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 빠르게 늘어나면 더 많은 동식물 서식지 파괴 오염 늘어나 기후변화 가속화 다양한 결핍과 분쟁 위험 예상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의 2011년 1월호 표지 기사 제목은 ‘70억 인구: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Population 7 billion: How your world will change)였다. 이 기사는 그해 말 인구가 70억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에 대한 응답이었다.
지난해 11월 15일, 지구에 사는 사람 중 80억 명째가 되는 아이가 태어났다. 오직 하느님만이 특별한 아이가 누군지 알 것이지만, 온 세상이 이 탄생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다. 80억은 엄청나게 많은 수다. 사실 우리 누구도 이 숫자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이렇게 많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 중 누군가 쉬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1부터 80억까지 센다고 해도 아마 이번 세기가 끝날 때까지 마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 아이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행복한 삶을 살면서, 알고 그렇게 하든 모르고 그렇게 하든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는 아이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인구가 80억이 되고 수십 년 내에 104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그저 좋은 소식이 될지 궁금하다. 만일 지난해 11월 1일 태어난 아이가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이 아이가 사는 세상은 어떨까? 거의 분명히 쾌적한 삶은 아닐 것이다. 6세기와 14세기의 흑사병 유행과 20세기의 제2차 세계대전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이미 인류가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전 세계적인 위기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아이의 인생은 거대 인구로 촉발되어 악화되는 수많은 위기로 점철될 것이다. 사실 이런 위기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구에 사는 수많은 인간의 존재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에 주는 충격은 너무나 커서 지구과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연대로 부르기도 한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로 ‘인간’을 뜻하는 ‘anthropos’에서 따왔다. 인류세는 1만1650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인간이 농업과 기술, 문명을 퍼뜨리고 발전시킨 홀로세(Holocene, 현세)를 대체하고 있다. 대개 한 시대 혹은 세(世)의 끝은 집단 멸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의 홀로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선택이든 아니든 인류세의 시작은 제6의 집단 멸종을 불러오고 있다. 우리는 이를 목도하는 한편 이 집단 멸종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현재 동식물의 멸종 속도가 평상시 한 종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속도의 1000배에 이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대개 이런 동식물의 멸종은 인구 증가로 인간이 다른 종의 삶의 터전인 서식지를 파괴해 생긴다. 물과 대기의 오염은 이 멸종 속도를 가중시킨다. 무엇보다도 화석이 된 동물과 식물, 바로 석유와 가스, 석탄을 태워 생긴 기후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할수록 더 많은 동식물의 서식지가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피조물인 다른 동식물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에너지 수요의 증가를 말하며, 이는 물과 대기의 오염으로 이어진다. 흔히 말하는 ‘인구공해’(populution)는 기후변화 속도를 빠르게 한다. 또 기후변화는 농업에 영향을 끼치고 해수면 상승을 야기해 향후 인류가 살고 식량을 생산할 공간을 줄어들게 한다. 기후변화를 비롯해 다양한 결핍으로 생기는 난민들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데, 이들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 각 나라들이 한정된 자원을 찾고 비축하며 보호하려는 가운데 군비확장과 분쟁의 위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솔직히 정치적·사회적 정의, 깨끗한 에너지, 여성의 교육과 권한 확대, 음식과 보건, 자원에 대한 공정한 접근권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뉴스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필요한 만큼 이뤄질까? 그렇지 않다. 80억 명째 아이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너무 늦어버렸다. 혹시라도 이러한 변화가 기대치 않게 벌어진다 하더라도, 인구공해를 끝내지 못하고서는 그저 집단 멸종 속도를 줄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망이 세속적으로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측되는 결과가 다르다 할지라도 허무에 맞선 충실함이 하느님 나라 건설에 궁극적으로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계속 따랐을 것이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재난에 맞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신념을 갖게 된다면, ‘지금 여기’를 초월해 하느님의 세상에 미친 우리의 악영향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