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유리알] 로마에서 온 외계인

이주연
입력일 2025-02-03 09:18:27 수정일 2025-02-03 13:15:16 발행일 2025-02-09 제 342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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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이자, 여행가, 의사인 파브리지오(맨앞). 박홍철 신부 제공.

‘재봉틀과 해부용 탁자 위에 우산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아름다워’.

이 문장은 이시도르 뒤카스(Isidore L. Ducasse)가 쓴 ‘말도로르의 노래’ 중 한 구절이다. 필명 로트레아몽 백작으로 활동했던 그는, 작가를 꿈꿨지만 음침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라는 이유로 당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진다. 

토요일 오후 3시. 주일학교 미사를 앞두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기차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젊은 여행가 혹은 주일학교 교사이며 의사인 파브리지오(Fabrizio Ettorre)를 정각에 내려줄 것이다. 

나는 왜 그를 기다리며 로트레아몽 백작이 쓴 시가 떠올랐을까. ‘말도로르의 노래’는 작가 사후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앞에서부터 몰입해서 읽으나 뒤 문장부터 거꾸로 읽으나,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배설한 듯한 글은 아무리 현대소설의 기원이라 해도 난해할 뿐이었다. 

서울역에서 만나기 전 파브리지오는 이태원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며칠간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던 신부님은 나에게 몇 번이고 그의 한국 여정을 부탁한 상태였다. 

드디어 5번 정거장에 기차가 선다. 내리는 사람마다 출발지에서 가져온 낯선 땅 내음을 풍기고… 파브리지오는 양팔로 자전거용 안장 가방을 쥐고 내렸다. 문자 외에 그와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불현듯 그에게서 여행 중 방문한 안동찜닭과 추어탕의 진한 국물 향이 풍기는 듯했다. 우리는 자주 본 사이처럼 알아보고 웃었다. 내가 물었다. 

“틈틈이 자전거로 세상을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곳이 있던가요?” 

“네. 저는 자전거로 놀라운 곳을 많이 다녔어요. 그중에 아름다웠던 곳을 꼽자면, 북유럽에 위치한 라피(Lappi) 지역이에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국경에 접한 곳입니다. 그곳은 수평선까지 펼쳐진 숲이 있고 도로를 횡단하는 순록을 만날 수 있어요. 적어도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고요…” 

나는 사실 부러웠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애초에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다’는 바람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이라는 빠져나갈 궁리를 댔으니까.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에서 봉우리를 타고 흐르는 알프스의 바람이 느껴졌다. 

주일학교 미사는 오후 5시였다. 그의 눈빛은 60여 명의 꼬마 짹짹이들 속에서, 자신의 로마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본당을 떠올리며 비슷한 얼굴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줍게 ‘헬로’ 인사를 건네는 꼬마에게, 그는 ‘안녕’이라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본당에서 견진교리(5학년) 1년 차 학생들과 청소년(14세~18세)들에게 교리를 지도하며, 동시에 복사단을 담당하고 있다. 후에 그는 이때의 기억을 ‘온전히 환대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성가부터 독서까지 미사의 모든 부분에서 로마와 달리,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미사가 좋았다고 했다. 

내 인생에 로마에서 온 손님과 미사를 함께 하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인간은 계획하고 하느님은 비웃으신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원인과 결과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고양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새들을 따라다니고, 물고기가 지하철로 출근하는 일은 현실에 없지만, 그보다 갑작스러운 사건과 사고 속에 상선벌악부터 시작해서 상식은 온통 흔들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말도로르의 노래’에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도 초현실적인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먼저 살바도르 달리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낯설게 만들기’, 서로 다른 소재를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틈새로 이 시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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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우산이 있는 재봉틀>

의사인 파브리지오가 일주일에 3일을 본당에서 보내고,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에는 청소년을 위한 학습과 교리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편이 나을 텐데, 살면서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나요?” 

그는 이 질문을 어려워했다. 

“저는 고집이 참 센 편이에요. 더 많이 공부하지 못할 때는 자학이 심했습니다. 사춘기 내내 사람들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애썼고, 언제나 익명으로 살고자 했지요. 이런 습관들이 제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다고 할까요. 제가 선택하는 것보다 결정된 것에 자주 끌려다니는 편이었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결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약점을 풍자하기(놀리기)’ 시작한 거지요.” 

껍질에 갇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풍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습거나 어리석어 보이기보다 성당과 병원에서 온기를 주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묻기보다 우선 듣기로 했다. 파브리지오는 평소 주변 학생들에게 결정 앞에서 망설일 때는, 언제나 ‘바로’ 실행에 옮기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변과 함께하는 조화도 살펴야 한다며. 

다음 날 새벽, 아주 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는다.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할게요’라고 짧게. 그러니 ‘이 봉헌자를 보호해 주소서’.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이 하루는 내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 것이오니, 혹여 바쁘셔서 못 오시면, 천사라도 부르셔서 모르게 지켜 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영혼을 파고드는 매일의 걱정을 물리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러면 하루의 탓이 내게 없으니 놀라지도 화내지도 안 테니까. 

파브리지오와 나는 출국 전날 아침,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그날 박물관 앞에는 야외수업을 온 학생들로 붐분볐다. 가끔 화장기가 도는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우리를 스쳐 갔다. 박물관의 1층 선사시대관부터 발길을 들이며 물었다. 

“파브리지오! 이탈리아에서 ‘가정의’라고 들었는데, 환자를 대할 때 주로 어떤 위로의 말을 하나요?” 

“친근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해요. 의사도 환자의 가족이니까요. 누구든지 위로가 필요할 때가 오면, 그들이 질병 앞에서 겪는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애씁니다. 무엇보다 저는 환자들이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그들이 겁을 먹으면 치료와 희망을 모두 놓치니까요. 이럴 때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그들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지요.” 

말을 듣는 내내 낯선 그에게서 익숙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