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박효주
입력일 2025-07-16 08:46:32 수정일 2025-07-16 08:46:32 발행일 2025-07-20 제 345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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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창세 18,1-10ㄴ / 제2독서 콜로 1,24-28 / 복음 루카 10,38-42
“마리아가 맞고, 마르타가 틀렸다”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활동과 관상 무엇이 우선하느냐의 문제 역시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름에 있어, 순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곁에 머물러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 이후 그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래 님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무엇에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잠시 주님 곁에 앉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인스타그램 @baeyounggil

예루살렘의 올리브산 동편에는 ‘베타니아’라는 마을이 자리해 있습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에 속하므로 높은 장벽이 세워져 예루살렘과 분리되었지만, 베타니아는 마태오복음 21장 17~19절에서 예수님이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신 장소로 보고됩니다. 

사실 철이 아닌데 열매가 없다며 예수님이 나무를 죽게 하신 일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여 꾸짖고 가르침을 주시려 한 일종의 상징 행위였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다운 열매를 내지 못하고 들포도로 변질되었음을 질책한 이사야서 5장 2~7절, 예레미야서 2장 21절 등과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성전이 그러하였는데, 언뜻 그곳에서 백성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희생 제물도 바치는 등 여러 활동을 하는 듯 보이나 정작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리리라고 선언하심으로써(마르 11,14 참조) 강도들의 소굴처럼 변질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습니다.(마르 13,2 참조)

이런 예고를 베타니아에서 전달하신 까닭은 성전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올리브산의 뒤편 마을이 베타니아라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곧 성전 가까운 곳에서 그 파괴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분리 장벽만 없다면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버스로 3분 거리입니다.

예수님 시대 베타니아에는 라자로와 마리아, 마르타 남매가 살았습니다. 지명의 뜻은 ‘무화과의 동네’ 또는 ‘가난의 동네’로 추정됩니다. 특히 나병 환자 시몬이 베타니아에 살았고(마르 14,3 참조) 라자로도 그곳에서 앓다가 죽었음(요한 11장 참조)을 고려하면 가난한 병자들이 많은 동네였던 듯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고 올리브산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라자로 남매의 집에 자주 들러 머무신 듯합니다. 그런 다음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마리아와 마르타가 자기 오빠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 칭한 점에서도 예수님과 이들 남매의 사이가 각별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이때도 예수님이 베타니아를 방문하신 것 같은데,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들르셨다는 루카 복음 10장 38절의 “어떤 마을”이 베타니아로 보입니다.

사실 루카복음 10장 29절부터는 중요한 대목이 두 가지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고, 그다음으로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런 배치는 예수님께서 으뜸 율법으로 가르치신 두 가지(루카 10,27 참조)의 본보기를 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제1계명인 ‘하느님 사랑’은 마리아의 행동에서 드러나고, 그다음 계명인 ‘이웃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이게 된 마르타는 주님을 환대하고픈 마음에 몹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어 불평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ㄴ)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답하시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손님 환대는 여러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손님 곁을 지키며 말씀을 듣는 것도 큰 환대입니다. 더구나 그 손님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일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르타가 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에둘러 꾸짖으시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루카복음 10장 38절에 따르면, 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였”는데, 이런 환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루카 9,53)던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말하자면 마르타는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경건한 부인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저마다 몫을 택하였고, 무엇을 택했든 그에 충실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처럼 타자의 선택을 인정하고 그것을 질투하거나 빼앗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성당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느라 하루가 바쁜 이도 있고, 날마다 묵상 기도에 긴 시간을 보내는 이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우열을 가릴 수 없듯이, 마리아와 마르타가 택한 몫도 그러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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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