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은 미래, 유전자는 이미 우리의 운명인가?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GATTACA)>가 최근 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람하게 되었다. 20여 년 전에 이 영화를 볼 때와, 그동안 변화된 세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된 ‘가타카’는 매우 달랐다. 특히, 첫 자막 “The not-too-distant future(머지않은 미래)”를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했다. 앤드루 니콜(Andrew Niccol)이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모두 맡았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90년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앤드루 니콜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윤리적 우려와 경고를 이 영화에 담아냈다. 머지않은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적격자(valid)와 부적격자(in-valid)로 나뉜다. 태어난 아기의 피 한 방울이면 그 아기의 모든 신체적·지적 잠재력, 수명까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적격자의 지위는 체외 수정을 통해 배아를 생성하고 유전자 검사를 거쳐 우성 유전자를 가진 배아를 선별한 뒤, 그 배아의 사소한 결함도 유전자 편집을 통해 모두 제거된 채 태어난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전자 선택을 거부하고 부부의 사랑 행위 안에서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를 지칭하는 ‘신앙에 의한 출산자(Faith birth)’에게 사회는 ‘부적격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자연 임신 출생자들은 건강 여부와 상관없이 최적화된 완벽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성 때문에 부적격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질 수 있는 직업 또한 한정되어 있다. 현실에서 유전 정보에 기반을 둔 고용 접근성의 제한 시도는 공평성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특권을 누려도 좋은 사람은 없다”는 전제하에 각 개인의 이익과 복리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특권층은 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그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기도 한다. 그 특권층에 도달할 사다리로서 우월한 유전자는 매우 매혹적이다. 최근 한 언론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 유전자 조작 아기 실험을 추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부 기업은 유전자 편집 없이도 ‘다유전자 스크리닝(polygenic screening)’을 통해 특정 특성을 예측하는 기술, 이른바 ‘진화형 선택 도구’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도 무분별한 신생아 유전체 검사 관행이 지적되었는데, 이는 유전적 운명론이 현실로 스며드는 위험한 징후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배아 또는 태아에게 시행되고 있는 유전자 검사를 가족계획을 위한 선별이나 낙태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생명윤리적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차별을 거부하면서도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이 사회의 모순에서 우리의 머지않은 미래가 어떤 사회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덧 보조생식술은 저출산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매우 유용한 도구처럼 비치고 있다. 여기에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결합되면서 윤리적 통제가 어려운 기술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할 때, 비윤리적 선택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어 이기적 이타주의로 포장될 위험이 커진다. ‘차별을 거부하지만 차별을 강화하는’ 모순된 사고가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했다. 그렇다면, 입법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출산이라는 명분이 이 위험한 사고의 흐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생명기술을 허용하고 있는가?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2015년 프랑스 파리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전 세계 195개국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하기 이전(1850~1900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가능하면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파리협정’을 맺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산호초의 70~90%가 멸종하며, 극심한 폭우, 가뭄, 홍수, 태풍, 산불 등 각종 이변이 일어나 지구와 인류를 괴롭힐 것이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세계기상기구는 산업화 이전 대비 1.55℃가 올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제 인류라는 종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인가? 그래서 단순한 경고는 위기를 넘어 재앙이라고 표현된다. 이미 재앙의 시기는 다가온 것 같다. 작년에는 빗방울이 살짝 보이기만 해도 반가워 뛰쳐나온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하루 만에 1년 치 강수량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다. 성경 말씀대로 사막에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사태였다. 이런 위기 상황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벨렝에서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가 열렸다. 