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새벽, 인간의 밤

1813년 겨울, 잉글랜드 요크에서 14명의 노동자가 반란 혐의로 교수대에 올랐다. 방직 산업의 급격한 기술 혁신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있던 때였다. 숙련은 존중받지 못했고, 임금은 추락했으며, 생계는 흔들렸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부수는 파괴적인 저항으로 알려진 ‘러다이트 운동’도 그 하나다. 흔히 무지한 폭도들의 반란으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역사학자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이를 새롭게 읽었다. 그것은 단지 기술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균형, 스스로 삶을 규정하는 힘이 파괴되며, 자신들의 생활과 존엄을 아무 가치도 없게 만드는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 노동 현장은 방직기에서 반도체 클린룸과 데이터센터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떠들썩한 시대, 한국 사회는 AI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거대한 산업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고 초고압 송전선로가 농어촌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종일 꺼지지 않는다. 욕망과 눈물이 함께 떨어지는 풍경이다. 효율과 경쟁력이 지상과제가 되고, 주식과 AI가 성장의 상징이 되면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지역 공동체의 삶, 환경의 착취, 에너지 자원의 과다 소비 같은 생존과 보호의 문제들은 배제되었다. 온갖 종류의 특별법과 육성 정책은 사적 기업의 위험을 공공이 떠안는 ‘디리스킹(De-risking) 국가’ 기제로 전락하고, 생명과 생태의 가치는 사라졌다.(김상현, 「반도체·AI 신드롬에 짓밟히는 노동과 생태」, 창비주간논평)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살만한 미래를 상상한다면, 과잉과 남용을 피할 수 없는 성장 방식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우리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게 하겠는가? 사회·생태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발전을 지연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발전을 인간화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특히 노동은 단순히 생산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며, 창조에 협력하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이다. 이를 비용으로만 환산하는 체제는 경제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왜곡된 질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노동은 ‘존엄으로 가는 통로’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로 가는 길’이다.(「찬미받으소서」, 128항)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움직이게 하는’ 통로다. 러다이트의 처형대와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시간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의 질문이 있다. 노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술의 변화는 누구의 삶을 지우는가. 자본의 막대한 이익은 누구에게 가는가. 사회적 삶의 재구성도 근본적으로는 ‘회개’의 요청이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속도를 늦추고, 기준을 다시 세우며,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결단이며, 노동과 기술을 관계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는 영적 용기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 노동이 존엄을 드러내며, 창조 세계가 선물로 존중받는 질서로의 전환은 거창한 전략 선언을 믿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자리를 더 존중하고 욕심을 더 묻어놓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선택은 기계의 새벽이 아니라, 인간의 새벽이다. 그 새벽은 정의를 향한 결심, 연대를 위한 발걸음, 전환과 회개의 용기 속에서 비로소 떠오른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3면

