고 제안했다.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고 환경적 위험과 비용은 약자에게 떠넘기는 불평등은 결국 기술 자본을 향한 분노와 새로운 정치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으로 퍼지는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은 이 파괴적인 산업이 대다수 보통 사람의 삶을 얼마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3대 메가프로젝트’의 하나인 데이터센터 건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사업자들에게는 싼 전력과 용수를 보증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착시와 환각도 정도를 넘어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우리는 ‘단순히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바꾸는 전환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전환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지구와 인간 삶의 회복 말고 어떤 것이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3면

‘하려고 함’과 실제로 ‘함’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좋은 의도로 말했는데 왜곡 전달되거나, 누군가의 오해까지 사면 씁쓸하다. 화가 나기도 한다. 나의 선한 의도가 달리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의지’와 ‘행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의지’란 ‘~하려고 함’이다. 사물과 사태를 이성적으로 판단한 뒤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내적 자세다. ‘실행하려고 하는’ 상태, ‘실행해야지’ 하는 내적 다짐이다. ‘실제로 행하기’ 직전의 단계다. 철학자 칸트는 이성이 나침반처럼 인간 본연의 도덕 법칙의 방향을 보여주면 그 방향대로 따르려는 내적 마음이 의지라고 해설했다. 이성이 방향을 밝혀주면 그에 따라 의지라는 엔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릉부릉하는 엔진의 힘을 받아 실제로 차가 움직이면서 생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고 함’과 그것을 실제로 ‘함’의 영역은 아주 다르다. 차가 가만히 있을 때와 움직일 때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이 다르다. 말이든 행위든 실제로 ‘함’은 예상 밖의 경로로 나아간다. 다양한 갈래를 만들며 무한한 파장을 일으킨다. 실제로 한 말과 행위는 의지의 영역을 떠나 다른 환경에 있는 타자를 매개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전달된다. 사태는 상상 밖의 갈래들을 만들며 전개된다. 내가 ‘하고자 함’이 나와 다른 너를 만나 완전히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신부님이 강론 중에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인용하며 한국 무속의 원초적 종교성에 대해 좋게 말했다고 치자. 어떤 신자는 그 강론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듣고, 어떤 신자는 무언가 꺼림칙해 하고, 어떤 신자는 딱히 감흥이 없다. 강론이 인상적이었던 어떤 신자가 미사 후에 지인들과 무속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연결되고, 한국적인 것이라고 해서 좋기만 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론을 좋지 않게 들은 신자는 나중에 ‘저분은 강론 중에 왜 무당 얘기를 하시냐’며 자기의 부정적 느낌과 생각을 여기저기 퍼뜨린다. 그의 지인은 ‘그 성당 좀 위험한 것 아니냐’며 부추긴다. 누군가는 무속의 긍정적 의미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점을 쳐보며, 누군가는 무속을 더 경계한다. 특히 부정적 이야기들은 여러 갈래를 만들며 더 증폭된다. 누군가를 부정할 때 그렇게 부정하는 자신이 긍정된다는 착각이 부정성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어떻든 누군가 속 생각을 실제로 표현하고 나면 거기에 저마다의 각종 이야기와 판단들이 뒤섞이며 복잡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하고자 함’과 실제로 ‘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렇게 강론해야겠다는 신부의 내적 의지와 그 외적 표현 간에는 비할 수 없이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신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원리다. 내적 의도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개인의 의도와는 확연히 다른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중층적으로 전개되어 간다. 모두가 자기가 경험한 만큼 듣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전달할 때는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되게 말하는 내용들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실제로 할 때, 너를 인정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해도 개인의 선한 의지에 언제나 부합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예단할 수도 없고, 개인이 결정할 수도 없다. 하물며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사실상 ‘혐오’ 발언을 하는 데서 생기는 부정적 파장은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를 힐난하거나 비판하는 ‘함’이 아니라, 가능한 살리려는 ‘함’이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내면의 선한 의지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만일 사태가 복잡하게 꼬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몫이다. 인간은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하게 말하려 하며 그에 어울리게 살려 노력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의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3면

유전자 편집 기술은 바람직한 것인가?