아마존을 배경으로 살아오던 남미의 8개 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선주민(원주민이라는 말과는 미묘한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요즘 사용되는 단어) 대표들이 에콰도르에서 출발해 벨렝까지 3000km를, 아마존강을 따라 항해했다. ‘물의 어머니’라는 배를 타고 그 먼 거리를 횡단한 이유는 정작 가장 적게 온실가스를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의 대표들, 트럼프도, 푸틴도, 시진핑도 오지 않은 회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짓을 더욱 결연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현장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보내온 레오 14세 교황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간곡한 당부에도, 행사 결과에서 ‘화석연료 퇴출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강대국과 산유국의 입김이 작용한 그저 그런 절충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자연보호운동이 있었다. ‘자연보호’ 헌장이 선포되고 국민적 운동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하여 멸종위기 식물 복원, 하천 정화 등 환경보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운동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려워졌다. 폐지를 모으고, 일회용품을 안 쓰겠다고 선언하고, 재활용을 생활화하자고 했고 이를 위한 ‘아나바다’ 운동도 있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단순한 운동이었지만 국민의 호응은 대단했다. 당시 각 성당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말자고 스테인리스 컵을 사서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비치하기도 했다. 성당 한구석에는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친환경 비누를 만들고, 공병과 폐지를 분리해서 수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풍경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아껴 쓰고 고쳐 쓰기보다는 싸고 편리한 일회용 세상이 되었다. 가정용품, 생활용품들도 고장이 나면 고치기보다는 ‘천원 가게’로 불리는 저가형 생활용품·잡화 전문 판매점에서 싼 맛에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일회용품은 차고 또 차는, ‘그래도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기후 위기와 지구 온도 1.5℃를 이야기하기 훨씬 전에도 지켜지던 소중한 가치들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우리의 일상에서 살리지 못한다면 세계 어떤 유력한 회의를 통해서도 이루지 못하는 창조 보전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23면

사랑의 통치 앞에 무너져 내릴 악이여!

수녀원 성 요셉 상 앞에는 늘 꽃이 꽂혀 있는데, 누군가 그 옆에 연둣빛 모과 두 개를 올려 두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런 황금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도 생명이 있는 것은 여전히 있는 그대로 존재함으로 자신의 값을 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은 이렇게 여여(如如)한데 인간의 악행은 세기를 거듭해 순수한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상식적 삶의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적 현상들은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돈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거센 세상의 흐름 안에서 무섭게 드러난다. 전쟁을 조장하는 몇몇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소지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받아봤을 보이스 피싱도 개인의 삶을 무너트리는 폭력이다. 스마트폰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거기서 들려오는 지시에 따라 가슴을 조이며 은행으로, 더러는 희망에 부풀어 먼 타국으로 향하고, 익숙한 이름으로 온 낯선 청첩장을 열어보다 정보를 다 털리기도 한다. 이 국제적 조직이 순박한 사람들의 손안으로 들어와 그들 삶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일부는 국가와 결탁해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니 당해낼 이 누구인가. 제1차 세계대전 후 팽배해진 세속주의와 무신론을 경계하면서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허름한 말구유를 요람 삼아 극도의 가난 안으로 들어오셨고, 최후는 십자가 극형이었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마태 8,20 참조) 그분의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었으나 부족함이 없으셨다. 따뜻한 동행으로 함께 머물며 제자 됨의 도를 배워 익힌 당신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시다.(마르 6,8 참조)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외에는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당부다. 이른 나이에 생의 마무리를 할 시점이 왔을 때, 그분은 사랑하시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시며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것의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 군림하는 것이 왕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끌어안아 함께 걸어가는 것(시노달리타스)이 진정한 왕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 사기행각으로 부를 축적하는 조직, 국익을 위해 과도한 관세를 물리거나 군사력으로 가난한 지역을 초토화하는 반인륜적 작태들은 사랑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보편적 왕권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리라. 불신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무서운 사회에,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통치’가 진정한 다스림이자 부(富)임을 보여 준다. 본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텔로스(τέλος, telos)’라는 용어는 ‘완성’ 혹은 ‘목표’를 뜻한다. 이 텔로스는 구원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는 ‘혼인 잔치’라는 뜻으로도 쓰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피조물과 하나 되신 예수님의 강생으로 시작된 인류 사랑의 여정이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요한 2장, 묵시 19장 참조) 가난한 말구유에서 시작된 탄생에, 처절한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인생이 어찌하여 사랑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 곧 부활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는 늘 성모님께서 계셨다. 그러기에 그분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사는 이들에게 다른 이의 것을 삿된 방식으로 취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나 되겠는가. 성모님께서는 영혼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고 끊임없이 아드님 앞으로 데려갈 채비를 하실 것이다. 무시무시한 악들은 가난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섬기는 통치권에 의해 구원으로 채워질 것임을 믿으시면서.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23면

