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연대 중심에 둔 오래된 합의 전통 이어받아
초기 교회부터 이어져온 교회회의
지역교회 고유한 문제 관구서 논의
오늘날 국가별 주교회의 원형
※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 교부들이 물려준 시노달리타스 전통
교회 안에서 열리는 공의회나 교회회의의 원형은 사도행전이 전하는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다. 우리 교회는 그 탄생 때부터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으로 살았다. 초기 교회 때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금했지만, 박해가 잦아들 때면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회의를 이어갔다.
2세기부터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교부 시대의 교회회의는 근본적으로 주교회의였다. 관구별로 주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거나, 여러 관구에서 온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방식이었다. 이미 3세기에 아프리카에서는 이러한 교회회의가 자리 잡았고, 지역 교회 시노드나 관구 교회회의 이외에도 아프리카의 모든 주교 또는 그 대리인이 참석하는 교회회의가 거의 해마다 열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프리카 전체 교회회의’(concilium plenarium Africae)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 주교들의 총회는 카르타고의 주교가 주재했고, 아프리카를 넘어 라틴 서방 전역에서 커다란 권위를 누렸다. 지역 교회에서 벌어지는 고유하고 특수한 문제들을 관구와 지역에서 논의하고 보편 교회와 공유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국가별 주교회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 주교 시노드의 틀을 세운 키프리아누스
서방의 교회회의에 관한 가장 이른 정보는 대부분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 †258)가 제공한다. 북아프리카 수도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10년의 재임 기간(248-258)에 일곱 번이나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데키우스 황제의 지독한 박해가 끝난 뒤 열린 첫 네 차례 교회회의(251-254)에서는 참회한 배교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으며, 로마의 주교 코르넬리우스(고르넬리오 †253)와 연대하여 교회 일치를 지켜냈다.
나머지 세 차례 교회회의(255-256)에서는 이른바 재세례 논쟁을 다루었다. 북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과 열교 세례의 무효성을 재확인하고, 그들이 교회로 돌아올 경우 다시 세례를 베풀기로 거듭 결의했다. 재세례에 반대하는 로마의 주교 스테파누스(†257)와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거듭되는 박해 상황에도 고대 교회회의의 훌륭한 전통을 세웠고, 258년 순교로 삶을 마감했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395년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지역을 초월하여 오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꺼이 가서 큰 정성과 열정과 권위로 부지런히 구원의 말씀을 선포했고, 이단과 열교를 바로잡기 위해 집필에도 열성을 쏟았으며, 자신이 깨달은 신앙 진리를 동료 주교들과 나누고 전체 교회와 공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9,1-3).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수많은 서간집과 설교집, 저술과 토론집 등은 그가 꿈꾸고 실천한 시노달리타스의 아름다운 증거다. 411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도나투스 논쟁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분열은 교회에 쓰라린 상처를 남겼지만, 밀과 가라지, 선인과 악인이 ‘뒤섞인 교회’(ecclesia permixta)의 본성과 오직 ‘하느님의 것’(res Dei)인 성사의 본질을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연이은 펠라기우스 논쟁은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치열한 논의를 통해 인간의 허약함과 하느님의 자비를 겸허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교회론과 성사론, 은총론과 구원론의 핵심 원리는 교황청 신학 담당 부서의 책상머리에서 하달된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들의 사목적 논의와 신학적 성찰에서 샘솟은 것이다. 사도 전승 안에서 숙의하며 깨우친 소중한 신앙 진리를 온 세상 보편 교회와 지혜롭게 공유하는 과정에 마침내 ‘거룩한 전통’[聖傳]이라 불리는 교부들의 신학이 탄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을 떠나던 430년, 반달족은 아프리카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히포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그는 전쟁과 박해 중에 사목자가 지켜야 할 자리에 관하여 유언과 같은 긴 편지를 동료 주교들에게 썼다. 참된 목자는 언제나 하느님 백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는 마지막 당부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종한 직후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문화유산은 파괴되고 빛나는 교회회의 전통도 형편없이 허물어졌지만, 교부들이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전통은 아직도 소중한 원체험으로 남아 있다.
■ 이 시대의 교부 프란치스코 교황의 꿈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세계 주교 시노드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마무리하면서 제도로 만들긴 했지만, 그 “정신은 매우 오랫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며, “교회의 매우 풍요롭고 오래된 합의 전통의 이상을 이어받은” 것임을 강조한다.(「주교들의 친교」 1항) 한마디로, 주교 시노드는 교부들의 교회회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말이다.
교부들이 물려준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주교들의 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연대라고 평가하고 싶다. 최초의 교부 문헌인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비롯한 다양한 교부 문헌에는 교구를 초월한 교회 일치와 친교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가득하다. 가난한 교회를 위해 자선기금을 모아 보내고, 교구 울타리와 지역 장벽을 허물어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고 돌보던 교부 시대의 아름다운 실천도 주교들의 깊은 동지 의식에서 꽃핀 것이다. 주교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고 심지어 로마의 주교와 긴장 관계도 없지 않았으나, 주교들의 단체성과 공동합의정신에 바탕을 둔 끈기 있는 대화와 협력은 언제나 교회 일치와 보편성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원동력이었고, 바로 그것이 시노드와 공의회의 거룩한 전통이 되었다.
이미 교부들은 세계적으로 생각하면서 지역적으로 실천했다. 지역 교회에서 벌어지는 긴급하고 절박한 사목적 문제들에 대한 최종 결정이나 승인을 로마의 교도권에만 기약 없이 맡겨둔 채 개별 교구 행정에만 몰입한 교부들은 상상할 수 없다. 오히려 425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교회회의에서는 지역 교회 문제를 로마 교회에 시시콜콜 상소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교부 전통에 굳건히 서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황이 지역 주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복음의 기쁨」 16항)는 신념을 재임 초기부터 분명히 제시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독려하고 있다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차원에서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아래로부터 경청하고 민중과 중생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것인지를 담대하게 논의하고 실천하는 일은 시노달리타스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도전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