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제주교구 정난주길

이승환
입력일 2025-02-26 08:57:26 수정일 2025-02-26 08:57:41 발행일 2025-03-02 제 343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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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의 딸로 태어나 신앙 때문에 노비되어 제주로 유배
‘대정성지’로 단장한 정난주 묘소…13.8㎞ 순례길 끝에는 모슬포성당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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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성지는 제주의 순례길 중 한 곳인 ‘정난주길’의 출발지다. 바다를 접해 걸을 수 있는 형제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산방산과 한라산. 이승환 기자

# 두 살 배기 아들 황경한을 품에 안은 정난주(마리아)가 유배길에 올랐다. 조선의 유배지 중 가장 멀다는, 중한 죄인들만이 보내진다는 제주로 가야 한다. 경기 마재 양반가 정약현의 딸은 이제 대역죄인의 아내이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가 됐다.

신유박해의 참상을 알리겠다며 배론에서 백서(帛書)를 썼던 남편 황사영(알렉시오)은 중국으로 가던 편지가 발각돼 처형당했다. 당당히 목숨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정난주는 품 안의 어린 아들 생각에 한없는 눈물을 흘린다.

‘경한이만은 일생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 마음먹은 정난주는 유배길 뱃사공과 포졸을 매수해 경한을 제주도 북쪽의 작은 섬 추자도 언덕에 내려놓는다. 포졸들은 이후 ‘뱃길에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다’고 보고했다. 아이를 섬에 두고 다시 배에 오르는 길.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어미는 자식과 생이별한 채 노비가 되어 제주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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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아치형 돌담 너머로 정난주 마리아 묘가 보인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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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성지 십자가의 길. 이승환 기자

제주 서남단. 산방산과 모슬봉이 우뚝 솟은 널따란 평야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성지 진입로 양옆으로 높다란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제주의 성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성지 입구 역할을 하는 아담한 아치형 돌담 옆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성모자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돌담 안은 소박하고 아늑하다. 아담한 잔디밭 둘레를 십자가의 길 14처가 감싸안고 있다. 정난주의 묘는 잔디밭 너머 커다란 십자가 아래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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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성지 평화의 성모자상. 이승환 기자

# 제주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정난주는 모진 시련을 믿음과 기도로 이겨냈다. 교양과 학식, 굳은 신심에서 우러난 믿음의 덕으로 ‘서울 할망’이라 불리며 이웃의 사랑도 받았다. 관비를 담당하던 대정의 김씨 집안은 그의 성품을 높이 사 어린 아들을 맡길 정도였다. 김씨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관비 신분인 탓에 추자도의 아들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결국 37년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던 그는 1838년 병으로 숨을 거둔다.

김씨 집안을 비롯한 이웃들이 모슬봉 북쪽 속칭 한굴밭에 조성한 정난주의 묘는 130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학자들의 확인을 거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된다. 1994년 ‘대정’으로 명명된 성지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새 단장 성역화됐다.

정난주의 묘소 앞 화병에는 누가 가져다 바쳤는지 모를 꽃이 놓여 있다. 매일 정성 바쳐 헌화하는 듯, 작년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향기가 느껴질 만큼 화사하고 싱싱한 꽃들. 피 흘려 순교하지 않았지만 삶으로 신앙을 증거해 온 ‘백색 순교자’를 기리는 제주 신자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대정성지는 제주교구 순례길(Santo Viaggio) 중 ‘고통의 길’이라 불리는 ‘정난주길’의 출발지다. 이곳에서 모슬포성당에 이르는 총 13.8km의 길에서 추사 김정희의 귀양지,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섯알오름 위령탑, 일본군 군사기지와 격납고 시설이 있는 알뜨르 비행장, 1901년 신축교안 때 순교한 이규석 삼부자의 묘 등 제주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순례길 종점인 모슬포성당 내 ‘사랑의 집’에는 특별한 일화가 있다. 1954년 대정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인 ‘사랑의 집’은 6·25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기초를 닦은 건물이다. 당시 중공군 포로수용소의 설리반(Sullivan, 蘇) 군종 신부는 포로들과 함께 성당 석조 외벽공사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중공군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과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 해서 ‘통회의 집’이라 불리다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자는 뜻에 따라 ‘사랑의 집’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 정난주 마리아 할망의 묘소 앞에서 짧은 기도를 마치고 모슬포성당을 향한 순례길을 시작한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의 지붕과 산방산을 곁에 두고 걷는 여정. 묵주를 손에 들었다. 제주의 이른 봄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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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길의 종점인 모슬포성당 외부 전경.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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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모슬포성당 내 ‘사랑의 집.’ 이승환 기자

◆ 순례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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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교구 정난주길(santoviaggio.com)

- 대정성지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 모슬포성당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영서중로 22

- 미사 : 토요일(오후 7시30분), 주일(오전 6시30분, 오전 11시, 오후 7시30분)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