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자리는 없습니다

이주연
입력일 2025-03-31 13:35:31 수정일 2025-03-31 13:35:31 발행일 2025-04-06 제 343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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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사제 영성 면담 해온 메리놀 외방 전교회 길고수 신부
아픔 앞에서도 함께 기도하며, 담백하고 솔직한 공감 노력
“항상 예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듣고 말하며 영성 지도 임해”

독일의 작가 케테 콜비츠는 1914년 10월 30일 일기에, 침묵을 담아줄 한 문장을 적었다고 한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지난해 겨울, 신학생과 사제들의 영성 면담을 해 오셨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길고수 갈멜로 신부님을 뵈었다. 어떤 신부는 이분을 떠올리면 어색한 한국어가 생각난다고 했고, 누구는 아직도 길 신부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감동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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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 사제들의 영성 면담을 해오셨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길고수 갈멜로 신부님. 박홍철 신부 제공

미국인 길고수 신부님과의 면담은 새로웠다. 좋은 분이라는 것과 영성 지도를 길게 하지 않으시고 고해성사를 봐도 보속이 믿을 수 없게 적다는 게 학생들에게 매력이었다. 대부분의 면담은 신학교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한 번에 30분 정도. 길 신부님은 주로 긴 소파 옆에서 듣기를 좋아하셨다. “그래 다니엘,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 저음의 느린 말씨와 다정한 미소 때문일까. 그때도 지금도 신부님은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여러 해 동안 신학생들의 영성 면담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 어떤 것에 중점을 두셨나요?” 

사람을 대할 때, 특별히 어떤 준비를 하시는지가 궁금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신학생들이 물어보는 것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거예요. 물론 면담을 3년 정도 해보니 배우는 것도 있었지요. 어떤 친구는 작은 문제가 있어서 함께 기도해 줬고, 책도 보면서 어떻게 도와줄지 찾아봤지요.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어요. ‘만약 신학교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있다’고 권하기도 했지요. 때때로 어떤 친구는 면담하기 참 까다로웠어요. 이를테면 자기는 ‘열심히 하고 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책으로 공부하고 그분처럼 잘살고 싶다’고 말해요. 하지만 저는 그랬어요. ‘너는 우선 교구 사제 생활을 배워야 한다’고.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생각해야 하고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줘요. 영성 면담을 하는 학생들도, 사제도… 마찬가지예요. 매년 성령께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똑같은 내용의 영성 면담은 재미가 없어요.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저는 말하려고 했지요.”

예수님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다가왔던 사람 중에는 제자들도 숨어있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어떤 분이신지 둘러보고 예수님을 재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나도 그랬다. 처음에 길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다. 하늘에도 묻지 못한 이야기를 어떻게 모르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초반 시간을 허비했다. 참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려 해도 ‘아니야, 기다려! 아직 아니야’ 이렇게 잠재우길 여러 차례… 신부님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때 다니엘 신학생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에 다니엘 신학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쯤이면 웃으며 말씀해 주실 것 같았다. 하지만 미소만 지으실 뿐, 고해의 비밀처럼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과거를, 하느님은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늘 그렇듯 인간만이 자신을 찌르고 용서하지 못한다.

길 신부님은 언제나 기다리는 분이셨다. 나는 묻고 싶었다. “신부님은 상담하실 때나 대화하실 때 그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영성 생활은 계속 노력해야만 합니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사제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오늘 미사를 했고 성무일도도 그렇고 기도도 했다. 나는 착한 사제다?’ 아니에요. 기도 생활은 하면 할수록 힘든 겁니다.” 그 말씀이 맞다. 얼마나 힘들면 성무일도의 첫 기도가 ‘하느님 날 구하소서’겠는가. 지금 마음 같아서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느님이 세상 좋은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시길’ 간절히 청한다. 간절함에는 언제나 아픔이 있고.

농민들의 솔직한 삶을 판화로 표현했던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는 두 차례의 전쟁 통에 막내아들과 손주를 잃는다. 이 비통함으로 그녀는 몇 년간 작업을 놓는다. 독일 나치가 미워했던 작가는,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시대의 비극을 ‘어머니’라는 품으로 끌어안고자 했다. 그 조각품 중 하나가 전쟁 중에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형상의 ‘피에타’였다.

사실 지난해 10월 말 신부님을 뵙기로 한 날 약속을 미뤄야 했다. “여보세요~ 다니엘 신부님?” 길 신부님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린다. “길 신부님. 오늘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때 고집했다. 가족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도록 내 슬픔을 삼켜야 한다고. 

“아이고 저런…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길 신부님은 몇 마디 하지 않으셨는데, 참았던 눈물이 울컥했다. 그 음성은 깊은 공감 속 진동. 그때 알았다. 

신부님께 영성 지도를 받은 사제들이, 말씀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한 이유를…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우리는 아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히 교우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사제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해요. 가끔 사제들은 진부하게 말할 때가 있어요. ‘기도해 드릴께요’라든가 ‘성모님께 기도하세요!’라든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교우들의 희망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친동생이 죽었을 때, 미국 집에 갔어요. 장례식 동안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거기 본당 신부님도 오셨고요. 엄마와 아버지는 슬픔 중에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본당 신부님은 우리 어머니에게 ‘어려운 일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일찍 부르셨다’라고 말했어요. 슬픔을 덮는 말입니다. 방금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말이지요! 어머니가 소리쳤어요. ‘여기서 당장 나가세요! 지금 나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한다고!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런 하느님의 자리는 지금 없어요!’ 물론 나중에 어머니는 본당 신부님께 잘못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원하신 건 ‘위로’였습니다. 이럴 때 위로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기도하겠다’ 하면 되지요.”

말은 느리게, 가르침은 공감보다 더 느리게…. 너무 쉽게 아픔을 조절하려 했던 우리는 타인의 상처 앞에서 해결만 하려 했다. 길 신부님께 신학생들은 고해성사를 원했다. 길게 안 하시고 농부처럼 담백하고 솔직하게 공감하셨고 적은 보속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적게 주시냐?”고 어느 사제가 물었더니, 길 신부님은 “면담 후 귀가하면서 내가 준 보속들을 똑같이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의 슬픔 앞에서 고통을 나눠 지는 공감과 동행의 답이었다. 오늘도 저편에서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 허허.”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