우면동성당과 서귀포 솔숲

서울대교구 우면동성당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리풀 2지구 공공주택 건설사업’에 성당과 인근 마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서울의 주택난 해소를 위한 불가피한 공익사업이라 설명하지만, 신자들과 주민들은 공익의 이름으로 신앙의 터전을 지우는 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아파트를 건설할 때뿐만 아니라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재건축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주택 건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신개발이든 재개발이든 기존의 현황을 세세히 살피고 남겨 보존할 곳과 철거하고 새로 지을 곳을 구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구역 경계 안의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짓는 거칠고 무자비한 건설 방식을 고수하는 게 문제다. 존치를 원하는 성당과 식유마을은 구역 경계의 서쪽 끝에 있고, 역시 보존을 바라는 송동마을은 동쪽 끝에 있다. 사업 구역에서 이곳을 제외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이곳들은 존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주택을 지으면 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울 강남구 자곡동·세곡동 일대에 추진했던 보금자리주택 사업은 기존 마을을 철거하지 않고 빈 땅에 공공주택을 조성했다. 오래된 옛 동네 단독주택 마을과 3층 다세대주택, 15층 안팎의 아파트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새로운 주택공급과 오래된 공동체 보존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선례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행정은 다시 ‘전면 철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왜 그럴까? 더 쉽고 빠르게, 더 많이 짓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서울시와 국토부는 부디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성당과 마을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지혜롭고 유연한 해법을 찾길 바란다. 비슷한 일이 제주 서귀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서귀포 옛 도심을 가로지르는 4.3km 우회도로 건설로 ‘100년 솔숲’이 사라질 위기다. 서귀포 우회도로는 1965년에 도시계획도로로 지정되었다. 60년 전의 도시계획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실행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이 서귀포에는 이미 충분한 도로망이 생겼고, 솔숲 일대는 초등학교·도서관·학생문화원 등 문화시설이 모인 보행 중심 생활권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자동차가 쌩쌩 달릴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은 여전히 ‘도로 건설이 곧 발전’이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솔숲과 잔디광장을 밀어내며 넓은 차도를 새로 내려 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인사동 입구의 동헌필방 등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을 관통하는 도로계획선이 일제강점기에 그어져 200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 인사동은 이미 보행자 중심의 문화지구로 자리 잡아 오래된 건물까지 헐어가며 도로를 낼 이유가 없었다. 결국 2000년 ‘인사동 지구단위계획’을 세울 때 도시계획도로를 해제했다. 보행이 우선되는 거리에서 넓은 차로는 필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샹젤리제 거리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파리를 상징하는 이 거리는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인데, 안 이달고 시장은 차로를 왕복 4차선으로 대폭 줄이고, 남은 공간을 보행 공간과 녹지로 바꾸는 ‘샹젤리제 정원화’ 계획을 세웠다. 자동차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다. 도로를 넓혀야 발전한다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차도를 좁혀야 도시가 살아난다. 우면동성당과 서귀포 솔숲은 다른 장소이지만 본질은 같다. 하나는 신앙의 숲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숲이다. 오랜 시간 공동체의 기억이 배어있는 곳이라면 성당이든, 마을이든, 숲이든 함부로 철거해서는 안 된다. 개발지구 안에도 남겨야 할 섬이 있다. 성당과 마을과 숲은 단순한 건물이나 나무들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혼이 담긴 장소(Genius Loci)’다. 하느님의 숨결 같은 ‘장소의 혼’이 꼭 지켜지길 바란다.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23면

세계가 보는 우리와 우리가 잃어가는 것

이번 주 내내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되고 있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중이다. 말라야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장 주변의 자판기에 한국의 라면은 한국어 상표 그대로 진열되어 있다.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외국 연구자들은 나에게 K-드라마, K-팝, K-푸드의 영향력을 들려준다.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이리라 짐작하니, 생경하면서도 뿌듯하다. 그러나 이내 씁쓸하다. 그들이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세계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껴진다. 동시에 한국을 떠나기 전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우리나라의 고독사와 자살 문제가 오버랩된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위상을 누리는 시대에 정작 한국 사회 내부에서는 곪아가는 문제들이 있다. 