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외다

초등학교·중학교 학창 시절, 성당 인근에 있던 수도원 덕분에 신문물을 조금 빨리 접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온 수사님들이 선보이는 슬라이드는 그야말로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5원 내면 빌려주는 만화경을 손에 넣고, 이 막대를 내려 몇 컷 안 되는 만화 장면들을 신기하게 보고 또 보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5원짜리 만화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예수님 이야기를 성경 줄거리에 따라 철커덩 철커덩 기계 소리와 함께 빛나는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기계의 신기함에 더 마음이 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영화 상영을 한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둥근 휠이 짜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서 빛 속의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포터블 영사기는 마음에 콕하고 들어왔다. 미아리에 있는 바오로딸 수녀원에 가서 필름을 빌려오는 심부름을 도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어느 순간 빔프로젝러라는 것이 등장하고, 이제는 안경 같은 것을 눈에 쓰면 영상이 펼쳐지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이라는 것도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교내 백일장이 되면 원고지 몇 장을 준비해야 했다. 200자 원고지에 칸을 채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는데, 신학교에 오니 학교 마크가 찍힌 리포트지에 과제를 써서 제출하게 되었다. 이도 잠시, A4용지를 끼워 넣고 손가락이 아프게 찍어 대던 마라톤 타자기가 활약을 했다. 신학원 복도에 울려 퍼지는 ‘타닥 탁탁’ 소리는 리포트 제출 마감이 다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신학교 때 일찌감치 타자기를 손에 익힌 덕분에 군대에 가서는 행정병이라는 꽃보직도 맡을 수 있었다. 먹지를 세 장이나 끼워 타자를 하다보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지곤 했었다. 막상 제대하고 돌아온 신학교에서는 타자기는 사라지고 감광지에 사진처럼 찍혀 나오는 워드프로세서가 활약하고 있었다. 서품을 받고 첫 보좌 신부 때는 도트(Dot) 프린터가 강론을 뱉어냈고, 곧이어 새로운 컴퓨터와 프린터로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뒤로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타자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7~8년이라면, 스마트폰에서 태블릿으로의 발전은 불과 1~2년 사이였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문물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 익히던 것들이 이제는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것은, 세월이 빨리 덤비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든다. 카페며 식당에서 주문하려고 문 앞에 서 있고, 식탁마다 매달려 있는 무인 주문 시스템의 기세에 눌린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래서 포기한 것들도 꽤 된다. 쓰고 그리고 구성하는 다양한 앱을 사용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하고, 다들 잘한다는 PPT(피피티)도, 동영상을 편집하는 것도, 어린이도 한다는 유튜브 방송도 먼 산 너머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제 포기해야지’ 하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본의 세상은 내 주머니 속의 작은 알갱이라도 빼먹기 위해서 조금 더 사용하기 쉬운 문명의 이기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쫓아가야지 하다가도 시대에 뒤처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이용하지 못 하는 것도 있어서 “그래, 여기까지만!”이라며 또 한 걸음 가기도 한다. 따라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어정쩡함을 동년배끼리 서로 나누며 허탈함을 물리기도 하지만 ‘낀 세대’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을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외다’로 뽑았는데, 위안으로 삼기에는 어째 어색하기만 하다. 그 수많은 변화를 겪는 인간들의 호소에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주를 통하여 구원하실까?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3면