최근 기존의 3세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보다 발전된 4세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4세대 유전자 가위의 경우 3세대 유전자 가위처럼 DNA를 잘라내는 기술이 아닌 염기 한 개를 치환할 수 있는 기술로 더 정밀한 유전자 교정이 가능하고 유전자를 대규모로 손실할 수 있는 위험도 적다고 합니다.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등장했을 때도 많은 사람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통해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많은 이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유전병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상황에 온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유전자 편집 기술은 아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전성 문제입니다. 허젠쿠이 박사의 발표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가 비판했던 이유는 이 기술의 적용이 미칠 결과를 아직 분명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전자 하나하나가 우리 몸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어떤 유전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쌍둥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도 장차 어떤 유전적인 문제를 갖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유전자 편집 기술이 질병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안전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 기술이 체외 수정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전자 편집 연구는 실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 연구를 통해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이 파괴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르침은 과학적인 사실을 토대로 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도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서 배아를 만드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난임 시술을 위해서 생성된 배아의 사용은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체외 수정 즉, 시험관 아기를 위해서 필요보다 많은 숫자의 배아를 만들게 되고, 그 가운데 일부만이 어머니의 태중에 이식됩니다. 이식되지 않은 배아는 잔여 배아라고 하는데, 잔여 배아는 냉동 보관이 되고, 5년이 지나면 폐기되거나 연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잔여 배아가 냉동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매년 폐기되는 배아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서 엄청난 숫자의 인간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서 유전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꿈같은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언제 안전하게 질병 치료에 적용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연구 과정에서 계속해서 인간 배아가 희생되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 앞에서, 생명을 위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이끄는 인공 생식 기술을 비판하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통찰이 지금 절실히 필요합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서울 마포구 주민들의 소각장 반대 다시 보기

2021년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고시한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에 따르면, 2026년부터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생활폐기물은 직매립이 금지된다. 즉, 소각재만 매립하는 방식으로 변경되는데, 이는 수도권 매립지 공간이 부족한 까닭이다. 폐기물을 소각 후 매립하면, 배출량도 100분의 1 규모로 줄어든다. 이에 따라 수도권 지자체에는 올해부터 광역소각장을 설치·운영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주민들이 소각장을 기피 시설로 여기는 경향 때문에 부지 선정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도심 한복판에 지어진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이다. 1987년 화재 이후 1992년에 새로 세워진 곳으로, 환경 예술가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했다. 쓰레기 소각장의 개념을 뛰어넘은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어 관광객들이 붐빈다. 유해 물질을 굴뚝으로 내보내기 전, 특수 개발한 필터에 의해 모두 걸러지고 수증기만 약간 배출된다. 또한 소각 시 발생하는 열을 이용하여 인근 6만 가구에 난방도 공급하고 있다. 빈에서 쓰레기를 묻을 땅이 부족해지자 관계 부처는 소각 후 매립하는 것만이 대안임을 결정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이러한 결과를 이뤄낸 것이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아마게르 바케 쓰레기 소각장도 창의적인 대안이 된 곳이다. 여왕이 사는 궁전도 소각장에서 불과 2㎞ 거리에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신규 소각장을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사례가 나타났다. 2022년 8월 서울시가 마포구 상암동에 앞서 말한 외국의 모델들을 참고하여 광역소각장을 짓겠다고 발표하였다. 한동안 마포구 아파트들에 ‘소각장 결사반대’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일어나는 님비현상(Nimby, Not in my back yard)이려니 했었다. 수도권매립지를 끌어안고 사는 인천 사람 쪽에서 보면 ‘서울 쓰레기를 인천에 버리는 것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내걸 것 같았다. 그러나 마포구 주민들은 단순히 님비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의 내용을 분석하고 철저한 분리배출을 유도하면 소각할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음을 데이터로 증명하였고, 기존 소각장의 현대화와 효율적 이용이라는 대안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이러한 해법에 결국 법원도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4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올해 3월 마침내 신규 쓰레기 소각장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현명한 주민들의 승리로 보인다. 박강수 전 마포구청장의 각오는 한층 더 희망적이다. “발생지 처리 원칙에 기반한 폐기물 감량과 재활용 극대화 정책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서울시는 행정에서의 섬세한 정책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당연히 마포구 주민들은 협조에 앞장설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 대란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월 14일자 방주의 창에 소개했던 ‘자원순환가게’와 같은 제도를 서울시가 서둘러 도입하고 마을마다 거점을 마련한다면, 버리는 문화에서 자원순환 문화를 선도하는 이상적인 사례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따르면, “버리는 문화는 물건을 쉽게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회칙 「찬미받으소서」 22항) 아울러 생산과 소비 과정 끝에 나오는 쓰레기와 부산물의 처리·재사용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 우리 산업 체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재생 불가능한 자원 사용의 최소화, 소비 절제, 개발 효율의 극대화, 재사용·재활용 등을 논의하는 것이, 지구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버리는 문화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임이 더 깊은 영성으로의 초대로 느껴진다.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3면