타국에서 K-문화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경험하면서도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불편한 현실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이러한 문화적 성취 뒤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인간이 고립되고 생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는 현실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만 직면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국가의 정책이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춰질 때 겪는 문제는 이제 서구를 지나 아시아로 흘러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체제는 이제 세계의 기본 질서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한편으로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따라 일어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빅터 프랭클은 1960년대 미국의 한 강연에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젊은 세대는 영적 가치의 침식을 경험하고 있다”(The Feeling of Meaninglessness, 1967)고 말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물질이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영적 가치가 외면당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 어떤 물질로도 채워지지 않는 실존적 공허를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선지자이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떠오른다. 아마도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분의 외침이 여전히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는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인간 존엄성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 인간을 정치나 경제의 도구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오히려 정치와 경제 등 그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가톨릭언론인협회 정기총회 미사,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1998년 3월 7일)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흥미롭게도 지금 참석하고 있는 이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윤리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후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기본 원리는 윤리에 기초할 수밖에 없음을 모두가 입을 모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바탕 중의 바탕은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데 있다. 이를 외면할 때 인간은 다른 인간의 존엄을 판단하려 들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너무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부한 말을 외면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선택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선택권의 확장은 인간의 존엄을 표방하며 자유를 개인의 욕망 실현으로만 이해하게 만든다. 즉 인간의 존엄이 진리와 분리되어, 자유는 절대화되고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어 이해된다. 그리고 시장경제 체제는 이를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누구인지 탐구하고 교육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인가?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23면

생명의 문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며 자랑스러운 한국을 이야기한다. 드라마, 영화, 음악, 게임, 웹툰 등 K-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서울 명동에만 나가봐도 실감할 정도다. 모든 단어에 ‘K’를 붙여서 이야기할 만큼 한국의 위상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높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물어보던 외국인들도 이제는 그런 질문 대신 K-Pop의 아이돌 가수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할 만큼, 어느새 한국은 세계인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나라가 됐다. 한국인들의 자유와 민주에 대한 열망 역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이른바 K-민주주의를 모든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진심 자랑스러운 일이다.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80돌 기념 열병식이 평양에서 있었다. 열병식에서는 북한의 신형 무기들이 등장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20형’, 단거리 탄도 미사일인 극초음속 ‘화성-11마’, 무인 전술 공격기(자폭 드론) 발사대 등 엄청난 무력을 가진 살상 무기들이 공개되었다. 이를 바라보는 평양 시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어떤 적들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자랑스러운 조선의 기상이라며…. 한편 이에 질세라 연일 방송에서는 KF-21 전투기, K2 전차, 현무5 미사일, K-9 자주포, 한국형 극초음속 미사일 등 전쟁 무기의 탁월한 성능과 세계 곳곳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활약상을 커다란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과연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일인 것인가? 우리가 생산하고 수출하는 전쟁 무기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살상의 도구로 쓰이는 일이 그렇게 감사할 일이어서 효자 품목이라고 추어올려도 되는 것일까? K-방산이 평화의 꽃이며 평화를 수출한다고 선전하지만, 결국 한국산 무기가 닿아 터지는 곳은 소중한 인명이 죽어가는 살상의 현장일 뿐이다. “무기 생산은 이미 알려진 대로 오늘날의 평화를 보장하는 계기가 된다고 그 정당성을 외치는 자들이 있으나, 결코 평화가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한 국가가 무기를 보강하면, 다른 국가들도 더욱 크게 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 … 그 결과 인간들은 일순간에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수도 있는 위험한 악몽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요한 23세 교황, 「지상의 평화」 110~111항) 60년 전에 발표된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무기의 생산과 판매, 사용을 옹호한 적이 없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 1월 18일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는 베로나 가톨릭 재단 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돈은 이웃을 위해 쓰일 때 가장 큰 가치를 창출해 냅니다. 