하늘이 전하는 침묵의 외침

아일랜드는 한때 ‘비의 땅’이라 불렸다. 연중 절반은 비가 내리고, 안개 낀 하늘이 일상이던 곳. 그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뜨거운 햇살을 일상으로 맞이했다. 푸른 하늘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현지인들조차 ‘이례적인 날씨(Unusual Weather)’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기후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뉴스는 아일랜드 일부 강과 호수에 녹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청정지역의 상징이던 곳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지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기온과 수온 상승, 농업 폐수, 산업 오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흐르던 물이 고이면, 생명의 물은 곧 죽음의 물이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맑은 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세례의 상징이며, 내면 정화의 은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다. 그 물이 병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침묵이 깊어만 간다. 맑디맑은 물의 침묵 속에 이는 경고음을 듣는다. 비슷한 시기, 4월 말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수 시간 동안 국가 전체가 멈춰 섰다. 열차는 멈추고 공항은 마비되었으며, ATM과 통신도 끊겼다. 마트는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도로는 멈춘 차량으로 가득 찼다. 원인 중 하나로 기후로 인한 대기 진동이 지목됐다. 포르투갈 전력 당국은 “스페인의 극심한 온도 변화가 드문 대기 현상을 일으켜 정전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자, 전력이라는 문명의 축도 한순간 붕괴된 것이다.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60% 이상을 풍력과 태양광에 의존하는 재생에너지 선도국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지 전력만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우리가 누리는 시스템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기후의 요동은 제도와 문명, 일상과 신앙까지 흔들어 놓는다.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권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 “아무리 부정하고 숨기며 위장하거나 상대화하려고 하여도, 기후 변화의 표징들은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5항)고 하셨다. 이 말씀은 통계나 분석이 아니라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경종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 그러므로 하느님의 땅에 대한 책임은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한 균형을 존중해야 함을 의미한다.”(62항) 하늘이 맑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자연의 질서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것은 취약한 존재들이다. 수도자의 삶은 본래 자연과의 조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 되는 삶은 자연의 리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아프면 기도도, 노동도 고통스러워진다.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마음의 전환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삶을 익혀야만 한다. 물과 흙, 공기와 햇빛을 ‘자원’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공동 피조물’로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필요하다. 태양과 달을 형제요 자매로 부르던 성 프란치스코의 눈길 위에 간절한 염원이 담긴 실천 하나가 절실하다. 지구가 보내는 이상 징후, 이 지속되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침묵으로 응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침묵으로 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의 깊은 탄식과 소리 없는 외침은 희망이 된다. 그 침묵의 응답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며, 고요히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연결된 연대의 실천이다. 더 많은 소비의 흔적이 아닌 더 깊은 책임의 자취이다. 그리고 그 자취 위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3면

‘인생은 음미체!’

쉰 살을 막 넘겼을 때 마음에 새긴 내 삶의 모토는 ‘인생은 음미체!’였다. 음악, 미술, 체육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벗이자 동반자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40대 때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다. 집안과 직장과 사회에서 내게 주어지는 일들과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도 몸도 몹시 힘들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아서라는 걸 깨닫고 삶의 태도를 바꿨다. 일을 줄이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늘렸다. 그렇게 친구가 되어 준 ‘음미체’가 나를 지켜 주었다. 돌아보면 어렸을 적부터 ‘음미체’와 함께 살아왔다. 주일 아침은 아버지께서 틀어 주신 가곡이나 영화 음악을 들으며 잠에서 깼고, 덕분에 음악과 친해졌다. 중학생 때 형이 치는 기타를 어깨너머로 배운 덕에 지금도 아들과 함께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른다. 동네 만화가게에서 살다시피 한 덕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중학교 땐 미술부 활동도 했다. 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고, 축구와 탁구, 테니스까지 ‘운동권’으로 살았다. 우연한 기회로 배우기 시작한 트럼펫 덕분에 교무처장 보직을 맡았던 2년을 잘 건너왔다. 출근 전 한 시간 트럼펫 연습 시간이 숨 쉴 공간이 되어 주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제자와 후배들에게도 음미체를 권한다. 출근 전 한 시간쯤 음미체에 몰입한 뒤 일과를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전 직장 후배는 내 권유로 아침 수영을 시작한 뒤 검도까지 이어져 지금은 건강한 60대를 산다며 고마워한다. 일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쉬고 또 즐기며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음미체로 함축되는 ‘문화, 예술, 체육’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 준다. 새 정부의 할 일이 많겠지만 ‘음미체의 생활화, 문화 예술의 일상화’도 중요한 국정 과제로 삼아 주길 바란다. 선진국이지만 국민은 정작 행복하지 않은 대한민국을 더 건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에도 음미체가 단단히 한몫할 것이다. 교무처장으로서 꿈꾼 일 중 하나는 신입생 교양 교육을 인문학과 음미체로 바꾸는 것이었다. 긴 세월 입시 지옥을 건너 대학에 온 새내기들이 1년 만이라도 다른 공부는 다 내려놓고 인문학과 음악, 미술, 체육을 배우며 산다면 문화 예술로 샤워를 한 것처럼 상큼하고 개운한 젊은이로 거듭날 것이다. 악기를 배우고 협주와 합창을 해 본다면, 그림을 그리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본다면, 몸을 움직여 춤추고 달리고 날아오르게 한다면 그만큼 좋은 교양 교육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이 못내 아쉽다. 음미체의 생활화는 어디서든 가능하다. 재작년에 우리 대학 성악 동호회에 가입해 귀한 선물을 받았다. 음악 전공 지도 교수와 대학원생들 덕분에 성악에 낯선 교직원들이 매주 성악 공부를 하고 학기 말에는 공연도 한다.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게 떨리는 일이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감사하고 성취감을 느낀다. 좀 더 갈고닦아 졸업생과 신입생들 앞에서 공연도 하고, 학교를 위해 궂은일로 애쓰시는 분들을 위한 뜻깊은 공연도 해 보고 싶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나라가 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3국이다.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1989년 8월에 세 나라 국민 200만 명이 620킬로미터 인간 띠를 이었고 한목소리로 ‘일어나라 발트야’ 노래를 불러 2년 뒤 독립을 쟁취했다. 4~5년마다 온 국민이 참여하는 ‘노래와 춤 축제’도 열리는데 수만 명이 함께하는 군무와 합창은 2008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더욱 빛이 난다. 학교, 직장, 교회, 마을에 그리고 도시와 지역과 온 나라에 음미체가 일상이 되고 생활이 되면 좋겠다.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 함께 어울려 배우고 익혀 풍요롭게 나누는 음미체로 ‘문화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보자. 인생은 음미체! 국가도 음미체! 행복에 이르는 길, 음미체!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3면

