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사도 2,1-11 / 제2독서 1코린 12,3-7.12-13 / 복음 요한 20,19-23 예수님이 당신의 교회 세우신 목적 성령의 인도로 세상 일깨우기 위함 이웃에 주님의 복 전하는 통로 되어 하느님 나라 확장하는 사명 다하길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이것은 지혜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솔로몬이 깨우친 지식의 한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가엾이 여기시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영을 선물하시며 당신의 생각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 그분과 친밀해져서 밝고 따숩고 신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성령강림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교회에 등을 돌린 분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흩어진 이유와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다시 새기려 합니다. 모든 이를 아끼시는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내 뜻과 내 방식대로 대했던 까닭에 주님의 자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되새기려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하늘 백성이 되게 하라는 명령, 그 영예로운 직무를 묵살한 증거임을 고백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온 세상에 예수님의 아름답고 고귀하며 흠숭 받아 마땅한 삶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을 몸소 살아내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증인이 되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세상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설사 악한 세상의 도발이 극심할지라도 예수님처럼 죽고 또 죽어 복음의 본질은 사랑이며 희생이며 희망임을 굳게 믿으며 또한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직히 살피면 소위 ‘냉담 교우’들은 우리의 모습에 실망한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만났다면 결코 교회를 등지는 일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요. 참으로 마음을 찢고 통회하며 목이 터져라 부르짖어 참회해야 할, 우리의 허물입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삼위 하느님께 찬미를 올립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되겠다고, 아들 예수님 곁에서 함께하며 복음을 실천하겠다고,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탁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고 복된 생각과 다짐을 그저 미사에서 혹은 기도 중에 ‘첨가’하는 조미료처럼 여기는 듯하니, 야단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전혀 새로워지지 못하고 더 성장하지 못하고 늘 그 걸음에 머물러 전전긍긍하며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사제로서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송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좋고 귀하고 감사한 날의 강론에서 이토록 참담한 고백을 늘어놓자니, 스스로 딱합니다. 사실 저는 이 강론을 예사롭게, 적으려 했습니다. 읽기 좋고 듣기 좋은 내용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몇 줄도 적지 못하고서 가슴을 긁는 듯한 … 머리가 아찔한 … 주님의 이르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썩어서 엉망이 된 교회라도 버리지 않는다”라는 음성이 들린 듯도 하고 그저 제 느낌인 것도 같지만 주님의 뜻은 그 순간, 분명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부패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곳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습니다. 바로 내 곁에 교회를 등지는 이웃이 있다는 것, 자녀들이 교회는 재미가 없다며 소홀히 여기는 것, 또한 그 사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며 세태를 탓하고 요즘 아이들이라며 관망하는 것. 나아가 이제껏 한 번도 복음을 전하여 누군가를 감동하게 한 적이 없다면 참으로 통회해야 할 직무유기임을 선명히 느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진정 예수님처럼 복음을 말하고 실천하며 다가갈 때,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을런지요.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아져서 섬기는 모습을 지닐 때, 어느 누가 힐책하며 등을 돌릴런지요. 이제는 부디 교회는 냉랭해서 어색하다는 말을 당연히 여기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통에 외로웠다는 새 신자의 고백이 사라져야겠습니다. 성인들이 성인품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만난 어느 누구이든 귀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여 대접했던, 그 아름다운 관계에 감동하고 감탄한 이웃의 증언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깊이 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전과 율법과 유다교를 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것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진리에 목마른 이웃입니다. 그들 안에 간직된 진리의 보물을 찾도록 돕는 일이 선교입니다. 그들을 회심시켜야 하는 죄인으로 인식하는 못된 심사를 버립시다. 그들은 잠재적인 회심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이미 사랑받고 있는 귀한 존재임을 명심합시다. 그들 안에 있는 영적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며 이웃 사랑이며 변화된 성령인의 모습임을 명심하여 이웃에게 주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 봅시다. 이 복된 주간, 성령님께 험하고 높은 믿음의 여정을 힘껏 싸우며 헤쳐 나가는 힘을 청합니다. 진심으로 이 땅에서 하느님께 사랑받음에 기뻐하는 성령인으로 뛰어오르시길, 원합니다. 참으로 교회를 쇄신시키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 시키는 신바람 나는 하늘의 사명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