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품고 걷는 십자가의 길 위에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가난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어긋나고 균열이 가 폐허 된 세상 곳곳을 바라보며 ‘희망의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간을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실존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큰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 길을 내시고, 급기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 솟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내신 예수님의 우주적 사랑을 거슬러 사사로운 생각의 틀에 붙잡힌 악의 하수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은 집행되었다. 여전히 행해지는 불의의 한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희망을 품은 순례자’로서 발걸음을 떼어갈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 정치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사유’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정을 다루며,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를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공무원’으로서의 아이히만의 진정한 무능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보고했다. ‘현실에 맞서 말할 수 없는 무능’,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무능’,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 안에 깃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닌 이가 곧 아이히만이다. 악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머물러 아무 식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드러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명령 혹은 사적 안위만을 따르는 것은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참사, 심지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낳은 참상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직사회 상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해 수행하는 것이 명령 혹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질이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상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군 장교 중에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뒤로 메라고 한 이도 있었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맡은 직위에서 숙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유하는 상급자는 항명하며 수하들을 바르게 통제할 수 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12·3 비상계엄에 대항했던 성숙한 시민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진실한 증언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성 있는 이들과 달리 법 지식을 악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조인들과 위헌·위법에 위증을 일삼는 최고 통치권자에 대해 마땅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다려 왔다. 십자가는 생사를 넘나드는 식별을 통해 수락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예수님이 받아안은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답하는 말씀(프란치스코 교종)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서도 묵묵히 정의를 지켜내고, 마음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길어 올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잠깐 멈춰 십자가에 깃든 하느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둠 한가운데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3면

신앙인의 ‘확신’과 ‘의심’

“왜 신앙인으로 사는가?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레지오 활동을 하고 구역모임 반모임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뭔가? 크고 작은 봉사직을 맡아 헌신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사업이 잘되어 돈 많이 벌고 자녀들 건강히 자라 원하는 대학에 딱딱 붙게 해달라는 간절함 때문인가? 나와 가족들이 병에 걸렸는데 절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살려주셨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뜨거운 신앙인으로 사는가? 신앙의 궁극적 바람은 무엇인가?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인가? 내 사업과 내 일들에 대한 보답인가? 내가 꿈꾸고 갈망하는 지위와 명예와 권력인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초중고 내내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와 쎌 활동까지 한 뒤 대학생이 되어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혼인 뒤 본당 사목위원으로, ME 발표팀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해 온 나에게 스스로 묻는 질문이다. 나는 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대학 4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때 서울에 우리집이 처음 생겨 감사한 마음에 집 가까운 잠실성당에 찾아가 미사를 드린 뒤 보좌신부님께 뭐든 시켜달라 했더니 주일학교 교사로 불러주셨다. 교사학교를 수료한 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는데 첫 수업 때 학생들에게 들은 얘기는 “교리 수업 재미없어요”였다. ‘멘붕’을 가라앉히며 그럼 뭘 하면 재미있겠냐고 물으니 축구를 하자길래 다음 주일엔 학생들을 데리고 한강에 가서 실컷 축구를 한 뒤 커다란 들통에 라면을 끓여 먹였더니 더없이 좋아했다. 