“너희가 바르게 살면, 세상도 바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대다”

작년 12월 이후 우리 사회는 매우 추한 사실 하나를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상식이 무너진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 만큼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지난 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벌어졌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현실에서 겪으며, 우리 사회는 ‘정의’와 ‘진리’가 ‘이익의 추구’ 속에서 얼마나 희석되고 상대화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고대 철학자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는 “정의란 곧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 말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와 진리’를 외치고, 그 개인들이 다수를 이루게 될 때, 정의는 결국 ‘강자의 이익’으로서 구현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기반하지 않은 정의는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 진영을 나누고, 대립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봅니다. 어쩌면, ‘진리’ 자체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진리와 정의의 방향이 다수의 힘, 즉 누가 강자의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쉽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단 지성은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파악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경제적인 측면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통 방식과 진리, 정의에 대한 이해입니다. 최근 선출된 레오 14세 교황은 우리가 현실에서 마치 바벨탑과 같은 혼란스러운 언어 구조 속에 빠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이념적이고 편향되며 사랑이 결여된 언어 속에서 우리가 소통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소통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형성”합니다.(언론인들과의 만남, 2025년 5월 12일) 이는 우리 사회의 언론들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한 소통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황은 또한 가정의 중요성과 함께, 태어나지 않은 생명(배아와 태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병자, 실업자, 시민, 장애인 등 우리 사회에서 연약하고 취약한 이들의 존엄을 보장하는 노력에서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외교사절단과의 만남, 2025년 5월 16일)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점점 약자와 취약한 이들을 이념적이고 편향된 언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다수가 될 때, 사회는 결국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인권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조차 점점 더 상대화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또한,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진리 없이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특히 말의 의미가 모호하거나 이중적으로 사용되어 현실을 왜곡할 때, 참된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마도 교황이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설교」 80, 8)을 인용했듯, 나부터 가장 연약한 존재인 배아에서 모든 인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3면

