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사도 1,1-11 / 제2독서 에페 1,17-23 / 복음 마태 28,16-20 “함께 있겠다” 제자들에게 약속 후 승천하시고 성령 통해 세상 모두의 내면에 살아 계시며 우리 곁에서 고난 함께하시는 예수님께 찬미를
그 무엇도 주님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제자들은 주님과 또 한 번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지난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마치 부모님 효도 관광 여행 떠나는 분위기입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입니다. 스승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그제야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님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됐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됐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등장하는 두 천사의 질문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이 말이 제겐 이렇게 들리더군요. ‘너는 왜 아직도 왜 뜬구름 속에서 살고 있느냐? 왜 움직이지는 않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느냐?’ 어쩔 수 없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하늘만 쳐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 세상 한복판으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죄와 타락과 고통이 뒤엉킨, 그래서 짜증나고 힘겨운 인간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과거 교회는 보통 도시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곤 했습니다. 세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높은 곳에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까마득한 교회의 첨탑 위로 끌어올리기보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라진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향했던 우리들의 시선을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돌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떠나시지만, 더 가까이 계시는 주님 언제나 지극히 제한적이고, 매사가 찰라 같은 인간 만사이기에, 늘 아쉽고 허전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남기신 유언(遺言)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것인지 모릅니다. 지상 생활을 마치고 떠나시는 분들이 자녀들이나 남은 사람들에게 남기는 유언들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아쉽고 덧없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남기신 유언은 전혀 차원이 다른 말씀입니다.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보십시오! 3년이나 5년 정도, 10년이나 20년간이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 주시겠다는 주님 말씀에 큰 감사의 정이 솟구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힘겨워 눈물 흘릴 때 옆에서 함께 눈물 흘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도 우리와 삶을 공유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매일의 구체적인 우리네 일상사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 동고동락하시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또 한 번의 작별로 인해 슬퍼하는, 아쉬워하는 순간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승천을 통해 당신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신 대사건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더 큰 결속력으로 우리와 결합하시기 위해 협조자 성령을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대신할 협조자, 아니 당신 본인이신 성령을 우리 친구로, 도우미로 관계를 맺어주시고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떠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전보다 더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안으로 들어오셔서 제대로 당신 자리를 잡으십니다.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어 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매일의 십자가 무게가 너무 무거워 벅찰 때면 바로 옆에서 함께 십자가를 짊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마다 우리와 함께 나란히 서서 같이 고난을 겪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고 비틀비틀, 좌충우돌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힘을 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