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도나토 브라만테

이형준
입력일 2025-05-07 09:12:29 수정일 2025-05-07 09:12:29 발행일 2025-05-11 제 344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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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교육을 체계화한 첫 건축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영향 주고받아
교황청 건축가로 로마 재건 투신…당대 뛰어난 건축가도 다수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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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토 브라만테의 초상>, G.B. 체키, 건축 분야의 가장 저명한 인물 시리즈 1769/75판. 출처 위키미디어

서양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1088년)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1150년)을 그 시작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은 오늘날처럼 다양한 학문을 다룬 것이 아니고, 대체로 라틴어 교육을 기본으로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회화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는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문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물려받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술 분야도 학교 교육의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대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건축을 학교 교육 형태로 시작한 첫 번째 건축가로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를 꼽고 싶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한 시기에 건축 공방을 운영하였는데, 그곳에서 같은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를 비롯하여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1481-1536),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3-1546),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 등의 건축가를 배출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를 제외하면 16세기에 로마에서 활동한 건축가들 대부분이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 근처의 페르미냐노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르비노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우르비노에서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그곳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의 제자로 있으면서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와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등과 교류하였고,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1439-1502)로부터 건축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후 1477년경부터 브라만테는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였고, 롬바르디아에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등의 작품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1478년부터 밀라노에 체류한 그는 초기에는 화가로 활동하였는데, 그가 그린 작품의 배경에는 건축 공간의 기하학적 구성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후 건축가로서의 브라만테는 밀라노 시기(1480-1499)와 로마 시기(1499-1514)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밀라노 시기에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파비아 대성당(Duomo di Pavia),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등이 있습니다.

1482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밀라노에 오자 브라만테는 그와 교류하였고,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는 롬바르디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의 전속 건축가가 되어 성당 외에도 일반 건축과 토목의 일에 관여했고, 밀라노의 인문주의자 및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리스도교 고전주의를 습득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1499년 밀라노를 공격하자 로마로 피신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로마 시기가 시작됩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브라만테의 나이는 55세로 건축 현장을 이끌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유적들을 보는 순간 브라만테는 그것에 사로잡혀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물론 이전에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로마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고전 건축의 원리를 배워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로마에 소개하고 르네상스의 중심에 로마를 끌어들이며 초기 르네상스를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라만테는 피렌체가 아닌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며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르네상스 건축을 한 차원 올려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브라만테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 등 이전의 건축가와 다른 점은 그에게 로마는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로서 로마의 재건 사업에 투신하였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청 안에 건축 공방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도시 계획과 건축 설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브라만테는 로마의 고전 건축물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나란히 놓은 로마의 건축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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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테가 밀라노에서 활동한 시기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의 초상(왼쪽, 작가 미상)과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초상>. 율리오 2세는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라만테를 후원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브라만테의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인문주의를 장려한 율리오 2세 교황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교황이 공방을 허락하였고 그곳에서 브라만테는 설계, 감리, 시공 등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은 당시 개인 소유의 소규모 공방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의 건축학과, 설계 사무소, 그리고 시공 회사를 합쳐놓은 건축 종합 센터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대의 스타 건축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후대의 건축가들도 브라만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로마 시기 동안 브라만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ace),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Tempietto di San Pietro in Montorio), 그리고 팔라초 카프리니(Palazzo Caprini, 일명 Casa di Raffaello) 등입니다. 물론 실제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바티칸의 벨베데레 안뜰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역작입니다.

로마에서 펼쳐진 브라만테의 활동은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 국한되지 않고, 로마 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일조하였습니다. 그가 집중한 바티칸의 건축 공사는 바티칸을 로마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로마는 오래전 로마 제국 시대의 수도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유럽의 중심으로 거듭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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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