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이가 생긴 걸 알았을 때, 아내는 대뜸 지금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모아 둔 돈이 충분치 않았기에 지금 집에서 잘 키워 보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뿔싸, 아이가 걷기 시작하니 아내의 의견대로 지금 우리 집은 너무도 좁았고 그 때문에 불필요한 싸움을 많이 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돈은 꼭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레이스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주식이 오르면 기뻐하고, 좋은 인프라가 구축된 집을 매수하기 위해 저축을 한다. 열심히 일하며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고 있기 때문에 내 행동에 대해 부끄럼은 없다. 하지만 부를 쌓는 방법을 탐구하면 할수록 예수님과 멀어진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돈 벌 궁리만 하다 보면 세상 모든 일들을 효율성과 숫자로만 바라보게 되고, 마치 돈이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가 예수님 앞에 부끄럽고, 예수님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내가 느끼고 있다.(마태 6, 24)
우리가 재물과 사랑에 빠졌을 때 얻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에 가깝다. 자본은 멈추면 쪼그라들어서, 끊임없이 증식해야 하기 때문에 탐욕과 닮았다. 성경에는 재물이 얼마나 허무하며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낱낱이 적혀있다. 돌아보면 내가 행복했던 순간들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나를 느낄 때였다.
스쿠버다이빙을 처음 했을 때, 작은 섬의 해변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을 때, 피정의 대침묵 등 걱정 없이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때가 즐겁고 행복하다. 물론 내 가정이 생긴 지금은 홀로 즐길 기회가 없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영속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라기보다는 취미나 취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본당 신부님 강론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주제가 나왔는데, 신부님께서는 행복이란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 즉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 응답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노라고, 사람의 행복은 이루고 성취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큰 불행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주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나와 우리 가족의 행복 또한 성령께 응답하고 예수님과 함께해야 주어질 것이다.
삶이 힘들고 괴로워도 언제나 출구는 있었고 훗날 돌이켜보면 잘 마련된 길을 걸었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이 모두가 주님이 인도하신 여정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이 에세이 또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작은 여정이었기에 그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