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음은 마음의 내적 자세로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된 상태 사막 교부들, 순수한 마음과 평정심 지키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