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한 사제와 화가의 만남 / 정미연

정미연 아기예수의데레사(화가)
입력일 2023-08-14 수정일 2023-08-14 발행일 2023-08-20 제 335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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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치 앞도 주님의 계획을 알 수 없다. 7년 전 어느날 기도 생활에 열심인 언니 성화에 못 이겨 여산성지를 찾았다. 손을 봐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성지에서 열성적으로 일하고 계신 젊은 신부를 만났다. 성모 신심이 뜨거운 분임을 단번에 느꼈다. 신부님께서 칠고의 성모님 제작을 의뢰하신다. 순간 유럽 성화나 성물에서 7개의 칼에 찔린 성모님이 떠올랐다. 순교자의 성지로 영성이 깊게 배어 있는 성당에서 성모님께 간청한다. 이곳 성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도와 달라고 기도드린다. 오랜 묵상 끝에 예수님의 가시관이 성모님 가슴에 휙 감기는 형상이 위로부터 전해온다. 역시 여산성지는 순교자의 성지임이 틀림없다. ‘성모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로 고통이 승화되는 아름다운 성상을 만들어 보자!’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가시관의 일곱 상처와 모던한 한복선, 고통으로 일그러진 성모님 자태에 아름다운 곡선을 넣는다. 단숨에 칠고의 성모님이 완성됐다. 바로 사진을 찍어 신부님께 전송한다. 신부님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성상이라며 기뻐하셨다. 며칠 후 이 성모님을 12처에 넣어 십자가의 길을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또 예수님께서 넘어지시는 3, 7, 9처의 장면에 순교의 상징으로 물과 불, 바람을 표현해 달라고 요청한다. 굉장히 어려운 주제를 껴안고 끙끙 앓고 있는 머리에서 원방각의 도형이 떠오른다. 답을 찾았다.

십자가의 길을 그림으로, 테라코타로, 판화로 여러 차례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처음 하는 작업이다. 그리스도께서 넘어지는 모습이 점점 고통스러워질 때 물로 당하시는 고문(배다리 수장)과 인두질 당하시는 불 고문(숲정이의 참수형), 숨이 막히시는 바람의 고문(백지사터의 질식사 고문)을 네모, 세모, 구의 도형 안에 형상화한다. 피에타의 장면에서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기하는 상징을 표현했다.

신부님이 영적 주제를 숙제처럼 던져주면 나는 작품화하는데, 색다르게 풀어지는 그 과정들이 흥미롭다. 순수하고 예민한 영성의 사제와 작가의 열정이 만나 이채로운 작품들이 탄생됐다.

묵주기도 강의로 전국을 오가며 성모신심을 펼치는 젊은 사제 박상운 토마스 신부님. 로마에서 교회법을 전공하고, 시도 쓰고,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하는 다재다능한 신부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간다. 이제는 cpbc에서 하시는 묵주기도 강의로 유명 인사가 되셨지만, 그 당시 전국을 순회하며 성모님 은총을 전하는 젊은 사제의 열성에 나도 한 몫을 거들고 싶다.

여산 무진박해 순교 1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오래된 성상에 새 옷을 입혀 드리고, 실내의 14처를 그려 드리고, 제대를 꾸미고,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여산성지를 바라보며 신이 났다. 빠듯한 형편으로 성지를 꾸미는 신부님께 한마음으로 합심한 신자들의 뜨거운 기도, 가난한 순교자 후손의 십자가 봉헌 이야기는 가슴이 뭉클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하늘의 문’ 선포식과 십자가의 길 14처 축복식. 박해를 이기신 순교자들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어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셨다. 기쁘다. 예술적 심미안과 영성을 고루 갖춘 사제와 함께한 시간 속에 성모님께서 앞장서셨고, 순교자들과 예수님의 보살핌이 있었다.

“마티스의 작품으로 만든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처럼 우리는 왜 그런 발상을 못할까요?” “작가님, 제가 성당을 짓게 되면 그런 멋진 일을 해봐요.”

지나가듯 했던 말이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주님께서 예비하신 전주효자4동 첫 순교자 기념 성당에서 말이다.

정미연 아기예수의데레사(화가)