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너른 길을 걷다보면 스치거나 깊어지는 인연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안전한 운명공동체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홀로 세상에 선다는 것은 실상 수많은 인연과 접속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천명을 훌쩍 넘겨 내 지난 삶을 돌아보는 날들이 늘어가는 요즘 들어 새삼 그 인연들 하나하나가 봄망울 틔우듯 떠오르기도 합니다.
10여년 전 가톨릭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캄보디아 공동체인 JSC(Jesuit Service Cambodia)에서 2년 동안 자원활동가로 머물던 때가 특히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곳에서 지뢰피해장애인, AIDS 환자, 도시빈민촌들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야말로 내게 생명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 소중한 인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단하고 불우한 일상만을 알고 찾아간 나는 그들과의 인연을 통해 그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작아’ 보일 뿐 결코 작지 ‘않은’ 이들의 삶의 풍경들이 나를 깨우치게 한 것입니다. 캄보디아뿐만이 아닙니다. 길게 머물거나 짧게 지나간 곳 어디에서든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 그들 모두를 포개어 가슴에 담아두던 시간들입니다.
명색이 사진가로 그 세월을 살아오다보니 종종 이런 얘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사진이 참 따뜻하네요. 가슴이 따뜻한 분인가 봅니다”라고 말이지요. 이렇게 과한 칭찬이나 관심을 받을 때면 손사레를 치면서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제가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따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 다소 허울 섞인 겸손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내가 만나고 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검은 피부색을 지녔거나 가난하기도 하고 장애와 같은 ‘경계와 구분’의 관념으로 인식되어 있는 이들인 이유도 물론 있습니다. 그들에게 따사로운 일상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그들의 보편적이면서도 존중할 만한 삶의 형태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사레를 치는 이유는 외형에서 보이는 것 너머 존재 자체로서 귀하기 그지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고단한 삶의 형태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존엄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훼손케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하고픈 이야기로 돌아가, 그 스치듯 접하는 인연들이 귀하게 내 가슴에 남는 각별한 이유 하나는 아무런 조건없이 내가 받은 눈빛 때문입니다. 달리 더 할 것 없이 배시시 짓는 고운 미소 담긴 눈빛이면 충분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니 참으로 고맙기만 했습니다. 결고운 손길에 실린 울림 같은 감흥이 내 안에 스며든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품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나를 품어 받아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연들 앞에 설 때가 되면 스스로 한없이 몸을 낮추게 됩니다. 내가 오늘 숨을 내쉬며 기대 가득한 하루를 맞이 하듯이 누구에게나 있는 그 귀한 오늘 하루를 깊이 눈여겨 보게 됩니다. 아마도 그 길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 여긴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디를 가든 만남이라는 인연을 맺는 이들의 삶 앞에서 그들이 내는 숨소리와 나직한 울림들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소소하지만 가슴이 뭉클하게 달아오르는 벅찬 감동의 기억들입니다. 늘 그래왔지만 그 귀한 인연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