이를 잊지 마세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투자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무기 제조업이 가장 수익성 높은 투자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투자한다는 것은 정녕 광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투자는 결코 인류의 선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바티칸뉴스 1월 18일자 참조) 당장 먹고사는 걱정에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세상이라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명을 먹이 삼아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죽음의 문화에 사로잡힌, 참으로 비루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문화로 시선과 발걸음을 돌릴 때, 더 큰 인류애로 참된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23면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희년의 아주 특별한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는 ‘평화를 향한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축성이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세례 축성 때 파스카의 인호를 받는다. 그러니 축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축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살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원의에 따라 지식기반 사회, AI 기술 혁신, 기후위기, 초고령화 등 사회적 이슈가 혼재하는 세상 안에서도 시대를 초월해 내적 가치들에 투신하며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축성생활자들(수도회, 사도 생활단, 재속회)이다. 이들을 위해 교회가 특별한 시간을 내어준 것이다.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시작과 마침의 시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2024년 11월 21일과 수도생활 쇄신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긴밀히 연결된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는 축성생활자 저마다가 그 의미를 심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축성생활자 스스로가 그 본질적 의미를 깨달아 핵심을 살도록 시간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축성생활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인류의 빛」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세례 은총의 더욱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복음적 권고들을 서원하여 사랑의 열정과 완전한 하느님 예배를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에서 해방되고자 하며, 하느님 섬김에 더욱 깊이 봉헌되는 것이다.”(제6장 44항) 이를 통해 축성생활을 신학(교회론) 안으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완전한 사랑」에서는 수도 생활의 시대 적응과 쇄신(Aggiornamento)을 언급했다. 수도자 신분의 중요성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그 생활 양식을 철저히 본받아(마르 3,13-14 참조)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상의 모든 것 위에 들어 높이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지닌 사랑의 힘과 교회 안에서 기묘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모든 이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도자는 교회의 삶과 거룩함에 속한다.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는데, 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부활, 즉 파스카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수도자들이 사는 사회는 명예와 부와 건강을 따라 살도록 부추긴다. 이 흐름은 대부분의 사람들 삶의 양식 안으로 흘러 들어와 명예를 추구하고, 건강을 챙기며 자신을 채우며 살도록 욕망하게 한다. 이 가치가 물질주의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돈의 힘으로 축적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18항) 보이게 하는 이 저속한 체제는 창조주 없이 사는 세속 사회를 부추긴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강생하시고, 기름 부음 받으시며(축성) 구원의 역사를 써가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추세로 빚어지는 성소자의 감소와 수도자들의 고령화로 축성생활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그 틈새로 본질에 충실한 축성생활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불필요한 가치들을 잘라내고 하느님만 남는 영의 힘, 그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앗(이사 6,13 참조)이 트여 축성생활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근원적 질문을 품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려는 이들이 있는 한 축성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이렇게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 안에 진리가 살고 있다.”(「참된 종교」 39권 72장)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23면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의 순환