교리를 전달하는 것보다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알려주고 싶어 동료 교사들과 ‘예수 공부’를 시작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고, 예수가 만난 사람들과 어떤 일들이 있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공부했다. 특히 예수가 누군가와 만나 음식과 술을 나눈 ‘잔치’에 관심이 끌려 복음서에 나오는 잔치 이야기들만 따로 모아 비교표를 만들기도 했다. 지도를 펴고 예수가 33년 생애를 보낸 장소들도 짚어보았다. 이현주 목사의 「예수가 만난 사람들」에 실린 세리 자캐오 이야기를 읽을 땐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톨릭교회에서 발간된 책들뿐만 아니라 안병무 박사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책들과 잡지「살림」도 읽었고 좋은 강의가 있을 땐 직접 들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사회학적 성서해석 등을 공부하며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했던 그때 그곳이 생생한 ‘현장’으로 다가왔고, 그 현장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동료·학생들과 함께했던 젊은 날의 예수 공부 덕에 오랫동안 신앙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또 내게 묻는다. “나는 왜 신앙인인가?” 같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대한민국은 지금 두 쪽이 난 것 같다. 신앙인들의 정치적 견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마치 같은 신앙의 이름으로 전혀 다른 신을 섬기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예수 신앙의 핵심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 아닌가? 예수 신앙의 뿌리인 야훼 신앙 또한 노예들을 해방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아닌가?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 실은 예수를 처형했던 유다 기득권과 로마 군대를 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바알신 맘몬에게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영화 <콘클라베>를 보며 가슴에 꽂힌 말이 있다. 로렌스 추기경의 대사였는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처럼 들렸다. 한 톨도 안 되는 너의 그 확신을 버리고 의심하라는.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고 관용의 치명적 적입니다. 믿음은 살아 움직입니다. 믿음은 ‘의심’과 함께 존재합니다.” 글 _ 정석 예로니모 교수(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우리나라 1970년대의 인구 조절 정책은 가족계획 표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자녀 갖기’에서 시작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1980년대에는 ‘하나씩만 나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으로 변경됐습니다. 정부는 인구 억제를 위해 피임과 정관수술을 장려하는 국민운동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세 자녀 가정에는 주민세와 의료보험료를 추가 부과하는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인구 억제 정책은 1990년대까지 이어지며, 피임과 정관수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으며, 낙태에 대한 묵인도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고 다자녀 출산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출산율이 급격하게 감소하자, 가족계획 구호는 ‘허전한 한 자녀, 흐뭇한 두 자녀, 든든한 세 자녀’ 등으로 180도 바뀌었지만, 국민들은 다자녀 출산을 사회적 의무로 여기거나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가치와 태도가 변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우선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는 더 자유로워졌고, 더 부유해졌습니다. 반면, 경제 성장을 위해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했고, 그 수단으로 낙태를 묵인하고 조장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결국 인간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이 전도되고 물질이 중심이 되면서 갖가지 사회문제가 여기저기서 표출”되고 있습니다.(「가톨릭신문」 창간 66주년 기념 특별 대담, 1993년 4월 25일) 이로 인해 약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와 물질 중심의 사고방식이 확산되며, 우리의 마음은 점점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회의 입법과 정부의 정책은 우리 사회와 국민 개개인뿐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까지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 정부 정책이나 국회의 입법안을 보면, 여전히 과거처럼 매우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는 ‘배아·태아 대상 유전자 검사 가능한 유전질환’을 2009년 63개 항목에서 현재 222개 항목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검사를 통해 유전적 이상을 완화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유전질환은 극히 제한적이며, 유전자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발현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배아나 태아를 선별하는 목적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책이 발달상의 결함을 지닌 아기의 출산으로 인해 발생할 비용과 이익을 비교하는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로 인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고, 바이오산업이라는 시장 경제 논리 속에서 출산이 마치 상품 검증 과정처럼 여겨지며,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 아이를 임신한 여성들에게 낙태 압력을 가중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한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발의된 모자보건법 일부 개정법률안(이재강·정혜경·강경숙 대표 발의)은 초저출산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비혼 임신 시술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을 혼인 여부에 