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념, 숱한 고통 견디며 진리와 옳음 따라 살려는 의지
신념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해
참된 신념은 하느님 따라 사는 것
타인 심판·단죄하는 형식과 달라
■ 시간 속의 상념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서 구획된다. 세밑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생은 반복의 여정이다. 연도는 달라지고 몸은 늙어가지만, 열두 달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소멸만이 우리를 이 달력의 순환에서 이탈하게 할 것이다. 벽에 새 달력을 건다. 반복과 순환의 삶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리추얼(ritual·의식)이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화두가 자주 출몰한다. 노년의 시간은 어쩌면 늙음과 죽음이라는 두 숙명에 응대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여정이다. 살짝 슬프지만 견디지 못할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간과 운명을 살아갈 뿐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덧없다는 애상과 정조가 가끔 찾아온다. 하지만 덧없음에 대한 느낌은 외려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에 대한 염려와 걱정도 없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며 운명주의자인 나는 허무라는 정서에 빠져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청춘도 아니고, 중년도 아니고, 장년도 아닌 노년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맥 빠지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생의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데. 노년의 시간 역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그저 제 생의 시간에 충실할 일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생각할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읽고, 산책하고, 공부하고, 탐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가. 신앙은 또 얼마나 큰 은총인가. 이 막막한 세상에서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고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다시, 시 읽기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은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때때로 시가 나에게 철학이고 신학이다. 시인들이 학자와 사상가보다 더 훌륭한 교사이며 예언자다. 시인들이 툭 건네는 말과 노래가 공감의 위로와 기쁨을 준다.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 장이 넘어가고/ 술 한 잔이 넘어갔다.// 목메지 말 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정현종 ‘벌써 삼월이고’)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과 늙음에 대한 그 어떤 철학적, 신학적 성찰보다 이 시가 더 깊은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겨우 쓸 수 있을 것 같아/ 두 마음은 왜 닮은 것인지// 무너진 꽃자리/ 약이 돋는다// 비로소 연한 것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허은실 ‘회복기 1’) 그저 이 구절들을 마음속으로 읊조리기만 해도 내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 있으면 나와보라고” 소리치면서 “그 시를 읽으면 죽어가던 것들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를 쓰고 싶다”(김상미 ‘시인 앨범 7’)라는 시인의 허장성세가 괜히 정겹고 위안이 된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많은 바람에 내 삶을 하나하나 증발시켜요/ 얼마나 편안하고 경이로운지/ 누워서도 앉아서도 다 들려요/ 깊은 바다에 얽힌 전설들/ … /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바닷가에서 살아요/ 매일매일 즐겁게, 내 피와 뼈들이 심해로 하얗게 가라앉는 걸 바라봐요/ 얼마나 아름답고 가혹한지.”(김상미 ‘또다시 바다, 바닷가에서’) 소멸로 향해가는 삶이라는 망망대해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평안함과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생의 역설과 신비를 시인에게 배운다.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손택수 ‘귀의 가난’) 늙어갈수록 마음을 더 다스리고 영혼을 더 수련해서 조금은 더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찼다.”(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누구나 다 늙고 죽어간다. 그래서 공감하고 나누고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늙음과 소멸의 여정 속에서 온전히 자신만이 견디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 신앙의 신념
마음속에 정갈한 신념을 지니고 한 생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신념(이념)은 개별적 인간과 진리의 주체를 연결하는 매개다. 신념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연결된다. 신념은 진리와 옳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신념화는 ‘영혼과 몸 안에 있는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이며, 신념화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임의성과 가변성을 건너갈 수 있다.(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 참조)
신념은 확신이라기보다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다. 참된 신념은 무엇보다 제 생의 운명을 견디게 하고, 숱한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진리와 옮음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동된다. 물론 모든 신념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신념의 이름으로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살거나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를 억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다. 그때 신념은 흉측한 이데올로기가 되며 부정적인 의미의 교조주의자를 낳을 뿐이다.
진정한 신념은 자신에게는 견딤과 의지적 힘으로, 타자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태도로 작용할 것이다. 건강한 신념의 삶은 아마도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김연수 「다시, 2100년의 바르바르에게」) 노력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신념은 다양하다. 실존적 신념, 사회적 신념, 종교적 신념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힘을 가진 것은 종교적 신념일 것이다.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 주인공의 독백처럼, 모든 사회적 이념이 사라져버린 오늘의 세상에서 사람들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은 종교적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적 신념, 신앙적 신념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신념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신앙은 신념으로 표현된다. 신앙의 자리에서 신념이 수행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때때로 율법과 규범으로, 종교적 관습의 준수와 전례적 행위에 참여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된 신념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을 따라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타인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적 신념은 이념과 명제와 규범과 관습으로 우리 안에 자리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성령의 신비로 자리할 것이다. 신앙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