에어컨을 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6월 중순, 프랑스 파리의 한 가전제품 매장에 에어컨을 구입하려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약탈 현장을 방불케 하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온난한 여름 기후와 까다로운 설치 규정으로 굳이 에어컨을 설치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어서, 에어컨 보급률이 25%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일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인명 피해가 속출하자, 에어컨 사용 문제가 일상의 선택을 넘어 국가적 정치 쟁점으로 비화했다. 이 틈을 타고, 극우세력은 에어컨을 ‘생존을 위한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기후 독재자들’이 에어컨을 쓰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며 선동했다. 이 주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며 확산하는 중이다. 그동안 기후위기의 대응 방안으로 크게 두 가지의 주장이 경합해 왔다. 당장 폭염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에어컨을 켜서 생명을 보호하는 대응이 ‘기후적응’이라면, 그 에어컨을 구동하는 에너지 시스템을 재생에너지로 바꾸고 도시 구조를 리모델링하는 방식을 ‘기후 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응’과 ‘완화’가 이런 방식으로 구분되며 충돌할 문제는 아니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런 구분이 기후위기의 본질을 매우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에어컨을 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양자택일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개인이 죄책감이나 고통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생태계를 위험에 몰아넣는 사회의 작동 방식을 바꾸면서도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지켜내는 다른 종류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기후위기에 물어야 할 질문은 에어컨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왜 에어컨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도시와 사회를 만들었는가이다. 기후위기는 개인들이 무분별하게 전기를 소비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성장의 기준으로 삼아 온 경제체제,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정책, 그리고 막대한 이윤을 위해 탄소배출의 비용을 사회 전체에 떠넘겨 온 산업 시스템이 위기의 근원이다. 요즈음은 기업도 탄소배출 축소와 재생에너지 같은 ‘탄소중립’ 정책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자신들도 자본에 피해를 줄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녹색 성장’이니 ‘지속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이념들이다. 생태환경을 염려하며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실천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의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친환경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정치와 기업에게 책임을 묻고 대안을 요구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행동을 방해한다. 우리의 안도감이 오히려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기업은 ‘친환경’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소비자의 양심을 만족시키면서도, 실제로는 대량 생산과 과잉 소비를 부추기는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결국 우리의 선의는 사회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어야지, 구조적 문제를 덮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합생태론’을 통해 생태적 회심과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함께 가는 근본적인 해법을 제안했다. 과도한 편리함과 끝없는 소비주의에 길든 우리가 ‘생태적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일은 단순한 인내나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 선전하는 가짜 행복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주권을 스스로 되찾는 영성적 독립 선언과도 같다. 파국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삶의 격조를 지켜내고 ‘참된 행복’을 스스로 재정립하는 가장 아름다운 저항이다. 사소한 일상의 실천이 쌓여 형성된 생태 감수성은 구조를 변혁하는 ‘기후정치’의 단단한 심정적 토대가 된다. 기후위기, 노동의 위기, 생명의 위기를 넘어서려면 ‘또 다른 성장’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 기후위기를 가장 먼저 견뎌야 하는 이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는 생태적 선택이 기후재난에 시달리는 취약계층의 고통을 줄이고 지구 공동체의 생명에 기여하고 있다는 연대의 감각은, 자본이 주는 물질적 풍요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실존적 밀도를 부여한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안으로부터 가꾸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3면