5월과 6월 사이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거세고 힘이 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의 차가 수시로 번갈아 지나가면서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6월 3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들이 더 잘할 수 있다’라거나, ‘다른 편의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을 담은 높은 톤의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그렇게 6월이 되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커다란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이다. 정치, 경제, 복지, 개헌, 교육, 주거, 노동, 일상생활, 문화와 미디어, 의료, 기후 환경, 과학기술, 외교, 통일과 국방, 공동체. 어느 하나도 뒤로 물릴 수 없을 중차대한 분야들에 대해 각계각층의 요구 또한 쌓여만 간다. 한편으로 저 많은 약속이 과연 물리적으로 지켜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켜켜이 쌓이고 있다. ‘하느님이 오셔도 안 되는 일’이라며, 미리부터 손사래를 치며 정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는 이도 종종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 많이도 언급하셨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기에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며, 참된 신앙은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여 이 지구를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늘 급진적이라고 오해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만 그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니다. 보수적이라고 오해받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당신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 국가 질서의 건설은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로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28항) 라며 정치 참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이제 6월이 되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리에는 새로운 권력이 자리한다. 한편에서는 기대가 차오르는 지금, “다른 모든 민족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 병사로 삼고 일을 시키며, 딸들을 데려다 시중을 들게 할 것이요, 세금을 거두어 가고 종으로 부릴 것이라는 예언자 사무엘의 우려가 다시금 떠오른다. 이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정치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다가가야 한다. 당장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지난 겨울 광장에서 이 땅의 주인들이 목 놓아 부르짖었던 정의에 대한 갈망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많은 숙제가 있지만 우선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창조물이 창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과 관계된 일들이다. 모든 창조물은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생명을 저버리고 만들어낸 이상세계는 있을 수 없다. 눈앞의 이윤을 위해서 어느 한 생명이라도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시작부터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눈물을 닦아주어도 시원치 않을 그 일꾼이 억울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억울한 사람, 억울한 소리가 제대로 들려 그 한을 풀어주는 일, 하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와 일터와 쉼터로 돌아가는 것, 안전이 보장된 일터에서 일하고 쉼이 보장된 거처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것, 모두가 행복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요 소명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 기다리는 대통령

14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끊임없이 외쳤지만, 항상 개인은 먼저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자기 비움과 내면의 정화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했던 이의 고백은 여전히 계속되고, 성녀의 내적 자세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지난 몇 년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함께 넘어왔다. 정의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숨결마저 메말라가던 때, 많은 이가 침묵과 인내로 그 시간을 견뎌 이제 다시 역사의 한 장을 이룰 자리에 다다랐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좌절 대신 성찰을 택했고, 분노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를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līmen’에서 유래된 ‘리미널리티(liminality)’로 정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출신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이를 “통과의례에서 나타나는 중간단계, 곧 이전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로는 아직 진입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 전환기에는 사회적 정체성과 질서가 잠시 정지되고,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침묵을 넘어 변화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리미널리티 상태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지에 대한 뼈저린 통찰을 통해 여기에 도달했다. 익명성 안에서 진실을 외치기 위해 영하의 추위를 견딘 용기, 광풍같이 몰아치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은 양심, 사사로운 이익보다 국가를 위해 정의를 택했던 수많은 이가 바로 함께 문지방을 넘어선 이들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무너진 나라 살림, 종식되지 않은 내란, 임계점을 넘어선 기후변화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은 누구여야 하는가? 그는 단순한 권력의 수혜자가 아니라, 이 통과의례를 함께 견뎌온 국가 공동체의 동반자여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책임으로,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나아갈 줄 아는 이여야만 한다. 신앙의 지침, 삶의 지침을 몸소 보여주시고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1936~2025)는 “더 나은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며, 사랑으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정치적 애덕’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180항 참조) 이 말은 대통령이 단지 행정의 수반이 아닌 국민의 상처를 보듬고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할 사명의 자리, 곧 공동체 전체의 존엄과 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놓는 사랑의 자리임을 일깨운다. 그 자리는 정치적 셈법을 따지는 계산대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눈물과 목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하는 윤리적 감수성을 지닌 책임의 중심지이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동반자로서의 사명 또한 품어야 하는 자리다. 회복의 정치는 분열이 아닌 연대의 언어를 사용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통령은 ‘정의의 검’이 아니라 ‘정의의 저울’을 들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은 더 많은 공약을 원하지 않는다. 더 깊은 책임, 더 단단한 도덕성, 더 낮은 자세를 원한다. 먼저 낮아지고 먼저 회심할 줄 아는 지도자만이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대의 변화를 지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본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필리 2,6-7)신 분이시다. 새로운 대통령 역시 통치의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세로 있기를 바란다. 기다린다,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도록, 그 곁을 함께 걸을 대통령이 이 나라를 온전히 껴안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3면

