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궁핍했던 조선인들 살림과 교육 돕고 교회 토대 일궈
주민들과 나눔의 삶 살아가고
기도와 애덕 실천으로 이끌어
힘든 상황에도 성당 건축 돕고
성경으로 힘 얻도록 번역 힘써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걷고 걷다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최양업 신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 1886년 6월 4일, 한불조약이 체결됐고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모진 박해가 끝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을 거라 짐작했던 1800년대 후반. 하지만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신자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윽고 일본이 침략하면서 식민통치의 칼날이 교회까지 위협을 가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최양업 신부 이후의 사제들은 이 시기, 모진 고난을 견디며 신앙을 지키고자 애썼다. 사제 성화의 날(6월 16일)을 맞아 최양업 신부가 남긴 거룩한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던 그 이후 사제들의 흔적을 소개한다.
■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 고난
1873년 병인박해를 일으킨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1886년 6월 4일 한불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된 교회는 지하교회로부터 자유교회로 발전하게 됐다.
박해기간 중 산중에 은거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천주교 신자들은 점차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신자들은 집단으로 이주해 토기굴을 짓고 교우촌을 형성, 옹기를 만들며 생활했다. 오랫동안 산중 생활을 하다 나온 이들의 생활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조선에서는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곤궁을 면하기 어려웠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선교의 자유를 맞은 한국교회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애썼다.
최양업 신부가 세상을 떠난 뒤 조선인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신자들을 위해 사제 양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신학생들을 선발해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유학에서 돌아온 신학생들은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최양업 신부 이후 처음 사제품을 받은 사제는 강도영(마르코)·정규하(아우구스티노)·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다.
세 명의 사제는 1895년 12월 21일 부제품을 받았고, 이듬해 4월 26일 서울 약현 성요셉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1897년 12월 18일 이내수(아우구스티노)·한기근(바오로)·김성학(알렉스) 신부가, 1899년 3월 18일 김원영(아우구스티노)·홍병철(루카)·이종국(바오로)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다.
1800년대 말에 서품을 받은 사제들은 무법천지였던 구한말의 시대상, 일본의 침략으로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리며 신자들의 삶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0년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자유를 찾을 수 없었고, 교회까지 위협이 불어닥쳤다.
1915년 8월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할 수 없도록 했다. 본당 신설 역시 사전에 총독부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일본군이 성당 건물을 군대 숙영지로 사용할 것을 요구해 사제와 충돌한 사건도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 수 연평균 증가율은 2.10%로서,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비해 현격하게 둔화됐다.
조선조의 몰락과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하의 혼란 속에서 사제들은 신앙을 지켜내고 본당 공동체의 기초를 닦는 도전에 직면했다.
■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걷다
장정의 하루 품삯이 좁쌀 한두 되였던 구한말. 어려운 경제 사정에 신자들의 생활도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다.
1906년 5월 20일 옥천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홍병철 신부는 자신의 생활을 극도로 절약해 주민들과 함께 가난을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실제로 그는 성당 주변에 호박을 심어 매일 호박죽만 먹었고 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손님이 올 때는 보리방아를 직접 찧어 대접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홍 신부는 1만여 평의 전답을 구입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신자들에게 위안이 되고자 어려운 여건이지만 성당을 짓기로 한 홍 신부는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을 줄이고 손수 목재를 다듬고 흙일을 하며 1909년 봄, 72㎡ 규모의 아담한 성당을 완성했다. 어느 정도 본당의 기반을 닦아놓은 홍 신부는 1913년 부활 판공을 위해 북부 지역(청주, 청원, 괴산, 청천, 보은군 일원) 공소를 순회하는 도중 열병으로 1913년 3월 6일 갑자기 선종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강도영 신부도 성당 옆에 해성학원을 지어 교리교육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농법 개량을 위해 힘썼을 뿐 아니라 1923년 이후에는 신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담배 농사 대신 양잠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가난의 근본을 해결하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한 것이다.
■ 신자들 삶과 신앙 지키다
정규하 신부는 한국인 신부로서 처음으로 강원도 최초 본당인 풍수원에 파견됐다. 1896년 부임한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성당 건축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접 산에서 나무를 베고, 신자들과 벽돌을 굽고 나르며 1910년 2월 완공한 풍수원성당은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서 근대 건축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심단체 설립에도 힘썼다. 기도와 교리공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에 힘쓰는 성부안나회는 신자들의 기도와 애덕실천을 위해 만든 것이다. 또한 1920년 풍수원성체현양대회를 시작, 신자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교회 일치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일곱 번째 서품자인 한기근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로서 신자들을 위해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그가 실천한 것은 성경 번역이다. 당시 제대로 된 성경 번역이나 간행이 이뤄지지 않았던 한국교회 상황에서 한 신부는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성경을 번역했다.
또한 그는 1925년 7월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첫 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작은 나라의 교회지만 보편교회 안에서 한국교회가 잊히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또한 그가 한국어로 쓴 「로마 여행일기」는 한국의 가톨릭 성직자가 기록한 첫 그리스도교 성지순례기다. 한국인 신자들이 견문을 넓히면서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기를 바라며 여행기를 적어 내려간 한 신부는 여행기의 마지막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7개월간 여행 중 보고 들은 것 중에 무엇이 제일 좋고 부럽더냐 하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성당이 많은 것이 제일 좋고 부럽다 하노라. … 우리 조선에도 교우가 많고 열심하여 각처에 성당이 연면하기를 기구하고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