이 말이 정말 그런 말일까

모든 오해의 근원은 언어다. 언어는 외적 사태, 내적 감정을 지시하기는 해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한다. 언어에는 개념과 경계가 있고, 그 경계 안에서만 의미가 일부 전달된다. 게다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떠올리는 언어의 끝, 즉 경계가 서로 다르다. 저마다 자신이 경험한 만큼, 자신의 상황, 관심, 의도에 따라 말하고 그만큼만 듣는다. 그래서 언어가 담는 내용은 더 제한되고, 말하는 입과 듣는 귀가 서로 어긋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발언에 대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이해와 반응이 다르지 않던가. 언어는 어떤 내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지시하는 내용의 ‘밖’은 가린다. 가령 밤하늘의 보름달에 집중하면 주변의 별은 희미해진다. 어떤 이는 보름달을 보며 문학 언어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천문학적 상상을 하며, 어떤 이는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언어는 저마다의 관심에 따르면서 한쪽을 가리는 식으로 작동한다. 큰 세계에 대한 상상은 작은 세계를 괄호 속에 넣는다. 가령 “예수님은 구원자”라는 말은 신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섭리를 연상시키지만, 그 연상은 종종 예수의 소소한 일상을 가린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걷고, 빵을 얻어먹다시피 하고, 때로는 혼자 뒷일을 보던 일상의 예수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큰 개념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일상을 배제한 구원이란 모순이다. 주변이 어두워야 보름달이 더 빛나게 마련 아닌가. 어둠 없는 밝음,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 가려진 세계를 같이 보아야 구원의 실상도 보인다.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언어가 무슨 뜻인지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가령 ‘신이 없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신이 있다’고 대응한다. 그런데 ‘신이 있다’고 말할 때, 희미하게 물러나는 배경이 있으니, 신이 있는 ‘장소’다. 신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이 있는 그 ‘장소’를 물을 때, 신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상상이 신을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 드러난다. 어딘가에 있는 신, 그 신은 그 ‘어딘가’보다 훨씬 작은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그리스도인도 흔히 경험한다. 가령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구절을 읽으며, 신이 하늘 어딘가에서 빛과 동물과 인간을 제작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그 하늘이 신보다 더 큰, 신보다 더 앞선 존재가 되고 만다. 신을 거대한 공간 어딘가에 머무는 작은 존재처럼 만들어버린다. 신이 하늘에 있다는 생각은 하늘을 신보다 더 위대하게 만들고, 신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는 말은 인간의 몸에는 신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신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어딘가의 ‘밖’은 신이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신이 천지의 창조자라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과 어긋나는 상상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늘 되물어야 한다. ‘신이 있다’는 말이 ‘신보다 더 큰 공간’, ‘신보다 앞선 시간’을 전제하는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공간과 시간에서 신을 보아야 한다. 존재하는 공간이 신이고, 변화하는 시간이 신이어야 한다. 행여 이런 인식이 위험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신’ 개념의 심층을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론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 먼지보다 작은 지구의, 모래보다 작은 인간에게 전파 같은 계시를 보내는, 그런 신도 신이다. 신이되, 인간이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자기식대로 상상하는 신이다. 신을 자기중심적으로 사물화시키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쓰는 언어의 개념, 배경, 맥락을 묻고 또 물으며, 개념의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존의 자기 인식에 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만물의 심층에서 만물의 모습으로 계시는 신을 만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라고 하지 않던가. 언어의 방주 안에 갇히지 말고, 방주의 창 ‘밖’을 보며 그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3면