따라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 명시한 행복추구권의 보장과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인구 억제를 위해 태아를 경시하는 사고방식이 이제는 태아를 생산물처럼 여겨 국가 차원에서 인구 증가를 도모하며, 비혼인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 위해 아이를 소유물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비혼 임신 과정에는 정자 및 난자 매매, 체외수정, 유전자 검사 및 유전자 편집, 대리모 등 거대한 의료 산업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혼인 및 가정의 의미를 상실한 인구 정책이나 개인의 행복추구는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 부메랑이 되어 또 다른 사회문제를 초래할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가 깊게 성찰해야할 현실입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3면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

낯선 곳을 찾아갈 때 갑자기 용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아는 곳도 아닌데, 그냥 계속 가면 목적지가 나올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다. 어쩌다 한 번 그 예감이 맞으면 행복한 일이겠으나, 대부분은 지나친 길을 되돌아 나올 때가 많다. 목적지도 잃어버리고, 목적지로 가는 길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려 보면 운전할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두껍고 묵직한 지도 하나만 있으면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찾아갈 때도 자신 있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그 역할을 하지만, 지도를 잘 보는 사람이 능력자로 인정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계엄 선포로부터 시작하여 탄핵과 체포 구금, 헌법재판소, 태극기와 성조기, 응원봉, 남태령 대첩, 키세스 부대, 서부지법, 찬성과 반대…. 들려오는 소리는 많은데, 담을 말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우리는 이렇게 또다시 가르고 갈라서 적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던 그날이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이처럼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 혼란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살아야 할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은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고 밝힌다. 이에 가톨릭 사회교리의 중요한 내용인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길을 찾고자 한다. 첫째는 진리에 입각하여야 한다. 진리를 가장한 수많은 말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발했던 바리사이들처럼,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 거짓을 동원한 이제벨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양 선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근본 가치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자유이다. 인간존엄성의 탁월한 표징인 자유를 행사할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가치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자유’와 도덕과 양심에 따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다운 사회생활을 이끄는 귀중한 가치이다. 다음은 정의이다. 교회는 정의를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이웃에게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고 한다. 교회는 ‘가장 고전적인 정의의 형태인 교환 정의, 분배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누구의 편이어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르는 문제이다. 옳은 것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마지막 가치는 사랑이다. ‘사랑은 정의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정의를 초월한다. 정의는 사랑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사랑’을 가르친다. 고통스럽고 버림받은 이들을 저버리지 않고 손을 내미는 것이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이라면, 그가 처한 처지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을 고려하여 우리가 처한 사회생활의 면면을 살핀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3면

숲의 죽음은 우리 삶의 종말이다

‘숲의 죽음은 우리 삶의 종말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형 벌목업자들과 농장주들이 아마존을 약탈하는 것에 대항했던 ‘아마존의 성녀’ 도로시 스탕 수녀(1931~2005)는 2005년 괴한에 의해 총살당했다. ‘숲의 수호자’(Guardians of the Forest)에 참여한 이들이 잇따라 아마존에서 죽음을 맞았다. 2020~2021년 1만3235㎢의 아마존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아마존 산림파괴는 2019년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가속되었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와 멸종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탄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실정인 우리나라의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4대강 토목사업으로 자연스럽던 강의 흐름을 막아 환경을 파괴했는데, 이제는 이 작은 나라에 탄소 배출량이 가장 높은 운송 수단인 공항 8개를 더 짓겠다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이미 있는 것에서도 적자가 나는 마당에 공항을 더 늘리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속화되는 기후변화,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종과 연결고리가 끊겨 가는 생태계는 우리의 마음을 타게 한다. 