레오 14세 교황 탐구

새들은 하늘의 메신저일까? 2013년 콘클라베 때는 비둘기가, 이번에는 갈매기들이 굴뚝 주변을 서성일 무렵 기쁜 소식이 왔다. 새벽에 교황 선출 소식을 듣고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어느 분이 나타나실지 궁금했는데 이윽고 등장한 새 교황은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었고 교황명은 ‘레오 14세’였다. 콘클라베 참여 추기경의 80%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한 분들이니 교황의 뜻을 잘 이어갈 분이 뽑힐 것으로 믿었고, 가까이 불러 중책을 맡긴 교황청 장관 중에 한 분일 것으로 추측했다. 유흥식 라자로 성직자부 장관의 교황 선출도 기대했는데 주교부 장관을 맡으셨던 분이 뽑혔다. 새 교황은 어떤 분일까? 미국인 첫 교황,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출신 첫 교황이라며 언론들이 소개했지만 충분치 않아 하루 종일 레오 14세 새 교황을 탐구했다. 교황이 되기 전 프레보스트 추기경의 70여 년 삶을 함축하는 키워드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와 ‘페루 선교사’일 것 같다.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두 형들과 미사 놀이를 할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에 입회해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페루에 파견되어 30대의 10년은 선교사로, 60대의 10년은 교구장으로 20여 년을 페루에서 살았다. 라틴아메리카의 어려운 여건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긴 세월이 그분의 삶에 깊이 배어 있을 것이다. 40대 이후 15년은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관구장과 총장으로 살았다. 총장 재직 시절에 한국에 있는 수도회를 다섯 번 방문하실 만큼 전 세계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를 돌보는 일에 열심이셨다.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인연을 다 알 수는 없지만, 2014년 말 수도회 총장 임기 12년을 마친 프레보스트 신부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교로 서품한 뒤 페루 치클라요교구장 소임을 맡겼고, 2023년에는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영성은 ‘일치’를 강조한다고 알고 있다. 자신과 일치, 이웃과 일치, 하느님과 일치를 통해 한마음 한뜻의 공동체를 꿈꾼다. 이런 영성으로 페루에서 선교사로 살아온 분이 교황이 되셨다. ‘레오’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했는데 아마도 교황 레오 13세를 따르려는 뜻 같다. 1891년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해 가정과 노동과 인권이 위협받던 격동기에 국가, 고용주, 성직자가 할 일을 제시하고 ‘사회교리’의 토대를 마련한 레오 13세의 업적은 컸다. 가톨릭교회가 사회문제를 보듬어 안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의 레오 13세처럼, 21세기 초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격동기의 또 다른 ‘새로운 사태’를 풀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 같다. 교황 선출 직후 첫 인사 말씀 중에 ‘모두의 평화’, ‘무장이 해제된 평화’, ‘하느님과 세상의 다리와 같은 그리스도’, ‘대화와 만남으로 건설하는 다리’란 표현도 눈길을 끈다. 짧고 얕은 교황 탐구를 요약하자면, 레오 14세 교황은 ‘다리를 놓는 교황’이 될 것 같다. 필요한 때에 좋은 분이 뽑혀 큰 일을 하실 것 같다. 그분 홀로 일하게 하지 말고 우리도 함께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자. 젊은 날 즐겨 불렀던 젠노래 ‘다리’의 가사를 떠올리며 새 교황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필요한 곳마다 다리를 놓아주시라고. 남과 북 사이에도. “온 세상 곳곳에 수많은 강이 흐른다. 길고 깊게 흐르는 강 우리를 가른다. 서로 물 건너 마주 바라보지만 아, 만나지 못한 채 그 눈길은 불신으로 가득 차. 어찌 강 위로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강은 장벽을 쌓는다.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양편 언덕을 갈라선 부자와 가난한 이들. 흑인들은 건너편 둑 위에 있는, 아- 백인 형제들을 멀리서 바라다본다. 어찌 강 위로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7면

