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삶의 질(quality of life)’ 평가에 대한 성찰

이승훈
입력일 2025-05-07 09:13:25 수정일 2025-05-07 09:13:25 발행일 2025-05-11 제 344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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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삶의 질’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의미는 무엇이며 어떤 기준으로 판단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삶의 질’ 개념이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 쾌락주의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때로는 안락사나 우생학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여 년간 ‘국민 삶의 질 보고서’를 매년 발표하는데, 지난 5년간 문제의식은 매년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 달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며, 다양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유례없이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높은 자살률 등 사회전반의 활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빈부격차 … 등 다양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에 기존 경제 성장 중심의 정책에서 삶의 질 제고로의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삶의 질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객관적인 생활 조건과 이에 대한 국민들의 주관적 인지 및 평가로 구성된다”고 정의한다. 동시에 “한 사회의 경제 및 사회 발전 수준과 구성원의 가치 및 규범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우리가 속한 사회가 무엇을 ‘바람직한 상태’로 인식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2000년대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부를 삶의 바람직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효율성과 유용성, 개인의 경제적 상태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건강 악화로 인한 생산성 저하나 사회 기여도의 감소, 실업 등은 삶의 질 저하로 해석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도 관련이 있다. 즉, 사회적 외적 조건과 개인의 주관적·임의적 가치관에 의한 삶의 질 판단이 생명을 경시하거나 생명을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제고하려면, ‘삶의 질’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 개념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문제는 ‘삶의 질’ 개념이 점점 인간 생명의 서열화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오랜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고령의 만성질환자들을 부담으로 간주하거나 ‘비생산적인 생명’으로 낙인찍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명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통해 그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여,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할 생명에 대한 사회적 의무를 져버리는 것이다. 물론 의료자살이나 안락사는 표면적으로 그것이 개인의 자율적 선택임을 강조하며, 존엄성의 표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매우 축소하고, 왜곡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가 이러한 삶의 질 개념에 둘러싸일 때, “인간 상호 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이 무시된다”고 경고한다.(회칙 「생명의 복음」 23항) 우리에게 ‘삶의 질’에서 삶이란 불가침성과 존엄성 위에 기초한 삶이다. 그렇기에 ‘삶의 질’ 개념 역시 이 전제 위에서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질로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무엇보다 인간 생명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생명권에 기초할 때만 삶의 질을 논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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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