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는 밖에서 주어지는 표시와 증명일뿐 진정한 행복 있을수는 없어 명예·명성을 영적인 선(善)으로 인정…다만 욕심낼 경우 더 큰 불행 도래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물’이나 ‘부’는 주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자연적 재물에 대한 유혹이 실패하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루카 4,1-1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도 강력한 유혹의 후보들이 떠오른다.
명예나 명성 안에서 찾는 인간의 행복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 엄청난 계약금으로 스카우트된 운동선수나 연예인,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이에 상응하는 ‘명예’가 주어진다. 또한 우리나라에 골프붐을 불러왔던 박세리 선수가 그 성과를 기억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하면서도 부러워했다. 그러한 현상은 소위 신지애, 박인비 등 ‘세리키즈’가 대거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또한 한강 작가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을 때는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했고, 외국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 근저에 놓인 ‘명예’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성 토마스는 ‘명예’야말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욕구할 만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는 각 분야의 가장 탁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자기 명예가 훼손을 당할 위험에 빠지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의 손실을 감수해서라도 이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I-II,2,2) 그럼에도 그는 행복이 명예에 있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자 안에 있지 않고, 명예를 받는 자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외부의 다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명예는 가장 탁월한 자들에게, 벌써 존재하고 있는 탁월성(excellentia)의 표시와 증명으로서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명예 자체가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명예는 행복에 따라올 수는 있지만, 행복이 명예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토마스는 명예와 비슷하지만, 직접적으로 덕행과 연관성이 없는 명성(fama)이나 영광(gloria)에는 더 낮은 가치만을 부여하고 있다. 명성은 주로 사람들의 평판에 달려 있다.(I-II,2,3) 그러나 사람들의 평판은 종종 크게 잘못될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 가수나 배우들에게 열광했다가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면 실망해서 그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곤 한다. 명성에 손상을 입은 연예인은 기존에 하던 광고 계약 등까지 해지되면 엄청난 재정적 손실도 겪는다. 이에 따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진정한 행복이 명성에 있을 수 있음을 배제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명성은 지나치게 우연적인 것이고, 둘째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들의 칭송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명예에 대한 집착(야욕)의 문제점
그럼에도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을 영적인 선(善)으로 인정하며, 물질적 선들보다 더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나 명성을 보존하도록 각자가 지닌 권리를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미치게 될 피해를 고려해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이웃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절도와 유사하지만, 현세의 사물 중에서는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인 명예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한 죄다. 그러므로 중상이나 비방으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해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이다.(II-II,73,3)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가짜 뉴스의 양산이나 ‘딥페이크’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자행되는 현대 사회에서 토마스의 경고는 더욱 시사성이 크다고 하겠다.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또는 영광)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행위들에 더 강한 추진력을 갖기 위해서 추구하는 경우, 그 자체로는 완전히 합법적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위들로 인하여 칭송을 받음을 아는 사람은 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간다.”(「악론」, IX,1) 더욱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교화를 위해서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참사랑에 속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명예를 무질서하게 욕구하는 것은 야욕(ambitio)으로 규정하고 죄가 된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를 욕구하는 자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거나, 혹은 자신이 받는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기 스스로 얻은 것으로만 자부하기 때문이다.(II-II,131,1) 성경 안에서도 분명한 예가 나온다.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설하자 군중은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고 말았다.(사도 12,20-23)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이 이성에 합치되는 질서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악을 저지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할 때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 쉽다.
<미생>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직장인은 무능한 상사가 자신의 노력을 가로채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는 경우 매우 분노하기 마련이다. 과거 황우석 사태처럼 이미 자신이 이룬 성과 이상의 명성을 얻고 나서도 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성과를 부풀림으로써 얻었던 명성과 부마저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이 쌓아 놓았던 공든 탑마저 모두 무너져 더욱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선거 때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한 번 얻고 나면 이를 놓지 않기 위해 ‘계엄’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권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주게 될까? 다음 회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