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학술 논문
신학을 강의하고 논문을 쓰는 삶을 오랫동안 살았다. 탁월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공부와 학문의 세계를 좋아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신학이 신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신앙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그 학문적 노력은 나름의 유용성을 지닌다. 하지만 하느님에 관한 학문적 접근이 하느님 체험과 신앙의 삶을 앞서는 것은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언제나 두 번째다. 체험과 삶이 항상 먼저다. 참된 사유는 체험과 삶에서 나온다. 하느님에 대한 사유가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을 닮은 삶보다 앞설 수 없다. 신학과 교리는 신앙을 위해 있는 것이지, 신앙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사유는 넓은 맥락에서 인간의 체험과 삶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순수한 사유, 형이상학적 사유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순수한 사유와 허구의 상상력이 갖는 창조적 힘을 우리는 믿는다. 이성적 사유의 초월적 차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체험과 삶에서 유리된 사유는 소통과 전달이라는 맥락에서 힘을 갖지 못한다. 신학은 신앙 체험과 신앙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의 장이 ‘그들만의 리그’로 불리며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전문 영역으로서 학문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문과 삶, 학문과 인격, 학문과 신앙이 늘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물론 참다운 학문은 삶과 인격과 신앙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특히 인간과 삶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학문과 삶의 통합이 더 바람직하다. 신학의 역사를 보면 그러한 통합을 이룬 탁월한 신학자들이 있다. 문제는 오늘의 우리 신학자들에게서 그런 통합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전공한 우리 신학자들은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신앙은 신앙으로 전수되고 교육된다. 신학은 신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신학만으로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려는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보조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역사 속에서 신학은 하느님을 탐구하는 지혜로서, 합리적 사유와 지식으로서, 신앙적 실천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어쩌면 오늘의 신학은 반성과 성찰의 역할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학문의 세계는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작동된다. 과학적 지식과 객관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논문적 글쓰기가 가장 적합한 방식일 수 있다. 학문의 세계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이상 논문에 관한 학문 세계의 규칙과 규범을 존중한다. 하지만 인문학의 영역에서 논문을 통해 참신한 통찰을 배우고 어떤 깨달음을 얻은 기억이 나에겐 거의 없다.
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학문 세계의 방식과 규범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신학적 글쓰기가 일반적으로 논문의 형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논문적 글쓰기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에 더 적합하다. 적어도 신학은 논문의 형식을 넘어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의 글쓰기를 찾아야 한다. 신학이 교회와 신앙인들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형식의 글쓰기를 찾아야 한다.
■ 이야기적 서술
전통적으로 신학의 서술 방식은 당대 학문의 방식을 따랐다. 철학적 서술이 주된 방식이었다. 하느님과 신앙에 대한 철학적 서술의 방식이 신학의 글쓰기 전략이었다. 하지만 신앙적 서술의 핵심은 성경적 진술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다. 성경은 체험과 기억과 신앙의 서술이다. 체험과 기억과 신앙은 이야기적 서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신학의 방법론을 설명할 때 흔히 세 단계를 구분한다. 체험의 단계, 해석학적 단계, 체계화의 단계다. 신학은 신앙 체험에 대한 해석과 체계화를 통해 사목적(실용적) 단계로 이동한다고 흔히 주장된다. 체험 단계에서 설명은 주로 이야기적(설화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학문적 서술은 해석과 체계화라는 사변적 과정을 통과하는 논리적 서술이어야 한다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학자들은 설화적 서술보다 사변적 서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의 구체성보다는 해석에 있어서 ‘사변적 명민함’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신앙 체험의 학문화가 신앙 신비를 더 잘 알게 하는 것일까. 신앙은 지적 성찰을 통해 더 정교해지는가. 체험의 직접성이 사라지고 관념성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 성숙과 발전을 의미할까. 어느 성경학자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여성을 중심으로 애도(lament) 공동체라는 성격이었는데, 점점 체계화 과정 안에서 주석(exegesis) 공동체로 전이되면서 지식과 권력이 체험과 이야기보다 앞서는 경향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신학의 서술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인간은 이야기에 매료되는 본능이 있으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할뿐더러 이야기를 전하고 이야기에 참여하기를 즐긴다.”(양자오 「이야기하는 법」) 학문으로서 신학이 어쩔 수 없이 논리적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좀 더 서사적 언어에 친숙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는 없을까. 신앙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신학은 신앙에 관한 진술이 아닌가?
■ 다정한 서술
논문 글쓰기는 객관성과 논리라는 이름으로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논문을 읽으며 공감과 감동을 얻기가 쉽지 않다. 논문이 가끔 새로운 앎과 통찰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 앎과 통찰이 삶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읽기는 앎의 즐거움에서 삶과 윤리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한다. 논문 읽기는 실천과 수행을 낳지 못한다.
신학이 성경적 서술을 닮을 수는 없을까.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이 묘한 감흥을 준다. “여러분은 성서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 놀라운 이야기꾼이 누구인지 궁금해한 적이 있으십니까? 혼돈이 질서로부터 분리된 태초의 첫날을 기록한 그는 누구였을까요? 우주가 생성되는 일련의 과정을 추적한 인물, 신의 생각을 알고, 그의 의구심을 인지하고, 일말의 떨림도 없이 굳건한 필체로 종이 위에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전례 없는 문장을 적어 놓은 인물. 감히 신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했던 그 서술자는 누구일까요?”(「다정한 서술자」)
신앙은 딱딱하고 고압적인 서술보다 다정한 연민의 서술에서 더 잘 전달되지 않을까. 하느님은 진리와 정의의 하느님이지만, 무엇보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에 대한 진술로서 신학은 과연 어떤 서술의 형태를 지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