하느님과 고양이, 우박과 벌레

그리스도인은 종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자문하곤 한다.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이 구름 너머, 허공 어딘가에 있다는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하느님이 구름 너머 창공 어딘가에 있다면, 그 창공이 하느님을 감싸안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자라면서, 하느님을 천지의 어느 한 특정 장소에서 찾다니, 모순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어떤 장소에 있다면, 그 장소가 하느님을 포용하는 더 큰 세계가 된다. 하느님보다 더 큰 세계라니. 물론 허공 한쪽에 있는 신도 신일 것이다. 신이되, 인간이 상상한 신일 것이다. 인간의 상상 이전의 하느님, 상상의 근원이자 너머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의 좁은 생각에서 해방해야 한다. 신을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나 공간에서 신을 보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모든 것,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일갈했다. 일면 정당한 말이다. 니체가 죽인 신은 인간이 광활한 세계의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가 아쉬울 때 자신의 온갖 욕망을 채워주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편협한 신이기 때문이다. 신을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신의 주변이나 배경까지 따라오곤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 신을 둘러싼 그 주변과 배경에서도 신을 보아야 한다. 허공에서 빛나는 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주변을 중심으로 보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신이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는 그런 식으로 타당해진다. 우리 집에 열한 살 된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고양이들이랑 여러 해 살다 보니 뭘 찾는지, 기분이 어떤지 어지간히 교감이 된다. 고양이들도 집안 분위기를 적절히 파악한다. 가족이 밝게 다 모여있으면 얘들도 같이 모여 편안해하고, 무언가 진지하면 얘들도 움츠러든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동물이나 사물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고양이 눈으로 보면, 인간이란 것들은 말도 못 알아듣는, 답답하고 희한한 존재일 것이다. 다른 눈으로 보니 인간만의 고유성이 아닌, 모든 존재의 평등성과 고유성이 느껴진다. 시편 148편을 다시 읽었다. 하늘, 천사, 해, 달, 별, 땅, 깊은 바다, 큰 물고기, 번개, 우박, 눈, 안개, 바람, 산, 언덕, 과일나무, 송백, 들짐승, 집짐승, 길짐승, 날짐승, 임금, 추장, 고관, 재판관, 처녀, 총각, 늙은이, 어린이…. 모든 것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란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찬양으로 넘실대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찬양받는 하느님을 성경의 주인공으로 여겼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게 찬양하는 모든 존재,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귀한 존재라는 메시지가 더 다가온다. 인간, 동물, 하늘, 땅, 산, 바다, 벌레 모두 하느님 앞에 차별이 없다. 이들 모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사람만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 방식 그대로 하느님을 증명한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도 한다. 삼라만상이 평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 새와 벌레, 물고기와 나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의 신앙과 신학을 다시 세워가야 한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생물만이 아니라, 방주의 창밖에 있는 모든 비인간 존재와 함께 사는 훈련이 신앙의 근간이어야 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3면

삶의 의미, 고통의 의미

세계적인 정신의학자이자 나치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 고통, 죄책감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3대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논란은 무엇보다 삶의 의미 혹은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영국의 언론인인 케이티 엥겔하트는 「죽음의 격(The Inevitable)」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이 왜 조력자살을 선택하는지 상세하게 조사하여 밝히고 있다. 거기에는 현대 의료가 지닌 한계, 노화, 신체적·정신적 고통 등 다양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자유’였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이 존엄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역시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자유는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끝내는 자유가 아니었다. 그는 끔찍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도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늘 기억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강제 수용소의 끔찍한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의 자유가 조력자살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을 때, 거기에는 생명의 변함없는 가치도, 삶의 의미도 자리할 수 없다. 삶이 그 자체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때, 고통은 무조건 피해야 할 대상이 되며, 고통스러운 삶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된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해로운 것을 피하게 하는 경고등의 역할을 한다. 고통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의학의 발전 역시 인간을 많은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생명의 복음」 23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인간 실존의 피할 수 없는 짐이면서, 동시에 인격 성장에 필요한 요소이기도 한 고통은 불필요한 것으로 ‘삭제’ 당하고 거부당하며, 실제로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하여야 할 악으로 반대를 받습니다.” 고통은 단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고등의 역할을 넘어 우리 각자의 인격 성장에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성장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짊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반대로 칼 융이 언급한 것처럼 “신경증(노이로제)이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생의 말기의 고통은 어떤가? 우리 중 누구도 생의 말기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고통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생의 말기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시에 안락사나 조력자살과 같은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질병과 고통 중이라도 인간의 생명이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태도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인간적 위안을 초월하여, 그 누구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임종자와 그의 가족에게 주는 커다란 도움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새 의료인 헌장, 148항) 생의 말기의 고통은 어쩌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3면

‘경제자유구역’ 지정 추진이라니, 강화에까지?