‘삶의 질(quality of life)’ 평가에 대한 성찰

최근 ‘삶의 질’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의미는 무엇이며 어떤 기준으로 판단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삶의 질’ 개념이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 쾌락주의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때로는 안락사나 우생학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여 년간 ‘국민 삶의 질 보고서’를 매년 발표하는데, 지난 5년간 문제의식은 매년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 달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며, 다양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유례없이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높은 자살률 등 사회전반의 활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빈부격차 … 등 다양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에 기존 경제 성장 중심의 정책에서 삶의 질 제고로의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삶의 질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객관적인 생활 조건과 이에 대한 국민들의 주관적 인지 및 평가로 구성된다”고 정의한다. 동시에 “한 사회의 경제 및 사회 발전 수준과 구성원의 가치 및 규범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우리가 속한 사회가 무엇을 ‘바람직한 상태’로 인식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2000년대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부를 삶의 바람직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효율성과 유용성, 개인의 경제적 상태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건강 악화로 인한 생산성 저하나 사회 기여도의 감소, 실업 등은 삶의 질 저하로 해석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도 관련이 있다. 즉, 사회적 외적 조건과 개인의 주관적·임의적 가치관에 의한 삶의 질 판단이 생명을 경시하거나 생명을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제고하려면, ‘삶의 질’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 개념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문제는 ‘삶의 질’ 개념이 점점 인간 생명의 서열화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오랜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고령의 만성질환자들을 부담으로 간주하거나 ‘비생산적인 생명’으로 낙인찍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명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통해 그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여,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할 생명에 대한 사회적 의무를 져버리는 것이다. 물론 의료자살이나 안락사는 표면적으로 그것이 개인의 자율적 선택임을 강조하며, 존엄성의 표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매우 축소하고, 왜곡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가 이러한 삶의 질 개념에 둘러싸일 때, “인간 상호 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이 무시된다”고 경고한다.(회칙 「생명의 복음」 23항) 우리에게 ‘삶의 질’에서 삶이란 불가침성과 존엄성 위에 기초한 삶이다. 그렇기에 ‘삶의 질’ 개념 역시 이 전제 위에서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질로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무엇보다 인간 생명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생명권에 기초할 때만 삶의 질을 논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3면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하소서

12년,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알렸던 그때로부터 한 해 한 해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오셨던 교종께서 하느님 집으로 돌아가셨다. 많은 이에게 참된 제자 됨의 삶을 보여주셨던, 그렇기에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었을 12년이었다. 참 많이도 닮았다. 3년 공생활을 하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과 만난 사람들은, 12년 종들의 종으로 살아오신 교종의 그것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고 자신도 포기했던 병자들, 세상의 탐욕과 권력에 지배당해 제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이른바 마귀 들린 사람들, 사람 취급받지 못했던 이방인들, 집도 일자리도 빼앗겨 갈 곳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 더럽고 천하다고 홀대받는 사람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을 빼앗긴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이 돌보아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내민 예수님의 손은 다시금 그들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기에 충분한 지지이며 연대였다. 작은 쪽배에 몸을 맡겨 지중해 바다를 건넌 사람들, 견뎌내지 못해 끝내 숨져간 동료와 자식들을 채 묻지도 못하고 앞길이 막막했던 이들을 즉위하자마자 찾아간 교종이었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며 힘의 논리로 일관하는 강대국들의 얍삽한 처신에, ‘사람의 생명과 피조물의 안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앞세웠던 수많은 메시지였다. 그렇게 프란치스코 교종은 어떤 이들에게는 밉상이었다. ‘거리에서 노숙자가 죽어가는 것을 외면하는 언론이 주가의 변동에는 그처럼 예민한 뉴스로 다룬다’는 일침에,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비난에,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씀에, ‘가난한 나라에 대한 책임이 그들을 침탈했던 강대국에 있다’는 선언에 얼마나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이 흠칫했는지 모른다. ‘교회는 야전병원이 되어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에, ‘당신이 앉아 있는 교종의 자리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고언에,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지 말고,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에 또 얼마나 많은 종교인이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는 와중에,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중립은 없다’는 엄중한 가르침은 길 위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이에게 이정표였다. 그러니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밉상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등 당대의 지배층에 밉상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밉상스러웠던 그 말과 행위가, 어떤 이들 특히 삶의 나날이 고통으로 이어진 이들에게는 젖과 같은 고소함이요, 꿀과 같은 달콤함이었다. 그로써 고통스러운 하루를 견딜 수 있었고, 그 위로로 꺾인 무릎을 펼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순례자들에게는 내비게이션이었고, 젊은이들에게는 빼앗겼던 희망이었으며, 이주민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신 분께 ‘시대의 성인’, ‘가난한 이의 성자’ 등 수많은 찬양과 숭배에 가까운 서술이 부여된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이분을 크게 현양하고 영웅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저 옆집에 사는 맘 좋은 아저씨로 남기고 싶다. 우리와는 다른 부류의 존재라고 여기며 격벽을 세울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가 그와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삼을 것 같아서 오히려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두 가지 말씀,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하소서”와 “옆집의 성인이 되어주십시오”를 기억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각 세대의 언어로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께 인사드리고 싶다. 안녕, 호르헤 할아버지! 평안하세요, 프란치스코 아저씨! 잘 가시게! 곧 봄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우리 모두의 친구!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3면

