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행복 위한 ‘수단’일 뿐…필요한 것 넘어서는 집착은 ‘죄’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