설마 했는데, 기어이 올 것이 왔다! 곳곳에 ‘강화 남단 경제자유구역 지정 추진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다. 만일 이것이 추진된다면 강화도에선 역사 이래 가장 큰 토목공사가 전개될 것이다. 가슴이 철렁한다. 새만금 ‘짝’이 날 것 같아서다. 강화는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의 보물섬이라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이런 강화가 지속할 수 있는 데에, 어떤 현수막 글귀처럼 ‘경제자유구역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한다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결정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 몹시 성급하고, 노령화된 군민들에게 장단점과 타당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제공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군수의 연두 방문 자리에 갔더니 입구 안내대에서 ‘강화 남단 경제자유구역 지정 추진에 찬성하라’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거니와,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주민들의 서명이 포개졌다. 농촌을 떠난 자녀를 둔 농부들에게 경제자유구역 추진은 넓은 농토를 처분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이 사업이 추진된다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강화섬이 육중한 사각기둥의 빌딩들로 점령당할 게 뻔하고, 복구 불능일 것이다. 더욱이 경제자유구역의 문제점들도 적지 않다. 원래 경제자유구역은 2003년부터 실시돼, 외국인 투자유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인천을 시작으로 한 국내 9개 경제자유구역에 실제로 외국인 기업은 4%에 불과하고 국내 기업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실정이다. 거기에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지역 간 경제 격차와 환경파괴이다. 개발자들은 일단 많은 혜택을 받고 개발 사업권을 얻고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산업 용지의 비율을 줄이고, 아파트 같은 주거 용지의 비율을 늘려 신도시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자유구역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때에 강화가 꼭 배웠으면 하는 곳이 있다. 자연을 택해서 경제도 살린 곳, 바로 순천만 갯벌 국립공원이다. 이곳은 2023년에 이어 작년에도 전국 1등 관광지로 자리를 굳혔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랫동안 개발과 보전의 격론을 거쳤고, 조사를 통해 생태적 가치를 확인한 후 민관이 함께하는 ‘순천만생태관광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습지보호지역’으로 공포되고 2004년 순천만 생태공원 개관에 이르게 되었다. 2015년에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었고, 202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얼마나 하느님께서 좋게 보실 일인가!(창세 1,31 참조) 그런데 강화는 순천만 갯벌 국립공원보다도 훨씬 풍부한 생태 보물섬이다. 멸종위기종 저어새와 천연기념물 두루미, 황새,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노랑부리백로, 흰꼬리수리 등 수많은 희귀 조류의 보금자리다. 세계 5대 갯벌에도 속한다. 고맙게도 '인천갯벌 2026 시민협력단'이 직접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최종 결정은 오는 7월 16일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이뤄진다. 강화 갯벌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자연 덕분에 진짜 강화다움이 보전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190항에 의하면, 환경보호는 시장경제로 적절히 보호할 수 없다. 이윤추구가 목적일 땐 환경이나 미래세대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은 착취 가능한 경제적 자원 창고쯤으로 여겨질 뿐이다. 더욱이 사물들의 가치, 인간과 문화에 주는 의미, 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필요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기후위기와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소수의 자유경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와 자연 생태계의 평화와 안전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고 싶은 것이다. 굳이 강화에까지?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23면