또 하나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앞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엾은 마음’과 특정 대상에게 내미는 손의 촉감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어 간다. 차갑고, 딱딱하고, 마음 없는 기계와 접촉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과 미래 세대에게, 타인에게 공감하는 연민과 손길이 닿는 접촉의 힘이 과연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제는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삶의 여러 부분이 큰 변혁의 문턱을 넘었다.(교황청 AI 연구 그룹 저 「인공지능과 만남」 참조) 인간의 성장은 한계를 모른다. 이 과정은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창세 11,3) 과연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멈춰 단지 외적 발전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고귀하고 탁월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와 가치’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가 간과된다면(「찬미 받으소서」 181항 참조) 아무리 훌륭한 혁명이라도 실패할 수 있다. 대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인문 사회학 부문의 학과들이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으니, 물결처럼 밀려와 우리 앞에 우뚝 선 4차 산업혁명, 인간처럼 작동하는 AI 로봇을 과연 어떤 철학적 가치 아래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디지털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인공지능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 조절이 어려운 단계로 진입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가변성(Variabilit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디지털 알고리즘의 두 가지 쟁점은 직시해야 할 부분이다. 벌써 몇 년 전에 학생들과 TED talk(학술 강연 비디오) 시간을 통해 만난 인간형 휴머노이드 로봇 소피아. UN에서 자신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공신경망을 통해 복잡한 학습 과정을 거쳐 예술 분야도 학습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 경악한 적이 있다. 인공지능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을 생산한 인간의 상상을 넘어 다른 존재로 변신할 우려 또한 짐작해야 할 것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기반을 둔 우주의 작은 행성 지구에서는 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사태」는 18세기 중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사회·경제 등의 큰 변화를 겪으며 레오 13세 교황(1810~1903)이 1891년 발표한 가톨릭교회 최초의 사회회칙이자 노동헌장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던 시대에서 욕망의 부추김으로 자연을 착취하여 성장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산업화는 우리에게 늘 인간존재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한다.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의 소유 자체가 ‘권력’에 중요한 접근 경로가 되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사회구조에서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가 사회를 관리하거나 운영·조작할 수 있다.(기획재정부 「시사경제용어사전」 참조)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조한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Technocratic Paradigm)의 해악을 기억하게 한다. 식별 없이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는 경제 논리와 정치는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찬미 받으소서」 109항 참조) 과학기술이 삶의 질을 드높여 사람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의 골을 더 깊어지게 한다면 여기서 잠시 멈추고 삶의 본질적 의미를 되물어야 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고독하게 걷는 회심의 여정을 과연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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