다수를 이기는 진리의 무게

오늘날 인간 생명은 특별히 생명의 시작과 끝, 가장 생명이 취약한 순간에 위협받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낙태와 안락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생명과학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 위협의 강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결정권’은 근래에 와서 낙태와 안락사(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두고 가장 중요한 근거처럼 작용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안락사에서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종식할 수 있는 ‘죽을 권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낙태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권리로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태아는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세포 덩어리 혹은 여성의 자궁의 일부로 왜곡됩니다. 만약 여기에 자살이라는 문제까지 더해지면 대한민국은 인간 생명이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자기결정권’의 이름으로 일생 위협에 시달리는 독특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중요한 가치도 아니고 단지 개인의 ‘자유’가 이토록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여러모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함께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동의하는 객관적 가치의 상실은 개인과 사회의 방향성 상실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저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선포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최근 서울대교구 생명의 신비상을 수상한 교황청 자문위원 파올로 베난티 신부는 수상 소감에서 인공지능 시대를 경고하며 “다수(Majority)가 곧 진리(Truth)는 아니다”라는 분명한 소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의 순교자들을 언급합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스스로 깨닫게 된 진리를 굳게 간직하며 신앙이 없는 대다수의 군중 속에서도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다수의 의견을 거스르고, 시류를 거스르고, 인간 생명을 억압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거슬러 홀로 진리를 외쳤던 한 군인의 역사적 결단이 최근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된 바가 있습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자국민을 향한 무력 진압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제38집단군 사령관 쉬친셴 소장의 일화가 그것입니다. 최근 비밀이 해제되어 유출된 1990년 그의 군사재판 영상 속에서, 그는 삼엄한 압박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습니다.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역사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는 그의 외침은 ‘진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고, 그 진리를 선택하는 모습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비록 소수일지언정 진리를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선택은 그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수를 거슬러 내려지는 선택, 시류를 거슬러 내려지는 선택이야말로 그 어떤 선택보다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결코 다수결로 결정될 수 없습니다. 윤리는 통계가 아닙니다. 보편적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다수의 의견이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외치는 것은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선포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3면

K-자원순환가게 어때요?

2018년 인천교구 생태환경사목부에 파견되어 수도권 매립지와 소각장, 쓰레기 선별장을 몇 차례 견학한 일이 있다. 충격적이었다. 얼마나 많은 땅이 매일 쏟아지는 쓰레기를 받아안고 신음하는지! 소각장의 위치는 또 왜 이리 먼지! 쓰레기 선별장의 작업자들은 온종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음과 악취 속에서 바삐 손을 움직이며 재활용할 쓰레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작업자 중 상당수가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쓰레기 배출만 제대로 해도 땅을 보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되겠다 싶었다. 쓰레기는 최대한 줄이고, 재활용하기 쉽게 배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각인되었다. 제한된 땅에 쓰레기를 무한정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무척 반가운 제도를 만났다. ‘자원순환가게’다. 이는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재질별로 분류하면, 무게에 따라 유가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2019년 6월 경기도 성남시에서 ‘자원순환가게 신흥이 re10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되어 현재 23개소로 늘어났다. ‘re100’은 ‘recycle 100’ 곧 재활용 100%를 뜻한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듯 나는 함께 일하던 이들과 서둘러 그곳을 찾았다.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쓰레기가 될 뻔한 캔과 플라스틱 등이 말쑥한 얼굴로 재탄생할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오면 더는 쓰레기가 아니라 모두 자원으로 불린다. 그중에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은 투명 페트병, PET/PE/PS/PP/OTHER라는 재활용 표시대로 분류된 플라스틱들이었다. 이들이 재생될 때 녹는 온도가 다르기에 분류된다고 했다. 플라스틱이 이렇게 다양한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정에서부터 분류한 자원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자원순환의 열쇠 하나를 얻게 되었다. 기존의 쓰레기 수거, 처리 과정에 따르는 비용과 이에 따른 원료 채굴과 탄소발자국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고양시, 용인시 외에 인천광역시에도 곧바로 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로 행정복지센터를 거점으로 진행 중이며, 현재 인천시에만 81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초기에 인천교구도 이를 실시한 바 있다. 그 후 나는 인천시 강화군으로 소임지를 옮겼으나 여전히 공동체와 함께 자원순환가게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강화군엔 이 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인천까지 가야 하지만, 자원순환 100%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모든 불편을 달게 만들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을 맛보았기 때문에 기존 방식으로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불편하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더 깊은 동기를 보태준다. “물건을 쉽게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11항)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 일곱 가지 실행 목표 중 네 번째는 지속가능한 생활이다. 매일 버리는 쓰레기를 자원으로 구출할 수 있으니 적절한 실천이 되리라 믿는다. 전 세계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으로 원유 공급이 불확실해지면서 석유에 기반을 둔 현대 문명의 유지가 위험을 겪고 있다. 이때 절실히 필요한 분야 중 하나는 자원순환이다. 한국형 자원순환가게는 세계에 알릴만한 모범적인 모델이라 생각한다. 우선 국내에서부터 더 퍼지도록 각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기를 제안하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 인구의 20%나 사는 서울특별시가 자원순환가게를 실천한다면 기후위기 완화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이 이제는 K-문화에 이어 K-자원순환가게로 세상을 선도해 보면 어떨까?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3면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세계