지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무안 국제 공항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탑승자 181명 중 179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 사고의 최초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조류 충돌’이다. 한때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었던 가창오리 무리의 이동 경로가 사고 항공기 비행경로와 겹쳤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되었다. 공항을 신설할 때 환경을 고려했을 터인데 조류의 서식지와 먹이터 등 활동 지역과 이동 경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변수를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 새들은 해가 뜨면 무리를 지어 먹잇감을 찾다가 해 질 무렵, 큰 무리를 이뤄 비행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군무를 연출했겠는가. 그러나 이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비행하다 문명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가창오리 또한 예측불허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공은 자연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5년 주기로 수립하는 제6차 공항개발종합계획(2021년~2025년)에 의하면, 백령, 서산, 새만금, 흑산, 가덕, 제2제주, TK(대구·경북), 울릉의 공항이 신설될 예정이다. TK를 제외한 공항 부지는 모두 철새도래지로 새들의 삶터이다. 이 중 새만금은 참사가 일어난 무안 국제 공항보다 조류 충돌 가능성이 무려 610배나 높다고 보고한다.(전북녹색연합) 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 후 건설할 가덕도, 염생식물과 갯벌 등 블루 카본(blue carbon)으로 인해 기후변화에 대응할 잠재력이 큰 새만금 신공항 등은 수려한 자연을 파괴한 후 불을 보듯 뻔한 적자의 위험을 안고 들어선다는 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현재 국내 공항 15개 중 인천, 김포, 제주, 김해 공항만이 흑자다. 2시간 이내 항로를 폐쇄하는 유럽의 추세를 직시해야 한다. 공항 건설은 대형 국책사업이다. 계획수립, 건설 후 개항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는 말이다. 정치적 혼란으로 민생이 어려운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질서에 어긋난 기후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공항 건설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하늘에서 새가 내려다보듯(Bird's-eye view) 우리의 시선을 넓힐 때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고양이의 눈으로(Cat's-eye view) 먹잇감을 찾아 물어버린다면 지구는 생존능력을 잃을 것이다.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아서야 한다.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들 자신과 환경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만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 받으소서」 69항 참조)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3면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

지난해 가을 일본 노인 주거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환갑과 진갑을 넘기고 나니 노인의 집 문제는 곧 닥칠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유심히 둘러보았다. 노후에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다가 죽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내내 했던 조금 특별한 여행이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치바현 ‘52칸의 툇마루’였다. 교외 지역에 위치한 노인 데이서비스 시설로 어르신과 어린이, 엄마와 자녀들, 동네 주민까지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정겨운 곳이었다. 도쿄도 시나가와구의 ‘하나고토바 플러스’는 소니그룹이 운영하는 노인홈으로 지난해 6월 오픈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새로 지은 시설이어서 깨끗하고, 강아지 로봇 말동무까지 모든 서비스가 완벽하게 제공되고 있지만 실내 공간 위주의 이런 형태가 최선일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요코하마시의 ‘와카다케 아오바’도 방문했다. 꽤 큰 부지 안에 노인복지시설과 재활시설, 그리고 서비스형 노인주택들이 함께 어우러진 마을이었다. 저층 단독주택에서 노인들은 다양한 서비스를 받으며 생활한다. 골목길과 2층의 브리지가 전체 주택들을 연결해 주어 좋아 보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도쿄도 고토구의 ‘후카가와 엔미치’였다. 평범한 주택가에 자리한 2층 건물로 사연도 많다. 1970년대 유치원으로 지어져 한때는 장례식장으로 사용되었다가 오래 비어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작년 5월 문을 열었다. 1층은 노인 데이서비스 시설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되고, 1층 중앙통로 벽면에는 지역주민 65명이 책장 한 칸에 자신의 책을 기증하여 운영하는 ‘엔미치문고’가 있다. 2층은 초등학생 방과 후 교실로 오후 2시부터 8시30분까지 운영되며, 영유아 놀이공간도 함께 있다. 오후 2시가 되면 학교에 다녀온 어린이들이 중앙통로에 줄줄이 들어오며 어르신들께 인사드리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돌봄을 받던 노인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영유아 기저귀 채우는 것도 돕는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저녁시간에는 문고 주인들이 맥주를 마시며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즐긴다. 크지 않은 공간을 여러 사람이 다목적으로 종일 알차게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센터센터’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가나가와현의 ‘가스카다이센터센터’까지 모두 다섯 곳을 답사했다. 오랫동안 지역 센터 역할을 해 오다 2016년 문을 닫은 슈퍼마켓을 2022년에 다시 살려 마을의 센터가 되어달라는 희망을 담아 이런 이름을 지었단다. 노인 데이서비스, 보육시설, 공유주방, 세탁연구소, 장애인 그룹홈까지 다채로운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건축물 설계도 뛰어나 2023년 ‘52칸의 툇마루’와 함께 일본 굿디자인상을 받았다. 고령화시대 노인들은 어디에서 살아야 행복할까? 위에 소개한 다섯 곳 가운데 어디에서 살다 죽으면 좋을까? 일본의 노인 주거 답사를 하면서 6년 전에 다녀온 네덜란드의 ‘케어팜’이 생각났다. 소, 말, 돼지, 닭과 다채로운 식물이 있는 농장에 치매 어르신과 성인 발달장애인이 와서 주말을 지내는 케어팜은 아주 멋진 해법처럼 보였다. 