지난 9월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50차 WWME 아시아회의’에 다녀왔다. 부부가 하나 되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메리지 엔카운터(ME) 운동’을 함께 하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대만, 중국,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인도, 필리핀, UAE, 한국 등 12개 나라 대표들이 모였다. 올해로 50회째를 맞는 뜻깊은 회의여서 세계ME 대표인 다니엘·클라렐 부부와 마이클 주교도 내내 함께했고, 지난해 말 한국대표가 된 우리 부부에겐 처음 참석한 아시아회의였다. 일주일 동안 많은 걸 보고 느꼈는데, 무엇보다 사랑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값진 시간이었다. 한국의 ME 운동도 교구마다 사정이 다르고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구가 있듯, 아시아 각국 역시 형편이 달랐다. 특히 일본과 대만은 발표팀 부부와 사제가 부족해 ME주말 개최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외로이 작은 불씨를 지키듯 ME를 이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회의 기간 중 일본 대표팀 히로미·히사미 부부와 에드몬드 신부, 대만 대표팀 에디·에스터 부부와 안토니오 신부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과 대만 현지에서 사목 중인 한국인 사제들 가운데 ME주말 발표를 맡을 수 있는 분들을 연결하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 발표팀도 필요하다면 파견하기로 했다. 한국ME가 일본과 미국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듯, 이제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차례라는 것을 절감했다. 받은 사랑은 필요한 곳으로 다시 흘러갈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한국ME의 첫걸음은 1976년 주한미군을 위한 영어 주말이었다. 미국에서 파견되어 한국에서 사목 중이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마진학 도널드 신부와 주한·주일미군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군속 부부들이 발표팀을 맡았고, 영어주말에 참가한 한국인 부부들이 이듬해 1977년 3월에 첫 한국어 주말을 열면서 한국ME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가 초창기에 중국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크나큰 도움을 받아 뿌리내렸듯, ME 역시 이웃 나라 사랑의 손길로 싹틀 수 있었다. 아시아회의 중 소풍 시간에 가보았던 ‘착한목자대성당’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성당은 2대 조선대목구 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엥베르 주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는 조선 입국을 앞두고 한동안 싱가포르에 머물며 준비했는데, “목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어도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조선에 들어와 한국교회를 돌보다 순교했다. 싱가포르 신자들은 그를 기려 성당을 세우고 유해를 모셨다. 목숨을 걸고 한국의 양들을 찾아온 엥베르 주교와 샤스탕, 모방 신부의 사랑을 싱가포르에서 느끼며,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순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막미사에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평생 ME 운동을 해온 97세 미카엘 아롤 신부를 만났다. 그 역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싱가포르ME의 역사이자 산증인이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폐막미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이었다. 그처럼 젊은 날 아시아의 다른 나라 한국에 와서 평생 사랑을 쏟고 올해 선종하신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떠올라 감사기도를 드렸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현 싱가포르ME 대표사제인 도미니크 신부께 한국인으로서 깊은 감사를 전했다. 아시아 안에는 아직 ME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베트남과 태국이 그렇다. 현지 한국인 부부들을 위한 한국어 주말을 열고,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 부부들을 함께 초대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또 다른 그늘을 만드는 사랑의 순환이 아시아로 또 세계로 퍼져가는 꿈을 꾼다. 이번 아시아 회의는 연례적인 회의라기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준 깊은 체험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두지 않고 다시 흘려보낼 때, 사랑은 더 커져 돌아온다. 사랑은 살아 움직인다. 머무르지 않고 흐른다.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그 사랑이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오늘 누구에게 되돌려 줄 것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23면

출산에서 낙태까지, 생명이 거래되는 시대

국가생명윤리정책원 홈페이지에는 생명윤리 관련 기사들이 연이어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드러난다. 특히 생명의 시작 단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려는 사례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여러 쟁점이 겉으로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첫째, 성별 선택을 위한 원정 출산이다. 최근 국내 일부 예비 부모들이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얻기 위해 태국으로 출산 원정을 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정 성(性)을 선택할 목적으로 배아를 생성하거나 수정하는 행위를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23조 제2항 제1호에서 금지하고 있다. 이는 생명을 개인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성별을 가려 출산하려는 부모의 개인적인 욕구나 선호는 생명을 상품화하는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태국의 IVF(체외 인공수정) 전문 병원들은 ‘성별 선택 가능’, ‘착상 전 유전자 검사’ 등을 내세우며 한국인 고객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최근 1~2년 사이 한국인 내원 사례가 급증한 것으로 언론은 전한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을 욕구 실현의 수단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둘째,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다. 영국에서는 80대 이상 고령부부들이 해외에서 금전 거래(대리모)를 통해 아기를 얻고, 영국 법체계에서 합법적 부모로 인정받으려 한 사례가 논란을 일으켰다. 시민단체들은 이를 “아이의 권리보다 성인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제도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2023년 60대 남성이 대리모를 통해 자녀 3명을 얻은 사건이 큰 파장을 낳았다. 최근에는 8000만원을 주고 계약한 대리모가 출산 후 금전을 추가로 요구하며 아이의 출생 비밀을 폭로했고, 이후 수감 중에 친모임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법원은 이를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무효로 판정했다. 하지만 생명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사례라는 점에서 깊은 논란을 남겼다. 셋째, 난임 시장의 확대다. 