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시도자가 원망에 찬 눈빛으로 묻습니다.
“단 한 가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세요.”
자살 유가족 역시 한숨을 몰아쉬며 질문합니다.
“이러한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세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절박한 물음 앞에서 저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 질문에 실린 무게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혀버릴 때가 많습니다. 상담을 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저 자신이 모순덩어리, 바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솔직히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현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살아갈 이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저는 애초부터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삶의 가치가 있어서 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무심(無心), 무념(無念)이 원래 우리의 상태인데, 고통에 처한 자신을 더 비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일종의 해법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해법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미망(迷妄)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며, 점점 더 죽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슬픔, 상실, 실패, 소외 등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그저 겪을 수밖에 없고,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자신을 더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중첩된 고통과 상처로 힘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나 ‘한껏 각성한 자기’를 망각하고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경험상 이러한 망각과 완화에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인간적인 유대와 관계’였습니다. 잘난 사람,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과의 관계성이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저 옆에 있어 주고, 그저 같이 걸어주고, 그저 같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야 하는 이유’(엄밀하게는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과 동일)를 찾는 사람이 다시 원래의 무심한 상태로 환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순박한 사람들과 흉허물 없이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를 마구 떠들 수 있는, 가능하면 유치찬란한 인간관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잘 어울려 노는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치한 상호작용이 사람에게 생명력을 줍니다. 그래서 ‘유치’를 뒤집으면 ‘치유’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