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의 현장…진정한 평화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날 메마른 햇빛 아래 체인을 질질 끌고 가는 인도의 이방인을 본 일이 있는가.’
겨울이 오면 몸은 인도를 기억한다. 그곳에서 '파더 킴’이라고 불리던 김성만 안드레아 신부님을 서울의 한 성당에서 뵙기로 했다. 차창 너머 풍경은 이미 20여 년 전 인도로 가는 겨울 비행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콜카타 공항 활주로를 거칠게 내리자, 흔들거리는 기내에서 인도 사람들은 기쁨의 손뼉을 쳐 댔다. 거리를 지배한 인도 택시 오토릭샤가 뿜는 비릿한 가스 내와 이국적인 향신료가 뒤섞여 이방인에게 여기가 인도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시간은 멈추다 못해 뒤로 흐르고. 순간 경유했던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과, 마중 나온 신학생들의 미소가 복잡하게 부딪친다.
김 신부님을 거기서 만난 것은 후배들이 묵고 있는 파라곤 게스트하우스로 방을 옮긴 다음 날이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간단한 일정을 알려주고 매일 새벽 6시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 미사 때 보자고 하셨다. ‘돕기 위해 간 것인지 도움이 필요해서 왔는지.’ 예수님을 향한 병자들의 마음이 그랬을까. 낯선 땅에서 한국 신부님의 평화로운 얼굴을 대하는 순간, 속으로 몇 번이나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던가. 나에게 인도는 그런 곳이었다.
인도에서 사목하며 평화 얻은 서울대교구 김성만 신부
사제로서의 초심 찾기 위해 스스로 택한 가난한 도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봉사하며 기도하는 삶의 의미 깨달아
이윽고 차는 개포동성당에 선다. 이날도 김 신부님은 그랬다. 인도인들의 박수는 없었지만, 긴 세월을 날릴 정도로 반겨 주셨다. 인도에서 기르시던 수염이 사라진 지금 나는 묻고 싶었다. “콜카타 마더 하우스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때와 달리 본당을 맡고 계시는 데 차이가 있을까요?” 지금도 인도에서처럼 어깨에 달랑 가방 하나 메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실 것만 같았다. 제자 파견 때 스승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씀은 의외로 간결했다. “주교님께 순명 서약을 한 사제이니,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 남대문시장준본당에 바로 가게 되었어요. 거기는 인도에 비하면 호텔이지요. 그 후에 어떤 상황인 줄 모르고 주교님의 명으로 또 임지에 가게 되었는데, 새 성전을 짓기 위해 100여 개 성당을 돌며 모금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 코로나19로 모금 시기가 겹쳐서 힘들었어요.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위한 인간의 모금이 자칫 교만으로 우쭐대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쳐야만 했지요. 그래서 미리 본당에 도착하면 우선 성체조배를 하며 미사를 기다렸습니다. 그게 큰 힘이 되었어요. 기도가 없다면 뭐든 성공해도 금방 허해지니까요.”
파라곤 게스트하우스 옥탑 2인실에 짐을 풀었다. 이른 새벽부터 울려대는 힌두교 경문 소리와 제대에 바쳐지는 향불이 땀내와 뒤엉켜 폐를 적신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교만함은 진작 두고 와야 했다. 미사 후 마더 하우스에서 주는 빳빳한 크래커와 생강 향 밀크티 한 잔 그리고 두 개의 작은 바나나로는 영혼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리고 고단했다. 봉사를 끝내고 우리는 네팔 식당에서 그나마 만두를 먹었는데, 혼자일 때는 거리에서 150원짜리 볶음면을 주로 먹었다. 돌이 씹힐 때마다 영혼은 하늘 저 멀리, 몸은 천근 걱정으로 가라앉고…
인도로 온 이방인들에게 그들도 묻고 싶었을까.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오셨나요?”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을 때마다 ‘첫 마음’을 떠올리신다는 김 신부님께, 인도인의 질문을 드렸다. “왜 인도였습니까?”
“저희 때만 해도 신부가 되어서 만 7년쯤 되면 본당신부로 나갈 수 있었어요. 주교좌명동본당에서 마지막 부주임을 끝내고 본당 나가기 전 어떤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사제가 되고 명동본당에서 부주임으로 사는데, 동시에 사회적 이슈도 대해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때로는 신부가 해야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내 안의 갈증으로 어떨 때는 ‘성사 집전하는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제 생활이 이러면 안 될 텐데….’ 돌파구를 찾던 중에 마침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그분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살 수 있었을까?’ 궁금했어요. 바로 주교님을 뵙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본당 가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의 정신을 체험하고 싶다고. 처음엔 6개월을 허락받고 갔는데, 1년 8개월 동안 있게 됐어요. 평소에 깔끔한 걸 좋아했는데 인도에 딱 가보니 그런 곳인 줄 몰랐지요. 그 나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갔거든요. 그렇게 불결하고 열악한 곳인지. 이러니 가서 한 달 동안 충격 그 자체였어요. ‘여기에 뭣 하러 왔나? 가난한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은데….’ 모든 게 힘들었습니다.”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닮은 개도 그들처럼 헐벗은 도시 콜카타. 손쓸 수 없는 ‘자기 되물음’ 속에 인간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는가. 인도든 인생이든 방향이 올바르면 속도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기는 인도, 마더 하우스의 미사 풍경은 동네 새벽시장처럼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신발을 잃을까 목에 두른 겁 많은 관광객부터, 밤새워 놀다 잠이 육신을 지배한 눈으로 배고픔을 채우러 온 청년들까지 뒤섞여 앉아 성가를 흐느낀다. 동방박사처럼 왔지만, 이제는 영혼의 약속을 구걸하는 노숙자라고 고백해야 할까. 성당 중앙에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석관이 자리하고, 구석 한편에는 수녀님 생전 모습을 한 조형물이 벽에 기대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 위에 조용히 내려온 햇살. 그곳 미사를 김 신부님은 좋아하셨다.
“사랑의 선교 수도회에서 수녀님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시멘트 바닥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구나 싶었어요. 그때 깨달았지요. ‘아! 그래서 이분들이 기쁘게 일하실 수 있구나.’ 그 후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과감히 버리고, 두 달 동안 프렘단(중년 어른들이 치료와 요양을 하는 공동체)에서만 일했어요. 처음에 너무 힘들어서 오후에는 일을 못 하다가, 두 달쯤부터 오전 일이 끝나면 ‘깔리갓’(임종자의 집)에 갔습니다. 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에서 임종자들을 위해서 이런 건물을 마련하시고 봉사를 시작하셨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이렇게 신부님의 인도는 어머니의 조용한 기도가 떠오르는 도시였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