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를 잠시 멈추거나, 더디 가게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문제점을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활동을 줄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롭게 우리의 사명을 탐색하는 은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교회에서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관심이 확산한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쇄신 운동이다. 신앙인과 공동체의 현실을 돌아보고 급변하는 세상의 환경에 맞추어 새로운 사명과 그것을 실현할 방식과 수단으로써 교회적 삶을 수행하자는 것이다. 시대마다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이 바뀌는데 교회 역시 이러한 체계를 바탕으로 소통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리와 전통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살아가고 표현하는 양식이 변화함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시노달리타스 교회 만들기’를 위해 필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마음에 느끼는바, 즉 ‘유감’(有感)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관심부족에 유감
2021년 10월부터 2024년 10월까지 실시되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는 본당에서 시작하여 교구, 국가, 대륙 그리고 보편교회로 수렴되는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 주제는 ‘함께 걷는 교회’다. 이미 한국교회도 2022년 교구 단위로 시노드의 과정을 밟아, 그 내용을 종합하여 세계교회와 공유하였다. 각 지역교회의 현실과 어려움을 진단하고, 교회의 사명을 찾는 작업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였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식탁 아래 모두 평등하기에, 서로 경청하고 존중하며, 신앙 감각으로 성령의 목소리를 따라 교회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각자 저마다의 길에서 주님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자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시노달리타스 운동의 동력이 한국교회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재 교회적 위기를 겪고 있는 로마와 서구교회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피부로 느낄 만큼의 큰 위태로움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본당과 현장 사제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번 시노드와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그 이해와 필요성이 상당히 결여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교회와 달리 독일교회의 경우 최근 해마다 20만 명 정도의 신자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 독일가톨릭교회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와 별개로 2019년부터 독일지역 교회 시노드(시노드의 길, Der Synodale Weg)를 열었다. 이 시노드에서는 동성 결합, 사제 독신제, 여성 사제와 같은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사안을 다루면서, 230명으로 구성된 ‘시노드 총회’에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1인 1표를 행사하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해당 교구장 주교들 몫이지만, 독일 주교회의 역시 독일 시노드 결의안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시노달리타스 교회 만들기는 위기 처방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시대의 표현양식과 방법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여전히 ‘안정기 신드롬’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 역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진정성 있게 수행하기는커녕 위기를 막기에 급급한 신세가 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성직주의와 신자들의 수동적 태도에 대한 유감
시노달리타스가 회자되며 한국교회의 문제와 쇄신을 위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성직자들의 권위주의 내지 성직주의이다. 이러한 지적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권에 대한 가치의 증대에 입각한 사회문화의 영향과도 관련된다. 사회의 제도와 체계의 수준에서 사람들의 평등 의식과 개인의 자유와 결정권은 중요시되어 가고 있다. 신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 위치하여 살아가기에, 과거 성직자에게 집중된 교회의 역할과 권위주의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사제들은 더 겸손하게 양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요구받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본디 복음의 정신이기에 사제들은 올바르지 않은 권위주의적 성직주의와 교회 사목의 분권적 역할 나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반대로 한국 신자들의 수동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들 자신이 지나치게 성직자들에게 의존하고, 교회 일에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수행의 부족이 성직주의를 강화한 측면도 있다. 시노달리타스가 함께 가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성직주의와 관련된 부분 역시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시노달리타스의 한국적 토착화에 대한 유감
시노달리타스는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가치가 보편화된 현대사회 안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생활과 영적 쇄신 그리고 교회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규범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성격을 이론, 담론, 운동, 제도쇄신, 문화혁신, 생활과 공동체의 원리 등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지만, 시노달리타스가 바로 지역교회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처한 삶의 자리인 한국교회의 맥락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적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만드는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용어부터가 아직은 생경하고 그 의미가 불친절하다. 중국의 경우 시노달리타스를 ‘공의성’(共議性, Gong Yi Xing) 혹은 ‘동도해행’(同道偕行, Tong Dao Xie Xing) 이라는 말로 번역해 쓰고 있다.
물론 한국적(토착화)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만드는 데는 용어 선정 이상의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어떻게 하면 진정성 있게 수행할까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유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에 영감을 주는 다양한 역사의 내력이 있다. 가령,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시민 연대를 끌어냈던 일, 여성·외국인 노동자·사회적 약자 등 주변부 삶들을 위한 사목적 헌신 등이 그렇다.
또한 정신문화적으로도 종교간 평화와 대화, 한국 사회의 올바른 가치관 함양을 위한 다양한 연구와 교육 계몽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내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있는 한국의 문화와 사회변동을 주시하면서, 우리 교회의 문제와 사명을 모든 성원이 모여 경청과 대화 그리고 식별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시노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명 수행의 한 지체로서, 다른 지역교회의 지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일치 안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