노인과 장애인이 돌봄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 다른 누군가를 돌보며 존엄한 삶을 살게 하는 케어팜은 가장 좋은 형태의 노인주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고령화시대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가장 좋은 집은 어디일까? 어떻게 살다가 죽으면 그래도 괜찮을까? 누구와 무슨 일을 하다가 죽어야 할까? 고민해 보자.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23면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 인공지능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지침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비슷한 콘텐츠가 계속 추천되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콘텐츠가 이렇게 많은 것에 환호하며 계속 그 콘텐츠를 보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서비스 이용자의 관심, 성향, 그리고 콘텐츠 이용 행태를 분석하여 이용자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AI 알고리즘 덕분입니다. 그러나 이용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제공받게 되면서, 자신과 비슷한 의견이나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만 주로 소통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기존 신념은 더욱 강화되는 반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이를 ‘에코 챔버 현상’(echo chamber effect)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우선,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한 동질감이 형성되어 유대가 강화되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반면, 비슷한 정보에만 노출되면서 사고의 편향이 심화되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의 확신과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 심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검증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허위 사실이나 가짜 뉴스)가 확산되면서 잘못된 믿음이 강화되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지 못해 균형 잡힌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 간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분열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일 추천되는 콘텐츠를 소화하기에도 바쁜 현대인들이 그 정보의 진위 여부를 따질 필요성을 느낄지조차 의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AI 알고리즘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2025년 1월 28일, 교황청 신앙교리부와 문화교육부는 인공지능(AI)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이라는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이 문헌은 총 117항으로 구성되며, 교육, 경제, 노동, 보건, 인간관계, 그리고 전쟁 분야에서 AI 발전이 가져오는 도전과 기회를 설명하며, 가톨릭 기관들과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AI의 윤리적 발전과 활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 삶을 충만하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로, 이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을 인용하여, AI와 관련해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35항), AI는 인간 지능의 인공적 형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 지능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철학적·신학적 전통에서 인간의 지능(지성)은 논증하는 이성(ratio)뿐만 아니라, 진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지적 통찰(intellectus)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이면서 상보적인 차원을 드러냅니다.(14항) 또한 인간의 지능은 인간의 육체성, 관계성, 진리와의 관계, 세상에 대한 청지기직(stewardship) 등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파악됩니다.(16~29항) 이 문헌은 AI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 지능을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하루빨리 번역되어, 많은 분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옛것과 새것’(마태 13, 52)의 지혜를 바탕으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 특히 최근 급격히 발전한 인공지능(AI)이 가져오는 도전과 기회에 대해 성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1항)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23면

“호소해 보아도 법이 없네그려”(욥 19,7)

주요 일간지의 지난 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인천 미추홀구에서 148억대 규모 전세 사기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일명 ‘건축왕’과 일당이 1심보다 형량이 감경된 2심 판결을 대법원에서 받았다. 사기범과 그 일당은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191채의 전세 보증금 148억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챘다. 이 사기범은 인천과 경기 일대에서 주택 2708채를 보유해 ‘건축왕’이라고 불렸다. 이들 일당의 전세사기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 중 4명이 목숨을 끊었다. 1심은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추징금 115억 원을 명했지만 2심은 징역을 7년으로 줄여 확정했다. 공범 중 2명은 무죄를 받았고, 나머지는 징역형 집행유예로 감형됐다. 피해자들은 “희대의 전세 사기범 일당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며, 사기가 합법이 되었음에 분개하면서 대법원을 규탄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갭투자가 유행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이재에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다는 재산 증식 방법이다. 