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오래된 사진관 앞에 멈춰 섰습니다. 유리창 너머에 전시된 사진들은 햇빛에 바래 원래의 색을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문득 우리의 기억도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와 본연의 색을 상실한 채 의식 어딘가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보통 그 일 자체를 억압하고 기억하기를 거부합니다. 기억을 거부한 대가는 기회의 소실입니다. 고통을 경감하고 슬픔을 해소할 기회 말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슬픔, 원망과 분노를 표출하고 누군가 혹은 자신에게 심연의 어두움을 토해냅니다.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를 잊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잊어야만 살 수 있을 것처럼, 전력을 다해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잊고 떨쳐내려 할수록 어떤 기억은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현재의 이질적인 요소들로 불완전한 기억의 공백을 메꾸면서 실재와 더 큰 차이를 만듭니다.
기억 역시 우리의 몸이 하는 것이어서, 기억 속의 삶과 몸의 감각이 합쳐지게 되면, 몸은 기억을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기억을 소장하기보다는 박탈당하길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의식에서 기억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집니다.
프로이트(S. Freud)는 현실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기억들이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장소’인 무의식으로 옮겨간다고 했습니다. 라캉(J. Lacan) 역시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아 무의식을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는 어떤 기억이나 표상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억이 무의식으로 옮겨가면 의식에 남는 것은 자기혐오, 자기 비하 같은 부정적인 정서와 현실을 부정하고 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기만적인 상황만 남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막기 위해서는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현재 시점에서 끝없이 과거를 움켜쥐고(파지), 미래를 당겨오면서(예지), 현재의 기억을 새롭게 각색한다고 할지라도 기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이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면서 온 존재를 뒤흔들지라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으로 떠난 이가 우리와 함께했던 존재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충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샅샅이 기억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기억의 무대에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살아 꿈틀거리게 해야 합니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떠난 이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잘 기억해야만 다시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됩니다.
무의식에 기억을 내주지 않고 떠난 이에 대한 기억을 현상(現像)하고 인화(印畵)해야 합니다. 기억을 현상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기억을 인화하는 과정에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나의 아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기억을 인화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담담하게 표현(인화)하는 과정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닌 영원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떠난 이의 죽음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되고 비로소 상실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