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병들게 하는 ‘악한 생각’ 없애고 마음 다스려야
악습(악한 생각)과의 싸움은 관상 생활과 더불어 우리 영성 생활의 또 다른 축인 수행 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이 싸움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여러 악습을 제거하고 거기에 상응한 덕을 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치열한 투쟁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요 악한 생각을 여덟 가지로 제시했다.
곧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다.(프락티코스 6)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요한 카시아누스에 의해 여덟 가지 악습으로 서방교회에 소개되어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에 의해 ‘칠죄종’으로 정착됐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영혼의 질병인 각 악습과의 싸움에 대한 수도 교부의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그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음을 정화하고 다스리는 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육체의 양면성
먼저 육체에 대한 교부들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싸움의 참된 목적과 올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게 된다. 교부들은 인간 육체를 원수이자 친구로 이해했다. 즉 원죄로 인해 손상되었기에 원수이고,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영혼과 함께 성화되고 변모되어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았기에 친구라는 것이다. 그들은 욕정 혹은 악습을 하느님이 우리 육체나 영혼에 심어주신 자연적 충동(본성)의 왜곡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은 본성의 억압이 아닌 변형이며, 근절이 아닌 교육이라는 것이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영혼의 어떤 욕정이 본성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본성적 속성들을 사악한 욕정들로 바꿔 놓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본성에 따른 생식능력의 경우가 그러한데, 우리는 그것을 음욕을 위해 남용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분노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뱀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웃에게 쏟아냅니다. 경쟁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덕을 겨루다가 시기심에 빠집니다. … 식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방탕을 위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천국의 사다리 26,167)
첫 번째 악습, 탐식
사막 교부들은 ‘배는 인간의 온갖 파멸의 원인’이라 생각하여 위(胃)를 정복한 사람은 정결을 향한 도상에서 장족의 진보를 한다고 말한다. 탐식은 우리를 폭식과 미식으로 이끌며 우리 안에 잠재된 선천적 욕정들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한다. 탐식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욕정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욕정들의 극복 여부가 탐식의 극복 여부에 달려 있을 정도로 탐식을 극복하기란 좀체 쉽지 않다.
에바그리우스는 우리 영혼이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줄이라고 권고한다.(프락티코스 16) 빵과 물은 하루 한 끼 식사했던 사막 수도승의 주식이었다. 사막의 한 원로는 말했다. “하루 한 끼 식사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하면 짐승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09) 하루 세 끼에 간식도 곁들이는 우리에게 에바그리우스의 처방전은 비현실적이고 무익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에서 점차 다음과 같은 극기의 원칙이 정착됐다. “배불리 먹으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기 체력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양을 취하는 것이다.”(담화집 2,22,1) 카시아누스는 폭식으로 이끄는 온갖 남용을 피하고 무분별한 단식 연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매일 합리적이고 일정하게 식사하는 것이 며칠 동안 단식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지나친 배고픔은 정신의 항구성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피로로 인해 우리 기도의 힘과 활력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규정집 5,9) 탐식의 치료제는 절제와 극기지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악습, 음욕
탐식에 굴복한 영혼은 음욕에 넘겨진다. 이 둘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클리마쿠스는 “자기 배를 채우면서도 음욕의 영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에 기름을 부으면서 불을 끄려는 자와 같습니다”(천국의 사다리 14,95)라고 말한다. 카시아누스의 다음 말은 음욕에 맞선 싸움이 얼마나 힘든지 잘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싸움은 음욕의 영에 맞선 싸움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다른 모든 싸움보다 더 끈질기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싸움입니다. … 다른 모든 악습을 극복하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규정집 6,1)
그러면서 그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갈망’에 기초한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이중의 치료제를 제시한다.(규정집 6,1)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영적인 불로 육체의 불을 끄면서 육체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몰아내는 사람은 순결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5,98)
정결을 위한 음욕과의 싸움은 육체의 성적 욕망을 통제하면서 시작되며, 그것들의 변형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결은 육체와 자연적 욕망의 억압이 아닌 변형을 목표로 하며, 인간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기혼자건 미혼자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성적으로 변형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악습, 탐욕
탐욕은 이 세상 재물과 물질에 대한 마음의 집착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과 질병, 궁핍의 고통 그리고 남들에게 생필품을 받는 데 따르는 수치심을 떠오르게 한다”(프락티코스 9)고 말한다. 한 마디로 탐욕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서 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3-34) 이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탐욕은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와 보호를 믿지 못하기에 우상숭배이자 불신앙의 자손과도 같다. 클리마쿠스는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것은 미움, 도둑질과 시기, 불화와 적개심, 격분과 복수, 잔혹한 행동과 살인을 유발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7,114)라고 말한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더 가지려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탐욕의 치료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 가난의 핵심이다. 천상의 것을 맛본 사람만이 이 지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