주택을 구입할 때 은행에서 주택담보 대출을 받고, 그 집을 전세로 내놓아 전세금을 받고 정작 자신은 몇 푼 안 들이는 방식이다. 그 갭투자로 한 채, 두 채, 세 채… 기본이 열 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자신이 투자한 자본 없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마술과도 같은 재산 증식이다. 거기다가 집값은 매해 오르니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재테크 방식으로 떠올랐다. 재산 증식에 관한 유명 경제인이나 연구소에서도 재테크 중에서 실질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사람들을 부추기고 금융기관과 정부도 이를 수월하게 하는 정책과 상품을 내놓았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주택 임대 사업자는 2021년 기준 47만 명에 이른다. 이는 주택 임대 사업 신고 대상자가 확대된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그전 4년 사이에 10배 가까이 오른 수치라고 한다. 갭투자뿐 아니라 전세사기의 수법은 다양하다고 한다. 물론 전세사기는 전세라는 제도가 생긴 후 끊임없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재산을 늘리는 것은 자유 경제체제에서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따라 피해자가 발생했다면, 공동체에는 악행이 되는 범죄행위이다. 지난 2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 6천 명이고 피해액이 약 2조 5천억 원이라면 심각한 사회문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 10명 중 6명이 20대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처음 사회에 진출하여 자립이라는 꿈을 일구며 살고자 했던 이들이 그 시작부터 사회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대한민국 헌법은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할 일은 국민들이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며, 사기로 인하여 취득한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징하여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피해액을 배상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의 확정은 국가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피해자들에게 절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참혹한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폭력이야!’ 소리쳐도 답이 없고 호소해 보아도 법이 없네그려”라는 욥의 절규를 모든 것을 마련하신 하느님께서도 외면하실까? “너희 재산이 는다 하여 거기에 마음 두지 말라”는 성무일도 시편의 한 구절을 되뇌며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의 마음이 양육강식, 각자도생의 험난한 세상에서도 기어이 살아나기를…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금호1가동(선교)본당 주임)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23면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성경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에서는 신탁을 받은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을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거짓 예언자로 고발한다. 얼핏 보면 성령의 감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를 잡신을 숭배한 이방인의 점쟁이로 낙인찍은 것일까? 그가 대낮의 술잔치를 기쁨으로 삼고 성적 타락과 물질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발라암, 그는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아 이를 준비해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는 삶의 안전이 보장될 때야 비로소 자기 초월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인간 실존의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신뢰다. 절대자에 대한 신뢰,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신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즉 건건한 자기 존중감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신뢰가 무너질 때 혹은 형성되지 않았을 때 다른 것에 눈을 돌려 외부에서 힘을 빌려와 나를 그 힘에 맡기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존재하려 한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기에 금세 무너질 허상이다. 신뢰와 위기는 같은 선상에 있다. 위기 앞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며 치고 나가는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미래에 대한 불안 앞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어둠의 기류를 넘어설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새로운 깊이를 더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좌절과 혼란 앞에서 현대인은 손안에 있는 기기를 이용해 쉽게 오늘의 운세를 클릭할 수 있는 조건에 살고 있다. 영국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까지 한국 점술 시장(사주·타로·운세 등) 규모를 37억 달러(4조1569억 원)에 달한다고 보고하는 바처럼 운세 앱의 규모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신동아 2019.12. 참조) 이런 세상을 극명하게 반영해 주는 것이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의 어두운 국면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역사를 바탕으로 다각적 측면에서 고도의 전문가들이 신중하고 심도 있고 무엇보다도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이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이뤄져야만 한다. 자신의 명예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영달을 위해 국민의 혈세를 받아 흥청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민에게는 매 순간 생존이 달렸다. 그것을 손쉽게 점서에 의존해 국제적으로도 복잡한 이념과 이권이 얽힌 우리나라를 정치하려 들지 말라. 