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유리알] 천국의 티라노

이주연
입력일 2025-04-16 09:42:23 수정일 2025-04-16 09:42:23 발행일 2025-04-20 제 343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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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천사의 위로 덕분에 상실감과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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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옷을 입은 박홍철 신부가 어르신 교리에서 고해성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홍철 신부 제공

‘공룡 옷을 입고 꼬마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린이날이 가까울수록 스스로에게 또 묻는다. 그래도 될까? 안 그런다고 없는 품위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선을 넘는 행동이 아닐까 해서였다. 하필 저렴하게 구입한 게 공룡 옷이라니. 그러나 모든 선택엔 이유가 있다.

어릴 때 공룡은 각별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장난감 공룡 티라노. 고대 그리스어로 ‘폭군 도마뱀’을 뜻하는 이 공룡은 ‘티렉스’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1950~60년대 플라스틱과 고무로 만든 장난감으로 유행했었다. 내 손에 떻게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를 지키는 것이 책장 속 야광 성모님이었다면, 내게는 공룡 티라노가 있었다.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장난감 자랑에서도 빠지지 않고 ‘으르렁’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빨을 보여주면 다들 물러섰다. 그러나 공룡 티라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이 시절을 나는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티라노가 사라졌던 그날은 여전히 느낀다. ‘상실’…. 누가 그랬을까. 깊은 상실감이 또 들이친다.

나만 그런 것인가 해서 주일학교 꼬마들에게 물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니?” 꼬마 준혁이는 장난감을 찾다가 머리가 아파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했고, 조이는 도둑이 훔쳐 가서 슬펐는데 경찰서에 신고하고 나서는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다.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친구 중에 비슷한 마음이었던 현우는 두 살 때부터 사랑했던 인형이 사라지자, 그 순간 나라를 잃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소중했던 장난감을 동생처럼 곁에 두고 영혼까지 담았다면,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티라노 장난감을 만날 수 있을까.

<실종된 공룡을 찾습니다. 이름: 공룡 티라노, 실종 일시: 알 수 없음, 실종 위치: 엄마와 같이 쓰던 방 장난감 상자. 추정하기로 엄마가 다른 아이 집에 넘겼을 가능성 있음. 특징: 어른 손바닥 두 개 합한 크기의 노란 공룡 장난감. 절대로 물지 않음, 소심한 성격에 주인만 잘 따르며 무서워서 싸움도 잘 못함. 목줄이 없고 좌우로 목이 돌아감. 긴 꼬리는 땅에 닿지 않음. 목격 시 공룡을 부르지 마시고 사진을 찍어 댓글로 제보 바람. 수십 년간 애타게 찾고 있음.> 이렇게 전단이라도 붙이고 싶지만, 이제 와서 어디에다 올린다는 말인가.

‘공룡 장난감이 필요하면 택배로 주문하면 그만인 것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게 아직 많다. 그때의 온기와 사랑의 기억을 포함해서…. 이렇듯 어릴 적 경험한 ‘상실’은, 과거로 끝나지 않고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자동으로 불안을 떠올리며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도 제자들은 기쁨보다 다락방에 숨어 불안해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숨진 스승의 잔상과 이에 무력했던 스스로를 벌하면서 상실감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사라짐’에서 오는 상실은 사랑한 만큼 아프다. 스승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곧 남은 자의 아픔이었다. 그분의 몸을 직접 만지기 전까지…. 부활의 빛은 미뤄지고 치워진다.

사라진 장난감 티라노는 지금 태평양 어디쯤 헤엄치고 있을까. 그는 어디에 있나. 집어삼켜지는 슬픔. 그러나 아이가 겪어야 할 상실감을 돌볼 여유는 가난한 집에 없었다.

어릴 적 소중했던 공룡 장난감 잃은 후 느낀 상실감 기억나
예수님 죽음 이후 제자들도 부활한 주님 깨닫지 못하고 깊은 아픔 느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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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찾아 주겠다며 공룡 무릎을 안아 준 본당 꼬마 현서와 챗GPT를 이용한 지브리 풍 이미지로 얼굴을 모사한 박홍철 신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이란 감독 마지드 마지디의 1997년 작품이다. 여동생의 낡은 신발을 수선하고 들린 야채가게에서 주인공 알리는 신발을 잃어버린다. 남매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신발을 찾을 때까지 알리의 것을 교대로 신은 채 학교를 다니게 된다. 누구의 탓인가. 신발을 잃어버린 알리 탓이다. 신발이 담긴 검은 비닐을 무심히 고물 장수에게 줘버린 야채가게 주인 탓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아이들은 이 ‘탓’을 보듬으며 해결해 간다.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살피고 걱정하며, 아픔을 준 어른들을 원망하지 않는 세상. 맞다. 어른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을 용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내려준 상처까지 말이다.

‘상실’은 일반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과 이어지다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 상실에 사로잡히면,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마치도 처음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주일학교 꼬마 지안이가 그랬다. “장난감을 잃어버렸을 때, 슬펐어요. 잃어버린 화장품 장난감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을 믿었어요.” ‘하느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찾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 믿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지안이는, 맨날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했다. 잃어버렸을 때도 느끼고, 지금도 느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라고 했다. ‘마이 멜로디’ 화장품을 잃어버렸을 때는 속 상하고 찡그렸지만,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면 안 좋은 느낌이 다 사라진다는 신비로운 말이었다.

공룡 옷을 앞두고 망설이던 내게, 내 마음이 물어왔다. ‘인생에서 어린이날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이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공룡 옷을 입고 꼬마들 앞에 나섰다. 내 친구 티라노를 생각하며 최대한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공룡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이러면 됐다! 꼬마들이 즐거워한다. 사라진 티라노 장난감을 잊을 만큼 나는 티라노가 된 것이다. 그런데 5살 한 꼬마가 도망치지 않고 도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공룡 무릎을 한껏 안는다. 순간 서 있는 나, 꼬마 현서가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공룡아 울지마! 엄마 찾아 줄게. 내가 안아 줄게~”

놀래주려고 공룡처럼 으르렁댔는데, 엄마 보고 싶은 공룡으로 보였나 보다. 울지 말라며 안아 주다니…. 어쩌면 말이야 티라노 장난감은 나에게 오기 전에, 어떤 소년이 가난한 집에 보내 준 장난감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어느 꼬마의 밤을 지켜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 앞에 선 꼬마 천사들은 내게, 상실을 잊고 하느님의 손길로 다시 나와야 한다고, 그래서 지난 상실감과 이제는 작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천국에 가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안녕 티라노.’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