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순례, 걷고 기도하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성당

이승환
입력일 2025-03-26 09:12:29 수정일 2025-03-26 09:12:29 발행일 2025-03-30 제 3435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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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가톨릭 미술가 작품 가득한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
화강암 성당과 중정·회랑·잔디마당 어우러진 기도의 장소
6·25전쟁 순교자 묘역은 2017년 성지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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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회랑 끝 종탑에서 바라본 죽림동성당.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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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죽림동성당 전경. 2017년 2월 드론 촬영. 이승환 기자

북한강과 나란한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 시내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회벽돌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이다. 성당은 예전 그대로 약사리고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지만 주변은 변화가 있었다. 2013년 성역화 사업으로 성당 앞은 중정과 회랑이 조성됐다. 교구의 얼굴인 주교좌성당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낼 뿐 아니라 신자들이 언제든 찾아와 묵상하고 기도하는 순례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춘천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엄주언(마르티노, 1872~1955) 회장의 세례명을 딴 말딩회관을 지나 두 팔 벌려 춘천 시내를 아우르는 예수성심상 곁으로 계단을 오르면 아치 너머로 널따란 중정, 잔디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정원 좌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봉헌할 수 있는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끝에 한국교회 석조성당의 대표작이라 할 죽림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건축 역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궤를 같이한다. 죽림동본당은 1949년 엄주언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과 당시 본당 신부였던 토마스 퀸란 주교(Thomas F. Quinlan, 한국명 구인란)가 마련한 현재 자리에서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떴다. 그런데 외벽을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는 공사까지 마무리한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성당을 지키던 성직자들은 미사 도중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공습으로 성당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이 터에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들이 주민들을 돌보며 식량을 나눠줬다. 결국 성당 공사는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1953년에야 마무리됐고 1956년 6월 성당 봉헌식이 거행됐다. 대대적인 보수공사(1998년)를 거친 성당은 2003년 6월 25일 근대 건축 유산 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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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 성모자상. 뒷쪽으로 죽림동성당의 역사와 함께한 토마스 퀸란 주교와 엄주언 마르티노의 초상이 보인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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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업적을 기리는 상징과 성가정의 이집트로의 피신 모습을 담은 성당 청동문 부조. 이승환 기자

화강암을 차곡차곡 쌓은 성당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고풍스럽지만, 성당 곳곳에 자리한 성미술 작품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작품이 담은 의미를 새기다 보면 이곳이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회랑의 끝 성당 오른편에 최종태(요셉) 작가가 제작한 예수성심상이, 왼쪽에는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가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작가의 원작을 살려 다시 세운 성모자상이 성당을 보듬어 안 듯 자리하고 있다.

성당을 나드는 청동문도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에 걸린 아일랜드풍의 옛 십자 문양 한 쌍은 강원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전쟁 후 주교좌성당을 건축하는데 힘을 보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업적을 기린다. 문양 아래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생명의 땅 이집트로 가는 장면과 예수의 산상설교 장면이 부조로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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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성당 내부 제대와 십자가. 변경미 수습기자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고 따스함이 묻어나오는 공간. 제대와 감실, 독서대 등 성당 내부의 성물과 좌우의 유리화 등도 모두 내로라하는 가톨릭 미술가들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오전 11시 미사를 앞두고 성당을 찾아 주님과 하나 됨의 시간을 갖는 신자들이 앉아 있다.

성당 뒤편 너른 공간은 지난 2017년 성지로 선포된 춘천교구 성직자·순교자 묘역이다. 이곳에는 6·25전쟁 때 순교해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이광재(티모테오) 신부 등 춘천교구 순교 성직자들이 잠들어 있다. 가장 오른쪽 하느님의 종 프랜시스 캐너밴(Francis Canavan, 1915~1950,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생애를 읽어 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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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지로 선포된 춘천교구 순교자·성직자 묘역.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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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 십자가의 길. 이승환 기자

# 1950년, 한국말을 배우며 사목을 준비하던 손 신부는 당시 지목구장인 토마스 퀸란 신부와 함께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다른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수백 명의 전쟁포로와 함께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내몰린 손 신부는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선종했고 동료 성직자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압록강 변에 묻혔다.

손 신부 곁에는 춘천지목구의 첫 한국인 사제 김교명(베네딕토) 신부, 패트릭 라일리 신부(Patrick Reilly, 라 바드리시오), 백응만(다마소) 신부, 앤서니 콜리어 신부(Anthony Collier, 고 안토니오,), 이광재 신부, 제임스 매긴 신부(James Maginn, 진 야고보) 등 6·25전쟁 중 순교한 성직자들의 생애와 순교 상황 등이 빛바랜 흑백 사진과 함께 안내돼 있다.

현대의 순교자들. 불과 7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아픈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성직자들이 하루빨리 시복시성의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며 묘역 앞에 섰다. 예수성심을 주보로 하는 성당 마당 곁에서 이곳에 잠들어 있는 성직자들이 닮고자 했던 예수성심을 떠올려 본다. 성당 곁 예수성심상 아래 새겨진 글귀를 기도 삼아 봉헌한다.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성심은,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마음 자체이며 온 인류 구원의 중심이자 원천이시다.’

◆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cafe.daum.net/uf99)
     -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3 
     - 문의 : 033-254-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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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성당 입구 언덕에 자리한 높이 3.5m의 예수 성심상. 춘천 시내를 내려다보며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다. 이승환 기자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