자신이 판단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으면 멈추고 하야하길 권한다. 발품을 팔아 길거리에서 한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살피는 정치인을 국민은 간절히 원한다. 어떻게 점괘에 기대어 치정할 수 있는가. 그런 정치가들에 의해 다스려질 백성들이 아니다. 만민을 위한 정치철학으로 긴 사유 끝에 양심에서 울려 나오는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 아닌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는 한 미래는 없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보고 느끼시는 분이시다.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6항) 그 끝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일어 누군가에게 결정권을 내어주고픈 위기 앞에서 먼저 ‘나는 누구인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이 이지러질 테니까. 중요한 선택은 점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고뇌라는 대가를 치르며 고통을 통과해야만 삶이 참다울 수 있다. 위기의 때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주는 아름다운 사슬, 묵주를 손에 들자. 성모님께 기대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강생,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시는 고뇌, 부활의 빛을 통과하자. 그때 비로소 ‘희망의 순례자’로 설 수 있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23면

라자로 추기경 탐구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요즘 나의 탐구 대상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프란치스코 교황과 라자로 추기경 두 분의 만남, 관계, 그리고 앞으로 함께 이루어 낼 일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당신의 바라심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합력할 때 하늘의 역사가 땅에서 이루어진다. 궁금하다. 두 분을 통해서 해내시려는 하느님의 바라심이 무엇일지. 2021년 6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라자로 추기경 탐구’는 시작되었다. 아시아의 작은 교구를 책임진 교구장을 어떻게 알고 장관에 임명했을까?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났고 어떤 관계를 이어왔을까? 궁금증은 검색으로 이어졌고 기사와 유튜브 등을 통해 라자로 주교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탐구를 본격화했다. 그렇게 알아낸 바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유흥식 추기경은 195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고 대건고 1학년 때 세례를 받은 뒤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했다. 2년 수료하고 로마에 유학해 1979년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뒤 1983년에는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대전교구 여러 직책을 맡은 다음 2003년 주교품에 올랐고 2005년에 대전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1969년에 사제가 되었다. 1998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2001년에 추기경에 서임된 뒤 2013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두 분의 첫 만남은 2013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였다. 폐막미사 직전 교황께 다가간 유흥식 주교는 350명의 청년들과 함께 한국에서 온 라자로라고 인사했고, 교황은 한국이냐고 되물은 뒤 “한국교회는 강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아마도 교황은 한국교회에 대해 깊이 알고 계셨던 것 같다. 2014년 대전교구에서 열릴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를 앞두고 라자로 주교는 교황께 초청 편지를 보냈고 교황은 기꺼이 응해주셨다. 초대 글을 읽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가라!”는 울림이 있었다고 고백하셨다. 2014년 8월 14일 한국에 오신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 위로, 124위 시복미사 집전, 아시아청년대회 참석 등 서울과 충청도를 오가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4박5일 방한 기간 중 교황과 라자로 주교는 깊은 친교를 나누셨을 것이다. 2020년 말 대전교구는 이듬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코로나19 백신 나눔 운동을 시작했다. 온 세상이 팬데믹으로 고통을 겪던 시기에 더 어려운 나라를 돌보자는 운동은 한국 천주교 전체로 확대되었고, 뜻밖의 정성에 감동한 교황은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을 한국교회가 자발적으로 했다며 몇 번씩 감사 인사를 한국에 전하셨다. 2021년 6월 교황은 라자로 주교를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했고, 2022년 8월 라자로 주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이상이 라자로 추기경 탐구의 개요다. 놀랍다. 특히 첫 만남에 주목하게 된다. 전에도 만났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낸 첫 만남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였고 먼저 다가간 이는 라자로였다. 라자로가 내민 손을 프란치스코는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잡아주었고 관계는 시작되었다. 두 분이 함께 해낼 일이 어디까지일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탐구 결과 분명히 깨달은 게 있다. 신앙인은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자로 추기경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키 작은 자캐오처럼. 그래야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다.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40여 년 도시를 연구해 온 정석 교수는 「행복@로컬」, 「천천히 재생」, 「도시의 발견」 등 다수의 시민 교양서를 출간했다. 아내 고유경(헬레나) 씨와 함께 월드와이드 메리지 엔카운터(WorldWide Marriage Encounter, ME) 한국협의회 대표부부로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23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