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내려가라!

이주연
입력일 2025-03-12 09:53:20 수정일 2025-03-12 09:53:20 발행일 2025-03-16 제 3433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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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 ‘강생’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참된 겸손의 표양
모든 덕의 절정이자 꽃인 겸손은 악령이 범접할 수 없는 요새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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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스스로 올라가려 했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다. 교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불순종의 토대라면, 겸손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해주는 순종의 토대다. 코르넬리우스 반 폴렌부르그 <낙원에서의 추방>. 출처 위키미디어 

우리 스승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이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그분을 내려오게 하였고,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게 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예수님을 본받고자 전 삶을 투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부단히 노력했고 제자들에게도 ‘내려가라’ 권고하였다.

역설의 신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우리가 자신을 낮출 때 높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가장 높은 사람이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타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 가르침은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위로 올라가 남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역설의 길,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 남을 섬기는 길로 초대받았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겸손의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임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겸손을 위한 분투

사막 교부들은 겸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겸손은 그들 일상생활의 본질과도 같았다. 그들은 겸손에서 멀어져 교만에 빠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교만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제자란 상상할 수 없었다. 온갖 덕에 나아간 사람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래서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겸손을 위해 분투했다.

어떤 수도승들은 사제품을 주려는 주교를 피해 도망 다니곤 했다. 그들은 늘 초심자로 남아있기를 바랐고 매일 초심자로 시작하려 노력했다. 피누피우스 압바가 대표적이다. 매우 큰 수도원의 연로한 사제였던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열렬히 추구했던 겸손을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몰래 수도원을 도망쳐 신분을 감추고 먼 곳에 있는 다른 수도원에 지원자로 입회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기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본래의 수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오랫동안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겸손한 삶을 악마의 질투로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에 슬퍼했다.(규정집 4,30.31)

최상의 덕

오르 압바는 겸손을 ‘수도승의 화관’이라고 했다.(오르 9) 7세기 시리아 수도승 이사악은 겸손을 ‘하느님의 옷’이라고까지 하였다. 수도승 전통에서 겸손은 모든 덕의 절정이자 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참된 겸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완덕과 순결의 끝에 도달 할 수 없다”(규정집 12,23)고 말한다.

다음 일화는 교부들이 겸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형제가 ‘당신이 본 환시를 말해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파코미우스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죄인이라 하느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소.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 환시인지 들어 보시오. 당신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위대한 환시요.’”(「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300쪽) 겸손한 사람은 바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마태 11,29) 닮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지 못한 수도승이나 신앙인은 스승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겸손은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덕이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겸손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다. 악령은 겸손한 자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악령이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다가와 그의 발을 자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악령이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두 가지고 있다. 너는 단지 겸손 때문에 우리와 구분된다. 너는 겸손으로 우리를 능가한다.’”(대大마카리우스 35) 카시아누스는 겸손 없이 우리는 어떤 악령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규정집 6,1)

이처럼 겸손은 악령이 범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반면, 교만은 악령이 공격해 들어오는 빈틈과도 같다. 우리가 교만할 때 악령은 우리를 쉽게 공격한다. 악령은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악령의 공격을 심하게 받는다면 하느님께 앞서 나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수록 악령은 우리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악령의 공격을 피하는 최상의 무기는 교만일 것이다.

순종의 토대

아담은 스스로 올라가려 했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다. 교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불순종의 토대라면, 겸손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해주는 순종의 토대다.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겸손과 순종의 길을 가고자 그토록 노력했고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싸웠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못 없이 배를 만들 수 없듯이, 겸손 없이 구원될 수 없습니다”(신클레티카 26)라고 말했다. 또 테오도라 암마도 “금욕 수행이나 철야 혹은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테오도라 6)고 말했다. 겸손이 구원의 유일무이한 무기인 순종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인간적 성숙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사람의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오래전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떠나는 날 한 노(老) 신부님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이 죄인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필자가 몸 둘 바를 몰라 “신부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자, 그분이 말했다. “우리 노인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죄를 지었기에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그분에게서 묻어나는 겸손을 강하게 느꼈었다. 이런 겸손한 모습은 평생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감추어진 삶을 통해 몸에 밴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인격과 언행을 통해서도 이런 겸손이 묻어나온다면,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참 제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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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