전쟁과 교회

세계가 다시 전쟁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가자지구의 학살,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정권의 국가 폭력,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 소식만 들어도 어지럽고 불안하다. 초강대국 지도자들의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언설은 전쟁이 이제 더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 정치의 상시적 수단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려 준다. 평화와 전쟁 사이에서 오랜 세월 갈등을 겪으며 어렵게 성취한 한국의 민주주의도, 전쟁까지 기획해 놓은 ‘위로부터의 내란’으로 큰 위기를 경험했다. 전쟁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증언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그냥 물음이 아니라, 희생과 용기가 필요한 공동체의 물음이다. 전쟁의 현실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전략이나 정책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 개개인이다. 전쟁의 고통은 육체적 파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자들의 비탄, 지속되는 폭력에 대한 불안, 사람들이 겪는 도덕적·심리적 손상, 그리고 증오와 차별을 포함한다. 어떤 전쟁이든 평화를 향한 신뢰 자체를 잠식하는 것이어서, 항상 인간성을 훼손한다. 우리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손쉽게 말하는 대신, 누가 고통받는지, 누가 침묵을 강요하는지, 누가 양심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미국의 군종대교구장 티모시 브롤리오 대주교는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침공 발언을 두고, 이 군사 명령은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경우”이며 “정당한 전쟁의 상황이라고도 전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군인은 양심에 따라 이런 명령에 불복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분명하게 짚어준다. 교회는 단순히 질서나 복종을 절대화할 수 없다. 교회는 오랫동안 ‘전쟁은 엄격하게 규정된 조건 아래서 필요악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견해’인 ‘정당한 전쟁’ 이론을 교리로 채택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권력의 군사적 결정 앞에서 개인의 양심이 지니는 우선성을 더욱 강조하는 전환점을 마련한다. 양심은 주관적 기분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진리를 식별하려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능력이다. 따라서 명령이 불의할 때, 복종보다 양심이 우선한다는 말은, 교회의 급진성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정통성에 속한다. ‘세계 평화의 날’이 제정된 이후 발표된 첫 담화에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화를 인권과 직접 연결지었다.(‘인권의 증진, 평화의 길’) 인권은 정의로운 사회의 구성 요소이며, 평화는 통합적이고 정의롭고 참여적인 발전의 성취이다. 인권을 유지하는 일은 평화가 의미하는 것과 상당 부분 같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모든 인권이 존중된다면 어떻게 전쟁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인권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평화의 문화라고 말한다.(‘인간권리의 존중’) “평화는 선으로 증진되어야 하는 선이다”라는 교회의 선언은 폭력과 전쟁에 대한 모든 위선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평화가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한다. 이 ‘회의적인 확신’에 맞서는 것이 교회의 과제이다. 평화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과정이며, 반드시 창조되어야 하고 항상 점진적인 실현의 과정에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화는 의무로 간주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 실존의 요구에서 나오는 내적 강제력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평화는 가능하며, 우리의 의무이다. 양심은 사회적이며, 신앙은 공적이다. 전쟁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무관심이 아니라 분별을, 침묵이 아니라 책임 있는 발언을 요청받는다. 평화는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려는, 가장 현실적인 신앙의 태도이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3면

