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함께 길을 가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하느님 뜻 따라야 하고
정의와 가난·소외된 이들 지향해야
광야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기 위해 광야 시절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이집트를 탈출한 공동체는 광야를 함께 지나갔다. 시나이 광야는 일찍이 아브라함 등 창세기 선조들이 함께 갔던 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느님은 길을 가던 공동체에게 다시 계약을 선물로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중재자 모세를 통해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다.(신명 4,10) 그런데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셨다’고 표현된 히브리어 /카-할-/( קָהָל )이 훗날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 )라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교회’(ecclesia)라는 말로 전승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만 봐도 하느님께서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일하시는 방식을 선명히 볼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요, 하느님은 길을 가는 공동체에게 많은 은총과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다. 십계명도 길을 가던 백성을 불러 모으셔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공동체요 함께 가는 공동체가 그 본질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도 역시 다양성을 갖추었다. 다양한 남성, 여성, 아이들, 노인은 물론이고 일부 이방인 등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길을 가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다양성을 갖춘 백성이 하느님의 ‘계약 상대자’임이(13항) 분명하다.
광야의 지도력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함께 광야를 지나는 백성의 지도력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끄심은 중재자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전달되고, 백성의 마음은 중재자를 통해 하느님께 닿는다. 그러므로 “그 회중의 한가운데에는 유일한 안내자로서 목자로서 주님께서 계시는데, 그분께서는 모세의 직무를 통하여 현존”하신다.(13항) 이 점이 바로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된 공동체의 지도력을 보여준다. 길을 함께 가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이끄시는 것이다.
물론 중재자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세는 장인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보좌할 사람을 꾸렸다.(탈출 13,18-27) 이밖에도 광야 시대에 이미 모세 곁에는 판관, 원로, 레위 등 다양한 직분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직분들도 역시 중재자를 통해 하느님께 연관되는 것이다. 그들은 “종속적이고 단체적 방식으로 모세에게 연결”된다.(13항)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의 내부는 때로 소란스러웠다. 광야에서는 하느님 백성 내부의 지도력을 두고 신뢰받는 지도자들 간에 이견이 발생하기도 했다.(민수 12장)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의 피붙이기도 했지만 하느님에게서 지도력을 받은 중재자에게 도전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도자 뿐 아니라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코라 등은 일부 백성을 규합하여 모세에게 맞서 일어났고(민수 16,2) 모세와 아론이 백성 위에 군림한다고 비판하였다.(민수 16,3)
이런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그 해결책은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해결되었다. 이런 갈등을 겪었기 때문인지, 모세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스라엘의 4대 권력기관(임금, 판관, 예언자, 사제)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신명 16,18-18,22)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함께 길을 가는 것 자체가 하느님 백성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vivendi et operandi)이다.(6항) 하느님은 광야에서 우리 백성이 과연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셨다. 하느님 백성은 지도자든 일반 백성이든 중재자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집트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백성은 광야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했다. 곧 이집트식으로 생활하고 활동하는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민수 14,22-23; 신명 1,35) 이 점도 시노달리타스 이해에 중요하다.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가 하느님 백성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에 맞는 참된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을 발견한다.
왕국
약속한 땅에 들어가서 이제 유랑은 끝났다. 하지만 백성에겐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온 땅이었지만 필리스티아인 등 새로운 사람들과 경쟁해야 했고, 때로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판관들은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다.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맞아 하느님 백성은 치열한 경쟁의 한 가운데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함께 단결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다.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이 백성은 어엿한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두 인물의 명암은 대비되었다. 사울은 백성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엿한 나라를 세운 공이 크지만, 결정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 한편 다윗은 사울과 비슷하게 전쟁 지도자였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인물이었다. 세속적 성공의 면에서 두 인물은 엇비슷할지 모르지만 성경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두 인물을 통해 함께 길을 가며 애써 이루려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이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언자
예언자의 시대에 하느님 백성에게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어 “역사의 길을 따라 걸으라는 요구를” 일깨우셨다.(14항) 임금도 신하들도 일부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뜻에 멀어져 버렸다. 하느님은 이제 새로운 중재자, 곧 예언자를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의 기능과 사명을 새롭게 가르쳐주셨다.
예언자는 함께 길을 가는 하느님 백성 내부의 의견 교환, 일치,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시사점을 준다. 쳉어(E. Zenger) 신부님이 지적하듯, 구약성경에 책으로 기록을 남긴 예언자는 모두 저항 예언자들이고 이들은 당시 하느님 백성 사회에서 소수였다. 엘리야 예언자는 야훼의 예언자는 자신 뿐인데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된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1열왕 18,22) 하느님 백성의 절대다수가 우상에 빠졌을 때, 하느님은 다수결의 원리가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한 소수의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을 이끄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예언를 통하여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가 무엇보다 정의를 지향해야 하고, 하느님의 정의란 가난하고 다양한 소외자들을 지향함을 강조하셨다. “그 정의는 특히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외국인에 대한 것이며 주님의 자비를 눈에 보이게 증언하는” 것이다.(14항) 이런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예수님에서 절정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