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에프렘 수녀, 치유와 은사로 상담전화 통해 타인 돌봄 “고통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주님께 기도로 청하는 것”
지하철 4호선 명동역 2번 출구. 여기 서면 방금 한국에 도착한 여행객처럼 무리에 숨어들고 싶어진다.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보기. 솔라도레 미솔미레. 출구 인근 호텔 앞에는 노동자들이 써 둔 구호가 손님들을 먼저 맞이한다. 호텔 진열장에 든 풍경화는 아무도 보지 않는 정지된 평화를 외치고….
솔라도레 미솔미레.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는 수녀님의 소개로 오늘 자리는 마련됐다. 김정희 에프렘 수녀님. 젊은 시절, 치유의 은사와 악령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으셨다고 했다. ‘오늘날 성녀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자, 생각은 팽팽해졌다.
나는 바람에 밀려 다시 걸었다. 어릴 때 성령 기도를 하는 사제의 손바닥이 엄마와 이웃 교우들 머리에 닿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친구의 누나도 마찬가지로 쓰러지는지 지켜보던 그 시절. 그것이 은사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고 악한 영을 쫓아냈다. 그리고 교회는 은사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겸손되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98세의 에프렘 수녀님을 찾아가는 길, 10여 년쯤 한 예술극장에서 본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로마 사교계의 왕인 주인공 잽은 그의 65세 생일을 맞게 된다. 감독은 로마에 대한 헌정의 뜻을 담아 미학적인 화면과 음악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로마 콜로세움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화려한 생일파티는 벌어지고, 저물어가는 인물들의 욕망과 가식적인 대화들이 화면을 채운 가운데 잽은 첫사랑의 부고 소식을 그의 남편에게서 듣는다. 40년 전에 쓴 소설 이후로 단 한 권의 책을 쓰지 못했던 주인공 잽. 밤이면 로마를 거닐다 만나는 이들을 통해 영화는 과거의 기억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순간 그가 오랫동안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이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그 후로 하느님을 제대로 느끼지도, 고백하지도 못한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잽은 영화 후반에 가서 만나게 되는 성녀 마리아 수녀의 질문을 받는다. “후속작을 왜 쓰지 않나요?” 영적인 질문을 하려 했던 주인공은 수없이 받았던 같은 질문을 눈앞에서 다시 받지만, 이번엔 솔직히 고백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찾지 못했어요.”
솔라도레 미솔미레. 명동 사무실에서 만난 에프렘 수녀님은 어느 고귀한 성녀의 모습보다 작은 체구에 시골 할머니의 미소를 지니셨다. 나는 미리 준비한 질문지와 녹음 장비를 부산히 꺼냈다. 초조했다. 시작 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 얼마나 인연이 깊은지, 서둘러 말했다. 그때 다시 수녀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솔라도레 미솔미레. 수녀님은 말이 빠른 편이었다.
“네. 누구세요? 아유 혈압이 내려가 소변을 보느라 잠을 못 자요?” 사람들은 수녀님을 만날 수 없을 때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고 수녀님은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 주님의 기도, 성모송 자꾸 하세요. 그러면 나아요. 노인이 되면 원래 잠이 없어요. 마귀 때문에 그런 거냐고요?… (수화기에 대고) ‘너 마귀냐? 마귀면 기침해 빨리!’ 할머니! 나이 잡수시면 잠이 안 오고 그래요. 제가 기도할게요….”
오는 전화에 짧게라도 기도를 해준다고 하셨다. 너무 길게 말하면 듣는 이가 힘들다며…. 나는 궁금했다. “수녀님, 구마가 필요한 사람과 상담 의사가 필요한 환자가 다를 거 같은데요?” “맞아요, 신부님. 마귀는 세 가지로 와요. 교만해서 오고, 미워해서 오고, 점을 봐서 와요. 마귀 들었던 사람들이 증언하니까 저도 알게 된 거예요. 통화를 할 때 그 사람에게 ‘마귀면 기침해’ 하면, 그렇게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저는 바오로 병원에서 소임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어요. 환자와 마귀 든 사람을요. 마귀 든 사람들은 저를 보면 싫다고 야단을 쳐요.”
“수녀님, 마귀가 무섭지 않으세요?” “뭐가 무서워요?! 꼼짝 못 하게 야단을 칩니다. 별짓 다 해요. 여러 번 해야 그 사람에게서 나가는 마귀도 있고, 피를 토하거나 침을 뱉거나 야단법석 요동치는 마귀들도 있고 다 달라요. 잠 못 자게 하고, 말 못 하게 하거나 밥도 못 먹게 해요. 또 다 버리거나 기도를 못 하게도 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저 하느님께 저는 청합니다.”
다시 벨이 울린다. 솔라도레 미솔미레~.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서 마더 데레사를 닮은 성녀가, 주인공에게 선문답처럼 묻는다. “내가 왜 식물의 뿌리만 먹는지 아세요? 그건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이에 주인공 잽은 응시할 뿐 답하지 않는다. 마치도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합니다(로마 11,16)’라는 성경 말씀이 연상되기라도 하듯….
그가 찾고 있던 아름다움은, 어쩌면 ‘로마’라는 이름의 영광과 타락의 도시에 살면서도 인간 본연으로 향하는 시선과 한순간도 잊지 못한 그리움 안에 있었던 건 아닐까. 주인공 잽은 결국 첫사랑의 기억이 있는 섬으로 향한다. 에프렘 수녀님은 신비를 전하듯 내게 말했다. “억울한 것을 잘 참으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세요. 2년 전에 하느님이 은혜를 주셨어요. ‘침묵은 무기다. 기도는 평화다!’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잘 사는 거랍니다.”
“수녀님, 수도자로서 살고 싶은 다른 삶이 있지는 않았나요?”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도 밤새 로마를 산책하며 아름다움을 찾던 주인공 잽처럼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고 싶었던 질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차갑고 흔들림 없이 들을 준비가 이제 되었다. “수녀님! 꼭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유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지만 낫지 않고, 어떤 사람은 낫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목소리는 이미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 대신에 이 세상 고통에 관해서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그래요, 기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이 평소에 하느님 마음에 들면 즉시 이뤄져요. 하느님 뜻이 아니면 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삶에 따라서 하느님이 해주시는 거랍니다.” 마법 같은 답보다 오히려 단순했다.
순간 속으로 ‘그러면 사제나 수도자가 낫지 않고, 착한 사람들이 아픈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애원에 가까운 질문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그 답이 신비를 뜻하는지도 모른 채…. 영화 중반에 주인공 잽은 장례식에서 ‘유족의 슬픔을 훔치면 안 된다’며 눈물을 보이지 말 것을 말한다. 정작 자신이 관을 들 때 흐느껴 울었으면서…. 그는 사람이었다.
에프렘 수녀님을 뵙고 나오는 중에 어디선가 ‘솔라도레 미솔미레’ 휴대전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원하던 답처럼 가슴에 뿌려진다. 그리고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만 참고, 이제 아버지를 위해 울어도 된다’고.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