실재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실재는 생각보다 중요하다(Realities are more important than ideas).”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 231항에서 했던 권고이다. 이 권고문의 의미는 ‘실재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실재(Reality)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플라톤에게 실재는 인간이 감각으로 포착하는 사물 너머의 세계, 영원불변한 원형의 세계이다. 사람에 의해 감각된 것은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다. 칸트에게 실재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물 자체’로서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다. 존 로크나 데이비드 흄과 같은 경험론자에게 실재는 인간의 직관적 경험을 통해 관찰되는 물리적 세계이다. 경험되지 않은 것, 경험될 수 없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귤의 모양, 색깔, 냄새, 맛과 같은 감각의 재료들이 모여 귤이라는 실재를 구성한다는 식이다. 현상학자인 에드문트 후설에게 실재는 인간의 의식이 지향하는 어떤 대상이다. 같은 벽돌인 것 같지만, 목수에게는 집 짓는 재료가 벽돌의 실재이고, 누군가를 해치려는 강도에게는 살상 흉기가 벽돌의 실재이다. 최근 ‘사변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에게 실재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 이전부터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이다. 가령 지구야말로 인간이 있기 전부터 인간의 의식과 관계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해 온 절대 실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런 실재론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현실감 있는 실재론을 견지한다. 하느님과 창조 세계 전체, “해와 달, 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 독수리와 참새, 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찬미 받으소서」 86항)과 같은 구체적 세계 전체이다. 이들은 하늘과 땅과 바람과 물과 인간과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지구, 태양, 우주도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는 거대한 실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예외로 두고서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주체 노릇을 한다. 내가 다 안다는 듯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나의 인식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얕은 생각으로 다듬은 고안물인데 그것이 진짜 실재인 것처럼 밀어붙인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공동번역 전도 7,29)는 성경이 이런 현실에 딱 맞는 경고이다. 이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실재는 그냥 있지만 생각은 다듬어진다”는 말로, 인간이 실재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실재로부터 멀어져가는 현실을 경계한다. 모든 실재(Realities)는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전체도 실재(Reality)이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공동번역 로마 11,36) 그중에 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들을 다듬고, 제 기준에 따라 우열을 나누고, 열등하다며 배척하고 상처를 주고 하느님의 세계를 가린다. 그러면서 생명들의 질서는 파괴되고, 운동장은 더 기울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고통이 생생한 실재이다. 당연히 이런 실재를 가리는 수단들은 거부해야 한다. 십계명에서 ‘살인하면 안 된다’고 말하듯이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복음의 기쁨」 53항)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의 편협한 생각에 가려진 하느님의 실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응당 실재와 그 실재에 관한 생각 사이에 지속적인 대화가 있어야 한다. 말만 내세우는 세계, 이미지나 궤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복음의 기쁨」 231항 참조) 실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뭇 생명, 비인간 존재도 서로를 향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향한다는 근원적 사실을 두루 구체화해야 한다. 그것이 “실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에 담긴 구원의 길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3면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위험성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규정되어 있던 자기 낙태죄와 의사 낙태죄가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고, 형법의 이 규정들은 국회가 개정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낙태를 규제할 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낙태에 대한 처벌을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난 2024년 6월에 발생한 36주 태아 낙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이 자신의 낙태 과정을 고스란히 촬영하여 유튜브에 게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가 된 상황에서 낙태의 윤리적 심각성 역시 인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청에서 1974년에 발표한 문헌 「낙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이가 처벌의 포기를 승인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낙태의 경우, 이런 포기는 입법자가 낙태를 더 이상 인간 생명에 대한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살인은 언제나 엄중히 처벌되고 있기 때문이다.”(「낙태 문제」 20항)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회는 형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형법이 아닌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통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민주당의 남인숙 의원과 이수진 의원 그리고 최근에는 박주민 의원까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 법안들의 주요한 문제점은 임신의 전 기간에 걸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낙태 약물의 도입을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자보건법은 1973년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본떠서 제정되었는데, 그 주된 목적은 산아제한 정책을 위하여 낙태 허용 사유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의된 개정안은 그와 같은 사유 자체를 삭제하고 오로지 여성이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정안들은 만삭 낙태를 사실상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중대한 문제점은 낙태 약물의 도입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낙태를 수술이라는 방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개정안들은 낙태의 정의에 약물을 통한 낙태를 포함시키고 있다. 낙태 약물의 도입은 2025년 9월 16일 정부가 발표한 123대 국정 과제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 정부가 낙태약을 국내에 도입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낙태약의 판매를 주장하는 이들은 낙태약의 사용이 낙태 수술보다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낙태약 판매가 합법화된 미국에서도 낙태약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이 보고되었고, 실제로 부작용의 발생 빈도 역시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는다. 즉, 현재 보고된 낙태약 발생 빈도보다 실제는 더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낙태약의 도입은 수많은 태아의 생명은 물론이고 여성의 생명과 건강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인간 생명의 초기에 이루어지는 낙태를 법제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차별은 이미 정당화되었고,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주장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자녀를 낳아도 낙태시키지 않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악법의 제정을 막고 가장 약한 생명이 환대받고 보호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 세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3면

