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도로를 달리는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전자제품은 삼성이나 LG에서 만든 TV, 냉장고, 세탁기가 대세다. 이뿐만이 아니다. K팝 인기는 놀라워서 BTS와 블랙핑크의 런던 공연 입장권 수만 장은 삽시간에 매진된다. K드라마도 인기가 높고, K화장품 명성도 자자하다. 나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어요?”라고 물으면 “코리아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하면서 은근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면 꼭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북한입니까? 남한입니까?” 나는 당당하게 “남한”이라고 말하면서 생각한다. 과연 북한에서 왔다는 것도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자부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이곳에서 느끼는 자부심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인기 많은 사람이 느끼는 자신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삼성 세탁기는 너무 비싸서 나는 살 수도 없고, K팝의 인기는 실감하지만 내가 즐겨 듣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출세한 식구가 있으면 내가 성공한 것 같은 기쁨과 비슷할 수 있겠다.
한글학교에서 중학생들을 데리고 발표수업을 한 적이 있다. ‘코리안이어서 자랑스러운 점’을 생각해 보고 발표하도록 했다. 은혜가 물었다. “남한이요, 북한이요?” 은혜의 부모님은 북한에서 왔다. “그건 네가 정하렴.”, “그럼 저는 북한으로 할게요.” 다른 아이들이 K팝, K드라마, 삼성 등을 빼놓지 않고 발표할 내용을 메모하는 동안 은혜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북한 사람이기에 자랑스러운 점을 이 아이가 어떻게 말할지 궁금했다. 자기 차례가 되자 은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북한에서 온 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살아남았거든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극복한 그 생존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다음날 은혜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아이가 한 발표를 말해 주었다. “우리 딸이 정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 끝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그래, 자부심은 성공한 결과가 아니라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대견함인지도 모른다. 그걸 이해해야 은혜를, 그 엄마를, 북한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자부심을 존중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자부심은, 풍요와 인기를 넘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대견함이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