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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안로길 여사와 태극기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9-03-11 수정일 2009-03-11 발행일 2009-03-15 제 263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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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조국의 상징·믿음의 표상"
안로길 여사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중심지역인 난강구(南崗區)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만난 안로길(루시아·97) 여사는 자신의 4단서랍장에서 고이고이 싸맨 뭔가를 꺼내 기자에게 내보였다. 태극기였다. 비록 사괘 위치가 틀리고 태극의 모양이 단순화돼 있었지만 분명한 태극기였다. 흰 천에 서툰 바느질 솜씨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한눈에도 오랜 시간과 공이 들어간 것임을 알게 했다. 안 여사는 틈만 나면 지금도 손수 바느질을 해 태극기를 만든다고 했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의 안 여사가 그토록 태극기에 매달리는 데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다. 사상범으로 잡혀 40년 가까이 형무소와 감옥이나 다름없는 노동개조농장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사회주의 치하의 중국 땅에서 적대국의 국기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태극기는 그에게 16살 어린 나이로 떠나온 조국의 상징이었고 갖은 고난 속에서도 지켜온 믿음의 표상이었다.

체포 당시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잡힌 안 여사는 감옥에 있을 때 아무도 몰래 자신의 옷에서 한 올 한 올 색실을 뽑아내 태극기를 만들었다. 발각이라도 되면 더 큰 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속옷 깊숙이 감춰두고 조국 생각이 날 때마다 몰래몰래 펼쳐 보곤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우리나라 경하하세.”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꺼내든 안 여사는 누가 청하지 않았음에도 애국가를 불렀다. “자꾸 눈물이 나.” 영국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르는 애국가, 현재의 애국가와는 조금씩 다른 애잔한 곡조 끝에 눈물을 비쳤다.

한 세대가 넘게 안 여사의 살이나 다름없이 속옷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태극기는 현재 몇몇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옹기동산 청학박물관’에 전해져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안 여사는 지금도 더딘 손길로 틈틈이 흰색 천에 태극의 색을 입힌다. 마치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은 사랑의 흔적을 되새기듯….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