‘새만금’ 이름을 다시 생각한다

2023년 8월 부실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장으로 떠들썩할 때만 해도 새만금이라는 곳은 내 관심사에서 희미했다. 그러다 그 이름이 인장처럼 박히게 된 것은 2024년 노틀담 수녀회 생태영성세미나 때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보고 나서다. 영화는 군산, 김제, 부안 사이에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발치에 펼쳐진 천혜의 갯벌 해안에 33.9km의 세계 최장 방조제가 생기면서 일어난 사연을 들려주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갯벌을 파괴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의 사투가 펼쳐졌다. 새만금은 바로 이 갯벌을 매립해 옥토로 만들겠다며 만경평야의 '만'과 김제평야의 '금(김)'을 합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에 만경강-동진강 하구 갯벌로 불리던 때는 바지락과 온갖 생물들이 지천이었고, 풍부한 먹거리 때문에 하늘을 가릴 만큼 많은 다양한 철새가 춤을 추던 곳이다. 주민들도 이 갯벌에 기대어 풍족하게 살았다. 특히 도요새 십만 마리의 군무를 목격한 이들은 1991년 방조제 공사의 첫 삽을 뜨던 때부터 지금까지 만신창이가 된 새만금을 부둥켜안고 새 한 마리, 조개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 있는지 찾아 헤매고 있다. 대표적인 그룹이 ‘시민생태조사단’이다. 누가 시킨 것도,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오고 있다. 그 이유가 나를 새만금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아름다움을 본 죄’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고 ‘아름다움을 본 죄’만으로도 이토록 자연을 돌보는 그들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 자체인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사는 수도자인데도 새만금에서 벌어진 생태 학살조차 몰랐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너무 늦게야 새만금을 알게 된 것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 후 나는 ‘아름다움을 본 죄’라고 답하는 아름다움을 본 죄인이 되어 2025년 2월 새만금 환경생태 1차 기행에 참가하였다. 새만금 내 수라갯벌과 해창갯벌, 잼버리 야영장까지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방조제가 생기고 매우 적은 해수 유통이 얼마나 새만금을 썩게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조개와 생물들이 폐사하고 철새들이 줄어들고 갯벌 생태계가 무너졌는지,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한 개발을 위해 갯벌을 육지화하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수십조가 넘는 혈세를 부어야 하는지, 이미 적자운영 중인 군산공항 옆에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을 없애고 지으려는 신공항의 조류 충돌 위험이 무안국제공항의 650배에 달할 만큼 높은지 등이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창조 작품을 인간이 감히 이렇게 훼손하고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기후학자들의 예견으로 보면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하지 않는 한,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 도시들이 잠길 날이 그리 멀지 않은데 개발자들은 이 사실을 염두에나 두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도 새만금이 옥토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새만금보다는 옛날처럼 만경강-동진강 하구갯벌로 부르자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새만금이 이름값을 못 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옥토는 갯벌 그 자체로 있을 때였다. 그 위에 사람들이 거룩할 정도로 무릎 꿇고 바지락을 쓸어 담을 때였다. 철새들이 하늘을 덮을 때였다.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흙으로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의 협력자로 데려오셨다. 다만 사람이 그들을 알맞은 협력자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창세 2,18-20 참조) 우리는 정녕 새들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생태계 균형을 이루는 중요한 협력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군무는 ‘아름다움을 보는 죄인’을 더 많이 낳고 최선을 다해 창조세계를 돌보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새겨졌던 새만금이 흐려지고 ‘새만은(새많은) 갯벌’이라는 이름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새만은(새많은) 갯벌’을 너도나도 자꾸 부르면 말이 씨가 되지 않겠는가!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1988년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고,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문화학 석사를 받았다. 인천교구 환경사목부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에서 생태영성교육을 담당하며,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환경운동 실천 공로로 인천광역시의 ‘제1호 환경특별시민’에 선정됐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빈곤의 얼굴

서울역 앞 남산 오르막길 옆 동자동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이 있다. 화려하고 분주한 도시 한 복판 곁에, 무너지고 내려앉은 폐허가 조용하게 숨어있다. 홈리스 활동가들과 함께 쪽방촌을 방문하다 보면, 이 세상은 빈곤과 풍요, 둘로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낡고 음침한 건물 하나에 한두 평 남짓한 30~40개의 쪽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누구라도 여기 와서 보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데 왜 여기 사람들이 사는가? 거리 노숙인뿐 아니라 쪽방, 고시원, 숙박시설 같은 ‘비적정’ 주거 공간에 사는 이들을 모두 ‘홈리스’라 부른다. 홈리스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집은 모두의 권리이지만, 실상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로 ‘땅, 집, 일’을 들었는데, 이를 각별히 ‘성스러운 권리’라고 불렀다. 이 권리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배제된 이들이 겪는 파괴적인 현실이 빈곤, 사회적인 불의, 환경파괴, 전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빈곤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우리는 음식과 집, 일과 안전 없이는 살 수 없다. 우애와 애정 없이는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차별과 모멸을 당하며 수치심과 외로움 속에 웅크려 기죽어 사는 것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며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 인간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결정적인, 그러나 극복 가능한 ‘사회적 해악’이 빈곤이다. 빈곤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관계적이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과 혜택은 사실은 누군가의 비참함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빈곤이 다양한 얼굴을 지닌 것처럼 그 해법도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그러나 빠질 수 없는 하나는, 우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의미에 따라 살기 위해,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는 인간 본연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이다. 부유한 사람과 달리 가난한 이에게는 이런 자유가 없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한 실질적인 가능성과 역량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페루 리마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을 대표해서 한 부부가 교황을 맞이하며 “교황님, 우리는 배가 고픕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시작했다. 교황은 너무 놀라기도 하고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응답했다. “여기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이 있고 또 빵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합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그 권리입니다.” 교황이 리마를 방문한 때는 1980년대이지만, 지금도 바뀐 것은 없다. 오히려 빈곤으로 인한 고통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때로는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하거나,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상황은 행동을 요구한다. 신앙의 책임은 사회적 책임이다. 굶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성체성사를 말한다고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이 상황은 말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치료받지 못한 질병이 만연한 가운데서 병자성사를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이 상황은 돌봄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 배제된 이들, ‘작은 이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사셨다. 신앙은 그 부르심에 따라 헌신하는 일이다. 우리가 마치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깊고 중요한 의미에서 이런 부르심은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부르심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1991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1년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정치철학과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17년부터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사회적 약자와 빈곤, 불평등 문제 등에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3면