록 음악가이자 작가인 닉 케이브는 어느 팬이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닉 케이브 스타일’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음악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알아차렸다. 그 노래에는 자신이 평생 떠다녔던 ‘삶의 강’이 흐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그 안에는 살아낸 시간도, 기다림도, 상실도, 숨결도 없었다. 케이브는 알고리즘은 진짜 노래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노래는 ‘고통’에서 나온다. 고통이란 창작이라는 복잡하고 내면적인 인간의 투쟁을 뜻한다. 알고리즘은 느끼지 않으며, 데이터는 고통받지 않는다. 노래를 쓴다는 것은 복제나 혼성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술적 창조와 표현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영혼의 구조다. ‘영혼’이라는 말은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도무지 낯선 말로 들린다. 인간을 오직 생물학적 개체로만 보지 않고,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인격적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그 단어는 우리 안에서 공명한다. 반면, 지금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 센터들은 우리가 전에 볼 수 없던 ‘기계 속 유령’ 같은 존재다. 단순한 질문 하나에 누군가의 세계를 샅샅이 뒤져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다. 이 유령들은 우리의 현실이란 결국 지각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는 사이, AI는 언제나 더 나아갈 곳이 있고,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유일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복제이며, 심층이 아니라 떠도는 표면이다. 레오 14세 교황의 첫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는 세상을 압도하며 밀려 들어오는 AI의 시대에, 무엇이 우리에게 ‘충만하고 고유한 삶’인가를 찾으려는 각별한 성찰이다. AI는 단순한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다시 묻게 하는 ‘새로운 사태’다. 그러나, 이 회칙은 중립적인 입장의 성찰이 아니다. 알고리즘, 디지털 플랫폼, 데이터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자산’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결코 중립적인 세계관을 구현하지 않듯이, 회칙 역시 복음의 척도로 AI 문제에 접근한다. 이 척도에서 보면, 이 시대가 숭배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수많은 거짓 우상이 숨어 있다. 완전한 자율성, 급진적 자동화, 인공적 의식의 실현, 인간 한계의 극복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환상이 ‘새로운 종류의 의존, 배제, 조작, 불평등’을 낳으며,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노동, 가정, 교육, 정치를 재구성하는 힘의 배면에는 막강한 ‘권력의 문화’가 있다. 권력과 기술이 결합해 이윤만을 추구하며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킬 때,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배이다. AI 시대의 진짜 문제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자유의 위기이다. 데이터 권력은 우리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되도록 유도되는 존재로 길들인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향해 자신을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한계와 취약함을 지닌 존재라는 삶의 진실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연민과 관대함, 건강한 상호 의존을 배운다. 돌봄, 노동, 보살핌, 기도, 고통, 우정 같은 삶의 방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은 ‘앎과 사랑’으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이다. 우리의 한계는 결함이 아니다. 그래서 회칙에서는 “유한함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도록 이끈다. 오히려 우리가 취약함, 고통, 실패라는 한계를 경험하기에, 우리 자신과 타인 모두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122항)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기술적으로 가능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가?’이다. AI 시대는 인류에게 닥친 위협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기회이다. 무력하게 있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역할을 다하며”(212항),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머무는 집, “사랑과 관계의 문명”(5장)의 집을 짓는 일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숙제가 되었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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