난임 시술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 확대와 맞물려, 국내 난임 치료제 시장이 약 1000억 원 이상 규모로 추산된다. 시험관 시술이 급증하면서 1년 새 새롭게 생성된 배아가 80만 명에 달했다. 같은 해 폐기된 배아는 53만 3266명으로 전년 대비 30.8% 증가했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이는 배아가 점점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폐기되는 ‘소모품’처럼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정부의 낙태 약물 도입이다. 이재명 정부는 낙태 약물 도입을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정 과제로 확정했다. 정부는 낙태법 공백을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생명을 약물을 통해 쉽게 결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낙태 약물이 여성에게 가져오는 대량 출혈, 극심한 복통, 불완전한 유산 등 부작용의 위험은 간과된 채, 태아의 생명 보호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선택된 생명만이 보호 가치가 있다는 생명 경시 현상을 정부가 결과적으로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상의 사례들은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생명을 시장 논리와 개인 욕구 그리고 국가 정책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생명의 상품화’라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생명이 욕망 충족이나 이윤 추구 혹은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 전락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개인 선택이나 제도적 편의로만 볼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권리가 어디까지 생명 존중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혹은 생명을 도구화하면서 실현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3면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온몸을 흰색 가운으로 두르고 머리에는 두건을, 입에는 마스크를 쓴 보건소 근무자가 쉬는 시간도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코에 면봉을 넣어 체액을 채취하는 코로나19 신속 항원 검사의 풍경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의 모습처럼 아른하기만 하다. 매일 텔레비전에 나와 브리핑하던 사람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내 흰머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해안과 남부지방에 산불이 났을 때 그을음으로 가득한 얼굴로 길바닥에 지쳐 쓰러졌던 소방관들과 진화대원들의 모습에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짧은 순간이든 오랜 기간이든 최선을 다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안녕과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극심했던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그야말로 창조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 좋은 세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치명!’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불렀다. 당시의 사회는 대역죄인이라는 말로 그 역행을 용납하지 않았다. 투옥과 고문과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반상과 남녀의 구별이 분명한 세상에서 평등을 외쳤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온 마음과 몸으로 받아 안은 고난이었다. 더구나 멀고 먼 타국에서 진리를 전하고자 고향을 떠나왔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사서 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하고자 폭력을 사용하거나 세를 모아 대항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리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1886년 조불 조약 체결 이후라면 가능했을 일을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백 년을 앞서 살았는지 실로 동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각 분야에서 불가능하다는 일을 하는 사람들, 대세를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다 지어진 군사기지 옆에서 평화는 무력으로 이룰 수 없다며 전쟁기지 폐쇄를 외치는 사람들, 이미 완공된 4대강 16개의 보를 해체하라는 환경운동가들, ‘아직도 그 타령’이냐는 소리를 들으며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당연한 세상에서 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하는 사람들…. 조금 더 세상이 좋아지면 가능할 일을 하필 그때, 그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도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일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 그나마 그 하루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하루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람들, 매달 갚아야 할 빚으로 메꾸고 또 메꾸는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치매 어른을 모시며 긴장과 불안을 살아가는 사람들, 알코올이나 도박과 게임 중독으로 폐인이 된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도 그 하루를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 던져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은 유혹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찾아올 텐데, 끝내 그 손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 오늘날의 순교가 아닐 수 없다. 그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그 최선이 덧없고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늘 이야기하고 꿈꾸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살해되며 도살된 양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는 세상을 확신하며”(로마 8, 36-38 참조) 살아가는 최선이기를, 다른 이를 짓밟고 이겨내는 최선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순교자 성월을 보낸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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