땅이 먼저 있었다. 12월 31일 밤 11시 26분 생

지구는 인류에 비할 수 없이 나이가 많다. 지구의 나이를 1년으로 잡는다면, 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26분경에 태어난 정도다. 이제 겨우 30분 남짓 산 셈이다. 인간은 지구의 시작과 활동을 본 적이 없다. 지구라는 모태에서 주어진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부터 인간이 지구를 급격히 흔들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기 삶의 조건인 지구의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에 다시 영향받으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처했다. 지구의 지질 구조 안에서 살던 인간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바꾸는 행위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지구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간이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생물 다양성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전에 없던 변화의 동인이 된 것이다. 자연 안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바꾸게 되었을까. 인류의 조상은 언젠가 마른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불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다. 물질들이 서로 부딪치면 마찰열이 생기고 불까지 일어나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서 일으킨 불은 인간이 추상화한 자연법칙의 효과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표준화하고 기술로 만들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고기를 굽고 집을 데우기 위해 불을 일으키고 어둠을 밝히는 기술로 밤을 낮처럼 산다. 자연법칙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통제자로 인식했고, 그 과정에 문명도 발생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수단화하면 할수록 문명도 정교해졌다. 물론 문명도 자연법칙에서 찾은 기술의 작품이다. 수백 톤 되는 철 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것도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만든 기술의 효과이다. 철이 바다 위를 다니게 되는 것도 자연법칙을 조작한 결과이다. 그러나 비행보다 더 큰 자연법칙은 추락이다. 추락이 더 심층적 자연법칙이다. 바다 위의 배는 언젠가 가라앉게 되어 있다. 가라앉아 삭아가는 것이 더 심층의 자연법칙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연법칙에서 찾아낸 기술은 언제나 더 큰 더 심층의 자연법칙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로 무수한 생명이 신음하고 있고, 인간도 신음하고 있다. 더 심층의 자연이 인간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거니와, 땅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 성경에서도 풀, 나무, 물고기, 새, 동물, 당연히 곤충과 미생물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창세 1,1-25 참조) 그런데 지구에서 겨우 ‘30여 분’ 밖에 살지 않은 인류가 앞선 생명 전체를 수단화하며 지구의 질서를 흔들어 왔다. 급기야 생명체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심각한 현실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질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4) 지구의 시작을 보지 못한 인간이 지구를 다 안다는 듯,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었던 양 행동하다가, 급기야 인간이 거의 신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때 그리스도인에게는 퍼뜩 이런 경각심이 든다. 2000년 이상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해 왔는데, 왜 세상은 무수한 생명을 짓밟는 ‘인간의 나라’로 치닫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하느님 나라’조차 인간 중심으로 사유하며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닫힌 ‘실선’에서 열린 ‘점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상생적으로 소통하며, 생명의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 인간의 토대인 땅의 유기적 생명 원리를 다시 보아야 한다. 창조의 원리를 되새기고 창조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급격한 추락보다 상처가 덜한 연착륙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 최후의 과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연구했으며, 「인간은 신의 암호」, 「평화와 평화들」 외 단행본 100여 권을 출간했다. 현재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이며,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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